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피니

복음에 나타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천국 도서관장 2009. 6. 10. 17:37

찰스 피니의 설교나 조직신학을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부르심, 회개, 죄사함, 칭의, 중생, 성화, 영화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직신학적으로 약간 오류가 있지만, 그가 말하는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조명, 성령의 내주임을 명심하면 큰 문제가 없는 것 같다.

이 설교와 더불어 조나단 에드워즈의 <참된 미덕의 본질>을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신 것과 죄인에 대한 사랑은 호의적 사랑, 성도에 대한 사랑은 만족적 사랑이라는 것을 구별해서 보면 유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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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 나타난 죄인을 향한 하나님 사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 16 )


이 위대한 사랑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 하나님은 단순한 지성적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실 능력을 지니신 존재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이 선언은 단순히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언변이 아니며, 따라서 선언에 나타난 의미 이하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이 선언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행하신 사실에 관한 진술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위하여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을 포기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진실로 사랑하신다는 점을 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보다도 위대하시기 때문에 어떤 사람보다도 강렬하게 사랑하게 사랑하신다.


*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대상은 누구인가?

위대하신 하나님은 누군가를 사랑하신다. 누구인가?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가?

하나님은 무한한 추상화의 산물이며, 자신들보다 무한히 높으며, 자신들의 행복과는 무관한 존재라고 죄인들은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성경 구절은 하나님은 가장 확실하고도 강렬하게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선언한다. 이 세상이란 둥그런 물질의 지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이란 지구 위에서 살고 있는 사람, 생명을 지니고 지성과 도덕성을 지닌, 그러나 범죄 하는 종족인, 사람을 의미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랑의 본질에 주목해야 한다. 이 사랑은 어떠한 종류의 사랑일까?

죄인들은 하나님을 미워한다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신다는 점을 여기에서 듣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종류의 사랑을?"이라고 물어보아야 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적절히 구분해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죄인에 대한 사랑이 단순히 좋은 종류의 사랑이라고, 즉 죄인의 특성과는 무관한 부드럽고 자발적인 감정이라고 오해하지 않는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을 우리는 이해해야만 한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존경이나 존중으로 인한 사랑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종류의 사랑은 상대방의 특성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랑은 단순히 상대방의 도덕적 특성으로부터 하나님께서 기쁨을 찾으실 수 없다는 점은 너무나 분명하다! 죄인들의 특성은 모두 하나님께 혐오스러울 뿐이다. 그러므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은 도덕적 특성으로 인한 사랑일 수가 없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행복과 불행을 느낄 수 있는 인지적 존재, 혹은 사고하는 존재로서 사랑하실 수밖에 없다. 다른 말로 해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들의 행복을 향한 성실한 열망이다[조나단 에드워즈는 <참된 미덕의 본질>에서 죄인에 대한 하나님을 사랑을 호의적 사랑(benevolence)이라고 표현했다. 반면에 사랑할 만한 대상이 있어서 사랑하는 것을 만족적 사랑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참된 성도에 대한 사랑이 만족적 사랑이다-cyh].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님의 사랑과 유사하다. 매우 못된 자녀를 가진 부모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그 자녀를 사랑한다. 부모는 못된 자녀들의 행복을 바란다는 의미에서 자녀를 사랑하며,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준다는 의미에서 자녀를 사랑한다. 도덕적 특성에서 볼 때 방탕한 아들은 전혀 사랑스럽지 않지만, 위와 같은 의미에서 방탕한 아들은 커다란 사랑을 받는다. 많은 부모들이 방탕한 자녀들을 간절히 그리워하곤 했다. 많은 부모들이 방탕한 자녀들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 인간으로서 견딜 수 있는 그 어떤 어려움도 기쁜 마음으로 감수하곤 했다.

다윗과 압살롬의 예에서 우리는 이러한 부모의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압살롬은 교묘하고도 악하게 아버지의 왕관을 노렸으며, 아버지의 잠자리를 더럽혔고, 아버지의 목숨을 빼앗으려 하였다. 그러나 다윗이 그토록 더러운 찬탈자를 진압하기 위해 그의 신복들을 파견시키려 할 때, 다윗은 더러운 찬탈자인 그의 아들을 가엾게 여겨 그의 장성들에게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삼하 18:5)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못된 아들이 시체가 되어 돌아오자, 다윗은 말할 수 없이 슬퍼하였다. 다윗은 위로받을 길이 없었다.


