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

혼인 예복에 관하여

천국 도서관장 2009. 11. 4. 03:33

이 설교는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심오하게 설명하고 있다(이 설교는 1790년 선포되었다. 웨슬리 목사님이 서거하기 1년 전에 전파된 설교이기에 매우 함축적이면서도 깊이가 있다). 칭의와 성화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것이 이 설교의 핵심내용이다. 칭의는 단순히 믿음에 의한 의로움이 아니다. 이 칭의는 성화와 함께 나타난다(병렬 관계이다).

단순한 믿음으로 칭의를 얻어 구원받다는 주장에 대한 위험성 때문에, 웨슬리 목사님은 칭의가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즉, 예수님으로 인해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고(칭의), 거룩하게 되어(성화)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성화가 나타나지 않은 칭의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혼인 예복’란 그리스도의 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이 모두 포함된 예복이다. 단지 ‘그리스도의 의’라고만 하면 그것은 부분적일 뿐 전체적인 의미를 놓치게 되며, 자칫 잘못하면 율법폐기론자가 될 수도 있다.

한편, 칭의와 함께 나타나는 거룩에 대해서도 많은 오해가 있었다. 이 거룩은 우상숭배나 박해의 영, 성지 순례와 같은 것, 또는 봉사, 희생 등 과 같은 인간적인 열심으로 사단은 오해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거룩이 아니다. 이 칭의에 포함된 거룩함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갈 5:6).  따라서 사랑에 의해 나타나는 거룩함은 온유, 절제, 겸손, 오래참음과 열매들이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이웃을 사랑하는 성품이라고 할 수 있다.


혼인 예복에 관하여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마 22:12).


1. 이 앞선 구절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중략)...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2. 이 비유를 대부분의 칭송받는 설교자들은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아 놓았습니다.

 

"이 비유의 목적은 복음을 전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기 위해서이다. 은혜의 자리에 오라고 하나님께서는 예언자와 사도들을 보내어 주셨다." 등등. "너는 왜 예복을 여기에 예복을 입고 오지 않았느냐?"는 이렇게 보아야 한다. 그들을 처벌하는 것은 우리를 낙심시키기 위해서이거나, 그 거룩한 의식에 우리가 등을 돌리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비유의 어디에서도 그렇게 추론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의식은 결혼식과 세례식 이상이 아니므로, 그런 해석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의식 가운데서 나오는 "잔치"라는 말 외에는 더 이상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3. 그러나 대부분 영국 주석가들은 버킷 씨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역시 그들의 수 천 명의 독자들도 그런 실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히 잘못된 해석입니다. 그들의 해석은 이 말씀의 실체의 그림자에도 접근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도 습관적으로나 적어도, 현재 그렇지는 못해도,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지키려는 확고한 목표와 그의 모든 약속들을 받기 위한 신실한 소망이 없다면, 주님의 식탁에 나아가지 않으리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비록 성경의 다른 많은 구절에 이런 말씀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 구절로부터 이와 같은 의무를 유추할 수는 없습니다. 더 이상, 유약한 양심을 가진 어떤 사람을 꾀어내어, "이것을 행하며 나를 기억하라(고전 11:24)"하신 우리 주님의 단 하나의 계명의 말씀을 그 이상으로 확대해서 기회 있을 때마다 전할 필요는 없습니다.


4. 그런데 주님의 잔치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 어떤 준비라도 해야 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이 비유에서 말한 "혼인 예복"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전혀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의 기념식(성찬식)은 그렇게 하라고 제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구름 타고 다실 주님께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때 우리 주님의 수단proceedings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만드실 때부터, 그들을 위해 준비해 두신 왕국”을 그들이 상속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자격과 관계있는 것입니다.


