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피니

율법적 체험

천국 도서관장 2009. 6. 26. 01:56

 이 설교는 처음에 진입하는 데 있어서 약간 어렵다. 그가 법을 공부한 변호사였기 때문에, 칭의의 설교나 율법에 관한 설교를 할 때는 치밀한 법률적인 논거들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증거를 제시한다. 그래서 법률적인 논거와 그에 따른 증거에서 벗어난 논리를 치밀하게 공격하여 물리친다.

이 설교에서 피니는 의지, 행위, 선택, 바람, 찬동, 기쁨의 의미에 대한 먼저 철학적으로 접근한다. 인간은 결국 자기의 의지에 의해 행동이 선택된다. 바람이나 찬동, 기쁨에 의해 자기의 행동이 선택되는 것이 아니다. 바라고, 찬동하고, 기뻐하지만 어떤 상황에 의해, 그것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즉, 그것을 의지적으로 선택하지 않으면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우에 문제가 심각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찬동하고, 기뻐하고, 그렇게 되기를 바랄 수 있다. 그러나 의지를 갖고 선택하여 행동에 옮기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없다. 그것은 단지 추상적으로 말씀을 적용한 것일 뿐 실제적으로 말씀을 적용해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찰스 피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뻐하고 찬동하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만, 그것을 의지적으로 선택하여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저주인지를 언급하고 있다. 인간은 양심과 도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옳은 것을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그것을 옳은 것을 알고도 하지 못할 때가 더 많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문제가 심각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고 찬동하고 찬미하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면서도 그 말씀을 자기한테 적용하여 실천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큰 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하지 않는 죄보다, 알고도, 그것이 옳은 것인지 깨닫고도 하지 않는 죄는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피니는 이에 관한 내용을 치밀하게 논증한 후에, 로마서 7장의 후반절을 강해한다. 그리고 로마서 7장은 율법 하에서 죄와 철저히 씨름하고 있지만 결국 죄에 져서 신음하고 괴로워하는 회개하는 죄인의 상태인 것을 입증한다. 즉, 로마서 7장의 신자는 중생한 신자가 아니라, 중생하려고 처절하게 죄와 싸우고 있는 존재를 말한다. 이런 죄인에게 율법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사랑의 말씀이다. 물론 당시는 그것을 제대로 깨달을 수 없지만, 회개한 후에, 율법이 얼마나 귀하게 사랑스러운 진리인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율법 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제시되었을 때 그 죄인은 정말 기쁨과 부끄러움으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게 된다. 기쁜 것은 죄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고, 부끄러운 것은, 자신의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피니는 이 신적 조명까지는 다루지 않았지만, 이 설교의 전체적인 맥락과, 다른 설교문에서 언급된 것을 유추해볼 때 이 설교에 신적 조명이 암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 이 설교는 얼마나 나를 기쁘게 한 줄 모른다. 너무나 명쾌하게 말씀을 전달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율법이 얼마나 감사하고 귀한 말씀인지를 더욱 볼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 설교와 더불어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 1부와 웥터 챈트리의 <사라진 복음> 2장을 참고해 보면 아주 유익할 것이다. <신앙감정론>에서는 인간의 이성과 의지, 감정의 문제를 좀 더 심화해서 볼 수 있다. 사실 피니가 에드워즈의 이런 철학적인 면을 많이 계승했다는 것을 그의 1876년판 <조직신학>을 연구하면서 알게 되었다. <사라진 복음>에서는 율법의 중요성에 대해 챈트리가 피니와 같은 입장임을 알 수 있다. 


율법적 체험


나는 한번 이상 로마서 7장에 대해 언급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때는 7장의 일부만을 본문으로 해서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했던 만큼 충분히 숙고할 수는 없었고 그래서 그것을 별도의 주제로 해서 강의 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순서가 되겠습니다.


