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 설교 2(John Wesley Sermon 45)
신생 (The New Birth)
번역 : 김시완
“당신은 거듭나야 한다.” (요 3 : 7 - You must be born again.)
1. 기독교 교리 중 가장 기초적인 것 두 가지를 고르라면 주저없이 칭의와 신생의 교리를 택하게 될 것이다. 칭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역사하여 우리 죄를 사하는 주는 것이요, 신생은 우리 안에 하나님이 역사하는 것으로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시간적으로 먼저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은총으로 의롭다함 받고,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됨으로 우리는 성령으로 나게 된다. 그러나 생각의 작용 순서로 보면 칭의가 신생보다 먼저라고 하겠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진노가 거두어짐을 인식하게 되고 그 다음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에 역사하는 것을 인식한다.
2. 칭의와 신생이라는 기초적인 교리를 철저하게 이해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자식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칭의의 중요성은 일찍이 인식되었다. 그래서 많은 위인들이 성경의 구절구절을 파헤치고 관련 쟁점을 일일이 설명하면서 광범위한 논의를 저술로 남겼다. 신생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논의와 저술은 많아도 그 중 비교적 괜찮은 것은 드물다. 대부분 그 명료함이나 논의의 깊이나 정확성 면에서 미흡한 수준이다. 애매하고 난해한 설명에 그치거나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고 말았다. 그러니 신생에 대한 명료하고 제대로 된 설명을 지금 또 해야 할 형편이다.
다음 세 가지 질문을 충족시키는 답을 찾아보자. 첫째, 우리는 왜 다시 태어나야 하는가? 즉 신생의 교리의 기초(배경)는 무엇인가? 둘째, 어떻게 다시 태어나야 하는가? 즉 신생의 본질은 무엇인가? 셋째, 무슨 이유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가? 신생이 어떤 목적 때문에 꼭 필요한 일인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런 질문에 대해 간략하고 평이하게 답하겠다. 그런 다음 이와 연관된 몇 가지 내용을 추론하도록 하겠다.
1. 1 첫째, 왜 우리는 다시 태어나야 하는가? 이 교리의 기초(배경)는 무엇인가? 그 배경은 창세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성경의 관련 설명을 보자.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 중략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창 1 : 26 - 27) 하나님의 자연적 형상, 곧 하나님 자신의 불멸성뿐만 아니라 영적인 존재로 인간을 만든 것이다. 즉 통찰력과 의지적 자유, 다양한 감정적 정서를 지닌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통치자적(정치적) 형상도 지니게 했으니 이는 이 낮은 세상의 통치자로 삼아 “이 땅 위의 모든 것과 바다의 물고기들을 지배할 권세”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형상 중 가장 주된 것은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이다. 사도 바울의 말에 따르면 “의와 진리의 거룩함”(엡 4 : 24)으로 지은 바 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을 당시 인간은 사랑으로 충만했다. 사랑이 창조된 인간이 지닌 기질과 사상과 말과 행동의 유일한 원칙이었다. 하나님은 공의와 긍휼과 진리로 충만하시다. 그래서 조물주의 손에서 인간이 나왔을 때 인간 또한 그러했다. 하나님은 흠 없이 순결하시다. 태초에는 인간 또한 죄악의 흠이 전혀 없었다. 만약 그 인간에게 흠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자기 손의 모든 일들을 이루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 : 31) 라고 선언할 수 없었을 것이다. 태초의 인간이 죄로부터 순결하지 않았다면 또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충만하지 않았다면 이런 선언이 있을 수 없었다. 인간은 하나님과 직접 교통했다. 만약 우리 인간이 지성은 있으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피조물이요 또 의롭지도 거룩하지 않은 피조물이라고 가정한다면 “심히 좋았더라”는커녕 그냥 “좋았다”고조차 말할 수 없다.
2. 인간은 비록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지만 그렇다고 고정된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시험의 상태에 두었다. 따라서 인간은 충분히 설 수 있도록 창조되었지만 넘어지기도 쉬웠다. 이 사실을 하나님이 친히 인간에게 알려주고 넘어지지 않도록 엄중한 경고를 했다. 그럼에도 인간은 존귀에 거하지 못했다. 자신의 고귀한 상태에서 타락했다. 그는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과일을 먹었다.” 자기를 창조하신 분에 대한 이런 고의적인 불순종 행위로 말미암아, 즉 그 분 주권에 대한 이런 명백한 반란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공개적으로 하나님은 더 이상 자기를 통치하는 분이 아니라고 선언한 셈이 되었다.
