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들의 외침

기도의 길

천국 도서관장 2010. 7. 8. 16:39

기도에 관한 좋은 글이 있어 인용한다.

본문 중에 인상에 남는 내용들이 있어 뽑아 보았다.


응답하시는 마음은 항상 부르짖는 마음을 능가한다.

능력 있는 모든 참된 기도는 인격적이고 친근하며 그리고 독창적이다.

기도의 부르짖음은 하나님을 이곳으로 모신다. 부르짖음은 다듬어진 말씨보다 더 강하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실 때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룰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성취이다.

급히 하는 기도와 중언부언의 기도는 결코 기도에 강한 영혼을 만들어낼 수 없다.

우리 주님은 기도하기 위하여 새벽 미명에 일어나셨고, 때로는 기도로 밤을 지새우셨다.

그곳은 확고한 목적과 견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외의 모든 사람에게 금지된 장소이다.


특별히 마지막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다. 기도하는 사람은 확고한 목적과 견고한 마음의 소유자여야 한다. 그런 사람 외에는 기도해도 소용없다.

요즘, 허리가 아파서 종종 새벽에 깨곤 한다. 그런데 기도자세로 있으면 통증이 가신다. 그래서 그런 자세로 계속 있다가 잠이 들곤 했다. 하지만 그럴 것이 아니라 기도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 피곤하긴 했지만 정말 기도가 잘 되었다. 하나님께 허리 아픔을 감사하게 되었다.


기도의 길



사무엘 차드윅


1. 기도의 표식

모든 종교는 기도한다. 하나님과 기도는 분리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기도를 믿는 믿음은 기본적이고 직관적이다. 옛사람들과 이교도의 관념들은 조잡하고 거칠 것이다. 그러나 그 관념들은 인류의 보편적 직관에 속해 있다. 구약의 가르침은 기도에 관한 주제로 가득 차 있다. 어디에나 기도하라는 명령과 권유가 있다. 그리고 구원과 승리, 체험과 환상의 위대한 이야기들은 널리 행해지는 기도에 관한 모든 예들이다.


우리 주님의 생애에서 모든 위기들은 기도의 특별한 시기들과 연결되었고, 주님의 가르침은 기도하는 자들에게 놀라운 확신을 주셨다. 주님은 결코 기도의 신비를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그는 기도의 법칙을 정하셨다. 기도는 주님에게 다루기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주님이 기도에 관해 말씀하신 두 가지 비유는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썩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냉정한 재판관이나 인색한 친구에 비유하는 것은 기도의 정신에 어울리지 않는다. 하나님은 전혀 그런 분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보여주려고 그 비유들은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그 비유는 끈질긴 간구에 대한 보상을 보여준다. 기도의 토대는 우리의 아들됨이다. 우리가 자녀이기 때문에 기도는 가능하고 합리적이다. 자녀가 아버지에게 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자녀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도 합당한 일이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살전 2:11). 기도에는 많은 어려운 문제가 있다. 그러나 그 문제들은 기도의 실제 체험밖에 있다. 기도하지 않고서는 그 문제들도 해결되지 않는다. 기도는 경험의 사실이다. 그리고 모든 시대에 걸쳐서, 기도의 사람들의 증언은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기도에 관하여 어떤 생각을 하시는가?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같지 않고 그분의 길은 인간의 길과 같지 않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9)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의 계시와 그의 아들 안에서 그의 생각과 길을 알게 하셨다. 계시의 매개는 경험이며, 그 경험은 개인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삶의 사건들 속에서 생긴다. 하나님은 결코 그분의 생각을 철학이나 형이상학의 명제로 제시하지 않았다. 그 분은 삶 가운데서 설명하셨고 그의 길을 교훈과 원리와 실례로 제시하셨다. 하나님이 기도에 대해 생각하시는 것을 말해주는 한 가지 사건이 있다. 우리는 기도에 관한 그 분의 마음을 기도하라는 모든 명령과 기도의 모든 법칙과 기도에 대한 모든 약속과 응답 받은 기도의 모든 실례 안에서 본다. 모든 부분은 전체의 일부분이지만 성경의 모든 주제는 그것의 최종적이고 완전한 표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다소의 사울의 회심에는 기도에 관한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독특한 계시가 있다. 기도에 관한 그 사건에는 세 인격이 있다.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 그리고 그를 통하여 응답이 이루어진 사람이다. 하나님이 중심이시다. 기도는 그분에게 드려지고, 그분을 통해 기도는 설명되고, 그분에 의해 기도는 응답 받는다.

하나님은 기도에 관해 놀라움의 어조로 말씀하신다. "[보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Behold, he prayeth. KJV)."