Ⅰ. 이 본문에 대해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통용되는 여러 가지 견해들을 언급하고

Ⅱ. 이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여러 가지 견해들 가운데 어느 것이 진실한 것인가를 아는 일의 중요성을 보여주며

Ⅲ. 이 본문을 설명하는 데 관계있는 몇 가지 원리들과 사실들을 제시하여

Ⅳ. 성경이나 어떤 다른 글이나 증언을 해석하는 데 있어 항상 유의해야 할 해석의 몇 가지 규칙을 언급하고

Ⅴ. 이 본문의 실제적 의미에 대한 내 자신의 견해와 그것에 대한 이유들을 제시하겠습니다.


나는 주로 본 장의 후반부에 대해서만 언급하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주로 그 부분이 논란거리가 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앞에서 제시한 순서에서 내가 이 문제를 가능한 한 간단하게 진술하고자 한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단 한 번의 강의에서 그 문제를 완전히 파헤칠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마 한 권의 책을 저술해야만 할 것입니다.


Ⅰ. 본 장의 적용에 관하여 지금까지 지배적이었던 주요한 견해들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1. 지금까지 광범위한 지지를 받아왔고 지금도 여전히 통용되는 견해는, 본 장의 후반부가 그리스도인 경험의 축소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상황과 연단들을 묘사하고 있으며, 내주하는 죄와의 전투를 보여주기 위해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교적 근대의 견해입니다. 본 장이 쓰여진 후 수 세기동안 그러한 견해를 주장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미국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철저히 이 문제를 검토한 스튜어트 교수에 의하면, 어거스틴이 이러한 해석을 시도한 최초의 사람이었으며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그렇게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2. 또 하나의 해석은 제 1 세기에 통용되었던 것인데 유럽대륙에서는 아직도 일반적으로 채택되고 있으며 영국과 미국에서도 상당수의 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는 견해입니다. 그것은 본문이 죄를 깨달은 죄인, 즉 율법의 동기 하에서 행동하고 있으나 아직도 복음의 경험으로 인도되지는 못한 사람의 체험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지배적인 견해는 로마서 7장이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Ⅱ. 본문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본문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근본적인 과제입니다. 만일 본문이 사실상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under conviction) 죄인, 즉 순전히 율법적 체험 하에 있는 사람을 묘사하고 있다면,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라고 상상해서 자기 자신의 경험과 부합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고 있는 셈이 될 것입니다. 만일 바울이 사실상 율법적 동기들과 헤아림의 영향을 받는 한 죄인의 경험을 묘사하고 있다면, 자기 경험이 로마서 7장과 일치하기 때문에 그의 경험을 그것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라고 믿는다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임에 틀림없습니다.


Ⅲ. 이 문제의 설명에 관계가 있는 몇 가지 원리와 사실을 제시하겠습니다.


1. 인간은 모든 경우에 본성상 자기가 더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혹은 다른 말로 하면, 의지가 행위를 지배합니다. 인간은 결코 자기 의지에 반하여 행동하지 않습니다. 의지가 지체의 동작을 주장합니다. 의지가 있는 존재는 자기 의지에 반대하는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2. 사람들은 종종 자기들이 선택하지 않는 것을 바랍니다.

바람(desires)과 의지는 종종 상반됩니다. 행위는 바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선택에 의해 지배됩니다. 바람은 선택과 일치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밤에 어떤 다른 장소에 가는 것을 바랄 수 있으니 그런데도 결국은 여기에 남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어떤 다른 곳에 있기를 아주 강하게 바랐을지 모르나 그래도 집회에 참석하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디론가 여행을 하기를 바랍니다. 아마도 그는 그것을 강하게 바랄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사업이나 야망에 아주 중요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족이 아프거나 어떤 다른 볼 일 때문에 집에 있어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집에 남는 쪽을 선택합니다. 모든 경우에 있어 행위는 그 실제적인 선택을 따르는 것입니다.


3. 중생이나 회심은 선택의 변화입니다.

그것은 마음의 최고의 지배적인 선택이 바뀌는 것입니다. 중생하고 회심한 사람은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더 좋아합니다. 그는 그것을 최고의 애정의 목적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의 변화입니다. 전에는 자기 자신의 이익이나 행복을 최고의 목적으로 선택했습니다. 이제 그는 자기 자신의 이익보다도 하나님 섬기는 일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거듭날 때 그의 선택은 습관적으로 옳으며 물론 그의 행동도 주로 올바릅니다.


