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

신생의 표적들

천국 도서관장 2009. 11. 11. 02:07

<신생의 표적들The Marks of the New Birth>(존 웨슬리,중생』, 은성, pp.125-150)에서 웨슬리 목사님은 신생을 통해 나타나는 증거들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생을 경험한 사람은 양자의 영을 갖게 된다. 양자의 영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믿음과 소망, 사랑을 갖는다. 이것이 신생의 표적들이다. 어떤 사람은 신생에 대해 정확하게 정의내리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거듭남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신생을 간구한다.


신생의 표적으로서의 믿음은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깊이 통회하고 오직 구원은 예수님께 있다는 확신가운데 갖는 살아 있는 신앙이다. 이 표적(믿음)을 가진 사람은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성령께서 내주하시기에 이 사람은 내적인 죄와 외적인 죄의 권세를 깨뜨린다. 양자의 영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죄를 짓지 않고 죄의 권세를 능히 이긴다. 항상 기뻐하고 하늘의 평안을 누리는 삶을 산다. 이 평안은 마귀의 권세나 지옥의 세력이 빼앗아 갈 수 없다.

신생을 경험한 사람은 소망을 갖는다. 소망에도 사변적 소망과 산 소망이 있다. 사변적 소망은 죽은 소망으로 ‘교만’으로 가득 차 있다. 산 소망은 오직 예수님이시다.

신생을 경험한 이기적이 아니라 이타적인 사랑을 한다. 양자의 영을 가진 사람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형제를 사랑한다. 필연적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더 나아가서 원수까지 사랑한다. 이에 대해 조나단 에드워즈는 『참된 미덕의 본질』에서 전자를 만족적 사랑으로, 후자를 호의적 사랑으로 구별했다.


* 정리

-신생의 표적

  살아 있는 믿음, 산 소망(예수님), 이타적인 사랑

-신생의 표적이 아닌 것

 사변적인 믿음, 죽은 소망(교만), 이기적인 사랑


차례

<신생의 표적들>


믿음

  1.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2. 내적, 외적 죄의 권세를 깨뜨리는 것

  3. 믿음이 누리는 평화

소망

사랑

누가 거듭난 자입니까?

 

신생의 표적들


“영으로부터 난” 모든 사람은 새롭게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다시 태어났다는 말과 하나님으로부터 났으며, 영으로부터 났다는 말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이나 혹은 양자의 영(롬 8:15)을 가진다는 말 속에 무슨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까?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자비의 선물이 종종 세례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이 세례는 어떤 의미에서 본문 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결코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의 목적은 사람이 새롭게 거듭날 때 무슨 선물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아보고자 합니다. 도대체 무슨 표적이 신생을 구별짓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신생에 대해서 정확한 정의를 내리는 것이 필요치 않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성경말씀도 신생에 대해서 명백히 정의하지 않았는데 꼭 그럴 필요가 있느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즉 영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 3:30)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그런 질문을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신생의 표적에 대해서 제가 성경에 나타나 있는 것을 발견한대로 가장 쉬운 방법으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믿음 

신생의 첫 번째 표적은 바로 다른 모든 표적들과 터전이 되는 믿음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갈 3:26)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요한복음은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요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믿을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혈통으로나 육적으로”된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부모들의 육적인 욕망 따라 어떤 내적인 변화도 없이 거저 태어나는 그런 출생도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 가운데서 “하나님 당신의 자녀가 되는 것”(요 1:13)입니다. 요한이 나중에 쓴 편지들을 읽어보면, 이 점을 분명히 연결짓고 있습니다. 즉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난 자입니다”(요일 5:1).