기도의 언어는 인간적인 것이지만 그것은 사람이 아는 유일한 말이며 아무리 부적당할지라도, 하나님과의 실제적 교통을 나타낸다. 하나님이 놀라실 수 있는가? 그분 안에 경탄하고 놀라실 수 있는 본성이 있을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기이히 여길만한 일들이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법이다. 그분에게는 기도보다 더 영광스럽게 놀라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의 세계에서 가장 큰 것은 기도하는 한 사람일 것이다.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것이다. 보라!(Behold!) 그 말에는 놀라움과 기쁨과 환희가 있다. 하나님이 평가하실 때, 기도는 하늘의 모든 경이로움보다 더 놀랍고, 땅의 모든 신비한 것보다 더 영광스럽고, 창조의 모든 능력들보다 더 힘이 있다.


하나님은 기도를 다메섹 도상에서 다소의 사울에게 일어난 모든 일의 표식으로 해석하신다. 그 사건은 다양하게 표현된다. 유대의 교회로서는 그들의 최대의 박해자가 복음 전도자로 변하는 회심이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후 나는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갈 1:21-24). 그 회심은 체험의 결과였다. 그 체험이 무엇이었는가? 바울은 그 체험에 대해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바울에게서 그의 아들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다고 증거하고 있다. 그것이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이 바울에게 의미한 것이다. 하나님이 그 일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분은 그 모든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신다. "[보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기도는 하나님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고, 그것은 언제나 그분에게 의미있는 것이다. 기도는 은혜의 상징이요 증거이며 척도이다. 우리가 양자가 되는 은총인 회심의 역사 안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리가 아들이므로 기도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다소의 사울은 평생동안 기도하는 사람이었지만, 기도에 관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바울은 회심 이전까지는 기도를 시작하지 않았다. 어린이들의 찬송은 어른들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나는 종종 나의 기도들을 이야기하네, / 하지만 나는 이제까지 기도하는가? ”


기도는 아들의 특권이며 아들됨의 기준이다. 마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하지 않는 자로 간단하게 구분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매우 단순한 기준이지만 결정적으로 나누는 것이다.


하나님이 응답하는 기도의 길

하나님은 기쁘시게 응답하신다. 우리 주님의 잃은 양과 잃은 돈 그리고 잃은 아들의 비유에서처럼 주님이 아나니아에게 하신 말씀에는 환희의 울림이 있다. "나와 함께 즐거워하자!." "[보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그의 잃어버린 자녀들이 기도를 시작할 때 하나님의 마음은 기뻐하신다. 아나니아는 하나님과 협상하겠지만 하나님은 결코 인간들과 협상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응답하시는 손은 인간들의 들린 손을 기다리시며, 응답하시는 마음은 항상 부르짖는 마음을 능가한다.


다소의 사울을 향한 응답에는 양면이 있다. 주님은 환상을 보여주셨고 사자(使者)를 보내셨다. 환상과 사자는 각각 서로에게 상응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우선 확신을 주시고, 그리고 나서 확증해주신다. 그것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 믿음의 기도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기도의 사역에서 주님과 동역자이다. 그것은 영적인 협동의 신비이다. 주님은 그가 보내신 사람 앞에 가신다. 사울은 준비되었고, 그는 하나님의 환상 속에서 이미 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나니아는 준비된 상태에서 기다리는 사울을 만났다.


하나님은 은총의 증거로써 기도의 표식을 아나니아에게 주셨다. 그것은 주님의 유일한 표식이었고, 지금도 주시는 표식이다. 한 사람이 기도의 사람이라는 사실처럼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어떠한 증거가 있는가? 성경은 엘리야에 대해 그는 "그의 기도 가운데서 기도했다"라고 설명한다.(약 5:17, 흠정역 난외주). 어떤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그들이 헌신의 분위기 가운데 산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도의 분위기 가운데 살아가는 일과 우리가 "기도 가운데서 기도하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피니(Finney)는 매주의 기도회에 갔다. 거기서 그는 많은 기도를 했고 아무 응답도 얻지 못했다. 물러는 기도했고 응답이 왔다. 그리고 그것은 왜 모든 사람이 그가 하나님의 사람인가를 믿은 이유이다. 예닐곱 살도 되지 않은 아주 작은 소년이었을 때, 나는 다벤포트 부인이 사는 이웃집에 심부름을 갔다. 아침 9시경이었다. 나는 노크를 하고 빗장을 올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난로 가에서 성경이 펼쳐진 채로 놓여 있는 의자에 무릎을 꿇고 다벤포트 부인이 기도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온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나는 잠시동안 조용한 경외감 가운데 서 있다가 조용히 밖으로 나가서 문을 닫았다. 그날 아침 이후 60년이 넘었지만 그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다벤포트 부인을 하나님의 성도로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는 기도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확실한 표식이며, 세상조차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유일한 증거이다.


기도는 다소의 사울에게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기도는 언제나 모든 것에 차이를 만든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 새로운 확신을 가져다주었고, 믿음의 새로운 확증, 하나님의 사람들끼리의 새로운 우정, 병고침의 새로운 경험, 새로운 소명, 새로운 기업, 새로운 능력을 가져다주었다. 기도는 변화를 가져온다. 기도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기도는 기도하는 영혼을 하나님의 전능함과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기도 가운데서 기도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 위에 그의 인을 치시는가?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소서!

