井底之蛙
뉴턴의 절대적 시공론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적 시공론으로의 전환, 고전역학의 인과적 결정론에서 하이젠베르크의 비결정성 확률론으로의 전환, 누적적 과학관에서 토마스 쿤의 혁명적 과학관으로의 전환, 합리적 이성의 의식세계로부터 프로이트의 비합리적 무의식의 세계로의 전환, 수학과 논리학의 완전성정리에서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로의 전환은 공통적으로 서양의 역사에서 약 2500년 동안 지켜왔던 전통적인 사유방식법을 뒤엎은 재전환의 계기를 마련했다고 하는 점이다. 한결같이 인식주관에 대한 철학적 자각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있다.
계간지 <과학과 사상> 31호 1999 겨울호. p12.
회사 앞에 있는 감신대 서점에서 아주 재미있는 책을 구입했다. 20세기를 이끈 과학사상가에 대한 주제로 <과학과 사상>이라는 계간지에서 그들에 관해 심층 토론을 한 것이다.
토론의 결론은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토마스 쿤, 프로이트, 괴델 이 5명의 학자에 의해 2500년동안 이어져 왔던 철학이 뒤집혀졌다는 것이다.
그럼 2500년 동안의 철학은 무엇을 주장하고 있었을까? 그것은 정적이고 결정론이며, 이성(의식)적인 진리관이었다. 즉 시공간은 정지되어 있어 누구나 그 결정된 범주에서 사고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고대부터 계속해서 주장되어왔으며, 칸트에 의해 선험적인 감각의 구성요소로 확고해 졌다. 또한 인간의 이성, 즉 인식으로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발견으로 인해 인간은 의식보다는 무의식에 의해 좌우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근대철학에서는 수학을 맹신하여 수학만은 이런 정적이고 결정론적인 세계에의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하였다. 19세기까지도 이 사상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학의 원류 논리학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버트런트 러셀이 논리학의 오류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모든 크레타섬 사람들은 거짓말장이다'라고 한 크레타 섬 사람이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말은 참인가, 거짓인가?”
참일 수도 거짓일 수도 없다. 이 말이 참이라면, 이 말을 한 사람이 크레타 섬 출신의 사람이기 때문에 모순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 말이 거짓이라면, 이 말은 하는 사람이 크레타 섬 사람이기 때문에 그 역시 거짓말을 하는 것이므로 모순이 된다.
이 논리 모순을 발전시켜 괴델은 '불확정성의 원리'를 주장하게 된다.
* 제1정리의 증명 과정
1) '논리식 G는 증명 불가능하다'라는 메타 수학적 문장을 나타내는 논리식 G를 구성한다.
2) G의 부정(~G)이 증명 가능할 때, 그리고 오직 그 때에만 G가 증명 가능하게 된다. :왜냐하면, ~G가 증명가능하다는 것은 "G는 증명 불가능하지는 않다"가 증명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3) G가 증명할 수 없는 식이며 동시에 참인 논리식임을 제시한다.
4) G가 참이지만 증명 불가능하므로 산술체계는 불완전하다는 결론(제1정리)을 도출한다.
<설명>
논리식 G는 이런 뜻이다. "나는 증명불가능한 문장이다". 만약 이 문장이 증명가능하다면 G의 부정, 즉 ~G(나는 증명될 수 있다)가 증명되어야 한다. 즉 G가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즉, G가 증명가능하다면 ~G가 증명되어야 한다. 이것은 서로 모순적이다. 그러므로 G는 증명불가능하다. 그런데 그것이 G의 내용이므로 G는 참이게 된다. 즉 G는 증명불가능하면서 참인 문장인 것이다. 그리고 이 문장 G가 산술체계에서 구성될 수 있으므로 산술체계는 불완전하게 된다.
* 제2정리의 증명 과정(제1정리에서 출발)
1) 먼저 논리식 H를 구성한다. H는 "산술체계가 일관적이다"라는 문장이다.
2) "H이면 G이다"가 증명가능하다는 것을 보인다.
3) H가 증명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4) 이로부터 제2정리를 얻는다.
괴델의 불확정원리성에 의해 수학의 형식논리조차 완전한 것이 아님이 증명되었다. 따라서 이것에 벗어나려면 직관주의에 의존해야 한다. 직관주의를 의존한다는 것은 수학 자체의 완전성을 자체적으로 보장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이성이 아니라 직관에 의해서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을 주체에게 주입시켜 수학의 완전성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과학의 진화론적 발전에 대해 철퇴를 가한 자는 '패라다임'이론을 주창한 과학사학자 토마스 쿤이다. 그는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이 진화론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으로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즉, 앞의 과학적 성과를 계승해서 과학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앞의 과학적 성과를 완전히 탈피해서 과학이 발전한다고 하였다.
발전론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그 메커니즘이 일직선상의 발전에서, 계단식 발전 구조로 전환된 것이다. 예를 들어, 뉴턴의 중력이론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바뀌었고, 스티븐 호킹의 특이점이론으로 또 바뀌었다. 기존의 뉴턴 이론은 시공간이 정지 되어 있다고 생각해서 중력이론이 가능했다면, 아이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시공간이 움직이기 때문에 가능했고, 스티븐 호킹은 아인슈타인의 움직이는 시공간에서의 빛의 고정성을 파괴하여 빛보다 더 빠른 속도가 특이점에서 발생하는 것을 발겨했기에 가능했다. 이를 보건대. 과학은 앞의 세계관을 완전히 부정해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헤겔의 부정의 변증법을 파괴시킨 논리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칼 포퍼는 헤겔의 부정의 변증법이 형식 논리학에서조차 불합리하다는 것을 증명한 바 있다.