이제 자기를 지으신 분의 의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의지에 따르겠다는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찾지 않고 이 세상에서 자기 손으로 이룬 일에서 행복을 찾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작에 “이 열매를 먹는 날에 정녕 죽으리라” 했는데 하나님의 이 말씀은 지켜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날에 그는 죽었다. 하나님께 죽은 것이다. 그 어떤 죽음보다도 무서운 죽음이 바로 이 죽음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을 잃어버렸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원래 인간의 영적 생명은 하나님과 연합하여 있었다. 몸은 영혼과 분리될 때 죽는다. 영혼은 하나님과 분리될 때 죽는다.
아담이 금지된 과일을 먹은 날, 그 과일은 먹은 시간에 하나님과의 영적 연합이 분리되었다. 이 사실을 그는 즉각 알아차렸다. 이는 아담의 행동에 바로 나타났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영혼 속에서 사그라져버렸다.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소외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 대신 아담은 이제 노예적인 두려움의 힘에 눌리게 되었다. 그래서 아담은 하나님의 현존으로부터 도망쳤다. 그렇다. 이 순간 아담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조차 거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모두 채우고 계시는 분인데 아담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창 3 : 8) 이런 헛된 수고를 한 것이다. 이렇게 아담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랑 둘 다 잃어버렸다. 이 두 가지가 없으면 하나님의 형상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빼앗기면서 불행할 뿐만 아니라 거룩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랑이 있던 자리에 교만과 자기 의지가 들어섰으니 이것들은 바로 마귀의 형상 그 자체요, 또 감각적인 취향과 욕망이 들어왔으니 이것들은 멸망하는 짐승들의 형상이라.
3. 그런데 만약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 “아니, 그건 단지 겁주려는 거야. 그 과일을 먹으면 죽게 된다는 말은 일시적인 죽음, 육체의 죽음만을 의미하는 거야.” 이 말이 확실하다면 이건 하나님을 너무나 명백한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다. 진리의 하나님이 진리와는 정반대의 일을 적극적으로 행했다는 증언이 된다. 아담이 “금지된 과일을 먹은 그날에” 육체적으로 죽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죽기는커녕 살아 900년 이상이나 더 살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리성을 의심하지 말고 여기서 말하는 죽음을 육체적 죽음으로 이해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이 죽음은 영적인 죽음, 하나님의 생명과 형상을 상실한 것으로 이해해야 마땅하다.
4. 아담 안에서 모두 죽었다. 모든 인류, 아담의 옆구리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의 자녀들은 죽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자연적 결과는 아담을 조상으로 두고 태어난 모든 사람이 영적으로 죽은 채 이 세상에 나왔다. 하나님께 죽은 것이요, 죄악 속에 완전히 죽은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전혀 없고 하나님의 형상이 없으며, 아담이 창조될 때 지녔던 거룩함과 의가 전혀 없는 상태로 태어났다. 오히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이제 교만과 자기 의지라는 마귀의 형상을 지니고 있고, 감각적 취향과 욕망 안에 있는 짐승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신생해야 하는 배경은 바로 우리 본성의 전적인 타락인 것이다. 죄악 속에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 여자에게서 난 자마다 하나님의 영으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II. 1.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다시 태어난다 말인가? 신생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것이 두 번째 질문이다. 이 질문은 지금 그 의미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굳이 아주 미세한 문제를 파헤치려고 고심할 필요는 없다. 다만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살펴보고 마음속으로 심사숙고하여 중요한 요점을 충분히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다시 태어나야 하는지 명백히 알게 된다.
2. 다시 태어나는 방법에 대해 아주 미세하고 철학적인 설명을 기대할 필요는 없다. 우리 주님의 인도함을 따라가 보자. 오늘 본문 말씀에 뒤이어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길 명백한 자연현상이지만 그것을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이와 똑같은 이치로 성령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며, 어디서 일어나고 어디로 가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당신은 바람이 부는 것처럼 성령의 작용을 확실히 알지만 성령이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고 그 심령에 어떻게 역사하는지 당신도 설명할 수 없고, 사람의 자식 중 가장 지혜로운 자라도 설명할 수 없다.
