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YH팡세

무지함에 대한 어느 부부의 대화

천국 도서관장 2009. 8. 25. 11:47

무지함에 대한 어느 부부의 대화


"오빠 난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 무지해. 왜 그럴까?"


"그럼, 여보,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많이 알아?


“글쎄.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진짜 모습을 잘 몰라. 자기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자연인의 수준에서, 자신의 실상에 대해 많이 접근한 사람은 철학자들일거야. 적어도 그들은 자신의 실존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했거든. 소크라테스를 보더라도 알 수 있어.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주장하는 소피스트에 대해서, 그는 일갈을 하지. ‘너 자신을 알라’ 이 한 마디는 소피스트에게 충격적이었어.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은 자기를 중심으로 또는 자기가 생각한 대로 돌아간다고 생각했으니 말이야. 하지만, 사실은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소피스트들은 자기 자신조차 정의하지 못했거든.”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주장한 소피스트는 왜 소크라테스에게 답변을 못 했지?”


“‘가령, 인생이란 무엇인가?’라고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에게 질문하면, 그들은 이렇게 답변했지, ‘인생이란, 삶과 죽음이다.’ 다시 소크가 질문하지. ‘그럼 삶과 죽음은?’ ‘삶은 수명이고, 죽음은 수명이 다 한 것이다.’(소피) ‘그럼 수명은?’(소크) ‘수명은 사람의 인생의 나이이다.’(소피) ‘그럼 인생의 나이는?’(소크) ‘인생의 연륜.’(소피) ‘연륜은?’(소크)...”


“뭐야, 끝도 없는 질문과 답변이네.”


“그래, 소크라테스는 이 점을 간파한 거야. 근원적인 답변을 모르는 인간의 한계를 말이야. 그러므로 인간은 만물의 척도가 아니란 것이지. 인간은 겸손히 진리에 복종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주제파악을 해야한다고 소크라테스는 생각했어. ‘너 자신을 알라’라는 일갈은 소크라테스의 이런 생각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야.”


“주제 파악?”


“그래, 주제 파악.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알라구.”


“그래, 자기 자신의 무지를 알아야, 세상의 진리를 탐구할 수 있다는 말이지. 그것은 관찰로부터 시작하고. 근원적인 것에 접근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니. 겸손히 진리를 탐구하라고 소크라테스는 주장한 거야. 그리고 이 겸손의 철학은 플라톤에게 이어지고. 계속해서 현대철학으로 계승되어 왔어.”


“겸손의 철학이라구?”


“그래, 원래 철학은 겸손으로부터 시작되었어. 하지만, 이성의 맹신으로 인해 얼마 후에는 교만해졌지만.”


“그렇구나. 그런데, 철학자는 근원적인 문제. 자신에 대해서는 답변을 찾은 거야?”


“찾지 못했어. 그 결과 철학은 해체 되었어. 양심있는 철학자는 자살하는 경우도 종종 있구. 또는 현실에서 도피하여 살아가기도 했어.”


“그런데, 여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알게 될 수 있을까? 먼저, 나 자신을 알아야 하는 것일까?”


“동시적일 거야. 인간 자신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거든.”


“어떻게 해야 알 수 있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야 돼.”


“그렇다면, 산 속으로 가야 하는 거야?”


“여보, 산도 세상에 속해 있어.”


“어, 그렇구나.”


“그럼 죽어야 알 수 있는 걸까?”


“그렇지.”


“뭐라고! 그럼 내가 죽어야겠네!”


“그렇지, 아 여보,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서 죽음이란, 세속에서 벗어냐야 한다는 의미야.”


“세속에서 벗어난다구.”


“그래, 이 세계의 가치에서 벗어나야 돼. 세속적인 존재의 제로점까지.”