기도는 그의 길에서 다시 돌이키는

회개한 죄인의 목소리라네,

천사들이 그들의 노래로 기뻐하며

외친다네, "보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생명의 호흡,

그리스도인의 타고난 곡조,

죽음의 문 앞에서의 그의 암호,

그는 기도와 함께 천국으로 들어가네.


2장 기도하는 법 배우기

우리는 기도를 배울 수 있는가? 기도하는 그 영혼이 성령님의 자유 안에 있어야하는 것이 아닌가? 세례 요한은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의 형식을 가르쳤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기를 요구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무언가 해주시기를 요구한 경우는 많지 않았고, 또 요구한 경우는 보통 그릇된 것이었다.


만약 제자들이 요구하지 않았다면 주님께서 기도의 형식을 주셨을까? 주님의 기도생활은 제자들에게 기도하려는 열망을 불러 일으켰고, 기도하고자 했을 때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모른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마음을 열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어떤 정해진 형식의 필요를 느꼈다. 제자들은 세례 요한을 예로 들었다. 지금도 예수님께 세례 요한을 예로 드는 제자들이 있다. 일정한 형식으로 기도하는 것은 창조적인 영혼으로 기도하는 것보다 쉽다. 로자리오 묵주에 의지하는 기도는 자유로운 언어로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 붓는 영혼의 기도보다 쉽다. 기도서는 입이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을 도와준다. 그러한 기도도 분명히 진실할 것이다. 그리고 신앙이 깊은 사람은 제공된 기도문에서 실제로 경건의 유익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도를 지도자로부터 배우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사실, 그것은 배워야 하는 종류의 기도이다. 어떤 사람들은 로자리오 묵주기도를 암송한다. 하지만 비국교도 교인들은 기도서의 아침기도나 저녁기도 드리는 법을 드물게 안다. 모든 기도는 기도의 형식들과 함께 시작된다. 경건한 놀라움과 기쁨을 가지고 어머니의 무릎에서 읽혀진 단순하고 진지한 기도를 기억하는 영혼은 아주 드물다.


기도와 인격

기도의 사람을 만드는 것은 다른 사람의 기도가 아니다. 능력 있는 모든 참된 기도는 인격적이고 친근하며 그리고 독창적이다. 한나는 하나님께 그의 영혼을 쏟아 부었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것은 기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의 전부는 아니다. 수용성은 표현만큼이나 기도의 진정한 일부분이다. 다소의 사울은 어린 시절부터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한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결코 진정한 기도를 하지 않았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일어난 모든 변화는 "[보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는 한마디에 요약되었다.


엘리야의 기도의 능력 비밀은 그가 "그의 기도 안에서 기도한 것"(prayed in his prayer)이다. 그것은 흠정역(KJV)의 난외주에 붙여진 해석이다. 흠정역 본문에는 그가 "간절히 기도한즉"(prayed earnestly)이라고 되어 있고, 개정역에는 헬라어의 문자적 의미가 "기도로"(with prayer)라는 난외주와 함께 "열렬하게"로 되어있다. 그는 '기도로' 기도했다. 그는 기도 안에서 기도했다. 즉 그는 참으로 그의 기도를 기도했다. 그는 단순히 기도를 말하지 않았다. 그는 기도하는 중에서 기도했다. 그의 모든 인격은 그의 간구 안에 있었다. 그는 그가 구하는 것을 진정으로 원했고, 그의 기도의 진정성을 뜨겁게 보여주었다. 누가 이러한 종류의 기도를 가르칠 수 있는가?


그 기도는 보편화되어 있는 기도이다. 교회예배의 틀에 박힌 형식과 전해들은 영감의 말들을 규칙적으로 읽는 일과, 그리고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현실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고 사람에게도 유익하지 않다. 그러한 일들은 공허한 반복이다. 우리가 판단해 보건대, 아무 소용이 없는 기도가 많이 있다. 연극 '바카라 스캔들'(The baccarat scandal)에서 스테드(W. E. Stead)는 웨일즈의 공작을 위하여 영국 국교회(성공회)에서 매일 드려진 기도의 회수와 가치를 계산했다. 그리고 그 가치의 계산은 그 회수에 비례하였다. 그는 분명히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는 수치로 계산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도의 핵심은 회수에 있지 않다. 기도는 시간이나 회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만 그 강도(强度)에 의해 평가된다. 열렬하게 기도하지만 아무 응답이 없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기도의 고뇌 중에 기도해야 하는 문제들이 있지만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모른다.