유혹의 힘이 때때로 그릇된 선택이나 혹은 연속적으로 그릇된 선택을 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의 습관적인 행동 방향은 올바른 것입니다. 회심한 사람의 의지나 선택은 습관적으로 옳으며 그의 행위도 물론 그러합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내가 묻노니, 회심한 사람과 회심하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어디 있습니까? 만일 습관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실행하는 것이 회심한 사람의 성품이 아니라면 그의 품성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러나 중생의 교리를 믿는 자라면 이 입장을 반박하지 않을 것입니다.


4. 도덕적인 존재들은 자연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옳은 것에 찬동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도덕적인 존재란 이해력과 의지와 양심을 소유한 존재입니다. 양심은 도덕적 대상들 사이에서 차이점을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도덕적인 존재는 선악의 차이를 볼 수 있어서 그의 도덕적 본성이 옳은 것에 찬동할 것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죄인이 결코 죄책감으로 괴로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이해하고 높이 찬동하며 형벌을 정당화할 수 있는 도덕적 본성이 없다면 죄를 깊이 깨달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어긴 율법의 선함과 그가 불러드린 형벌의 정당성을 보는 이것이 죄의 확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하나님의 법이 옳다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그의 양심이 율법에 찬동하지 않는 도덕적인 존재란 하늘에나 '땅에나 혹은 지옥에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5. 사람들은 율법을 옳은 것으로 시인할 뿐 아니라, 추상적으로 또한 자신들과의 관계에 구애됨이 없이 율법이 관찰될 때에, 관조하는 일에서 그들은 종종 즐거움을 실제로 가집니다.

이것이야말로 자기기만의 커다란 원인이 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법을 추상적으로 관찰하면서 그것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반대할 아무런 이기적인 이유가 없을 때에, 그것을 관찰하는 데에서 기쁨을 얻습니다. 추상적으로는, 그들은 옳은 것을 찬송하며 사악함을 정죄합니다. 그들을 재촉할 아무런 이기적인 까닭이 없을 때에 사람들은 모두 다 이러합니다. 이론상 악을 찬동할 만큼 그렇게 사악한 사람을 발견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지금까지 마귀의 성품을 찬성하거나 자기와 관련이 없는 다른 악인에게 찬동한 도덕적 존재가 어디 있었습니까?


여러분은 사악한 인간들이 다른 사람 속에 있는 거대한 악에 대해 최대의 혐오와 몹시 싫어함을 나타내는 일은 얼마나 자주 보아왔습니까? 만일 그들의 정열이 어떤 식으로든지 실수나 오류에 편입되어 있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항상 옳은 쪽의 편을 들 것입니다. 그리고 옳은 것에 대한 이 체질적 찬성은, 그것이 그들의 이기심을 어떤 식으로든 직접 해치는 관계들을 알아채지 못하였을 때에는, 그들에게 심지어 기쁨을 주는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6. 진리와 하나님의 법에 대한 이 체질적 찬동 및 그것으로부터 자연히 생겨나는 기쁨 안에는 아무 덕(virtue)이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인간의 도덕적 본성에 속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마음의 구조로부터 자연히 우러납니다. 정신은 본성적으로 덕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나 그 안에 어떤 덕이 있기는커녕 그것은 사실상 그들의 타락의 힘에 대한 명백한 증거일 뿐입니다. 즉 그들은 옳은 것을 알며 그 탁월함을 보면서도 그것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이 그들 속에 거룩한 어떤 것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의 사악함이 그만큼 더 커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사악함은 그들이 향유하는 빛에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의 탁월성을 볼 뿐 아니라 그것을 강하게 찬동하여 그것에서 즐거움을 얻으면서도 그것에 순종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절망적으로 사악한지를 발견할 수 있으며 죄는 더욱 뚜렷이 죄된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7. 사람들은 흔히, "나는 이런 저런 일을 하고자 하지만 할 수가 없어"라는 말을 합니다. 그것은 단지 그들이 그것을 바랄 뿐 실제로 그대로 행하는 쪽을 선택하는 것으로 이해돼서는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단지 그것을 행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만일 그들이 하려고 한다면 그들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나는 어느 목사에게 다음 주일에 내 대신 설교를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대답하기를, "할 수 없어요."했습니다. 뒤에 나는 만일 그가 하고자 했다면 할 수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어느 상인에게 어떤 상품 하나에 대해 이러저러한 값을 받으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그렇게 할 수 없어요"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이었을 까요? 자기가 그런 값을 받을 능력이 없다는 것일까요? 천만에요. 하고자 했다면 그는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Ⅳ. 성경뿐 아니라 모든 문서와 모든 증거의 해석에 적용할 수 있는 해석 원리를 몇 가지 제시하겠습니다.