3. 하지만 우리는 어떤 호기심 차원이나 비판 차원의 질문이나 하려고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않는다면 신생의 본질에 대해 성경적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신생에 대한 성경적 설명만으로도 충분히 합리적이고, 기독교의 목적에도 충분하다. 오직 자기 영혼의 구원만을 갈망하는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그 정도의 설명에 수긍이 갈 것이다. “거듭남”은 우리 주님이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아니다. 그 시대 이전부터 이 말은 잘 알려져 있었다. 이 용어는 구세주께서 유대인 중에 나타났을 때 유대인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용어였다. 어떤 이교도 성인이 유대교가 하나님에 관한 종교임을 확신하고 유대교에 동참하려고 할 때 할례를 받기 전에 먼저 물세례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가 물세례를 받았을 때 이 사람은 거듭났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은 이 사람이 전에는 마귀의 자녀였는데 이제 하나님의 가족으로 택함을 받아 하나님 자녀로 간주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선생인 니고데모가 이 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가 알고 있는 의미보다 더 강력한 의미이긴 하지만 이 표현을 주님께선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통상적인 의미보다 훨씬 강한 의미로 이 말을 사용하니까 니고데모는 그런 일이 어찌 가능하냐고 물으면서 다시 어미의 태속으로 들어가 태어나는 것이냐고 묻는다. 그러나 주님이 이 말을 사용했을 때 의미는 영적인 것이다. 즉 사람이 위로부터, 하나님께로, 성령으로 나야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 태어나는 방식이 마치 육신으로 태어나는 것과 아주 유사하다는 것뿐이다.
4.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아기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 그 밖의 많은 감각을 불완전하게 사용한다. 이 세상에 대한 어떤 지식도 없고 어떤 자연적 이해도 갖고 있지 못하다. 태어나기 전에 아이가 지닌 존재 방식은 생명이라 명명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태어났을 때가 되어서야 그 아이가 삶을 시작한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태어나는 순간부터 빛을 보기 시작하며 자신을 둘러싼 다양한 사물들을 보게 된다. 이때 귀가 열려 연속적으로 귀를 때리는 소리를 듣는다. 동시에 다른 모든 감각 기관들이 각기 그 대상에 따라 작용하기 시작한다. 이제 배속에 있을 때와는 완연히 다른 방식으로 숨을 쉬고 살아간다. 이런 현상은 영적으로 태어나는 조건과 너무나 유사하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지 않고 자연 상태에 있는 동안 영적인 의미로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한다. 뚫을 수 없는 두꺼운 막에 막혀 있다. 또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 꼭 들어야 할 모든 것에 완전히 귀머거리이다. 그밖에 다른 영적 감각들도 모두 잠겨 있다. 이 상태는 마치 영적 감각들을 전혀 갖지 않은 것과 동일한 상태이다. 그래서 이런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없고 하나님과의 교통함도 없고, 하나님과 전혀 친하지 않다. 이런 인간은 영적이거나 영원한 것과 같은 하나님의 것에 대한 참된 지식이 없다. 그래서 이런 인간은 살아있으나 죽은 크리스천이다.
하지만 하나님께로 나는 순간 모든 조건에서 총체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이해의 눈이(the eyes of understanding - 사도 바울식 표현) 열려 옛날에 어둠에서 빛이 비치라 명령하신 이가 그 가슴에 빛을 비추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빛과 영광스러운 사랑을 본다. 귀가 열려 내면에서 울리는 “힘을 내라, 네 죄가 사함 받았다” 또는 “가라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이것과 똑같은 말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이 그 가슴에 말씀해 주는 요지는 이와 비슷한 내용이다. 이제 그는 어떤 것이든 들을 준비가 되었다. 사람에게 지식을 가르치는 그 분은 기꺼이 자신을 때때로 계시한다. 거듭난 자는 자신의 가슴으로 우리 교회의 언어를 사용한다. 이것은 성령의 강력한 역사이다. 세상 사람들같이 세속적이고 천박한 수준에서 어리석고 고의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잘못 이해하는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거듭 말할 뿐이지만 세상 사람은 이를 곡해하여 듣는다.