여기서 사도 요한이 생각하고 있는 믿음이라는 것은 단순히 사변적인 생각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그저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라는 명제에 대한 단순한 동의나, 우리의 신앙고백 안에 들어있는 다양한 신조들에 동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신구약 성경에 포함되어 있는 여러 명제들에 동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들이 신뢰할 만한 일에 대해서 그저 추상적으로 믿는 정도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확신이나 전적인 확신에 대한 지적인 동의도 아닙니다. 우리는 심지어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만일 믿음이 그런 것이라면,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마귀들도 거듭났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귀들도 두려워 떨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모든 성경말씀은 진리라는 견해에 마귀들도 동의하고 있습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증언하실 때, 마귀들도 ‘그가 참으로 신실한 증언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권능의 역사도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있도록“(벧후 2:4)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을 단지 하나님에 대한 증언이나 기적에 기초한 신적 진리에 대해 동의하는 것으로 축소시킬 수는 없습니다.

동의에 의해 역사하는 것은 “죽은 믿음”뿐입니다. 진실로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며, 이는 단순한 동의 그 이상입니다. 실로 그것은 이해의 행동을 포함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서 역사하는 내적인 변화입니다(cyh-‘이해의 행동’회개를 말한다. ‘내적인 변화’란, 조명을 받을 때의 믿음을 말한다. 즉, 웨슬리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은 ‘회개’를 한 후 조명을 받고 죄사함을 받을 때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되는 것을 포함한다. 이런 믿음이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확신하게 된다. 그러나 단지 동의하는 믿음은 회개도 포함되지 않고, 성령의 조명으로 마음의 내적인 변화를 받지 못함으로 죽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국교회의 “구원에 대한 설교”에서는 “신자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죄를 용서받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화목케 되었다는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뢰와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 지기”위해서는 먼저 자기 의지를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아들여지도록 “육체에 대한 모든 신뢰”를 전적으로 거부해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아무런 공로도 없이, 여러분 스스로 행한 일들에 대해, 혹은 여러분이 지닌 어떤 종류의 순수한 의로움에 대해 그 어떠한 신뢰도 두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뜻합니다. 이제는 한 잃어버린 자로, 비참하고 깨어진 채로 자기를 정죄하고 망해버린 자로, 이제 입술은 완전히 닫혀진 채 절망에 빠진 한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입니다. 이 깊은 통회의 감정을 부분적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단지 “절망”이라고 부를 뿐입니다. 믿음은 이러한 죄의식을 통하여 그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깊고 완전한 확신에 이르게 됩니다. 즉 우리의 구원과 그 구원을 사모하는 간절한 열망은 오직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는 확신과 함께 살아있는 믿음 곧 “자신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속전을 치르셨고, 자신의 생애 가운데서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에 앞서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났다고 하는 그 믿음은 단순히 우리의 신앙의 모든 신조들을 시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진실되게 확신하는 것입니다


2. 내적 외적 죄의 권세를 깨뜨리는 것

우리는 이런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의 즉각적이고 계속적인 열매는 바로 죄를 이기는 권세입니다. 이 열매는 그 뿌리인 믿음과 그 어떤 방법으로도, 심지어 잠시 잠깐 동안만이라도 분리되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를 이기는 권세를 두 가지 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를 이기는 권세를 두 가지 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즉 외적인 면과 내적인 면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외적인 면으로는, 이 권세가 모든 사악한 말과 행실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이 있는 곳마다, 이 권세는 우리의 양심을 이전의 죽은 행실로부터 깨끗케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적인 면에서 보면, 죄를 이기는 이 권세는 우리의 마음을 모든 불경건한 정욕과 성질로부터 정화시킵니다.


로마서 6장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의 열매로서 죄를 이기는 권세에 대해 여러  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더 많은 은혜를 구하려고 죄 안에 거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죄 안에서 더 살 수 있습니까?”(롬 6:1-2).


“우리는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는 죄된 자아의 파멸을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죄에 대해 책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롬 6:6).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의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라”(롬 6:11-12).


“너희 지체를 죄에게 드리지 말고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죄가 다시는 너희를 지배하지 모사리라”(롬 6:14).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이제는 너희가 해방되었도다!”(롬 6:17-18). 여기서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는 말을 쉽게 설명하면, 비록 여러분이 과거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그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의의 종이 되었음을 감사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같은 무한한 특권과 죄를 이기는 권세에 대해서는 사도 요한의 편지들에서도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별히 내적인 죄뿐만 아니라 외적인 죄를 이기는 권세로서의 그런 활동들과 관련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마치 너무나도 깊고 풍성한 하나님의 선함에 놀란 사람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요일 3:1).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우리가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을 아직 나타내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은 줄(like him)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라”(요일 3:2). 


