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설교는 하나님께서 악인에 대해 진노하시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성경에 충실하게 설명한 설교이다. 피니 목사님에 의하면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속성상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악에 대해 진노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죄인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셔서 죄를 용서해 주신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은 악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실 수 없다고 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일반적 상식조차 없는 사람이다. 진노는 악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진노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이 악을 사랑한다는 말밖에는 안된다. 하나님의 진노하실 때 진노 자체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아무 이유 없는 것이나 부당한 이유에서 진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악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것이다. 악은 하나님의 영광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파괴시키며 하나님의 백성을 타락시킨다. 가만 나두면 천국조차 파괴시키고 만다. 악한 자의 누룩은 금새 퍼진다. 따라서 하나님은 악에 대해 진노하시는 것은 지극히 선한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믿지 않는 사람이 지은 죄보다 훨씬 더 크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속성을 알고도 죄를 짓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배우자가 바람을 피운다고 해보자. 얼마나 불쾌하고 화가 나겠는가? 만약 그것을 방치하면 가정을 파괴하고 자식에게조차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죄를 짓는 자에 대해서 어떤 마음이 드실까? 토하여 내치고 싶으실 것이다.
이 설교는 지극히 상식적이다. 사실 성경을 모르고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교회에 나오면 이런 상식조차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쉬운 사실도 너무나 모른다. 세상에서는 그렇게 똑똑한 사람조차도 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이 역시 하나님께서 조명해주셔야 알 수 있는 것이다.
피니 목사님의 설교는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하다. 아니 더욱더 필요하고 절실하다. 현대 기독교에는 특히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며 영접식 기도로 구원자를 양산해낸다. 하지만 믿음뿐만 아니라 회개도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하다. 더불어 그에 앞서 그는 택함을 받아야 하며 또한 믿음을 가지고 의지적으로 하나님께 나와 하나님 나라로 침노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혐오하시며, 죄인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음을 뼈저리게 체험해야 한다. 죄에 대한 분노가 얼마나 타당하고 필요한지를 온전히 체험해야 구원이 가치를 깨달을 수 있다. 그래야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죄를 진정으로 혐오하며 죄를 이기고 살아갈 수 있다.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시 7 : 11)
(God is angry with the wicked every day)
I. 성경에서 말하는 악인은?
II.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III. 하나님 진노의 본질
IV. 진노의 이유
V. 죄에 대한 하나님 진노의 정도
VI. 진노는 얼마나 지속하십니까?
VII. 하나님 진노 하에 있는 죄인의 끔찍한 상태
I. 성경에서 말하는 악인은?
성경에서는 모든 인간을 의인과 악인 두 부류로 구분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믿음을 유지하고 하나님께 자기 영을 헌신한 자는 의로우며 지상에서도 천국의 삶을 사는 자입니다. 의인은 성령으로 새로워진 자다. 이들이 원래 갖고 있던 이기심은 완전히 제거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항존하는 은총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악인은 이런 의인과 정반대입니다.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았고 이기적으로 살아가며 그 형태를 불문하고 가능한 모든 형태의 이기적 삶을 살아갑니다. 자아가 이들 삶의 위대하고 유일한 궁극적 목적입니다. 이런 자가 성경적 의미로 악인입니다.
II.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진노를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표현한 성경 구절은 이밖에도 무수히 많습니다. 진노에 관한 말씀은 하나님 자신의 증거임을 죄인은 알아야 합니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느낌이 어떠한지 하나님 자신보다 누가 더 잘 알겠습니까? 누가 하나님께서 확신하는 것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성적으로 판단해도 하나님의 진노는 진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이성을 발휘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수밖에 없음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에 반대하지 않으신다면 바로 악인에 반대하지 않습니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 자신이 악하게 됩니다. 법을 위반하는 자들에 반대하거나 이들을 미워하지 않는 재판관이 있다면 그 사람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듭니까? 법을 위반한 자들에게 벌을 주지 않습니다면 그 재판관이 정직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법을 어긴 자에게 벌을 주라는 것은 이성과 상식의 명령임을 누구나 압니다. 죄인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고 항상 이 사실을 현실적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체득하지는 못할지라도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진노하고 있음을 아니, 진노할 수밖에 없음을 (지식적으로는) 압니다. 죄인들은 체득하여 깨닫지는 못하면서 지식적으로 아는 것은 많다. 예를 들어, 죄악 속에 있는 당신도 당신이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은 압니다. 하지만 당신이 죽는다는 사실보다도 더 확실하게 하나님이 당신에 대해 진노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죽는다는 사실이 하나님이 당신의 죄로 인해 당신에 대해 진노하고 있습니다는 사실보다 반드시 더 확실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사망을 경험하지 않고 옮길 수도 있습니다. 몇몇 사람은 죽지 않고 천국에 가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진노합니다는 이 보편적 법칙에는 조금의 예외도 없었고, 그런 예외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하나님이 악인에게 진노합니다는 사실) 100퍼센트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이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앞서 이미 언급했듯이 죄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이 사실을 실제적 판단의 근거로 항상 삼는다. 그렇지 않다면 왜 죄인들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십니까? 왜 이 천벌이 내려질 세상에서 하나님과 대면하기를 두려워하십니까? 자신들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고 있습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면 그래도 죄인들은 두려워하겠는가? 이 사실을 죄인들에게 증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죄인도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엄연한 현실이며 또 마땅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III. 하나님 진노의 본질
하나님의 진노의 본질적 성격에 주목해 보자. 먼저 하나님의 진노의 소극적 의미를 살펴보자.