다윗의 슬픔이 너무나 강렬하였기 때문에 요압은 그의 군대에게 줄 영향을 두려워하여 다윗에게 이토록 위급한 시기에 그러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난하였다.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신복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장관들과 신복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삼하 19:5,6)


이러한 비난에 대하여 다윗은 아마도 다음과 같이 답하였으리라. "나는 단지 아버지의 복받쳐 오르는 마음을 토로하였을 뿐이네." 사실상 다음과 같은 탄식의 말은 한 경건한 아버지의 깊은 연민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롭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삼하 19:33).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압살롬은 그의 죄로 인해 죽었으며, 경건한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에 대해 이처럼 슬픈 언어로 애도하였다. 아들을 심히 걱정한 나머지, 다윗은 공적인 위험을 거의 간과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다윗의 군대가 전쟁에 나가 싸우고 있고 그 결과가 불확실한데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의 신복들에게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공적인 위험을 간과하지 않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마치 당신께서 공적인 위험을 간과하신 것처럼 보이실 지도 모를 상황아래서 죄인을 용서하는 모험을 감행하신다. 하나님의 죄인들에 대한 사랑은 제멋대로인 아들을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과 얼마나 닮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이야기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은 상황의 진실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깊고 성실한 의미를 가지며, 그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의미를 갖고 있다. 다윗의 탄식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는냐, 이스라엘이여…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8)라고 소리 높여 외치신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자의 진정한 애정을 엿볼 수 있으며, 징벌을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몹시도 마음 아파하시는 자의 죄인에 대한 진정한 애정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 다윗 왕의 눈물과 슬픔어린 탄식 속에 분명히 드러나는 아버지의 마음 가득한 애정을 보라! 다윗은 그가 지혜롭게 안전히 할 수만 있었다면 죄 많은 아들의 털끝 하나라도 다치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하나님은 징벌을 받아 마땅한 당신의 목숨을 구원코자 하신다.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인해 당신이 넘어졌을 때, 그리고 하나님의 군대의 전차 바퀴가 당신의 넘어진 몸 위로 달려야만 할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넘어짐을 애처로이 슬퍼하신다.


이러한 사랑은 모든 사람들에게 향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고 선언하고 있다. 예외는 없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인가! 그러나 죄인들에게 이러한 진리를 이해시키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당신은 이러한 진리를 깨달아 보려고 노력한 적이 있는가? 당신 스스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 본 적이 있는가? "세상의 아버지들이 자신의 아들에 대해 그런 것처럼,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행복에 대해 개인적으로 깊이 생각하실까? 나의 개인적인 구원을 위해 지칠 줄 모르는 관심 속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행복을 찾으실 만큼,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처럼 위대하다는 사실을 나는 믿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나에 대한 사랑이 대단한 것일까?" 사실 하나님은 그러하시다.


죄인들이 지닌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너무나 커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죄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다.


반복하건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의 사랑과 같다. 오랜 고통에도 참으시며, 탐욕스러운 도발에도 오래 인내하신다. 만약 여러분 중에서 죄 속에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죄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정확히 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나를 너그러이 대하시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죄 많은 반역자인 나를 당장에 짓뭉개 버릴 원수로만 생각지 않으실 수 있을까?"라고 외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자기 멋대로이며 악덕한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인내를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나 부모의 인내는 하나님의 죄인에 대한 인내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당신이 부모를 괴롭히는 사악한 어린이라고 생각해 보자. 너무나 사악해서 부모의 말을 따라본 적이 한 번도 없으며,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하였고, 언제나 부모를 박해하고 반대하고 천대하였다고 생각해 보자. 과연 당신의 이러한 행동을 참아줄 부모를 찾아볼 수 있겠는가? 아무도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러한 행동을 참아주신다!


