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피니

<진정한 부흥>을 읽고

천국 도서관장 2009. 7. 14. 15:34

<진정한 부흥>을 읽고


     



부흥이란 무엇인가? 교회에 사람 수가 늘어나는 것인가? 며칠간 열광하는 것인가? 아니면 연례행사인가? 어렸을 때의 부흥회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던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필자는 부흥하면 위의 이미지가 먼저 떠올랐다. 그래서 부흥이 부정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정말 부흥이 그렇다면 얼마나 실망스러운 것인가? 그러나 부흥은 영이 다시 사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기뻤던가! 역시 그런 천박한 것이 부흥이 아니어서 필자는 얼마나 다행으로 여겼는지 모른다. 그리고 “진정한 부흥”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부흥에 관해 알게 되어 참 감사하게 생각한다.

사실, 이 책은 내게 좀 위험해 보이기도 했다. 부흥이 수학공식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자신 있게 법칙이 있는 양 주장하는가? 그리고 사람의 역할이 상상 밖으로 강조된 데 대하여 정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니, 불경하기까지 했다. 감히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경한 것은 필자였다. 하나님의 세계는 정말 광대했다. 그리고 법칙이 있다. 인간이 다 알 수는 없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다 알기를 원하신다. 그것을 모르는 것은 엄청난 죄이다.

이 글에서 진정한 부흥이 무엇이고, 언제, 어떻게 일어나며, 부흥의 최대의 적 죄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며, 그리고 부흥이 어떻게 소멸되며, 어떻게 해야 유지되는지 살피겠다. 필자는 이를 위해 ‘진정한 부흥’의 1, 2, 3, 15장을 중심으로 본론의 각론에 맞추어 편집하여 요약했다.  



     

1. 진정한 부흥이란 무엇인가?

유대인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을 떠났다가 하나님께서 영과 섭리로 그들을 깨우쳐 주시면 죄를 각성하고 돌이키어 신앙이 회복(부흥)이 되는 예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타락하였다가 하나님의 영과 섭리로 부흥이 일어나는 것도 보게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부흥의 원칙을 알 수가 있다. 이 원칙들이 지켜지면 부흥은 일어나고 지속되는 것이다. 그러나 부흥을 체험한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교회는 너무나 원칙이 결여되어, 목적의식이 흔들려 세상적 감정과 흥분에 빠져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극심해 질 때 다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어 부흥이 시작된다. 

이처럼 ‘신앙의 부흥’은 타락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영적으로 너무나 게으르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신앙에서 떠나게 하면, 또 복음의 영향력을 반대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인간에게 반대하는 장애물들을 제거할 만큼 높아질 때까지 각성을 일으켜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신앙을 진척시키는 것은 주로 변화 없이, 점진적으로, 흥분(excitement)도 없이 경건치 않은 자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각성할 만큼 흔들리지 않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면 가능할지 모르나, 너무나 많은 방해 요소와 교회가 빛으로 서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방법으로는 신앙의 성장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부흥만이 신앙의 타락을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 부흥은 그리스도인들이 첫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며 그 영향으로 죄인들이 각성되어 일어나서 하나님께로 회심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흥이 일어나면 교회가 죄를 깨닫게 된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회개하고 그들의 굳고 냉랭한 마음을 버리고 잃었던 믿음을 되찾게 된다. 그리고 영혼에 대한 부드러우면서도 불타는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되어 온 세상이 구원받기를 갈망하게 된다. 이러한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죄인들도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죄를 버리고 구원받아 새 사람이 된다. 부흥이 일어나면 매춘부, 술주정뱅이, 깡패 등 각종의 타락한 사람들이 각성되어 회심한다. 인간 중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 유순하게 되어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보이게 된다.



2. 부흥은 언제 필요하고, 언제 기대되는가?

