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설교는 ‘칭의’에 관한 전형적이고 교과서적인 설교이다. 칭의와 성화는 구별되는 구원의 서정이다. 칭의는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통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요, 성화는 성령께서 임하셔서 거룩하게 해주시는 은혜이다.
누가 칭의를 받게되는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칭의를 받을 수 없다.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칭의를 구할 필요성을 못느끼기 때문이다. 물론 개나 돼지는 여기서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칭의는 신앙(믿음)을 통해서 받는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공로를 의지해서는 신앙을 가질 수 없다. 오직, 믿음을 가져야만 칭의의 은혜를 얻을 수 있다. 단, 믿음이라는 수단이 능력이 있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구원받는 것이다. 믿음 자체가 능력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죄의 권세를 이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는 자는 자신의 공로로 의롭게 되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칭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다.
신앙에 의한 칭의
“불경건한 사람을 의롭다하시는 분을 믿는 사람은 아무 공로 없어도,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집니다”(롬 4:5)
1. 죄인이 어떻게 모든 사람들의 주님이시요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하심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모든 사람의 자녀에게 보통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희망의 근거를 그 속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적대관계에 있는 한, 시간 안에서나 영원 안에서나 진실된 평화도 확고한 기쁨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이 우리를 정죄하는데 어떤 평화가 있을 것입니까? 그리고 더더구나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지"(요일 3:20) 않습니까?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 위에 머무는"(요 3:36) 동안, 이 세상에서나 오는 세상에서나 무슨 진정한 기쁨이 있을 것입니까?
2. 그렇지만 아직도 이 중대한 문제가 그 얼마나 조금 밖에 이해되지 않는 것인지요! 그 일에 관해서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혼란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실로 혼란될 뿐만 아니라, 종종 전혀 그릇된 생각이었습니다. 마치 어두움이 빛에 상반되는 것처럼 진리에 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절대적으로 조화되지 않으며, 또 신앙의 유비와도 전적으로 어긋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그 기초에 관하여 그릇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 위에다 건설할 수가 도저히 없었습니다. 어쨌든, 그 기초는 불로 단련되어도 견딜 수 있는 "금, 은, 보석"같은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는 받아들여질 수 없으며 사람에게도 유익하지 않은 "풀과 짚"(고전3:12)에 불과한 것입니다.
3. 이 주제의 엄청난 중요성을 정당하게 다루기 위하여, 진지하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헛된 말이나 언쟁"(딤전 1:6)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인도함을 받아온 사상의 그 혼란함을 제거하기 위하여, 그리고 또 그들에게 경건의 이 위대한 신비에 대한 진실되고도 바른 개념을 주기 위하여, 나는 다음의 사실을 보여 주도록 힘쓸 것입니다.
Ⅰ 이 칭의의 교리 전체의 일반적인 기초는 무엇인가
Ⅱ 칭의란 무엇인가?
Ⅲ 의롭다 함을 받는 그들이란 누군가?
Ⅳ 어떠한 조건에서 그들은 의롭다함을 받는가?
나는 먼저 이 칭의의 교리 전체의 일반적인 기초가 무엇인가를 보이고자 합니다.
Ⅰ 이 칭의의 교리 전체의 일반적인 기초는 무엇인가
1.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 그를 지으신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며, 모든 것의 창조자가 자비로우신 것처럼 자비롭고, 그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처럼 인간도 사랑 가운데 머물러 있고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도 그의 안에 살아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의 영원한 형상"이 되도록 지으시고 영광의 하나님의 썩지 않는 모습으로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깨끗하심과 같이 깨끗하여 아무런 죄의 더러움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떤 종류, 혹은 어떤 정도에서도 악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죄 없이 순결했습니다. 그는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되신 그의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막12:30).
2. 이처럼 의롭고 또 완전한 인간에 대하여 하나님은 완전한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에 대한 충분한 그리고 완전한 복종을 요구했는데 이 율법은 인간이 산 영(a living soul)이 된 그 순간부터 그의 시련이 끝나는 그 때까지 아무런 빈틈도 없이 행해져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그 표준에 미달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실제로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명령받은 과제에 대하여 충분히 견딜 수가 있고 또 모든 선한 말과 일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것을 철저히 공급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인간의 마음속에 기록된 사랑의 완전한 율법에(아마도 인간은 그 율법을 파기하는 방식으로는 직접적으로 죄를 범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지혜에서 선하다고 보시는 하나의 결정적인 율법이 첨가되었습니다. 즉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창 3:3)하는 율법이요, 거기에는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하는 형벌이 가해졌습니다.
