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용도 목사님에 관한 서적을 집중적으로 보고 있다. 변종호 목사님이 간행한 전집과 감신대에서 발행한 신학논문집과 카페 등에서 목사님의 자료를 일별하고 있다. 목사님에 대한 글을 보면 볼수록 빠져들어간다. 목사님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그대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이 많이 생각난다. 목사님의 신앙의 기저에는 체험적인 하나님에 대한 만남이 있다. 그 만남을 통해 이 목사님은 신앙의 경험이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형식주의의 메마른 이성의 신앙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역사하는 체험적인 신앙의 중요성을 이 목사님은 깊이 깨달은 후 그의 사역은 온통 하나님에 대한 체험적 신앙으로 점철된다. 이 목사님은 신앙은 知보다 感에 있다. 感은 信愛에서 비롯된다고 하셨다. 이 말은 에드워즈 목사님의 <신앙감정론>에 자세히 나온다. 신앙의 좌소는 머리는 아니라 마음이다. 따라서 설교는 이해가 아니라 impression이라고 주장하시고 설교를 통해 성도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셨다.
또한 목사님의 설교는 윗필드 목사님과 닮아 있다. 윗필드 목사님이 설교를 할 때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자신들의 죄를 생생히 보고 회개하고 각성되었다. 마찬가지로 이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많은 영혼들이 그 자리에서 고꾸라지고 회개하고 변상하고 각성되었다. 즉, 성령님이 임재하셨다.
한편 그의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열정은 피니 목사님과 닮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용도 목사님이 활동하던 1920년 후반부터 1930년 초반까지 우리 나라의 영적 상황과 사회적 상황은 암담했다. 일제의 군국적 제국주의의 기세는 확장일로에 있었다. 궁핍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사회는 희망의 불이 꺼져가고 있었다. 영적인 기갈은 더욱 심각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여파로 전국에 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성도들이 늘어났지만, 그후 사단이 역부흥을 일으켜 교회는 형식주의자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또한 일제의 앞잡이가 된 교회도 부지기수였다. 신사참배를 교단 차원에서 하는 것이 당시 교회의 영적 수준이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목사님들이 교회에서 쫓겨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이용도 목사님 같은 거룩한 종을 세워주셨다. 이 땅에 불을 붙여주셨던 것이다. 웨슬리 목사님이 활동하던 당시 영국의 영적 상황은 최악이었다. 에드워즈 목사님이 활동하던 당시 미국의 청교도는 지는 석양을 보며 지난날의 영광을 회상하고 있었다. 피니 목사님이 활동하던 당시 미국 교회는 형식주의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영적인 기갈이 심할 때 극적으로 역사하신다. 영혼의 가난한 심령들을 준비시키는 것일까? 하나님은 약할 때 강함주심을 이렇게 보여주시는 것 같다.
* 아래의 글의 필자를 모르겠다. 하지만 비교적 간략하면서 핵심을 잘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이용도 목사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고찰
목 차
제 Ⅰ 장 서 론
제 Ⅱ 장 역사적 배경
제 1 절 사회적 상황
제 2 절 당시 교회의 모습
제 Ⅲ 장 이용도의 생애와 신앙
제 1 절 그의 성장과 독립운동 시절
제 2 절 신학교 시절
제 3 절 그의 성역시대
제 Ⅳ 장 이용도의 신학사상
제 1 절 이용도를 보는 시각
제 2 절 신학방법론 : 합일의 원리
제 3 절 신앙 형태론
제 Ⅴ 장 결 론
※ 참고문헌
제Ⅰ장 서 론
한국교회는 세계 기독교의 역사에 있어 가장 독보적인 성장과 부흥의 현장이 되고 있다. 기독교 선교의 역사에 있어 한국교회처럼 짧은 시간 내에 위대한 부흥을 이룬 예는 그 어느 나라에도 없다고 한다. 이러한 한국교회 부흥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한국교회는 20세기말을 달리는 오늘, 천주교의 역사로는 선교 200주년을 넘어섰고, 개신교의 역사로는 선교 100주년을 넘어선 시점에 놓여 있다. 그리고 이 세월 속에는 많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바로 그들의 발자취가 오늘의 한국교회를 세계 속에 우뚝 세웠다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여기서는 바로 그러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이용도 목사의 생애와 사상에 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그에 대한 평가는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그를 신비주의자로 보는 것이다. 이 경우에 신비주의의 이해와 평가기준에 따라 그 평가가 일치하지 않고 있느나 그의 신비주의가 "기독교 신비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데는 거의 일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도 다양한 평가와 비평이 이용도 목사를 향해 이루어지고 있다. 본 논문은 이용도 목사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고찰을 통해 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모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제 Ⅱ 장 역사적 배경
제 1 절 사회적 상황
어떤 사상이나 인물을 평가함에는 그것에 영향을 주었던 제 상황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상황들 가운데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시대적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 인간의 인격과 사상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되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용도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 그를 바로 이해하는 관건이 된다 할 것이다.