여러분은 이러한 상황을 공정하게 바라보기를 바란다. 한 젊은 여자가 이 학교에(오벌린 대학) 입학하기를 원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런데 그녀는 언제나 부모에게 골칫거리였으며, 보모의 말에 순종해본 적이 없고,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린 적이 없다. 여러분은 이 젊은 여자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만약 모든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부모가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며 그녀의 행복을 원한다는 점을 여러분이 알았다면, 여러분은 그 부모의 영혼이 인간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경탄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처럼 부모를 괴롭히는 딸은 아마도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여러분은 즉각 흥분하여 "그녀를 모든 인간 사회로부터 추방하라! 태양의 빛 아래 그런 악녀가 숨쉴 장소는 없다!"고 외칠 것이다.


이제 여러분 스스로 이러한 비난을 자신에게 솔직하게 적용해 보기를 간청한다. 당신은 하나님에 대한 반대만을 일삼아 왔다. 당신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진실 된 마음으로 아주 조그만 일이라도 아직까지 홰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당신의 생명을 유지시켜주시고 계시며, 지옥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신다. 당신의 발이 죄악의 위험한 길목에서 헤매고 있을 때, 하나님은 당신의 발을 붙들고 계신다.


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들을 얼마나 오랫동안 하시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반복하여 악용해 왔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발로 짓밟아 버렸다. 하나님은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시 50:21)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잠잠히 침묵하실지라도, 하나님께서 잊어버리시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오랜 동안의 고통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을 때까지 인내한다.


하나님의 사랑의 겸손함에 주목하라.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지 살펴보라.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한 인격화이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는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 2:7)라고 전해진다. 예수님은 온순하고 마음이 겸손하신 분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의 겸손하심은 이처럼 지극하셨다. 무한하신 아버지의 겸손하심도 이에 못지 앓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원을 위해 얼마나 커다란 대가를 치르셨는지 생각해 보라. 당신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 라고 물어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를 죽음에 내어주기까지 포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돈이 아니라 사랑을 위하여 아들을 기꺼이 주셨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기 위해 산에 올라갔을 때, 그리고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따르겠다는 그의 결심을 보였을 때 그리고 필요하다면 그가 죽인 아들을 일으키실 하나님을 믿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창 22:16,17).


아브라함의 경우 그의 독자를 아끼지 않았다는 점이 그의 강점이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독자를 아끼지 않으셨으며, 기꺼이 독자를 제물로 내주셨다. 아브라함이 그의 독자를 제단으로 데리고 가서 칼을 들었을 때, 하나님의 천사가 그의 손을 잡고 진정한 제물을 대신할 양을 가리켰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의 독자를 내어 주셨을 때, 죄인들에 대한 정의의 요구로 인해 죄인을 대신할 제물이 되셨으며, 죄 없는 희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는 살해되었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피를 흘리셨으며, 괴로워하셨고, 기운이 다하셨고, 마침내 죽으셨다! 그 어떤 사랑이 이와 같을까?

우리처럼 이기적인 마음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아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친구들에게 복을 주시라고 얼마나 자주 하나님께 기도하는가? 우리의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매우 당연한 일이다. 이제 우리의 원수들을 위해 기도해야만 한다. 예수님은 그의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원수를 위해서도 기도하셨다. 만약 우리가 진심을 다해 가장 사악한 원들을 위해 기도한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그의 원수를 가장 사악한 원수들을 위해 죽으셨는지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당신은 "아, 내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실 것이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친구로 사랑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은 당신을 불쌍히 여기시어 사랑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의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사악한 무리들의 손에 독생자를 넘겨주시고 사악한 무리들로 하여금 독생자를 죽이게 하심으로써 바로 그 살해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렇게 하셨는지를 당신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실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마음 깊이 사랑하신다는 점을 당신에게 확신시켜 주고자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이 확신을 당신의 마음속에 강렬하게 인식시키고자 원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이 스스로 저지른 엄청난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혼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의 구원을 위해 독자를 포기하셨다는 점을 당신이 잊지 않기를 바라실 것이다.