4. 이상과 같은 것이 낙원에서의 인간의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유로운 일방적인 사랑으로서 인간은 깨끗하고 행복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즐겼습니다. 그것이 사실상 영원한 생명인 것입니다. 만일 그가 모든 사항에서 하나님께 계속 복종하였다면, 이 사랑의 생활을 영원히 계속했을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하나님께 하나라도 복종하지 않는다면, 그는 모든 것을 잃을 것이었습니다. "그 날에 너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고 말씀하셨습니다.
5. 인간은 실제로 하나님께 불복종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먹었"(창 3:11)습니다. 그리고 그 날에 인간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으로 죄있는 자로 선고되었습니다. 그 날에 또 인간에게 앞서 경고되었던 선고가 그에게 효력을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그 실과를 맛보았던 그 순간, 그는 죽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죽었고,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되었습니다.
마치 영혼에서 떠났을 때에 육체가 생명을 가지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떠났으며, 영혼도 더 이상 생명을 가지지 못합니다. 역시 그의 육체도 또한 썩을 것이 되고 죽어야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리해서 죽음이 육체까지도 장악한 것입니다. 영으로 이미 죽었고 하나님께 대해서 죽었고, 죄가운데 죽었기 때문에, 인간은 영원한 죽음을 향하여 돌진한 것입니다. 결코 꺼지지 않는 불 속으로의, 육체와 영혼의 파멸을 향하여 나아간 것입니다(롬 5:12).
6. 이처럼 "한 사람 때문에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또 그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온 것 같이…죽음이 온 인류에게 퍼지게"(롬 5:12)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의 공통된 아버지요 또 대표자였던 자 가운데 죽음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리하여 "한 사람이 범죄함으로"(롬 5:17)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영원한 죽음의 선고 아래 썩어가며, 머지않아 분해될 죽을 육체 안에 살고 있어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죽고 죄 가운데서 죽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심판이 모든 사람을 죄 있는 자로 선고한 것입니다."(롬 5:12)
7. 우리가, 아니 모든 인류가 이러한 상태에 있을 때에, "하나님은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우리들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요 3:16). 때가 찼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이 되셔서 인류의 또 하나의 공동 수령이 되셨고 모든 사람들의 둘째의 일반적인 어버이가 되고 대표자가 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우리의 슬픔을 지시고", "주께서는 우리 모든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었으며", "그의 영혼을 죄를 속하는 제물로 드리신" 것이었습니다(사 53:4-6,10). 그는 그 피를 죄를 범한 사람들을 위하여 부으셨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으며", 그는 "친히 나무에 달려 우리 죄를 당신 몸에 담당하셨으니"(벧전 2:24), 그 오직 한번 바쳐진 자신의 제물로써 그는 나와 전 인류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그는 그로써 "온 세상의 죄를 위하여 충분하고 완전하여, 부족이 없는 희생과 만족을 수행하신" 것입니다.
8.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기 때문"(히 2:9)에 하나님은 이제 세상을 자기와 화해하게 하셨으며 그들의 이전의 "죄과의 책임을 그들에게 돌리시지 않으셨습니다."(고후 5:19) 이처럼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정죄 받은 것과 같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거저 주시는 은사가 모든 사람을 의롭다 하기에 이르렀습니다."(롬 5:18)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로 인하여, 즉 그 아들이 우리 위해 하신 일로 인하여, 또 우리를 위하여 괴로움을 받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제 단 한 가지의 조건으로(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그것을 행할 수 있는 힘까지도 주신 것이지마는) 우리의 죄로 당연히 받아야 할 형벌을 면케 하시고 우리를 그의 호의 안으로 복귀시키시고, 장차 올 영원한 생명의 보증으로 우리의 죽은 영혼을 이제 영적 생명(spiritual life)으로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9. 그러므로 이것이 전체 칭의의 교리의 일반적인 기초 입니다. 처음 사람 아담의 죄로 인하여, (그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였을 뿐 아니라 대표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호의에 미치지 못하게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다 진노의 자식이 되었습니다. 사도가 말한 바와 같이 “심판이 모든 사람에게 와서 그들을 정죄했습니다”(롬 5:18).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의 대표자로서의 둘째 아담에 의하여 이루어진 -죄를 위한 희생에 의해, 하나님은 전 세계와 화해하시고 새로운 언약을 주셨습니다. 화해의 그 명백한 조건이 일단 성취되므로 우리는 "더 이상 정죄 받는 일이 없고"(롬 8:1)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의롭다하심을 얻게 되었습니다."(롬3:24)
Ⅱ 칭의란 무엇인가?