5. 수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전적으로 이 비유를 이런 식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확신하고, 여기에서 언급된 혼인 예복은 '주님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아니라, '천국의 자격'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 예복을 단지, "그리스도의 의로우심"라고 해석했습니다. 이것만이 어떤 사람이라도 주님의 날에, 그곳에 설 수 있는 의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그때 누가 감히 위대한 주님의 앞으로 나아가, 그의 사랑스러운 아들의 의로우심 안에서 구원받게 됩니까? 그때 우리는 적어도, 전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우리보다 더 나은 의를 가질 필요성을 발견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의로움 외에 어떤 다른 의가 있을 수 있습니까?” 경건하고 지혜로운 고(故) 허베이 씨도 이에 관해서 광범위하게 설명했습니다. 특별히 그의 역작 <데론과 아스파시오의 대화>에서 설명했습니다.


6. 내가 현재 주님 안에서 신뢰하는 또 다른 훌륭한 작가도 바울의 로마서 주석의 서문에서 그와 같은 취지로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확실히 우리의 것보다 더 나은 의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심판 날에 주님의 법정에 서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그 표현이 이해가 안 됩니다. 그것이 성경적입니까? 구약이나 신약 어디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습니까? 나는 그것이 별 의미가 없으며 비 성경적이고 억지스러운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해석에는 명확한 의미가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웨슬리 목사님은 그 마지막 날에 누구의 의로 하나님 앞에 서겠습니까?”라는 이상하고 다소 거친 질문의 의미가, 누구 때문에whose sake, 누구의 공적으로, 목사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로 들어갈 것이라고 기대합니까?라는 의미라면 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모든 믿는 사람은 그의 공적으로만 구원받게 됩니다. 즉, 그의 공적으로 의롭게 되고(죄책에서 구원받고), 성화되어(죄의 속성으로부터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7.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 더 말하기 위해 시간을 할애할 가치가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표현보다 더 난해한 표현을 고안해내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어떤 의로 우리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가?” 왜 여러분은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하지 않습니까? “누구 때문에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 어떤 순박한 농부라도 그 즉시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호하고, 애매한 모든 표현들은 단지 그 원인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경솔한 청중들을 율법폐기론으로 빠지게 합니다.


8. "혼례 예복"과 비슷한 표현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19장 8절에서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라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주장하기를,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정말 이 구절이 그렇게 해석된다면 어떻게 요한계시록 19장"세마포를 입는 백성"요한계시록 7장에 나오는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흰 옷을 입은 백성"과 일치시킬 수 있습니까?

 

그들은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이 씻기어 그리스도의 보혈로 희게 되었던 것이 아닙니까?”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런 율법폐기론자의 횡설수설을 멀리하십시오! 성도들의 바로 그 의는 보혈의 피로부터 나왔기에, 하나님께서 그 자체로 귀하게 여기시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까?


9. 요한계시록 19장 9절 말씀에서 나온 “어린 양의 혼인 잔치”는 마태복음의 “혼인 잔치” 비유와 매우 유사합니다. 이 표현과, 마태복음에 나온 혼인 잔치 비유는 거의 비슷합니다. 그러나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거기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비유에 나온 잔치는 이 세상에서 투쟁하는 교회에 속하며, 요한계시록에 나온 교회는 승리한 교회에 속합니다. 전자는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말하고, 후자는 하늘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따라서, 전자에서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는 사람이 발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자에서는 그러한 사람이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각 나라와, 방언과 민족과 나라에서 온 셀 수도 없는 수많은 사람 중에 한명도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 안에서 “왕이자 제사장이며, 그와 함께 영원히 다스릴 것입니다.”  


10. 요한계시록의 “성도들의 의”라는 표현은, 마태복음의 비유에서 나온 “혼례 예복”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닙니까? 성도의 의란, “거룩함이 없이는 주를 보지 못한다”라는 말씀에 나온 거룩함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의는 거룩함에 참예하는 어떤 영혼에게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와 마찬가지로 개별적인 거룩 또한, 모든 자녀들에게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의와 성도의 의 사이에는 다른 면이 필연적으로 있다는 것을 분명히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자는 우리에게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반드시 부여합니다. 후자는 우리가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합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없다면 우리는 천국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거룩이 없이는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적합할 수 없습니다. 전자에 의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 하나님의 자녀, 천국의 후사가 됩니다. 후자에 의해, 우리는 영광 안에서 성도의 유산 상속자로 합류하게 됩니다.


