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 챈트리는 자기 부인에 대해서 명쾌하게 설명한다. 자기 부인은 믿음의 첫단계라는 것이다. 즉, 중생한 신자부터 자기 부인이라는 덕목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부터 자기 부인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덕목은 중생한 후에도 계속된 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기 때문이라고 하셨다(고후 5:15). 따라서 자기 부인을 하지 않으면 결코 회심할 수 없다. 그 결과 중생할 수도 없다. 자기 부인을 하지 않고 아무리 교회를 다닌다고 해도 아무 소용없다. 자기 부인을 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기독도, 크리스천이 되기 위함이다. 크리스천(Christian)이란 예수님(Christ)처럼 살고 예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자기(아)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제1장 죽으셨다 살아나신 그분에게로
“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3-15).
자기 부인은 참 종교의 중심에 가장 가까이 놓여 있는 실천사항입니다. 이것을 실행에 옮기지 않고는 그리스도에게로 회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사고(思考)의 틀에서 가장 기본적인 자질들, 그 중에서도 특히 겸손과 온유는 독립적으로 표현되어서는 안되고 오히려 하나로 녹아져야만 합니다.
자기 부인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개인적인 헌신을 시작하게 되기를 기다립니다. 우리 거룩하신 주님에 대한 전도와 봉사의 문턱에 자기 부정이 서 있습니다. 그것은 성결 가운데 따라오는 투쟁의 순간마다 느끼는 가장 고통스러운 요소입니다.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온전한 정신을 지니고 있는 오늘의 신자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수많은 실제적인 질문들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입니다. 이 기본적이며 성경적인 요청을 올바로 이해하면 전도, 성화, 그리고 실생활에 관한 수많은 실수를 잠재울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자기 부인에 대하여 저술도, 설교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형편입니다. 때로는 가장 심오한 진리들이 너무 명백하기 때문에 무시되곤 합니다. 아마도 이 특별한 성경적 진리는 과거에 왜곡되었기 때문에 망각되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광신적인 금욕주의로 그형태가 변형되거나 혹자는 그 주제 자체를 꺼렸습니다.
현 세대의 설교자들은 자기부정을 “second grace of grace(오순절 계통의 성화 이후에 주어지는 은혜의 단계)”에 이르는 단계로 보았습니다. 자기부인에서부터 복잡하고 까다로운 인격의 분석들이 이루어지고, 또 이러한 분석들의 도리어 단순한 용어인 “자기(self)”를 모호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요소들을 규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생기가 넘치는 성경의 주제에 대하여 침묵하도록 공헌을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 가운데 개혁 신앙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을 모호하게 만드는 부당함에서 벗어나 자기 부인에 대한 성경적인 교훈을 소생시켜야 합니다. 그것은 중세의 ‘채찍질 고행자’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deep life movement(오순절 계통의 은혜 운동)”의 전유물로 감히 내어 줄 수 없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고 말씀하신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진정한 칼빈주의는 자기 부인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항상 이끌어 줍니다. 은혜의 교리들이 온화하고 실험적으로 선포될 때 자기 부인은 필연적으로 각 영혼이 체험하게 되는 으뜸되는 경험입니다. 그 교리들은 각각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높이고 인간의 죄악된 자아는 벌레에 불과한 것으로 낮추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타락에 관한 교리들 중에서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 부인의 경이로움과 실현이 여러분의 영혼에 넘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자기의 모든 것 즉 자화 자찬, 자기 방종, 자기 만족, 자기 결을 죽이는 축복이 아닙니까?
“여호와의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으로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라는 시편 115:1의 기도처럼 그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떠오르는 사랑의 광선이 아닙니까?
여러분의 마음의 부패함과 사악함을 영적으로 묵상하게 될 때 비로소 자기를 거부하는 자리에 나아가게 됩니다. 만일 여러분의 영혼이 인간의 타락을 파악하였다면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부인해야 된다는 강요를 당하였을 것입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영을 사람의 마음속에 두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전하였을 때 이 영의 선물로 말미암는 결과 가운데 하나가 에스겔 36:31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리라”는 것입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롬 7:18)이라고 마음속으로 결론짓고 계속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칼빈주의라고 하는 성경적 진리의 위대한 유익 가운데 하나는 사람이 다만 티끌 가운데 있다고 낮추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진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것이 없이 상한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5, 6)라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이 진리가 인간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에 침투했을 때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 수 없고 욥처럼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6)라고 부르짖게 됩니다.