1. 그러나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게 무엇입니까? 칭의가 무엇입니까? 이것이 내가 보이려고 생각하는 둘째의 사항입니다. 이미 설명된 사항으로 분명합니다마는, 칭의는 실제로 공정한 사람이 되었다든지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화입니다. 실로 성화는 어느 정도 칭의의 직접적인 열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별개의 선물이며, 완전히 다른 성질의 것입니다. 즉 칭의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그 독생자를 통하여 행하시는 것을 의미하며, 성화는 하나님이 그의 영으로써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2. 또 칭의가 우리를 죄의 고발로부터 특히 악마에 의한 고발로부터 해방한다는 엉뚱한 생각도 성서의 명백한 기사에 의한다면 쉽게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위에 쓰여져 있는 이 사항에 관한 성서의 모든 설명 가운데 저 고발자나 그의 고발이 끼어든 것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악마가 인간의 "고발자"라고 하는 것은 실로 부정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사도는 로마서에서도 또는 갈라디아서에서도 그가 칭의에 관련해서 쓴 모든 일에서 다소간이나마 이 사항에 관해서 언급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웨슬리는 여기서 오리겐의 설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즉 오리겐에 의하면 인간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전인류의 영혼을 속량하기 위하여 악마에게 넘겨졌다. 그러나 악마는 그것을 보존할 수 없어 그리스도와의 거래에서 속은 것이었다. 웨슬리는 오리겐의 이 학설을 이상에서 성서적 근거가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3. 칭의가 율법에 의하여 우리에게 가져온 고발에서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것도 성서의 명백한 증언으로 증명되고 있다고 하기보다는 단순한 가정이라고 할 것입니다. 적어도 만일 이 무리한, 부자연한 말을 하는 방식이 단순한 가정 이상의 사항을 다소나마 의미한다고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여 지옥의 저주에 합당하게 됐지마는 하나님은 의롭다하신 사람들에게 그들이 당연히 받을 형벌을 주시지 않는다'는 일 이상을 승인하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웨슬리가 단순한 가정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율법의 인격화이다. 예컨대 스웨덴의 신학자 아울렌의 바울 루터에 있어서는 율법이 반인격적인 또는 악마적인 존재로서 인간을 고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웨슬리에 의하면 그것은 전혀 성서에서 증명될 수 없는 일이요 그 의미는 의롭다함을 받은 자에게 하나님은 거기 해당하는 형벌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불과하다고 하는 것이다.)
