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교회는 개혁주의나 복음주의나 신적 조명에 대한 교리에 대해 체험이 거의 없다. 신적 조명이라는 같은 말을 사용한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체험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천양지차가 난다.
신적 조명의 교리는 중세말기 스콜라신학자인 피터 롬바르드에서 시작하여 루터가 처음으로 칭의의 개념을 구체화시켰으며, 멜랑히톤은 칭의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매우 자세히 다루어졌으며 청교도에서 꽃을 피운다. 특히 존 오웬 목사님께서는 신적 조명을 매우 강조하였다. 신적 조명이 없이는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해도 피상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적 조명을 체험해야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고 죄 사함을 받으며 성령의 의롭게 되고, 성령의 내주하심을 체험할 수 있다. 그래서 청교도는 성령의 조명을 받기 전의 믿음과 회개와 성령의 조명을 받은 후의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구분했던 것이다. 존 오웬 목사님이 자신의 경험을 성경과 종합하여 학적으로 증명했다면, 존 번연은 <천로역정>에서 성령의 조명을 받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하였다. 이러한 성령의 조명의 교리는 조지 윗필드, 존 웨슬리에게 계승되었고,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에게서 만개하였다. 에드워즈 목사님의 설교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빛’과 <신앙감정론>을 보면 성령의 조명의 은혜의 역사가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핍진하게 기술되었다. 경험과 논리와 성경적 배경을 통하여 에드워즈 목사님은 성령의 조명을 종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조명의 교리는 1차 대각성 운동이후 사라졌다가, 1830년대에 찰스 피니 목사님에게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피니 목사님이 활동했던 당시 성령의 조명의 교리는 사라져고 죽은 정통주의 또는 형식주의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이들은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을 계승한다고 했으면서도 그 본래의 취지를 잘 알지 못하여 형식주의자나, 하이퍼 칼비니스트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죽은 정통주의를 비판한 분이 바로 찰스 피니 목사님이다. 이 설교를 보면 피니 목사님이 존 오웬의 <성령론> <그리스도의 영광>과 에드워즈 목사님의 <신앙감정론>의 성령의 조명 교리와 연결된 것을 알 수 있다(하지만 피니 목사님 또한 웨스터 민스터 신앙고백을 100퍼센트 이해한 것 같지는 않다. 독학으로 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발생한 오류가 있지 않나 싶다). 또한 피니 목사님은 칼빈이나 청교도와는 달리, 칭의의 교리에 자비라는 개념을 추가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더 강조하였다.
현대의 개혁주의는 그들이 칼빈과 청교도를 계승했다고 하지만, 본인이 보기에는 로이드존스 목사님 이후로 죽은 정통주의나 형식주의로 퇴보하고 말았다. 따라서 말로는 신적 조명을 말하지만 실질적으로 초자연적이며 총체적이고 즉각적인 성령의 조명을 체험한 사람은 극히 드문 것 같다.
그런면에서 이 설교는 신적 조명의 핵심이 무엇인지 아주 자세히 나와 있어 많은 도움이 된다.
신적 조명의 필요성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7-13).
사람들의 마음을 거룩하게 하고 밝혀주기 위한 성령의 감화의 필요성은 성경에 풍부하게 나타나 있으며 일반적으로 모든 정통교회에서도 이것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인류는 복음에 대해 그다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복음에 관한 인류의 지식은 지극히 미미하여 거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 성화를 이룬다는 복음의 위대한 목표의 실현은 거의 시작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거룩한 감화가 필요한지, 만일 필요하다면 어느 정도 필요하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우리의 성화와 실제로 관련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주제를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Ⅰ. 인간의 이성은 신적 조명을 받지 않고서 어느 정도나 종교적인 일들을 이해할 수 있는가?
Ⅱ. 복음에 대한 유용한 지식을 얻는 능력이 부족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Ⅲ. 하나님의 성령만이 우리에게 필요한 조명을 공급할 수 있다.
Ⅳ. 모든 사람은 자신이 필요한 만큼 성령의 감화를 소유할 수 있다.