1. 이 진노는 악의적인 분노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는 전혀 악의가 없습니다. 어떤 존재에 대해서도 어떤 형태로든 악의적으로 대하려는 성향 자체가 없습니다. 악의의 감정과는 무한히 거리가 멀며 그런 식의 진노를 전개시키는 일과는 완전히 떨어져 있습니다.
2. 사람들은 화가 나면 흥분하여 격노하기 쉬운데 하나님의 진노는 그런 격노와는 다르다. 우리는 사람들의 감정이 민감하여 분노로 흥분되어 격분하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이들의 심령은 흥분으로 들끓고 있으며 그 흥분의 강도는 정말 크다. 이 순간 이성은 자리를 잃고 혈기가 주도권을 잡는다. 하나님은 절대 이런 식으로 진노하시지 않습니다.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혈기있는 흥분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3. 하나님의 진노는 어떤 의미로도 이기적 분노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조금도 이기적이기 않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그 반대입니다.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당연히 이기심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다.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지닌 적극적 의미를 보자.
1. 악인의 행위와 악인의 성질을 완전히 부인합니다. 하나님은 악인들의 마음이나 그들의 삶에 있는 모든 것을 가장 강력하고도 철저하게 부인합니다. 하나님은 악인을 너무나 강하게 혐오합니다.
2. 하나님은 또 악인의 성격에 대해서도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고 싶어 합니다. 악인의 성격은 하나님의 성격과 하나님 자신이 세운 의로운 것과는 너무나 상반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가장 강력한 형태로 악인에 반대합니다.
3. 하나님의 진노는 죄인들을 물리치려는 강력한 거부감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악인에 대해 진노의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죄를 보고도 하나님이 진노하지 않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거룩한 마음이 어떤 정신적 상태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우리 자신의 마음에서 유추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계시된 것을 압니다. 물론 하나님의 마음은 타락한 우리 마음과는 정반대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는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이 다같이 공존한다고 가정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우리에게 지성과 감수성(정서)과 의지가 있듯이 하나님께도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거룩한 마음의 자질이 무엇인지는 물론 그런 거룩한 마음의 자질들이 작용하는 법칙도 추론해 봅니다. 어떤 대상 앞에서는 본능적으로 강하게 대립하고 싶은 느낌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대상들은 우리의 감수성과 밀접하게 관계하여 자연스럽게 우리의 화나 분노를 낳습니다. 만약 우리가 허물을 철저하게 부인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런 부인이 더 나아가 행악자에 대한 불쾌감이나 분노의 형태로 어떤 실제적인 감수성을 각성시키지 않았다면 우리는 우리 마음의 확고한 법칙에 따라 행동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의롭다면 어떤 불의에 대해서 격한 감정적 반응을 나타내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건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 마음이 의로우면 의로울수록 불의를 더더욱 용납하지 못하고, 더욱 강렬하게 불의에 대항하려 하고 불의를 행하는 자를 더욱더 불쾌하게 여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불의에 반대하려는 의지를 작용한다는 의미에서 진노할 뿐만 아니라 불의에 반대하는 불같은 감정에서 더욱 진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진정 도덕적인 분이라면 당연히 이러해야 할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죄인에게서 나온 죄에 반대하여 진노할 뿐만 아니라 죄인 자신에 대해서도 진노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에 대해서는 진노하지 않고 죄에 대해서만 진노한고 헛되고 웃기는 주장을 애써 제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도둑질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도둑놈은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간음을 혐오합니다. 그러나 간음자를 기꺼이 좋아합니다. 이런 넌센스가 어디 있습니까. 죄는 죄인과 분리하여 평가할 수 없습니다. 행위자와 분리된 행위가 있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미워하고 인정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그 일, 행위자와 분리된 일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자 자신입니다. 아주 정상적인 도덕적인 사람이 자기의 뜻대로 살아가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대항하고, 보편적으로 옳고 정의로운 모든 일에 거역하면 이것이 하나님을 슬프고 언짢게 만드는 일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죄인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의 직접적이고 유일한 대상입니다.
성경에도 명백히 이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추상적인 죄가 아니라 악인에게 진노합니다. 악인이 돌아서지 않으면 하나님은 자기 칼을 갈 것이고, 죄를 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을 쏘기 위해 활을 당겨 발사 준비를 할 것입니다. 혐오스러운 짓을 행한 악인을 쏘기 위한 준비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나 일반 상식으로나 통하는 유일한 원칙입니다.
