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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참회록

천국 도서관장 2009. 6. 12. 00:54

톨스토이(1828-1910) 참회록(크리스찬다이제스트사)



톨스토이는 여느 러시아 귀족 소년들처럼 국교였던 러시아 정교를 통해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이 종교는 여러 문제를 내포하고 있지만, 윤리 도덕적으로는 어린 학생들에게 지표는 되었다. 비교적 착했던 톨스토이는 막연하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차차 성장하면서 이상한 것을 발견한다.


나는 가장 진지한 나의 소망, 즉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어 보겠다는 소망에 대하여 말할 때마다 모욕과 조소를 받았다. 그리고 속된 정욕에 몸을 맡기자마자 나는 칭찬을 받았으며 격려를 받았다 (38p).


세상 사람들은 착하게 살고자 했던 톨스토이를 모욕하고 조소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바보취급하고 있었다. 그래서 세속적으로 살아 보니까, 의외로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험을 해 보았을 것이다. 착하게 살아보려고 했다가 낭패를 당했던 적을 모두 다 있었을 것이다.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었던 톨스토이는 숙모(38p)의 손에서 자라나면서 그녀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그녀는 품의 있는 교양인으로서 톨스토이가 존경하는 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톨스토이가 장군의 부관이 되고, 귀족의 여인과 결혼해서 출세하기를 바라는 평범한 세상적인 여인에 불과했다. 숙모조차 이타적이기보다는 이기적인 자기 목적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하니까, 톨스토이는 점점 그런 풍조를 자신의 세계관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게다가 주의 친구들(귀족, 지배층)은 이 모든 것(죄-기만, 사기, 욕심 등등)에 대하여 책망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칭찬(39p)하기에 바빴다.


이제 평범한 세상 사람이 된 그가 글로서 세상에 이름을 내자 훌륭한 예술가, 시인으로 칭송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 칭송 뒤에 남아있는 건 무엇이었을까? 세속적인 일에 성공을 하고 나서 칭송을 받아 본 적이 있는가? 아니, 교회 일을 성공적으로 해서 칭찬을 받은 적이 있는가? 그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생각해보라. 혹시 그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인간적인 칭찬의 쾌락에 빠지진 않았나? 그 감정을 즐겨 보지는 않았는지, 그 결과 교만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나?


처음에 톨스토이도 그런 유혹에 빠져 쾌감을 맛보고 교만해졌다. 그러나 이성이 마비되지 않았던 그는 세상의 성공으로 인해 칭송받았던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때 그가 내린 결론은 무엇이었을까?


"만물은 진보한다. 나 자신도 끊임없이 진보하고 있다. 왜 내가 만물과 함께 진보하고 있는가는 불원간 알게되리라"(45p)


존재하는 모든 것은 톨스토이와 같은 지식인들, 즉 문화의 전달자에 의해 진보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진보사관은 당시 유럽을 풍미했던 계몽주의에서 나온 발상이다. 이 사조는 이성만으로 세계를 모두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이는 자연과학의 발달로 세계에 대한 인간의 교만에서 싹튼 대표적인 인본주의라고 볼 수 있다.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이런 사관을 가지고 있었고 톨스토이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성을 그 이상으로 사용해 본 사람은 알게 되어있다. 이성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 톨스토이가 "삶은 무엇을 위해, 또 어디로 가는가?"라는 의문에 봉착해 있을 때 그는 이성으로 이를 먼저 해결하려고 했다. 그 대표적인 수단이 철학, 자연과학, 사회과학이었다.


* 철학-윤리, 이상세계는 제시 가능하다. 그러나 존재의 근원은 모른다. 즉 누가 그것을 제공 했는지 알지 못한다.


* 자연과학-과학적 합리성---그러나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예-자연과학의 끝은 어디인가? 자연과학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한다면 '무'에서 '유'를 창출해 봐라. 과학적으로? 혹자는 무기물에서 유기물이 진화되어서 동물, 인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그 무기물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필자의 유치한 예지만 자연과학으로 설명 안 되는 부분이 많다.


* 사회과학-역사학, 사회학, 경제학, 윤리학---역사학이 발달해서 역사가 발전했는가? 경제학의 발달해서 모두가 잘 살게 되었는가? 윤리학이 발달해서 사람들이 윤리적이 되었는가? 정칙학이 발달해서 사람들이 모두 평등해졌나? 지식의 독소화는 무엇인가? 이런 지식의 발달은 혹 인류를 점점 병들게 하지는 않았나? 지식에는 독이 있는 것은 아닌가? 톨스토이는 이런 것의 부질없음을 깊이 있게 깨닫게 되었다.


학문에서 삶이 이유를 찾아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진보한다고 보기에는 학문의 역할은 너무나 미비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학문에서는 무한한 세계를 유한한 세계로 제단하려 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알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학문을 많이 배운다고 해서 전 세계의 존재 원리에 대해서 아는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고민에 빠진 톨스토이는 독서를 통해 일찍이 쇼펜하우어, 소크라테스, 석가, 솔로몬 등이 이를 깨닫고 탄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깨달은 위대한 성인들조차 무의미하고 악(사람의 수준을 보라)한 세상에 대한 해결방법은 도저히 알 수 없다고 토로한 것을 발견한 그는 절망하게 된다. 그들조차 절망했는데 그라고 별 뾰족한 수가 있었겠는가?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의미 있게 살 수 있으며, 진리 안에 살 수 있는지는 도저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한 가닥 삶의 희망을 걸었던 석가를 통해서 인생에는 병, 가난, 죽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 이렇다 할 삶의 의미를 찾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이제 문제는 이를 깨달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톨스토이는 이 문제에 죽음, 자살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무의미하고 악한 세상에서 살면 살수록 더 악하고 무의미해지기 때문에, 이를 하루 빨리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자살 이외에는 탈출구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심정은 다음 우화에 자세히 나와 있다.