Ⅴ. 사람이 자신의 필요한 만큼의 신적 조명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Ⅵ. 사람들은 자신이 실제로 누리고 있는 빛은 물론 누릴 수 있었을 빛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Ⅰ. 신적 조명을 받지 못한 인간의 이성은 과연 종교적 문제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가?
1. 인간의 지성은 일반적인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듯이 종교에 관한 역사적 사실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인간의 지성은 교리적인 복음의 명제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의 지성은 복음의 골격을 이루는 추상적 개념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 성경의 거룩한 권위와 영감, 그리고 복음의 골격을 이루는 그밖의 다른 근본 교리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지성은 이러한 교리적인 명제들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들을 뒷받침해주는 증거가 사실임을 깨닫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과학적인 명제들을 이해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 문제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사람은 이성에 의해 하나님의 율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율법이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을 향해 완전한 사랑을 발휘하라고 요구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도덕적 존재이기 때문에 이렇게 행하는 것이 어떤 근거에서 자기의 의무가 되는지 압니다. 그는 경험에 의해 사랑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왜냐하면 다른 대상물들을 향해 사랑을 발휘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명령의 타당성을 깨닫기만 한다면 사랑의 개념을 이해하고 형성할 수 있습니다. 그는 도덕적 의무의 근거와 영향력을 이해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자기의 의무를 약간은 깨닫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죄인이며 자기의 행위로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율법을 범하였으며 율법은 결코 그를 의롭다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구원을 얻으려면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용서함을 얻어 의롭다함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그는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인간의 이성의 힘만으로는 종교적 일에 대한 유익한 지식이나 변화하여 성화를 이루는데 효과적인 지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Ⅱ. 성령의 도우심이 없는 우리의 종교적 지식의 결점은 무엇인가?
복음에 대한 지식이 우리의 구원에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 부족한 까닭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며 순종하려는 사람에게 유익한 지식과 전혀 거룩해지기를 원하지 않는 죄인에게 유익한 지식을 구별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의로운 이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악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보다 훨씬 적은 조명을 받거나, 또는 훨씬 분명치 못한 동기의 받고서도 자기의 의무를 깨닫고 행합니다. 지금 우리가 알아보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실질적인 사실들을 중요시 합니다. 우리의 현재의 능력으로 얻을 수 있는 지식이 우리를 올바르게 행하도록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이 세상에 죄는 없는 것인지는 나로서는 이야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사실 과거 아담이 무죄한 상태에 있었을 때에 가지고 있었던 지식은 그로 하여금 올바르게 행하도록 영향을 주는데 유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사물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죄인들이 신적인 것에 대해서 유익한 지식을 소유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려 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다루려는 것은 죄인들에게 감화를 주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게 만들 지식은 아닙니다.
