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설교는 ‘믿음’에 대해서 실질적으로 알려준다. 피니는 말한다. 믿음은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의 신앙이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 믿으려고 한다면, 절대 믿을 수 없다. 마음으로 믿을 때 이해의 폭이 깊어지고, 예전 다른 차원에서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
이성의 믿음은 비자발적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의지의 발휘가 전혀 없다. ‘a는 b이다.’ ‘8시 30분에 부산행 기차가 온다.’ 와 같은 사실에 대한 믿음은 전혀 신앙적인 믿음이 아니다.
하지만 마음의 믿음(신앙)은 자발적이며 의지적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자발적이고 의지적으로 움직인다. 이성이 마음을 반대할지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넘어선다. 즉,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는 이성의 불가능성에 대한 경고를 가볍게 넘어선다! 물론 때로는 매우 힘들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어려움을 넘어선다.
<마음의 신앙>은 자세히 보면, <신앙감정론>의 1부와 <기독교 강요> 1권을 보는 느낌이 든다. 즉, 에드워즈 목사님은 신앙에 있어 좌소는 마음에 있으며, 마음의 믿음은 자발성과 의지라는 속성이 포함된다고 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해서 모두 알아야 믿을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칼뱅은 태양을 연구한다고 하여 태양을 계속 처대보면 눈이 멀어버리듯이, 하나님에 대해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다(소경)고 했다.
이는 내 경험에도 맞는 말이다. 마음으로 진정으로 믿을 때 어느 순간 성령님께서 조명해주시어 진리를 깨닫게 해주신다. 로마서 10장 10절 말씀처럼, 우리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는 것이지 머리로 믿어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양심을 주셔서 믿음에 이르는 근거를 주신다(존 웨슬리 목사님에 따르면 '선행은혜'를 주셔서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택자는 하나님에 대해서 무조건 끌리게 되어 있다. 자발적으로 그의 뜻에 따르고 의지적으로 그의 나라로 침노하게 되어 있다. 자발성과 의지의 발휘! 이것이 마음의 신앙의 핵심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마음으로 믿게 하신다. 분명 마음으로 믿으면 성령께서 조명을 해주신다. 그때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게 된다(고전 2:10).
마음의 신앙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롬 10:10).
위의 본문을 가지고 다음의 사실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Ⅰ. 지적인 신앙과 마음의 신앙의 차이
Ⅱ. 지적인 신앙의 몇 가지 조건들
Ⅲ. 마음의 신앙의 조건들
Ⅳ. 마음의 신앙이 의-진정한 순종-에 이르게 한다는 것
Ⅰ. 지적인 신앙과 마음의 신앙 사이의 차이를 주의 깊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흔히 신앙이라고 불리우는 마음의 상태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이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마음이라는 말도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실상 다소간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 용어는 별로 없습니다. 그 때문에 구별한다는 것이 아주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말에 있어서도, 성경은 “마귀도 믿고 떠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음의 신앙을 가졌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귀는 “믿음으로 의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적인 신앙이란 하나의 판단-견해-입니다. 정신적으로 판단을 해서 사실이 그렇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믿은 것의 속성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것은 비자발적인 마음의 상태인 것입니다. 믿어진 그 사실들이 진실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것일 수도 있고 종교의 위대한 근본적 사실들과 교리들을 포함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의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종종 사람들은 자기들의 판단을 확신할 수 있지만 이러한 확신은 그들의 지성을 넘어서는 것은 아닙니다. 혹은 아마도 그러한 확신이 훨씬 더 멀리 나아가서 그들의 감정을 움직이기까지 하고 그들의 감수성에 영향을 미치기까지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이상은 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것은 의지에 아무런 변화를 낳지 못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도덕적 목적을 전혀 낳지 못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자발적인 마음의 상태에 도달하는 데는 완전히 실패해서 삶에 아무런 변화를 낳지 못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신앙은 참된 신뢰(confidence)입니다. 또한 그것은 한 사람의 자아와 복리를 자기가 믿는 진리의 요청에 진지하게 위탁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신뢰감 가운데 의지하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가지는 그러한 위탁과 꼭같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아이들이 자기 친구들이나 부모들에 대해 느끼는 그러한 의탁인 것입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그들이 하는 말을 믿고,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보호에 자신을 맡길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음은 이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자발적인 정신(mind)의 상태입니다. 그것은 항상 본질적으로 의지의 행동입니다. 이런 종류의 신앙은 물론, 항상 감정에 영향을 미치며 삶에 영향을 줄 것입니다. 자연히 그것은 의를 향하는 경향이 있으며 “의에 이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을 포함하며 그 본성상 애정을 영감받은 저자들은, 신앙이란 애정을 제외시킬 정도의 순수한 의지의 행위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신앙이 애정을 포함한다고 기록했습니다.