4. 칭의는 하나님께서 자기가 의롭다 하신 그 사람들에게 속고 계시다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이 그들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자로 생각하시는 일, 또 하나님이 그들을 실제로 그런 것보다 다른 것으로 생각하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칭의는 하나님이 우리에 관해서, 사항의 실태에 거슬러 판단하신다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실제로 그러한 것보다 훨씬 좋은 것으로 평가하신다든지 또는 우리가 불의한 때에 의로운 자로 우리를 믿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니고 전지하신 하나님의 판단은 반드시 진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또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이 그렇고 그렇다 해서 나를 무죄하다고 생각한다든지 또 나를 의롭고 거룩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그릇됨이 없으신 지혜에 위반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은 나를 다윗이나 아브라함과 혼동할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와도 혼동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이해력을 주셨으므로 이 사실을 편견 없이 생각하십시오. 그 때에 이상과 같은 칭의의 사고방식이 이성에도 또는 성서에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5. 칭의의 성서적인 명백한 견해는 사면이요, 죄의 용서입니다. 그것은 아드님의 피에 의해 이루어진 화목제물을 보시고, "이제까지 지은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의(또는 긍휼)를 보이신다."(롬 3:25)고 하는, 그 하나님 아버지의 행위입니다. 이것이 그 편지 전체에 걸쳐 있는, 칭의에 관한 사도 바울의 무리 없는 자연스러운 설명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그는 칭의를, 특히 이 장에서 또 다음 장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이 설교를 위해 선택된 성구에서 한 절 건너 다음 절에, 바울은 "불법을 용서받아, 죄가 가리워진 사람은 행복하다. 주께서 죄를 문제삼지 않을 사람은 행복하다"(롬 4:7-8)고 말하고 있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 또는 용서받은 자에게 하나님은 죄를 문제 삼아 그를 정죄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이 세상에서도 또한 저 세상에서도 정죄하시지 않습니다. 그의 죄, 곧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그의 모든 과거의 죄가 덮어지고 도말되며, 마치 존재하지 않았었던 양 더 이상 그에게 불리한 것으로 기억되거나 언급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드님이 그 사람을 위해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가 당연히 받았어야 마땅한 고통을 그 죄인에게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이를 통하여 받아들여지고"(골 1:14) "그의 피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된(롬 5:10) 때로부터, 하나님은 마치 우리가 결코 죄를 범하지 않았었던 양 우리를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며 또 우리를 영원히(언제까지든지) 돌봐주시는 것입니다.
한 곳 뿐이지만 사도는 그 말의 의미를 더한층 넓혀주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거기서 그는 "율법을 듣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롬 2:13)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우리의 칭의를 위대한 날의 심판과의 관련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우리 주님 자신도 "너는 네 입으로 한 말로 무죄하게도 되고 유죄하게도 될 것이다."(마12:37)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으로서 "사람들이 생각 없이 말을 해도 그들이 심판날에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마12:36)라는 것이 증명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우회(迂回)적인 의미로 성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예는 다른 곳에서는 거의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의 문서의 일반적인 대의(大意)에 의하면 그러한 우회적인 의미로는 거의 사용하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앞에 있는 성구는 물론 그러한 의미로 그 말을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성구는 의심 없이 바로 지금 출발하여 "저들의 달려갈 경주를 달리기"(히 12:1) 시작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Ⅲ 의롭다 함을 받는 그들이란 누군가?
1. 그러나 의롭다하심을 받은 자란 누구냐 하는 것이 셋째로 생각해야 할 사항입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분명히 그 사람들이 불경건한 사람들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 곧 "하나님은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십니다."(롬 4:5) 즉 모든 종류의, 그리고 또 모든 정도의 불경건한 사람들, 다름 아닌 불경건한 자를 하나님은 의롭다하시는 것입니다.
"의로운 이들은 회개할 필요가 없는 것"(눅 15:7)처럼, 용서도 필요치 않습니다. 죄인들만이 용서를 구할 필요를 지니며, 죄만이 용서받는 일을 허용합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죄에 대하여 직접 관계가 있으며, 이점에서 그밖에 다른 아무 것에도 관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용서의 하나님이 긍휼이 깊은 것은, 우리의 불의에 대해서요, 하나님이 "다시는 기억지 아니하시는"(렘 31:34) 것은 우리의 죄악입니다.
2. 이상의 사실은 인간은 성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즉 그가 의롭다 하심을 얻기 전에 거룩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격렬히 주장하는 사람들이 조금도 고려해 보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전반적인 성결이나 순종이 칭의에 선행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그러한 사람들은 이것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됩니다(물론 이것은 현재의 문제 밖에 있지마는 그들이 마지막 날의 칭의를 의미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러한 주장은 진실에서 너무도 떨어져 있으며 그 가정 자체가 단순히 분명하게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곳에는 성결이 없고 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신다는 의식이 원인이 되어 있는 것을 제하고는 하나님에의 사랑은 없는 것이므로) 또한 본질적으로 전연 불합리하며 그 자체가 모순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용서받는 자는 성자가 아니라 죄인이며, 그리고 죄인이라는 의식 밑에서 용서받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사람이 아니라 불경건한 사람을 하나님은 의롭다 하십니다. 이미 거룩한 사람이 아니라, 거룩하지 않은 사람을 하나님은 의롭다하십니다.