지식이 어떤 목적을 이루게 하는데 유익한 것이 되려면, 마음에 감화를 줄 수 있는 지식이어야만 합니다. 의지가 그 지식의 통제를 받아야만 합니다. 이렇게 되려면, 마음은 염두해 두고 있는 목적에 일치하는 감정을 자극시킬만한 견해를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지성만으로는 영혼을 움직이게 만들지 못합니다. 감각에 호소하거나 감정을 자극하지 못하며 순전히 과학적이고 추상적인 지적 개념들은 의지를 감동시키는 데는 전혀 무익합니다. 이것은 어느 분야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천국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마음에 감화를 주어 그의 뜻을 움직이려면 그의 마음을 어느 정도 흥분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죄인들에게 감화를 주어 그의 뜻을 움직이려면 그의 마음을 어느 정도 흥분시켜야 합니다. 순종해야 하는 이유가 지극히 선명하고 강력하게 나타나야만 반역적인 마음을 정복하여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런 지식이 유용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없는 사람은 결코 이런 지식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의롭게 행하려 한다해도 성령의 도움을 받지 않는 이성을 통해 얻는 지식이 과연 얼마나 유익하겠습니까?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완전히 올바르게 행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그들의 지식은 결코 죄인의 회심시키는 일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 이유를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1.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영적 지식은 모두 유추나 비교에 의해 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우리의 지성은 육체 속에 갇혀 있으므로 우리의 모든 개념은 감각을 통해 외부의 대상물로부터 얻습니다. 우리 혼자의 힘으로 이 방법에 의해서 노력해서 자신의 의지에 올바른 감화를 줄 지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육체의 능력은 이런 목적을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영적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모두 유추에 의해서 또는 우리 주변의 사물과 비교함으로서 얻어집니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의 마음에 전달되는 개념들은 모두 지극히 불완전합니다. 결국 우리는 마음에 참된 개념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에게 주어졌던 전형들은 그들에게 복음에 관한 올바른 개념을 주기 위해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었던 가장 설득력 있는 방편이었을 것입니다. 동양의 국가들은 상징이나 우화나 전형을 사용하여 교육하는데 익숙해 있었습니다. 아마도 전형이야말로 그들의 마음이 진리에 접근할 수 있도록 있도록 고안된 가장 인상적이고 훌륭한 방법이었으며, 그 어떤 방법보다 효과적으로 구속계획에 관한 사항을 충분히 부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 전해진 개념들은 대단히 불완전했습니다. 그리고 이성 혼자의 힘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확실하게 실재를 깨닫게 해주는 신적 조명이 없으면, 이 방법으로 결코 유익한 지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단어는 어떤 사상을 전하기 위해 사용되는 부호에 불과합니다. 그것들은 사상이 아니라 사상을 나타내는 전형입니다. 그런데 때로 어떤 사상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거나 거의 불가능한 경우가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함께 대화를 나누어 보십시오, 그의 어린 마음에 당신의 사상을 주입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어린아이가 이미 경험하고 알고 있는 일이라면 당신은 쉽게 그 일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눈이 멀어 색깔을 알지 못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런데 훌륭한 화가가 벽에 결려 있는 훌륭한 그림을 당신에게 설명해주려 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가 무슨 말로 설명을 해도 당신은 마음에 그 그림을 그려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ㄸ너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상징적인 언어나 유비나 유사한 사물을 사용하여 전하는 지식은 불완전하고 부적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소문을 들어 정확히 그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들을 마나보면 자신의 생각이 전혀 잘못되었음을 발견하는 일이 있습니다.
지구와는 전혀 다른 원리의 지배를 받는 다른 행성의 인간이 지구를 방문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는 지구에 오래도안 머물며 우리말을 배워 자기의 고향인 그 행성에 대해 설명합니다. 우리는 그의 설명을 우리의 생각과 경험에 따라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이 두 행성에 대한 유비가 대단히 불완전하다면 그의 설명으로 우리가 얻는 지식도 그만큼 불완전할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나라나 지옥, 또는 그밖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세상의 일에 관한 성경말씀을 대할 때 우리는 결코 표현할 통해서 실재와 일치된 참된 개념을 얻지는 못합니다.
2. 우리의 마음은 대단히 악하기 때문에 우리의 판단을 나쁜 길로 이끌며, 종교적 일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마음문을 닫습니다.
어느 주제에 대해 생각이 너무나 왜곡되어 있어 그것과 관련된 증거를 택하지 않는 사람은 물론 그 주제에 관한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종교에 대한 우리의 상태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왜곡되어 빛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마음문을 닫고 있으므로 지성은 신적인 일에 대한 개념들을 얻지 못합니다.
