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천국 도서관장 2009. 7. 6. 15:19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slow of heart to believe)”(눅 24:25).


이 말씀에서 SLOW라는 말이 눈에 띄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마음'에 더디(SLOW) 믿었기 때문에, 미련하다는 말을 들었다.


믿음에 있어서 하나님은 빠른 믿음! 즉각적인 믿음! 민첩한 믿음을 원하신다. 그렇지 않으면 답답해하신다.


빠른 믿음이 생기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에 의하면 믿음은 사랑이 내재되어 있다(<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의 ‘칭의’편에도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나와 있다). 믿음은 사랑이 전제되지 않으면 절대 역사할 수 없다고 한다. 사랑은 역사를 이룬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사랑은 속도가 무제한이다.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는 데 속도가 더딜 리가 없다(나의 경험상 그렇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택자를 사랑하시는데 속도가 더딜 리가 없다. 이것을 마음으로 깨달으면 택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속도 역시 무제한이 될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은 그래서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한다고 했다. 아래의 글은 <사랑과 그 열매>에 나온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에 관한 에드워즈 목사님의 설명이다.  여기에는 믿음의 속도는 나오지 않지만, 속도의 개념을 적용해서 보면 더 유익할 것 같아 인용해 본다.


-인용글-


3. 이 교리의 진실성은 사도가 갈라디아서 5장 6절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라고 가르친 것에서 나타난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선한 역사를 이룬다. 그런데 진실한 믿음이 이루는 모든 선한 역사는 사랑에 의한 것이다. 이것에 의해, 현재의 목표에 있어서 두 가지가 분명해진다.


(1) 그 사랑은 진실하고 구원하는 믿음의 한 요소이며, 그 믿음 안에서 가장 본질적이고 구별되는 것이다. 사랑은 단지 사변적인 믿음의 요소가 아니다. 그러나 사랑은 실질적인 믿음의 생명이자 영혼이다. 진실하고 실질적이고 구원하는 믿음은 빛과 열이 함께 하거나, 빛과 사랑이 함께 한다.


단지 사변적인 믿음은 열없는 빛일 뿐이다. 그러나 사변적인 믿음 안에서 영적인 열기 또는 신적인 사랑을 원한다고 해도, 그것은 헛되거나 효과가 없다. 사변적인 믿음은 단지 동의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구원하는 믿음은 동의와 승낙이 함께한다. 단지 이성적인 동의만 갖는 믿음은 마귀가 가진 것 이상보다 나을 것이 없는데, 왜냐하면 마귀들은 사랑이 없는 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귀는 믿고 떤다.


마음의 진실한 영적인 승낙은 마음의 사랑과 구별될 수 없다. 그리스도를 구주로서 마음으로 승낙한 그는 그런 개념으로 즉, 구주로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마음으로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방식을 진심으로 승낙한 사람은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하는 방식을 사랑하는 것과 구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참되고 구원하는 믿음 안에는 선택 또는 택정하는 행동이 있는데, 그런 믿음의 행동으로 영혼은 그리스도를 그의 구원자로 선택하고, 그를 구원자로서 받아들이고 영접한다. 그런데 앞서 관찰한 바대로 그 영혼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것은 사랑의 한 행동이다. 그것은 선택의 사랑이다.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영접하는 영혼에는 사랑이 있다.


믿음은 하나님이 그 영혼에게 요구하는 의무이다. 우리는 믿기를 명령받았고, 불신은 하나님이 금지한 죄이다. 믿음은 율법의 첫 번째 판에 요구된 의무이자, 첫 번째 명령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주님의 위대한 명령이 이해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


사랑은 진실한 믿음의 가장 본질적인 것이다. 사랑이 진실한 믿음의 생명과 영혼이라는 것은 갈라디아서 5장 6절에 나온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과 야고보서 2장 6절을 함께 비교해 보면 특별히 분명해진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또한 죽은 것이다”


어떤 것의 행하고 움직이는 성질은 그것의 생명이다. 인간이 어떤 것을 살아있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이 그 안에서 살아있는 성질을 관찰했기 때문이다. 인간 안에 있는 행하고 움직이는 성질은 그가 그 안에서 가지고 있는 영혼이다. 그러므로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또한 죽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진실한 믿음에 있는 이 행함의 성질을 알고자 한다면,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갈라디아서 5장 6절을 말해줄 것이다.


그는 믿음이 역사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진실한 믿음 안에 있는 이 능동적으로 역사하는 영은 바로 사랑이다. 사도가 이 구절에서 말했듯이, 자비 또는 사랑이 없는 그 믿음은 그것이 아무리 산을 옮길 정도가 된다고 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듯이, 만약 그 믿음이 죽지 않았다면 그것은 바로 그것의 영혼 때문이다.


사도가 고린도전서 13장 7절에서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라고 말한 것은 그가 가능한 한 하나님 안에서 믿는 것과 바라는 것, 또는 믿음과 소망의 똑같이 위대한 미덕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그는 이 장의 다른 구절에서도 믿음을 비교하며, 특별히 마지막 절에서 그것을 비교한다.


믿음 소망, 사랑은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다. 사도는 고린도전서 13장 7절에서 애정 또는 사랑을 다른 두 가지인 믿음과 소망보다 선호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그 안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도 사도의 의도하는 것은 우리의 이웃에게 최선으로 믿고 소망하는 것이 통속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몇몇 다른 기회에 더 다루겠다.


이에 관해 가장 특정적인 것으로서, 믿음을 올바르게 정의한 것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명령에서 잘 이해되는데,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에게 말한 내용에서 더 잘 나타난다.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41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요 5:40~43).


(2) 사랑에 의해 역사하나는 믿음에 관해 사도가 갈라디아서 5장 6절에서 말한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작용하고 생명의 역사하는 것은 사랑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모든 크리스천의 거룩이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믿음과 함께 시작한다는 것을 신약 성경에서 풍부히 가르침을 받는다.


모든 그리스도의 순종은 성경에서 믿음의 순종이라고 불린다.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롬 16:26).


여기서의 순종은 이 앞장에 나온 18절에서 언급한 것과 의심없이 같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롬 15:18).


그리고 사도는 우리에게 그 지금 육체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의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라고 말한다(갈 2:20).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인은 믿음에 의해 산다고 듣는데, 그것은 영적인 생명 안에서 모든 은혜와 거룩의 활동과 작용이 믿음에 의한 만큼 그 안에서 수행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믿음이 그런 것을 역사하는가? 갈라디아서의 5장 6절을 보면 그것은 그것이 수행하는 무엇이든지 그것은 사랑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교리의 진실성은 실제로 기독교에서의 구원의 모든 것과 특징적인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랑 안에서 개략적으로 이해된다고 볼 수 있다.


<사랑과 그 열매>, 조나단 에드워즈, 청교도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