즉, 헤겔은 변증법에서, 정-반-합 이라는 메커니즘을 가진 부정의 부정 변증법을 주장했다. 예를 들어, 컵이라는 대상을 볼 때, 일단 정면에서 컵을 보고, '컵은 직각 사각형이다'라고 정립한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돌려 이번에는 컵을 위에서 바라다보고, '컵은 원형이다'라고 반정립한다. 이렇게 결론을 내지 않고 정립한 반정립하는 것을 '지양'이라고 한다. 이렇게 '지양'된 것을 다시 합쳐서, 헤겔은 결론을 내린다. '앞에서는 직각사각형이고, 위에서는 원형이니. 컵은 원통형이다.'이것이 헤겔의 정-반-합의 원리이다.
그런데, 칼 포퍼가 보기에는 헤겔의 논리는 근대 철학의 형식 논리학적 입장에서 보면 오류이다. 형식 논리학은 배중률은 인정하지 않는다. 즉 A와 ~A가 동시에 인정될 수 없다고 한다. A와 ~A는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헤겔의 정-반-합에서 말하는 정립과 반정립의 관계는 부정의 부정을 통한 강한 긍정이기에 의미론적으로 성립하나, 논리적으로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헤겔은 '정'을 정립할 때, 그 이외의 것은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합'으로 갈 때는 이번에는 '정'을 부정하는 것이다. 즉 , A와 ~A를 동시에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두개의 정립(A)과 반정립(~A)을 동시에 인정하는 것이다. 그 바탕에서 어떤 '합'을 도출한다. 결론은 맞지만, 헤겔의 논리는 엄격한 의미에서의 형식논리학에서는 이렇게 모순적인 것이다.
이로서 철학도 수학도 모순이 발견되었다. 인간 이성이 이렇게 모순 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는 것은 모두 모순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이 현대철학의 결론이다.
물론, 이에 대해 철학자는 이 모순도 진리의 대상이라고 한다. 즉, 모순은 모순대로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상하게 보지 말자는 것이다. 모순을 자연스럽게 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형식 논리학의 엄밀성은 떨어질지는 모르지만, 세상을 이해하는 상황논리를 설명할 수 있으니 얼마나 편리하냐는 말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무엇인가? 대혼란이다. 어떤 이해 안 되는 상황이 닥쳤을 때, 그것은 모순이니, 상황논리로 풀자는 셈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들!
나는 이 우물을 탈피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왔다.
이곳에서 탈출하기 위해, 인식의 지평을 넓히려 닥치는 대로 독서를 해 보았다. 경험의 폭을 넓히려 해 보았다. 그런데, 늘 내 삶은 모순으로 가득 찼다.
때로는 실존하는 사단과 직면하기도 했다. 사단은 어느 때는 내 귓속에서 악마의 달콤한 계교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그것에 속아 넘어가서 엄청난 고생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때는 사단의 소리가 사라지기도 했다. 갑작스럽게. 양심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도 했다.
그래서 실존하는 하나님의 존재를 깨달았다. 악마가 늘 내 귀속에서 속삭이지 않는 것은, 예수님께서 직접 마귀를 쫒아 주시거나, 때로는 천사를 보내주셔서, 마귀를 쫒아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늘 이 시지프스 언덕을 바위를 굴리며 올라가는 반복된 그래서 지겨운 생활을 그래서 권태로운 생활을 그래서 게으른 생활을 그래서 악한 삶을 살아 왔다.
내가 우물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딱 한 가지다. 말씀이었다. 그 말씀을 통해서 내가 사는 곳이 우물임을 알았다. 물론 나는 스스로 우물을 탈출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고, 책을 통하여 다른 사람과 차별성을 두어왔다. 그러나, 우물의 지평은 넓어졌으나, 거기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철학을 신앙하는 세속의 우물은 모순으로 가득 찬 곳이었기 때문이다. 모순으로 가득 찬 곳에서 개발된 책에는 늘 시지프스 언덕 같은 반복되는 지겨운 지식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로마서 2장 말씀을 묵상하다가 하나님의 주권성을 깨닫고 감전되는 듯한 큰 충격과 함께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압도당하였다. 그렇게 신앙에 눈을 떴을 때, 나는 세속적 신앙의 병목현상에 붙잡혀서, 오도 가도 못하는 위선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나의 존재성에 눈 떠지자 이 세상은 견딜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더 이상 이 세상의 것에 대한 미련이 없어졌다.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를 떠날 때, 신앙이 어렸을 때는 심하게 갈등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성에 압도당했을 때 그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어려운가! 정말 하나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기도했을 때, 순식간에, 우물에서 벗어났다. 세상의 아둥바둥과 작별했다. 그리고 보았다. 우물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을. 현대의 플라톤을. 현대의 칸트를, 현대의 헤겔을!
그리고 가슴 시리도록 서럽게 웃었다. 그들은 결코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CYH팡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스칼의 회심기 (0) | 2009.06.26 |
---|---|
철학자의 신은 자기자신이다 (0) | 2009.06.25 |
분산과 하모니 (0) | 2009.06.13 |
톨스토이 참회록 (1) | 2009.06.12 |
‘천로역정’을 보는 관점(POINT OF VIEW) (0) | 20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