다시금 반복하거니와 하나님의 사랑은 자발적인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진해서 하는 그런 것이다. 그러나 죄악에 빠진 인류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 사랑을 구하지 않았다. 이 세상은 무릎 꿇고 하나님께 간청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세상은 하나님께 강력히 반역하였으며 하나님의 권위로부터 도피하고자 사납게 몸부림쳤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불쌍히 여기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은 그들을 향해 분출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또한 인내하시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몇 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패로 인해 포기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고집 센 비신앙인들을 설득하려고 몇 번 기도하고 노력하다가 포기하곤 한다. 특히 역경을 만났을 때 그러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다. 죄악에 빠진 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인내하시는 사랑이며, 쉽게 소멸되지 않는 사랑이다. 아무리 많은 물로도 끌 수 없으며 그 어떤 홍수로도 삼킬 수 없는 사랑이다. 아,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들에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다. 만약 거룩하지 않았다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방법은 하나님의 통치를 위험하게 만드는 그런 방법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하여 심판의 벼락이 머리 위에까지 도달한 죄인들을 구원한다는 것은 심각하고도 어려운 일이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율법의 요구는 충족되어 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은 구원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 구원의 방법은 죄인들로 하여금 자신이 저지른 엄청난 죄의 책임을 나타내는 방법, 특히 죄의 중대한 사악함과 우주의 위대하신 주재자의 거룩함과 순수함을 표시하는 방법이어야만 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공의를 무너뜨리는 방법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하나님께서 율법의 집행을 재껴버리기 위해 오셔서 죄인들에게 자비의 문을 활짝 열어 죄인들을 초대하셨을 때, 커다란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아들의 희생으로 인하여 이 위험은 제거될 수 있었다. 이처럼 조심스러운 역사를 가져온 것은, 거룩함과 순수함이 함께 섞인 사랑이었다.


이 사랑은 하늘과 땅과 지옥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들이 읽을 수 있는 문자로 보여주셨다. 다가올 모든 세대의 모든 존재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영원한 바위에 문자를 새기셨다. 이 문자는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거룩한 율법을 얼마나 신성이 여기시는지를 보여준다. 죄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내어 주셨을 때, 하나님의 뜻은 명백히 드러날 수 있었다.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순수함을 증거 하셨다. 하나님은 단순히 좋은 사랑으로는 죄인들을 구원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또한 구원 사역이 하나님 나라의 안전성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셨다. 죄인들에 대한 사랑으로 인하여 하나님 왕국에 대한 하나님 사랑이 조금도 약화되지 않았다는 점을 하나님은 또한 보여주셨다. 죄인들의 구원 역사로 인하여 거룩한 자, 아직 죄악에 빠지지 않은 자들에게 들어갈 영광이 위험에 처하지 말아야 했다.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또한 깨어 열망하는 사랑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며, 죄인들에게 복을 주고자 하신다. 영혼들을 한없이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느꼈던 종교 부흥기의 그리스도인들을 여러분은 기억할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으며, 근심에 쌓였고,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다. 아마도 그들은 영혼들의 구원을 걱정하면서 거의 음식도 먹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 때문에 밤새 잠을 못 이루고 기도하셨는가?


예수님은 죄악에 빠진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으며, 영혼을 향한 짐은 예수님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표현한 다음과 같은 말은 수식어가 붙지 않은 평범한 말이었다. "내 짐에 대한 열심이 나를 삼키었도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예수님의 마음에 걱정과 근심을 안겨 주었으며, 예수님의 육신은 이 걱정과 근심으로 소진되었다. 예언자는 환상 중에서 예수님을 보았을 때 이러한 점을 예언하였다.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사52:14)


예수님은 서른이 되기도 전에 그 얼굴에 주름이 생겼으며 나이가 들어 보였다. "하나님의 집에 대한 열심이 예수님을 삼키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젊은 나이에 노인이 되어 버렸다. 죄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연민이 얼마나 깊었던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라.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12:50) 예수님은 미래를 예견하시면서 그의 마음에 무겁게 걸려있는 몇 달 몇 년 동안 고통의 세례에도 불구하고, 결코 예수님의 사랑은 멈칫멈칫하지 않았다.


당신은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가? 이러한 마음의 상태가 어떨지에 대해 당신의 경험으로써 알 수 있는가? 잃어버린 가련한 영혼들을 위한 깊은 사랑의 관심에 공감해 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경험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이 하나님과 함께 가련한 죄인들에 공감하고, 죄인들을 위해 당신의 삶과 영혼을 쏟아 놓을 때, 당신은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이며,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또한 동정으로 가득하다. 그 깊은 동정 아래서 하나님은 크게 감동받곤 하신다. 하나님은 감정의 심연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신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31:20).