그는 하나님이 그의 가슴에 역사하는 은총을 느낀다. 곧 내적으로 감지한다. 그는 수많이 이런 기쁨을 하나님 안에서 느낀다. 이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영광으로 충만한 것이다. 그는 성령으로 자기 가슴에 넓게 비춰진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다. 이제 그의 모든 영적 감각들이 살아 영적으로 좋은 것과 악한 것을 구별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이 보낸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그리고 자신의 내적 왕국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아는 지식에서 날마다 자란다. 이제 그는 온전히 살았다 말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으로 그를 속히 옮기셨으니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로 살아났다. 그는 이제 세상이 알지 못하는 삶을 산다. 이 삶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숨기운 삶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쉬지 않고 그 심령 위에 숨을 쉬고 그는 다시 하나님께로 숨을 쉰다. 은총이 그의 가슴으로 내려오고, 기도와 찬양이 천국으로 상납된다. 이렇게 일종의 영적 호흡으로 하나님과 인간간의 교통이 계속되고 성부와 성자와의 교제가 계속되는데 그 심령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한 이런 교통은 멈추지 않으며 하나님의 자녀는 계속 자라나 장성한 분량까지 그리스도의 모습에 이르게 된다.
5. 자 이제 신생의 본질이 무엇인지 분명해졌다. 신생이란 심령 속에 하나님이 역사하여 이룬 엄청난 변화다. 이 변화가 있을 때 생명을 얻었고, 죄악의 사망에서 의의 생명으로 옮긴다. 이 변화는 하나님의 전능한 영으로 그 심령 전체에 이룬 변화로 이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 의와 진리의 거룩함 안에서 새로워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 대한 사랑으로 변화되고, 교만이 겸손으로 혈기가 온순함으로 증오와 시기와 악독함이 전 인류에 대한 진지하고 부드럽고 이타적인 사랑으로 화한다. 한 마디로 세속적이고 감각적이고 마귀적인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그 마음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생의 본질이다. “성령으로 난 자는 누구나 이렇게 된다.”
III. 1. 이상의 내용을 생각해 보면 신생의 필요성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즉 세 번째 질문인 우리가 왜 꼭 다시 태어나야 하는가, 무슨 목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이미 찾은 것이다. 그래도 거듭남의 필요성을 정리해 보자. 첫째, 거룩함을 위해서 거듭남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외적인 종교적 행위, 즉 일련의 외적인 의무들을 행하는 것이 거룩함은 아니다. 또 얼마나 많은 종교적 의무들을 행하고 아무리 정확하게 그 일들을 행하더라도 그것은 거룩함이 아니다. 복음에서 말하는 거룩함은 그 마음에 찍힌 하나님의 형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거룩함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었던 그 마음 자체이다. 천국의 모든 정서와 기질이 혼합되어 하나로 뭉쳐 있는 것이다. 거룩함은 자기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기꺼이 보내신 하나님에 대한 계속적이고 감사로 충만한 사랑이다. 하나님의 독생자로 인해 모든 사람의 자식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긍휼과 사랑과 온유와 오래 참음의 잔을 풍성히 채우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의 모든 대화에서 흠이 없도록 가르친다. 우리의 몸과 심령을 있는 그대로 흠 없게 만든다. 우리의 존재, 우리의 소유, 우리의 생각과 행동과 말과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지속적 희생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열납(悅納되)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거룩함은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서 새로워지기 전에는 생겨나지 않는다. 우리 마음의 극적인 변화가 있은 후에야 거룩함이 우리 심령 안에서 시작된다. 즉 지존자의 권능이 우리를 덮음으로써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옮겨진 후에 드디어 거룩함이 생기는 것이다.
2. 그러나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한다.” 거룩함이 없이는 영광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따라서 신생은 영원한 구원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사람들은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죄악 속에 살아도 나중에는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을 거라고 미혹된 생각을 한다. (이는 가히 절망적일 정도로 사악하고 기만적인 인간의 생각이다.)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믿고 있으니 이들은 멸망에 이르지 않는 넓은 길을 찾은 것인가!
