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책의 '들어가는 말'을 소개합니다.
<거룩한 구원:복음주의 대각성 운동과 청교도의 조직신학:구원론, 성령론> 노병기 저, 예영커뮤니케이션,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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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거룩한 거듭남을 위하여
“사랑하는 독자들이여, 현대에는 거룩한 복음이 참으로 불명예스럽게 남용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입으로만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찬양하면서, 생활은 비그리스도인처럼 불신자들의 생활 방식으로 살아가는 경건치 못한 사람들의 회개할 줄 모르는 삶을 통해서 완전히 입증되었습니다.”1) 이 글은 약 사백 년 전 요한 아른트(Johann Arndt, 1555~1621)가 쓴 유명한 『참된 기독교』 서문 첫째 줄에 나오는 말이다.
사도 바울 이후 최고의 복음 전도자로 평가받는 조지 윗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는 약 삼백 년 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독교인으로서 마땅히 살아야 할 우리의 의무보다 더 잘 알려진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처럼 실천이 잘 안 되는 것도 없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습니까? 물론 명목상으로는 다들 실천한다고 하지만 마음과 생활양식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2)
주님을 사랑하는 독자들이여, 거룩함이 그리스도인에게서 사라진 것이 그때뿐이겠는가! 세상의 마지막 때가 가까워지고 있는 지금은 그 상황이 더 나빠져 가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은 지금 우리 기독교인의 영적 수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타락한 삶과 신학이 거룩한 삶과 신학으로 바뀌어야 한다
필자가 볼 때에 현대 기독교인들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현대 기독교인은 성도라면 본질적으로 가져야 할 거룩함을 상실했다(살전 4:3 ; 요일 2:15~16). 한마디로, 심각하게 세속화되었다. 현대는 기독교인라고 해도 믿지 않는 자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이 살아간다. 많은 교인이 단지 믿고 천국 가려고 교회 출석하는 것 외의 일상생활은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른 것이 없다. 실로, 많은 사람들이 현세적인, 기복적인 목적으로 교회를 출석한다. 즉 세상적인 행복을 얻기 위한 한 방편으로 교회를 출석한다. 그들은 복음이 그 이상의 무엇을 말씀한다는 사실에 전혀 관심이 없다. 그들은 거룩한 복음이나, 거룩한 구원에 관심이 없다.
성경은 속물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계 21:27).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속물적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그들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구원을 받는 것(살후 2:13 ; 딛 3:5)을 체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세상을 본받지 않고 산다는 것(롬 12:1~2)이 무엇인지 그 개념조차 정확히 알지 못한다. 성경은 옛 사람을 그 정과 욕심과 함께 십자가에 온전히 못 박은 자라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씀하신다(갈 5:24 ; 롬 6:6). 그러나 현대 기독교인들은 이런 말씀을 잘 모른다.
누가 속물인가? 그 마음에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살후 2:13 ; 고전 6:11)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적인 가치보다 세상적인 탐욕에 따라 사는 자이다. 그 마음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보다 현세적인 출세와 물질에 대한 탐심과 세상적인 허영으로 차 있는 자가 속물이다. 황금만능주의가 지배하게 된 지금 온 세상은 이러한 속물들로 넘쳐난다. 문제는 교회 안에도 거듭나지 못한 속물들이 넘쳐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종말의 가장 큰 전조이다(눅 17:26~30). 이들은 모두 영적인 음행자로서(약 4:4),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계 17:1~18).
우리나라 교계에서 한국 교회에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진정한 개혁이 어디서부터 와야 하는지 정확하게 지적해 주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무엇부터 개혁해야 하는가? 참으로 통탄할 만한 것은 스스로 세속적인 삶의 방식에 따라 살고, 거룩한 복음을 세속화시켜 가르치면서 말로만 개혁을 외치는 위선자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둘째, 현대 기독교인들의 거룩하지 못한 삶의 현실 뒤에 부패한 신학이 있다. 이것이 오늘날같이 부패한 교회 현실을 낳은 근본 원인이다. 현대 기독교의 가르침은 정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상당히 변질되었고 세속화되었다. 신학은 타락했고 설교는 군중들의 이기적인 입맛에 맞추기에 급급하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라고 말씀하셨고, 또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현대 교인들은 자기가 얼마나 거룩하게 변화되어야 진정으로 거듭난 것인지, 또 얼마나 거룩하게 살아야 장차 재림하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며, 별로 고민하지 않는다. 그 대신 온통 세상적인 성공과 행복을 추구하는 속물적인 욕망에 지배당하고 있다.