기도함에 의해 배운 기도

기도하는 것 외에 기도를 배울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다. 기도에 관한 훌륭한 철학도 기도하는 영혼을 가르친 적이 없다. 이 주제가 어려운 문제들로 둘러싸여 있지만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 문제들은 모두 응답 받은 기도와 하나님과의 사귐의 기쁨 안에서 해결된다.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만일 기도가 합리적인 이해를 기대한다면, 그 기도는 결코 시작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 우리는 믿음으로 행한다. 에디슨은 1921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어떤 사물에 관하여 1%의 백 만 분의 1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물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빛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중력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일어설 때 무엇이 우리의 발을 땅에 지탱시키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전기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열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자기(磁氣)에 대해 아무 것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것들에 관해 많은 가설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무지하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이용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사용하면서 발견한다. 연습하면서 배운다. 한 사람이 기도에 관한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또 그가 기도에 관한 모든 신비를 이해한다 할지라도 만일 기도하지 않는다면 결코 기도를 배우지 못할 것이다.


능력 있는 기도의 사람들이 있어왔고, 그들은 기도하기를 배웠다. 기도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그들의 생애에 다른 이들과 똑같은 시기가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강하게 되었고, 형통하였다. 모든 순간에 은총의 위기가 있었지만 그들은 은총의 훈련 가운데서 능력의 비밀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로 알려졌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도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중 몇몇은 야곱이나 시몬이나 사울처럼 다시 이름 지어졌다. 그들은 "기도하는 존", "기도하는 메리"," 기도하는 브람웰" 그리고 "기도하는 하이드"로 불렸다. 그들은 기도로 영국을 구했다. 그들은 기도로 지옥의 문을 흔들었다. 그들은 기도로 천국의 창을 열었다. 어떻게 그들은 기도하기를 배웠는가? 그들은 많이 기도함으로써 기도를 배웠다. 그들은 기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기도했다. 그들은 기도에 대해 논쟁하지 않고, 다만 기도했다.


기도의 훈련

기도는 무한한 영역에 관계한다. 기도는 어린아이가 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하다. 동시에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없이는 아무도 기도할 수 없을 만큼 심오하다. 몽고메리의 찬송은 기도의 심오한 단순성에 영원성을 부여하였다.


기도는 입을 열어 말했든지 표현하지 못했든지

영혼의 진지한 갈망,

가슴속에서 떨리는

숨겨진 불의 몸짓.


기도는 어린아이의 입술로도 할 수 있는

말의 가장 단순한 형태,

기도는 지극히 높으신 분에게 미치는

가장 고상한 선율.


그것은 빛나는 진실이다. 기도의 부르짖음은 하나님을 이곳으로 모신다. 부르짖음은 다듬어진 말씨보다 더 강하다. 바리새인은 그들 자신을 향해서 기도했다. 그의 기도는 그의 머리와 가슴에서 습관적이고 상투적인 외식일 뿐이었다. 세리는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 들으셨다. 그 기도는 말하자면 영혼의 비상구가 아니라, 기도의 사람의 몸에 밴 습관과 경험이다. 그러한 기도는 훈련에 의해서 나오고, 그렇게 힘든 학과는 없다. 코울리지(Coleridge)가 말하기를, 그러한 기도는 인간의 마음이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에너지이며, 모든 기능이 전체적으로 집중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대다수의 세속적인 사람들과 학식 있는 사람들이 기도에 있어서 무능하다고 단언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실 때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룰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성취이다.


이러한 기도의 삶을 위해 우리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것은 시간이 걸린다. 급히 하는 기도와 중언부언의 기도는 결코 기도에 강한 영혼을 만들어낼 수 없다. 예술과 기술에 숙달되기 위하여, 학습자들은 능숙해지기까지 매일 정기적으로 시간을 투자한다. 우리 주님은 기도하기 위하여 새벽 미명에 일어나셨고, 때로는 기도로 밤을 지새우셨다. 모든 기도의 성인들은 매일 몇 시간씩 기도했다. 우리는 그러한 예들을 드는 것을 두려워한다. 오늘날은 기도할 시간이 없다. 그러나 시간 없이는, 그리고 많은 시간이 없이 우리는 결코 기도를 배울 수 없다. 24시간 중의 한 시간을 하나님 자신에게 줄 수 있어야 한다. 어쨌든, 기도 훈련을 위해 매일 일정한 시간을 떼어놓음으로써 기도훈련의 학과를 시작해 나가자. 우리는 기도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진지하게 준비해야 한다. 당신의 마음과 힘을 다해, 그리고 이성과 의지를 가지고 기도하는 것,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목소리를 들으실 것이라고 확실히 믿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신실하게 행하는 것- 이것은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전투의 최후의 가장 위대한 성취이다.

오 주님, 우리가 구하오니,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소서.


기도하는 성령님께서 숨을 쉬나니,

감찰하시는 능력을 보내시어

모든 뒤얽힌 문제들로부터

나의 근심하는 마음을 물러나게 하시네


억눌린 세속적인 생각에

나의 연약한 마음은 계속되네

영원한 휴식으로 다시 돌아오라고

나타나사 명하소서.


