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명설교는 칭의에 관해, 매우 명쾌하게 설명해 준다. 피니의 '칭의'론은 매우 탁월하다.
믿음에 의한 성화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 3: 31).
사도는 모든 인류가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을 막론하고 죄 가운데 놓여 있었다는 것을 논증하고, 유대인들이 그토록 신봉하고 있는 교리 즉 '그들이 거룩한 백성이며 그들의 행위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주장을 반박해 왔습니다. 그는 칭의가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는 다음과 같은 반론을 예상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율법이 이러한 칭의의 계획에 의해 폐지되고 철폐되었다고 당신은 가르친단 말인가?" "그럴 수 없습니다. 도리어 굳게 세웁니다."
이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순서를 따르고자 합니다.
Ⅰ. 복음에 나타난 칭의의 방법은 율법을 철폐하거나 철회하지 않습니다.
Ⅱ. 오히려 복음의 칭의 방법은 율법에 대한 참된 순종을 낳음으로써 율법을 굳게 세웁니다. 그것도 그 같은 순종을 낳는 유일한 수단으로서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
믿음에 의한 칭의 교리에 대한 최대의 반대는 항상 이것이었습니다. 곧 죄를 묵인하고 죄악의 물길을 터주기 때문에 선한 도덕률과 조화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위하여 사람은 자신의 선한 행위에 의존하지 말고 다른 존재를 의지해야한다는 주장은 사람들로 하여금 선한 도덕을 무시하게 하며, 그들의 칭의를 위해 그리스도를 의존하게 하는 한편으로는 그들을 죄 가운데 살도록 격려한다고'들 말해져 왔습니다.
또한 '복음이 사실상 사람들을 도덕법에 순종할 의무에서 풀어줌으로써, 복음 하에서는 율법 하에서보다 한결 느슨한 도덕률이 허용되어 있다'고 어떤 이들은 주장해 왔습니다.
Ⅰ. 복음의 칭의 방법이 도덕법을 철폐하는 것은 아닙니다.
1. 복음은 어디서나 율법에 대한 순종을 강요하며 거룩함에 관한 동일한 표준을 제시하므로, 이 칭의의 방법이 도덕법을 내버리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덕법의 말씀, 바로 그것을 채택하셨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명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2. 복음의 조건들은 도덕법을 유지하기 위해 계획된 것입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죄의 포기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을 회개하고 율법에의 순종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회개는 순종의 한 요구와 동등한 것입니다.
3. 복음은 율법이 옳다는 것을 옹호합니다. 만일 복음이 율법을 충분히 옹호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가 죄의 사역자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4. 복음의 계획에 의하면, 율법의 제재에 복음의 제재가 덧붙여진 것은 율법에의 복종을 강요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따라서 율법의 그것에다 복음의 무서운 제재들이 덧붙여진 것은 율법의 명령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기 위한 것입니다.
Ⅱ. 믿음에 의한 칭의의 교리는, 율법에 대한 진정한 순종을 낳음으로써 성화를 산출합니다.
내가 의미하는 바는, 사람이 마음으로 이 계획을 이해하여 그것에 대한 믿음을 발휘할 때, 그것은 자연스럽게 성화를 산출한다는 것입니다. 성화는 거룩함이며, 거룩함이란 율법에 대한 복종 이외의 어느 것도 아니며,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과 일치합니다.
믿음에 의한 칭의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진정한 순종을 낳는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가 최우선으로 견지하는 입장은, 복음에 대한 고려들이나 믿음에 의한 칭의와 연관된 동기들을 떠나 율법 자체만으로는 이기적이고 사악한 인간들 가운데서 성화가 산출될 수 있다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동기들은 이들이 죄짓는 일을 저지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이기심의 권능 아래에 떨어져서 죄가 확고한 습관이 된 때에, 그 같은 동기들이 그들을 교정할 수 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입니다. 사람이 한 번 타락하면, 율법의 동기들은 부분적으로 영향력을 상실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심지어 정반대되는 효과를 낳습니다.
