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약 3:17).
관용을 헬라에 성경에서는 ‘έπιεικήꐠ’(에피에이케스)라고 한다. ‘순한’, ‘온화한’, ‘친절한’, ‘너그러운’이라는 의미이다. NIV에서는 ‘considerate' 킹제임스에서는 ‘gentle’로 나와 있다. NIV에서 관용을 ‘considerate’라고 해석한 것이 나에게 크게 다가왔다. ‘considerate’는 ‘consider’에서 나온 형용사이다. 왜 ‘관용’을 ‘considerate’라고 했을까? 이 단어는 '동정심이 많은', '사려깊은'이라는 뜻으로 ‘consider’의 숙고하다. -두루 생각하다’라는 의미에서 파생되었다. 관용을 considerate'라고 한 것은 진실로 관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심사숙고헤애한다는 의미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로부터 난 지혜로서의 관용은 맹목적으로 순하거나, 온화한 것이 아니라, 깊은 숙고와 이해심에서 나온 덕목이기 때문에, ‘considerate 표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경험상 자칫 아무 생각 없이 덮어놓고 온화하고 순한 의미에서 관용하려고 하면 진정한 관용의 정신이 발휘되지 않았지만 깊이 숙고한 후에는 어김없이 참다운 관용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의 숙고의 근거는 인간의 이성의 차원은 아니었다. 온전히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근거한 숙고였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근거하여 어떤 상황, 또는 사람에 대해여 숙고하면 참다운 관용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NIV에서 관용을 ‘considerate 표현한 것은 아주 탁월한 해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신앙의 위인들조차 관용의 덕목에서는 그렇게 자유롭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솔직히 이 사실이 나를 벌벌 떨게 한다. 그리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생각됐다). 교회사가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가 ‘-주의’, ‘-주의’로 나누어질 만큼 옹색하진 않을 텐데. 그렇다면, 나의 할일은 무엇인가? <거룩한 구원>에 그 답이 있다. 특별히 <거룩한 구원>의 커버 뒷장에 그 답이 있다. 이 커버 뒷장을 출판계에서 전문용어로 ‘표4’라고 한다. ‘표4’에는 책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기능을 한다. <거룩한 구원>의 ‘표4’는 지금 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 성령의 조명(칭의와 죄사함)과 성령의 내주(중생)를 받았는가? 성령의 조명을 전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갈라진 교회에 관용의 정신을 전파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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