그러면 이렇게 아름다운 부흥이 언제 일어나는가? 앞서 유대인의 예를 들어 신앙의 부흥은 그들이 가장 타락한 때라고 했는데 그 구체적인 시기를 살펴보자. 첫째, 그리스도인들 상호간에 형제의 사랑과 신앙적 신뢰가 결여될 때 부흥이 필요하다. 이러한 때야 말로 하나님께 그의 일을 부흥케 하옵시고라는 간구가 있어야 한다. 둘째, 신앙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 알력과 시기와 서로 헐뜯는 것이 있으면 부흥이 크게 필요하다. 셋째, 교회에 세상적 기운이 돌아 쾌락을 추구할 때이다. 넷째, 교회 중에 크고 심각한 죄들을 범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대야말로 교회가 각성해서 신앙의 부흥을 위하여 하나님께 울부짖을 때이다. 다섯째, 교회 안에 논쟁의 분위기가 있으면 부흥이 필요하다. 논쟁의 정신이 넘치는 곳에 신앙의 부흥은 있을 수 없다. 여섯째, 악한 사람들이 교회를 이기고 교인들을 욕할 때이다. 일곱 번째, 죄인들이 무관심한 상태에서 어리석게 지옥으로 가는데도 교회가 무관심하면 교회가 깨어나야 한다.

이렇게 타락한 시기에 무엇으로 신앙을 회복할 수 있는가! 부흥밖에는 없다. 다른 무엇으로도 되지 않는다. 그러면 부흥의 필요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이 일어나면 다음과 같은 것이 해결된다. 먼저, 다른 어떤 것도 아니고 신앙의 부흥만이 현재 교회를 감싸고 있는 비난을 깨끗이 말소 시킬 수 있으며 신앙을 본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다.부흥 없이 사람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일면을 바꿔놓을 수 있으나, 결국 사태만 악화시켜 놓을 수밖에 없다. 둘째, 교인들 간에 그리스도적 사랑과 신뢰를 회복하는 방법은 달리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다른 것으로 회복하면 절대 안 된다. 셋째, 그와 같은 때에 신앙의 부흥은 하나님의 심판을 교회로부터 돌리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이 부흥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길이 없다. 그리고 세상은 그 책임을 우리에게 돌릴 것이다. 넷째, 신앙의 부흥 외에는 아무것도 교회를 전멸에서 보존시킬 수 없다. 다섯째, 신앙의 부흥만이 은혜의 수단으로 인하여 ‘경건치 않은 사람들’에게 임할 큰 재앙을 방지할 수 있다. 이 사람들은 복음을 듣지 못했던 사람들보다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다. 다섯째, 다른 방법으로는 교회가 성화되고, 은혜 안에서 성장하여, 천국에 알맞게 변화될 수 없다.

  앞서 신앙의 부흥이 필요한 때와 부흥의 중요성에 대해서 살폈다. 이제 신앙의 부흥이 기대되는 때는 언제인가를 알아보자. 첫째, 하나님의 섭리가 부흥이 가까웠다는 것을 알려주는 때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지시가 어떤 때는 너무나 분명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계시처럼 된다. 둘째 악인들의 악행이 그리스도인들을 슬프게 하며 겸손케 하며 또 연약하게 할 때이다. 그들이 죄인들을 비난하거나 조롱하는 대신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게 될 때 부흥을 기대해도 좋다. 셋째, 부흥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흥을 위하여 기도하는 마음을 가질 때 기대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기도할 때, 마음이 부흥을 위하여 작정이나 된 것처럼 기도할 때이다. 이들은 부흥의 결핍을 깨닫고 기도하는 것이다. 놀라운 기도의 영이 임하면 사단이 맹렬히 부흥을 반대하나 주님의 영도 갈수록 기준을 높이어, 결국엔 구원을 허락하신다. 넷째, 목회자의 관심이 특별한 제목으로 특별히 기울어져서, 그의 설교와 모든 노력이 죄인들의 회심을 위하여 특별히 목적 될 때이다. 다섯째, 죄인들이 죄를 서로 자백할 때 시작될 수 있다. 여섯째, 그리스도인들이 부흥을 지속시키기에 필요한 희생을 각오할 때 부흥은 기대될 수 있다. 그들은 그일을 진척시키기 위하여 그들의 감정, 그들의 직장, 그들의 시간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목회자들은 그들의 힘을 내놓고 또 건강과 생명을 해칠 각오가 되어야 한다. 목회자들은 회개하지 아니한 자들을 분명하고도 충실하게 다룸으로 이들의 마음이 상할 것도, 그 일에 동조하지 않은 많은 교인들의 마음이 상할 것도, 각오해야만 한다. 교인들 역시 그 희생이 무엇이든 부흥을 가져야 되겠다는 각오가 되어야 한다. 일정한 집회 이상은 참여 못하겠다거나, 상업상 약속이나, 돈 버는데 지장 받지 않은 범주 내에서 부흥을 원한다고 하면 안 된다. 그런 사람들은 부흥을 절대 누리지 못한다. 일곱째, 목회자들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도구들을 사용하시어 부흥을 일으키시도록 맡길 각오가 될 때 부흥은 기대할 수 있다. 때때로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부흥을 주관할 수 없거나, 그들의 매개가 부흥을 일으키는 데에 현저하게 나타나지 못하면, 부흥을 원하지 않는다. 여덟 번째, 엄격히 말해서 지금까지 언급한 일들이 발생한다면, 발생한 만큼 부흥이 이미 시작된 것이다. 사실상 부흥은 언제나 필요할 때 기대되어야 한다. 우리가 부흥될 필요가 있으면, 부흥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의무이면 그것은 가능하다. 그런고로 우리는 부흥될 것을 결정하고, 제자들을 만드는 일에는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의지하여 성공하리라는 확실한 기대를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을 부흥시키고 또 죄인들을 회심시키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다 해야 할 것이다. 