Ⅱ. 지적인 신앙의 몇 가지 조건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항상은 아니지만 때때로 마음의 신앙은 지성의 신앙에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격에 관계되는 사실들을 조사할 적절한 준비가 되기 전에 마음의 신앙을 가지는 것이 필요할는지 모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과 관련해서, 만일 우리가 그분에 대한 마음의 신앙이 부족하다면 우리는 결코 그분의 사역과 방법의 증거들을 공정하게 다룰 수 없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관계된 정신의 저항할 수 없는 가정들과 연구나 추론에 의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것들 사이의 거대한 차이를 주목하는 것이 좋습니다. 마음의 신앙은 모든 정직한 조사에 필수적인 것 같습니다.
2. 그것은 또한 진리에 관한 우리의 확신에도 필수적입니다. 내가 만일 어떤 친구에 대한 마음의 믿음을 얼마만큼이나 가지고 있지 않다면 나는 그 친구에 대해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못한 것입니다. 내가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에 대해서 심히 불미스러운 소문을 듣는다고 합시다.
나는 그에 대한 존중 때문에 그 소문이 증거에 의해 충분히 뒷받침되기까지는 그 불미스러운 소문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한편 만일 내가 그에 대한 마음의 신뢰가 거의 없다면 나의 지성은 완전히 팽개쳐져서 나는 나와 그, 양자에게 모두 최대의 불공정을 행하게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신앙과 관련해서 이러한 경험을 해 본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생활을 해 나가는 가운에 마음의 신뢰가 없었다면 크게 속을 뻔 했던 일이 종종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여러분의 마음이 그것을 막아 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자비로운 판단을 할 수 있는 여건 속에 있었고 그래서 진실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3. 마음의 신앙은 특히 신비가 필수입니다. 물론 종교적 교리에는 심히 신비한 점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종교적 진리에만 고유한 것은 아니고 하나님의 사역의 모든 부분에 공통된 것입니다. “그것은모든 현실적 학문에 공통된 것이다”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 아이라도 내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신뢰가 없다면 사회가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종종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일의 성질상 하나님에 관해서도 틀림없이 신비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우리는 유한하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최대의 무한한 신뢰를 가질 수 있게 할 정도로 자기 자신을 충분히 계시하십니다. 그런고로 조금 이상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왜냐하면 사실상 우리의 모든 사회관계에도 그러한 것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아주 의심스러운 경우에도 우리의 친구들을 신뢰해야만 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뢰하고 그 후에 점점 진실이 밝혀져서 우리의 마음의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불공정한 처사를 하지 못하도록 막아 주었던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4. 또한 마음의 신앙은 상충되는 증거가 있는 곳에 특별히 필요합니다. 가끔 여러분은 하나님이 편파적인 분인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지지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만일 저변에 하나님은 옳으시며, 옳으심에 틀림없다는 확신이 깔려 있으면 여러분은 무난히 통과할 수 있습니다. 한 여인을 보십시오. 그녀는 모든 것-남편, 아이들 그리고 전부-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떻게 그녀가 이것을 설명할 수 있었겠습니까?