기도의 훈련이 고되게 느껴질 때, 다음의 말들을 기억하라.


주님, 약하고 마음 산란한 기도 중에

종종 주님은 가장 가까이 계시네,

홀로 마음이 지친 죄인이

거기서 아주 종종 주님을 찾습니다.


겸손한 기도는 그 영혼을

모든 미혹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온전히 가르치네

사랑하는 주님, 기도는 주님께 달려있습니다.


3. 은밀한 기도

만약 기도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라면 그것의 위력에 상응할 만한 훈련이 요구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기도 학교는 그 나름대로 조건이 있고 요구사항이 있다. 그곳은 확고한 목적과 견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외의 모든 사람에게 금지된 장소이다. 강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종종 기도 공부의 긴장감으로 기가 꺽이기도 한다. 집중을 하는 일은 망치질을 하거나 쟁기질을 하는 것보다 더 힘든 작업이다. 훈련 때문에 자유가 박탈당하지만 훈련으로 인하여 마음의 집중력이 생긴다. 이해하는 것이 행동하는 것보다 더 무거운 부담이며 묵상하는 것이 봉사하는 것보다 더 엄격한 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기도가 지불해야 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고민스러운 간청을 하면서 땀을 흘리는 데 기도의 어려움이 있다기보다는 기도의 삶의 매일 매일 임해야 한다는 데 그 어려움이 있다. 기도는 헌신에 대한 엄격한 시험이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떤 것도 기도를 매일 유지해야 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없다. 기도의 훈련이나 기도의 강력함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분개를 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며 그들의 자녀가 심하게 울고 눈물을 흘리면서 원하는 무엇인가를 간청하고 탄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럴 것 같지만 어느 누구도 그렇게 기도하는 것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없으며 자녀들의 간청과 관련해서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릇되게 유추하는 것보다 더 진리에서 먼 것은 없다. 기도학교는 기도하기를 정말로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다.



은밀한 장소

배우러 오는 자들을 제자라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을 그 분의 멍에 아래 두고 그분으로부터 배우기를 원한다. 배움의 첫째 조건은 가르치는 자가 가르침의 정신을 가지고 있느냐 이다. 우리의 주님은 가르치는데 권위가 있으시다. 그 분 자신이 강의하지는 교사일 뿐 아니라, 모범을 보이시는 자이시다. 그 분 보다 더 매혹스러운 것은 없다. 그 분이 우리에 가르치신 기도의 방법을 알아본 후, 우리의 마음을 그 분의 가르침에 복종시키고 충성스럽고 믿을 만한 순종의 훈련에 모든 것을 내맡기자.


우리의 주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는가?

그분이 첫 번째로 우리에게 명하신 바는 기도의 장소가 있다는 점이다. 전 지구가 다 주님의 것이고 우리의 기도가 들려지지 않는 곳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어디에서나 기도하기를 바라셨다. 우리가 어디에 있을지라도 그분은 가까이에 계시며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는다. 또 기도의 마음을 가진 자마다 하나님의 성소를 발견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께서 이 땅의 신성함을 인정하시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 분은 말씀하시길 이 땅을 하나님의 발판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조용한 장소를 찾아서 기도하시는 것이 그 분의 습관이셨다. 그 분은 조용하게 가려진 장소를 필요로 하셨다. 그 분은 제자들에게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의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 5,6).


왜 그 분은 이런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을 것을 주장하셨을까? 그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기도에서 원하셨던 첫 번째 요소는 바로 진실성이었기 때문이다. 위선자들은 결코 은밀하게 기도하지 않는다. 겉치레하는 기도자들은 청중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듣도록 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으며 그래서 그들은 말솜씨와 보여지는 정직함과 경건하다는 명성으로 이미 그들의 상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중요시 여기는 것들이 아니다. 그들의 그 분의 현존하심 속에 살 수 없다. 기도는 한 영혼과 하나님 한 분 사이의 은밀한 것이다.


영혼의 조용한 장소

영혼은 조용한 장소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기도하기를 배우는 곳은 바로 조용한 장소에서이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거기에서 홀로 하나님과 함께 갇힌 채로 은밀한 중에 계시며 은밀한 것을 보시는 우리의 아버지께 기도할 것을 명하셨다. 거기에는 고독함과 같은 시험은 없다. 적막한 장소의 조용함 중에 있으면 두려움이 모든 마음을 사로잡는다. 은밀한 것은 보시는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 때문에 가슴이 오그라들 것이다! 그 누가 그 분의 현존하심과 함께 거할 수 있겠는가? 그 누가 어두움 없는 빛이신 하나님과 함께 거 할 수 있겠는가? 문을 닫고 하나님과 홀로 있을 수 있을 만큼 마음이 순결하고 손이 깨끗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어떤 은밀한 장소에서 하루에 30분 만이라도 그 분과 함께 문을 닫고 있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혁명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그런 기도를 위해서 영혼의 모든 기능들이 깨어있고 방심하지 않는 상태에 있어야 한다. 우리의 주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그 분과 함께 은밀한 기도의 장소로 데려갔을 때 그들은 잠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다. 영광의 산에서도 그랬고 고통의 동산에서도 그랬다. 영광을 보게 되어서야 그리고 괴로움을 깨닫고서야 비로소 그들은 완전히 깨어났다. 사람들이 말을 하지 않는 조용한 장소가 있겠지만, 거기서도 잠을 자는 것은 가능하다. 멍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은 명상이 아니다. 졸리는 듯이 반응하는 것은 기도가 아니다. 기도의 은밀한 장소는 정신과 마음의 모든 기능을 요구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모든 것들아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송축하라.“