3. 부흥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부흥은 기적이 아니다. 부흥에서는 자연법칙이 무시되거나 중단되지 않고, 물질과 정신의 모든 법칙이 작용하며 결코 무시되거나 중단되지 않기 때문이다. 부흥은 자연의 힘을 초월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적이 아니다. 부흥은 자연의 힘을 옳게 사용한 것에만 존재한다. 사람이 신앙적으로 되도 과거에 없었던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다만 이전과는 다르게 쓰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는 것이다. 부흥은 결코 기적도 아니며 기적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 부흥은 당면한 수단을 옳게 사용하는 것이다. 부흥은 적절한 수단을 옳게 사용한 결과이다. 하나님이 부흥을 일으키기 위해 사용하시는 수단은 의심할 바 없이 부흥을 일으킬 수 있는 자연적인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이 없이는 부흥을 일으키지 못한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영향이나 매개가 있어야 한다. 부흥도 마찬가지다. 즉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영향과 매개이다. 따라서 밀알이 땅에 떨어져 열매 맺는 것은 적절한 수단(하나님의 영향과 매개)을 사용했기 때문인 것처럼, 부흥도 적절한 수단을 사용한 결과로 생기는 것이다. 물론 신앙은 원인과 결과의 범주에 속해 있지 않다. 그러나 부흥이 수단에 의하여 일어나지 않을 지라도 그 때(3에서 다루었음)가 있으며 곡물이 원인의 결과인 것처럼 부흥도 못지않게 자연적이고 확실하게 그 때의 결과일 수 있다. 그런데 신앙의 촉진이 하나님의 권능에 속해 있는 너무나 신비스러운 제목이기 때문에, 수단과 결과 사이에는 아무런 자연적 연관도 없다고 교회가 설득된다면, 결코 부흥을 누리지 못한다. 지금까지 부흥의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저들을 구원할 것을 꿈꾸며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수많은 영혼이 지옥으로 보낸 것이 그 증거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 수단을 살펴보자. 부흥을 진행시키는 데는 세 가지의 매개와 한 가지 도구가 쓰인다. 세 가지 매개는 '하나님', '진리를 마음에 새겨주는 사람', '죄인 자신'이다. 부흥의 도구는 진리이다. 매개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하나님의 매개는 이중적으로, 그의 ‘섭리’와 ‘성령’에 의해서이다. 먼저 하나님은 그의 ‘섭리적 통치’에 의하여 죄인의 마음과 진리가 연결되도록 일들을 조성하신다. 하나님은 죄인을 그의 귀나 눈이 진리에 접촉될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하신다. 즉 기후, 사람들의 건강, 그 밖의 환경 등 모든 것 하나하나가 진리의 작용이 가장 효과적으로 일어날 수 있도록 조성하신다. 꼭 필요한 목회자를 보내시고, 어떤 특별한 개인을 위하여 어떤 특별한 진리를 그 개인이 들을 준비가 된 때 그것을 듣게 하신다. 그리고 ‘성령’에 의해 그 특수한 매개로 작용하신다. 하나님은 각 죄인의 모든 과거와 상태를 너무나 잘 아시며 그의 마음에 단도직입적으로 접근하시어 그 특별한 경우에 가장 알맞은 진리를 택하신 다음, 거룩한 능력으로 사로잡으신다. 성령님은 인간에게 진리를 분명히 나타내시어, 죄를 녹여 주시는 용광로와 같은 빛으로 그 영혼에게 퍼부어 주심으로 인간은 거절하지 못하고 그 진리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순종하여 구원을 받게 된다. 둘째 사람도 매개로 사용된다. 설교자는 사역에 있어 도덕적 매개이다. 그래서 그는 진리를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그는 수동적 도구가 아니라 죄인들의 회심을 촉진하는 데에 자발적이다.(느헤미야처럼) 셋째 죄인 자신의 매개, 죄인의 회심은 진리를 순종하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죄인이라는 매개가 없으면 회심이 일어날 수 없다. 회심은 죄인이 옳게 행동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죄인은 하나님의 매개와 사람의 매개에 의해서 영향을 받아 회심에 이르게 된다.