율법의 동기들은 이기적인 마음으로 보면 죄를 더하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죄인들의 경험입니다. 율법의 영성(spirituality)은 보나 복음의 동기들을 죄인이 보지 못할 때, 율법은 그의 마음의 교만을 부추기고 그의 반항심만 굳어지게 합니다.
마귀의 경우가, 율법이 그 모든 원리들과 제재(강제력)와 더불어 사악한 마음에 대하여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한 좋은 예입니다. 그는 율법을 이해하며, 그것의 합리성을 알고, 순종의 복됨을 경험했으며, 돌이켜 순종하면 마음의 평안이 회복되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인류 중에서 결코 거룩했던 적이 없었던 어떤 인간보다 마귀는 이것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개심시킬만한 동기들을 마귀에게 제시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순종과는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그를 몰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순종이 죄인에게 생명의 조건으로서 제시될 때, 그것은 즉각 그로 하여금 자기 의를 이루려는 노력에 착수하도록 만듭니다.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 각성된 죄인의 첫 번째 시도는 율법에 순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는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에 먼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좀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영생을 순전히 거저 주시는 선물로 제공하는 복음의 계획, 즉 믿음에 의한 구원의 단순성을 그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형벌로 죄인을 놀라게 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그의 마음의 법칙에 의해, 좀 더 나은 행동을 하고 자신의 생활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노예근성적인 두려움의 영향 아래서 자기 의를 세우는 방식으로 영생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이 그를 강요하면 할수록, 그의 바리새적인 노력은 더욱 커지게 됩니다(만일 순종하면 그가 하나님께 용납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남아 있을 동안은) 그 외에 무엇을 그에게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순전히 이기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당장 굴복해야 하지만, 아직은 구원을 위한 복음의 항목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당연히 형벌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목적에 우선적으로 쏠려 있어, 어떤 다른 방법으로 천국에 들어가려고 시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반드시 믿음에 의하여 되는 것이지 자신만의 의를 이루려는 분투노력으로는 자기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전에 하나님께 굴복한 사람은 역사상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만일 율법적 동기들에 의해 거룩함을 산출하려고 시도하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랑의 대상인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주의력을 다른 데로 돌리는 결과가 됩니다. 죄인은 시종일관 시내산 주위를 맴돌고 있으며, 자기가 얼마나 순종에 근접하고 있는가를 보기 위해 자기의 발걸음에만 마음을 씁니다. 그러한 그가 어떻게 천국의 영을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율법의 형벌에는 사랑을 산출할 성향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사랑을 소유한 자들이라면 하나님의 무한한 거룩함의 표현으로서 율법을 심사숙고할 때, 율법이 사랑을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하늘의 천사들, 그리고 지상의 선한 사람들은 율법의 적합성과 적절함을 이해하며 그 속에서 당신의 피조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한 의지의 표현을 봅니다. 율법은 호감을 주며 사랑스럽고 보이며,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기쁨과 신뢰를 증가시킵니다.
그러나 이기적인 인간들에게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그는 형벌이 자기 머리 위에 놓여 있는데 탈출구는 전혀 없다는 것을 봅니다. 자기의 저주받은 머리를 천둥벼락으로 위협하는 존재에게 반해버린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할 일인 것입니다. 마음의 본성상, 그 분으로부터 달아나고자 하지 그 분에게로 피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영감 받은 성경 기자들은 율법이 사람들을 성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이 주어진 것은 살리기보다는 죽이며 또한 자기 의를 이루려는 인간의 희망들을 영원히 베어버림으로써, 그리스도에게로 달려가 피하도록 그들을 강요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죄인들, 율법아래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을 뿐 복음과는 무관한 죄인들은, 자연스럽게도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러한 상태 아래서는 하나님을 화해할 수 없는 적으로 볼 것은 당연합니다. 그들은 전적으로 이기적인 것입니다. 복음에 대해 충분히 고려해 본 일이 없다면, 죄인들은 마귀가 하나님을 보는 것처럼 하나님을 봅니다. 율법 안에서는 사랑을 낳을 어떠한 동기도 이기적인 마음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형벌이 그러한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을 개혁하기 위해 그들을 지옥으로 보내라는 것, 그것은 이상한 개혁안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생애의 마지막 날까지 죄악 중에 반역을 계속하게 한 다음, 거룩해 질 때까지 그들을 처벌받게 해 보십시오. 이상한 것은 그렇다면 마귀는 왜 아직 거룩해지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충분히 오랫동안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는 수천 년 간 지옥에 매여 있지만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거기에 복음이 없다는 것과 진리를 적용시킬 성령이 계시지 않으며, 형벌은 오직 그의 반역을 굳게 할 뿐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칭의의 교리는 이러한 난관들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명령에 대한 진정한 순종을 낳을 수 있고 또 낳아 왔습니다. 믿음에 의한 칭의는 의무의 규범으로서의 율법을 철폐하지 않고 단지 율법의 형벌만을 파기할 뿐입니다. 그리고 단순한 믿음의 행위를 따라 주어지는, 순전히 거저 주시는 선물로서의 칭의를 설교하는 것이야말로 율법에 대한 순종을 늘 일으키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점들을 고려해 보고자 합니다.