이용도는 1901년에 출생해서 1933년에 별세했으므로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1920년대와 30년대 초반이 될 것이다. 이 시기는 1919년 3.1운동 이후, 일본의 문화정치라는 미명하에 민족분열을 획책하였으며 민족혼을 말살시키고 일본에 동화시키는데 혈안이 되어 있던 시기로 3.1운동, 6.10만세사건을 비롯하여 1929년의 광주학생사건 등 빈번했던 학생저항운동 등 일본에 대한 민족 저항이 끊이지 않았던 격동의 시기였다. 3.1운동의 실패, 일본이 힘의 과시와 팽창주의에서 일으킨 1931년의 만주사변은 독립을 향한 민족의 사기를 크게 위축시켜 절망감을 안겨다 준 사건으로 작용하였다.
경제적으로도 일제의 무자비한 농민에 대한 경제적 수탈로 민족의 생존권이 위협을 받고 있던 시기였다. 특히 농민들은 일본의 토지 수탈과 규율의 소작료에 시달리다 못해 농토를 버리고 도시로 이주하거나 만주 등지로 떠나는 사람이 속출하였으니 당시 만주로 이주한 실태를 보면 1927년에 56만 명이던 것이 1936년에는 89만 명으로 늘어났으며, 쌀의 수탈량을 보면 1920년 쌀 생산량 1270만석의 20%인 290만석을 가져간 일본이 1932년에는 1590만석의 생산량 중에 50%에 해당하는 760만석을 수탈해갔다. 이 통계만 보아도 당시의 한국경제의 피폐현상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일본의 정치, 경제적 억압정책은 1931년의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더욱 강화되어 민족적 절망감은 사회 전반에 걸쳐 넓게 퍼져나갔다. 1930년대의 시대사조는 "불안"이 그 밑바닥에 흐르고 있었다. 문화적 사조는 "불안, 우울, 애수, 순간적 쾌락주의" 등이 주요 내용을 이루고 있었으니 유진오는 당시의 문학비평에서 "암담한 현실에 대한 맹목적 절망"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사상적으로도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밀려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한국교회의 현실도피적 보수성을 공격하는 교회의 위협적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사회주의는 당시 노동자, 농민, 젊은층에 파고들었는데 당시 젊은이들은 마구 밀려들어오는 무신론과 사회주의적인 문서들을 닥치는 대로 읽을 유혹에 빠져 있었으며 실제 사회주의자로 자처하면서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상황 속에서 기독교가 도전 받고 있는 사상적으로도 극히 혼란한 시기였다.
제 2 절 당시 교회의 모습
당시의 한국교회는 3.1운동의 실패 등으로 민족의 독립에 있어 교회와 미국의 역할에 대한 회의를 느낀 사람들은 점차 교회를 등지고 떠나가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이때 밀려들어오기 시작한 사회주의, 공산주의에로 빠져들기 시작하여 오히려 교회를 적대시하는 그런 현상으로 나타났다. 교회에 대한 반감은 사회주의자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널리 퍼져 있었으니 당시 교역자들의 낮은 지적 수준과 민족이 당면한 난관들을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갈만한 역량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개벽지는 기독교가 현실에서 도피한 채 사회정의나 평화를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회칠한 무덤과 같은 예루살렘의 조선이여"하고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이광수는 당시 교역자들의 무지를 통렬히 지적하고 있음을 본다. 더구나 일제는 한국교회를 외국의 선교사들에게서 탈취하려고 일제 통치의 어용도구인 조합교회를 설립하여 교회분열을 획책하였다. 이렇게 교회는 일제의 탄압의 시련 속에서 안팎으로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는 부흥집회를 통해 내세 지향적 경향을 더하여 갔으며 선교사들의 교권에 도전하는 반선교사적 색채를 띄기 시작하였다.