찬양처럼 기도에도 전 존재가 요구된다. 사적인 기도와 공적인 기도사이에는 전적인 차이점이 있다. 두 기도 다 각각 나름대로 축복을 간구하는데 바로 거기에 차이점이 있다. 공적인 기도는 덜 강제적이다. 거기에는 친교의 느낌이 있고 그로 인해 용기를 얻고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인도된 기도는 친근감이 있으나 대리자적인 태도로 생각이 표현되는 경향이 있다. 사적인 기도에서는 개개인은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채로 홀로 서있다. 생각은 개인적이며 기도는 독창적이며 동기는 도전적이다. 공적인 기도는 친교감을 주지만 사적인 기도는 개인의 인격을 훈련시킨다. 하나님과 홀로 하루에 한 시간을 보냈을 때 그 영향력이 얼마나 될지 누가 판단할 수 있겠는가?


주님의 언덕

하나님 앞에 현존하는 길로 누구나 다 들어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들어가는 골방은 자신의 것이겠지만 그 곳이 신성한 장소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현존하실 때이다. 세속적인 마음에는 현존하심이 있을 수 없다. 현존을 찾는 자 만이 찾을 수 있다. 청중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기도를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야고보는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아야 될 사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기 전에 이미 시편기자는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라고 하였다(시 66:18).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는 골방에 있다. 그러나 은총의 보좌 또한 거기에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느 누구도 감히 그곳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잊어버렸던 죄를 생각해 내고 감추어진 것들을 드러나게 하고 열어 보여 하나님 앞에 서라. 그 분과 함께 우리는 행하여야 한다. 거룩한 현존 속으로 들어가서 사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갈망을 가져야 하며 양심이 빛 가운데서 행하여야 한다.


우리의 주님은 용서하는 마음을 강조하셨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기도의 방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은 우선 무엇보다도 용서하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화해가 있기 전에는 하나님의 어떤 선물도 받을 수 없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예수님께서 기도와 관련해서 믿음의 법을 말씀하실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막 11:24-26).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5).


왜 주님께서는 용서를 그렇게 강조하셨을까? 율법과 예언자들이 의를 강조하였던 것과 똑같은 이유 때문이 아니겠는가? 거룩한 분께 나아오는 자들은 다 거룩해야하며 자비의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누구나 자비로워야 한다. 은총을 간구하는 자는 은총을 믿어야한다.


"너의 골방"

어느 누구도 시작부터 외식하지 않도록 하자. 기도 공부는 배우는 자의 능력에 따라 여러 단계가 있다. 기도에 능력이 있고 하루에 서너 시간을 하나님과 함께 지내는 것을 즐거워하는 위대한 영혼이라면 옛날에 초보자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들은 항상 힘이 넘쳐난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점은 우리는 우리의 평안을 위해서 우리의 골방으로 들어가며 거기에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점이다. 몇 년 전 한 조그마하고 예쁜 아이가 내가 머물고 있는 집의 침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어린아이의 경의로운 세상에 사로잡혀 즐겁게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 때 내가 아버지가 위에 계시는지를 물어보았더니 그녀는 밝게 웃으면서 공손하게 나를 바라보더니 "아, 내 아빠는 항상 아침밥을 먹기 전에 응접실에서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행복한 아버지! 행복한 아이! 행복한 하나님!


4 골방과 닫힌 문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이 명령의 문 앞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두 가지 어려움이 있다.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골방이 없다는 점이다. 그들의 삶 속에는 개인의 비밀스런 장소가 없다. 공유되어지지 않은 방이 없으며 만약 방을 발견한다하더라도 한가한 시간이 없다. 닫힌 문이라도 사람을 들여보내지 않을 수 없고 사람을 가둘 수가 없을지 모른다. 무선망 때문에 우리는 빗장이 걸려있는 문도 덧문이 있는 창문이라도 사생활을 보증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익히 잘 알고 있다. 생각은 소리보다도 더 미묘하며 사단은 무선 전문시설보다도 더 교묘하다. 개인적인 기도를 연습한 성자는 영혼의 골방문 앞에서 망을 보고 있는 적을 막을 수 있는 증인역할을 할 수 있다.


