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들의 외침

조셉 얼라인과 <회개의 참된 의미>서문

천국 도서관장 2009. 6. 17. 18:27

조셉 얼라인과

회개에의 참된 의미(An Alam to the Unconverted, 회개에의 경종) 서문



조셉 얼라인은 잉글랜드 월트셔 지방 더비츠에 살던 한 청교도 가정에서 태어나, 1634년 4월 8일에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당시 영국은 곧 시민혁명으로 이어지게 될 격한 사건들에 휘말려 있었습니다. 얼라인은 열 살이 되기 전, 그의 집이 있던 마켓 스퀘어는 라운드웨이 전투(1643년 7월)에서 왕당파가 공화당(청교도 또는 의회파에 속한 사람들)을 몰아내기 위해 쏘아대는 찢어질 듯한 대포소리와 머스킷총의 굉음 소리로 뒤흔렸습니다. 2년 후 전세는 뒤바뀌어 공화당의 수장 크롬웰은 얼라인이 어린 시절을 보내던 집 맞은 편에 있는 낡은 성 꼭대기에 의회파의 청색 깃발을 세웠습니다. 이런 정치 상황 속에서 얼라인의 가정도 시련을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비록 의류업자로서 신분이 꽤 높았으나 전쟁 통에 심한 경제적 타격을 입었고, 이미 성직자 생활을 하던 큰 형 에드워드도 1645년에 죽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해 얼라인은 그리스도인의 길을 걷기로 작정하고, 아버지께 ‘형의 성직을 계승하기 위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1649년 4월 드디어 옥스퍼드로 올라가 존 오웬과 토마스 굳윈 같은 신학자들에게 신학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1651년 링컨 대학에서 코퍼스 크리스디 대학으로 진학했는데. 이 대학은 고결한 인물을 지닌 스톤턴 박사(Dr. Edward Staunton)가 이끄는 철저한 청교도 신학교였습니다. 1653년 7월 6일, 이 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은 얼라인은 시간강사로 일하다가 후에는 교목이 되었습니다. 얼라인이 교목이 된 것은 물론 부분적으로 그의 영향력 때문이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제시(Henry Jessy)는 1660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나는 얼라인이 교목으로 있던 당시의 코퍼스 크리스티 대학 같은 곳은 다시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는 많은 학생들이 경건의 능력을 나타내며, 하나님께 정결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는 이곳이 에덴동산이었는데, 지금은 황무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얼라인이 옥스퍼드에 있던 시절은 한마디로 경건과 면학의 기간이었습니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여 주위에 많은 친구들이 있었으나, 그들의 방문이 공부에 방해가 될 경우에 책을 덮고 그들을 맞이할 시간이 없다고 정중히 그들을 거절하였습니다. 그의 생각은 이러했습니다. ‘공부할 시간을 잃는 것보다는 차라리 친구들이 나의 냉정함에 당혹해 하는 편이 낫다. 몇몇 사람은 불쾌감을 가지고 발길을 돌리겠지만, 대다수는 자기들의 방문이 나의 시간을 뺏는 일임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교목으로서 옥스퍼드 근교 마을들에 복음을 전하는 데 힘썼고, 격주마다 교도소를 찾아다니며 죄수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그의 미래 사역을 위한 훈련이 되었습니다. 그는 아직 스물한 살밖에 안 된 나이였지만, 이미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사역의 소망을 꺾을 수 없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고, 이 사역을 위해 기도와 설교하는 일에 열절을 쏟아 부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열정을 생각할 때, 청교도 신학자이자 타운톤에 있는 성 막달라 마리아 교회의 목사인 조지 뉴턴이 1655년에 그를 자기 동역자로 초빙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타운톤은 인구가 약 2만의 사는 모직물 생산 도시로서, 잉글랜드 서부 지역에서 청교도의 영향력이 가장 강한 곳이었습니다. 이 도시의 기질은 당시로부터 10년 전에 뚜렷이 발휘된 적이 있었습니다. 몇 차례의 왕당파 공격을 놀랄 만큼 견고하게 견뎌냈던 것입니다. 그때는 심지어 시가지 절반이 빗발치는 듯한 포탄에 불타고, 많은 시민들이 굶어 죽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이곳, 낮은 구릉지대에 목초지와 과수원이 펼쳐져 있는 서머셋 지방에서 얼라인은 비록 짧지만 잊을 수 없는 사역의 시기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타운톤에서 사역을 시작함과 동시에 얼라인은 1655년 10월 4일, 테오도시아 얼라인이라는 친척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테오도시아는 신앙이 깊은 여인으로서, 훗날 남편의 사역에 관한 감동적인 글을 남겼습니다. 그가 남편에게 저지른 단 한 번의 ‘실수’는 남편이 자기와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있어주지 않는다고 불평한 일이었는데, 그때 남편은 대답하기를, “여보, 나는 당신의 영혼이 안전하다고 알고 있소. 그러나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멸망해 가고 있소? 나는 그들을 돌아보아야 해요. 그들을 좀 더 돌아보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몰라요!”라고 했습니다. 얼라인의 전 생애는 “주님, 자기 시간을 금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그리스도인을 한 사람이라도 제게 주옵소서.”라고 한 자신의 말을 그대로 실천한 본보기였습니다. 그는 한 주간을 시작하면서, “이제 또 한주간이 내 앞에 있다. 이 주간을 하나님을 위해서 보내자.”라고 했고, 매일 아침에는 “오늘 하루를 의미있게 살자.”고 말했습니다. 얼라인의 부인은 그의 생활에 대해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의 몸에 별 이상이 없을 때에는 매일 새벽 4시 혹은 그 이전에 일어났고, 주일에는 좀 더 일찍 일어났습니다. 혹시라도 대장장이들이나 구두제작공들, 상인들의 말소리를 듣고 일어난 날이면 그들보다 늦게 하나님 앞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을 매우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게 ‘이 소리들이 나를 참 부끄럽게 만드는군! 내가 섬기는 주인은 그들의 주인보다 더 충성을 받을 만하지 못하신 분이라는 말인가?’라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그는 4시부터 8시까지 기도와 묵상, 그리고 시편 찬송을 했습니다. 그는 이 시편 찬송을 부르기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가족과 함께 부를 뿐 아니라 혼자서도 불렀습니다.”