1. 칭의 교리는, 이기심을 자연스럽게 굳혀갈 고려들의 압박으로부터, 마음을 자유케 해줍니다.
율법만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는, 순전히 이기적 노력들을 영속시키는 바램과 두려움의 영향력을 마음은 느낄 뿐입니다. 그러나 믿음에 의한 칭의는 이러한 노예의 영을 소멸시켜 버립니다. 사도는 이처럼 말합니다. "우리가 다시는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다." 이러한 구원의 계획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를 낳으며, 영혼들로 하여금 성결의 감미로움을 맛보게 합니다.
2. 그것은 또한 자신만의 구원을 최대의 목적으로 삼을 필연성으로부터 마음을 해방시켜 줍니다.
복음의 구원 계획을 믿는 이들은, 구원이 충분하고도 완전한 것이며 그것이 이미 예비 된 성화와 영생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헛되이 노력하며 심신을 소모시키는 바리새인의 생애에로 내몰리는 대신, 그는 구원을 거저주시는 선물로, 순전히 무상의 선물로서 받아들이며, 자신의 영혼을 전폭적으로 그리스도에게 맡긴 가운데, 이제 자유로이 사심 없는 사랑을 행하고,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살고 수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그에게 구원을 거저 주시는 선물로 제공하셨고 주셨다는 사실은 신자들 속에 다른 사람을 위한 관심을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이 이 구원이 없어 죽어 가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는 그들이 진리에 대한 지식에로 인도되어 구원받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영향력들은 모든 이기적인 동기들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것입니까!
복음은 하나님을, 율법처럼 화해할 수 없는 원수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화목 되기를 바람으로 슬퍼하시고 마음 상한 아버지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자기의 피조물들이 자기와 화목하게 살 수 있기를 몹시 바라고 계시며 이것이 그의 사랑을 낳은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을 죄인들과 화목하기 위해 최대의 희생을 치르신 분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그 동기는 그들의 행복에 대한 순수하고도 사심 없는 고려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당신 자신의 가정에서 시험해 보십시오. 율법이 묘사하는 하나님은 진노로 무장하시고 소망도 도움도 없는 죄인들을 처벌하기로 결심하신 분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을 마음 상한, 그러나 아직도 그들이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을 너무나 갈망하시기 때문에, 그의 방황하는 자녀들에 대한 사심 없는 사랑에서 우러나와서,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가장 고귀한 희생을 치르신 분으로 묘사합니다.
나는 언젠가 어느 아버지가 자기 가정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본받으려고 애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자녀가 나쁜 짓을 하면 그와 변론해서 그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충분히 잘못을 깨달아 꾸짖음을 듣고 나무람을 받아 유구무언이 되면, 그때서야 아버지는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벌을 받아야 마땅하겠지?"
"네, 아버지. 압니다."
"이제 만일 내가 너를 그냥 용서해 주면, 네 형제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게 되겠니? 차라리 내가 벌을 받겠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채찍으로 쳤고 그것은 그 아이의 마음에 아주 충격적인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는 이처럼 온전히 마음을 굴복케 하는 일을 지금까지 시도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심성 자체가 그러한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과는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롬 3:21, 24).