요한은 즉시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짓기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씨가 그 안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요일 3:9)라고 덧붙여 말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이 점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불쑥 끼어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는 ‘습관적으로’ 죄를 짓지 아니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습관적’이라니요? 도대체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그런 말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말은 성경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보다 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짓지 아니한다”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습관적’이란 말을 덧붙인 사람은 바로 당신이지 않습니까? 당신이 무슨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고치려 합니까? 요한계시록 22:8은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거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이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이러한 일은 여러분이 덧붙인 해설이 본문 자체의 의미를 집어 삼키려는 경향이 있을 때, 더욱 그러하며, 이런 교묘한 속임수에 의해 본문 자체의 온전한 약속은 상실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교묘한 속임수에 의해 성경의 권위는 무용지물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책에 있는 그 어떤 말씀도 제하여 버리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행여 성경 안에 기록된 보다 더 넓은 의미와 영감을 떨쳐 버리고 단지 죽은 문자들만 남겨놓아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여러분이 참예할 것”(계 22:19)을 제하여 버리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우리는 오히려 사도 요한이 그의 논의의 전체적인 취지와 관련하여 요한 자신의 언어로 해석하도록 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즉 요한일서 3:5을 보면,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말씀으로부터 어떤 추론을 이끌어내려고 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6절에 나타나는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이같은 중요한 가르침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사도 요한은 주의할 것을 경고합니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요일 3:7). 사도 요한은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속여 그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일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미혹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반박했습니다.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습니다. 반면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의 자식입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하였기 때문입니다”(요일 3:7-8).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누구든지 죄를 짓지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씨가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죄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의를 행하지 않는 이 중에 하나님의 자녀는 아무도 없습니다”(요일 3:9-10).



이런 평범한 표적(죄를 지음, 혹은 죄를 짓지 않음)에 의해 그들을 구분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의 편지 후반에 동일한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압니다.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합니다“(요일 5:18).


3. 믿음이 누리는 평화

살아있는 믿음의 또 다른 열매는 평화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고, 우리의 죄가 깨끗이 씻겨진 까닭에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습니다”(롬 5:1). 우리 주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날 밤, 친히 모든 제자들에게 이 평화를 장엄하게 유언하셨습니다. “나의 평안을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는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요 16:33). 그렇다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빌 4:7)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연인’으로서는 마음속에 상상조차 할 수 없고, 심지어 영적인 사람이라도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영혼의 평온함입니다.


이 평화는 땅의 권세나 지옥의 세력이 빼앗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파도나 폭풍이 몰아친다 해도 절대로 평화를 파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견고한 반석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 평화는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줍니다. 그들이 편안할 때나 혹은 고통 중에 있을 때에도, 병중이나 혹은 건강할 때에도, 그리고 풍요함에 있거나 혹은 가난에 처해 있을 때도 그들은 스스로 만족하는 것을 배웠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내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지 간에, 그것들이 믿음 안에서 그들의 선함을 위해 하나님께 허용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모든 위험 가운데서도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가운데 견고히 서 있습니다.

소망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 사람들에 대한 두 번째 성경의 표적은 소망입니다. 후에 베드로는 세상에 흩어져 있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셨습니다”(벧전 1:3)라고 말합니다.