저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토록 순하고 덕스러운 여자에게 무슨 위험이 있을 수 있겠어? 저토록 엄격한 도덕성을 지니고 또 저토록 정직한 사람이 천국에 가지 못할 거라고 두려워 할 게 무엇이겠어? 특히나 이들은 예배와 성찬식에 꼬박 참석했는데 말이야!” 이들은 또 다음과 같이 자신만만하게 반문할 것이다. “뭐라고? 내가 이웃만도 못하다고?” 거룩하지 못한 이웃보다야 나을 것이다. 죄악에 빠져 죽을 이웃 수준이야 될 것인가! 그러나 당신들 모두는 불못에 함께 빠져 죽을 것이다. “유황이 타오른 불못” 말이다. 이제 당신은 영광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거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아니 하나님은 이미 당신에게 이 사실을 알 수 있도록 했다!) 그러니 당연히 신생은 필연이다. 누구라도 새로 태어나지 않고는 거룩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3. 이와 똑같은 이유로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조차 행복해질 수 없다. 사물의 본질상 거룩하지 않은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룩한 수준에는 이르지 못한 가난한 시인도 “악인은 행복할 수 없느니”라고 노래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거룩하지 못한 모든 기질들은 불편한 기질들이다. 악의, 증오, 질투, 복수심은 그 가슴에 현재적 지옥을 만들어내는데, 이런 것들보다 좀 더 부드러운 열정들도 적절히 통제하지 않으면 즐거움보다 수천 배나 더 큰 고통을 가져다준다. 심지어 희망조차 그것이 당장 성취되지 않았을 때(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마음을 병들게 하고 하나님의 의지에 합당하지 않은 욕망은 수많은 슬픈 일들로 우리를 찌르기 쉽다. 죄의 일반적 근원인 교만, 자기 의지, 우상숭배 등은 이것들이 기승을 부리는 정도와 정비례하여 불행의 근원이 된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이 심령 안에 자리 잡고 있는 한 행복이 있을 자리는 없다. 하지만 이것들은 우리 심령이 변하면 그 지배력을 상실한다. 우리가 다시 태어나면 불행의 근원은 사라진다. 따라서 신생은 다가올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행복하기 위해서라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VI. 이상 언급한 내용에 덧붙여 추론할 수 있는 몇 가지 내용을 부연하고자 한다.
1. 첫째, 세례는 신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둔다. 세례와 신생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세례와 신생을 동일한 것으로 여기고 싶어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어떤 교파도 세례와 신생을 동일하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경우를 나는 알지 못한다. 영국 국교회든 국교회를 반대하는 편에 있는 사람이든 누구라도 세례와 신생을 동일하게 여기지 않는다. 영국교회에서 나온 우리의 입장은 다음 교리문답에 명백하게 선언되어 있다. (Q, 163, 165 - Ed.)
질문 : 성찬을 구성하는 요소들로는 무엇이 있는가?
답 : 성찬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는 외적이고 눈에 띄는 표시로써 성찬이고, 다른 하나는 내적이고 영적인 은총으로, 내적 의미가 또 다른 요소이다.
질문 : 세례란 무엇인가?
답 : 세례는 일종의 성찬식으로 그리스도가 물로 씻는 의식과 그리스도의 영으로 중생의 인침 두 가지가 있다. 여기서 명백한 것은 의식으로서 세례는 그 내적 의미인 중생과 명백히 구별된다고 말할 수 있다.
영국 교회의 교리문답에서도 우리 교회와 동일한 판단이 분명하게 선언되어 있다.
질문 : 성찬이란 말은 무슨 뜻인가?
대답 : 내적이고 영적인 은총을 외적이고 가시적인 것으로 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질문 : 세례에서 외적인 요소 내지 형식은 무엇인가?
대답 : 물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으로 이름으로 사람은 물로 세례를 받는다.
질문 : 세례가 의미하는 내적인 요소 내지 내적인 것은 무엇인가?
대답 : 죄에 대해 죽고, 의로 새롭게 태어남.
“그러므로 영국교회에 따르더라도 세례가 신생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명백백하다.”
이처럼 상황이 명료하고 분명하기 때문에 다른 권위 있는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세례는 가시적인 것이요, 신생은 가시적이지 않은 것이니 이 두 가지로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닌가? 하나는 자기 육체를 정화하는 사람의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그 사람의 심령에 역사하신 변화이다. 이렇게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르다. 하나는 육체의 문제요 다른 하나는 심령의 문제다. 하나는 물이지만 다른 것은 성령의 일이다.