여러분은 남편과 가족들과 함께 서부로 여행했던 그 여인의 경우를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 그녀는 남편과 다른 자녀들을 모두 장사지내고 두 어린 것만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것들을 데리고 처량한 걸음으로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지독한 가난과 피곤으로 인해 그녀는 황혼녘에 어떤 낯선 사람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심술궂은 그 집 주인은 그녀를 거리로 내쫓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인정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받아들이자고 고집했습니다. 비록 자기가 밤새 앉아서 지내더라도 그렇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슬픈 과부의 어려운 시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녀는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슬픔과 신앙이 뒤섞인 이러한 탄식을 그녀는 말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을 그녀는 어떻게 확실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당신이 당신의 남편을 믿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와서 당신 남편은 떠나가 버렸으며 자기의 서약을 저버렸다고 말해 준다고 합시다. 당신은 그와 같은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낼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남편에 대한 신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많은 신비한 성품과 방법에 대해서 그러한 태도를 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존재의 시작도 없이 존재하실 수 있는지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혹은 어떻게 삼위로 존재할 수 있는지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어떤 존재도 한 인격 이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어떻게 그가 영원히 선하시고 그러면서도 죄와 비참이 인간에게 일어나게 할 수 있는지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마음의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마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이처럼 말합니다. “저는 당신을 심문하거나 불필요한 질문 공세를 펴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잘못된 일을 결코 하실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 신비가 어떻게 설명되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신뢰 속에서 내 영혼은 귀한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자기를 떠났다가 돌아온 남편을 본 아내가 한 마디의 설명도 요구하지 않고서 남편의 품으로 달려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녀가 다정한 말을 하기 전에 남편의 설명을 기다렸다고 합시다. 그것이 그녀를 이지적인 여자로 보이게 할지는 몰라도 그녀의 마음에 대해서는 좋은 평가를 하기가 어렵게 만들 것입니다. 그녀가 마음으로 자기를 신뢰해 주었기 때문에 남편은 그녀를 이전보다 더욱 더 사랑하게 되며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께 대한 당신의 관계에 적용할 수는 없습니까? 당신이 보기에 하나님은 변덕스러운 분 같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 당신은 압니다. 하나님이 불공평하신 것처럼 보일는지 몰라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당신은 압니다.
아, 그리스도인들이여, 당신들이 하나님의 긴 안목과 크신 사랑을 이해하게 될 때는 욥처럼 부르짖을 것입니다. “비록 그가 나를 죽이신다 할지라도 나는 그를 의지하겠노라.” 당신이 그와 같은 신뢰를 가졌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그전 어느 때보다도 당신의 마음을 더욱 구하게 여기시지 않겠습니까?
Ⅲ. 이제 우리는 마음의 신앙의 조건이 아닌 것은 무엇이며 조건인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믿음의 대상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조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추론과 설명은, 사실을 지탱하고 그것을 마음으로 믿게 하는 증거와는 전혀 별개의 것입니다.
2. 사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경우에 있어서도 모든 이유들을 다 아는 것은 별로 필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차이점의 근거는 이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항상 옳으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이 항상 옳다고는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한 우리의 깊고도 저항할 수 없는 확신은 그는 모든 것에 옳다는 것 입니다.
인간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런 확신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에 있어서조차도 우리는 종종 그들의 전직에 대한 확신 때문에 그들을 신뢰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하물며 하나님에 대한 더 강한 확신이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더 그를 신뢰하게 해 주겠습니까!
3. 또한 하나님에 대한 이 마음의 신앙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있지도 않습니다. 많은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것에 대해서도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그것은 마치 그들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생각을 한번도 해 보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저항할 수 없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다른 증거는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분의 존재와 임재를 의식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당신의 속사람에 계시되어야만 합니다. 아마도 온 우주에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보다 더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다른 어떤 존재나 사물보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 마음의 신뢰는 인간의 속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에 기초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계시는 최고의 확실성을 가진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우리는 관찰의 대상들을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더 강한 확신이요 확실성입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게 되며 이 직접적이고도 적극적인 지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4. 또 하나의 조건은 영혼이 내적으로 하나님께 끌린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상호간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는 때때로 우리를 친구에게로 이끄는 특별한 감정을 의식합니다. 이것은 의식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그와 비슷한 힘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며 그것은 마음의 신앙의 가장 강한 형태의 자연스러운 조건인 것 같습니다.