어떤 조건으로 하나님이 그 일을 해 주시는가는 다음에 곧 고려될 것입니다.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간에 그 조건은 성결일 수는 없습니다. 만일 그 조건이 성결이라고 주장한다면, 미리 제거된 죄만을 하나님의 어린양이 제거하신다고 말하는 것이 됩니다.
3. 선한 목자는 이미 발견된 자들만을 찾아 구합니까? 아닙니다. 그는 잃은 자를 찾아서 구원하십니다. 그는 그의 용서의 긍휼을 필요로 하는 자를 용서하십니다. 그는 죄의 책임에서 인간을 구하는 것이요(그리고 동시에 그 힘에서도 입니다마는) 모든 종류의, 또는 모든 정도의 죄인들을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즉 그 때까지 전혀 불경건한 사람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머무르지 않은 사람들, 따라서 선한 것이 조금도 없고 또는 진실하게 크리스천다운 성질이 머물러 있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차라리 그 사람들에게는 모든 악하고 또는 혐오할 만한 사항이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대적하는"(롬 8:7), 저 육의 마음의 진짜 열매인 교만, 분노, 세상에 대한 사랑이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선한 목자는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4. 죄의 무거운 짐을 견디기 어려운 병든 사람들이 의사를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 밑에서 신음하고 있는 죄있는 자들이 용서를 필요로 합니다. 생각, 말, 행위에서 그들 자신의 불경건 때문에, 하나님에게만이 아니요, 그들 자신의 양심과 무수한 증인들에 의해서 이미 유죄 선고받고 있는 자들이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을 통하여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을 크게 불러 찾는 것입니다. 즉 불경건하며 "행한 것이 없는 자"(롬 4:5), 의롭다하심을 받기에 앞서 선한 행위도 참으로 덕스럽고 거룩한 행위도 없고, 끊임없이 다만 악만을 행하는 자를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을 통하여 의롭다 하시는 분을 부르짖어 찾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가운데 부어지기까지는 그의 마음은 필연적으로 본질적으로 악입니다. 나무가 썩어 있을 때는, 열매도 썩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기"(마:18) 때문입니다.
5. 만일에 반대하기를 "아니, 의롭다하심을 받기 이전 상태에 있는 사람도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벗은 자에게 입혀줄 수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선한 행위다." 라고 할는지 모릅니다.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의롭다하심을 받기 전에 그런 일은 "선한 행위요, 그런 일들은 사람에게 유익합니다"(딛 3:8).
그러나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그 자체가 좋은 것이거나 또는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에 선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교회의 말을 사용한다면) 모든 참되게 선한 행위는 칭의 이후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선한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받으실"(벧전 2:5) 것이라면, 그런 것들은 "진실하고 산 신앙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에, 칭의 이전에 된 모든 행위는 기독교적으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에의 신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한 선한 것이 아닙니다. (가끔 그런 것들이 어떤 종류의 하나님에의 신앙에서 나오는지도 모르지만) "차라리 그런 것들이 하나님이 원하시고 또 명하시는 대로 되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아무리 어떤 사람들에게는 기묘하게 보일지라도) "우리는 그것들이 죄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6. 아마도 그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왜 칭의 이전에 행한 행위가 실제로 당연히는 선한 것일 수 없는 것인가 하는, 다음에 드는 중요한 이유를 적당히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요지를 솔직히 말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하나님이 원하시고 또 명하신 것 같이 행해지지 않는 모든 행위는 선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칭의 이전에 될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원하시고 또 명하신 것처럼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칭의 이전에 된 모든 행위는 선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 명제는 자명합니다. 그리고 모든 우리의 행위가 사랑(아가페)에서 되어져야만 하는 것 즉 전 인류에 대한 사랑을 낳아주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서 행해져야 할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고 명하고 계시다는 것만이라도 우리가 고려해 본다면, 둘째의, 칭의 이전에 된 모든 행위는 하나님이 원하시고 명하신 것처럼 되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 또한 분명하며 부정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지 않을 때에, 어떤 우리 행위도 이런 사랑에서 행해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아들이 되게 하는 영"(롬 8:15)을 받기 전에는 우리 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이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지 않으시고 또 (이 의미에서) 행한 것이 없는 자를 의롭다 하시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는 헛되이 죽으신 것입니다. 그 때에는 그의 죽으심에도 불구하고 모든 산 자가 의롭게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Ⅳ 어떠한 조건에서 그들은 의롭다함을 받는가?