전반적으로 교회의 성장은 둔화되어 가고 있었고 율법주의적 형식화로 그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때 이용도는 "아-조선의 영들을 살펴 주소서 머리 속에 교리와 신조만이 생명 없는 고목같이 앙상하게 뼈만 남았고 저희들의 심령은 생명을 잃어 화석이 되었으니 교리가 어찌 저희를 구하며 몸이 교회에 드나든다하여 그 영이 무슨 힘과 기쁨을 얻을 수 있사옵니까?"라고 애타게 쓰고 있다.
최지화는 "아! 금일 조선교회는 영력을 잃어버린 것 같다! 우리는 먼저 강단에서 공담을 버리고 순복음 진리를 그대로 전합시다"라고 호소하고 있다. 그리고 이미 이때부터 지방의식과 외국에서 교육받은 목사들과 국내에서 교육받는 목사들 간의 갈등과 감정적 대립 등으로 교회분열의 상처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무엇보다 뚜렷한 변화는 이때까지 한국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던 외국 선교사들의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사실상 외국 선교기관이 폐쇄되기에 이른 점이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후견자가 없어진 상황에서 그리고 민족적 시련과 내외의 거센 도전 속에서 스스로 서지 않으면 안될 운명에 놓여진 것이다.
민경배는 당시의 한국교회가 "폭풍우 속을 저 혼자 걸어가는 이제 갓 걷기 시작한 어린아이 같았다" 라고 쓰면서 "한국교회의 독자적인 최초의 신앙임상기였다"고 진단한다. 이렇게 정치적, 사회적, 교회적으로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이용도는 특히 당시의 교회를 치명적으로 병들었다고 진단하고 새로운 변화와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1927년 2월 9일 일기에서 조선교회는 없는 것으로 기도, 전도, 열심, 사랑 등 12가지를 들고, 있는 것으로는 폄론, 시기, 불평, 분열 등을 들고 있다. 그의 이와 같은 교회개혁의 필요성 인식은 구라파 천지에서 거처를 잡을 수 없었던 그리스도를 초청하는 글에서 미완성품인 서양의 기독교에서는 만족을 얻을 수 없으므로 심령방면, 신비방면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해야겠다는 그의 설교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특히 여기서는 당시 한국교회가 정체성을 찾아야할 띠로 한국적인 토착화의 신앙을 새롭게 발견해야 할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한국적 영성으로서의 길을 열어주고 있다고 보겠다.
제 Ⅲ 장 이용도의 생애와 신앙
제1절 그의 성장과 독립운동 시절
이용도는 1901년 4월 6일 황해도 금천군 서처면 시변리에서 이덕홍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잔병을 많이 알았으며 신경이 과민한 편으로 울기 잘하는 외는 평범한 어린아이였다. 그의 집은 무척이나 가난했고 애주가인 그의 아버지는 경건한 기도의 어머니를 늘 학대하여 가정은 편치를 못했고 그의 어머니는 어린 용도가 보는 앞에서 양잿물을 마시려 했던 때도 여러 번 있었으나 신앙으로 이를 극복하고 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다. 이용도는 이러한 불우한 환경 가운데서 우울한 날 들을 보냈으나 그의 어머니의 영향으로 신앙심이 깊은 소년으로 자라났다. 그래서 그는 일생 어머니를 잊지 못했다. "이름 중에 제일은 어머님, 마음 중에 제일은 어머니의 맘, 눈 중에 제일은 어머니의 눈, 나의 오늘이 있음은 오로지 어머니의 기도와 염려에 인함이라. 눈물의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그는 13세 때부터 벌써 밤을 새워 기도하는 신앙의 소년이 되었다.
