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YH팡세

코이노니아

천국 도서관장 2009. 8. 4. 11:12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을 사도의 축도라고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 구절에는 성령의 ‘교통’하심에 관한 말씀이 나온다. 교통을 원어성경에서는 ‘코이노니아’라고 나온다. 코이노니아는 ‘교제’라는 의미로 많이 쓰인다. 즉, 성령의 교통은 성령과의 교제를 뜻한다. 우리가 거듭나면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 내주하신다. 이 성령님은 한 하나님으로 거듭난 성도에 내주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시고 성도의 교제를 이끄신다.

나는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1년 전에 헬라어 공부를 하면서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문장이 떠올랐다.  


의인(οί δίκαιοι;호이 디카이오이)은 이 세상에 있으나, 세상(사람들)과 교제(κοινωνίαν;코이노니안) 하지 않는다. 


헬라어를 공부하면서 이 문장을 공부할 때 가장 즐거웠다. ‘의인’은 의롭게 되어 거듭난 자이다. 이 의인은 세상에 속해 있으나 세상과는 교제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가 없다. ‘코이노니아(교제)’는 ‘좋은 것을 함께 나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성도(의인)들은 교제를 할 때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를 가지고 한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과는 성도들이 좋아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함께 있어도(살아도) 교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께서 <참된 미덕의 본질>에서 말씀하신 대로 세상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사랑을 줄 수 있으나, 성령의 교통하심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서로 보고 느끼며 존경하며 사랑하는, 성도들의 만족적 사랑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성도들이 모인 가견적인(visible) 모습의 교회에 관해서는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모습이 좀더 구체적이고 선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우리) 교회의 궁극적인 모습,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믿음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교회의 모습은 사실 우리 앞서 청교도들이 꿈꾸었던 교회의 모습이기도 했다. 이에 관한 사실은 <거룩한 구원>에 잘 나와 있다.


청교도들에게는 공통된 두 가지 신학적 특징이 있었다. 첫째, 그들은 모두 ‘거듭남에 있어서 철저한 성령의 사역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중략...


둘째, 가시적 성도의 모임으로서의 교회관이다. 로이드 존스에 의하면, 청교도는 일차적으로 ‘순전한 교회’, ‘진실로 개혁된 교회’에 관심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청교도주의의 국면들을 아무리 존경한다 할지라도 “그의 첫 번째 관심이 순전한 교회, 성도들의 모임으로써의 교회에 관심이 없다면 자신을 청교도라고 부를 자격이 없다.”라고 로이드 존스는 지적했다.


<거룩한 구원>, 노병기, 예영커뮤니케이션, p. 584.


이 마지막 시대에 그 어디에서도 알지도 못하고 그래서 시도하지도 못하고 있는 ‘성령이 교통하심이 있는 교회’가 하루 빨리 세워지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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