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의 편지>를 구입했는데 주옥과 같은 글들이 많아서 읽는 내내 마음에 기쁨이 가득찼다. 그 중에서 당시(1650년 대, 프랑스) 교회에 대한 그의 한탄을 담은 내용이 있는데, 지금도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 같아 인용해본다.
* 초기 기독교인과 오늘의 기독교인의 비교
1229사본의 제목: 오늘의 기독교인의 교육 부족과 나태의 원인은 무엇인가?
페리에 사본의 제목: 옛날에는 교회에 어떻게 입교했고 교회 안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그리고 오늘날에는 어떻게 입교하고 생활하는지에 대한 고찰.
1. 교회가 세워진 초기에는 구원에 필요한 모든 문제에 있어서 완벽한 지식을 갖춘 사람들만이 있었다. 반면에 오늘날에는 너무나 엄청난 무지를 볼 수 있어, 교회에 대해 애정의 감정으로 차 있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한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초기에는 많은 노력과 오랜 열망을 거친 후에야 교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정성도 노력도 없이 들어간다.
그 당시는 아주 엄격한 시험을 거친 후에야 교회에 받아들여졌다. 지금은 시험을 받을 상태가 되기도 전에 받아들여진다.
그 당시는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세상과 육체와 악을 버린 후에야 교회에 받아들여졌다. 지금은 그런 일은 어떤 것도 할 상태가 되기 전에 받아들여진다.
마지막으로, 초기에는 교회에 받아들여지 위해서는 세상에서 떠나야 했는데 반해, 오늘날에는 교회와 세상에 동시에 발을 붙이고 있다. 이와 같이 하여 당시는 세상과 교회의 본질적인 차이를 알고 있었다.
당시에는 교회와 세상은 두 개의 적대적인 것,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두 적으로 생각되었으며, 그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부단히 박해하되 약해 보이는 쪽이 언젠가는 강한 쪽을 이기리라고 생각되어서, 그 두 반대되는 것에서 사람들은 한쪽을 버리고 다른 쪽에 들어갔던 것이다. 사람들은 한쪽의 원리를 버리고 다른 쪽의 원리를 받아들였으며, 한쪽의 감정을 벗어버리고 다른 쪽의 감정을 덧입었다.
2. 사람들은 그들이 제1의 탄생을 받았던 세상을 떠나고 포기하고 청산한 후 전적으로 교회에 몸을 바쳤으며, 이 교회에서 말하자면 제2의 탄생을 얻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그들은 세상과 교회 사이에 무서울 만큼 큰 차이를 머리에 그리고 있었다.
3. 반면, 오늘의 사람들은 거의 같은 순간에 세상에도 교회에도 있으며, 우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바로 그 순간 이 교회에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 결과, 그 후에 나타나는 이성은 이렇게 반대되는 두 상태, 두 탄생을 구별하지 못한다. 이성은 세상과 교회에서 동시에 커가는 것이다. 성사에도 나가도 동시에 세상의 쾌락도 즐긴다.
5. 그 결과, 초대 기독교인들 사이에는 훌륭한 지식을 갖춘 사람들만을 볼 수 있었는데 반해,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소름 끼칠 정도로 무서운 무지 속에 놓여 있다.
7. 초대 교회에서는 세례 지망자들에게 세례를 주기 전에 먼저 그들을 가르쳤으며, 그들이 기독교의 신비를 완전히 알고 그들의 삶을 회개하며 그들이 이제 영원히 따르려고 하는 신앙 고백과 기독교의 가르침의 위대함과 탁월함을 충분히 깨달아 참된 회심의 뚜렷한 표징을 보이고, 또 세례를 받고자 하는 지극한 열망을 나타낸 후에야 그들을 교회에 받아들였다.
이 사실들이 교회 전체에 알려지고 나서야 그들은 교회와 한 몸이 되는 성사를 받았으며, 이로써 교회 내에서 새로 태어나 교회의 일원이 되었던 것이다.