그가 시변리 공립보통학교에 다닐 때 목촌 교장의 기독교 가정의 어린이 학대에 반항하여 퇴학원을 낸 일도 있었던 그가 워낙 얌전한 모범학생이었기 때문에 목촌 교장도 그를 사랑하여 그만은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아니하고 다닐 수 있었다. 그는 가난한 집안을 열심히 돌보았는데 젖이 모자란 어린 누이동생을 그가 젖동냥을 하여 기르기도 했다. 그는 손재주가 비상했고 특히 그의 언변은 뛰어나 윤치호, 이상재 선생이 감탄했을 정도였다. 그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개성에 있는 한영서원에 입학했으나 학비는 스스로 조달해야 했다. 그는 가난과 독립운용으로 옥고를 치르는 등으로 해서 4년제 중학교를 9년만에 마칠 수 있었다. 그의 중학교 시절은 가난과 나라 잃은 설움으로 고통과 눈물의 연속이었으니 그가 중학교 재학중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이에 가담하였다. 이로 인해 2개월간 옥고를 치루었으며 그후 기원절 사건으로 6개월간, 그리고 1921년 성탄절 날의 불온문서 사건으로 6개월간 감옥살이를 했으나, 그의 항일 투쟁은 계속되었다. 1922년 가을 태평양회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2년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여 4회에 걸쳐 5년여 옥고를 치를 만큼 그는 이 무렵 독립정신에 불타는 애국청년이었다. 법정에서의 그의 애국심과 언변은 언제나 법관들을 감동시켰으며 어떤 사건에서 이용도와 김종필이란 청년이 서로 자기가 혼자한 일이라고 주장해서 개성거리에서 한때 이야기 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가 서대문 형무소에 있을 때 같은 감방에 수감된 한 사형수의 수갑 찬 손에 얼음이 박히자 그 손을 자기 품에 넣어 녹여준 일도 있었다. 그는 감옥에서 자기 밥을 다른 죄수들에게 주고 자신은 조용히 기도하는 때가 많았다.
제 2 절 신학교 시절
독립운동에 열중하던 이 애국청년 때문에 어려움을 당할 것을 우려했던 한영서원의 왓슨 교장은 이용도가 옥고를 치루고 다시 복교하려 하자 그를 감리교의 협성신학교에 가도록 강권하였다. 그래서 그는 1924년 봄 협성신학교에 가도록 강권하였다. 그래서 그는 1924년 봄 협성신학교 영문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가 신학교에 들어가게 된 동기에 대해 주재용은 독립운동에 직접 가담하던 그가 이제는 영적인 차원에서 민족역사에 참여하려 했을 것이란 견해를 피력했는데 타당한 견해로 보여진다.
그가 신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동요, 창작이나 연극 등 문예활동에 몰두하였으며 특히 아동교육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이때 이호빈, 이환신과 함께 삼이 형제로 우정을 다지기도 했다. 그의 나이 25세 되던 해인 1925년 겨울 그는 뜻밖에도 객혈을 하게 되고 폐결핵 3기라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이 사건이 그로 하여금 전 생을 죽음이란 것을 가슴에 안고 하루하루를 마지막이라는 절박감 속에서 살아가게 한 것이다. 그는 이환신의 고향인 강동으로 요양 차 떠난다. 거기서 그는 그곳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고, 이환신과 기도로 밤을 새운 그가 강단에 섰을 때 그는 아무 말도 못하고 목메어 흐느껴 울었다. 온 교인들도 그 감동에 휘말려 함께 흐느꼈다. 그가 찬송을 불러도, 기도를 해도 교인들은 감격하고 통곡했다. 요양하려 온 자신의 처지도 잊어버린 채 일주일간의 집회를 감동과 흥분 속에 마친 그는 완전히 새 사람이 되어있었다. 새 힘이 솟았고 그는 그때부터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로 결심한다. 그는 이렇게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하고 서울에 올라와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여기서 성령의 뜨거운 체험을 하게 되었으며 말이 아니 체험의 신학을 배운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하나의 중요한 체험은 1927년 성탄절에 있었다. 그때 그는 자신이 쓴 "십자가를 지는 이들"이란 성극을 자신이 연출하였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여 가는 그의 고난에 찬 모습은 너무도 진지하여 온 관중들을 울렸다. 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신의 모습은 바로 주님의 뒤를 따라 주님을 닮아 보려는 그의 영성과 자신의 고난에 찬 미래를 예언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1928년 1월 28일 제 14회로 협성신학교를 졸업한다.
