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YH팡세

나사로를 통해 나타난 예수님의 인격적인 사랑

천국 도서관장 2009. 9. 3. 12:08

예전에 아내와 요한복음 11장의 나사로 사건에 대해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 내용을 재정리하여 여기에 인용해본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를 살리는 이적을 보여주신다. 성경의 한 장을 할애하여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의 전말이 나온다(그 만큼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에 자세히 기록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는 과정은 매우 치밀하며,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나타내신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인격적으로 다가가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나타내주신다.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돌아가셨다가 죽은 지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셨다. 이 과정에서 나는 예수님께서 그 택한 자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그들을 얼마나 배려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나사로 사건을 통해 본 예수님의 인격적인 사랑


1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로 즉시 가지 아니 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이 일을 통해 어떤 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했을까? 특별히 여기서의 영광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을 병에 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13절에 보면, 그가 죽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2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5 내가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16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예수님은 왜 지금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고 있는가?

-예수님은 지금 베다니에 있지 않는 것을 왜 기뻐한다고 하였는가?

-도마는 왜 우리도 죽으러 가자고 했는가?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나사로가 실제로 살아날 수 있다고 믿지 못하는 마르다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마르다와 예수님의 대화에는 오해라는 장해물이 있다. 물론 마르다가 예수님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적 수준의 믿음에서, 즉 자신의 세계관으로 예수님의 뜻을 구겨넣으려 하고 있다. 이는 수가성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이들을 배려하시여, 참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예수님은 왜 심령에 통분히 여기셨는가?

-예수님은 왜 눈물을 흘리셨는가?

-자식이 그 부모의 뜻을 몰라줄 때 그 부모는 얼마나 가슴이 아픈가.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예수님은 왜 또다시 통분히 여겼는가?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예수님을 진실로 믿어보았는가?

-진실로 믿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는가?

-예수님은 왜 크게 기도하셨는가?

-예수님은 왜 나사로를 살리셨는가?



‘나사로야 일어나라!’


나사로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야라는 것을 증거하셨다. 이 표적은 죽기 얼마 전에 쓰신 마지막 표적이다. 이 표적은 예수님에 의해서 계획된 것이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즉시 가지 않으셨다. 그러면서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나사로는 죽었다.


제자를 배려하신 예수님


제자들은 처음에는 이 사실을 몰랐다. 나사로가 자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었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틀을 더 유하다가,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이것을 다행으로 여기셨다. 주님의 표적을 사용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할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눈높이 맞추어 주신다. 아무리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못했다. 그러자 나사로의 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신분을 다시 증거하시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의 인격적인 사랑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억지로, 강제로 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항상 영적인 것을 모르는 제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가르치신다.


자연의 질서를 위반하면서까지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셨다. 주님의 만든 세계의 질서는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큰 혼돈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원을 위해서라면 그런 질서도 깨면서까지 표적을 허락하신다. 여기에서 이신론자들의 오류와 칼뱅이 주장한 하나님의 섭리론과 예정론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위해 기꺼히 세상에 개입하시고 택자를 인도하신다.  그만큼 예수님은 택자(제자)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부모님들이 어린 자녀를 위해 기꺼이 아이의 수준으로 내려가서 아이를 이해시키는 일과 마찬가지이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런 일을 하는 것이다.


두 번이나 통분히 여기시는 예수님


그럼에도 하나님은 통분히 여기신다. 그들의 믿음 없음을 통분히 여기신다. 분명히 그전에도 표적을 보여주시며, 자신이 메시아이신 것을 증거했는 데도 불구하고 믿지를 못하는 것에 대해 가슴 아파 하신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를 전도할 때, 복음을 알아듣지 못하고, 딴소리를 할 때, 아무리 노력해도 말이 통하지 않을 때 답답함을 느낀다. 물론 말의 지혜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면서 전도할 때를 말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도 통분히 여기는 것이다.


비아냥거리는 유대인


유대인들은 비아냥거린다. '흥, 예수님이 나사로를 얼마나 사랑하였나 보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병들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으면 빨리 와서 고쳤어야 할 것 아니야! 예수님도 별로 능력 없네.' 그들의 생각은 부분적으로 맞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틀리다. 주님의 계획하심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 '죄를 회개하고 기도하면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했는데, 왜 안 될까? 왜 예수님은 나에게 은혜를 주시지 않는 거야.‘ 때때로 이렇게 주님을 비난하며 떠나는 사람이 있다. 당시에는 그 생각이 맞을지 모르지만, 전체적으로는 틀리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려 보아야 한다.


마르다와 마리에게 가장 완벽한 것으로 응답하시는 예수님


마르다와 마리아의 낙망은 너무나 컸다. 유대에 오실 때마다 자기 집을 들러서 유하셨던 예수님. 그분이 자기 3남매를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전했는데 오지 않아, 오빠가 죽게 되었다.

예수님만 함께 하셨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았다. 두 자매의 믿음도 대단하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신다는 것을 굳건히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춘다.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것을 결코 믿지 못하는 것이다. 맞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예수님 같은 분을 한 번도 못 보았을 뿐 아니라, 죽은 자가 살아난 것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일은 주님의 계획하신 뜻이 있어서 이루어진 사건이다. 따라서 영적인 의미가 무엇인줄 안다면, 아니 모른다고 해도 잠시 자신의 생각을 덮고 깊이 주님의 생각을 묵상한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을 순종하고 이해했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울면서 주님께 원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당장 어떤 일이 안 된다고 해도, 쉽게 불평하거나 낙망해서는 안 된다. 주님의 큰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무조건 주님을 믿고, 아브라함처럼 주님께 맡겨야 한다(찰스 피니의 ‘마음의 신앙’을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참 좁고 험하다. 가다가 낙망되어, 기도가 잘 안 될 때도 있다. 그러나 당장 하나님께서 구원을 안 주시는 것이 이해가 안 가고, 그 때문에 힘들어도 주님의 뜻을 믿고 나아가야 할 때가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은혜의 때이기 때문에 분명히 은혜를 허락해 주신다(고후 6:2).


나사로가 살아났다! 그렇다. 주님은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신다. 우리의 죽었던 영혼도 분명 살아 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을 위해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