반면, 요즘에는 세례가 무척 중요한 몇몇 이유 때문에 철이 들기 전에 아이들에 주어지므로, 때로 부모들이 등한히 한 탓에 기독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종교의 위대함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사이 나이 들어가는 경우를 본다.
8. 종교 교육이 세례에 앞서 의무적이었던 그 당시는 모든 입교자가 필요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세례를 교육에 앞서 받는 지금 그 교육은 필요불가결한 것이 아니라 자의적인 것이 되어버렸고, 뒤이어 등한해지더니 마침내는 거의 폐지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상태가 된 진정한 이유는, 세례의 필요성은 납득하되 교육의 필요성은 납득하지 않은 데에 있다. 그럼으로써 초기에 교육이 세례 전에 있었을 때는 세례의 필요성이 필연적으로 교육을 거치지 않을 수 없게 한 반면, 오늘날에는 세례가 교육 전에 있으므로, 즉 교육을 받지 않고 기독교인으로 태어났으므로 계속 교육을 받지 않고 기독교인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9. 초대 기독교인들이, 교회가 그들의 오랜 기구(祈求)를 받은 후에야 베풀어주는 은총에 대해 교회에 한없는 감사를 느낀 데 반해,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다정한 어머니 교회가 그들이 요구할 상태에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베풀어주는 그 동일한 은총에 대해 엄청난 망은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초대 기독교인들 사이에 극히 드물게라도 더러 있었던 타락을 교회가 그토록 미워했다면, 오늘의 기독교인들의 끊임없이 거듭되는 타락을 보면 얼마나 가증스럽게 여기겠는가. 게다가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제1의 탄생에 처했던 영벌의 상태에서 그들을 교회가 더 빨리, 그리고 더 관대히 구해주었으므로 교회에 대해 훨씬 더 많은 빚을 지고 있었는데 말이다.
10. 교회는 그의 은총 가운데서도 가장 큰 은총이 악용됨을 보고, 또 그가 그들의 구원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한 일이 바로 그들의 멸망을 불어오는 거의 확실한 게기가 됨을 보고 한탄을 금치 못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례의 관습을 바꾸었지만 정신을 바꾸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11.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그 은총을 교회의 의도와는 너무나도 반대되는 방향으로 상요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생각할 때 소름 끼치는 두려움을 금할 수 없다. 사람들은 이제 그처럼 그 은혜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전혀 바란 적도 없고 구한 적도 없고 심지어는 그것을 받았다는 사실마저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2. 이렇게 해서, 초기에는 세례에 의해 다시 태어나 세상의 악덕을 버리고 교회의 신앙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거기서 다시 세상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던 데 반해, 오늘날에는 세상의 악덕이 기독교인들의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것보다 더 흔한 일은 없다.
그래서 지금 성도들의 교회는 악한 자들이 섞여 듦으로써 온통 더럽혀지고 말았으며, 교회가 잉태하고 어린 시절부터 품안에 안아 기른 그의 아이들은 그의 심장 속에서, 즉 그의 가장 존엄한 신비에 참여하는 데 있어서까지 그의 적들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적, 세상의 마음, 야심, 복수심, 흑심, 탐욕심을 마음속에 품은 자들이 되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그 자신의 아이들에 대한 사랑으로 그의 가장 잔인한 박해자들을 가장 깊은 내부에까지 받아들인 것이다........
13. 그러나 그토록 유익한 규율을 변화시킴으로써 야기된 불행해 대해 그 책임을 교회에 돌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비록 교회가 세례를 주는 방식을 바꾸었을지라도 그 정신을 바꾸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세례의 연기가 수많은 아이들을 아담의 전주 속에 버려두게 함을 보고, 교회는 그들에게 줄 도움을 빨리 줌으로써 그들을 멸망의 무리로부터 구원해주려고 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좋은 어머니는, 이제 그의 아이들의 구원을 위해 자기가 해준 일이 어른들의 타락의 계기가 됨을 보고 다만 더할 나위 없는 회한을 느낄 뿐이다.