4. 부흥의 최대 걸림돌-죄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먼저 당신이 당신의 마음의 묵은 땅을 기경할 뜻이 있다면 먼저 당신의 마음을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묵은 땅이란 당신이 지은 죄라는 것을 알 것이다. 당신이 몸소 지은 죄들을 하나씩  하나씩 들추어 보라. 당신이 과거의 생활을 힐 끗 본 다음 죄로 가득 찬 것에 동의를 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 총괄적인 자백을 하여 용서를 빌라는 말이 아니다. 당신은 죄를 하나씩 다루어야만 한다. 당신의 죄를 조목조목 다룰 때 연필과 종이를 갖고 생각나는 대로 쓰면 좋을 것이다. 당신이 죄를 한 번에 하나씩 지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왕 죄를 해결하고자 한 이상 하나씩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죄는 다음의 두 가지 종류로 나누어진다.

        

1)부작위 죄

첫째, 감사치 않은 죄.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았지만 그에 대하여 결코 감사치 않았던 경우들을 전부 적어야 한다. 이렇게 자백을 하면 암시의 법칙에 의하여, 다른 죄들이 또 생각날 것이다. 그것들도 포함시켜야 한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사랑 부족죄. 당신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 죄를 살펴야 한다. 당신의 아내, 남편, 자녀에 대해 사랑이 식어진 것을 알면 당신은 무척 놀라고 슬플 것이 아닌가! 셋째, 성경 소흘죄. 당신이 몇주, 몇 달씩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못했다면 자백하라. 또 읽었다고 해도 읽은 내용이 무엇인지 말할 수조차 없는 식으로 읽은 것도 자백하라. 넷째 불신죄. 하나님의 명백한 약속과 선포를 당신이 믿지 않는다는 것을 실제로 진리의 하나님을 거짓말의 하나님으로 고소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한 것을 믿는가? 응답받기를 기대하는가? 다섯째, 기도 소흘죄. 은밀한 기도, 가정 기도, 기도회 소흘이 한 때는 없는가? 하나님만 슬프게 하는 기도는 하지 않았는가? 여섯째, 은혜의 수단에 대한 소흘죄. 사소한 핑계로 모임에 빠지며, 영적 기쁨을 잃었기 때문에 구원을 소흘이 하거나 멀리 하지 않았는가? 일곱째, 당신이 하나님의 의무를 행하는 태도에서의 죄. 느낌 부족. 믿음 부족, 세상적인 마음으로 인해 하나님이 당시의 기도를 들어주셔야 할 이유를 못 느끼는 것을 아는가? 여덟째, 친지의 영혼에 대한 사랑 결핍죄. 친구나 친척들이 지옥에 가는 데 수수방관하고 있지 않은가? 아홉째, 이교도에 대한 무관심죄. 당신은 저들이 구원받는 것에 관해 얼마나 원하는지 측량해 보라. 열 번째, 가족에 대한 의무감 소흘죄. 가족의 영적 상태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열한 번째, 사회적 의무감 소흘죄. 열두 번째, 생활에 대한 경계심 소흘죄. 당신은 행동을 경계하지 않아 하나님, 교회, 세상 앞에 죄를 지은 것은 없는가? 열세 번째, 형제를 보살피지 못한 죄. 형제를 보살핀다는 약속을 얼마나 어기었나! 형제의 심령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열네 번째, 자기 부인(否認) 소흘죄.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부인하는 일만 아니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각오가 되어있다. 이것이 당신 마음이라면 회개하라.