5.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은 마음의 신앙에 절대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선의가 없이는 마음의 신앙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남편에 대한 마음의 신앙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녀의 마음이 진정한 사랑 속에서 남편에게 끌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마음의 신뢰가 없어져서 더 많은 증거를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원리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랑을 얻고 우리의 마음을 그분에게 이끌기 위해서 수단을 사용합니다. 사람들이 서로서로에게 하듯이 하나님도 우리에 대한 자신의 깊은 관심을 표명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낌없이 축복을 쏟아 부으시고 그가 정말 우리의 친구라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다 우리 마음의 신뢰를 얻기 위해 그가 사용하시는 수단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건강, 은사들, 우리의 모든 안락함들-을 받았다는 것이 분명해 질 때 우리는 많은 어둡고 시험되는 일들을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는 비록 그가 우리를 치신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들이 자녀들을 매질한다 할지라도 아이들은 부모님이 자기들을 사랑하며 자기들이 잘 되기를 바란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광범위하고 일반적인 사랑의 표현 하에서는 비록 당장은 사랑의 표현이 없다 하더라도 그들은 신뢰하는 것입니다. 세실(Cecil)이 자기의 어린 딸에게 복음 신앙의 의미를 어떻게 가르쳤는지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루는 그녀가 손에 구슬을 한 줌 쥐고 와서 아주 기뻐하면서 그에게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아이에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그것들을 모두 불 속에 던져 버려.”
아이는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주 진지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아이는 순종해서 정말 그것들을 불 속에 던졌습니다. 며칠이 지난 뒤에 그는 딸에게 보석 상자 하나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습니다. “자, 내 딸아 요전에 너는 나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었어. 그리하여 너의 구슬들을 불 속에 던져 버렸어. 그것이 믿음이야. 이제 나는 너에게 훨씬 더 귀중한 것을 줄 수 있단다. 이게 훨씬 더 낫지 않니?”
이와 같이 여러분은 항상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분은, 믿고 자기들의 죄를 던져버리는 자들을 위해서 보석들을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Ⅳ. 또한 마음의 신앙은 의-참된 순종-에 이른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 신실하고 애정깊은 마음의 상태는 자연히 우리를 하나님에 대한 순종으로 이끌어 갑니다. 나는 종종 고대의 신학자들이 나타내 보인 신앙을 흠모했습니다. 그는 아주 커다란 불합리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강한 신뢰를 고수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종교적인 진리에 대한 그들의 철학 속에 내포된 가장 불합리한 원수들을 비웃을 수 있었습니다.
교회의 대다수가 필연론자들이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그들은 의지의 자유가 아니라 의지의 속박을 주장했습니다. 그들의 교리란 것은 의지가 강한 동기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러한 철학적 견해를 가졌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지극히 선하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 철학의 불합리성이 하나님에 대한 그의 신앙을 흔들어 놓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처럼 모든 구파의 신학자들도 극단적 칼빈주의의 불합리성을 신봉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피조물들의 도덕적 행동들을 절대적이고도 완전하게 통제한다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비이쳐 박사는 수년 전에 윌슨 박사와의 논쟁에서 주장하기를 의무는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내포한다고 했습니다. 윌슨 박사는 그것을 일축했습니다. 그 후에 비이쳐 박사는 극소수의 사람만이 용감하게 돌진해서 그러한 명제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너무나 신뢰하기 때문에 지독한 불합리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은 종종 있는 일입니다. 여기에는 내가 과거에 생각했던 것보다도 적은 미신과 더 많은 신앙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독단과 철학을 망각하고 그 양자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며 신뢰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괴상망칙한 교리들을 주장했는데 심지어는 하나님이 죄의 창조자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범죄하게 하는 데에 자신의 신성한 능력을 사용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성령에 의해서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에몬스 박사가 그러한 견해의 주창자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경건의 소유자였고 어린아이같이 신뢰하는 영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어떻게 그토록 불합리한 사실들을 주장할 수 있는지 또 그러면서도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달콤한 신뢰를 소유할 수 있는지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그 괴상한 철학과 신학에 대한 지식 외에 다른 어떤 영향력에 의해서 확정되어 있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분명히 그들의 이성과는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이성의 직관적 증언과 그들이 철학적 추론에 의해서 도달한 사항들은 전혀 별개의 것이었습니다. 전자는 하나님에 대해서 거짓말할 수가 없었으나 후자는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전자는 마음의 신앙을 위한 확실한 기초를 제공했지만 후자는 그들의 지적인 인식들-그들의 기독교 신앙을 결코 흔들 수 없어 보이는 불합리성들(우리는 그 사실에 감탄해 마지않지만)-을 보충합니다. 이러한 추론들이 그들을 거대한 불합리로 몰고 갔지만 그들의 이성이 그들의 신앙과 경건을 바로 세워 주었던 것입니다.