2. 이상 살펴 본 대로 신생은 세례와 동일한 것이 아니듯이 세례를 받을 때 반드시 신생이 따르는 것은 아니다. 세례와 신생은 늘 동행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물로는 태어났으나 성령으로는 태어나지 않았다. 내적인 은총이 없는데도 외적인 표시가 있는 경우가 때때로 있다. 아이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 교회에서는(영국교회) 유아 세례 때 동시에 거듭난다고 가정한다. 이런 전제 하에 교회 관계자들은 유아세례를 베푼다. 세례와 신생이 유아에게 동시에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없고, 또 어른에게도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모르겠다. 아이들의 경우를 차치하고라도 세례를 받은 어른이 모두 세례와 동시에 거듭나는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그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했다. 세례를 받기 전에 마귀의 자식이던 자들이 물 속에 들어갔다 나와도 여전히 마귀의 자식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저들 아비(마귀)가 하는 짓을 저들도 한다.”고 했다. 이들은 여전히 죄의 종들이다. 이들은 내적이든 외적이든 전혀 거룩함을 입지 못하고 있다.
3. 신생은 성화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특히 “기독교 중생의 본질과 그 근거”라는 논물을 발표한 저명한 저술가도 신생과 성화를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논문의 내용과 관련해 몇 가지 비중 있는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 이 논문에서는 명백히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 논문은 중생을 하나님께로 처음 돌아선 순간부터 그 심령에 서서히 이루어진 어떤 점진적인 역사라고 줄곧 말한다. 이는 틀림없이 성화를 말이다.
그러나 중생이나 신생은 그렇지 않다. 신생은 성화의 부분이지 전부는 아니다. 성화에 이르는 문이요 출입구인 셈이다. 우리가 다시 태어날 때 우리의 성화와 우리의 내적이고 외적인 거룩함은 시작된다. 그 이후로부터 우리는 점차 우리의 머리 되신 하나님 안에 자란다. 사도 바울의 이런 표현은 바로 신생과 성화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동시에 자연적 현상과 영적 현상이 매우 유사함을 나타내기도 한다. 아이는 어느 순간, 즉 매우 짧은 시간에 여자에게서 태어난다. 그 후 서서히 성장하여 어른만큼 자라게 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어느 한 순간, 적어도 아주 짧은 순간에 하나님께로 난다. 그 후 조금씩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란다. 이렇게 육신으로 태어나 자라는 것과 신생하여 성화하는 것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
4. 한 가지 더 언급하겠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인데 보다 신중하게 고려하고 좀 길게 언급하겠다. 다른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여 그 사람이 멸망할 것을 탄식하는 사람이, 주일도 지키지 않고 술에 취하거나 여타 고의적인 죄를 짓고 사는 사람을 보고 뭐라 하겠는가? 앞서 언급한 내용들이 사실이라고 할 때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시기심 많은 사람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노, 그런 일을 있을 수 없어. 이 사람에게 무슨 끔찍한 소리를 하는 거야? 이 사람은 이미 세례를 받았다고? 이제는 이 사람은 다시 태어날 수 없어.” 다시 태어날 수 없단 일인가? 정말인가? 그렇다면 이 사람은 구원될 수 없다.
니고데모만큼 나이를 먹었나 본데, 어찌되었든 “거듭나지 않고는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다시 태어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가혹한 저주를 퍼붓는 것이다. 누가 무자비한가? 나인가, 아니면 당신인가? 나는 그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구원을 상속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당신은 그가 다시 태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자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 당신은 완전히 이 사람에게 구원의 길을 막고 있다. 그 잘난 자비 때문에 이 사람을 지옥으로 보낸단 말인가?
여기 어떤 죄인이 있어 그 사람에게 우리는 정말 자비로운 마음에서 “당신은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당신의 새로운 교리에 반대합니다. 나는 다시 태어날 필요가 없어요. 내가 세례를 받았을 때 그 때 난 다시 태어났어요. 그런데 뭐라구? 내가 받은 세례를 부인하란 말이요?” 이렇게 답하겠다.
첫째, 이 세상의 그 무엇도 거짓을 옹호해 줄 수는 없다. 명백한 죄인에게 이렇게 말해주겠다. 만약 당신이 세례를 받았다면 그 세례를 부인하시오. 이 세례가 얼마나 당신의 죄를 악화시켰던가! 이 세례가 당신을 얼마나 더 저주에 빠지게 하는가! 당신은 태어난 지 여드레에 하나님께 헌신되었고(유아세례를 받았다가) 그 나머지 기간 내내 마귀에게 헌신하지 않았는가? 당신은 이성적인 사고를 하기 전에 (철들기 전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헌신했었는가? 그리고 이성을 활용하기 시작한 이후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떠나 사탄을 숭배하지 않았는가? 패역한 것에 있지 않았는가? 세상을 사랑하고 교만과 분노와 탐욕과 어리석은 욕망과 그밖에 수많은 사악한 감정들을 사랑하여 그 가운데 서 있지 않았는가? 한 때 성령의 성전이었던 아니,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집이었던 자기 심령을 더럽혔다. 엄숙하게 하나님께 헌신했던 심령이 아니던가? 당신이 한때 하나님께 속했던 이 사실이 영광스러운가? 오, 부끄러운지고! 창피해 얼굴이 빨개질 일이구나! 스스로 땅 속에 숨어라. 자랑할 것도 없으니 하나님과 인간 앞에 부끄러워하라!