2)작위의 죄

첫째, 세속적인 마음을 가진 죄. 재산 불리는 재미, 욕심, 야망 등. 둘째, 교만죄. 허영은 교만의 특별형태이다. 당신이 복장에서 용모에서 허영을 나타낸 적이 얼마나 많은가?(찰스 피니 자서전-어느 여인은 자신의 장신구가 거듭남을 막았다. 쿠르트 코흐의 <줄루족에 임한 하나님>에서 엘로는 자기의 복장에 대해 회개하고 거듭났다)모든 사람이 장님이라도 당신은 용모를 꾸미겠는가? 셋째, 시기죄. 어떤 점에 있어서 당신보다 훌륭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시기한 경우를 살펴보라. 넷째, 흠잡는 죄. 당신이 쓰라린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전혀 사랑이 결여된 태도로 말했던 경우이다. 다섯째, 비방죄. 교인이나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등 뒤에서, 불필요하게 좋은 이유 없이 말한 때이다. 여섯째, 경솔죄. 당신이 이 세상의 왕 앞에서도 감히 경박하게 행동하지 못했을 텐데,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나 자주 경박하게 행동하였는가? 일곱째, 거짓말죄. 거짓말은 무엇인가? 이기적인 이유 때문에 의도적으로 속이는 것은 어떤 종류이든 거짓말이다. 여덟째, 당신이 어떤 사람을 대할 때 당신에게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경우를 생각하라. 아홉 번째, 위선죄. 당신이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백하는 것을 예를 들어보자.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 것을 위하여 기도하한 예들을 기록하라. 그 증거는, 당신이 기도를 끝냈을 땐 무엇을 기도하였는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열 번째, 도둑질. 시간을 잘못 사용하여 하나님이 그를 봉사하며, 또 영혼을 구하라고 주신 시간들을 쓸데없는 오락이나 어리석은 잡담을 하면서, 소설을 읽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허비한 예들을 생각하라. 열한 번째, 화내는 죄. 열두 번째. 다른 사람이 사용되는 것을 방해한 죄. 다른 사람의 영향력을 암시적으로 약화시켜, 당신 자신의 영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빼앗은 것은 물론 다른 사람의 손들을 묶어 버렸다. 또 남의 시간을 빼앗은 죄도 회개하라.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쳤으면 가서 자백하고, 해 받은 사람이 너무 멀리 살면 편지를 써 진실한 마음으로 자백하고 우송하라.

이 모든 것을 철저히 해결하라. 지금 그렇게 하라. 뒤로 미루지 말라. 연기할수록 어려워지는 법이다. 사람에게 지은 죄는 사람에게 자백하고, 인간에게 지은 죄는 인간에게 자백하라. 당신의 마음에서, 성질에서 잘못된 것은 발견하면 세부적으로 고칠 결심을 해야 한다. 깊은 회개의 역사와 완전한 자백과 하나님 앞에 깨어지는 일이 있게 하라. 그리하면 당신도 육체가 감당할 만큼의 많은 기도의 영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에 영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을 살펴보기 위하여 고통을 감수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요, 그 결과 그들의 마음을 이와 같이 완전히 깨뜨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5. 부흥은 어떻게 소멸되는가?