문서의 의미와 증인들의 증언 및 모든 글을 분별하는 데 모든 사람이 적용해야 하는 어떤 증거의 규칙들이 있습니다.


1. 우리는 항상 그 주제의 본질이 요구하는 의미를 언어에 부여해야 합니다.

2. 우리는 항상 어떤 사람의 말을 담론의 주제에 적용할 수 있도록 이해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주제를 보지 못하고 그들이 말하고 있는 바에 구애됨이 없이 그것을 해석할 자유를 가진다면 일상생활의 많은 언어가 왜곡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를 무시한 채로 성경에 나타나 있는 개개의 본문들과 표현들을 해석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오류를 범해 왔습니까?


성경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터무니없는 잘못들과 상충점들을 지지하는 것으로 곡해된 것은 주로 이 단순한 규칙을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이 규칙은 모든 진술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정의의 법정은 성경에 언명된 것과 같은 것이 되도록 그러한 왜곡들을 결코 허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2. 만일 어떤 사람의 말이 그것을 허용한다면, 반드시 우리는 그가 일관성을 가질 수 있도록 그의 말을 해석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규칙을 지킨다면, 여러분은 어떤 주제에 대해 다른 사람과 5분 동안 대화하면서도 그로 하여금 자가당착을 일으키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여러분의 생각을 이해시킬 수 있겠습니까? 만일 어떤 증인의 말이 이 규칙의 제재를 받지 않고 마음대로 왜곡된다면 어떻게 사실을 배심원들에게 알릴 수 있겠습니까?


3. 어떤 사람의 말을 해석할 때, 우리는 항상 그가 말하고 있는 요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의 논증의 범위와 그가 고려하고 있는 목적과 그가 말하고 있는 요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어떤 책을 읽는데 내 시선을 작가가 염두에 두고 있는 목적과 목표로 하고 있는 요점에 고정시키지 않는다면 결코 그 책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해석의 제 1 원리를 무시한 채 성경을 해석하는 습관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오류가 생겨났습니까?


4. 여러분이 어떤 사람의 말의 요점을 이해할 때, 여러분은 그가 그 요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만 하며 그의 목적과 무관하거나 그것과 일관성이 없는 그의 말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됩니다. 이 규칙을 간과하면 모든 말이 뒤죽박죽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항상, 어떤 말이 적용되고 언급되는 주제의 빛에서 그 말을 해석해야 합니다.



Ⅴ. 이 규칙과 원리들을 제시하였으니 이제 그것을 염두에 두면서 본문의 의미에 대한 나의 견해와 그 이유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먼저 몇 마디 언급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이 본문에서 사도가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 혹은 어떤 경우를 가정하고 있는 것인지 하는 것은 본문의 올바른 해석에 필수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가 1인칭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인 원리를 논하거나 어떤 요점을 주장할 때, 예를 들어서 어떤 경우를 가정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1인칭으로 말하더라도 실제적인 사건이나 자기 자신의 경험을 묘사하는 것이 전혀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주 세밀한 논증을 펼쳐 나가고 있었으며 단순히 예화를 통해서 이것을 소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자기 자신의 실제적 경험이냐 혹은 가상의 경우이냐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건 혹은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건 혹은 어떤 경우를 가상하고 있건 그 목적은 행위의 일반적인 원리와, 모든 사람이 그런 상황 속에서는 동일한 행동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인에 대해 말하고 있건 혹은 회개하지 않은 죄인에 대해 말하고 있건 그는 일반적인 원리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야고보서 3장에서 심지어 책망을 하면서 1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라. .......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종종, "나"라는 1인칭을 사용하면서 일반적인 원리들을 논하고 예증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또한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니라."