3. 편견은 우리의 종교에 관한 올바른 지식을 받아들이는데 커다란 장애가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경우를 예로 들어 봅시다. 그들은 구원계획에 대해 강력한 유대적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편견은 너무나 강력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르치신 교훈으로도 그들은 진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3년 동안 친히 모든 재능과 기술과 능력을 다해 성실하게 그들에게 가르치셨지만 그들은 복음의 초보적 원리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3년 동안 친히 모든 재능과 기술과 능력을 다해 성실하게 그들에게 가르치셨지만 그들은 복음의 초보적 원리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죽음이 임박하셨을 때 까지도 그들은 주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실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그들에게 행한 마지막 설교에서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지 않을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래니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고 주님께서 과거에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말씀들이 의미하는 것을 소유하게 만드는 것이 주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가시는 의도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신적 조명이 없이도 성경을 이해하여 죄를 깨닫고 스스로를 정죄할 수는 있으나 성화를 이루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대체 계시가 주는 유익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합니다. 계시는 대단히 유익한 것입니다. 성경은 대단히 분명한 말씀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명백한 교훈을 주셨음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은 자기의 교훈을 설명하기 위해 대단히 수고하셨습니다.
주님은 단순한 언어를 사용하셨으며, 마치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가르치듯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적 조명이 없이 인간의 이성의 힘만으로는 결코 복음을 깨달아 유익을 얻지 못합니다. 어려운 점은 그 주제 안에 있습니다. 성경은 가능한 명백한 복음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그것은 종교적 개념들을 나타낼 수 있는 언어적 상징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종교적 개념들은 상징적 표현으로 나타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히 종교적인 개념들을 사실적으로 마음에 소유하기는 어렵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무지와 죄, 그리고 그 주제의 본질에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복음에 대한 유익한 지식을 얻으려면 거룩한 신적조명이 필요합니다.
Ⅲ. 하나님의 성령만이 우리에게 신적 조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이라는 추상적인 명제를 과학적인 문제처럼 증명하여 편견이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는 주님이라는 진리에 동의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성령만이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소유하고 그 사실을 믿으며 그것을 자기 마음의 성화를 위해 유익하게 사용하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5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요 6:44, 45). 여기에서 말하는 “이끌림”은 성령의 가르침입니다. 사람들이 실제로 그리스도께 올 수 있는 영적 지식을 소유하려면 하나님과 성부에 대한 가르침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우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의 의미는 “도움을 주는 자” 또는 “가르치는 자”입니다.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8-13).
또 요한복음 14장에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 16, 17).
또 말씀하시기를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이로 보건데 성경의 직무는 인류에게 신령한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만이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나 사도들, 또는 영감을 받은 교사들이나 영감을 받지 못한 교사들의 가르침은 우리 마음이 신령한 개념을 소유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가르침은 말이나 감각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가르치지 않는 분의 가르침입니다. 우리에게는 신령한 개념을 나타내는 상징들이 아니라 개념 그 자체를 우리 마음에 와닿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감각을 통하지 않고 직접 우리 마음에 접근하여 말을 사용하지 않고서 종교적 사상들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교사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이러한 일을 이 세상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방법으로 행하십니다. 성령은 말을 사용하지 않고 우리 마음을 감동시키십니다. 그리하여 인간이 가르치거나 말로 설명하거나 전형이나 비유로 나타낼 때에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신령한 일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인간 교사는 오직 말을 사용하고 감각에 호소하므로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사상들을 가르치기에는 적당치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은 직접 우리의 마음에 접근하므로 우리에게 신령한 일에 대한 실질적 개념을 가르쳐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신자가 있습니까? 성령께서 인도하실 때에 자신이 연구하고 노력해도 결코 알지 못했던 성경의 의미를 즉각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 신자가 있습니까?
앞에서 언급했던 예를 다시 들어보겠습니다. 당신은 눈 먼 장님입니다. 그런데 저 벽에 대단히 훌륭한 그림이 걸려 있어서 내가 당신에게 그 그림을 설명하려 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나는 그 그림의 색깔의 대조와 혼합 등을 열심히 설명하고 당신은 내 말을 이해하려고 온 정신을 다 기울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당신이 눈을 뜨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당신은 이제까지 나의 설명을 듣고 이해해보려고 애섰으나 이해하지 못했던 그 그림을 당신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직무이며 오직 성령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우리의 신령한 눈을 열어주고, 우리가 상징이나 유비에 의해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물의 살아있는 실체를 우리 마음에 가져와서 그것을 사실 그대로 완전히 소유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만이 하나님에 관한 일들을 알고 있으므로 성령만이 우리에게 그 일들의 개념을 정확하게 전해주실 수 있습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1).