11. 이로부터 인자는 이 중요한 진리를 그의 자녀에게 전달합니다.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모든 사람은 어둠으로 던져집니다.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게 됩니다. 영혼의 적은 이런 진리를 모호하게 만들기  위해 힘쓰고 있으며, 그 결과 사람들은 평생 동안 계속해서 미망에 빠져 죽음을 구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방식으로 사단은 우리가 거룩하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위장합니다. 이 기독교 세상에서 조차, 얼마나 많은 것들이 감추어져 왔습니까! 몇몇 방식은 전혀 거룩과 관계없거나 관련이 없습니다. 오히려 무익하고 하찮은 것들입니다. 다른 것들은 거룩의 일부분으로 간주되지만,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이 사단의 궤계에 무지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것들 중 몇몇의 것들을 열거하는 것이 유용할 것입니다.


12. 거룩과는 정반대됨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의 거룩이라고 묘사된 첫 번째 부류는, 우상숭배입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이것은 다양한 모양으로 가르쳐져 왔고, 지금까지 거룩에 있어 본질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대부분의 크리스천의 교회에서 지금도 통용되고 있습니까! 그런 우상 중 어떤 것들은 은과 금 또는 나무나 돌에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행 17:29)들입니다. 또 어떤 우상들은 그들 자신과 성정이 같은 사람들, 즉 특별히 우리 주의 사도들과 동정녀 마리아입니다. 이런 우상 외에 그들은 그들이 만들어낸 수많은 성인들을 추가하며, 적지 않은 수의 천사들도 추가합니다.


13. 진실된 신앙의 전체적인 취지와 직접적인 반대되는 또 다른 것이 수많은 크리스천의 교회에서 열심히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박해의 영입니다. 형제들을 박해하여 죽이기까지 합니다.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하기 위해서, 크리스천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의해 이 땅은 종종 피로 뒤덮여왔습니다. 심지어 로마교회에 이 끔찍한 교리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지금 그것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콘스탄틴 회의에서 그것을 가결하고 여러 세대동안 성도를 박해온 것만큼, 로마 교회의 수장이 공개적이고 명백히 마귀의 그 치명적인 교리를 포기했습니까? 여전이 그들이 박해를 하고 있기에,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이 보는 앞에서, 처참하게 살해당한 프라하의 제롬의 피와 수 천 명의 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14. 여러분은 "이것은 우리 개신교 일이 아니다"라고 말하려 합니까?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박해의 영을 혐오합니다. 우리는 모든 이성적인 피조물은 하나님을 경배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진리로서 확신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 원리에 진실합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불과 장작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박해하여 피 흘리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나라의 법이 이것을 허락하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영국에서 가정의 핍박과 같은 것이 발견되지 않습니까? 그 자신의 양심에 따르면 가족의 누구에게 한 어떤 불친절한 말이나 행동은 일종의 핍박입니다. 현재, 우리는 이것에 완전히 깨끗합니까? 이런 의미에서 아내를 핍박한 남편이 없습니까? 그녀의 양심에 따라서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하여 아내에게 불친절한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식으로 어떤 부모도 그들의 자녀를 핍박하지 않았습니까? 주인이나 여주인이 그들의 하인을 핍박하지 않았습니까? 만약 이와 같이 핍박을 하고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라고 한다면, 로마 가톨릭에게 먼저 돌을 던져서는 안 됩니다.


15.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구원의 필수적인 것이라고 주장될 때,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어리석은 부류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하찮은 것을 구원에 있어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작은 죄가 아닙니다. 그와 같은 것들은 순례의 길을 떠나거나, 성경에서 공개적으로 요구한 것이 아닌 어떤 것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 중에서 몇몇 것들을  틀림없이 정설, 또는 올바른 주장이라고 평가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신앙에 있어 잘못된 주장은 당연히 잘못된 기질이나 행동을 유발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본래적인 의무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은 악마처럼 정확하게 판단을 하지만 그와 같이 사악합니다.