제3절 그의 성역시대
1928년 1월 신학교를 졸업한 후 강원도 통천으로 부임한 이래 1933년 10월 작고하기까지의 기간으로 주님에 대하는 뜨거운 사랑과 교계로부터의 질시와 무차별의 사랑을 가지고 전국을 누비며 교회 부흥을 위해 피와 땀을 쏟았던 시기로 최남규는 이 시기를 성령과의 연합사역의 기간으로 보고 그의 중심 되는 신앙 내용을 사랑을 본질로 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통천에 부임해온 후 반년 동안은 그의 목회가 이성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고 교회는 부흥되지 않았다. 이에 자극을 받은 그는 당시 기도의 청년 박재봉과 함께 10일간의 절대금식의 산기도를 드린 후 그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 자신이 믿음으로 뜨겁게 불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뜨겁게 만드는 능력있는 전도자가 되었고 기도의 사람이 된 것이다.
그후 1928년 말경 새벽기도 중 마귀격퇴의 체험을 하게 된다. 송길섭은 이용도의 이 체험을 웨슬레의 올더스 게이트 체험에 비유한다. 확실히 그의 10일간의 산기도와 마귀격퇴의 체험 후 그가 인도하는 집회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침체하던 교회가 부흥의 불길이 불기 시작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이때부터 성령의 사람으로, 기도의 사람으로 예수님의 밟으신 길을 따른 "예수쟁이"가 된 것이다. 이러한 성령의 능력의 역사는 그로 하여금 교회개혁자로서의 자각을 불러일으켰고 이후로부터는 부흥집회를 인도하며 전국을 누비게 된다.
1931년도에는 재령동부교회를 비롯 20여개 교회의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재령에서는 그의 목이 쉬어 말이 나오지 않자 몸부림으로 설교를 하였으며 이때 온 회중은 울음의 바다를 이루었다. 1932년도에도 20여개 교회의 집회를 인도했다. 이해 겨울 해주 남본정교회의 집회에서 은혜를 사모하는 남녀 성도 12명이 사리원에서부터 170여리의 길을 밤낮 걸어서 찾아온 일도 있을 정도로 그의 부흥회는 은혜가 넘쳤던 것이다.
그의 부흥회의 주제는 회개와 기도와 사랑이었다. 그가 가는 곳마다 교인의 회개와 각성을 촉구했으며 이것이 그를 무교회주의자로 오인하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의 부흥회의 결과로 나타난 것 중의 하나가 기도운동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평양기도단"이다. 이것은 1930년 2월 평양중앙교회의 집회를 계기로 이루어진 모임이었으며 그의 집회 후에는 온 교회적으로 기도의 불이 붙었던 것이다. 특별히 그가 설파했던 것은 사랑이었다. 그는 외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몸소 그 사랑을 실천한 것이다. 그의 사랑은 이타적인 사랑, 헌신적인 사랑이었다. 그가 말년에 한준명 사건에 연루되어 교계의 공격을 받게 되었을 때에도 자기 변명보다 오히려 이들을 감싸려 했던 것은 그의 "무차별의 사랑"때문이었다.
그의 사랑은 침체된 교회를 살리려는 교회개혁 의지로 나타났으니 이것이 당시 생명력이 상실된 채 교리에만 고착된 기성교회와 교직자들에 대한 날카로운 공격으로 나타났고 이런 것들이 당시 교계의 반발을 샀으며 자신에 대한 공격의 구실이 되었다. 마침내 "호기심과 경탄의 눈초리로 그의 부흥집회를 지켜보던 한국교회는 그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심판자로 서게 되었다." 장로교의 황해노회가 그에게 금족령을 내렸고 1932년 10월 평양노회는 이용도 및 평양기도단을 염두에 두고 그들의 발을 묶는 결의를 하였다. 타 교단에서 이용도 목사에 대한 이단 시비가 일어나자 감리교회에서도 1933년 2월 그에게 파면이 아닌 휴직처분을 내렸다. 1933년 초 해주에서 그의 마지막 피와 담을 쏟아 부었던 그는 그후 기도와 명상으로 그리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올바른 신앙으로 인도하기 위해 마지막 눈물과 사랑을 쏟아 부었다. 1933년 10월 2일 그가 소원했던 대로 모든 것을 다 빼앗긴 채 "아름다운 내 본향을 목적삼고 한 찬미를 불러보세. 거기 무궁한 세월이 흘러갈 때 고난 풍파가 일지 않네...... 손에 거문고 들고 늘 찬미할 때 우리 서로 만나겠네."라는 찬송을 들으며 33년의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했다.