1. 그러나 불경건하며 이전에 행한 것이 없는 자가, 어떠한 조건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습니까?
유일한 조건 위에서인데, 그것은 믿음입니다. 그는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을 믿습니다."(롬 4:5) 그리고 "믿는 자는 정죄받지 않습니다."(롬8:1) 그렇습니다,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간"(요일 3:14)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또는 긍휼)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이르고 또 믿는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데(롬 3:22).....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한 화목제물로 세우셔서, 이리하여 '당신 자신이 의로우실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정의와 모순됨이 없이) 예수 믿는 이를 의롭다하시는 분이심'을 명백히 알리려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롬 3:25, 26).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확정합니다.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없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롬 3:28). 즉 실제로 그가 지금까지 수행할 수 없었던, 도덕적 율법에의 선행적인 복종이 없이 말입니다. 여기서 의미하는 것이 도덕적 율법만이라는 사실은 다음의 말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하는 것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율법을 굳게 세웁니다"(롬 3:31). 믿음으로 우리는 어떤 율법을 굳게 세웁니까? 의식적인 율법, 즉 모세의 의식적 율법이 아닙니다. 그런게 결코 아니고, 그것은 변함없는 위대한 사랑의 율법, 하나님과 우리 이웃에 대한 거룩한 사랑의 율법입니다.
2. 일반적으로 신앙이란 그것이 과거 또는 미래의 사항이기 때문에, 또는 영적인 사항이기 때문에 우리의 육체적 감각으로 발견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사실"(히 11:1)에 대한 신적인, 초자연적인 증거요 확신입니다.
의롭다 하는 신앙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기와 화해하게 하셨다"(고후 5:19)는 사실에 대한 신적인 증거요 확신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 때문에 죽으시고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는 사실에 대한 확실한 신뢰요 신임인 것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시기에 죄인이 믿든지 간에-그것이 어릴 때이거나 장년기이거나 또는 그가 연로하여 백발을 띠고 있을 때이거나-하나님은 그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때문에 그 때까지 아무 선한 것이 없는 자를 용서하시고 사면하시는 것입니다. 실상 하나님은 그에게 지금까지도 회개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회개는 모든 선한 것이 그에게 없고 모든 악이 그에게 있다는 깊은 의식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고부터, 신앙은 그가 가지고 있고 또한 행하는 모든 선한 것을 찾아 구하는 것이 아니요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열매입니다. 먼저 나무가 좋아지고 그리고서 열매도 좋아지는 것입니다.
3. 나는 우리 자신들의 교회의 말을 사용한다면 이 신앙의 성질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구원의 유일한 수단"(칭의는 그 구원의 일부분임)은 신앙입니다. 즉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고 또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고난의 공로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한번 하나님의 총애 안에 받아 들여 주셨다는 데 대한 확실한 신뢰요 확신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변덕스럽게 동요하는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활동을 저지하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신앙에서 좌절했기 때문에 베드로는 물위를 걸어서 그리스도에게 가려고 했을 때 빠지는 위험을 당했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흔들리거나 의심하기 시작한다면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빠질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물 속으로가 아니요 밑이 없는 지옥의 불구덩이에로 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단지 전세계를 위하여 유효할 뿐만 아니라 그는 당신을 위하여 온전하고, 충분한 희생을 드린 것이어서, 당신의 죄를 완전히 씻어버린다는 확실하고도 확고한 신앙을 가지십시오. 그리하여 당신은 사도와 함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사랑하사 당신을 위해 당신 자신을 주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그리스도를 당신 자신의 것으로 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그의 공적을 당신 자신에게 대해서 적용하는 일입니다."
