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자는, 인간이 초월자에 대해서 태도를 취하는 방식에 좇아서, 인간에게 나타난다. 그리고 사람들의 태도의 방식에 따른 초월자의 나타남 그 자체가 암호다.'
'실존은 자기가 암호를 해독하는 방식에 쫓아서 특정의 자기로 되어 가는 것이다.'
위의 말은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말한 것이다. 야스퍼스의 이 말은 참 재미있다. 불교에서도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라는 말이 있다.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 있다라는 뜻이다.
즉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대상이 변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맞는 말이다. 우리가 기분 좋을 때, 어떤 대상을 보는 것과,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어떤 대상을 보는 것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칼 야스퍼스의 주장을 잘 살펴보면. 인간이 초월자를 구할 때, 어떤 마음으로 구하느냐에 따라 초월자가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지하게 초월자를 구할 때. 그 초월자는 진지해 질 것이요. 가볍게 초월자를 구하면 가벼운 초월자가 나타날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야스퍼스에 의하면 초월자를 보려면 죽음, 고통, 투쟁, 죄책과 같은 상황에 직면하여 그 상황에서 좌절하여, 한계상황를 거쳐서, 자신의 현재 위치를 깨달아야, 비로소 초월자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죽음이나, 고통, 죄책과 같은 한계상황을 거친 자가 초월자를 가볍게 구하지는 않을 것이나, 그래도, 초월자를 구하는 자의 차이는 날 것이다. 따라서 구하는 사람마다 다른 초월자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칼 야스퍼스의 사상은 우리 크리스천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신앙하느냐에 따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해 주신다고 성경에는 나와 있다.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는 그는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그러나 어린아이같이 순전한 마음으로 나오면 그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또는 죽기 살기로 기도하고 회개하고 나오면 하나님께서 만나 주신다고 했다.
하지만 야스퍼스의 사상과 기독교는 합치되지 않는 점이 있다. 야스퍼스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한계상황을 극복하고 실존자가 되어서 초월자를 만날 때, 그가 진지한 태도로 나아가 만나든지 가벼운 태도로 나아가 만나든지, 또는 어떤 다른 태도를 가지고 나아가 만나든지 그가 만나는 초월자는 결국 그 사람 자신 속에 있다고 한다. 즉, 초월자는 결국 자기 자신이었다는 말이다.
결국 야스퍼스는 인간 자신을 아주 신처럼 떠받들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야스퍼스의 잘못만은 아니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인간의 능력을 신뢰하고 있으니 말이다.
철학자들의 태도를 보면, 기독교를 잘 모방한다. 그들은 일단 현실을 부정한다. 그리고 현실이 부정되면 부정되지 않는 대상이 나타난다. 그것은 변하지 않기에 진리다. 이 진리를 탐구한다. 그러면 그는 진리와 하나가 된다. 결국 인간을 완전자의 자리에 갖다 놓는다. 그러나 늘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일 뿐이다. 왜냐하면 후세의 철학자들은 전 세대의 철학자들을 부정하고 나오기 때문이다. 전 세대의 철학자들이 진리라고 탐구해 놓은 것을 부정하고 나오는 것이다. 정말 웃기는 일이다. 그러려면 진리 규명은 왜 해 놓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철학하는 태도는 배울 점이 많은 것 같다. 지극히 존재가 가벼운 이 시대에 철학자들은 그래도 존재의 무게를 진지하게 재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말이다.
야스퍼스의 초월자에 대한 태도를 통해 그 초월자와는 비교도 안 되는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한 나의 태도를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