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YH팡세

분산과 하모니

천국 도서관장 2009. 6. 13. 10:11

분산과 하모니


키에르케고르를 '분산'의 철학자라고 한다.


한참 포스트모더니즘을 공부할 때, 쟈크 데리다의 '차연((Différance)'이라는 개념을 깨닫고 한동안 무척 뿌듯한 적이 있었다. ‘차연’은 세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차이, 분산. 그리고 지연. 포스트모더니즘은 이 세 가지 개념을 핵으로 만들어진 사조이다.


그런데, '차연'의 두 번째 의미인 '분산'이라는 개념이 키에르케고르에서 왔다는 것을 얼마 전에 알고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됐다.


우리 출판사에는 아침에 꼭 티타임을 갖는다. 그때 사장님은 회의를 할 때도 있고, 정치, 문화, 사회, 경제에 대해서 토론을 하기도 한다. 물론 일방적으로 사장님이 말한다.


그런데, 그 시간에 꼭 사장님에게 한 소리 듣는 사람이 있다. N실장님이다. N실장님은 사장님이 어떤 주제를 놓고 진지하고, 깊이 있게 얘기하고 있을 때, 꼭 끼어든다. 그래서 전혀 주제와는 관련 없는 이야기를 한다.


가령, 어제 사장님은 인간관계의 구조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원자론을 가지고 설명했다. 원자핵을 중심으로 각 궤도를 따라 도는 전자들이 원심력과 구심력의 역학에 따라 원운동을 하며 원자의 형태를 유지해 나간다고 한다. 그리고 이 관계가 깨지면, 즉, 원자가 하나 달아나거나, 원자핵의 질량이 너무 커져서 전자를 모두 흡수해 버리면, 원자구조는 변형되거나 깨질 수도 있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인간관계도, 자아의 주변 궤도에 그 사람과 친분관계에 따라 차례로 배치되어, 원심력과 구심력에 따라 인간관계를 형성한다고 했다. 만약, 이 균형이 깨지면 인간관계가 깨지며, 잘못되면 자기 자신도 피해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이때 N실장님은, '가장 작은 물질은 원자가 아니잖아요. 더 작은 것도 있어요. 저번에 책에서 봤는데...'


그럼 사장님은 이렇게 말한다. '너하고는 무슨 말을 못해. 지금 그 얘기가 아니잖아!'


N실장님은 늘 주제에서 벗어난 말을 해서, 사장님의 말의 중심을 흐려놓는다. 물론, 사장님이 원자론을 말하고 있었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였다.


나는 이 대화를 들으면서, '분산'의 의미에 대해서 더 생각해 보게 되었다. 지금은 한물 갔지만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겉의미와 속의미의 1:1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1:다수'의 관계를 만들어 놓는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게 만들어 놓는다. 그 결과 '상황논리'가 발달되었다.


물론, '1:다수'의 관계정립을 통하여, 의미의 다양성을 생산해낼 수는 있겠지만, '무의미'를 만들어 놓을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칼'을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죽음, 사랑, 정의, 부엌, 요리, 전쟁, 돈, 권력...'으로 해석한다. 상황논리에 따라, 문맥을 보고 '칼'의 의미를 찾아보라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갖다 붙이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그래서 원래의 '칼'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단지 상황이 더 중요하게 된다. 이때, '칼'의 의미는 사라지고, 대신 문맥의 의미만 남는다. 즉, '칼'의 의미는 증발되어 무의미화(to be nothing)된다. 이것은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에서 주장한 논지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것을 키에르케고르는 1800년대에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기존의 학문과 신앙의 체계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철학도 좋고, 신학도 좋지만, 그것이 개인에게 와 닿는 의미가 더 중요하지 않는가 하고 그는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에 대한 개인적인 의미는 어떻게 관계를 맺겠는가? 그는 당시의 만연하는 위선적인 신앙인들에 대해서, 철퇴를 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존의 신학체계를 소화해 내지도 못하고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는, 그것을 실천할 수 없자, 실천하는 것처럼 살고 있는 위선적인 신앙인들에게 키에르케고르는 그들 자신들의 실상을 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은 올바른 신앙인이었는가? 그렇지 않다. 그 역시 위선적이었다. 그는 신앙을 일종의 자기의 기호품 정도로 생각했다. 즉, 키에르케로르 기호에 맞는 신앙을 한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주장에 대해서 후대인은 ‘기독교실존주의’가 키에르케고르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신앙이 그런 것인가? 신앙은 신령한(holy, 또는 godly-이 단어를 나는 참 좋아한다. 직역하면 ‘하나님처럼’이란 뜻이 된다. 정말 황송한 단어이다) 것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신령한 차원에 있게 된다. 그들은 모두 한 가지 의미 속에서 행한다. 하나님 안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그들은 한 형제 자매가 된다. 그들은 분산하지 않는다. 대신 화합한다.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며 살아간다.


키에르케고는 어떤가? 그는 세상 사람들의 위선은 지적했으나, 그 대안으로 내놓은 그의 해결방안은 후대 사람들을 더 큰 혼란으로 몰아갔다. 그는 사람들에게 참 하나님을 만나라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그의 mind에 맞추어 넣으라고 한 것이다.


각 개인의 상황은 다르니, 그 개인에게 들어오는 신의 의미도 다를 것이다. 그렇게 신의 의미를 깨달으면, 그 깨달음에 순종하라. 그러나 이것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고, 옛날 코미디 프로에 나온 유행어처럼 ‘그때그때 달라요.’가 될 것이다.


그 결과 개인의 신앙은 개인의 상황에 따라서 발현되게 된다. 이것이 중요하다. 신 자체보다 개인에게 다가온 ‘신의 의미’가 말이다.


그럼, 그 개인이 완전한가? 그가 신령한가? 그 개인이 신령하다면, 그가 만난 신의 의미도 신령할 것이다. 그러나 그 누가 인간이 신령하다고 할 수 있는가?


결국 그는, 신의 의미를 ‘분산’시켰다. 그래서 그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렸다. 왜 그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렸는가? 신에 대한 해결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발견한 신의 의미는 진리가 아니었다. 단지, 키에르케고르가 이해한 신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안식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위선적인 신앙인들이었다. 신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학문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그래서 그는 분산을 시도했다. 위선보다는 분산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억지적인 신앙보다, 억지적인 학문보다, 좀더, 그것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신앙과 학문에 대해서 다각도로 생각할 수 있도록 분산을 시켜놓았다. 어떤 누구도 키에르케고르 책에서 절대적인 의미를 찾아 낸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그는 동일한 주제에 대해서도, 각 책마다 다르게 써놓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가 한 말은 횡성수설일 뿐이다.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법칙을 주셨다. 자연에는 자연법칙을, 영적인 세계에는 영적 법칙을 주셨다. 이것은 구하는 자가 얻게 된다. 믿는 자가 얻게 된다.


믿는 대로 된다. 그런데, 믿는 데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왜 그런가? 안 믿기 때문이다. 왜 안 믿는가? 분산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어떤 것을 믿으라고 했을 때 자기 생각으로, 그 믿음의 요소를 대신 채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는 대로 안 되는 것이다.


돋보기로 불을 붙여 보았는가? 초점을 안 맞추면 불이 붙는가? 다초점(多焦點)으로 만들어 놓으면 불이 붙는가? 한 초점이어야 한다. 한 초점이 되어야 불이 붙는다.


그래서 하모니가 중요하다. 한 데로 모아야 한다. 그래야 불이 붙는다. 불은 사랑의 믿음으로 역사한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4).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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