광야에서 광포한 짐승에게 쫓기는 한 여행자에 대한 오래된 동방의 우화가 있다. 그 짐승으로부터 도망치다가 그는 마른 우물로 내려가게 있었다. 그때 그 우물 밑바닥에 그를 삼키려고 턱을 벌리고 있는 용을 보았다.

이 운 나쁜 사람은 우물 밖으로 나갈 수 없었는데 만약 올라가면 광포한 짐승에게 잡혀 죽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물 바닥으로 뛰어 내릴 수도 없었는데 만약 뛰어 내려가면 용에게 먹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물 벽의 갈라진 틈에서 자라고 있는 가는 나뭇가지 하나를 잡고 거기에 매달렸다.

그의 손에서 힘이 점점 빠져 나가자 그는 곧 그의 위 또는 아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파멸에 의해 사로잡힐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매달려 있었다. 그때 그는 두 마리의 쥐, 즉 한 마리는 검은 쥐, 한 마리는 흰 쥐를 보았는데 일정하게 그가 매달려 있는 줄기를 돌면서 그것을 갉아먹고 있었다.  곧 그 줄기가 끊어지면 그는 용의 턱 속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 여행자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계속해서 매달려 있는데, 그가 매달린 나뭇가지의 잎 위에서 꿀 몇 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 꿀이 그의 혀에도 떨어지자 그는 그것을 핥아먹었다.

 

나 역시 인생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으면서, 죽음의 용이 나를 조각조각 찢을 준비를 하며 기다리고 있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나는 왜 그런 고통에 쳐해 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전에 나를 위로해 주었던 꿀을 맛보려고 시도했으나, 그 꿀은 더 이상 나를 기쁘게 해 주지 못했다. 그리고 낮의 흰 쥐와 밤의 검은 쥐는 내가 매달려 있는 나뭇가지를 갉아먹고 있었다.

나는 용을 분명히 본 후 더 이상 꿀의 단맛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단지 용과 쥐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그것으로부터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이것은 우화가 아니라 진실로 어떤 사람도 반박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53-54p).


이 우화에서 톨스토이는 이 세상에는 네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a. 무지, 무식--죽을 운명인 것을 모른 채 꿀을 빨아먹고 있는 사람

b. 쾌락주의자-용과 쥐를 외면하고 꿀을 빨아먹고 있는 자.

c. 용기와 정력으로 부딪히는 자-죽음

d. 소심한 자-죽어야 할 것을 알면서도 광대 같은 삶을 삶.


이처럼 세상이 의미 없고, 악하다고 판단한 톨스토이는 당연히 c.부류에 속한 대표적인 사람이어야 했다. 하루 빨리 이 저주받은 땅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는 죽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자기를 d.와 같은 소심하고 광대사람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인가? 하지만 톨스토이는 곧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된다. 즉 세상은 악하고 무의미하기 때문에 자살해야 한다는 것은 성급한 결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의 생각은 귀족 중심의 세계관이었다는 것을 톨스토이는 깨닫게 된 것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농촌 사회로 시야를 옮겼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기적이지 않고,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해 삶을 사는 것을 보고 그는 크게 깨닫게 된다. 지금까지 하찮게 여겼던 농부의 삶의 실상을 본 그는 즉각적으로 그들에 대한 우월의식을 버리게 되었다. 그 결과 우월의식 위에서 내린 삶의 결론인 자살할 생각을 버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농부들의 삶이 귀족들보다 더 가치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이 산다면 살 소망이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농민들이 나가는 러시아 정교는 수준이 낮아서 거부 반응이 일어났다. 가령 농부들과 함께 러시아 정교회에서 매주 드리는 성만찬식. 국왕을 위해 드리는 기도, 천사 찬양, 이는 톨스토이의 신앙을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말았다(117-120p).

 

따라서 그는 이런 신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농민들(대중들)은 어린 신앙 내지, 거짓 믿음 즉, 비진리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121-123p). 그리고 교회성직자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직업적 의무감으로 교회 일을 하는 것을 알고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125p).


고심 끝에 톨스토이는 교회 안에는 진리와 비진리가 혼재되어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거짓이 없는 신앙을 갖추기 위해, 신앙을 공부하고 연구하여 진리에 길로 가기로 하면서 글을 맺는다. 그 후 구체적인 회심의 뒷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다만 네휴류도프. 메슬로바의 삶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부활'(1899)을 보면 그 뒷 부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 생각해 볼 문제


a. 각성하기 전 그의 인생에 대한 태도는 어떠한가?

b. 각성하면서 절망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 어떤 과정을 거쳤는가?

c. 결국 그가 얻는 답은 무엇인가?

d. 용과 쥐의 우화(53-54p)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e. 세상 사람의 네 가지 유형은 무엇인가?

f. 왜 그는 자살하지 않았는가?

g. 민중을 통해서 그가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

h 민중과 러시아 정교를 통해서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

i. 톨스토이는 참회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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