그러나 또한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인간의 자만심은 부서진 반면 만군의 주 하나님에 대한 존경심이 형성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는 그러한 마음에 감동을 주고 사로잡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로 말미암는 절대적인 자유로움은 그러한 영혼으로 하여금 낮이나 밤이나 그분 앞에 엎드려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권세를!’하고 찬미하는 천상의 무리들과 연합하게 합니다. 그분의 주권과 무한한 긍휼의 환상과 더불어 새로운 좌절감과 마음 아픔이 그러한 여혼을 채우게 됩니다.
그것은 자기 욕망만 채우려고 허덕이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말미암는 지난날의 부르짖음이 아닙니다. 그분의 이름만을 거룩하게 여기려는 바람입니다. 오, 구세주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주여 내가 무엇을 하오리이까?’ 내가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오직 한 분뿐이신 왕의 영광으로 사로잡힌 한 영혼이 드리는 기도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은 오직 자기 부정뿐입니다.
은혜의 교리란 심오한 인생의 질문에 대하여 지고지선의 논리적인 해답을 주는 철학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렇습니다. 은혜의 교리들은 자기 부정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속사람에게 일깨워 줍니다. 전능하신 분의 보좌 앞에서 취하는 이 예배의 행동은 헌신의 샘을 열어주며 이 샘으로부터 실제 생활의 결단과 행동이 밑바닥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자기 부인은 한편으로는 교리와 헌신을, 또 다른 한편으로는 헌신과 실행을 생동감 있게 연결시킵니다. 나는 더러운 반역자요, 하나님은 엄청난 은혜의 조성자시라는 진리는 자기 부정이라는 헌신적인 행동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일상생활에서 그 자체를 나타내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칼빈주의를 시험해 볼 곳은 바로 여깁니다. 자아(自我)는 얼마나 낮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속의 하나님은 얼마나 높으십니까? 여러분 인생의 거의 매 순간은 시험의 순간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논리적인 결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매 요소를 실제적으로 적용함, 이것은 고린도후서 5:15의 표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생애를 장엄하게 설명한 것입니다. 15절에서 ‘더 이상’(henceforth, 흠정역에서 사용한 말. 개역성경에는 ‘다시는’으로 번역됨)이라는 바울의 말은 과거에 대한 것을 암시합니다. ‘다시는[이후, 더 이상]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라는 말은 자기 과거 생활에 대한 간접적인 증언입니다. 그것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인류를 정확하게 기술한 것입니다. 그들은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삽니다.’ 이기심은 죄악된 삶을 지배하는 힘입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생각, 감정, 의지, 곧 자기 만족, 자기 잇속만 차리고 자기만 위한 삶, 바로 그러한 이기적인 동기가 고동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주 죄를 이기심으로 기술합니다. 이사야 53:6은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라고 합니다. 이들 여러 길은 양들이 지니고 있는 개성이나 취향만큼 다양합니다. 그러므로 각자 ‘제 길’을 가지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1,2에서는 충격적인 말로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 그것은 구역질나게 하는 우리 세대의 현실입니다. 사람들은 오직 단 하나의 대상, 즉 ‘자기 자신’을 위하여 결정을 합니다. 각자는 자기 자신의 권리만을 위하여 외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일만 합니다. 이웃이나 어린이나 그와 같은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현대인의 사랑에 담긴 으뜸되는 목적은 ‘자기 자신’일 뿐입니다.
베드로는 육체를 따르는 자들을 표현하면서 ‘담대하고 고집하여’라고 하였습니다(벧후 2:10)(‘그들은 뻔뻔스럽고 완고하여’라고 번역할 수도 있음). 죄악된 마음은 사사로운 의견에 헌신하게 됩니다. 죄인을 보고 ‘당신이 실수를 범했다’는 말처럼 죄인을 격노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아합은 그가 듣고 싶은 말을 하게 하려고 400명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미가야의 외로운 목소리가 그의 사사로운 견해에 반하는 말을 한다고 분노하였습니다. 죄악된 감정은 자기를 사랑함에서부터 가장 깊게 끓어오릅니다.
이 타락의 뿌리들은 유아에게서도 대단히 명백하게 나타납니다. 갓난아기들은 추악한 죄의 결과를 보이지 않습니다만 이기심은 분명하게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의 작은 에고(ego)가 괴로움을 당하면 밤이건 낮이건 때를 가리지 않고 울어댈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들은 작은 어린이가 얼마나 자기 본위인가를 주목해 보셨을 것입니다. 무엇인가 대접할라치면 ‘나 먼저’의 태도가 단연 우세합니다. 작은 어린아이들은 자기만 봐달라고 합니다. 모두 자기만 위해 달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모든 것을 요구하는 자기 고집은 욕심 많은 어른의 고집으로 성숙하게 됩니다. 좋은 생각들이 이기심을 예의바르고 점잖게 만들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삶 전체는 단 한 가지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 자아입니다!