이 충성된 부부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테오도시아 얼라인은 집에서 어린이 학교를 열었고, 그동안 남편은 한 주일에 다섯 번씩 오후에 간절한 사명감을 가지고 아직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 결과 웅장한 막달라 마리아 교회당의 탑 밑에는 주일이 거듭될수록 수많은 사람들도 북적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을 별로 주민들의 이름 목록을 만들었고, 마침내는 모든 사람을 방문하여 교리문답을 가르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일을 무수히 많은 영혼들을 교회로 모으는 결심을 맺었습니다.“(테오도시아 얼라인은 이 일에 대해다음과 간이 기록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노력에 지칠 정도의 복을 내리셔서 불과 몇 년 사이에 전에는 하나님께 외인이었던 수많은 사람이 회개했습니다.“ <조셉 얼라인>, 찰스 스탠포트 지음, 1861, p.101.)


뉴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간청과 권고는 매우 친근하고 거룩한 열정과 생명력으로 가득했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그들의 냉정한 마음을 녹였으며, 완고한 사람들도 결국 마음을 열어놓게 만들었습니다.” 그 당시는 힘있는 설교와 성공적인 전도가 보편적인 시기였음에도 얼라인의 사역은 동료들의 눈에 뛰어나게 보였던 것입니다. 북부지역의 청교도였던 헤이우드는 “조셉 얼라인 같은 특출 난 전도자들을 낸 시대는 그리 많지 않다.”라고 말했고, 백스터도 “그는 대중들을 상대로 매우 설득력 있고 힘있게 성경을 풀어 가르쳤으며, 이를 그들의 삶에 적용시키는 데 있어서 그의 위대한 목회능력을 발휘하였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얼라인이 사역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평온한 때가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3년이 채 못되어 크롬웰이 죽은 것입니다. 그 뒤 2년이 흘러 타운톤에는 찰스 2세와 왕정복고를 환영하는 종소리가 울려퍼졌습니다. 청교도들의 마음속에서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이는 헨리가 말한 바 ‘신앙이 국가의 얼굴’이었던 시기가 끝나고, 1662년에 공표된 그 악명 높은 통일령에 의해서 영국이 유사 이래 지녔던 2000명의 훌륭한 목사들이 강단에서 쫓견났기 때문입니다.


서머셋에서도 85명이나 되는 목사들이 이런 고난을 당하였는데, 그 중에는 물론 조지 뉴턴과 조셉 얼라인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라인은 강단에서 쫓겨난 뒤에도 잠잠히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때의 일에 대해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때 그는 자기가 일할 날이 매우 짧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연구는 다 제쳐두었습니다.” 전도 활동에 더 힘을 쏟았던 것입니다. “남편은 설교하는 일을 부쩍 늘려서 여드레에, 혹은 열흘에 열네 번 하던 것을 요즘 들어서는 보통 엿새나 이레에 열네 번씩 설교합니다.”