하나님은 또한 "에브라임의 죄악으로 나의 마음이 아프구나"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바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동정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러한 동정을 갖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죄인들을 이토록 오랫동안 놓아두실 수가 있겠는가? 왜 오래 전에 모든 죄인들을 지옥으로 휩쓸어 버리지 않으셨겠는가?


이제 이러한 사랑의 계획 속에서 하나님의 목표 혹은 목적에 대해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목적은 다음과 같다.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스토(Storrs)와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사악한 자들의 소멸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잘못되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들은 "멸망"은 "소멸"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 달성될 목적은 죄인들을 소멸로부터 구원하고 죄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이러한 믿음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으로부터 발생되었다는 점을 나는 발견하였다.


그들은 성경의 모든 구절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되어져야 하며, "멸망"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소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 주장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먼저 두 번째 주장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멸망"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소멸"이 아니다. 어떤 것이 멸망한다고 할 때, 그것은 형태나 존재 양식의 변화를 의미할 뿐이지,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는 스토의 주장이 설령 옳다고 하더라도, 스토는 자신의 주장을 적용하는 데에 잘못을 범하고 있다. 한편, 이 성경 구절에서 멸망은 영생과 대비되어 사용되고 있다. 영생은 단순히 영원히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기에서의 영생은 영원한 복락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영생의 반대는 영원한 불행이어야만 한다.


더군다나, 만약 사악한 자의 소멸이 하나님의 법칙의 위반에 대한 처벌이 갖는 목적이라면, 하나님은 이러한 방식으로 죄인들을 처벌하셨을 것이며, 하나님은 일순간에 모든 죄인들을 소멸시키시고, "그렇게 되어라"라는 한 마디 말씀을 통해 거룩한 존재들로만 구성된 다른 세상을 만드셨을 것이다. 모든 것이 쉽고 그리고 순식간에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소멸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는지를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인들을 하나님과 거룩함에 대한 교제와 조화로 되돌려 놓기 위한 것, 죄인들을 다시금 하나님의 거대한 가정의 순종하는 아들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위대하고 좋은 아버지를 향해 죄인들의 도덕적 태도를 변화시키는 수단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사람들의 눈앞에 드러내 보이고자 하셨던 계시였다. 그리스도는 사람으로서 살고, 노동하고, 말하고, 사람들 가운데서 행동하시기 위하여 썩어 없어질 육신으로 오셨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육신을 통해 하나님의 진정한 성품을 인간들에게 드러내 보이실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불리운다. 말들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생각을 나타내듯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유일한 목적은 아니지만 그러나 여러 가지 목적 중에서 위대한 하나였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을 우리의 눈에 들어나 보이게 하시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모든 위대한 도덕적 속성들을 이해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육신으로 오셨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와 함께 살도록 하셨다. 여러분 중에는 목수로 일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이웃들 속에서 목수로서 일하셨으며 사람들에게 목수는 어떠해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스도는 젊은 시절에 사람의 아들로서 일했으며 충실한 아들은 어떠해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나서 그리스도는 공생애를 시작하셨으며 사람은 어떠해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 주셨다. 이 모든 측면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하나의 모범으로서 우리에게 진정한 성품을 펼쳐 보이셨으며, 진정한 하나님의 예증을 보이셨다. 사람들 사이에서 머무르시면서 그리스도는 최대한 많은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다.


성육신의 또 하나의 위대한 목적은, 하나님을 드러내 보이심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를 새롭게 하려는 것이었다. 죄악은 그 자체로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신을 가져온다. 그리고 죄인이 구원되기 전에 먼저 이러한 의심과 불신이 청소되어야 한다. 적개심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미워하는 상대방의 나쁜 점을 믿음으로써 자신의 적개심을 정당화시키려고 노력한다. 원인 없는 적개심, 잘못된 적개심이라 할지라도, 적개심은 의심과 중상모략으로 이어진다. 나쁜 짓을 행한다는 의식 때문에 편치 않은 마음은 자기-정당화에 의해 위안을 얻으려 한다. 그리고 이 위안을 얻기 위해, 그가 부정하게 해를 끼친 사람들의 악을 생각하고 믿도록 그의 마음은 강요당한다.