부흥은 하나님이 일이기 때문에 결코 중단될 수 없는가? 전혀 그렇지가 않다. 농부가 밀을 수확하기 위해 수단을 사용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부흥을 위해 수단을 사용하신다. 따라서 부흥은 밀밭 못지않게 해를 받을 수 있다. 그럼 무엇이 부흥의 방해하고 소멸시키는가? 그 구체적인 방해요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부흥은 그 부흥이 끝날 것이라고 교회가 믿을 때 언제나 중지된다. 교인들이 하나님이 도구이기 때문에, 그것이 제 기능을 못하는 부흥이 중단되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이 부흥의 중지를 동의하면 그 부흥은 끝난다. 부흥이 쇠퇴하여 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그것은 부흥의 중단에 동의하는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인들이 부흥을 일으키기 위해서 기계적으로 노력할 때 부흥은 중단된다. 기도가 냉랭해지고, 마음속 깊이에서 나오는 느낌도 사라져 기계적으로 노력하며, 느낌 없는 말을 하기 시작하면 부흥은 끝난다. 넷째, 부흥의 역사가 그들의 도움이 없이도 계속되리라는 생각을 그리스도인들이 하면 부흥은 끝난다. 하나님도 사람도 교회의 협조 없이 세상을 회심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회심은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고자 하는 의지에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교회가 하나님의 일보다 자신들의 관심사에 더 신경을 쓸 때 부흥은 끝이 난다. 여섯째,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큰 부흥을 자랑으로 생각할 때, 부흥은 끝이 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부흥을 위해 얼마나 기도하고, 노력했는가를 생각할 때 부흥은 떠나간다. 일곱째, 부흥은 교회가 육체적으로 지치게 되면 끝이 난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서 실수를 저지른다. 그들은 너무나 생각을 하지 않고, 생활 습관을 깨뜨리면서 적당한 때에 먹고 자지 않고, 흥분 상태에 계속 있기를 원한다. 그렇게 되면 육체적으로 지쳐버려, 그들은 더 이상 부흥을 위해서 일할 수 없게 된다. 여덟 번째, 교회가 생활과 관련 없이 추상적으로 교리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면 부흥은 끝난다. 아홉 번째,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자기 교회로 끌어 들이려고, 할 때에 부흥은 끝이 난다. 열 번째,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이 받은 축복만큼 주님께 드리기를 거부할 때 부흥은 끝이 난다. 열한 번째, 교회가 어떤 방법으로든지 성령을 슬프게 할 때 부흥은 끝이 나는 데 다음 세 가지 대표적인 예이다. 1. 교회가 성령을 의지하지 않을 때, 2. 부흥을 자랑하는 마음이 사람들 가운데 생겨 성령을 슬프게 할 때, 3. 하나님의 역사를 과소평가하는 일을 말하거나 출판하면 성령을 슬프게 하여 부흥은 끝이 난다. 열두 번째, 그리스도인들이 형제사랑의 마음을 잃을 때 부흥은 끝이 난다. 열세 번째, 계속적으로 깨우침을 받지 않을 때, 부흥은 기울어지고 끝이 나고 만다. 열네 번째,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부인을 하지 않을 때 부흥은 끝이 난다. 따라서 부흥을 처음 맛볼 때 방종에 대한 가증성이 엄습해 오면 정신을 차리고 자기부인을 중단하지 말고, 방종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열다섯 번째, 전도의 소흘은 하나님의 영을 떠나가게 한다. 열여섯 번째, 교회가 젊은이들을 사역을 위해서 교육시켜야 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면, 부흥을 방해하고 소멸시키게 된다. 열일곱 번째, 교회가 부흥을 비방하면 왕왕 부흥은 중지된다. 에드워즈 시대에 있었던 큰 부흥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하나님의 원수가 부흥을 비방하는 것은 당연하나, 교회가 이에 동참하면 성령은 슬퍼하시며 떠나가신다. 마귀가 부흥을 대적하면 거기에 동참할 것이 아니라 교회는 힘을 합해 막아야 한다. 열여덟 번째, 성직자에게 논쟁이나, 신학적인 싸움에 말려들게 하면 부흥은 끝이 난다. 열아홉 번째, 부흥을 방해하는 반대자에게 부흥을 수행해 오는 사람이 비난하기 시작하면 부흥은 끝이 난다. 부흥의 반대자들 편에서 하는 비난은 교회 안에서 하든 교회 밖에서 하든 그 자체가 부흥을 중단시키지 못한다. 부흥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겸손하고 기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앙갚음을 하지 아니하며 오히려 인내 가운데 있으면, 그들의 관심이 기도의 영에서 떠나 비난하는 데로 돌려지지 아니하면, 부흥은 계속된다.    