동물은 사람의 성품, 목적 등 사람의 일을 알지 못합니다. 당신은 의식을 지니고 있으므로, 나는 당신은 인간이며 인간의 사정을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짐승에게는 이런 말을 할 수 없으며, 또한 짐승도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짐승은 사람의 영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사람의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고전 2:1).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일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피조물들은 알지 못하는 신적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으나 피조물들은 주지 못하는 교훈을 우리에게 줄 수 있습니다.
Ⅳ. 복음 아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감화를 값없이 소유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 사실을 가르쳐주는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은 성령을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며 부모가 자식에게 떡을 주는 것보다 기쁜 마음으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 11:23).
야고보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만일 이 말씀이 진실이라면, 즉 하나님께서 이처럼 무한한 약속들-누구든지 하나님께 구하기만 하면 구한 만큼의 신적 조명을 받는다는 것-을 예비하셨다면,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필요한 분량의 신적 조명을 소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Ⅴ. 사람들이 자신이 필요한 분량의 신적 조명을 소유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사람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의 신적 조명을 구하지 않거나, 또는 합당한 방법으로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2. 잘못은 이기적인 동기에서 그것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말하기를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약 4:2).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기적인 동기나 또는 그밖의 여러 가지 다른 이유 때문에 신적 조명을 구하는 사람은 구하여도 받지 못합니다. 만일 그가 성령을 구하는 목적이 언제나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거나, 또는 성경을 잘 아는 것이거나, 또는 자기의 체험이 유명해지기를 바라거나, 또는 그밖의 이기적인 견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는 자신이 구하는 것을 받지 못합니다.
3. 자기가 구하는 것을 위해 적절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성경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서 하나님께 신령한 일에 대한 지식을 달라고 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과 그밖의 지정된 교훈의 수단을 통해 지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이러한 수단들을 사용할 능력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기도해도 신적 가르침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이러한 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과 소유하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 결핍된 환경 속에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조명을 얻으며 복음을 배운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는 마치 무인도에 있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의 성령의 직접적인 조명을 받았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그는 절대적으로 가르침의 수단에 접근할 수 없는 다른 환경에서도 성령의 직접적인 조명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이러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당시 나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여겼으며, 교인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여 그 일을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나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여겼으며, 교인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여 그 일을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나는 복음전도자로서 어느 곳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었는데 그 인근에는 많은 독일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의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그들의 대부분은 글을 읽을 줄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에, 그들은 성령을 받았으며, 대단히 강력한 신앙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추수를 하느라고 한창 바쁜 때에라도 기도회가 있으면 모두가 함께 모여 그 집을 가득 채우고 설교자가 가르치는 복음의 진리를 열심히 들었습니다.
본래는 총명하지만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어느 가난한 독일 여인이 이러한 기도회에서 간증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이야기했는데, 그녀의 이웃들도 그것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기쁨이 충만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에 성경을 읽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했습니다. ‘오, 주님, 당신은 내가 성경을 읽도록 가르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에게 읽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 집에는 성경이 있었습니다. 기도를 마친 뒤 나는 성경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서 그 책을 들어 펴보았습니다. 내가 펼친 곳에는 전에 다른 사람들이 읽는 것을 들었던 말씀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오 주님, 당신은 나에게 읽기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교사에게 가서 과연 내가 제대로 읽는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녀는 내가 옳게 읽었다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성경을 읽도록 가르친 것입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곳에는 그녀가 찾아갔던 여교사가 함께 참석하여 그의 간증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웃들에게서 좋은 평판을 듣는 사람이었으며, 후일 그 마을에서 존경을 받는 몇 사람들은 나에게 그녀의 말이 진실임을 의심치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간증이 진실이었음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 당시 그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몇 년 동안 드러나 사실들에 비추어 나는 그것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억이란 결코 파괴되지 않으며 언제가 자극을 받을 때 되살아난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아마 그녀는 어렸을 때 알파벳을 배운 적이 있었는데, 성령께서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그녀의 정신을 일깨워 그것들을 모두 기억나게 하셨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언제가 마한 학장은 인간의 마음에 새겨진 인상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다고 말하면서 어느 부인의 경우를 예로 들었습니다. 그 부인은 젊었을 때 하나의 짧은 이야기를 노래한 시를 읽은 일이 있었습니다. 후일 나이가 든 후에 그녀는 아이들에게 그 이야기가 유익하리라고 생각하여 이야기를 해주려 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녀는 그 시를 완전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젊었을 때 결코 그 시를 외운 것이 아니라 그저 읽기만 했었는데도 말입니다.