마찬가지로, "만일 내가 스스로 폐한 것을 다시 세우면 나를 범법자로 만드는 것이라." 고린도전서 4장 6절에서 그는 자기가 어떻게 예화를 사용하는지 정확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 자신과 아볼로의 경우를 들어서 말하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둘째, 사도가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많은 말은 종교의 형식만 남아 있는 타락자들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처음 사랑을 버렸으며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과 똑같이 바람과 공포라는 율법적 동기의 영향 밑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만일 진정한 회심자가 타락자가 되었다면 그는 죄인들과 똑같은 동기에 의해 행동합니다. 그리하여 양자에게 동일한 말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몇 마디 말을 타락자가 되어버린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시킬 수 있다고 해서 본문에 묘사된 경험이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단지 타락자와 죄인은 여러모로 비슷할 뿐인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최소한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의해서 행동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본문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이 그의 성품을 설명해 주는 것이며 그 때는 그가 타락자이든 죄인이든 전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셋째, 본 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몇 가지 표현은 습관적인 타락자가 아니라 한동안 유혹과 정열에 넘어가서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이 잘못된 것처럼 말하는 신자의 경우를 묘사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정욕에 이끌려 꾀임에 빠질 때 시험에 든다고 합니다. 그런 상태 속에서는 물론 여기서 자기 자신의 경험을 묘사하는 표현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문의 의도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이러한 상태 속에 있는 동안은 죄인과 다를 바 없는 어떤 확실한 영향 하에 있지만,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죄인은 온종일 그같은 영향 아래 있습니다. 그런고로 똑같은 말을 일관성 있게 양자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비록 어떤 표현들은 그럴듯한 의미를 가질 수도 있겠지만 본문 전체의 관점은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묘사한 것이 아님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내 자신의 견해는, 사도가 여기서 묘사한 것이 죄인의 경험, 즉 부주의하지 않을 뿐더러 죄를 철저히 깨달았으나, 아직 회심치 않은 자의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여기서 사도는 분명히 어떤 사람의 습관적 성품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전적으로 육체의 지배 하에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의 유혹의 힘 아래서 자신의 일반적 성품과 일치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에 관한 묘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율법에 찬동하면서도 시종일관 습관적으로 죄에 빠지는 사람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그의 논쟁의 예증으로 언급하는 것은 그의 목적과 완전히 무관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필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육신적 생각에 대한 하나님의 법의 영향에 있어서 그것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앞장에서 그는 칭의가 오직 믿음에 의한 것이지 율법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님을 말했습니다. 7장에서는 칭의가 믿음에 의해서 일 뿐만 아니라 역시 성화도 오직 믿음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남편있는 여인이 그 남편의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이 모든 말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여러분이 율법 하에 있는 동안에는 율법에 순종해야 하며 칭의를 위해서 율법의 요구조건에 얽매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심판의 척도인 율법으로부터 자유했으니 더 이상 바람과 공포라는 율법적동기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결혼한 그리스도께서 형벌을 제거하심으로 여러분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즉 회심치 않은 상태에서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상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며 의문의 묵은 것으로 섬기지 않습니다. 그는 율법의 열매가 오직 죽음이며, 복음에 의해 그리스도에게 진정으로 복속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였도다."


율법은 만일 사람들이 그것을 온전히 지키면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제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그것이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이제 그는 다시 반론을 제기합니다. 어떻게 선한 것이 사망을 이룰 수 있습니까?"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함이라."