전 인류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는 이와 마찬가지이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인간들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으며, 고로 아무런 이유 없이 그들이 미워하는 하나님을 탄핵하기 위한 어떤 수단들을 강구할 필연성에로 그들은 밀쳐졌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 아래서 이러한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녹일, 하나님으로부터의 계시를 죄인들은 필요로 한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다른 방법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속죄하셔야 했으며, 이로써 죄인들의 죄악은 자유롭게 용서될 수 있었다. 이 일을 그리스도께서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인간의 특성과 하나님의 성품이 함께 있었다. 인간의 육체로 계셨던 하나님은 이러한 분쟁으로부터 발생되는 모든 요구를 감당하셨다.


우리의 입장에서, 믿음은 구원받기 위한 커다란 조건이다. 믿음이란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련돼 있다는 점,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을 실제적으로 포함하여, 구원의 상황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점 등이 세월이 흐를수록 나에게 보다 분명해진다.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 "내가 너를 죽음으로부터 살릴 수 있으며, 너의 병을 고쳐줄 수 있으며, 너에게서 귀신을 쫓아낼 수 있으며, 너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다고 믿느냐? 너는 이 모든 것을 믿느냐? 그렇다면 구원하는 나의 힘에 네 자신을 던지라." 믿음의 본질은 그리스도를 진정한 하나님으로 믿고 그리스도를 그와 같은 분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을 신뢰한다. 믿는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과 계획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은, 이를 진리로 인정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셨다는 점을 믿으며,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을 주셨으며, 나로 하여금 죽지 않고 살도록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점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영혼들은 각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위탁한다. 아무리 완전한 순종도 지나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온 마음을 다하여 우리는 자신을 그리스도께 헌신하여 그리스도로 하여금 자신을 사용하고 지배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성화되며 구원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위선자로 취급한다.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자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위선자로 취급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자신은 우리의 친구하고 고백하신 말씀을 그들은 신뢰하지 않으며, 실제로 그리스도는 그들의 친구가 아니라고 느낀다.

바로 이러한 점에 대해 당신을 시험해 보자.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마치 당신 혼자만이 죄인인 것처럼 바로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는 점을 깨달아 본 적이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당신 혼자만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는 점을 깨닫고 그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본 적이 있는가? 바로 이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약속과 자비가 당신 자신의 영혼에 적용된다는 점을 믿는 것이다. 믿음은 이기심의 완전한 포기를 의미한다. 이기심의 포기는 하나님께 대한 자기 헌신을 포함한다.


우리의 믿음의 또 다른 요소에 주목해야 한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과거 행적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계시된 그리스도와의 모든 관계를 믿는 것이다. 종종 구원을 믿지 않는 죄인들도 과거를 믿곤 한다. 그들은 말한다. "그리스도가 언젠가 살았다가 죽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수천 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그는 부활한 다음에 하늘나라로 올라가 버렸을 뿐이다." 여기에서 그들의 믿음은 끝난다. 이러한 생각에는 구원에 관한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아무런 신선한 것도, 새로운 것도 없다. 마치 고대 역사의 한 단편처럼 취급될 뿐이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가까운 곳, 훨씬 가까운 곳에 관한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현재의 그리스도, 지금 살아있는 구세주,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항상 중재하시는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리스도의 중재로 인해 지금까지 지옥에 떨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당신은 깨달아 본 적이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말라버린 무화과나무의 예화를 통해 이를 보여주신다.


"아직 그를 잘라내지 말아라. 그를 놔두어라. 내가 복음의 소리를 통해서 다시 한번 그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해 보겠다. 아마도 그는 회개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면, 그를 잘라내어라. 그러나 그 이전에 잘라내면 안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 당신들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셨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는 아직도 당신을 위해 기도하신다. 그리고 아직도 당신을 지옥에 빠지지 않도록 붙들고 계신다. 당신은 어제 저녁 잠자리에 들어 달콤하게 잤다. 그러나 당신이 지옥으로 곧바로 떨어지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그리스도의 기도 때문이다. 당신의 마음에서 모든 기도가 사라졌을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소리 높여 외치신다. "아, 한번만 더 그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내가 그를 아버지 집으로 인도하겠습니다. 만약 실패하면 그 때 가서 자르십시오!"