4. 칭의의 교리는 마음을 완전히 새로운 영향력 하에 있게 합니다. 그리고 성결을 위한 이유들을 숙고해 보고 그것에 따라 결정을 하도록 허락해 줍니다.
율법 하에서는 바람과 두려움의 동기 외에 죄인의 마음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 하에서는, 바램과 두려움의 영향력은 사라지며, (하나님께서 구사하실 수 있는-사람들의 모든 주의를 끌어 땅기는-매혹적인 모든 힘을 지닌) 하나님의 완전하신 성품에 관한 견해와 더불어 새로운 고려사항들이 제시됩니다. 가눌 길 없게 복받치는 감정을 최고로 불러일으키어, 우리로 죄를 기어이 정복하게끔 할 -하나님에 관한 견해를 복음은 나타내 보입니다.
또한 복음은 그분의 사심 없으심을 드러내 보입니다. 사탄이 우리 최초의 조상들을 유혹했던 방법은 하나님의 사심 없음을 의심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은 진실을 밝혀서 이러한 거짓말을 바로잡아 줍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죄인의 냉혹한 원수로 표현합니다. 완전히 순종하는 자에게는 행복을 주고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진노를 쏟으시는 분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그 전에는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의 성품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줍니다. 의심할 나위 없이 복음은 모든 거룩한 존재들의 사랑을 증가시킵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에게 더욱 더 커다란 기쁨을 줍니다.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동정과 오래 참으심을 볼 때, 그들의 사랑과 신뢰와 경이가 크게 증가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악마들을 지옥으로 몰아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담과 이브를 낙원에서 추방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거룩하신 하나님이 오히려 당신의 가슴을 활짝 여시고, 그들을 위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주시며,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수 천 년 동안 지칠 줄 모르는 수고를 하고 계신다는 것을 축복된 영들이 보게 될 때에, 그것이 그들 마음 안에서 순종과 사랑을 향한 동기를 강화시키는 데에 영향을 미치지 않겠습니까?
순전히 이기적인 존재인 마귀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이기적이라고 참소하고 있습니다. 그는 "욥이 공연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십니까?" 마귀는 우리의 조상 아담과 이브에게 하나님을 이기적이라고 참소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했던 유일한 이유는 혹시 그들이 당신만큼 지혜로워 질까봐 두려워해서였다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정말 어떠한 분인지 보여줍니다. 만일 그가 이기적인 분이었다면, 단숨에 지옥으로 밀어 넣어 버리실 수 있었던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렇게 수고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기적인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의 이기심을 부끄러워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자비로운 행실을 보게 하는 것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사악한 자들은 자신이 사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려고 끊임없이 애쓰고 있습니다.
조금이라고 양심이 남아 있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참된 사랑을 보게끔 하십시오. 그것은 마치 머리 위에 숯불을 얹어 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셨을 때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했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우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렇게 함으로써 너는 그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아두는 셈이 될 것이다." 어떤 것도 그처럼 원수를 거꾸러뜨리고 설복시켜 친구가 되게 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죄인들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지었던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사심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허리를 꾸부려서 죄인들을 구원하고자 하신다는 것을 죄인들이 볼 때에, 그리고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에, 그의 심령은 얼마나 녹아지고 깨어지게 되겠습니까? 그것이 그의 이기심에 치명타를 가하여, 무한한 신뢰와 거룩한 사랑으로 나아오도록 그를 설복하지 않겠는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이 덕을 숭상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인간에게 도덕적 능력이 있는 한, 그도 그럴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천국에서나 지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악마도 이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를 정죄할 타산적인 동기들이 하나님에게는 없으시며, 순전히 거저 주시는 선물로 구원을 하나님은 믿음을 통해 제공하신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보게 될 때에, 그는 하나님의 자애심에 대해 경탄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의 이기심은 산산조각나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 역할을 다 감당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모든 이기적 노력이 아무 소용없었다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의 마음이 사심 없는 사랑으로 부풀어 오릅니다.