4. 이 신앙이 칭의의 전제 또는 조건이라는 것을 주장한다는 것은 첫째로, 나는 이 신앙 없이는 칭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요 3:18). 그리고 그가 믿지 않는 한, 심판은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그에게 있을 것"(롬 3:26)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 외에 "우리가 구원받을 이름은 하늘 아래 누구에게도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행 4:12)이요 또 죄를 선고받은 죄인이 죄의 책임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예수의 공적 이외에 없는 것이요 그 이름을 믿는 신앙에 의함 이외에 그 공적을 분배받을 다른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는 동안, 우리는 "약속의 계약에서 문외한이요 이스라엘 나라와는 관련이 없는, 하나님도 없이 세상을 사는 자들입니다."(엡 2:12). 어떠한 (이른바) 덕을 사람이 가지고 있다 해도-나는 복음이 전파되어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밖에 있는 사람들을 심판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겠습니까?"(고전5:12)-어떤 좋은 (이른바) 행위를 그가 하더라도, 그것은 유익이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진노의 자식이요 예수를 믿기까지는 여전히 저주 아래 있는 것입니다.
5. 그러므로 신앙은 칭의의 필수 조건입니다. 그렇습니다. 유일한 필수 조건입니다. 이 사실은 유의해서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둘째의 요점입니다. "행한 것이 없는", "불경건한 자"에게 하나님이 신앙을 주시는 순간(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사이기 때문), 그 신앙이 그에게 의로 간주되는 것입니다(롬 4:5). 그는 이 사실에 앞서서 조금도 의를 가지지 못합니다. 소극적인 의, 즉 순진까지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가 믿는 순간에 믿음이 그에게 의로 간주됩니다(롬 3:28).
그것은(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 그를, 그가 실제로 그렇지 않은 자라고 생각하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삼으셨다"(고후 5:21)는 말씀과 같이,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죄인으로 취급하셔서 우리의 죄 때문에 그를 벌하신 것같이), 우리가 그 분을 믿는 때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의 죄 때문에 벌하시지 않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마치 죄의 책임이 없고 바른 사람인양 우리를 대우하십니다.
6. "신앙이 칭의의 유일한 조건이라"는 이 조항에 동의하기가 곤란하다고 하는 것은 확실히 그것에 대한 몰이해에서 온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써 신앙, 그것 없이는 아무도 의롭다하심을 얻지 못하다는 유일한 사항이라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신앙은 용서를 위해 직접적으로, 반드시, 절대로 필요한 유일한 것입니다.
한편, 신앙 이외의 모든 것을 가졌다고 해도, 그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받을 수 없는 것 같이, 다른 한 편으로는 모든 다른 것을 가지지 못했어도 만일 그 사람이 신앙을 갖는다면 그는 의롭다 하심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종류 또는 어떠한 정도의 죄인이라도 좋으나 그 전 존재가 불경건과 같은 죄인, 전혀 선한 일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또는 행할 수 없는, 그리고 완전히 지옥의 불에 합당한 죄인을 상상해 보십시오. 만일 도움도 없고 또 희망도 없는 이 죄인이, 그 자신을 전적으로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던져버린다면 (실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함 이외에는 그것을 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순간에 그가 죄 용서함을 받는다는 것을 누가 의심할 수 있을 것입니까? 그 죄인이 의롭다하심을 얻을 수 있기 전에 그 이상의 무엇이 반드시 요구된다는 것을 누가 주장하겠습니까? (이제 이 세상의 처음부터 이러한 예가 하나라도 있다면, 그리고 이러한 예는 만을 만배할 만큼 이제까지도 없었던 것인가, 또 이제도 없는 것인가?)(단 7:10) 위와 같은 의미에서 신앙이 칭의를 위한 유일한 조건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7. 하나님의 행위의 이유를 하나님께 묻는 다는 것은 가엾고 죄의 책임이 있는 벌레같은 인간에게 마땅하지 않는 일입니다. 벌레같은 인간은 그들이 맛보고 있는 모든 축복(우리의 혀를 서늘하게 하는 한 방울의 물에서부터 영원한 영광의 무한한 부에 이르기까지)을 은혜로 인하여, 단순한 은혜로 인하여, 보수로서가 아니요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이론을 주장하는 것은 우리에게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행동에 대하여 설명을 가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당신은 신앙을 칭의의 조건, 유일한 조건으로 하셨습니까, 왜 당신은 믿는 자만이 구원을 받도록 정하셨습니까 라고 물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성 바울이 그의 로마서 9장에서 매우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점입니다. 즉 용서와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한 조건이란 우리 자신에 의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자신의 선하게 여기심에 따라서 하나님이 자신의 조건을 정하셔도 그것은 하나님이 불의하시다고 하는 일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내가 불쌍히 여기려는 자를 불쌍히 여길 것이다."(롬9:15) 즉 예수를 믿는 자를 불쌍히 여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조건을 선택하는 일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자비로 된다는 말입니다“(롬 9:16). 하나님은 자신의 자유로운 사랑, 자신의 보수를 요구하지 않는 선량성 이외의 이유로는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비를 베풀려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롬 9:15). 즉 그 사랑하는 독생자를 믿는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완악하게 하시고"(롬 9:18) 마침내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을 방임하시는 것입니다.