제 Ⅳ 장 이용도의 신학사상
제1절 이용도를 보는 시각
이용도는 생전에 남긴 헌신적인 신앙 부흥 운동과 천부적인 기질에서 야기된 비애와 비탄과 찌르는 감화력 때문에 한국 기독교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한국 교회사가 민경배 교수는 이용도를 "한국 교회의 자립과 토착화의 실험에 나서서 고고하게 음성을 내다가 사라져 간 신앙인"으로 평가하며, 그의 사상을 "고난 받으시는 그리스도 신비주의"라고 단정한다. 그런가 하면 윤성범 교수는 "분명히 이용도는 영광의 신학은 아니요, 십자가의 신학에 치중한 것이 사실이며, 그것을 더욱이 실존적으로 실감하게 된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이용도의 사상을 일관하는 정신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평가하면서 "이용도는 기독교 신비주의자라고 시정하고 싶다."고 단정한다.
그런가 하면 박봉배 교수는 "이용도의 사상 가운데는 금욕주의적인 요소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고 단정하면서 계속하여 "그의 금욕주의는 정열적인 사랑을 동반하는 신비주의로 옮겨가는 것이다. 어떻게 말하면 슐라이에르마허의 절대 의존의 감정이 이용도에게 와서 절대 사랑의 감정으로 대치되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고 평가한다. 장로회 신학대학의 한국 교회사가 이영헌 교수는 이용도의 사상을 신비주의로 단정하면서, "이용도의 신비주의를 성격 지운다면 그것은 신부 신비주의, 고난의 신비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의 신비보다 요한의 신비를 사랑하는 이용도였다. 그러기에 거기에는 예수에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가득차 있었다."고 말한다.
장로교 신학자들과 감리교 신학자들 사이의 이용도에 대한 평가는 정도의 차이가 매우 심하지만 공통적인 점은 어떤 형태로든지 이용도가 신비주의자임을 주장한 점이다. 그러나 이용도의 신학과 사상에 신비주의 요소가 팽만한 것은 사실이나 그 형식이나 본질에서는 유대 사상, 그리스 사상, 로마 철학, 기독교 신학 및 서양 문화주의 등에 의한 체계적이고 깊은 사상적 근원에서 기독교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성을 영교적으로 느끼려고 했고, 신앙의 본질을 영교의 체험으로 표현하려 했던 서양의 신비주의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이용도의 부흥 신학적 실천 운동은 신학의 이론과 실천이 완전히 부합된,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러한 삶을 실제로 보여준 모형임을 내세워서, 그의 신학과 사상을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남긴 신비적인 혹은 영감적인 일기나 몇몇 서신만 가지고 그를 철저한 서양 중세기적 신비주의자로만 해석할 것이 아니라 그의 신학과 사상을 보다 납득할 보다 납득할 만한 수준에서, 그리고 그의 삶의 전이해를 통해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제2절 신학 방법론 : 합일의 원리
이용도의 신학 방법론을 볼 수 있는 것은 1931년 1월 17일(화)자 일기이다. 이 일기에는 그의 신학 방법론이 요약되어 있다. 그것은 몇 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사랑과 신앙의 일화(一化)의 방법을 직설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서 그가 사용하는 일화란 신앙의 동화를 가리키기도 한다. 여러 신학자들이 이용도의 사상을 신인(神人)합일의 신비주의라고 보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표현에서 증명되고 있다. 주의 사랑이 모든 것을 삼켜 자기 속에 담는 것과 인간의 신앙이 오직 그리스도 중심 사상이 되어야 하는 이 두 요소가 서로 삼키워지고 삼키는 과정에서 인간은 그리스도와 일화의 체험 속에 빠져 들어간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의 신앙은 이 점에서 분명히 그리스도 중심주의의 신앙 형태를 갖고 있다.
