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영이가 드디어 인터넷으로 주문한 세발 자전거를 받았다.
좋아서 소리 지르고, 이리저리 살펴보느라고 정신이 없다.
그리고 잠시 정신을 차린 아직 16개월밖에 되지 않은 이 아이는
아빠 엄마의 마음을 녹아내리게 하는 미소를 보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아빠 엄마 역시 너무나 기뻐서 정신이 없다.
그런데, 하영이와 엄마 아빠 중 누구의 기쁨이 클까?
누가 더 열심히 서로 기쁘게 하려고 할까?
하영이일까? 하영이의 아빠와 엄마일까?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목적>이라는 책에서
천지를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했다.
하나님의 영광은 내적 영광과 그것을 담고 있는 외적 영광이 있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내적 영광을 담고 있는 외적 영광을 보게 된다.
외적 영광을 본 피조물 중에 그것을 깨닫는 자들은
그 거룩함과 사랑을 깨닫고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마치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펄쩍펄쩍 뛰게 된다.
그리고 피조물은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 모습을 본 하나님은 너무나 기뻐하시며, 피조물의 영광을 더 구하신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의 영광을 구하실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물론 하나님은 피조물의 영광 없이도 영화로우시다.
그렇다고 피조물의 영광을 구하시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피조물을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알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은
무한하신 하나님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하나님과 일치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며
또한 하나님에게 속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다.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기에 그 모습을 기뻐하며 받아 들이신다.
즉, 피조물에게 영광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일치되려고 하는 피조물의 모습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모습을 대견하게 여기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창조자이시기에
피조물에게 영광을 받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스스로의 영광을 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이런 모습을 가장 원하신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이런 모습을 가장 즐거워하신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피조물이 하나님께 영광을 구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보다,
하나님 자신이 더 열심히 자신의 영광을 구하고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에드워즈 목사님에 의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속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발산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은 무한하시기에 무한히 발산하시기를 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영광스러운 것을 영광스러워 하시고,
그런 영광을 무한히 구하시기 때문이다.
유한한 피조물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한계가 있다.
무한한 하나님께서는 무한히 영광을 존중하신다.
그래서 무한한 영광을 구하시는 것이다.
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 자신보다 무한히 가치가 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피조물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렇게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늘 불꽃과도 같은 눈동자로 택자들을 찾고 돌보고 계신다.
비록 택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유한하게 드리며 유한하게 기뻐하지만,
하나님은 무한한 영광과 사랑으로 인해 그것을 무한하게 영광스럽고 기뻐하신다.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무한하게 영광을 열심히 구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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