그리고 그는 그것이 율법의 잘못이 아니라 죄의 잘못이며 바로 이 결과가 율법의 탁월성과 죄의 심히 죄됨을 보여 준다는 것을 나타냄으로써 율법을 변호합니다. 만일 죄가 하나님의 선한 율법을 가지고서 그것을 사망의 수단이 되게 할 만큼 그러한 왜곡을 가져올 수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끔찍한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여기에 모든 문제가 전환되는 중심점이 있습니다. 이제 보십시오. 사도는 여기서 만일 율법이 죄인들에게 사망의 수단이 된다면 그것은 선할 수 없다는 반론에 대항하여 율법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 반론에 대항하여 그는 죄인의 마음에 대한 그것의 모든 작용은 그것이 선한 것임을 보여준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시선을 이 점에 고정시킨 채 그는 율법은 선하며 악은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는 죄로부터 온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묘사한다고 생각되는 부분, 즉 논쟁의 주제에 도달했습니다. 그는, "율법은 선하나 나는 육신적이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육신적"이란 이 말을 한번 그가 사용했는데 그것도 그리스도인들에 관해 오직 한번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낮은 종교 수준에 놓여 있는 사람들에 관한 언급이었습니다.


"너희가 아직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이 타락한 자들이며 그들은 마치 회심치 않은 육신적 사람들인 것처럼 행동했던 것입니다. 그 말 자체는 일반적으로 최악의 죄인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됩니다.


바울은 어기서 그것을 그렇게 정의합니다. "육신적이란 것은 죄 아래 팔린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에 썼을 때 그런 말을 자기 자신에 대해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자기 자신의 경험이었겠습니까? 그가 죄 아래 팔렸겠습니까? 그것이 그 위대한 사도에게 해당되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율법을 변호하고 있었으며 한 경우를 가정함으로써 예증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여기서 여러분은 제가 제시했던 원리가 적용되는 것을 봅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여기서 여러분은 제가 제시했던 원리가 적용되는 것을 봅니다. "원한다"(would)는 이 말을 해석할 때 우리는 그것을 의지나 선택이 아니라 단지 바람(desire)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도는 단순한 사실에서 모순을 일으키는 셈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의지가 행위를 지배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진리인 것입니다.


스튜어트 교수는 바란다(desire)는 말을 아주 적절하게 풀이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하지 않고 내가 찬동치 않는(disapprove) 것을 행하는도다." 그 다음에 결론이 옵니다. "만일 내가 바라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라. 만일 내가 찬동하지 않는 것을 내가 하면, 만일 내가 내 자신의 행위를 찬동치 않는다면, 만일 내가 내 자신을 정죄하면, 그것으로 내가 율법이 선하다는 것을 증거하노라."


이제 여러분의 눈을 사도가 염두에 두고 있는 대상에 고정시키고서 다음 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여기서 사실상 그는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에 대항해서 양분하고 있습니다. 혹은 자기 자신이 두 개의 본성을 가진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방 철학자가 말한 것처럼 두 영혼이 있는데 하나는 선을 좋아하고 다른 하나는 악을 사랑하며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여기서 "원함"(to will)이란 찬동(approve)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만일 사람이 정말로 어떤 것을 할 의지가 있다면 그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말이 허용하는 경우라면 우리는 그것을 알려진 사실과 일치되게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원함"(to will)이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이해한다면 여러분은 사도가 스스로 하지 않는 것을 원해서 자기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했다고 말하게끔 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주지의 사실과 상충되는 것입니다.


그 말의 의미는 바란다(desire)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죄를 깨달은 죄인들의 경험과 일치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해야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며 그것이 옳다는 것을 강하게 찬동하고 있지만 그것을 행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습니다. 가령 내가 여러분에게 어떤 일을 시켰다 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 중에 회개하지 않은 자들에게 앞으로 나와서 앞 자리에 앉으라고 요청했다 합니다. 그가 누구인지 우리가 알아보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며 그의 죄를 보여주고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이 그의 책임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 합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소리칠 것입니다. "나는 그것이 내 책임임을 압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간단하게 말해서 그의 의지가 반대쪽으로 가울어졌다는 뜻인 것입니다.