얼라인은 여러 번 위협을 당하면서도 계속 설교를 하다가 마침내 1663년 5월 26일에 소환장을 받았습니다. 그는 잡혀가기 직전인 때에도 새벽 한두 시 쯤 교인들과 모임을 갖기로 약속했는데, 교인들은 열의를 보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수백 명 참석했습니다. 그는 세 시간 동안 이들에게 설교하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동이 튼 다음에 그는 일체스터에 있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1년 후 풀려났으나, 그의 앞에는 5마일 조례(비국교도 목사들이 도시 5마일 반경에 접근할 수 없게 한 법)와 컨벤티클 조례(비밀집회 금지법)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건강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지만, 비밀집회를 통해서라도 계속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다 마침내 1666년 7월 10일, 한 교인의 집에 모인 회중들에게 시편 147편 20절을 설교하다가 문을 박차고 들어온 군인들에 의해 다시 감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 뒤 다시 풀려났으나, 꺼질 줄 모르는 영적 에너지를 가진 그는 그런 상황일지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부인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하루가 더 주어졌어요. 하나님을 위해서 하루라도 더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니, 낭비없이 오늘 하루를 삽시다. 우리 영혼을 위해 열심히 일하여 하늘에 보화를 많이 쌓아둡시다. 이제 이런 날이 얼마 없을 거요.” 그의 아내는 참된 청교도 정신을 소유한 그가 이런 상황에서 웨일즈나 심지어 중국에 대한 선교의 가능성을 생각했다고 술회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영국인의 가슴에서만큼 뜨겁게 타오른 일이 또 있을까요? 그러나 얼라인의 사역은 거기서 마감되고 말았습니다. 심한 옥고로 쇠약해진 그의 몸은 다시 회복되지 않은 채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1668년 11월 7일, 그의 나이 34살에 하나님께서는 장차 있을 환난에서 건지시려고 그를 데려가셨습니다. 연로한 조지 뉴턴이 곁에 서서 배웅하는 가운데, 그의 시신은 앞서 회개하지 않은 자들의 ‘경고’의 외침이 울려 퍼지던 교회당 뜰에 안장되었습니다.


이 책은 얼라인이 직접 설교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책에서 청교도들이 전했던 복음을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대마다 말은 바뀌고 사람마다 은사는 다르지만, 제가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책에 진정한 복음전파를 위한 원칙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위대한 복음전도자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책의 교훈에 감명을 받아 그 사상을 형성하였습니다. 조지 윗필드는 옥스퍼드에서 공부할 때 얼라인의 이 책이 자기에게 얼마나 많은 유익을 끼쳤는지에 대해 일기에 남겼습니다. 스펄전은 자기 어머니가 주일 저녁이면 화롯가에 아이들을 앉혀놓고 얼라인의 이 책을 수없이 읽어주었다고 하며, 자기도 스스로 죄지은 것이 생각날 때마다 이 책을 펴서 읽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얼라인의 <경고>난 백스터의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를 펼쳐들던 일이 생각난다. 그 책들이 얼마나 좋았는지! 나는 그것을 읽고 또 읽었다...” 일찍이 청교도 목사를 타오르게 했던 불에 가득 사로잡힌 스펄전은 어린 시절부터 얼라인과 윗필드가 걸었던 길을 걸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책은 ·1671년 처음으로 빛을 본 이래, 헤아릴 수 없는 중판을 거듭했습니다. 칼라미 박사는 1702년에 이 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글을 썼습니다. “아마 수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영어로 쓰인 책들 가운데 성경을 제외하고는 보근된 수에 있어서 이 책을 필적할 만한 책이 없습니다. 2만 권이 <부르심> 또는 <경고>라는 제목으로, 5만 권이 <하늘로 인도하는 확실한 안내자>라는 제목으로 팔렸는데, 그 중에 한 판에 3만 권이 팔린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 책이 끼친 영적인 영향력을 잘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를 여기서 들고자 합니다. 18세기 말경 한 스코틀랜드 회중교회 목사는 어떤 위원회로부터 <경고>를 갤릭어(스코틀랜드인들이 쓰던 고어)로 번역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 책을 받고서 설교 자료로 유용한지를 검토한 후 교인들에게 그 내용을 순서에 따라 반복해서 가르쳤습니다. 그는 그 결과 “회개운동이 널리 번졌으며, 그것은 니더 론 지역에서 오랫동안 계속됐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책의 내용이 세계 각처에서 다시 한번 들려지기를 기도하면서,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한”(히 14:12) 말씀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이 책을 사용하시기를 간구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라”(벧전 1:24-25).


레인 머리(Lain Murray)


<회개의 참된 의미>, 조셉 얼라인, 목회자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