살아 있을 때에도 이 시대의 선지자라는 평판을 들은 토저(Aiden Wilson Tozer, 1897~1963)는 현시대 설교자들이 가르치는 간단한 인스턴트식 구원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솔직한 판단으로는 결신자(決信者)를 만들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나머지 최근에 우리는 현대의 세일즈맨들이 쓰는 기법을 사용하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세일즈맨들은 상품의 좋은 점들만 이야기하고 다른 점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기분 좋은 복음을 제시하면서 언덕의 양지 바른 곳을 약속하는 것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속이는 것입니다.”3) 오늘날은 솜사탕 같은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들과 솜사탕 같은 복음이 좋아서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로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당이 붐비고 있다.
현대 교회 설교자들과 달리 복음주의 대각성 운동을 일으킨 신앙 위인들과 청교도들은 구원에 대해 그렇게 가볍게, 간단히 가르치지 않았다. 윗필드는 참된 신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극히 드뭅니다. 그것은 본성이 철저하게 내면적으로 변화되는 것이요, 신적인 생명을 가지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께 생명의 참여를 하며, 영혼이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4) 오늘날에는 이런 식으로 거듭남을 가르치는 자가 드물다. 왜 그런가? 윗필드처럼 ‘거룩한 거듭남’을 경험적으로 체험한 사람이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청교도 신학을 완성한 자요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인정받고 있는 조나단 에드워즈는 “거듭남은 사람이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회심할 때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에 의하여 사람 속에 일어나는 위대한(great) 변화이며, 사악한 자로부터 거룩한 사람으로 바뀌는 것”5)이라고 했다. 오늘날은 이런 가르침을 더는 들어 보기가 어렵다. 당신은 거듭날 때 이러한 위대한 변화가 일어났는가?
에드워즈는 그의 가장 유명한, 아니 교회사에서 가장 유명한 설교라고 할 수 있는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든 죄인들”이라는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그러하기에 여러분의 영혼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강력한 능력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큰 변화를 결코 체험해 보지 않은 여러분 모두, 다시 태어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일이 결코 없는 여러분, 죄 가운데 죽어 있는 상태에서 살리심을 받아 새로운 상태가 되어 보지 못한 여러분, 곧 전에는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빛과 생명의 상태로 옮겨지지 않은 여러분 모두가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입니다.”6)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신생은 하나님께서 영혼을 살리실 때 하나님께서 영혼 속에 일으키시는 위대한(great) 변화”이며, “한마디로 말해서 신생은 '세상적이고, 정욕적이며, 마귀적인’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마음’으로 바뀌는 변화”7)라고 가르쳤다.
이와 같이 거듭남이란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 속에 일어나는 내면의 철저한 변화를 말한다. 이것이 복음주의 각성 운동 설교자들과 청교도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이렇게 가르치는 자가 거의 없다. 이것이 오늘날같이 부패하고 세속적인 기독교를 낳은 근본 원인이다. 타락한 삶 뒤에는 타락한 신학이 있다.
필자는 복음주의 각성 운동과 청교도 신학을 깊이 연구한 결과 그들의 구원에 대한 가르침에서 현대 교회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너무나 중요한 공통점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우리의 내적 성품을 철저히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위대한 역사 없이는 아무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성령님께서 먼저 우리 본성의 부패함을 철저히 깨닫게 하시고, 성령의 조명을 주셔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어 주시고, 우리 심령 속에 내주하셔서 우리 영혼의 본질을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위대한 역사가 필수적이다. 이것은 복음주의 각성 운동 사역자들과 청교도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한 내용이었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은 거룩한 구원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삶도 거룩한 삶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실제적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다시 오시는 주님을 영접할 수 없을 것이다(히 12:14). 이것은 구원의 말씀 중 핵심이 되는 말씀이다. 그러나 누가 이것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말세에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하나님께서 노아 시대에는 물로 죄 많은 세상을 심판하셨지만,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불로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벧후 3:6~7). 왜 그토록 인자하신 주님께서 이 세상을 완전히 심판하러 오시는가? 이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고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기’ 때문이다(창 6:5).