은밀한 장소를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내 목적은 가르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제안을 하려는데 있다. 헌신을 가르치는 책자들은 보통 나에게는 도움이 되었다기 보다는 압박감을 주었다. 그것들은 너무 기계적이었거나 엄격했다. 그것들은 격려를 해주기보다는 오히려 절망감을 주었다. 나는 아주 솔직하게 그리고 내 경험한대로 쓰기를 원한다. 내 생애 내내 나는 기도하기를 배우기를 원했다. 나는 열정적으로 그럴듯한 그리고 그럴듯하지 못한 기도의 방법들과 가르침들을 시험하고 발견해 냈다. 이제 겉치레를 한다거나 자만심을 가지지 않고 내가 배운 바를 부드럽고 겸손하게 말하기를 원한다.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다른 사람의 방법을 판단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조언을 비난하지 않으며 또한 다른 사람의 경험에 대해 도전하지 않으리라고. 나는 최대한 단순하게 말하려고 하니 여러분이 나의 말하는 바를 판단해주기 바란다.


우선 은밀함의 어려움에 대해 살펴보자. 은밀한 기도를 하기 위하여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 있을 장소를 갖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이 수도 없이 많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며,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잠자며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일을 한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의 문을 닫혀있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어느 월요일 아침, 한 회개하는 죄인이 내가 일요일에 설교를 하는 마을의 대로에서 나를 멈추어 서게 했다. 가까이에 비국교도 교회가 세 곳이나 있었지만 세 교회가 다 앞 문 뒷문이 모두 잠겨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할 은밀한 장소를 찾기 위해 교구 교회로 가야했다. 교회의 문은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더라도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은밀한 기도 장소는 일상생활의 일부분이 되어야 하며 곧 일상의 거주지의 일부분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밀회를 나눌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 한다. 굶주린 영혼은 방법을 찾아다닐 것이다. 야외에서건 격리되어있는 모퉁이에서건 내밀한 성소가 마련되어야 한다. 만약 이런 좋은 장소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열려 있는 공간이라도 뒤로 물러서 있을 수 있는 장소로 만들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는 중이라도 하나님과 만 함께하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골방"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이다. 다행이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어디에서나 기도할 수 있기를 바라시나 그 분의 은혜의 장소는 고독함 중에 있다. 그 분은 거기에서 우리를 바위틈에 감추어 주시고, 거기에서 마치 우리가 우리 친구와 이야기하듯이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신다.


어떻게 하면 닫혀진 문을 확고히 할 수 있을까?

세상이 우리 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우리 마음이 바깥으로 나가지 않도록 하는 일이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 어떤 주제에 집중한다는 것은 마음이 극도로 긴장되어 잇는 것을 말하며, 은밀한 기도 장소에서 기도를 할 때만큼 집중하는 것이 어려운 경우는 없다. 알 수 없는 적에 의해서 까닭없이 불안이 생겨나거나, 의식이 흥분된다거나, 어떤 기억이 생겨나거나하여 신성한 시간에 침입자가 들어오기도 한다. 간단히 어떤 장치를 하게 되면 은밀한 장소에 누군가가 침입해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고든 장군은 그의 텐트 문 앞에 흰색의 손수건을 걸어놓았다. 나는 내가 홀로 있기를 바랄 때는 내 방 앞에 카드를 한 장 걸어놓는다. 이 것은 단순한 방법이기는 하나 이렇게 하면 사람이 들어오는 것은 막을 수 있기는 하나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을 막는 데는 소용이 없다. 방황하는 마음을 갖고서 갇혀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몸이 지유롭게 나돌아 다니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어떻게 하면 관심이 흩트리고 생각을 산만하게 만드는 것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닫고 있을 수 있을까?


주의력은 의지의 행위이다. 집중한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주제에 대해 긴장을 하면서 주의력을 모으는 것을 말한다. 의지는 훈련되어질 수 있으며 집중력은 개발되어질 수 있다. 교양있는 사람은 주의력과 식별력과 집중력을 훈련받은 사람이다. 인내에 의해 영혼은 승리할 수 있으며 훈련에 의해 마음은 단련될 수 있다.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계신다. 우선 거룩한 임재의 상태를 확인하라. 마음과 몸의 모든 기능이 은밀한 중에 계시며 은밀한 것을 추구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 하나님을 인식하며 그 하나님을 깨닫도록 하라. 마음을 이 사실에 집중시키라. 어떤 산만함에도 관대하게 대하지 말며, 기분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어떤 것도 허락하지 말며, 어떤 방탕한 것에도 만족하지 말라. 모든 기능이 깨어있도록 하라. 사도들이 거룩한 산에서 잠에 억눌려 있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는 완전히 깨어있을 때였다. 꿈을 꾸는 것은 명상이 아니다. 꾸벅꾸벅 조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의기소침해 있는 것은 기도가 아니다. 은밀한 중에 기도하는 행위는 한결같이 모든 기능이 최상의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기도의 형태와 순서를 가르쳐주셨다. 그러나 그것은 노래나 기원으로 시작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묵상으로 시작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시오며“