마한 학장은 또 무식한 노예 소녀의 이야기를 예로 들었습니다. 그녀는 한 때 박학한 목사의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 목사는 자기 연구실에게 히브리 성경을 소리내어 읽는 습관이 있었으며, 그녀는 그 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일을 하곤 했습니다. 물론 그녀는 그 말씀의 의미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소리만 듣곤 했습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 임종을 맞게 된 그녀는 히브리어와 갈대아어로 성경을 암송하여 옆에 둘러선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살마들은 처음에는 이것을 기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일에 대한 설명을 찾아냈습니다. 즉, 비록 뜻을 알지 못하고 들은 소리라도 기억에 새겨져 있다가 나중에 완전히 분명하게 회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가련한 독일 여인의 경우가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열렬한 기도의 응답하여 성령께서 그녀의 기억을 새롭게 하여 어렸을 때에 배운 문자들의 명칭과 형태를 상기시켜 주셨기 때문에 그녀는 갑자기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표면적인 교육의 방편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종류의 신적 조명을 자신이 필요한 분량대로 성령으로부터 직접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표면적인 수단을 소유하고 있거나, 또는 그 수단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 신령한 지식을 얻기 위한 수단을 사용하기를 태만히 하면서 신적 조명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입니다. 기회를 소유하고 있는 자들에게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 있는데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다른 방법으로 조명을 얻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자기의 약속을 진실하게 지키시는 분이므로, 아무런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조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4.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필요로 하는 조명을 성령으로부터 받지 못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성령을 슬프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성령을 슬프게 하거나 모욕하는 태도로 생활하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조명하시는 은사를 주실 수 있습니다.
5. 또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은 신적 감화가 없어도 가르침이나 수단들이 유용할 것이라
고 믿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목사나 주석이나 책이나 자신의 연구를 통해 얻는 지식을 의자하고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이 없다면 이 모든 것들은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들이며,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저주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모든 교회가 잘못을 범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이 없이는 그 어떤 방편도 유익을 줄 수 없음을 깨닫지 못한 채 신적인 자식을 얻기 위해 이러한 방편들을 의지합니다.
만일 온 교회가 피조세계에 있는 모든 방편들은 성령의 가르침이 없이는 전혀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들은 손을 정결케 하고 마음을 겸손히 하여 기도에 힘을 것이며, 마침내 보혜사께서 내려오셔서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종교의 진리를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6. 신적 조명을 받지 못하는 까닭 중의 하나는 자만심입니다.
신앙을 고백한 신자들이 종교적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학식이나 비평이나 선천적 천재성을 신뢰한다면 하나님의 성령의 조명을 누리지 못합니다.
Ⅵ. 사람들은 자신이 소유하게 될 수 있는 신적 조명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자신이 소유하게 될지도 모르는 빛의 조명에 대해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은 보편적인 진리로서 모든 인류가 인정하고 있습니다. 보편적 이성의 소리인 관습법은 범죄한 사람은 법을 알지 못했음을 구실로 내세우지 못한다는 것은 불문율로 삼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법을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되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뜻을 알 수 있는 자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자녀들이 부모의 뜻을 알면서도 그 뜻을 어긴다면 그들은 더욱 큰 책임을 들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합니다. 표면적으로는 교육의 방편을 가지고 있고 내면적으로는 성령의 가르침을 받을 능력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범죄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핑계로 대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들의 무지 그 자체가 죄가 되며 그들의 죄를 더욱 무겁게 만듭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완전하고 즉각적인 성화에 유익할 지식을 소유하지 못한데 대해 결코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결론
1. 우리는 신적인 감화를 누리지 못하는 신자들에게 다른 모든 가르침이 어떤 효과를 주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의무를 확신하게 해줄 수 있으나 결코 성화를 이루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마음을 완악하게 할지언정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신적 감화가 없는 가르침은 죽음에 이르는 죽음의 향기에 불과합니다.