산 믿음에 대해여 죽은 믿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은 소망이 있기 때문에 산 소망이 역시 산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침울한 소망은 하나님께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인간의 원수들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죽은 소망은 그것의 가장 지독한 열매인 교만으로 알 수 있습니다. 교만은 셀 수 없는 악한 말과 나쁜 행실의 근원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산 소망을 지닌 자들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거룩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 1:15-16). 그리고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게 하느니라”(요일 3:2-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이 소망은 “믿음의 철저한 확신”(히 10:22)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즉, 이러한 확신을 통해서 “여러분의 소망이 마침내 실현될”(히 10:22) 그러한 신앙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우리의 언어로 형언할 수 있는 최상의 표현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어 번역은 그 의미가 헬라어 성경의 의미보다는 상당히 약화되어 있습니다. 원래 헬라어 성경에는 우리들 자신의 영감과 양심의 증거를 함축하고 있으며, “우리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거룩함과 신실하심에 의해 지배된다.”(고후 1:12)는 사실을 완전히 확신시켜 주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자녀이면, 상속인이 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인 임”(롬 8:16-17)을 보다 더 온전히 확신시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요”(마 5:4)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엄밀히 말한다면 이는 슬픔 중에서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약간의 슬픔이 우리 영과 함께 하고 있는 성령님의 증거를 앞선다 하더라도(사실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고 심판의 두려움 가운데 끙끙댈 때에는 어느 정도 비통함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우리들 가운데 계시는 이 증거를 느끼자마자, “우리의 슬픔은 기쁨으로 변할 것입니다”(요 16:21). 마치 “어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는 기억지 않는 것”(요 16:21)처럼 그 고통이 무엇이든지 간에 두려움은 곧 새롭게 거듭났다는 기쁨 때문에 잊혀질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몇몇은 지금 매우 침통해 하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대해서 왠지 이방인 같고,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것 같으며,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있는 약속에 대하여 외부인”(엡 2:12)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성령을 지니지 못했다고 고통스러워 할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아마도 “소망이 없고 하나님이 없는 것”(엡 2:12)처럼 느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여러분이 마음에 근심합니다만, 평안의 주님이 오시면 그때는 여러분의 마음이 다시 기뻐할 것이며, 다른 사람이 여러분의 기쁨을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요 16:22).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즐거워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화목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롬 5:11).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들어가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이 은혜의 자리는 사랑의 자리요, 하나님과의 화해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곳에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고 즐거워합시다!”(롬 5:2).


사도 베드로도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하려 함이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지금은 그를 볼 수 없으나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말할 수 없이 크게 기뻐하느니라“(벧전 1:7-8).  


참으로 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성령 안에 있는 이 기쁨을 우리는 그 어떤 말로도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마치 “숨겨진 만나와 같아 그것을 받는 자 외에는 그 어떤 사람도 그 기쁨을 알 수가 없습니다”(계 2:17). 비록 우리에게 알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기뻐합니다. 우리가 깊은 환란의 고통 가운데 처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여전히 기쁨이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흘러넘치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모든 즐거움이 사라졌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그 위로가 작다고 할 수 있습니까?(욥 15:11).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이 최고조로 달한 곳에 성령의 위로가 충만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에게 다가오는 경제적 어려움이나 고통, 그리고 지옥이나 무덤을 비웃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욥 5:22). 이것은 그들이 “최후에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 바로 하나님”(계 1:18)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면 이 모든 환란을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으실 것입니다”(계 20:3). 그러나 우리들은 지금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울려나오는 큰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4)하는 말씀입니다.


사랑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 사람들에 대한 세 번째 성경의 표적은 사랑입니다. 물론 사랑은 이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속에 부어 주신 것”(롬 5:5)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들 마음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갈 4:6).


그리고 이 영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끊임없이 화평과 사랑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들은 이런 하나님께 날마다 일용할 양식과 그들의 영과 혼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간절히 아뢰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의 뜻대로 구하기만 하면 그분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것입니다”(요일 5:14)라는 말씀을 알기에 하나님 앞에 그들의 온 마음을 쏟아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기쁨이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 마음의 즐거움이요, 그들의 “방패”(시 33:20)가 되시며, “대단히 큰 상급”(눅 6:33)인 것입니다. 그들 영혼의 소원은 하나님을 향하여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일이 그들의 “음식과 음료”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아주 풍성하고 값비싼 음식을 먹는 것처럼 만족해합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시 63:5).


