믿음에 관한 소고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 11:8).
믿음은 자라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겨자씨만하게 주어집니다.
한 번에 겨자 나무와 같이 커다란 믿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처음부터 큰 믿음이 주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믿음은 이성과 양심의 동의에 의해서 생성됩니다.
거듭남에 대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거듭남에 대한 믿음은 어떻게 생기는 것입니까?
현 상황에 대한 부정에서 시작됩니다.
더 나은 세계가 있다는 긍정에서 시작합니다.
이것을 이성과 양심이 인정함으로 인하여 거듭남의 믿음이 시작됩니다.
아브람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단지, 현 상황보다 더 나은 곳으로 인도하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고향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작습니다.
그러나 성장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이지 모르겠다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으로 더 큰 믿음을 소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한번에 완전히 변화시켜 줄 믿음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안 생기니 답답해합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기도를 시작합니다.
어느 정도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늘 제자리입니다.
기도를 하기 위해 눈을 감으면, 처음에는 잘 되다가도, 기도의 목적을 잊어버립니다.
낙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자신부터 믿음을 안 주시는 하나님에 걸쳐 원망하는 마음이 싹틉니다.
믿음은 자신을 한 번에 완전히 변화시켜 줄 정도로 임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이 상황보다 더 나은 상황에 대한 바람으로 시작됩니다.
그 최종 목표는 거듭남입니다.
그것 외에, 아무 것도 모릅니다.
즉, 현 상황과 더 나은 상황이라는 정보밖에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 두개를 가지고 믿음은 시작됩니다.
현 상황과 거듭남 사이의 중간 단계의 정보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첫길은 막막합니다.
그러나, 현 상황이 싫다는 것은 강하게 긍정을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이로 인하여 거듭나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갔습니다.
좀 더 나은 곳이 있다는 믿음 외에, 그 중간에서 만날 것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갔습니다.
그 중간길을 통과하면서 믿음은 자라는 것입니다.
더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거듭남을 방해하는 요소 중의 하나는
그 중간단계를 처음부터 알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입니다.
그것은 알 수가 없는데도,
그것을 아는 것이 믿음이라고 착각하여,
계속 거듭남 길에 들어서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들어섰다고 해도, 어느 정도 가다가 낙망하거나 돌아서는 사람이 많습니다.
갈 길을 확실히 보여 주기 전에는 못가겠다는 마음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결국, 두려워서 그런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믿음은 중간의 과정이 한꺼번에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시작과 끝만이 정보로 주어집니다.
그 시작과 끝만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게 나아갔을 때, 중간단계를 거치는 동안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가다 보면, 믿음이 점점 자랍니다.
왜냐하면, 그때마다 음성을 주시기 때문에,
그 음성을 믿고 나아가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구체화 되는 것입니다.
거듭남의 기도를 합니다.
좀 더 나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그 나은 세계를 가기 위해서는 회개를 해야함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회개를 합니다.
처음에는 두루뭉술하게 합니다.
그러나, 회개를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는 것임을 압니다.
그래서 지난 날들을 돌아보며 구체적으로 합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배상의 문제, 사과하는 문제 등을 만납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그것을 해결합니다.
사단은 계속 참소하면서, 자신감을 떨어뜨립니다. 그러나 이기고 나아갑니다.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도 필요합니다.
고통스럽지만 이기고 나아갑니다.
그렇지만, 거듭남은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칩니다. 낙망의 마음이 생깁니다.
실재로 이 단계에서 많은 사람이 기도를 포기합니다.
나는 할 만큼 했는데, 안 오시는 주님을 생각하니 원망하는 마음도 생깁니다.
그러나, 계속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세미한 음성을 듣게 됩니다.
"네 자아를 죽이라!"
이것이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인식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자에게 그 음성이 들릴 때가 있습니다.
결국, 여러 시행착오를 겪다가 그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아란, 자기 힘으로 하려는 모든 것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돌아보면, 회개도 내 힘으로 하려고 한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내 힘으로 하려고 했으니, 낙망했던 것입니다.
기도도 자기 힘으로 한 줄 압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기도도 하나님의 힘으로 하게 된 것을 깨닫습니다.
교회도 자기 힘으로 나온 줄 압니다.
그러나 교회에 오는 것도 하나님의 힘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나는 몸이 약해서 기도 잘 못해...이것도 자아입니다.
몸이 약해서 기도 잘 못해라고 변명하는 것은 자기 힘으로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기도를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바빠서, 머리가 안 좋아서, 가정이 불행해서, 회사가 바빠서, 친구 때문에... 기도를 못합니다. 이것도 모두 자아입니다. 자기 힘으로 해보려는 모든 것은 자아입니다.
심지어, 나만 천국가면 뭐해...라는 이타적인 동기의 핑계도 자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인간이 알면 얼마나 안다고, 월권을 하려 하는 것입니까.
자아를 죽이라는 음성은, 아무나 듣지 못합니다.
그 세미한 음성을 듣기 까지, 저는 4년 동안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그 음성을 듣고, 순종했을 때, 거듭나게 됩니다.