5.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합당한 이성으로 발현되는 정상적인 화냄의 영역에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자신의 경험으로 판단해 보아도 우리 나름대로 이유 때문에 화를 낼 때는 의지적으로 잘못을 행한 자에게 강하게 반발하고, 아주 그 사람에 대해 불쾌하게 여기고 악인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따라서 동일한 상황에서 하나님 역시 그러하리라고 추론해도 되겠다.
IV. 진노의 이유
하나님의 진노는 절대 합당한 이유 없이 촉발되지 않습니다. 이유 없이 화내는 것은 항상 죄악입니다. “누구든지 이유 없이 형제에게 화를 내는 자는 심판을 받을 위험에 처한 자다” 하나님은 자신이 정한 법을 절대 위반하지 않습니다. 그 법은 무한한 의로움과 공의에 바탕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에는 항상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에 합당한 이유가 있고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진노합니다. 사람들도 화를 낼만한 상황에 처했을 때 화를 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합당한 이유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합당치 않은 이유로 화를 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 대적하는 자들의 사악함을 보면 어떤 죄인이라도 그에게 화를 낼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죄인도 하나님께 대적하는 다른 죄인의 사악함에 대해 화를 내지 않습니다. 사악한 죄인에게 화를 내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는 합당한(선한) 이유 때문이 아니고 전혀 선하지 않은 이기적인 이유 때문에 화를 냅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만약 화가 난 사람을 보고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은 죄악이라고 그 사람을 책망하면 그 사람은 이렇게 자신을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즉 자신이 화를 낸 이유는 그 자의 죄악, 곧 하나님께 대항한 잘못된 행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건 화를 낼만한 합당한 이유가 됩니다. 정말 이런 이유로 화를 내게 되었다면 그건 좋은 현상입니다. 그러나 이건 변명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실은 이기적인 이유 때문에 화를 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우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죄와 무관하게 진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죄 때문에 진노하십니다.
1. 악인의 행위는 완전히 합당하지 않다. 이들의 행위는 온전한 이성과 온전한 의로움과는 아예 전쟁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에게도 지성과 양심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지성과 양심에 반한 행동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에게 순수하고 선한 법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 법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위반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행위는 어떤 면으로 보나 완전히 부당하다.
정해진 우리 삶의 법칙에 따르면 이성 없이 행동하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화나게 만드는 건 없습니다. 무리한 자를 참는 것은 너무 큰 시련이며 우리의 분을 돋우는 가장 강력한 동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의 부당한 행위를 보실 때 가장 강한 분개와 불쾌함을 느낍니다. 죄인들이 이성을 부여받은 합리적 존재가 아니라면 분노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이성이 부여되어 있고 참되고 숭고한 마음으로 순종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비이성적으로 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들의 위법에 대해 불쾌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악인의 길은 완전히 파멸의 길입니다. 죄인의 영향으로 전 세계가 파멸에 이르지 않는다면 그나마 고마운 일이겠습니다. 마음의 법칙에 따르면 어떤 사람의 죄도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짓도록 영향을 미치고, 그 죄는 마치 무시무시한 전염병 모양 멀리 그리고 넓게 퍼져나갑니다. 죄인은 이 우주를 파멸시키는 최악의 일도 한다는 말도 사실일 것입니다. 죄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반역의 본을 보인 자입니다. 바로 하늘나라에 대적한 본보기보다 더 영향력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죄인은 모든 선한 것을 파괴하기 위해 자기의 죄를 짓습니다. 이것이 가장 악한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파괴하려는 죄인의 영향력이 요원의 불길같이 전 세계에 그리고 하나님의 세계에 속한 모든 도덕적 존재들 위에 타오르고도 남습니다.
한 가정의 아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죄악 속에 살면 가족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 다른 가족들도 자기처럼 사악하게 만듭니다. 이 가장이 자기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이 사악한 아비가 가족과 더불어 기도하고 가족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삶은 기도 없는 삶입니다. 오히려 매일같이 자기 가족들에게 이렇게 선언할 것입니다. “니들, 어떤 일이 있어도 기도하면 안 돼. 봐라. 나는 기도 없이도 이렇게 잘 살아가잖아.” 또 이 자가 가족들에게 성경을 읽어주거나 가족과 더불어 성경을 읽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가족들 앞에 보이는 그의 한결같은 삶은 성경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지 않아도 얼마든지 잘 산다고 계속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아비의 전반적인 영향력은 자기 가족들에게는 파괴적입니다. 이 아비를 따라 다른 가족들도 지옥에 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 아비가 가족을 파멸로 이끌었다고 저주하면서 절망과 비통함으로 가족들이 이 아비에게 부르짖어 소리치지 않으면 이 자는 다른 사람들에게까지도 악영향을 미치려 할 것입니다. 이 자는 이처럼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자입니다.
이런 자에 대해 하나님이 진노할 만하지 않습니까? 왜 이 자에게 진노하지 말아야 하십니까? 만약에 이런 자가 당신의 아내와 딸들을 유혹하고 아들들을 꾀어 범죄와 파멸의 길로 이끌어 당신 가정의 평화를 파괴한다면 이 자에 대해 당신은 당연히 분개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겠습니까? 아니, 당신은 확실히 분노합니다. 당신이 당신 가정을 파괴하려고 한 악당에 대해 분개하듯이 하나님 또한 사악한 아비에 대해 당연히 분개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악한 아비에 대해 진노한다는 사실이 당신에게는 참으로 좋은 일이 아닙니까?