“그게 가능할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찾아야 한다면서, 이 세상의 가치에서 대부분 자기 자신을 찾게 되어 있어. ‘나란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사람들은 묵시적으로, ‘나는 자유인이다.’ ‘나는 신이다.’ ‘나란, 죽으면 끝나는 존재이다.’ 이런 식으로 ‘나란, 무엇이다.’라고 정의내리지. 그러나, 그때 문제가 되는 것은 ‘나란, 무엇이다’라고 했을 때, ‘무엇’은 또 ‘무엇인가?’라는 의문부호가 따르게 되는 데에 있어. 이것을 철학에서는 존재론적인 질문이라고 해. 즉, 동어반복(tautology)을 통해서 또 다른 의미의 전진을 할 수 있다는 말이지. 가령, ‘나는 최용환이다.’ 했을 때, ‘나’와 ‘최용환’은 동일한 주체이기에 동어반복이지만, 그만큼 나의 신분이 노출 되었으니, 존재론적으로 일말一抹이나마 진전되어 있다는 거야. 그래서 철학에서 동어반복적인 존재론적 문답법이 중요한 거야.”


“하지만, 그 동어반복으로는 근본적인, 나라는 존재는 끝없이 정의되겠네.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는 끝까지 미궁에 남아 있겠네.”


“그렇지, 끝까지 알 수 없는 거야. 여기에 존재론의 한계가 있는 것이지.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철학은 인식론을 개발했어.”


“인식론?”


“그래, 인식론. 인식론은 진리를 어떻게 인식하는가라는 철학의 분과야. 가령, 나는 나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내가 최용환인 것이 아니라, 이름 최용환이라는 너머에 있는 근원적인 최용환을 이루는 그 존재를 나는 어떻게 인식하는가?”


“인식론에서는 그 존재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결국 인식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데카르트부터 시작된 근대철학에서 인식론이 매우 중요하게 대두되었어. 왜냐하면, 중세시대에는 내가 나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신이 나 자신을 인식하게 해주었으니까. 가능했어. 가령. ‘나는 최용환이다.’라고 인식할 때, 내가 이름 이상의 최용환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최용환’이라고 선언해 주었기 때문이지. 하지만 신을 제거한 근대철학은 나와 최용환을 일치시킬 수 있는 근거를 신에게서 찾지 않았어. 대신 그때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과학 또는 이성을 신의 자리로 대치시켜, 과학적으로 인간을 규명하려고 했지. 예를 들면, 의학적으로 해부해서, 인간을 규명한 거야. 그들은 인간을 이렇게 정의하지. ‘인간은 256개의 관절과, 5장 6부로 되어 있다.’ 여기에 여러 학문이 합치되어서,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규명해 나갔지. 물론, 이런 과학의 발달로 인간은 자신을 규명할 뿐만 아니라, 자연을 규명하여, 자연을 인간이 이용할 대상으로 만들었지.”


“그래서, 인식론은 인간 자신을 규명할 수 있었어?”


“그렇지 못했어. 인식론의 근본 문제는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주체를 ‘신’대신 ‘이성’을 대치해 놓았기에, 과연 인간이성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확실한 답을 낼 수 없었어. 그래서, 그들은 이성적인 신을 개발했어. 스피노자는 능산하는 자연을 확대해석하여 범신론, 라이프니쯔는 다신론을 주장했고, 칸트는 선험적으로 이성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고 했고, 헤겔은 변증법적으로 절대정신을 규명하여, 인간이성이 신의 영역을 대치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 하지만, 인간 이성이 진리를 완전히 규명하는 데는 실패했지. 마치 존재론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은 온전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반증했듯이, 인식론으로는 진리를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 규명되었지. 즉, 인간이 인식하는 것이 진리이냐, 아니냐, 이 일치문제가 인식론의 발목을 아주 굳게 잡은 거야.