마음의 신앙은 모든 형태의 불신앙에 대항하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어떤 것도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경건없이 직관적 이성의 증언을 버리고서 철학적으로 모든 난제들을 해결하려고 할 때 그는 거의 불가피하게 걸림돌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섭리에 많은 신비들과 난점들을 뛰어넘게 해 줍니다. 이 영역에는 난점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섭리적 계획과 목적들의 밑바닥까지 꿰뚫어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또한 이 마음의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구속의 신비들을 뛰어넘게 해 줍니다. 마음이 이 모든 신비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하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일반적으로 구속은 철학적으로 이해되기 전에 마음에 의해 받아들여져서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사도들에게 있어서도 그러했습니다. 그들의 청중들도 그러했습니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그러했습니다. 성경은 사실상 구속의 철학적 측면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교리도 그러합니다. 다른 여타의 교리들도 일반적으로 그러합니다. 그것들은 실천적 진리로써 알려지고 가르쳐졌습니다. 그것들의 철학이 특별히 연구되기 오래 전에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의문이 생겨난다 할지라도 마음의 신앙에 의해서 극복되거나 이성의 직관적 확언에 의해 해결되었던 것입니다. 사변적 추론에 이해 해결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에 대한 그러한 신앙을 요구하시는 것은 어떤 의미로도 터무니없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진리라고 알지 않는 것을 믿으라고 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그분은 우리에게 상식을 포기하고 끝없이 믿기만 하라고 요구하시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그 분은 우리에게 상식을 포기하고 끝없이 믿기만 하라고 요구하시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일반적인 성품을 섭리의 어떤 어두운 처분들을 의심없이 받아들일 때 우리가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신비한 처분에 대한 특별한 이유가 아니라, 우리에 대한 그 어두운 측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손길은 선하시고 지혜로우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는 것은 그분의 일반적 성품을 신뢰할 수 있는 풍부한 근거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여러분이 나에게, 나의 절친한 친구가 거짓말을 했다고 말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믿을 수 없어요. 나는 그를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이 말합니다. “여기 증거가 있어요. 이것은 그에게 아주 불리한 증거예요.” 나는 대답합니다. “그럴지도 모르죠. 그래도 난 믿을 수없어요. 무슨 이유가 있었겠죠. 난 믿을 수가 없어요.”
이제 나는 내 친구에 대한 모든 억측과 소문들을 일시에 거부할 수 있는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 친구에게 불리한 그 증거가 절대적으로 확증되기까지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합리적인 처사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섭리의 어두운 면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그러하겠습니까!
사람은 우리를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없다는 것을 고려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가장 깊은 곳까지 항상 알 수는 없습니다. 만약 안다면 문제는 다를 수 있습니다. 한때는 진리였던 것이 허위로 밝혀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직관적 확신은 하나님이 항상 선하시며 항상 지혜로우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의 사랑에는 어떤 감퇴도 있을 수 없으며 그분의 성품에는 어떤 혁명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단언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현존하는 증거없이 뿐만 아니라 그것에 반해서도 하나님을 믿도록 요청을 받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서 낯선 땅으로 가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 순종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많은 질문들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질문도 한 것 같지 않습니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그는 진지하게 외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정당했을 것입니다. “주님! 그것은 살인입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내 가슴 속에 심어 주신 자연적 애정을 말살하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주위에 있는 이방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자녀들을 불 가운데 통과하게 하는 그 끔찍한 죄악들을 더 담대히 행하게 만들 것입니다.”