다시 한번 반복하건대, 진정한 믿음은 과거의 용서뿐만 아니라 미래의 은총에까지 관련된다. 믿음의 진정한 목소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은총은 나에게 충족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덧붙이는 말


1. 믿음은 구원의 자연스러운 조건이다. 이 말은 믿음이 본질적이고 불가피한 조건이라는 의미이다.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에 관하여 그리고 구원의 제공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을 신뢰하지 않을 것 같으면, 당신이 행하는 모든 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다. 앞에서 이것을 말하고자 하였다.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포기하신 것은 모든 사람들을 무조건적으로 구원하시기 위해서도 아니요, 사회적으로 사랑스러운 사람이나 도덕적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오직 그를 믿는 바로 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누가 구원되고 구원되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최종적인 답변이다.


2. 당신의 이기심은 당신으로 하여금 이 진리를 올바로 바라보기 어렵게 만든다. 당신은 당신의 원수를 사랑해 본적이 없으며, 원수를 위해 당신의 편안함이나 즐거움을 희생해 본적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셨다. 그러므로 당신이 하나님의 자비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어려운 일이다. 하나님의 자비는 당신의 이기심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위해 기도하신다. 이제까지 기도하셨으며 지금도 기도하고 계신다. 그러나 당신은 이러한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롐을 바라보시고 얼마나 슬피 우셨는가를 생각해 보라. 그리스도는 그들 가운데 계셨으며 자신에 대한 그들의 적개심을 알고 계셨다. 그리스도는 예루살렘 군중들이 흥분하여 자신을 죽이려고 칼을 갈고 있음을 보셨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마음은 동정과 연민에 휩싸였다. 그리스도는 그들이 얼마나 자신을 미워하는지 알고 계셨지만, 이렇게 외치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눅 13:34) 다른 복음서 저자는 "그는 예루살렘을 보고 슬피 우셨다"고 기록하였다.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의 엄청난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양 그것을 잊어버리고 계시는 듯 하셨다.

그러나 어떻게 그리스도의 그러한 마음 상태를 당신이 이해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이기심이 너무나 강하고 지배적이어서 절대로 당신의 적에 대해서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지닐 수 없다. 그리고 당신의 적개심과 이기심을 버리라는 말을 들을 때, 당신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항변한다. 그러므로 당신은 믿음의 조건을 지성적으로 충족시킬 수 없는 불쌍한 불구자이다. 당신이 믿음을 지니기가 어려운 것은 유명한 거짓말쟁이로 하여금 진실 된 말을 믿게 만들기가 어려운 것과 같다. 그들은 당신이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며, 더욱이 그들의 마음과 양심은 건전한 도덕적 진실을 용납하지 않는다. 도둑은 언제나 도심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을 의심한다. 마찬가지 원리로, 사악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실성과 선하심을 신뢰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아마도 이론적으로는 진리를 수용할 수 있겠지만, 사악한 사람은 여전히 그 진리를 믿으려 하지 않으며, 그 진리를 실제로 자신의 마음에 수용하려 하지도 않는다.

이제 돌이켜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구원하시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하셨는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얼마나 많은 말씀을 하셨는가. 그러나 당신의 마음은 아직도 불신으로 인해 납덩이처럼 무겁다! 당신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무슨 일을 더 하셔야 하는가? 죄인들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것이 나에 대한 애정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내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이루어졌다는 점을 믿을 수가 없다." 이제 하나님은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 사랑을 믿게 하기 위해 무엇을 하실 수 있겠는가?


3.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당신에게 평화를 준다. 이에 관해서 당신은 의심할 필요가 없으며 사실상 전혀 의심할 수조차 없다.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당신 개인을 위해 보내셨다는 점을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이 사실을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를 세워서 당신에게 보내셨고 당신을 사악함에서 구출하여 복 주시고자 하신다. 그러므로 지체하지 말라. 당신 영혼의 모든 에너지를 이 일에 당장 쏟아 부어라.