역시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그의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바로 그의 자녀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요일 4:21-5:1).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든 자들”(엡 6:24)에게 거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구주로 기뻐하며 마치 “그와 한 몸을 이룬 것처럼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엡 6:24)에게 거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구주로 기뻐하며, 마치 “그와 한 몸을 이룬 것처럼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고전 6:17)에게 거합니다.


이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늘 그의 사랑하는 사람을 향하여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처럼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있고, 사람들은 모두 함께 그를 “만인 가운데 뛰어난 표본”(아 5:10)으로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믿는 성도들은 “나의 사랑하는 자는 다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아 2:16)라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모든 사람보다 아름다우며, 은혜를 입술에 머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당신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시 45:2)라는 말씀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필연적인 결과는 우리의 이웃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 속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인간을 사랑한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심지어 우리의 원수들과 “우리를 저주하는 자들”(눅 6:28)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cyh-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은 <참된 미덕의 본질>에서 성도에 대한 사랑은 만족적 사랑, 이웃과 원수에 대한 사람은 보편적 사랑이라고 하셨다). 이웃을 사랑하되 우리가 남으로부터 사랑받고자 원하는 그 사랑만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것을 보다 더 강력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요일 4:7-12).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 모든 사람들은 마음속에 다음과 같은 계명을 새겨야겠습니다. 즉,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2). 이 계명을 통해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신 바로 그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의 말처럼 “이제 우리도 우리의 형제 자매들을 위하여 우리들의 목숨을 마땅히 버려야 합니다”(요일 3:16). 만일 우리가 이 일을 할 준비가 기꺼이 되어 있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의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오직 그렇게 된 이후에 비로소 우리는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압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요일 3:14).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고 있는 증거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기 때문입니다”(요일 4:13).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을 압니다”(요일 4:7).


그러나 혹시 어떤 이들은 이렇게 반문할지 모릅니다. “사도 요한이 말하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라고 하지 않던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의미는 역시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과도 같은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 낼 수 있겠습니까?


보이는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네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이 의미하고 있는 모든 것을 가르킨다고 할 수 있습니까? 혹 어떤 사람들은 사도 요한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영혼에 대한 어떤 감정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외적으로 나타나는 섬김이라고 잘못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이웃에 대한 사랑은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일종의 눈에 보이기 위한 행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단지 외적으로 하나의 행위처럼 보는 것은 사도 요한의 말씀을 조잡하게 해석하는 것이 되버리고 맙니다. 보다 더 평이하고 분명한 의미가 요한일서 5:3에 나타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나머지 모든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징이 되고,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야 말로 첫째되고 위대한 계명을 지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 가운데 흘러나오게 되면, 이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도록 강요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온 힘을 기울여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또 다른 열매는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요, 그분의 뜻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순종은 사랑과 너무나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어서 그것들을 서로 서로 구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한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순종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우리의 마음 가운데서, 그리고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순종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성질을 관통하며,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모든 순간까지 포함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언급된 가장 분명한 성품 가운데 하나는 바로 “선한 일에 열심”(딛 2:14)을 내는 것입니다. 가능한 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선행을 하기 위하여 선행에 굶주려 있고 선행에 목말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기쁨으로 너희 영혼을 위하여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허비하고, 심지어 이 세상 끝날까지 내 자신마저도 허비하리라”(고후 12:15)는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사랑은 이 세상에서 어떤 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의인의 부활로써 보상받는 것입니다.


누가 거듭난 자입니까?


저는 지금까지 신생에 대한 세 가지 표적, 즉 믿음, 소망, 사랑을 성경에서 나타나는 대로 설명해 드렸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질문에 답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났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말이며, 그 결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의 권세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거듭났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소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우리의 저급한 본성으로 향하지 않고, 우리가 언제 어디에서든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빌 4:7)을 누리는 것입니다.


둘째, 거듭난다는 것은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소망함으로 우리들 가운데 선한 양심의 증거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친히 우리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는 것”(롬 8:16)입니다. 이런 증거들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그리스도 안”(롬 5:11)에서 영원히 기쁨을 누립니다.