2. 우리는 능력이 닿는 한 모든 종교적 교훈의 수단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그러한 매체를 통하여 우리 마음에 신적 조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종교적 지식을 얻기 위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하고 육체의 기능을 사용해서는 안될 이유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능력이 있으면서도 그 수단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결코 신적인 도움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노력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신령한 일을 깨닫기 위해 육체의 기능을 사용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조명해 주실 것입니다. 눈을 감고 빛을 보지 않은 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서 신령한 일을 가르치려 하는 사람은 소경을 인도하는 소경 지도자입니다. 성령의 조명하시는 능력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면, 비록 그가 신학적 지식들을 분별하는 능력을 가졌으며 지식이 많다 해도 훌륭한 종교교사가 되지 못합니다. 만일 그가 성령이 없이도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눈 먼 소경이요, 또 만일 그가 종교적 진리를 가르치려 한다면 그는 스스로 속이는 자요, 그는 물론 그를 의지하는 모든 사람이 함께 개천에 빠질 것입니다.
4.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성령과 함께 복음을 가르치는 사람은 청중들에게 감화를 줄 수 있습니다.
물론 자신은 복음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청중들에게 성령이 임하시지 않으면 청중들은 감화를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만일 성령께서 청중에게 임하신다면, 그는 복음을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분량대로 그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습니다.
5. 목회자는 복음을 전파할 때에 자신이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 의미를 깨달은 성경 말씀만 사용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 의미를 개달았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말씀들을 설명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주제넘은 짓이며, 그렇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제나 구하기만 하면 성령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아버지가 자기 자식에게 떡을 주려 하듯이 하나님께서도 언제라도 신적 조명을 주실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배가 고프면 어머니에게 떡을 달라고 하듯이 목회자도 구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자신이 필요한 만큼의 조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목회자는 물론 주일하교나 성경연구반의 교사들에게도 적용됩니다.
만일 어떤 교사가 스스로 성령의 가르침을 받지 못한채 학생들을 가르치려 한다면, 그것은 마치 거리에서 제일 무식한 사람이 천문학을 가르치려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염려스러운 것은 일반적으로 목회자나 교사들은 자신에게 이렇나 신적 가르침이 필요하다는 것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설교나 성경학습을 위해 기도해야 할 필요성도 거의 느끼지 있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그들이 성령의 조명을 받아 말씀의 참 개념을 깨닫는다면 지금보다 훨씬 효과적인 가르침을 베풀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일학교 교사들이여, 성경공부 교사들이여! 당신은 이것을 믿습니까? 당신은 자신이 가르치려는 말씀에 대한 참 개념을 주시기를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구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성령의 도움이 없이 주석책에서 발췌한 메마른 내용을 지껄입니까? 만일 당신이 이런 식으로 가르치고 있다면, 권하노니 차라리 다른 일을 하는 편이 낫습니다. 자기가 설교하려는 성경 본문을 놓고 기도하지 목사를 위해 당신을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당신은 목사를 위해 발람의 당나귀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비록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 그러한 바보같은 짓을 사람의 소리로 말하며 꾸짖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런 목회자의 마음 깊은 곳에 닿을 수 있는 교훈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목회자에게는 물론 주일학교 교사들에게도 중요한 일입니다. 만일 당신 자신이 가르칠 말씀을 앞에 두고 기도하여 그 안에 함축된 사상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지 못한다면, 어찌 감히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6. 신학생들이 성경의 의미를 알기 위해 위대한 교사들의 견해, 조상들과 박사들의 저서들, 그밖의 모든 사람의 견해를 얻으려 하면서도 성령의 견해를 얻으려 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큰 잘못입니다.