둘째, 이용도의 신학 사상은 서구 신학의 복잡하고 철학화 된 이론에 기초하거나 서구 신학의 빈틈없는 방법론을 모방하여 출발하지 않고, 오직 순수한 신앙심에서 주와 교제하고 주를 대망하는 데 더 큰 의의를 둘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신은 연구의 대상이 아니고 신앙의 대상입니다."라고 늘 역설한다. 즉, 그의 신학 목표는 기독교의 이론화나 철학화로서 예수를 도덕 군자화 하려는 자유주의 신학 흐름과는 반대로, 주님을 바라보는 데에 온갖 마음을 정성스럽게 바치자는 데에 있다. 한마디로 "일심으로 주만 바라보자."는 그의 고백은 말로만의 신학에서 영을 가진 신학을 생각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서양인은 외적인 것을 다 찾았다. 이제 신비적인 것을 동양인이 찾아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용도의 신학 방법론은 여러 측면에서 다양하게 말할 수 있으나 일화주의적 방법론 혹은 일심주의적 방법론으로 집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그는 다양한 이론이나 학습적 개념으로 표현하지 않고 단순히 "합일의 원리"라고 불렀다. 여기서 합일이 그리스도와 합일이란 점에서 그의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좀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예수 중심", 또는 "성애(聖愛)" 신비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용도의 일화 방법론이라는 것은 "주님은 나에게 끌리시고, 나는 주님에게 끌리어 하나를 이루는 것", "나는 주의 사랑에 삼키운 바 되고, 주는 나의 신앙에 삼키운 바 된 것", "나는 주의 사랑 안에 있고, 주는 나의 신앙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성과 계시의 상관 관계 방법보다는 사랑과 신앙의 상관관계의 종합성, 즉 일화성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다. 주의 사랑은 신앙을 삼키는 것이며 신앙은 사랑을 삼킨다는 두 본질의 상호 포용성이 그에게는 신학 방법의 최고 원리가 되었다. 합일의 원리란 이질적 두 원리의 통일을 의미하므로 이용도에게서 예수의 사랑과 인간의 신앙의 상호 포용력은 그의 삶 모든 과정에서 표현되었다. 그래서 그는 "오직 예수 중심의 사랑이 우리의 중심에 부딪힐 때 눈물이 흐를 수 있고 주님의 희생과 사랑에 감격할 수 있습니다."고 신앙의 내용을 표명하고 있다.
제3절 신앙 형태론
이용도에게 조직적인 신학 이론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왜냐하면 그가 남긴 체계적 신학 저술이 없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신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독자적인 신학 노선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그를 신학자나 기독교 신앙가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짧은 사역 기간 동안에 일제 치하 조선인들과 조선 기독교의 신앙 부흥에 강한 열기를 불어 넣었고 이러한 그의 행적이 어떻게 평가되든 한국 기독교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길 수 있을 만큼 진하고 강했다는 점 때문에 이단으로 정죄된 그의 주장들이 약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 초교파적으로 다시 음미되고 있다.
이용도의 신학은 하나의 사상이나 주의로 해석될 수 있을 정도로 명료하거나 확실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지 않으며, 거의 종합적인 사상 혼합체를 이루고 있다. 즉 이용도의 사상에는 그리스도와 신비적 합일의 사상도 있고, 그리스도와 인격적 교제의 사상도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우리는 영합의 면을 발견할 수 있음과 동시에 영교의 면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그의 사상이 복합적이며 포용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확실히 그는 단일적이며 배타적인 신학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신앙의 형태를 논할 때도 복합적인 구조를 포용한 신앙 발달 이론을 말하고 있다. 그는 신앙을 네 시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첫째 시대는 교회 시대로서 교회의 의식, 제도 등 교리에 복종이 강요되는 교회 권위와 지배가 우선된 시대이다. 즉 베드로로 대표되는 교회 주체 시대이다. 교회 시대는 카톨릭 교회와 교황주의적 교회 지상주의의 신앙 형태이며, 시대적으로 뿐만 아니라 각 개인의 신앙 생활도 교회 의식이나 교리로 말미암아 신앙의 길이 영향받은 시대를 말한다. 성경의 권위, 교회의 전승과 권위, 교리의 권위 및 공의회에서의 결의에 대한 절대 복종과 교황의 절대 권위 등이 카톨릭주의적인 신앙의 표현 수단임을 이용도는 시사한 것이다.