반대로 아주 모범적인 아버지를 생각해 보자. 말도 조리있고 특별히 반박할만한 것이 없다고 가정해보십시오. 그런 아버지의 본이 가장 고귀하고 강력한 도덕적 힘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경우 참담한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따로 가르침을 줄 필요도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남편과 아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보다 더 마귀가 원하는 건 없습니다. 가장 나쁜 상황입니다. 마귀는 이 악한 아버지에게 영광스러운 복음과 죄 사함의 자비가 제시되도록 절대 허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진노할 합당한 이유가 있듯이 그 이상으로 이 사악한 아비에 대해서도 진노할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밖에 다른 여러 부류의 죄인에게도 하나님의 진노는 마찬가지입니다. 죄인의 길은 바로 하나님께 대항한 반역의 길입니다. 죄인들은 다른 도덕적인 사람들까지도 죄에 끌어들이면서 이 세계에서 가장 나쁜 짓을 행하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은 선하시고, 죄인들은 너무나 악하니,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에게 진노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악인들보다 더 현명한 만큼 악인들보다 더 나쁜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악인들이 저지르는 엄청난 죄악보다 더 풍성하기 때문에 죄나 죄인에 대해 하나님은 불쾌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가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선하시기 때문에 죄인들에게 진노하실 수 없어.”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 너무나 선하기 때문에 모든 악에 반대할 수 없다니! 너무 선하시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자들을 싫어할 수 없다니! 이런 선함이야말로 정말 이상한 선함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너무 선해서 죄를 미워할 수 없고, 죄인을 거부할 수 없다니! 이건 도대체 어떤 종류의 선함이란 말입니까?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진노한다면 이건 마귀만큼이나 하나님이 나쁜 것이 된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소릴 가끔 듣습니다. 이 말은 불경스럽기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한 말이요, 논리적으로 터무니없이 불합리한 소리입니다. 하나님이 악을 싫어한다면 하나님 자신이 악하게 된다는 논리 아닌가. 이와 마찬가지 논리로 불법을 행하는 자를 증오하는 것도 단연코 잘못이란 논리입니다. 기도하시오. 누가 이런 교리를 붙들고 있습니까? 하나님 자체에 대항하는 악인들을 살려두라는데 조금의 관심이라도 갖는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죄인에게 하나님이 진노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에는 아무런 설득력도 타당성도 없습니다. 오로지 거룩한 진노에 대해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 인간의 성내는 것이 종종 그렇듯 - 그 자체로 죄악이라면 이 주장이 왜 옳은지 논리적으로 설득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진노는 전혀 죄악이 아니며, 이기적이지도 않고, 악의적이지도 않으며, 약간의 거룩하지 않은 점이 있지도 않고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죄악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거짓되고, 더 궤변스럽고, 더 황당하고, 더 사악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진노하는 것은 스스로 사악해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바로 이 말을 하는 자들은 최대의 불경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주제의 참된 견해는 전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선한 사람은 자신의 선량함으로 악인을 거부한다는 사실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모든 악한 자들도 이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모르고 있다면 악인들이 선량하고 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을 왜 두려워하겠습니까? 말 도둑이나 위조지폐 범들은 하나같이 선량한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숨어 지내고 공통적으로 선량한 사람을 너무나 싫어하는 감정을 갖고 있으면서 자신들의 사악한 계획을 선량한 사람들이 없애려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왜 항상 두려워하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악인은 하나님을 인식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 때문에 하나님은 악인에게 적대적이라는 사실을 악인들은 압니다. 이 점은 시편 기자의 다음과 같은 권면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어찌 너의 사악함을 자랑하십니까? 하나님의 선하심이 계속 되는도다" 하나님은 항상 선하시다. 어찌 너의 사악함을 자랑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너무나 선하시고, 변함없이 너무나 선하시기 때문에 당신에게 조금의 범죄도 허용하실 수 없습니다. 부정한 가운데에는 하나님과 함께 화평할 조금의 소망도 없습니다.
V. 죄에 대한 하나님 진노의 정도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정도는 악인의 악함의 정도와 일치한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나님답게 존재한다면 당연한 일입니다. 이방인의 무지와 암흑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은 눈짓을 보냈다” 이방인의 죄악은 그들에게 임한 빛이 적은 만큼 고라신(Chorazin)과 벳새다(Bethsaida)와 같은 도시들의 죄악보다 적었다. (마 11 : 21에 나오는 이야기. 원문 :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배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이런 도시들이 절대적으로 순수한 채로 있지는 않았습니다. 복음이 전해진 곳의 죄인들이 저지른 엄청난 죄악과 비교하여 이런 도시의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순수하다고 할만했습니다.