16. 단지 어떤 것의 일부분으로 이루어 진 것을 거룩이라고 상상하는 사람들은 더욱더 변명을 합니다. (즉, 그것이 나머지 부분과 관계가 되어 있을 때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전체의 일부분이 전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전혀 해가 아니라고 추측합니다. 이 얼마나 비상식적입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거룩과 무해함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기둥만큼 해가 없다고 해도, 하늘과 땅만큼 거룩과 관계가 없을 수 있습니다. 남을 속이지 않고, 남에게 잘못을 범하지 않고, 모든 거래를 정확하게 하며, 모든 사람에게 그 자신의 것을 지불하는 사람을 정직한 사람이라고 틀림없이 가정할 수 있습니다.

이제, 확실히 정직하고, 자기의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제공하고, 남을 속이지 않고, 남에게 잘못하지 않고, 남을 해치지 않은 않으며, 모든 거래에 있어 정직한 한 남자가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모든 말과 행동에 있어 한결같이 겸손하고 고결한 한 여자가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전자와 후자가 지속적으로 도덕적으로, 즉 의롭게, 자비롭게, 진실되게 행동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 모든 것이 매우 선한 것일지라도, 이 모든 것은 크리스천의 거룩의 일 부분일 뿐입니다. 어떤 일에 있어서도 아주 선하게 행동하는 친절한 성품의 한 사람을 가정해 보십시오. 그는 굶주린 자를 먹여주고, 헐벗은 자를 입혀주고, 나그네와 병자와 죄수를 구제해 줍니다. 그는 수많은 영혼을 죽음으로부터 구해줍니다. 그러나 거룩함이 없이는 주를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거룩함에 있어 크게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17. 천국에 갈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인, 진실한 “혼인 예복”의 거룩함은 무엇입니까? (즉,  그것이 이교도에서는 무엇이든지 간에 크리스천의 법령에 따르면,)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 6).


먼저 이것은 하나님의 힘으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사랑으로 역사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으로 모든 거룩과 하늘의 기질이 나타납니다. 특별히 겸손과 온유, 부드러움, 절제, 그리고 오래참음으로 나타납니다. "크리스천의 의무에 참예하는" 할례자나. "이방의 도덕에 충실한" 무할례자가 아니라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거룩한 자입니다. 특별히 그들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거룩은 “주와 마음을 합하여” “주와 같이 걷는”것입니다.


18. 지난 30년 동안 이에 관한 나의 판단은 어떤 중요한 변화도 없었습니다. 단지 15년 전에 나는 분명히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된다는 생각이 전보다 더 분명해 졌습니다. 그 이후 나는 결코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똑똑한 사람은 내가 천 번이나 변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것을 그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지금 나는 죽음의 가장자리에 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여전히 나는 같은 고백을 증거합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내가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선언하기 시작했을 때, “거룩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라고 내거 전에 주장했던 것을 취소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 구절은 다른 구절과 잘 일치합니다. 전자(믿음으로 받는 구원)의 의미는 분명히 이런 말씀입니다. 믿음에 의해 우리는 죄로부터 구원받고 거룩해진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거룩의 지위를 박탈한다는 망상은 율법폐기론의 핵심적인 사상입니다. 


19. 지금까지 말한 내용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의 사람은 기꺼이 그가 만든 영혼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그들에게 구원의 약속과 함께 말씀으로 선포하신 것으로서, 사랑의 아들을 계시해 주셨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그를 믿은 사람들에게 주어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도태로부터 천국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강제로 그것을 받아들이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그들 스스로 분별하도록 그들의 손에 복음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보아라. 나는 너희들에게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놓았다. 생명을 선택하면 살 것이다.” 내가 은혜로 준 거룩을 선택하라. 이것이 영생의 유일한 길이다. 주님께서는 부르짖고 계십니다. "거룩하라, 평안하라. 이생에서와 앞으로 올 내세에서도 평안하라. 거룩은 그의 집에 영원하리라." 이것이 “어린 양의 혼인 잔치”로 초대받은 모든 사람을 위한 혼인 예복입니다. 이것을 입으면, 벌거벗은 사람으로 발견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옷을 씻고 어린양의 피로 희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날에 혼인 예복 없이 나타난 모든 사람들에게 심판자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마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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