둘째, 당신은 이미 자신의 세례를 부인했다. 그것도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자기가 받은 세례를 부인했다. 당신은 세례를 수천 번이나 부인했다. 당신은 지금도 매일매일 자기의 세례를 부인하고 있다. 당신은 세례를 받을 때 마귀와 마귀의 일을 비난했다. 그러므로 당신이 다시 마귀에게 자리를 내줄 때마다 당신이 마귀의 어떤 일이라도 할 때마다 자신의 세례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은 모든 고의적인 죄와 깨끗하지 못한 행동과 술 취한 행동과 또 복수하는 마음과 행동으로 세례를 부인했고, 저속한 말과 당신 입에서 나온 모든 맹세로 세례를 부인했다. 주일을 속되게 할 때마다 당신은 그것으로 세례를 부인했다. 그렇다. 당신이 해서는 안 될 일을 다른 사람에게 할 때마다 그 사람은 이 일을 당신에게 그대로 한다.
셋째, 당신이 세례를 받았든 받지 않았든 당신은 다시 태어나야 한다.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당신이 내적으로 거룩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니 내적인 거룩함은 물론 외적인 거룩함도 없고, 당신은 다가올 세상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이 세상에서조차 행복할 수 없다. 당신은 이렇게 말하려는가? “아니야. 난 다른 사람에게 전혀 해도 입히지 않았고, 모든 거래(장사)에서도 정직했으며, 난 저속하지도 않고, 주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지도 않았어(주의 이름으로 맹세하지도 않았어). 그리고 주일을 속되게 보내지도 않으며, 술주정꾼도 아니며, 이웃을 비방하지도 않고, 고의적인 범죄를 지으며 살지도 않는데 그런 내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그렇다면 보통 사람들보다는 많이 나아 보이는 사람이긴 하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멀었다. 그 정도로 당신은 구원될 수 없다. 다시 강조하지만 당신은 다시 태어나야 한다. 또 이렇게 덧붙이려는가? “물론 더 진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선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 당신이 더 선하게 행동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더 선해지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책임을 묻게 된다.
그러나 당신이 이 모든 것들을 개선하고, 당신이 남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선한 일들을 실제로 했다 하더라도 달라진 건 없다. 당신은 여전히 거듭나야 할 처지이다. 거듭남 없이는 당신의 불쌍하고 죄 많고 오염된 심령에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다. “무슨 말씀. 난 항상 하나님의 의식에 참여하고 교회 예배나 성찬식을 반드시 지킨다구요.” 그건 잘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아무리 다 잘해도 당신의 지옥행을 막지는 못한다.
당신은 거듭나야 한다. 하루에 두 번씩 예배에 참여하고 매주 성찬에 참예하고 골방에서 수많은 기도를 하고, 수많은 설교를 듣고, 좋은 서적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당신은 거듭나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이런 것들 중 어떤 것도 신생을 대체하지는 못한다. 아니, 하늘 아래 어떤 것도 신생을 대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아직도 하나님이 이루시는 내적 역사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계속 기도하시오. “주여, 당신의 모든 축복 위에 신생의 은총을 더하소서. 제가 거듭나게 해주소서.”
당신이 좋아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부인하시오. 단 이것만은, ‘거듭나야 하는 것’만은 부인하지 마시오. 당신에게 좋아 보이는 것들 - 주변의 평판, 재산, 친구, 건강 - 이것들을 버리고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만 달라고 하시오. 하나님의 자녀로 용납되게 해달라고 하시오. 그리고 또 이렇게 기도하시오. “썩을 씨가 아니라 썩지 않을 씨, 영원히 살아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태어나게 해주소서. 그리고 매일 우리 주요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그 은총에서 자라게 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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