사람이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특사를 얻기 위해 정부에 여러 차례 탄원서를 올렸지만 실패했는데, 그 이유는 그의 노력이 모두 거짓되고 이기적인 탄원이었기 때문이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정부는 그의 동기를 알고 있고, 그 자신도 진정으로 정부와 화해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의 동기들은 모두 위선적이며 이기적인 것으로서, 호의를 입을지 모른다는 바램이나 진노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며, 그래서 정부는 그의 위선에 더욱 분개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습니다. 이 때 정부로부터 그에게 공문이 한 장 날아왔는데, 그 내용은 그에게 용서를 거저 제공한다는 것이었다고 합시다.
그리고 그 조건은 단지 그가 그것을 순전히 거저 주시는 선물로서(자신의 노력은 전혀 고려됨이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라 합시다. 그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주었겠습니까? 형벌이 파기되었기 때문에 자기 노력으로 자기-의를 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그의 마음은 찬탄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정부가 가장 고귀한 희생을 치렀다는 것이 드러난다 합시다. 그의 이기심은 죽어버리고, 그는 어린 아이처럼 그 통치자의 발밑에 엎드려 울먹이게 될 것이며, 이제 그 통치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율법에 복종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5. 모든 진실한 순종은 신앙(faith)에 달려 있습니다. 신앙은 성화에 필요한 모든 영향력을 확보해 줍니다. 신앙은 생각에 영생의 교리를 접근시켜서 마음을 끌어당깁니다. 이 세상적인 동기는 감각을 통해 전달됩니다. 천국에 있는 의인의 영혼에 영향을 주는 동기들은 감각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도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행사될 때 장벽은 무너지고, 영원의 엄청난 실재들이 천국에서와 꼭 같은 종류의 영향력으로 여기서도 마음에 작용합니다. 정신은 어디서나 정신입니다.
그리고 불신의 어두움이 없다면, 사람들은 영원한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죄인들은 지옥에서처럼 여기서 분내고 신성을 모독할 것입니다. 지금 신앙은 이 모든 것들이 실재가 되게 합니다. 신앙은 마음을 흔들어 세상의 사슬들로부터 마음을 자유하게 해줍니다. 그래서 마음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분의 율법과 사랑을 이해합니다.
이러한 동기들 이외에 어떤 방법으로도 마음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붙잡을 때에, 믿음이 마음에 굉장한 영향을 줄게 분명합니다! 복음의 순수한 동기들이 마음속에 밀어닥쳐와 신성한 능력으로 마음을 휘저어 놓을 때, 그것은 얼마나 엄청난 생명의 능력이 되겠습니까!
모든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강도에 따라 자기의 마음이 쾌활해지고 적극적이 되며, 믿음이 흔들릴 때 영혼은 어둡고 낙심된다는 것을 압니다. 믿음만이 시간과 영원의 사물들을 진정으로 대조시켜 놓으며, 믿음만이 그것들에게 제 가치를 부여합니다. 믿음은 마음의 망상들을 분쇄해 주는 것입니다. 영혼은 잘못과 장애물을 스스로 떨쳐버리며, 영혼은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일어서는 것입니다.
결 론
1. 복음의 동기들에 의하지 않고 죄인들을 회심시키고 성화시키려는 시도는 불합리할 뿐 아니라 비성경적입니다.
당신은 율법으로써 죄인을 압박하여, 그의 자신의 성품,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정의 그리고 그의 타락한(몰락한) 모습을 보게 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으로부터 복음의 동기들을 감춰 보십시오, 그러면 그 일은 모두 헛수고가 될 것입니다.
2. 복음을 제공하는 일이 이기적인 희망을 낳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죄인의 마음에 하나님의 성품 모두를 제시하는 일을 꺼립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절망 속에 내던짐으로써 그를 하나님께 굴복시키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은 복음에 반대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에 있어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죄인의 이기심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를 얼마나 사랑하시며 긍휼히 여기시는가 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시기 위해 얼마나 고귀한 희생들을 치르셨는가를 그에게 숨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3. 죄인들이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되면 거짓 소망을 가지게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은 사실과 거리가 먼 생각입니다. 그것을 감추면 오히려 거짓 소망을 갖게 됩니다. 죄를 깨닫고 몸부림치는 죄인으로부터,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순전히 거저 주시는 선물로 마련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감추어 버리면, 그것은 바로 그의 이기심을 강화시키는 길입니다. 만일 어떤 희망을 가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거짓 소망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오직 율법만으로 그를 굴복시키려고 밀어붙이는 것은 그로 하여금 자기 의의 기반을 쌓게 하는 것입니다.
