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교회사를 공부하면서, 위클리프가 성경을 얼마나 사랑했는지에 대한 글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위클리프는 성경을 묵상하고 연구하면서 중세 가톨릭 교회의 맹점을 알게 되었고, 성경에 없는 다양한 칙령과 교리를 만들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파괴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을 절대 기준으로 하여 성령의 조명을 통해 깨달은 것 외에는 모두 버리기로 결심하고 담대히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나설 수 있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통해서 조명을 받고 예수님을 만난 후, 회심(믿음과 회개)과 성화를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믿음과 행함을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의 신앙은 존 후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복음으로 보헤미아의 종교개혁을 주도하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에라스무스도 성경을 번역하고 주를 다는 데 열심을 냈습니다. 그가 번역하고 주석을 단 성경을 통해 말씀에 갈급하던 많은 사람들이 중세의 암흑시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엔리키디옴: 그리스도의 군사 안내서>라는 책에서 사단과의 싸움을 대비에 언제든지 승리할 수 있는 무기를 갖추어놓으라고 했습니다. 특히 두 가지 무기는 필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기도와 지식입니다. 여기서 지식은 하나님의 법으로서, 성경을 말합니다. 이 두 무기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성경은 기도의 방향을 정해주고 무엇을 기도할지를 안내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도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경고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묵상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보다, 더 가공할만한 사단의 유혹은 없다.”
우리의 부흥은 말씀의 부흥입니다. 따라서 말씀이 역사하지 않으면 부흥은 끝납니다. 우리 중에 말씀의 사모함이 없다면 부흥이 지속될 수 없습니다. 중세교회가 미망에서 깨어난 것도 위클리프나 에라스무스와 같은 분들이 성경 말씀의 중요성을 깨닫고, 말씀을 통해 교회를 개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개혁이 불이 식어진 것도 말씀에 무관심한 열광주의자와 형식주의자들이 나타나면서 부터입니다.
그럼 요즘 열심히 읽고 있는 <순례하는 교회>에서, 위클리프와 에라스무스가 성경을 얼마나 사랑했는지에 대한 글을 소개하겠습니다. 이런 믿음의 조상들의 빛나는 전통이 우리 감사교회를 통해서 그리고 믿음 안에서 한 형제 된 교회에서 만개하기를 소원합니다.
---인용글---
위클리프 시대의 학자들에게 있어 교부들의 가르침이나 공회의 결정사항, 교황의 칙령 등은 성경과 더불어 신앙 문제에 관한 주요 권위로서 간주되었다. 결국 성경은 다른 것들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지지 못한 것이었다. 반면에, 위클리프는 점차로 성경에 친숙해감에 따라 그것의 유일무이한 권위를 인정하게 되었고, 다른 것들은 성경과 일치할 때에만 그 가치를 인정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앎이 두 가지의 원천, 즉 이성과 계시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것들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며 단지 이성, 즉 자연의 빛이 타락에 의해 훼손되어 불완전한 단계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 불완전한 이성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경을 통해 드러난 지식을 수용함으로서 치유되어지고, 또 그렇게 함으로서 성경이 절대적인 권위로서 이해되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조건적이고 구속력 있는 성경의 권위가 바로 위클리프가 증거하는 위대한 진리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반대자들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 이렇게 서로 반대되는 주장이 개진되는 이유는 양자가 모두 그 결과의 광범위한 영향력을 깊이 인지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에 대해 그는 그의 책 <성경의 진리에 대하여Of the Truth of Holy Scripture>(1378)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그 책에서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자 하늘 아버지의 뜻과 언약이라고 가르쳤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은 하나이다. 그리스도는 성경의 저자이시며 성경은 그분의 법이고, 그분은 성경 안에 스스로 거하신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해 무지한 것은 곧 그분에 대해 무지한 것이다. 성경이 한결 세부적이고 지엽적이었다면, 그것은 어떠한 상황에는 적용될 수 없는 경우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렇지 않음으로 인해서 성경은 모든 것에 적용될 수 있다. 또 성경에서 명령된 것들 중 준수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편 성경의 영향력은 그것이 신적 기원과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교회의 경험은 전반적으로 성경의 완전성과 유효성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전승과 혼합되지 않고 그리스도의 순수한 법을 지켜 나갔을 때 교회는 빠르게 성장하였으나, 그것에 인간의 전승이 허용된 이후로 교회는 지속적으로 쇠퇴일로를 걸었다. 또 지혜의 다른 형태들은 사라져 버렸으나, 오순절에 사도들에게 주어졌던 성령의 지혜는 여전히 남아있다. 또 성경은 무오하다. ... 성경 위에 무언가를 두거나 혹 인간의 전승, 교리, 의식 등을 더 선호하는 것은 앞을 못 보는 추리에 불과할 뿐이다. 성경에는 여타 선하고 합리적인 결의문이나 의식들이 보충적으로 포함된다는 주장은 억지 논리이다. 왜냐하면 지금도 사잔 자신의 명령이나 삶 전체는 그러한 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단이 그러한 능력을 행사하도록 허용하지 않으실 것이다.