6. 부흥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5.에서 언급된 열아홉 가지에 대비하면 된다. 더불어 다음의 이을 계속하면 부흥은 계속해서 유지될 것이다. 첫째, 목회자들 편에서 심각하고도 큰 회개를 해야 한다. 특히 부흥에 반대 입장에 섰던 사람들이 회개해야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그런 목자들이 없는 편이 회중의 회심을 위해서는 더 좋을 수도 있다. 둘째, 부흥을 반대해 온 교회들은 자신을 낮추고 회개해야한다. 셋째, 부흥을 일으켰던 사람들이 분을 내거나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는 회개해야 한다.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부흥을 중단시킬 수 없다. 그러나 부흥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잘못되면 부흥은 중단된다. 넷째, 교회는 정치에 올바른 태도를 취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정직한 사람을 뽑아주어, 무뢰한이나, 간음자, 술주정꾼들을 후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다섯째,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주일을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무엇인가 효과적으로 하지 않으면 주일은 전반적으로 깨어질 것이다. 그렇지 못해서 주일이 없어지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여섯째, 교회는 시시때때로 결정해야 되는 모든 실제적인 도덕 문제, 곧 금주와 도덕적인 개혁의 문제에 올바른 입장을 취해야 한다. 도덕적인 개혁의 문제에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그들의 행동에 동조하는 것과 똑같다. 일곱째, 기독교적 자선이라는 큰 목적을 위하여 더 많은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는 선교와, 교육과, 성경과, 기타 모든 신앙적인 문제에 있어서 더 많은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것이다. 여덟 번째, 부흥에 관해 회의와 질투를 일으킬 수 있는 글을 쓰는 사람들은 그것을 중단하고 부흥을 위해 선두에 나서야 한다. 그런 글들이 교회에 얼마나 해를 끼쳤는지 스스로 알 것이 아닌가!   



     


부흥은 시작하기도 어렵지만 유지하기는 더 어려운 것 같다. 지금까지 역사가 그것을 증거한다. 그렇다면 그런 역사에서 배운 교훈을 통해 부흥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제 까지 부흥론이 많이 연구되었지만, 부흥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아직 그 성과가 미미한 것 같다고 생각한다.

사실, 부흥이 유지된다면 부흥은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과, 깨어있는 사람, 죄인들의 겸비한 마음이 있으면 부흥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꺼지지 않는 부흥이 일어난다면 전무후무한 부흥이 될 것이다. 이 책에서도 누누이 강조했듯이 부흥은 하나님과 사람, 죄인의 매개와 진리의 도구가 유기적으로 작용할 때 일어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을 하면 부흥이 된다. 기도하라고 하면 기도하면 된다. 회개하라고 하면 회개하면 된다. 수동적으로 기도도 하지 않고, 간구도 하지 않고, 마른하늘에 벼락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면 결코 부흥이 오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의 강권하심이 있으면 가능하지만...

보편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대로, 성경에서 하라고 한 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능동적으로 게으르지 말고(게으른 것은 악한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부흥은 결코 기적이 아니다. 이것이 해답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과 몸과 뜻을 다하여 순종하면 부흥될 수 있다. 이것이 찰스 피니 목사님이 주장하신 거룩한 부흥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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