가장 명료한 빛 가운데 범죄한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는 가장 강렬하게 불타오르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 설교가 이루어지고 있는 이곳과 또 여기에 모인 회중들에게 말입니다. 당신은 아마 외적으로는 예의바르고 도덕적인 사람으로 친구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이기적이고 완악한 죄인이라면 순수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당신을 너무나 싫어하고 혐오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상들에게 절하면서 암흑 속에 있는 수많은 이방인들에게서보다 당신 안에 있는 보다 실질적인 죄악을 봅니다. (당신은 이런 이방인들의 죄에 관한 내용을 읽으면서 혐오와 역겨움을 느낄 것입니다.) 명심할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하늘저울(天秤)을 가지고 영원한 공의로 당신이 받은 빛과 범죄를 측량하면서 우상을 숭배하는 민족보다 엄청나게 사악한 당신에게 더 진노하실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빛에 대해 이방 민족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감안하고 있습니다. 오, 당신은 여기서 매일매일 충실하게 불타오르는 진리의 빛 가운데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당신은 지옥에서 나온, 아니 지옥 안에 있는 가장 사악한 자의 한 명이요, 당신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는 그 엄청난 범죄에 대한 증오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당신은 어쩌면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도덕적이지 않고 정직하지 않다고?”
당신이 도덕적이라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과연 누구를 위해 당신은 도덕적입니까? 왜 도덕적입니까? 오로지 당신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 때문이 아닙니까? 마귀도 당신과 같은 목적으로 도덕적일 수 있습니다. 당신이 도덕적인 사람인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도 아니요, 그리스도를 위한 것도 아님을 명심하십시오.당신은 당신 자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즉 당신이 무신론자라면 당신은 현 상태 정도로도 도덕적이라고 할만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물론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 눈 앞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 내 가슴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어. 마치 하나님이 없는 듯이 내 방식대로 살고 내 길을 가게 해줘.” 사실 당신은 이런 생각과 행동을 이교도의 암흑 속에서가 아니라 당신 주위를 활활 타오르는 천국 진리의 광대한 빛 속에 행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당신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습니까? 당신은 하나님께 대적했고, 하나님 독생자의 복음을 거절했고, 은혜의 성령을 조롱했다. 이방인들이 행한 것 중에 이런 범죄와 필적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자기의 오물 속에 뒹굴기까지 한 가장 사악한 이방족속도 당신과 비교하면 깨끗합니다. 당신에 대한 이런 견해를 반박하고 물리치려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다시 물어 보겠습니다. 무슨 법칙으로 죄를 평가해야 합니까? 길거리를 지날 때 저급한 동물들이 사람이 해서는 안 될 끔찍한 짓을 하는 것을 봐도 당신은 그 동물들이 범죄하고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개들이 서로 찢어 죽이려고 하는 것을 보고 당신은 아마 이들을 뜯어 말리려고 하겠지만 이 개들에 대해 도덕적 분노나 도덕적 불쾌감을 느끼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나까? 당신은 본능적으로 개의 범죄를 개의 시각에서 보고 있습니다. 바로 이성과 빛으로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감안하여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똑같은 원칙이 자기 배설물을 핥는 이방인들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서로 싸우고 가장 혐오스러운 악과 이기적인 모습을 지닌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범죄는 당신의 범죄와 비교할 때 아주 희미하게 작은 것일 뿐입니다.이방인들이 지닌 빛이 당신이 받은 빛보다 적으므로 그 적은 빛만큼 적게 이들의 범죄를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의 이성은 이 원칙으로 범죄를 평가하라고 요구합니다. 다른 원칙으로는 올바르게 평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당신은 압니다. 하나님 역시 이와 똑같은 원칙으로 죄를 평가합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죄인의 죄와 비례합니다. 그가 향유한 빛과 범죄를 서로 견주어 보는 것입니다. 악인에 대한 하나님 진노의 정도는 외적으로 표출된 행위로 측량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죄인의 심중을 꿰뚫는 하나님의 눈에 비친 실제적 죄로 그 진노의 정도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VI. 진노는 얼마나 지속하십니까?
하나님의 진노는 악함 자체가 지속되는 한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악인은 계속 악한 상태에 있는 한 하나님도 악인에 대해 매일 진노할 수밖에 없습니다. 악인이 돌이키지 않습니다면, 진노는 줄어들지도, 멈추지도 않습니다. 이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로 모든 사람이 꼭 알아두어야 합니다.
VII. 하나님 진노 하에 있는 죄인의 끔찍한 상태
하나님이 매일 악인에 대해 진노하고 있다는 무서운 사실을 죄인들이 지식적으로는 알지만 마음 깊이 깨닫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죄인들이 죄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평가했으면 좋겠습니다.
자, 여기서 하나님이 지니신 여러 속성들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시며 또 무엇을 하십니까? 하나님은 당신이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진노를 당신을 향하여 발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까? 당신은 종종 어떤 사람이 기분 나빠하는 것만 보아도 끔찍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아이들은 자기 부모가 화내는 것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무서워합니다. 어떤 아이는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고 그 일이 아버지나 어머니께 알려지게 될 때 참으로 무서운 사태가 발생하게 되리라고 느낍니다.