교회의 진정한 뜻은 교회가 그처럼 어린 나이에 세상의 오염에서 구해낸 어린이들이 세상의 생각과는 전적으로 반대되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타락한 이성이 그들을 빠뜨릴지로 모를 악덕을 미리 막기 위해 이성이 사용되기 전에 선수를 친다.
즉 교회는 그들의 정신이 활동하기 전에 그 자신의 정신으로 그들을 채우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세상을 아주 모르는 가운데, 그리고 세상을 모르는 만큼 더욱 악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생활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14. 이것은 세례의 의식 자체로도 나타난다. 교회는 아이들이 대부, 대모의 입을 통해, 세례를 바로고 하나님을 믿으며 세상과 사탄을 버린다는 것을 선언한 후에야 비로소 그들에게 세례를 준다. 그리고 교회는 그들이 이 마음을 그 후 일생 동안 지니기를 바라므로 그들에게 이 마음을 추호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간직하라고 각별히 명하고, 또 대부, 대모에게도 이 모든 일에 대해 아이들을 잘 가르치라고 엄한 계율로써 명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어린 시절부터 그의 품안에서 키운 이들이 옛날 그의 신도로 받아들인 어른들보다 덜 배우고 덜 열성적이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가 키우는 아이들에게나,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나 똑같은 완전성을 바란다.
15. 이와 같이 교회가 어릴 때부터 교회의 가족으로 신앙 가운데 키워온 이드에게나 이제 교회의 가족이 되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나 똑같은 열성을 요구한다는 것이 명백하다면 세례 받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예를 눈앞에 놓고, 그들의 열성, 신앙심, 세상에 대한 혐오, 세상과의 고결한 단절을 가늠해야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그러한 마음가짐이 없어서 세례 받기를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자신 안에 이 마음가짐이 없는 사람들은.......
16. 따라서 오늘날의 기독교인들도 교회의 공동체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이미 받았어야 할 필요한 교육을 받는 데 스스로 동의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참회에 동의해야 하고, 또 죄의 타락한 쾌락을 누리는 데 매혹을 느꼈던 거처럼 이제는 엄격한 고행을 혐오하는 마음을 억제해야 하는 것이다.
......
그들에게 배우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하려면 여러 시대에 시행된 관습의 차이를 그들에게 이해시켜야 한다.
새로 태어나는 교회에서는 세례 지망자들과, 다시 말해 세례 받기를 원한 사람들을 세례 주기 전에 가르쳤다. 그들에게 종교의 신비에 대해 충분히 가르친 다음, 그들이 자신들의 지난날을 회개한 다음, 또 그들이 영원토록 들어가기를 바라는 신앙의 고백과 기독교 교훈의 위대함을 알고 난 다음, 그리고 또 마음의 진정한 회심에 명백한 표시가 있고 세례에 대한 강한 욕구가 있은 다음에야 비로소 그들이 세례 받는 것을 허락했던 것이다.
이 일들이 전 교회에 알려졌을 때 그들은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는 합체의 성사를 받았다. 그들의 열성과 신앙심, 그리고 세상에 대한 혐오와 세상의 모든 사치에 대한 고결한 포기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옛 선인들이 그러한 마음가짐 없이는 세례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판단했다면, 세례를 받은 후 그러한 마음가짐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그처럼 고결한 감정을 마음속에 키우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여생 동안 구원을 위해 금욕할 것에 스스로 동의하며, 악의 타락한 탐닉에 매혹을 느끼기보다는 십자가의 삶에 대한 혐오를 덜 느끼는 게 올바른 일이 아니겠는가......
<파스칼의 편지>, 블레즈 파스칼, pp.270-280, 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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