근대 철학자의 완성자라고 자처한 헤겔이 아무리 절대정신으로 인하여 인간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고 독단적으로 주장했지만, 그 절대정신은 결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지(헤겔의 절대정신은 객관적이기보다는 주관적이었다. 그래서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했다. 이 주관성은 칸트에서 비롯되었다. 칸트는 일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의 주관성을 강조하였다. 즉 그 누구도 객관적으로 물자체를 볼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주관적 이성으로만 세상을 볼 수 있다. 즉 자신이 옳게 보면 옪은 것이고 그르게 보면 그르게 된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주관성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는 ‘선험적 이성’이 그 주관성을 어쨌든 보증해준다고 했다. 즉 그는 이성의 객관성을 믿었다. 쉽게 말하면 칸트의 신은 이성이었다. 그의 철학을 발전시키고 근대철학의 완성시킨 헤겔의 신도 이성이었다. 즉 그가 아무리 절대정신이 객관적이라고 주장했지만, 결국 절대정신은 칸트의 선험적 이성의 범주에 있었다. 이성은 인간의 주관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근대철학의흥망성쇠>

근대철학 시작-데카르트-스피노자/라이프니쯔-영국 경험주의-칸트/헤겔-근대철학 붕괴

 

-존재원인(아르케, 실체)은 신이 아니라, 이성과 물차제(연장)이다.

-이성과 물자체는 개별적인 존재이다.

-실체가 둘 이 되었다.

-이성이 물자체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이 문제가 근대철학의 아킬레스 건이다.

-결국, 이성은 보편적이고 객과적이 아니라, 주관적인 존재인 것이 규명된다.

-주관적인 것은 진리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근대철학은 주관적인  철학이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된다. 즉, 말발만 세면 누구나 철학자가 될 수 있다.

-철학은 진리를 규명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근대철학은 이성으로 진리를 규명하려고 했으나, 이성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진리를 규명할 수 없었다.

-이렇게 근대철학은 헤겔를 끝으로 붕괴되었다.

-그 이후 현대철학에서는 진리를 규명하는 대신, 현상을 해석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즉, 현대철학은 본질에 대한 접근은 포기하고, 시류에 따라 유행하는 현상을 해석하는 비중이 가벼워진 학문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현대철학은 중세의 신학이 그랬던 것처럼, 학문의 왕좌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결국, 그(헤겔)의 절대정신도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드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어, 즉, 그들이 보기에 인간은 절대정신이 없었어. 마르크스는 자본의 역사에 의해 인간은 끌려가는 존재이고, 니체는 절대정신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강자와 약자와의 끝없는 권력의지에 이 세상은 굴러 가고 있다고 주장했고, 프로이드는 무의식의 발견으로 인간이 의식만으로 이루어져있다고 생각한 절대정신을 파괴했지.

과학으로 즉 이성으로 인간을 규명하기에는, 아니 더 나아가서 진리를 규명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어. 생각해봐, 철학이 인간 자신을 규명하고, 진리를 규명했다면, 이 세상은 천국이 되어 있을거야.”


“그런데 오빠, 인식하는 것 하고, 행동하는 것은 다른 것 아닐까? 만약 철학이 인식론으로 진리를 제시해 주었다고 해도, 인간의 나약함으로 진리를 실천할 수 없지는 않았을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철학에는 윤리학이라는 분과가 있어. 사실. 칸트는 이 윤리학을 매우 중요시했지. 그도 연구해 보니까, 인간 이성은 자연법칙이외에, 형이상학적 법칙까지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 그래서, 실천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지. 미세하게 들려오는 진리의 음성에 순종하여 살자. 처음에는 미세하게 들려올지라도 훈련하면 진리의 음성이 크게 들린다. 우리는 그 음성을 듣고 최고선을 향하여 나아가자고 했지.”


“그래서 윤리학은 최고선으로 나아갔어?”


“나아갔다면, 우리의 세상은 지금 천국이 되어 있겠지? 아무리 훈련해도 안 됐지. 왜냐구? 무지한 백성은 그만두고라도, 같은 철학자들도 또는 그의 후학들은 칸트의 생각이 틀렸음을 증명했고, 윤리학조차 독단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야. 그의 후손들이 1,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독일 국민임을 잊지 말아야 해.”


“그렇다면 철학은 아무 의미가 없는 거야?”

 

“그렇지 않아, 그들의 시도는 우리에게 진리의 존재를 말해 주고 있어.”


“진리의 존재를? 어떻게?”