이런 말들을, 그리고 그보다 더한 말들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명하시니 나는 순종할 뿐이다. 그가 기뻐하신다면 죽은 자 가운데서 이삭을 살리실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정말 자기 아들 이삭을 드렸으며, “비유적으로 말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다시 얻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믿음의 행위에 인을 치셨으며 모든 세데 앞에 어두움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믿고 순종한 모범으로 그것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하나님의 일반적인 성품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오는 증거 외에 아무런 다른 현존하는 증거없이 믿으라는 요청을 받는 것입니다. 얼마동안은 모든 일이 불리하게 되어 가는 것처럼 보이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믿으라는 것입니다.
커다란 시험을 거친 한 여인이 결국 하나님에 대한 위대한 신뢰를 얻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주님, 나는 당신이 선하다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서 그것을 나에게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것에 걸려 넘어집니다. 그들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 진리를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결 론
1. 이유를 요구하는 것은 종종 우리의 신앙을 당황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마귀의 술수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우리가 믿기 전에 하나님의 모든 길들을 이해해야만 한다고 말함으로써 우리의 신앙을 흔들리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불가능하며 불합리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피의 희생으로 드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항의할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신앙은 단순한과 아름다움이 바로 여기-아무런 질문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더 깊은 통찰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그분의 지혜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길의 모든 이유들을 이해한다 할지라도 이 지식이 그에게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은 그 때에 조차 거역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러분은 왜 아브라함의 신앙에 대해서 그토록 많은 언급이 있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영광스럽게도 신뢰하며 묻지 않는 신앙이었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본보기입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온 세상에 흠모할만한 모법으로 추천하시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2. 신앙은 종종 어두운 가운데서 전진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진실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신앙의 성도들의 역사를 읽으면서 신앙은 종종 시련을 거친다는 것을 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든 발걸음마다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기 전에 하나님의 모든 이유를 알아야만 한다고 하면 그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신앙의 상태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앙의 가장 충분한 근거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성품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특정한 행동에 대한 특별한 이유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3. 우리는 단지 어린 아이들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방법들에 대해서는 비참할 정도로 무지한 자들인 것입니다. 모든 면에 있어서 그가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은 우리에게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유들을 이해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그분을 신뢰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바로 여기에 신앙의 장점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정한 행위에 대해 결코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의 일반적인 성품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선하시다는 것을 확신시켜 줄만한 정도의 지식은 충분하기 때문에 비록 특정한 경우에 대한 특별한 증거는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소유하거나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믿음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방법 안에서 쉬지 못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로, 지금 여기서 신앙을 훈련하게 만드시는 것은 아주 필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늘에서도 역시 하나님의 모든 방법들을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성도들도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완전한 지식 위에서가 아니라 단순한 신앙에 의해서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천국의 성도들이 죄가 세상에 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은 신앙에 얼마나 큰 시험이 되었겠습니까!
최후의 심판이 오기 전에 그들은 아마 그 이유를 거의 알 수 없을 것이며 그래서 그들 마음의 직관적 확신에 의지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말할 수 있었던 전부는 “우리는 하나님이 선하시며 지혜로우시며 틀림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다리면서 결과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겸손히 신뢰해야만 한다.”
5.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특별히 자녀가 모든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방식을 택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한다고 공언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을 그런 식으로 훈련시키지 않습니다.
신앙은 어린아이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녀들이 신학자 되기까지는 회심했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복음 체계의 모든 위대한 사실들이 설명되어서 그 논리를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보다 더 사실과 거리가 먼 것은 없는 것입니다.
6. 어릴 때 회심한 사람들이 커서 신학도가 되어서는 자기의 철학과 지혜를 자랑하게 되면서 단순한 신앙을 잃어버리고 불신으로 빠지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나는 그들이 신학을 인간 지식의 한계까지 속속들이 공부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내가 반대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위대한 교리들에 대한 실제적 증거가 부족하지는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들의 철학이 가장 현명한 사람까지도 물리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진리의 증거는 어린아이나 철학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을 한결같이 만족시킬 수 있어야만 합니다.