부모가 자기를 극도로 싫어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되니, 이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이런 사태를 두려워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죄인이 자신의 죄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자기의 적으로 만들었을 때 이런 상황에서 죄인이 두려워 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태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죄인이 위대하고 가공할 무서움을 발하는 하나님의 진노에 노출된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천성을 주목하십시오. 누가 하나님 권능의 크기를 측량할 수 있습니까? 누가 아니 그 무엇이 하나님의 의지에 저항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섬들도 아주 작은 물건처럼 들어올리시고 하나님 앞에서는 열방도 하늘저울에 있는 작은 먼지 알갱이에 불과합니다. 언제 하나님의 진노가 불붙습니까? 누가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수 있습니까? 누가 그 가공할 진노를 견딜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또한 전지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행한 모든 것을 압니다. 모든 행위가 하나님 눈 아래 지나갑니다. 모든 외적 행위만이 아닙니다. 당신이 더욱 두려워해야 할 것은 모든 행위 뒤에 숨어있는 동기까지도, 가장 은밀한 당신 마음의 일 모두를 하나님은 압니다. 당신이 간단히 속일 수 있는 그런 사람하고 상대한다면 무엇 때문에 은밀히 속이려고 계획을 세우겠습니까!
그러나 어떤 계획도 헛되나니,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압니다. 당신 자신과 인간 세상의 재판정 사이의 소송건이라면 아마 많은 내용을 숨길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속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은밀히 증인을 위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단 한순간에 이런 시도는 헛된 것이 된다. 전체적인 진실은 드러나게 되며, 두렵게도 당신이 숨긴 모든 것이 폭로됩니다. 하나님께는 어두움과 빛이 모두 동일하며 그 무엇도 하나님의 눈에서 숨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행한 모든 것을 알고 또 하나님은 그런 당신을 능히 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만큼 하나님은 능력이 있고,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죄를 절대 간과할 분이 아님을 당신도 압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선하시기 때문에 죄를 보면 반드시 회개하게 하거나 벌을 주거나 하지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그냥 놔둔다면 이것은 이 우주에 대한 무한대의 잘못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그냥 놔둘 수밖에 없다면 그 순간 바로 하나님은 선하고 거룩한 하나님이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오, 죄인들이여, 하나님의 완전한 거룩함, 그 심령의 무한한 성결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당신 죄를 하나님이 얼마나 완강히 반대하는지 생각하지 않습니까? 당신이 지은 죄악들은 당신 자신의 눈으로 보아도 너무나 죄질이 나빠 친지들에게 그 죄악이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당신의 죄 많은 심령이 성결하고 거룩한 하나님 눈앞에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자비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어쩌면 당신 자신에게도 자비로운 하나님의 성품에서 나오는 은총을 소망할지 모릅니다. 오, 당신이 하나님의 자비를 스스로 거절하여 당신 발 아래 짓밟지 않았다면, 하나님 자비가 당신에게 구현되었을 때 그것을 가볍게 여겨 무시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자비가 진정 필요한 날에 당신에게 임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를 모욕했다면 그 자비를 어찌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풍성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항하여 죄를 지었는데 당신은 무어라 자신을 변호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상처받은 자비가 당신에게 우호적으로 임할 수 있으리라 소망할 수 있습니까? 진정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당신과 같은 죄인을 용납할 수 있는 속성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이렇기 때문에 당신은 소망할 게 없습니다. 오로지 모든 것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진노는 어떻게든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단 당신에게도 자신을 돌이켜 구원에 이르는 노력을 할 수 있는 최대의 기회를 주기 위해 한철 동안 참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돌이키지 않으면 정의는 정의의 길을 가지 않겠습니까? 죄인에게 모욕당한 지존자께서 자신의 경외로운 목소리를 발하지 않겠습니까? 무한한 하나님께서 자신의 경외로운 성결의 모습으로 일어나 다음과 같이 선포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모든 악을 미워합니다. 내 진노는 죄인에게 타올라 가장 낮은 지옥으로 죄인을 보내노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진실한 위상을 죄인들이 알도록 합당한 조치를 취하지 않겠는가?
<정리>
1. 하나님은 사탄이 죄인을 반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죄인들을 거부합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사탄에게는 죄인들을 거부할 하등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사탄이 죄인들을 자기편으로 부리듯이 죄인들은 사탄의 일을 합니다. 사탄이 죄인들의 길을 불쾌하게 여긴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이유로도 죄인들을 심히 불쾌하게 여깁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말하길 하나님이 악인들에게 진노한다면 하나님이 사탄보다 더 나쁘다고 합니다. 이들은 사탄이 자유스럽고 온화한 마음을 지닌 자로 여기나 봅니다. 아니 사탄을 전반적으로 아주 자비롭고 고상한 심성을 지닌 자라고 칭찬하고 싶은가 봅니다. 아니면 사탄이 아주 나쁘다고 생각은 하지만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엄격하신 것을 수용할 수 없는가 라고 생각합니다.