우리 구세주의 여러 비유는 죄인의 자기 경배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여 …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눅 15:12). 이 탕자처럼 우리도 건강, 시간, 재능, 부를 자기 만족, 자기 야심, 자기 쾌락, 자만심을 위하여 사용하고 싶어합니다. 자아란 모든 사람이 자연스럽게 경배하는 우상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는 자기의 모든 계획에 ‘나’라는 인칭 대명사를 끊임없이 사용하였던 어리석은 부자의 본보기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더 이상’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나도 역시 그와 같았다. 나는 정통성을 추구하는 열심당원으로서 명성을 쌓았다. 나는 자기 의를 위하여 살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선순위를 완전히 재정리하는 것입니다. 한때 자아가 으뜸이었고 하나님은 두 번째나 다른 사람 뒤에 오는 세 번째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의 여러 생각들은 나의 사적인 견해보다 그분의 말씀에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감정과 욕구는 그분의 뜻에 이어서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분을 사랑하고 나 자신보다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택하고 있습니다.
이 작은 사람 바울은 자기 부정이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출발점에서 요청된다고 이해하였습니다. 이 특별한 근본 원리는 각 개인에게서 각기 다른 항목을 목표로 합니다. 질투심이 많은 사람들은 부자 청년 관원의 경우에서처럼 자기 자신을 부정하여야만 합니다.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입니다. 자기 의를 잘 엮어가는 교만한 바울에게는 그리스도를 소유하기 위하여 그가 지니려고 했던 자기 의를 배설물이라고 말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5은 매우 명료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지속적인 목표는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모든 영혼을 표시해 주는 변함없는 태도입니다. 여기 바울이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곧 ‘내가 그분을 알게 되고’ 더 나아가서 ‘그분 안에서 발견되고자 함’입니다. 위대한 욕구란 그분을 위하여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구세주만 위하여 살려는 욕구입니다.
‘다시는’(더 이상)이라는 말을 장래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2은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지상에서 그의 남은 날들은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뒤틀린 자아와 경쟁이 끝나고, 전(全) 존재가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분의 보혈로 우리를 죄에서 정케 씻어 주신 그분에게 찬송을 돌리게 될 때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편안함이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고귀한 목적을 부정적으로 일컫는 말이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자아)를 좇지 않고’라는 것이며 긍정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라고 부르는데, 이 목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바울의 묵상에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사도의 마음에는 ‘왜 그리스도가 죽으셨는가?’라는 질문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질문에 대한 대답에는 여러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화 아래서 사도는, 자기만 위하는 삶을 원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주님의 죽음이 의도된 것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께서 의도하신 것 가운데 생동적인 부분은 그분이 피 흘리심으로 다시 살게 하려는 자들의 동기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려는 것입니다. 그분이 갈보리 언덕 위에서 투쟁하시고 피 흘리셨던 바 그분의 목적은 자기 사랑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심어 놓으시려는 것입니다. 다른 쪽이 쓰러질 때에라야만 한 쪽이 살아납니다.
자기 부인s은 자기 학대증의 영적인 형태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고통이 영적인 행동의 목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부정은 죽으셨다 다시 사신 그분에게 동일한 삶의 분량을 수종 드리게 될 때만 건전한 것입니다. 자기 부인은 영적 기쁨을 출산하는 고통입니다.
출산의 고통을 갈구하는 여인은 없습니다만 갓난아기를 자기 품에 안고 흔들어 잠재우는 기쁨을 위하여 기꺼이 그 고통을 견딥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부정의 고통에 복종하는 것은 여호와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순수한 기쁨과 그분의 장엄한 사귐 가운데 거하는 만족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코 끝이 없습니다.
금식은 결코 유익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한 영혼이 낮아지기 위한 수단으로써 금식은 엄청난 유익이 됩니다. 음식을 먹고 소화시키는 데 들이는 모든 정력과 관심은 함께 묶어 간절한 기도로 드려질 수 있습니다.