그들은 곧바로 빛의 근원으로 가지 않고 돌처럼 차가운 마음으로 쓸데없는 학식들을 주워 모아, 그것을 경건한 가르침인양 교회에서 지껄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행하는 한 우리는 결코 효율적인사역을 받지 못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라면 마땅히 학문의 도움을 최대한도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사상을 소유했다고 느껴 만족하지 않는 한 책에서 얻은 학식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나는 내가 가르치는 신학생들에게 이러한 감명을 주려고 애서 왔으며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더욱 크게 노력했더라면 보다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신학을 공부할 때, 성경을 앞에 두고 성령의 뜻을 깨닫게 될 때까지 몇 시간, 아니 몇 주일을 애쓰며 기도하곤 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제기하는 의견이 결코 이상한 견해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언제가 내가 설교할 본문과 설교 내용을 두고 기도합니다. 만일 내가 빛의 근원을 올바르게 붙잡았으면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큰 종교적 지식을 얻었을 것임을 나는 깨닫고 있습니다.
7. 교회 내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지극히 적은 지식 밖에 소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에게 서신서나 그밖의 다른 부분을 읽게 해보면, 그들은 성경의 1/10에 대해서도 참 의미를 설명할 만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가 성화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결코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그들은 더 많은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가 온전한 성화의 방법을 알게 되려면 먼저 이 중요한 성화의 방법을 보다 충분히 즐겨야만 합니다. 오늘 교회는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성경을 설명하기 위해 그 저자에게로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매일 이 복된 특권을 소유하며, 성경의 저자에게 가서 설명을 요구할 특권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에는 성령의 가르침에 의해 알게 되었다고 여겨지는 성경 지식이 거의 없습니다. 오늘의 주제인 본문 말씀을 읽어보고 또 이와 유사한 다른 말씀들을 읽어 보십시오. 신자들은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크게 꾸중을 드어야 할 것입니다.
8. 우리는 신적 가르침 아래서 성경 공부에 전념해야 합니다.
나는 최근에 여러 가지 책들을 읽어 보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웨슬리 목사님의 <기독교의 온전함에 대한 사고Thought on Christian Perfection>, 브레이너드 테일러, 페이슨, 로저스 여사의 전기 등이 있습니다. 이런 책들은 유익한 책들입니다. 그러나 나는 어느 한 권의 책만을 읽지는 않습니다. 나는 때때로 이 책들을 읽습니다. 그러나 나는 성경에 대해 배워야할 것이 많기 때문에 다른 책들을 읽고 싶은 생각도 거의 없고 시간도 없습니다. 성경은 마치 금광과 같아서 깊이 파고들수록 더욱 풍성해집니다. 우리는 어느 책보다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한 구절씩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 기도해야 하며, 부분 부분 비교하고 심사숙고하고 완전히 소화시켜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마침내 성령께서 성결의 영으로 우리를 가득 채워 주셨음을 느끼게 되어야 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하시겠습니까? 당신은 하나님께 마음문을 열어놓고, 하나님께서 신적 지식을 가득 채워 주시기까지 결코 쉬시지 못하게 하시렵니까? 당신은 성경을 철저히 연구하겠습니까? 나는 때때로 젊은 회심자들이나 목회준비를 하는 청년들로부터 무엇을 읽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성경을 읽으십시오.” 나는 수백번이라도 그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경을 공부하십시오. 안타깝게도 목회사역에 임하는 젊은 목회자들의 성경지식은 다른 책에 관한 지식보다 적습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만일 그들에게 제임스 브레이너드 테일러의 정신, 성경을 향한 사랑, 신적 가르침을 구하는 기도가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교회들이 서적을 토한 지식은 많으나 성령이 결핍된 신학교를 나온 젊은 교역자들의 영적 메마름으로 인해 탄식하는 소리를 듣지 않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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