지난 겨울 나는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내가 언급하는 이유는 그것이 기독교의 한 면모를 밝히 드러낸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어떤 판사가 자기 동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적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은 마치 내가 당신을 아는 것만큼이나 진실하고 확신하다는 주장을 가지고 당신에게 옵니다. 당신은 그러한 간증을 거절할 수 있습니까? 만일 당신이 어떤 다른 주제에 대해서 그러한 간증을 거절한다면 이 나라의 시민들이 당신에게 무라고 말하겠습니까? 당신은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의 경험을 간증하도록 허용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이 대답합니다. “대답할 말이 없군요.”
“그렇다면 왜 당신은 이 간증을 믿지 않습니까? 나는 당신 앞에 동일한 증거를 할 수 있는 수천 명을 데려올 수 있습니다.”
7. 나는 다시 말합니다. 복음의 진리들을 신학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 공부하는 것은 아주 유용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 마음이 알고 믿는 많은 것들을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게 되어 죽음의 순간까지 그것을 굳게 붙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진리들과 알려진 마음의 법칙들 및 모든 공정한 법률들 사이의 아름다운 조화를 보는 것은 만족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신학도들은 때때로 경건에 있어 퇴보하는 수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단순하고도 신뢰하는 마음으로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차츰차츰 공부가 그의 시야를 넓혀줍니다. 그는 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많은 것들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매료되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독선적으로 자만하게 되면 자기의 단순했던 이전 마음의 신앙을 부끄러워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치명적으로는 아니라 할지라도 두렵게 걸림돌에 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단순한 마음의 신뢰를 다하여 불변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굳게 붙든다면 만사가 잘 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 신앙의 단순성 대신 당신의 지적 철학을 앞세운다면 결코 잘될 수 없을 것입니다.
8. 여기에 어떤 신학도들이 경건해지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모든 것을 이해하겠다고 결심합니다. 물론 결코 회심할 수가 없습니다. 몇 년 전에 내가 목격했던 것이 바로 이러한 경우입니다.
지적이기는 하지만 경건하지 않은 B박사에게는 경건한 아내가 있었는데 그녀는 어린 딸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본 박사가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왜 당신은 그 어린애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려고 애를 쓰고 있소. 요 몇 년 동안 그것을 이해하려고 애를 써 왔지만 나 자신도 아직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잇소. 그런데 어떻게 그 어린애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이요?”
그러나 며칠 뒤 그가 혼자 말을 타고 가고 있을 때 그는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진리가 그의 마음에 비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무도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 만큼은 충분히 알 수 있다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9. 복음의 신앙은 자발적인 것입니다. 신뢰하고자 하는 의지인 것입니다. 나는 내 친구들 가운데 한 경우를 회상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들 중 한 사람에 대해서도 도무지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드디어 오랜 투쟁 끝에 나는 말했습니다. “나는 내 마음에 이러한 것들을 추방해 버리고 이 어려움들을 몰아내어 버리겠다. 내 친구는 올바르며 정직하다. 나는 그것을 믿겠다. 그리고 이러한 비방들에도 불구하고 그를 신뢰하겠다.” 결국 내가 옳았다는 것이 나중에 판명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러한 태도가 항상 옳은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으로부터 결코 실수하실 수 없고 너무나 선하셔서 악을 의도하시지 않는 그분에 대한 모든 어두운 의심들을 몰아내어 버리는 것이 항상 옳습니다.
한때 나는 환난 중에 있는 자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비록 당신이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할지라도 이 모든 것은 당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습니까?” 그녀는 표정이 밝아지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믿겠어요.”
여러분 중에 누가 이러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누가 지금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맡기시겠습니까? 만일 필요한 것이 지적인 신앙이라면 나는 여러분에게 어떻게 그것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겠습니다. 그것은 증거를 조사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마음의 신앙은 단순히 노력-신뢰하고자 하는 자발적인 결심-에 의해서만 도달되어야 됩니다.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을 그분의 뜻에 맡겨 버리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말하십시오. “오 나의 구주여! 나는 당신의 말씀대로 당신을 믿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의지의 행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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