자 명백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선하기 때문에 죄인들에게 진노하는 것 외에는 달리 길이 없습니다. 마귀는 그 자체로 너무나 나빠 죄인들의 악함을 용납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죄인들의 악함이 전혀 사탄을 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탄이 죄인을 대하는 것보다 죄인들을 무한히 더 미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만약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진노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신뢰를 상실하게 됩니다. 만약 어떤 도시의 시장이 법을 어긴 사람에게 전혀 분개하지 않는다면 그 시장에 대해 시민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당신은 당연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 시장의 마음속에는 이 도시의 공공안녕을 유지할 생각이 없어. 그런 시장을 신임할 수 없어.’
3.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복락과 불일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거룩함과 불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진노에 뭔가 잘못이 있다면 이건 하나님의 모든 복락을 파괴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본능적으로 옳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락을 파괴하지도 않고 악인에 대한 진노 없이 행복을 느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복락은 모든 실체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거기에 따라 행하는데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지 않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를 모든 온전한 방식으로 공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스스로 자신을 존경할 수 없고, 하나님 자신의 본성 깊은 곳에 물러나 무한히 올바른 양심으로 영원한 은총을 향유할 수 없습니다.
4.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반대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악인과 마귀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공표하는 것은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훌륭한 통치자들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훌륭한 통치자들은 악인들을 반대한다고 공표할 수 있는 기회만 있으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하는데, 이것이 그들에겐 진짜 영광스러운 것이 아닙니까? 범죄를 막는 일에 열심과 효율적으로 임하는 것은 훌륭한 통치자들의 영광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그렇습니다. 이것 외에 진정한 영광이 통치자들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통치자가 살인자, 도둑놈, 강탈자 등을 동정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의 이름을 비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5. 성도들은 하나님이 성도 자신들의 죄악까지도 예외 없이 포함해 죄인들을 반대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의 죄를 반대하지 않는다면 성도들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들은 자신의 부정에 대해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 하나님이 성도들 자신의 죄에 대해서도 얼마나 반대하는지 알게 되면 성도들은 하나님을 영예롭게 여기고 더더욱 경배하게 됩니다. 자기 죄 문제로 이 우주에서 하나님 외 다른 존재를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죄를 부인하면 그만이지 죄인 된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떤 다른 입장을 견지할 필요도 없습니다.
6. 오늘 본문 말씀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는 말 그대로 이해하면 된다. 너무나 명료한 말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실제로 진노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그런 주장을 우리에게 이해시키려고 가당찮게 이 구절을 이용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 구절은 해석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성경 구절을 읽을 때 여기서 사랑은 우리가 서로서로 느끼는 것과 같은 그런 실제적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현실적 사랑과 같은 것이 아니라 사랑이란 말을 단지 편의상 사용할 뿐 실제로 어떤 특별한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해석은 성경을 파괴합니다. 아니 어떤 다른 책이라도 이런 식의 해석을 만나면 파괴된다. 이런 문제에 대한 유일한 건전한 견해는 하나님이 아주 상식적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합니다는 사실입니다. 보통의 독자와 청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언어를 사용할 때도 가장 분명한 의미로 쓴다. 하나님이 죄인에게 진노한다다고 말하면 실제로 하나님이 진노하는구나 라고 이해하면 된다.
앞에서 제시했듯이 하나님의 실제적 품성을 확실히 알면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파악하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악의적인 진노나 이기적인 진노가 아니라는 점을 또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로움과 불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추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풍성히 이해할 때 더 이상 추가할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 진노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 죄인들의 엄청난 죄악 때문에 모든 죄인들에 대해 변할 수 없이 영원한 불쾌감을 지니고 그들을 반대합니다.
7.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에는 사랑이 배제되어 있지 않다. 거기엔 실제적이고 참된 연민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지만 안일한 사랑은 거기에 없습니다. 선의의 사랑은 있어도 죄인에 대한 사랑은 없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가운데 무한히 행복할 수 있는 그런 감각을 지닌 자에 대한 사랑은 있습니다. 이것이 죄인에 대해 하나님이 취하는 태도임을 확실합니다. 이런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부모는 없습니다. 당신 아이의 악함을 보면 당신은 분노의 불이 붙을 것입니다. 동시에 당신은 부모의 마음인 연민의 정을 아이에게 느낄 것입니다.
죄인은 때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매일매일 감찰하시기 때문에 나에게 진노할 수 없어. 하나님은 식탁에서 나를 먹이시고, 하나님의 풍성한 것으로 나를 환대합니다. 오, 죄인아 이 문제를 잘못 판단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라. 하나님이 진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진노를 표하는데 느리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스스로 죄인을 향해 오래 고통을 참으시는 이유는 이들을 멸망으로 이끌지 않고 모두 회개의 길로 들어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에게 향한 하나님의 실질적인 감정을 잘못 간파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하나님의 크신 관용을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경계하십시오. 하나님은 기다리신다. 그러나 복수의 폭풍우가 모여들고 있습니다. 언제 하나님이 자기 자리에서 나와 갑자기 모든 복수의 회오리바람을 풀어낼지 모릅니다. 오, 죄인아, 이런 일이 한 번 이루어지면 너희들은 더 이상 잠들지 못하리라.