20절에서 그는 앞의 말을 되풀이 합니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있는 죄니라."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습관적 경험이나 특성일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리스도인이 그런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일반적 성품이라면 그것은 불신자의 그것과 무엇이 나르겠습니까?


만일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습관적 성품이라면 성도는 실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라는 성경의 표현에는 한 마디도 진실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코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여기서는 분명히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여기서 그는 육신적 성향의 행동들이 너무나 지속적이고 보편적이기 때문에 한 "법"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노라." 여기서 커다란 걸림돌이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인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할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나는 그 표현이 강한 표현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사도는 양쪽에 대해 계속해서 강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58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말보다는 강하지 않습니다. 그는 역사상 가장 사악하고 반역적인 세대를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그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


그런데 그는 바로 이 백성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며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노라."

여기에 분명히 하나님께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 회개치 않는 죄인들의 한 예가 있습니다. 에스겔 33장 32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너를 음악을 잘 하며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잘하는 자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준행치 아니하노라." 선지자는 그들이 얼마나 사악한가를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백성이 모이는 것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않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

여기에 분명히 회개치 않는 죄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설교를 유창하게 하는 선지자의 설교 듣기를 좋아(love)합니다. 불경건한 죄인들도 어떤 유능한 목사가 하는 은혜로운 설교나 능력있는 말씀 듣기를 즐거워하는 일이 얼마나 자주 있습니까! 그것은 그들에게 지성의 잔치와 같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그들은 그 말씀을 너무나 즐거워해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고 생각할 정도가 됩니다. 이것은 마음의 완전한 부패와 하나님의 참된 성품에 대항한 적개심과 일치합니다. 아니 그것은 그들의 부패를 강력한 빛 속에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옳은 것을 알고 찬동하면서도 그릇되게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이처럼 즐거워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지체 속에 있는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여기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는 말은 분명히 괄호이며 사고의 흐름을 깨뜨리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그는 모든 문제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것은 마치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나의 더 나은 자아, 나의 왜곡되지 않은 판단,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법을 찬동한다. 그러나 내 지체 속에 있는 법, 나의 정욕이 나를 지배하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불순종한다."


사도는 온전히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의 습관적 특성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제시하는 것은 전혀 그의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율법의 정당성을 변호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율법 하에 있는 사람의 경우를 취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묘사하고 있었다면 그는 자기 자신에게 반대되는 논증을 하고 있었던 셈이 됩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라면 그것은 율법이 정욕을 굴복시키고 사람을 성화시키는 데 효과가 없다는 것뿐 아니라, 복음 또한 효과가 없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은혜아래 있으며, 율법의 정당성을 변호하는 데 있어서 율법 하에 있지 않고 은혜 하에 있는 사람들의 경험을 제시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인 것입니다.


또 하나의 결론적인 추론은 그는 사실상 4절과 6절에서 신자의 경우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율법 하에 있지 않고 육신에 있지도 않은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육신적이지 않고 율법으로부터 구출받아 실제로 영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순종하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8장 초두에서 그는 이렇게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는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 자니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는 위에 있는 괄호에서 잠시 이것을 암시했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러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는 지금 누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만일 앞 장에 나타난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것은 누구의 경험입니까? 여기에 완전히 다른 것이 있습니다. 한 쪽은 온전히 죄의 지배 하에, 즉 율법 하에 있으면서 자기 의무를 알면서도 그것을 결코 행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정욕의 권세로 인해 율법이 할 수 없었던 것을 복음이 해냄으로써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 사람, 즉 율법의 요구하는 바에 순종한 사람을 봅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노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이것이 결정적인 말입니다.


7장에서 바울이 육신적인 사람이라고 묘사한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그러나 여기에 육신이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전에는 육신이 지배하여 그를 의무와 구원으로부터 멀리 끌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이제 정욕의 세력은 굴복되었습니다.


이제 지금까지의 모든 논의를 요약하겠습니다.