“근대 이후, 세계는 마르크스를 거쳐, 현대 철학으로 넘어가지. 그 중에 중요한 사람이 에드문드 훗설이야. 그는 현상학을 체계화한 중요한 업적을 쌓았어. 훗설은 기존의 모든 것을 부정하자고 했어. 현상을 독립적으로 보자고 한 거야. 현상에 존재하는 부대적인 것을 제외하고 세상의 현상 그 자체만을 보자고 한 것이지. 그러면, 그 현상의 근본 원리를 알 수 있다고 했어. 그렇지 못하고, 현상을 현상 자체로 보지 않고, 그 부대적인 것과 같이 보게 되면, 절대 현상의 근본 자체를 파악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


“오빠가 말한 것하고 비슷하네. 자신을 알려면, 세속에서 벗어나, 즉, 모든 관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 말이야.”


“그런 면도 있지. 하지만, 어떤 현상에 대해서, 그 부대적인 것을 모두 버리고, 그 자체로만 파악하기는 불가능해. 가령, 사막에서의 ‘물’과 홍수가 난 곳에서 ‘물’은 같은 물체이나 전혀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잖아. 그래서 어떤 현상이 독립적으로 파악되기는 불가능해. 또한 현상에 대해서 독립하여, 자신이 파악했다고 해도, 파악된 것이, 나와 다른 사람과 그 결과가 다르다면,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를 어떻게 판별할 수 있을까?

훗설의 이런 주장은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에게 계승되지. 하이데거 역시, ‘탈존(脫存Eksistenz)’이라는 개념을 주장하지. 즉 지금의 존재에서 탈출해야, 현존재가 인식되어 참존재가 된다는 거야. 그렇다면, 다시 훗설과 똑같은 문제가 일어나지. 아무리 탈존했다고 해도, 세상과 관계가 없이 존재할 수 있는가? 또한 탈존한 존재가 참존재라면, 탈존한 사람들은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 인식이 모두 일치되는가?

이에 대해 하이데거는 탈존한 존재는 ‘피투사성’이 있다고 먼저 해결책을 내놓게 되지. 즉 탈존한 존재도 세상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상 속에서 살게 되어 있다는 거야. 그래서 세상은 탈존을 방해하고, 탈존자는 계속해서 탈존하려고 투쟁한다는 것이지. 따라서 탈존자는 세상을 주체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가 있는 거야. 세상을 기존에 주어진 것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의 모든 역사로부터 탈출하여, 참진리를 인식한 현존재가 참존재로 살 수 있으니. 그가 사는 대로 세상이 바뀐다는 의미이지.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탈존자들마다 세상을 다르게 인식한다면이라는 문제가 남게 되어 있지.”


“뭐야, 아무리 철학자들이 발더둥쳐도 역시 진리를 인식할 수 없다는 거네.”

    

“그렇지, 그래서 샤르트르는 존재의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소경이라는 것을 알았지. 신과, 이성, 과학, 역사, 물질에서 인간이 독립했을 때, 남는 것은 암흑이었던 것이지.”


“그렇다면, 아까 오빠가 철학의 한계로 인해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이 증명된다는 말은 무슨 뜻이야?”


“응, 철학이 세상의 의미망으로부터 독립하여 참 진리를 추구한 것은 참 의미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인간의 이성은 거기까지라는 거야. 아무리 세속의 의미망을 벗어나려고 해도, 그것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인 이상 거기에서 벗어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거야. 따라서, 이성의 차원으로는 진리를 알 수 없다라고밖에 할 수 없어.

그러면 진리는 없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인식하기 불가능하다고 해야 하나? 진리가 없다면 왜 인간은 진리를 추구하려고 했을까? 우리가 어떤 존재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먼저 그 없음부터 생각할까, 있음부터 생각할까? 없다는 것을 먼저 전제한 후에 있음을 생각할까? 있다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없음이라는 개념이 생겨났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있음을 기준으로 해서 없음이라는 존재가 나타났을 거야. 없음을 기준으로 해서는 있음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거든. 즉, '없음' 자체도 '있음'이라는 전제가 없으면 절대로 발생할 수 없기 때문에 '있음'이 있어야 '없음'이 있다고 할 수 있지.