둘째 시대는 수도 시대이다. 아무리 철저하게 의무와 교리를 지켜 행한다 하더라도 인간은 물욕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계속 죄를 지으며 죄의 상태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은 금욕을 통해 죄를 벗어나야 구원받을 수 있으므로 자기 금욕을 위한 의지가 요청된다. 이 시대는 야곱으로 대표되는 자기 주체 시대이다. 그러나 이용도는 수도 시대를 구원의 왕도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탈속 구도주의보다는 생활 신앙을 강조함으로써 현실 긍정주의의 신앙을 내세웠다.
셋째 시대는 신앙 시대이다. 인간이 의롭게 될 수 있는 것은 교회의 의식이나 교리에 절대 복종함으로써도 아니고 절대 금욕을 통해서도 아니다. 인간은 너무나도 연약하고 인간의 의지는 쉽게 허물어지기 때문에 교회의 권위와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 그래서 제 3시대는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시대는 바울로 대표되는 하나님 중심의 시대이다. 이용도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바울 신앙의 중심사상을 그의 신앙 일변도 신학으로 수용하였다. 그래서 그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고난, 죽음, 부활, 승천에의 동참이며, 동시에 구원의 유일한 일이 신앙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합인 것이다.
넷째 시대는 사랑 시대로서, 믿음으로 구원이 가능하다고 하나 그럼에도 신앙만 가지고는 완전히 만족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신앙이 개인 구원의 방편은 될 수는 있으나 사랑이 없는 신앙이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이기주의적 신앙이므로 진정한 크리스찬의 삶과 신앙이 못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랑 시대를 대망하여 "신앙으로 용기와 담력을 얻어 죄와 싸울 수는 있고 죄인을 책망할 수는 있으되 죄인을 긍휼히 여길 수는 없음을 어찌하랴!" 이에 "오! 주님이시여. 나의 신(信)이 애(愛)에 있게 하옵소서."라고 외친다. 이 시대의 신앙 유형을 대표하는 것은 요한이며 요한 시대의 신앙 본질은 "애의 화신이 되어 자기는 애의 신(神)에 삼킨 바 되기를 원하는" 사랑의 영합 시대이다.
제Ⅴ장 결 론
지금까지 본 논문을 통해 이용도 목사의 신앙인격과 삶, 그리고 그의 사역을 고찰해 봄으로서 그의 신학사상이 무엇이며 그 내용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았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일제치하의 민족적 시련기로 정치·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빈곤과 암담한 현실 속에서 민중들은 절망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불운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는 일찍부터 민족의 설움을 맛보며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 죽음을 가슴에 안고 하루하루를 마지막이라는 긴장감으로 절박한 삶을 살아간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신앙과 열정을 가지고, 또한 그리스도와 일화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부흥의 사역을 감당했다. 이로 보건대 이용도 목사는 한 시대의 교회역사를 주도했던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가 성역을 감당했던 시대에 속하는 많은 성도들이 그의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와 만나는 신앙적인 체험을 할 수 있었다. 그가 선포했던 예수 그리스도는 사변적 지식을 위한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따스한 사랑의 주님이었고 교리나 제도의 주님이 아니라 마음속에 모실 인격의 주님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평가에 기초할 때 그가 지나친 신비주의자로 평가되어 이단으로 정죄 된 것은 한국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가슴 아픈 사건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부동한 신앙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신앙을 또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를 간절히 바랬던 복음의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다. 따라서 이제 이러한 이용도 목사에 대한 더욱 폭넓은 평가와 연구를 통해 새로운 시각으로 그를 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어져야 할 것으로 본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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