(1)사도의 말의 강력함이 이 문제를 결정지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양쪽에서 다 강한 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묘사하고 있는 사람이 "율법을 즐거워 한다"고 말해지는 것을 반대한다 할지라도, 그는 또한 "육신에 속해서 죄 아래 팔렸다"고 말해 집니다. 저자가 강력한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을 무의미하게 일관성 없게 만드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2) 그가 자기 자신에 관해서 말했든지 혹은 어떤 다른 사람에 관해서 말했든지 혹은 단지 예증을 위해 어떤 경우를 가정한 것이든지 그것은 이 문제에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3) 그가 밝히고 싶었던 요점은, 육신적 마음에 대한 율법의 영향에 관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옹호하는 것이었습니다.

(4) 요점이 예증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즉 죄를 깨달은 죄인이 율법의 탁월성을 보지만, 그의 속에 있는 정욕이 승리하는 경우인 것입니다.

(5) 만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라면 그것은 단지 엉뚱할 뿐 아니라 사도가 의도했던 것의 정반대를 입증하게 됩니다. 그가 의도했던 것은 율법은 선하지만 정욕의 권세를 깨뜨릴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라 말해진다면 그것은 율법은 커녕 복음도 정욕을 굴복시키지 못하며 사람을 성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입증하게 되는 것입니다.

(6) 7장과 8장의 차이는, 7장의 경험이 그리스도인의 경험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합니다.



결 론


1. 로마서 7장에서 자기 자신의 경험을 발견하는 사람은 회심한 사람이 아닙니다. 만일 그것이 그들의 습관적인 특성이라면, 그들은 중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죄를 깨달은 상태에 있을 뿐이지 그리스도인은 아닌 것입니다.


2. 여러분은 죄인들을 다룸에 있어서 율법을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높이 평가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의로우시다 인정하게 하며 자기 자신을 정죄하게 하는 것이 율법인 것입니다. 죄인들은 율법에 의해 죄를 깊이 깨닫지 않으면 결코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습니다.


3. 동시에 여러분은 율법이 사람을 회심시키기에는 터무니없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악마의 경우는 이 점에 있어서 율법의 최고의 효능을 보여줍니다.


4. 여러분은 단순한 바램(desire)을 경건으로 오해할 위험을 보셨을 것입니다. 올바른 선택을 낳지 않는 바램 은 그 속에 아무 선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악마도 그런 바램을 갖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자들도 신앙을 가졌으면 하고 바랄 수 있고 실제로 종종 그것을 진정 바라기도 합니다. 그것이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혹은 자기들의 정욕을 다스리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느낄 때 말입니다.


5. 그리스도와 복음은 마음을 성결케 할 수 있는 유일한 동기들임을 보여줍니다. 율법은 단지 죄를 확신케 하고 정죄할 뿐입니다.


6. 진심으로 회심하고 복음의 자유 속에 들어온 자들은 자기 자신의 부패의 굴레로부터 구출을 진정 발견합니다.

그들은 육신의 세력이 분쇄된 것을 발견합니다. 그들도 많고 심한 갈등과 시험을 겪을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정욕의 노예 상태로부터 구출되었으며 죄에 대한 승리를 구가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쉽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의 계명은 그들에게 비탄에 젖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멍에는 쉽고 그 짐은 가볍습니다.


7. 진정한 회심자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립니다. 그는 자기가 그것을 가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는 평강을 맛봅니다. 그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부패에 대한 승리를 느낍니다.


8. 이 주제로부터 여러분은 엄청나게 많은 교인들의 진정한 위치를 발견하셨을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율법 하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계명과 그 형벌을 다 찬동합니다. 그들은 정죄되었다고 느끼며 구출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불행합니다. 그들에게는 기도의 영이 없으며 하나님과의 교제도 없으며 양자됨의 증거도 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로마서 7장을 자기의 증거로 언급합니다. 그런 사람은 "그게 바로 나의 경험이야"라고 말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만일 그것이 여러분의 경험이라면 여러분은 아직 죄의 속박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죄책의 굴레 속에 있으며 죄에게 패배 당한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것이 쓸개즙처럼 쓰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이제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도 바울의 옆 자리에 앉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여전히 육신적이며 죄 아래 팔렸으며 만일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