그러니까, 철학에서의 진리에 대해 '알 수 없음'이라고 했을 때, 진리가 있으니까, 없음이라는 개념이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이야. 따라서 철학이 진리를 추구하려고 했던 것은  철학의 비진리성을 전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어.

왜냐하면, 선한 사람은 선하지 않으려고 해도 선해. 선하지 못하거나, 선을 추구하지만 아직 선하지 못한 사람이 선해지려고 하는 것이야. 이처럼, 진리는 자연스럽게 있어도 진리로 들어나게 되어 있어. 철학이 아무리 부산하게 움직여도, 그럴수록 그것의 위선과 부족함만 들어날 뿐이었던 거야.”


“그러면, 오빠, 나는 어떻게 나를 알 수 있는거야? 적어도 세상의 가치관을 생산하는 철학에서 벗어나야 겠네.”


“그래, 철학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해.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관계는 모두 철학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니까. 또한 철학은 모든 학문의 원류이거든. 여기에서 과학, 문학, 사회학 등등 모든 학문이 나왔거든. 이 학문의 기초에 의해 세상은 문명을 이루었고, 그 문명 속에서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인 모든 관계를 거미줄처럼 쳐 놓았거든.

나는 가끔 생각하지.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이 무엇이 중요하지. 내가 남자라는 것이. 내가 경주최씨라는 것이. 내가 AB형이라는 것이. 내가 서울시민이라는 것이. 내가...무엇무엇이라는 것이....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세상의 가치관으로 만들어진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지? 마치 꿈에서 깨면, 꿈에서 만들어진 관계가 물거품처럼 사라지듯이, 나의 이 관계성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가 밟아 왔던 궤적과 그 결과물로 남은 모든 것들은 정말 가치 있는 것일까?

이교도異敎徒의 연장인 철학(철학은 신화를 계승하고 있다)은 나를 속여 온 것이다. 철학을 낳은 모든 이교도 역시 나를 미망으로 이끈 것이다. 마치 자석이 있으면, 거기에 자기장이 발생하는 것처럼, 그래서 거기에 끌려가, 그 자기장의 역학에 역학적으로 반응하는 것처럼, 나는 이 세상의 자기장의 힘에 의해 움직여져 왔던 것은 아닐까하고.“


“거기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 거야?”


“지식의 근본을 찾으면 되는 거야. 지혜의 근본을 찾으면 되는 거야. 지금 당신은 선해지고 싶고, 지혜로워 지고 싶고, 하나님을 알고 싶지? 그런데 그 역으로 생각해보면, 지금 당신은 악하고, 지혜롭지 못하고,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거야. 그렇지?”


“...”

 

“그렇다면, 그것을 먼저 완전히 알아야 해. 나의 무지를. 나의 악함을. 당신은 친구들에게 잘 해주고 싶고, 남편인 나에게도 잘 해주고 싶지? 그렇다면, 그것은 비약하자면, 당신은 친구에게 잘 해주지 못하고 있으면. 남편에게도 그렇다는 것이지.”


“어머, 그렇네. 그거 견디기 힘든 진실이예요.”


“하지만, 불가항력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어. 선한 존재는 그 자체로 아무 노력하지 않아도 본성적으로 선한 것이야. 사자 그림을 보면, 그렇게 무섭지 않지만, 진짜 사자는 내가 그 존재의 이름을 몰라도 본능적으로 무서운 법이지.”


“...”


“세상의 자기장으로 벗어나야 해. 악으로 이끄는 자기장으로부터. 이것을 벗어나려고 조금만 시도해 보면, 그 힘에 놀라게 될 거야. 평소에는 느껴지지 않던 강력한 힘을 인식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군요.”


“하지만, 우리는 이 지금의 현존재 상태가 비정상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해. 세상의 악함과 자신의 악함을 이제는 알 거야. 그리고 이 악함이 싫지. 그렇다면 이 세상의 선함의 결핍을 알게 될 거야. 아, 이제 언어의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는 지점에 왔어. 백척간두에서는 무엇을 해야 하지?”


“進一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