교회의 역사는 복음으로부터의 이탈과 후기 전승과의 혼합이 처음에는 희미하여 거의 인지되지도 않으나 차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부패성이 심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편 성경 해석에 관한한, 신학자들도 그 해석의 권위를 갖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사도들에게 풀어 가르치셨듯이 성령께서 우리에게 성경의 의미를 가르치신다. 그렇다고 누구든지 성령의 조명에 의하여 성경의 정확한 의미를 안다고 추측하는 것은 위험하다. 성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성령의 조명뿐이다. 그리스도의 ‘비추임’을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 성경 해석에는 헌신적이고 경건한, 그리고 겸손한 정신이 요구된다. 또 성경은 성경에 의해 해석되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일반적인 분별 원칙을 간파할 수 있다. 이단들처럼, 성경을 조각조각 찢어 해석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 그리스도는 영원부터 존재하시는 참된 인간이시고 참된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성육신 때에 한 위격 안에서 두 본질을 결합시켰다. 그분의 위대함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잇는 중재자라는 점과 인류의 중심이 되신다는 점, 그리고 유일한 머리가 되신다는 점에서 가히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리스도에 의해 이뤄진 구원의 개인적 적용은 회심과 성화에 의해 가능하다. 회심은 죄로부터 돌이켜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 즉 회개와 믿음을 가리킨다.
회개는 필연적인 단계이며, 또한 열매로 입증되게 마련이다. 위클리프는 믿음과 성화를 유기적인 것으로 이해했으며, 믿음을 행함과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위클리프)는 또한 교회를 눈에 보이는 가톨릭 교회나 혹은 성직자 계급의 조직된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아닌, 선택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또 가시 세계에서는 단지 일시적인 표출과 순례여행만을 하는, 그리스도의 신부이자 몸으로서의 교회로 보았다. 그 본향과 기원과 결국은 보이지 않는 세계, 즉 영원 속에 있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구원이 기존 교회나 성직자들의 중재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자유롭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접근한다. 즉,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다. 또한 위클리프는 교회의 근거는 하나님의 선택에 있으며, 인간은 자신이 은혜 가운데 있는지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에 대한 유일한 평가 기준으로서 거룩한 삶이 곧 그 증거라고 덧붙였다.
<순례하는 교회>, 브로우드벤트, pp.162-164.
“나(에라스무스)는 성경이 모든 언어들로 번역되기를 소원한다. 그래서 스코틀랜드인과 아일랜드인에게뿐만 아니라 사라센인들과 터키인들까지도 그것을 읽고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읽기 위한 첫 단계는 성경을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옮기는 일이다. 나는 농부가 쟁기질을 하면서 성경 중 일부를 읊조릴 수 있는 날이, 여행자가 밖에 나가 여행 중 피곤을 느낄 때 성경을 보면서 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열망한다.”
<순례하는 교회>, 브로우드벤트, p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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