매 단계에서 자기 부인은 정신적인 행실- 즉, 한때 자기를 위하여 사용되었던 애정과 고집의 정력- 의 흐름들이 죽으셨고 다시 사신 그분을 향하여 방향을 바꾸게 될 때에라야만 유익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 마음은 우리 구세주께서 묘사하신 것처럼 더러운 귀신에게서 깨끗하게 청소한 집을 제공하는 것과 같게 될 것입니다(눅 11:24-26). 만일 자기 본위(self-interest)라는 한 마리의 마귀를 영혼에서부터 소제하고 그 영혼이 죽으셨다 다시 사신 그분에게 완전히 삶을 드리지 않는다면 처음보다 더 나쁜 자기계획이라는 일곱 마귀와 더불어 돌아올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자기 앞에 놓인 이 위대한 목표를 그리스도 안의 삶으로 충족하게 진행시켜 나가는 그리스도인은 극히 적습니다. 빌립보 교회에 디모데를 추천하면서 바울은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빌 2:20, 21)라고 말하였습니다. 앞서 같은 장에서 바울은 회중들에게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라”고 권고합니다(4절).
성경에서 이렇게 거듭하여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치르는 전투의 중심점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하여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인쇄한 깃발을 들어올려야만 합니다.
성화의 과정에서 매 단계는, 수많은 눈물을 흘려 왔으며 수많은 핏 방울을 뿌려 온 무서운 전쟁터로 그리스도인을 데려갑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것은 익숙한 장면입니다. 영적 전진을 하는 여러분 앞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의 길에 두 다리 짝 벌리고 서 있는 소름끼치는 늙은 원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아(自我)입니다!
이 괴물은 매일 자기를 섬기라고 고함을 지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도전하고 주님에게 시간, 정력, 사랑을 드리는 것을 매번 반대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고통스러운 타격을 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낌으로써만 이길 수 있는 이상한 전쟁입니다. 모든 자기 부정을 예리하게 느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전투의 장면을 바꾸기를 얼마나 사모하는지요! 의의 진보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매 경우마다 우리는 반드시 자아와 싸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 주님은 산상설교에서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러비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물론 이처럼 생생한 언어는 자기 자신에게 신체저인 해를 가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아의 손발을 자르는 행위가 반복적으로 유혹에 빠지는 것을 이기기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점을 가르치려는 것입니다. 만일 달콤하고 감미로운 대안이 없다면 말입니다! 사람의 전 기관에 결정적인 충격을 가함으로서 눈을 뽑고 사지를 자르는 것은 여전히 위대한 의사이신 그분이 처방을 내린 치료 방법입니다.
그리스도의 평범한 지시들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보다 고상한 자리에 이르는 길을 보여 줄 때마다 우리는 두려움으로 망설였습니다. 우리는 또 다른 길에 우리 마음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자아를 부인하고 죽으셨다 다시 사신 그분을 위하여 사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부흥에 대한 수많은 동경은 약간 비현실적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부흥의 개념은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은 천국으로 몰려드는 무리를 보고 싶어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이 경이, 사랑과 찬송으로 확장되는 예배의 체험을 바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강력하여 대적을 정복하고 우리 시대에 승리의 행진에 앞서서 진리와 의의 원수들을 몰아내는 것을 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복의 한 가운데 있는 여러분 자신을 어떻게 그려 봅니까? 교회에 여러분이 앉아 있고 이 모든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거기서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그러나 목사님들은 말씀의 젖을 달라고 울어대는 갓난아기의 무리들의 노력을 배가시킬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장로님들은 부흥의 시대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보조를 맞추기 위하여 증가된 임무에 자기 자신을 드리려고 개인적인 휴식과 안일함을 위하여 마려한 모든 시간표를 기꺼이 잘라 버리고 있습니까?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자기 백성 가운데서 느껴질 때 시간과 정력을 요구하는 압도적인 요청에 대하여 준비가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TV 프로그램이나 휴가 여행, 휴식을 취하는 저녁 시간을 위하여 드릴 시간의 여유가 없을 것입니다. 부흥의 시간에 처한 성도가 치러야 할 대가만 있을 뿐입니다. 삶의 양식이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와 부흥을 위하여 노리개를 원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천국을 예비해 놓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슬퍼하면서도 반면에 정작 금식하면서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성도들이 지상에서 예루살렘을 찬송하기 전까지는 그동안 내내 자아는 부정되지 않은 채 그래도 살아 있을 것입니다. 자아의 뿌리에 도끼는 놓여 있지 않습니다.
다시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 대신 죽으셨다 다시 사신 그분을 위하여 살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하면서 자아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 부흥을 간절하게 바라는 자들이 바로 지금 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자기 부정은 한번 해 보고 말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 삶을 그 일에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모하는 모든 위대한 영적 기쁨은 자기 부정이라는 해산의 고통과 함께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세계로 들어옵니다.
<부러진 십자가> 월터 J. 챈트리, 엠마오, pp. 5-20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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