8. 그러나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리하면 그대와 그대의 집이 구원을 얻을 것이요"(행16:31)하는 이 칭의의 조건을 하나님이 정하신 이유의 하나를 우리는 겸손히 생각해도 좋다고 생각됩니다마는, 그것은 사람에게 교만을 가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교만은 이미 하나님의 천사들을 파멸시켰고 "하늘의 별들의 삼분의 일"(계 8:12)을 땅에 던졌습니다. 저 유혹자가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창 3:5)고 말했을 때 아담이 그 충실성에서 타락하고 또 세상에 죄와 죽음을 가져오게 한 것도 대부분은 이 오만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러한 화해의 조건을 아담과 및 그 자손들을 위해 정하시고 그들을 온전히 겸손하게 하여 티끌에까지 낮추신 것은 하나님에게 합당한 지혜의 한 예입니다. 이러한 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이상의 목적을 위해서 특히 적당합니다.
왜냐하면 이 신앙으로 하나님에게 오는 자는 자기 자신 안에 있다고 추정되는 어떤 선한 것 즉 덕이나 의가 그 무엇이든지 간에 어떤 것에도 조금도 주목하지 말고, 그의 눈을 오로지 그 자신의 사악성, 죄책, 무력함에 맞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순히 죄인으로 와야만 합니다.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깨어지고, 또 죄있는 자로 선언되고, 오직 불경건 외에 하나님께 드릴 것이 전혀 없고 자신이 가진 것이라곤 다만 죄와 비참임을 호소해 오는 것입니다. 그의 입은 막히고 또 그가 완전히 죄책이 있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섰을 그 때에만, 그는 예수를 자기의 죄를 위한 완전하고도 유일한 속량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만 그는 예수 안에서 발견되며, 또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의"(빌 3:9)를 얻는 것입니다.
9. 이러한 말을 듣고 또 읽는 불경건한 여러분! 사악하고 무력하며 비참한 죄인인 여러분! 나는 당신들에게 모든 사람의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명령합니다. 당신들의 모든 불경건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곧장 나아가시오. 당신들의 얼마간의 의를 주장함으로써 당신들의 영혼을 파멸시키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전혀 불경건한, 죄의 책임이 있으며, 잃어버려진, 멸망받고 있는, 지옥에 가야 마땅하며 그래서 지옥으로 떨어져가고 있는 자로서 오시오. 그 때에 당신들은 하나님 앞에서 호의를 발견하고 또 하나님은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파멸된, 무력하고 저주받은 죄인들로서의 당신들을 부어질 피의 곁으로 데려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따라서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당신의 죄를 가져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당신 자신의 행위나 올바름을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 자신의 겸손도, 뉘우침도, 성실성도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결코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주장한다면, 당신을 값주고 사신 주를 부인하는 일이 됩니다.
그렇지 말고 오로지 언약의 피를, 당신의 교만하고, 완악하며, 죄 가득한 영혼을 위해 지불하신 속량의 피만을 주장하십시오. 이제 당신의 내적인 외적인 불경건을 보고 또 느끼는 그 당신 자신은 대체 누구입니까? 당신이 그 인물입니다! 나는 당신을 나의 주를 위하여 원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신앙에 의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촉구합니다! 주는 당신을 필요로 하십니다. 바로 지옥에 합당하다고 느끼고 있는 그 당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촉진하는 데 합당한 것입니다. 즉 불경건하며 행한 것이 없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의 그 영광을 촉진하는 것입니다. 자 빨리 오시오!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러면, 당신과 같은 사람이라도,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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