4. 죄인들은 주어진 그리스도와 받아들인 그리스도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주어진 그리스도와 받아들인 그리스도는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커다란 사랑으로 선물을 주셨다. 당신은 그 선물을 받았는가? 당신이 받기 전까지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대로 받는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동안 예수님이 당신의 구원을 위해 당신에게 주어졌다는 점을 당신은 알고 있다. 당신은 이를 심각히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말할 수 없이 귀한 선물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한 마디라도 감사해 보았는가? 당신은 감사의 찬송을 하나님 앞에 드린 적이 있는가? 감사한 마음이 없는 당신의 모습이 당신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가? 만약 당신이 창피스럽게 생각한다면, 당신의 구세주 눈에는 당신이 어떻게 보이겠는가?

당신이 여기 앉아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집으로 들어오셨다고 생각해 보자. 당신은 그의 머리 뒤에 빛나는 영광의 후광으로 인해, 그가 당신이 이제까지 거부하던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당신에게 손과 발의 못 자국을 보여주시고 나서 창으로 찔린 옆구리 상처 자국을 보여 주신다. 그러고는 당신 옆으로 와서 않으신다. 그는 부드러운 연민의 미소를 띄우시고서 당신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보신다.


"이 모든 것이 너에게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냐? 너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느냐?"

"네"

"내가 네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느냐?"

"네"

"내가 너의 믿음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느냐?"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네 자신을 나에게 맡기고, 나의 말과 은총을 믿어서 구원받고 그러고나서 나의 일에 네 자신을 헌신하지 않겠느냐?"

당신은 대답한다.

"아니오,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나는 너를 구원하기 위해 왔단다. 이 문제는 오랫동안 토론되어 왔었지. 그리고 이제는 너의 마지막 결정이 무엇인지를 솔직하게 내게 말해줘야 할 시각이란다. 우리는 이제 이 문제를 매듭지어야만 하거든. 너의 마지막 결정이 무엇이든지간에 나는 너의 결정을 받아들일 것이고, 그에 따라 심판이 이루어질 것이란다."

이제 이러한 상황에서 당신은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당신은 "지금은 그냥 지나 가세요"라고 말할 것인가?

"그러나 만약 내가 지금 지나가면, 다시는 네게 축복하기 위해 돌아올 수 없단다. 나는 더 이상 너를 위해 기도할 수 없단다. 너를 구원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다는 점을 너는 알고 있지 않니? 나를 향한 적개심이 네 안에 있다는 점을 네게 보여주기 위해 나는 노력했지. 그리고 나에 대한 적개심을 던져 버리고 너의 마음을 나에게 맡기라고 네게 간청하지 않았니? 지금이 마지막 자비의 시각인데도 너는 나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겠니?"


죄인들이여, 당신은 이 간청을 이해할 수 있는가? 의심할 여지없이 당신은 이해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얻고자 하신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당신을 설득하고 계신다. 당신은 설득당할 것인가? 지금 당신은 중대한 결정을 내릴 것인가? 만약 현재의 결정이 최종적인 결정이라면, 당신을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지금의 결정이 아마도 최종의 결정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신중하게 결정하라! 인내가 더 이상 미덕일 수 없는 시점이 있다.


그 시점을 넘어서면 하나님조차도 인내하실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시점을 넘어서면 미덕이 인내를 금지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령의 섭리라는 점을 기억하라. 그리고 만약 당신이 고의적으로 성령에 대하여 범죄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당신을 용서하시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하라.


당신은 "성령은 지금 내 안에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당신의 말에 조심 하라! 당신의 죄를 의식하는데 있어서 당신 마음 이외의 영향은 전혀 없었는가? 어떤 이유에서건 당신은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당신의 죄를 보게 되지 않았는가?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에게 당신의 죄를 용서받기를 원하게 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지금은 당신의 차례이다. 당신은 지금이 마지막 시각이라고 생각해야만 한다. 당신은 지금 당장 "오! 하나님 나의 마음을 가져가십시오. 나의 마음을 모두 가져가셔서 영원히 주님의 것으로 봉하십시오!"라고 외쳐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