8. 죄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알고는 있어도 깨닫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이들이 알고 깨달았다면 무서운 부정을 저지를 때 자기의 엄청난 강심장을 과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죄인들은 하나님이 진노합니다는 생각 자체를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지 않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무모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한 번은 겪어야 될 사망처럼 여긴다. 죄인들은 자신들이 죽을 수밖에 없음을 압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온 몸으로 깨닫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가만히 앉아 사망이 얼마나 빨리 오나, 사망이 오는 것이 얼마나 확실하나, 무덤에서 벌레들이 자기 광대뼈에 붙은 살을 갉아 먹고 지금은 초롱초롱 빛나는 이 눈을 삼키겠지 등등 사망과 관련된 생각을 하면서 사망을 제대로 알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여기 계시는 숙녀분들은 지금 말한 그런 생각들을 하고 싶어 하지 않지요. 하지만 이런 장면들이 곧 현실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시오.
이런 식으로 당신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그렇게 진노하는 이유와 그렇게 격분하는 모습에 대해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십중팔구 지금 내 설교를 듣기 싫어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설교는 나로선 최대로 부드럽게 하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오늘 던진 하나님 진노에 관한 말씀을 당신을 듣기 어려워합니다. 당신은 가만히 앉아 이 주제를 신중히 생각해 보는 습관이 있습니까? 말해 보시오. 신중히 고민해 본다면 하나님을 경멸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자신에게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9. 죄인들이여, 당신은 하나님을 당신의 적으로 만든 줄 아는가? 당신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는지 아는가? 당신이 하나님께 저항하는 짓이 얼마나 별볼일 없는 짓인 줄 알기나 하십니까? 만약 조금이라도 의지가 되는 친구가 있습니다면 그 친구를 당신의 적으로 만들 생각은 없을 것입니다. 이 대학의 학생이라면 아무 생각도 없이 이 대학 교수를, 어떤 과의 교수라도, 그를 자기 적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아이는 부모를 적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이제 당신이 하나님께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라. 하나님은 그의 권능으로 당신의 숨을, 즉 바로 당신의 목숨을 손아귀에 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손을 빼면 당신은 자신의 중력으로 지옥에 떨어진다. 미끄러운 절벽에 붙어 서게 될 것이고, 저주의 물결이 발 아래 펼쳐져 있습니다. 오, 죄인아, 하나님께 반역하려는 무기를 손에 들고 당신이 한밤에 누워있을 때 하나님의 불타는 눈이 당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이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까?
한때 이 대학 학생이었던 H씨의 경우를 돌이켜 보십시오. 그는 상당 기간 동안 오늘 제시된 것과 같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항했습니다. 반역의 기운이 점차 고조되어 갔습니다. 그 학생이 할 수 있는 최고조의 단계까지 간 것 같았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그는 잠자리로 가 불을 꼈다. 갑자기 그 방이 휘황찬란하고 장엄한 빛으로 가득한 것 같았습니다. 그는 주위를 둘려 보았습니다. 그 앞에 거룩하고 가장 밝은 권능의 눈을 가진 영광스러운 모습이 서 있었습니다. 점차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단 하나의 눈만 남았는데, 그 눈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찬란히 빛났고 그를 세밀히 살피는 것 같았습니다. 이 모습이 그의 마음에 너무나 경외롭게 다가왔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내가 하나님의 의지에 굴복하여 무릎을 꿇고 엎드리지 않았다면 오랫동안 그 빛 아래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하나님의 찾는 눈(searching eye)이 당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밤에 자리에 누울 때마다 이 사실을 생각하십니까? 당신이 오늘 하루를 더 살아 다시 잠자리에 눕게 되면 그때 이 말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보고 있습니다.” 이 말을 작은 카드에 기록하여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 걸어 놓으십시오.
이것을 행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눈이 당신의 마음을 꿰뚫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 경외로운 찾는 눈이여! 당신은 잠자기 위해 눈을 감지만 하나님의 눈은 당신을 계속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밤의 어둠이 내려도 감지 않습니다. “나는 평소처럼 잠을 잘 거야. 하나님 진노가 두려워 잠을 자지 못하는 그런 죄인이 아니야. 내가 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해? 내가 겁낼 게 뭐 있어? 나는 하나님이 ‘네 마음을 다오.’라고 말하는 걸 확실히 알아. 하지만 내 마음을 주려고 생각하지는 않아. 나는 오랫동안 하나님께 불순종했고, 어떤 진노의 불꽃도 보지 않았어. 하나님이 여전히 나를 먹이시고 내 잔에 온갖 축복으로 채울 거야.”
그러나 죄인들이여,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불타는 진노를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자비를 너무나 남용하여 그 한계에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오, 얼마나 빨리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폭발할지 모릅니다. 이 우주에서 어떤 무기로도 이 파멸의 홍수 속에 견딜 수 없습니다. 당신이 이런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더욱 확실해지고, 더욱 빨라지고, 경외롭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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