성경에 기록된 모든 위대한 기도자들은 다 이렇게 기도를 시작하였다. 나는 기도를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나는 그 분의 성품과 속성을 흠모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경이로워하는 마음을 갖고서, 그 분의 위대하심과 권세 그분의 은혜와 영광을 생각한다. 묵상을 하다보면 불이 켜지고 불꽃이 일며 그 불꽃이 "벽 주변을 둘러싸는데" 어떤 적도 어떤 침입자도 그 곳에도 접근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나는 종종 은밀한 기도의 장소에서 이 영광의 찬가를 드리는 것으로부터 기도를 시작하여 영광과 감사를 충만하게 그 분께 돌린다. 주님께서 변화되신 모습을 보이신 곳도 바로 그 곳에서였다.


거룩한 임재 중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나는 은밀할 기도의 자리에 들어갈 때 성경 이외에는 어떤 책도 가지고 들어가지 않는다. 성경이 나의 기도 책이다. 나는 경건함을 위해서 십자가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상과 같은 어떤 외부적인 보조물도 찾지 않는다. 장막 내에 있는 하나의 제단 이외에는 어떤 제단도 없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방법들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건한 고전 작품을 가지고 있지만 나는 심지어 찬송가조차도 가지고 들어가지 않는다. 나는 성경의 경건한 사용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말할 것이지만 지금으로서는 성경의 진리를 찾으며, 성경의 확고한 말씀을 받아들이며, 성경에 기록된 시와 기도를 개인적인 감사와 기원으로 사용하면서 성경만으로 살아간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을 만족할 수 있다. 저녁 식사를 할 때 식사와 관련된 어떤 화학적인 분석으로 나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 것처럼, 은밀한 기도의 시간에는 어떤 비평적인 질문도 그것이 성경에 관한 것이건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건 간에 절대로 내 마음 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게 필요한 식사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엄청난 능력으로 나를 전율케 하며 나를 감동시킨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기도의 자세는 건강의 상태나 마음의 평안함의 상태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보통 무릎은 꿇는 태도는 존경을 표하며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이다. 내 친구 중 한명은 앉아서 그의 바로 가까이에 빈 의자를 하나 둔다고 한다. 무릎을 꿇는 것이 습관이 되어야 하지만 건강 상태나 마음의 상태에 따라 태도가 달라질 수 있다. "우리를 만드신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좋다. 기도는 요구하는 것 이상이지만 우리의 요구조차도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야한다. 나는 거룩하신 현존 안에서 나의 일상의 생활을 자세히 말하고 재음미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발견했다. 내 계획을 세우는 일도 바로 거기에서이다. 하나님은 성산에서 세상의 모든 문제들을 관리하신다. 토마스 켐니스는 매일 아침 다섯시에서 여섯시 사이에 그의 일과 목회에 관한 일들을 하나님과 이야기 하였다. 하나님은 그 분의 눈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그 눈으로 은밀한 교제 중에 가장 최상의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그 분의 의지를 확신하는 곳도 바로 그 곳이요, 그 분의 길을 이해하게 되는 곳도 바로 그 곳이다.


그 곳은 또한 중재의 장소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관하여 자유롭게 하나님께 말 할 수 있는 곳도 바로 그 곳이다. 가족, 교회, 사업, 친구, 국가, 세계, 이 모든 것들이 다 진지하게 신앙심을 지니고 은밀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 제목이다. 학급을 인도하는 사람들은 출석부에 기록된 한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되새겨야 한다. 주일 학교의 책임자는 교사들의 이름을 되새겨야하고, 학급의 선생님들은 똑같은 방법으로 학생들의 이름을 되새겨야 한다. 중재를 요하는 문제들의 기도 목록을 만들고, 항상 당신이 기도해 주어야 할 사람들의 이름 목록을 만들어 두어라. 당신이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을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말할 필요는 없다. 아버지는 은밀한 중에 계시며, 그 분은 은밀한 중에 보시며, 은밀한 중에 들으신다. 당신의 기도 내용이 알려지게 하는 것조차도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그 분께 맡겨두어라.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기도는 자식이기 때문에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 집에서 아들과 딸로서 기도를 드린다. 그 분은 우리의 필요를 우리가 그 분께 말씀드릴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더 잘 아신다. 그 분은 우리가 요구하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차고 넘치게 해주실 수 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고 확신을 갖고 구하라. 우리는 침묵이 최상의 연설이고, 듣는 것이 기도의 최상의 일부분임을 은밀한 기도의 장소에서 배울 수 있다. 그 분은 우리의 말을 들으시며, 우리가 그 분의 말을 들을 때 또한 우리에게 들릴 것이다. 예수님의 기도에 관하여 성경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