마지막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사랑은 여러분이 전에 그 어떤 피조물을 사랑한 거보다 더 큰 사랑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이웃 즉, 다른 모든 사람들을 마치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으로부터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사랑합니다.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처럼 여러분의 모든 말과 행실로 드러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전 생애 동안 사랑하는 일을 계속해서 만들고,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을 따라 책임있게 살도록 해 줍니다. 여러분은 “아버지가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하기 위하여”(눅 6:36)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경에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신 것처럼 여러분의 모든 해실이 거룩해야 합니다”(벧전 1:16). “하늘의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온전하여야 합니다”(마 5:8).


 만약 “우리가 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히 2:1), 이러한 가정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이다라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즉,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설령 우리의 양심이 우리를 정죄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더욱 굳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양심보다 더 크시기 때문입니다”(요일 3:19-20).


여러분이 이 말씀을 묵상해본 적이 있으시다면, 그때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감정에 대하여 의문을 가졌을 것입니다. 마치 다른 사람들에게 조사받는 그런 분위기보다는 오히려 바로 그 순간만이라도 홀로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인가 아닌가를 알고자 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세례를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지금 여러분이 서 있는 상태에서 과연 여러분은 누구인가 하는데 있습니다.



여러분을 양자로 삼으신 영이 여러분 마음 가운데 존재합니까? 여러분 마음속 깊이 이 질문을 던져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이 세례를 받았는가를 물어보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거룩한 성령께서 지금 살아계셔서 여러분 마음 가운데 계시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말씀하시기를, “만일 내가 율법을 행한다면, 할례가 유익하다. 그러나, 만일 율법을 범하게 된다면, 그때는 할례가 전혀 소용없는 무가치한 것이 되고 마느니라”(롬 2:25)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다음과 같이 보다 진지한 질문을 던져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영, 영광의 영이 지금 당신 가운데 거하고 있습니까?”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도 여러분이 한 때 세례를 받았다고 하여 지금도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이다라는 결론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세례받은 탐욕자도 보고, 세례받은 주정꾼들도 보지 않습니까? 또한 세례받은 이들 중에 거짓말쟁이, 말썽꾸러기, 호색한, 도둑, 강도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저에게 이 모든 사람들이 진정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도 이런 사람들이 행하는 악한 일들에 대해서 심히 질책하였습니다. “너희 아버지는 마귀로구나! 그래서 너희는 너희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려고 하는구나!”(요 8:44). 또한 예수님은 그들이 받은 하례에 의존하려고 하는 자들을 심히 책망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를 스스로가 악한데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마 12:34).


만일 여러분이 거듭나지 않는다면, 심판의 자리에서 여러분에 대한 판결이 어떻게 구별할 수 있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죄와 허물로 인해 죽어 있는 데 말입니까?”(엡 2:1). 여러분이 만약 중생할 가능성이 없다면, 여러분은 아무런 희망도 없고, 절망에 짓눌린 채 어둠에 내어 맡겨지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혹 어떤 사람이 너무 갑작스럽게 말하는 것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맞습니다. 저 아말렉 사람들을 칩시다. 그래서 죄인들을 진멸하도록 합시다. 기브온 사람들도 남김없이 죽입시다. 그들을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까?”(삼상  15:17-20, 삼하 21:1-9).


만일 하나님의 공의만이 역사한다고 하면, 우리는 모두 그런 슬픈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럴 거시고, 여러분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받을 만한 가치도 없는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그 자비하심 때문에, 우리는 지금 지옥의 어둠 속에 있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이 “아니오. 나는 전에 세례를 받았습니다”라고 자부한다면, 우리는 여러분이 지금 당장 세례받은 증거를 보여주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중심을 아십니다. 여러분은 사람 들 앞에서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미움을 받는 것이 되는 줄 모른단 망입니까?”(눅 16:15).