그리고 되돌아보십시오. 믿음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현 상황이 마음에 안 들었는데,
그런데 더 좋은 상황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믿음이,
그 깨달음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고,
회개하게 해주신 분이 하나님이고,
구체적으로 배상하게 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고,
기도하고 찬송하게 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고,
자아를 죽이게 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고,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믿음이 자란 것입니다.
다시, 아브라함을 봅니다.
그가 이삭을 바칠 때, 그는 하나님의 뜻을 옳다라는 그 한 정보,
그 정보에 대한 믿음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공포였습니다.
그렇지만, 갔습니다.
그 중간단계로 나아갔습니다.
결국 절대 절명의 순간까지 나아가 이삭을 잡기 위해 칼을 뽑아 들었습니다.
공포가 극대화 되었습니다.
그러나, 순종했습니다.
자아가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더 좋은 것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 되신 분입니다.
믿음은 중간 단계를 알지 못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1학년 때까지, 공부를 못했습니다.
해본적도 없었습니다.
학교 생활은 행복했습니다.
학교는 저에게 노는 곳이었으니까요.
그러다가, 저처럼 중하위권을 맴도는 친구가,
선생님의 격려로 변화되어.,
성적이 급상승하는 것을 보고,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2 때 처음으로
나도 공부를 해 봐야겠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나는 공부를 잘 못하는 현 상황이 싫었습니다.
공부를 잘 하는 상황이 더 멋져 보였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잘 하고 싶다라는 꿈만 가진 채, 공부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공부를 잘 하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대가는 아무것도 모르고 나아갔습니다.
공부를 하려고 책을 펴니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습니다.
영어참고서를 보니. '동사원형'이라는 용어가 나왔습니다.
나는 이 말을 몰라, 처음 난관에 부딪쳤습니다.
그날 밤에 아무리 연구를 해도 알 수 없어서.
다음 날, 짝꿍에게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비웃었습니다.
이것을 중학교 1학년 때 배운 것인데. 모른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 수모를 무릎 쓰고, 졸라서,
동사원형이 무엇인지 알아냈습니다.
그때의 희열이란, 참 컸습니다.
그렇게 영어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수학공부를 했습니다.
수학공부도, 암기과목처럼 했습니다.
계속 책에다 연필로 줄치면서, 외웠습니다.
어느 날 그렇게 한 시간 반 동안, 수학참고서에 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옆집 형이 왔습니다.
그래서 "나, 1시간 30분 동안 수학 공부했다"고 자랑했습니다.
형이 공부한 것 좀 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보여 주었더니, 이게 뭐냐고 했습니다.
수학 공부 한 거라고 했습니다.
수학을 누가 이렇게 공부하냐고 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부터, 중 1때 까지 공부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왔기 때문에.
수학공부도 어떻게 하는 줄 모르고 했던 것입니다.
그 형은 친절하게도, 수학공부는 문제를 푸는 것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문제를 풀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어렵던지요. 기초가 하나도 없으니...
다행이 옆집 형이 공부를 잘해서, 수학 문제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나, 대가가 따랐습니다.
문제를 풀어주면 한 문제당 100원인가를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ㅎㅎ
저의 질문행렬은 학교에서도 쉬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물어댔습니다.
애들은 처음에는 귀찮아하다가 하도, 조르니 알려 주었습니다.
새벽 2~3시까지는 기본적으로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보니, 43등에서 17등으로 뛰어 올랐습니다.
17등에서 13등. 13등에서 8등, 4등까지 오르더군요.
그 과정에서, 여러 번 코피를 쏟았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너무 재미있고, 성취감이 대단했습니다.
공부라는 것이 재미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비록, 피곤하고, 지치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사실, 공부라는 것이 안 할 때는 모르지만,
막상 시작하고보니 할 것이 많았습니다.
공부라는 것은 하면 할수록 많아지더군요.
처음에는 그것이 벅찼지만, 죽어라 하면, 따라가더군요.
고등학교에 오르면서 그런 열정이 사라졌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 때의 경험은 참 귀중하다고 생각됩니다.
거듭남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목표는 이 상황보다 더 나은 상황을 찾고자 하는 열망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신앙에 대한 기초가 없으니. 거듭남의 길을 가면 갈수록
할 일들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그렇게 부딪치면서, 믿음은 자라는 것입니다.
결국, 모르는 게 있으면, 질문도 하게 되고,
남들을 싫어하는 것 같은 데도 귀찮게하고,
회개하려고 발버둥도 칩니다.
그렇게 해서, 자아를 죽이고 거듭나게 됩니다.
물론 믿음은, 한 번에 주어지지 지기도 하지만
대체로 믿음은 자라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믿음이 없어서, 거듭남에 대해 알 수 없다고 판단하지 마십시오.
이성과 양심이 있으면, 현 상황보다 더 나은 상황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믿음이 발생하여, 거듭남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 11:8).
믿음(신앙)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 글과 연계해서 읽어 볼만한 설교가 있다. 그것은 찰스피니의 ‘마음의 신앙’(<승리의 원리>, 크리스챤다이제스트사)이다. 기회가 되면 찰스 피니 코너에 이 설교를 올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