노아 홍수 심판 때에 전 인류 중애서 몇 명이 구원받았는가? 의인인 노아 식구 여덟 명만 남고 나머지는 다 심판을 받아 죽었다.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벧후 2:5). 당시에 인구가 수억에서 수십억 정도 되었을 것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연대와 그 당시 엄청나게 길었던 인간의 수명을 잘 계산해 보면 그렇다.) 그중에 겨우 여덟 명만 구원받았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온 인류 중 극소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돔 고모라가 멸망할 때 몇 명이 구원을 받았는가? 의로운 롯(벧후 2:8)과 두 딸 외에는 모두 심판을 받아 죽었다. 롯이 소돔 고모라를 나올 때 사위 두 명에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말하자 그들은 농담으로 여겼다.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더라”(창 19:14). 롯의 처는 소돔 고모라에 미련을 갖고 뒤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다. 소돔 고모라가 멸망할 때 큰 성 전체에서 단 세 사람만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마지막 불 심판 때는 얼마나 구원받겠는가? 인자의 때, 즉 주님의 재림은 노아의 때와 같고 롯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음을 기억하라(눅 17:26~30).
이상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본격적 심판 때는 소수의 의인 외에는 거의 전부가 죽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심판 때는 언제나 극소수 중 극소수만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라. 그것이 성경이 주시는 경고의 말씀이다.
주전 587년 구약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망할 때는 예루살렘 거리에서 공의를 구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렘 5:1). 그곳에 제사장도 많았고 선지자도 많았으며 각양 종교적 활동은 많았지만, 강퍅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아무도 안 들었다. 의인이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멸망했다. 하나님께서 전멸시키는 심판이 다가올 때는 그 땅에 의인이 없어지고, 모두가 타락한 상태임을 알아야 한다(창 15:12-16; 18:20--33). 그러므로 말세는 고통 하는 때인 것이다(딤후 3:1).
혹자는 마지막 심판을 앞둔 때가 그렇게 의인이 없는 시대라면, 믿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현대는 종말이 아니지 않는가 하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 신앙 위인들의 가르침을 가지고 이 시대 교인들을 점검해 보라. 현재 기독교인의 영적 상태라면 구원받을 자가 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확연히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여, 저들의 닫힌 눈을 열어 이 사실을 분명히 보게 하소서!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장년 중에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자는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 뿐이었다. 나머지는 하나님을 불신하고 원망하다가 광야에서 다 죽었다(이것이 12 정탐꾼 사건이다. 민수기 13~14장을 보라).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극소수만이 하나님의 기준을 통과한 예를 많이 볼 수 있다. 안일한 인간적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완전히 다를 수 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판단은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엄중함을 알 수 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당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1~12).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은 근신하고 진지해야 한다
이 시대는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 주님께서 온 세상을 불로 심판하러 오실 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표정에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의 비장함이 없다. 청교도 리처드 백스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그대가 진지하지 않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진지함은 기독교의 높은 수준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생명이며 정수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군사와 연극 속에 나오는 검객이 다르듯이, 진지한 그리스도인과 위선자는 다르다.”8)
이 시대의 풍조에서 가장 위험한 것 중 하나는 진지함이 없다는 것이다. 당신에게 묻겠다. 당신은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얼마나 되었는가?(마 25:1~13). 당신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할 정도로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가?(눅 14:26) 당신은 구원하시는 성령의 조명을 받았는가?(고후 3:18) 당신은 참으로 성령으로 새롭게 출생했는가?(요 3:5) 당신은 날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고 사는가?(롬 8:13)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서 정절을 지키면서 흠 없이 살아가고 있는가?(계 14:4)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는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 근신하고 깨어 있는가?(벧전 5:8~9)
이 책은 진지하고 진실한 독자들을 위한 책이다. 자기 영혼의 문제에, 영생의 문제에 진지하지 않은 사람은 이 책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진지한 독자들은 이 책을 만나게 된 것을 기뻐할 것이라고 믿는다. 필자는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깨끗하다. 그것은 필자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꺼림이 없이 전하고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의 평가나 비평을 두려워하기보다 오직 이 글을 읽게 될 영혼의 영원한 유익을 구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행 20:26~27).
가장 거룩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주님, 이 글을 읽는 모든 주님의 택자들에게 성령의 조명을 주시고, 성령의 불세례를 주셔서 주님께서 그들을 위해 예비하신 구원을 속히 얻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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