세례의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이 땅의 성도 여러분! 지금 당장 일어나서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중에 누가 이 땅에서 살 자격도 없는 사람들에게, 간음한 자들이나 살인자 자들, 그리고 불쌍한 사람들을 향하여 맨 처음 돌을 던질 준비 가 되어 있습니까? 여러분은 사도 요한이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요일 3:15)라고 말했을 때나, 혹은 예수님께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으니라”(마 5:28)과 말씀하셨을 때, 과연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먼저 배우는 게 낫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거짓되고 신실하지 못한 존재가 된다면, 이 세상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이 어째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지”(약 4:4)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시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요 3:3). 직 우리가 세례에 의해서 거듭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상한 갈대가 그것을 의지하는 자의 손을 찔러 들어가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사 36:6). 설령 여러분이 세례를 통해 단번에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은 그것이 여러분 자신의 만족을 위한 세례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거듭나야 한다는 사실이 명백하다면, 우리는 이런 저런 말로 구차하게 변명하지 맙시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자녀를 구별하는 증거들, 즉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에 관해 들어 왔습니다.


여러분이 세례를 받았든지, 안 받았든지 이러한 증거들을 아직까지 소유하지 못하고 계신분이 있다면, 여러분의 영혼은 그것들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만일 그것들 없이는 여러분의 영혼은 상실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중에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서도 계속해서 유혹에 빠진 분이 계시다면, 다시 한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요 1: 12)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잃었던 양자의 영을 다시 받게 되면, 여러분은 그 영을 통해 “아바, 아버지”(롬 8:15)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주 예수여! 지금 이 시간에 당신의 임재를 간절히 기다리며 마음속에 준비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시금 양자의 영을 받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그들이 지금 당신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여!”라고 외칠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각 사람마다 다시 한번 당신의 긍휼을 힘입어 그 이름을 믿을 힘을 주사,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소서!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케 되었으며, 그의 흘리신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용서되어졌음”(엡 1:7)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죄를 이기느니라”(요일 3:9)는 당신의 약속을 믿고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우리들 모두 이제 “거듭난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 1: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리스도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요일 3:3)라는 사실을 명심하게 하소서. 사랑과 영광의 영이 당신의 아들과 딸들인 우리들 각 사람에게 임하여 주사,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우리들 자신을 깨끗케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거룩함을 온전히 이룰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고후 7:1).

 


느낀 점

* 구원에 관한 성경말씀을 자세히 들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 구원에 관한 성경을 들을 때 그것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과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이 있다.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은 말씀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 자기식대로 구원받았고 믿고 뒤로 넘어져 부러지고 걸리며 결국 마귀에게 잡히고 만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로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잡히게 하시리라"(사 28:13).


그러나 구원에 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목소리를 듣는다.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사 28:23).

구원을 소망하는 택자는 성경을 죽기살기로 상고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고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있는 말씀을 통해 구원의 길을 열심히 찾아간다.


* 거듭난 자는 양자의 영을 받은 자이다. 양자의 영을 가진다는 말은 믿음과 소망을 사랑을 소유하게 된다.

* 『거룩한 구원』p.298)에서는 양자의 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양자와 연합은 거듭남과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⑴ 양자 : 성령님은 양자(養子)의 영이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으면 그 즉시 우리는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자유와 담대함을 누리게 된다. 우리는 더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다는 죄책에 시달리지 않는다.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에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양자의 영이 임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사랑의 감정을 가지게 되고,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고자 하는 자발적인 마음이 생긴다. 그리고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든 특권과 혜택들을 누리며 살게 된다. 


* 『거룩한 구원』에서 신앙 위인들은 양자의 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피니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양자의 영을 주실 때 하나님을 아버지로 느끼게 된다고 했다.(p.204)

에드워즈도 거듭난 사람은 양자의 영으로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분명히 느끼게 된다고 했다.(p.204)

윗필드는 아직 양자의 영이 주어지지 않은 자는 양자의 영이 거하심을 느낄 때까지 기도하라고 강조했다.(p.205)

웨슬리는 성령의 증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령의 증거는 영혼에 주어지는 내적 인상을 가리키는데, 하나님의 영이 나의 영에게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고 나의 모든 죄는 도말되었으니 나도, 아니 나까지도 하나님께 화목되었다.’라고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증거하시는 것입니다.(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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