4. 우리가 이해하는 한, 은혜에 의한 구원이야말로 이기적인 존재들을 개심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구원이 전적으로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 선행에 의한 것이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부분적으로 그 선행에 의해 우리가 칭의를 얻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생각이 있는 한, 이기심이 자극을 받게 마련입니다. 당신은 죄인을 이끌어서, 거저 주시는 은혜에만 그가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며, 충분하고도 완전한 칭의가 믿음의 최초 행위를 따라 순전히 거저 주시는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지, 칭의의 어떤 부분도 그가 하여야 할 어떤 것에 상응하는 것으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게 해야만 합니다. 이것만이 이기심의 영향을 해소하고 거룩한 행실들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5. 만일 이 모든 것이 참되다면, 죄인들은 구원의 전 계획에 대해 가능한 한 빨리 완전한 지식을 습득해야 합니다.
죄인들은 율법과 자신의 죄책과 자신들에게는 스스로를 구원할 길이 없다는 것을 보게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이해돼야만 합니다. 그 때에 그의 이기심은 분쇄되고 그의 영혼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굴복하게 될 것입니다. 죄인들과 대화할 때 그들에게 구원의 모든 계획과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완전히 제시하는 것을 두려워 마십시오. 그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문을 두드리고 계시며 그가 하나님께 화목 되기를 간청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그에게 보여 주십시오.
6. 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그 많은 죄인들이 자신들의 행위에 의해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의의 노력으로써 시내산을 계속 오르려 하고 있는지,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경우에 죄인들은 더 많은 느낌을 갖기를 시도하거나, 혹은 더 많은 기도를 하고 더 많이 노력할 때까지 기다리거나 해서, 그런 식으로 자신들을 하나님께 천거하길 바라고 있습니까? 이 모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죄인들은 이러한 것들을 떨쳐버릴 필요가 있으며, 또한 자기가 줄곧 율법 아래서의 구원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모든 것이 -그가 원하는 모든 것들을 순전히 거저 주시는 선물로 제공하는 복된 소식에 의해 대체된다는 것을 그는 깨우쳐야만 합니다. 그는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해 내게 나아오기를 원치 아니한다. 너희는 기도하고자 하며, 집회에 참석하며, 성경을 읽고 혹은 다른 일을 하려고 하나, 단지 내게 나아오라. 죄인들이여, 이것이 정도이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나아올 자가 없느니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라. 죄인이여, 여기 네가 원하는 것이 있노라. 자신의 의를 세우는 너의 기도와 노력 대신에, 여기 네가 찾는 것이 있다.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7. 왜 그토록 많은 신앙 고백자들이 항상 어두움 속에 있는지를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을 자기 자신에게만 고정시키고 있기 때문에,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즉시 붙잡고 자신을 그분께 던져버리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는 안목을 그는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8. 율법은 사람들에게 죄를 확신시키는데 유용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결코 심령을 찢게 하지는 못합니다. 복음만이 그 일을 합니다. 회심자가 깨어지는 정도는 복음을 이해하는 통찰력의 정도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9. 율법적인 설교를 들으면서 어떤 희망을 즐기는 회심자들은(만일 그들을 그렇게 부른다면) 율법에 지적으로 찬동하고 또 일종의 메마른 열심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마음이 녹아지고 깨어진 심령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은 되지 못합니다. 만일 그들이 복음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그 심정의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다면, 그들은 결코 예수의 이름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여 몸을 와들와들 떠는 그런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10. 죄를 깨닫고 있는 죄인들과 어두움 속에 있는 신앙고백자들은 곧바로 그리스도께 인도되어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계획을 붙잡게 되어야 합니다. 그 외에는 그들에게 도움을 줄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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