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설교는 죄를 이기는 신자의 특권에 대한 설교이다. 서론에서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한다. 칭의는 죄책에서의 해방을, 성화는 죄의 권세에서의 해방을 말한다. 따라서 칭의와 성화를 통하여 과거의 죄를 용서받고, 현재적 구원을 받아 죄를 이기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거듭난 자도 죄의 유혹과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항상 깨어있지 못하면 넘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알미니안의 영향인 것 같다. 성경에도 이러한 구절이 있기에 명심해야 할 것이다. 늘 겸손하게 주의 권능과 성령의 인도에 깨어있지 않으면 죄의 공격을 받고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예정론과 견인의 교리는 약화된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에 관한 말씀도 있기 때문에 겸손히 받아들여야 한다.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은 성도의 믿음에서부터 견인의 역사가 있음을 주장하셨다. 따라서 믿을 때부터 견인의 은혜를 받는 것이다.
성경에는 성도가 죄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음을 말하는 한편, 한번 구원하신 자는 끝까지 견인하신다는 말씀도 있다. 두 말씀 모두 받아들여야 승리할 수 있다.
웨슬리목사님의 칭의와 성화의 구분은 매우 탁월하다. 그리고 바나바나 베드로의 실수를 지적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준엄하다. 얼마나 깨어있어야 하는지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다. 또한 죄인과 성도가 같은 시대와 공간에 살지면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것을 초반부에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 매우 설득력이 있고 흥미롭다.
하지만 다윗의 죄에 대한 지적은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구약과 신약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구분되기 때문이다. 물론 구약과 신약은 하나로 이어져 있으며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역사하신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경륜의 역사는 구분되기 때문에 다윗의 예를 든 것은 신약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자들의 위대한 특권
The Great Privilege of those that are Born of God
“누구든지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요일 3:5).
1. 다음의 사실이 흔히 당연한 일처럼 생각되어 왔습니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난다는 것은 의롭게 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신생과 칭의는 동일한 사실을 표시하는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한편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은 다 또한 하나님께로 난 자요, 다른 한편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또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다, 실로 하나님의 이 두 가지 선물은 동일한 순간에 모든 신자에게 주어진다, 한 시점에서 그의 죄는 소멸되고 그는 새롭게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이 라고 생각되어 왔습니다.
2. 그러나 칭의와 신생이 시점에 있어서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양자는 쉽게 구별되는 것입니다. 양자는 동일한 것은 아니요, 대단히 다른 성질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칭의는 단지 관계적인 변화를(relative change) 의미하며 신생은 실제적인 변화를(real change) 의미합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for us) 어떤 것을 하시고,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in us) 일을 하십니다. 전자는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외적인 관계를(outward relation) 변화시키고 그로 인하여 원수였던 우리가 자녀들이 되는 것입니다. 후자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의 깊은 속이 변화되어 그로 인하여 죄인이었던 우리가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전자는 하나님의 사랑에로, 후자는 하나님의 형상에로 우리를 회복시켜 줍니다. 전자는 죄책을(guilt) 제거하는 일이요, 후자는 죄의 능력을(the power of sin) 제거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양자는 시간적 관점에서는(in the point of time) 함께 결합되어 있지만 전적으로 구별되어지는 성질(distinct natures)의 것입니다.
3. 이 사실을 분별하지 않는 일, 의롭게 되는 것과 거듭나는 것 사이에 있는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이 주제를 다루어온 많은 사람들 가운데 대단히 큰 사고(思考)의 혼란을 일으켜 왔습니다. 특히 그들이 이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권을 설명하려고, 즉 어찌하여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누구든지 죄를 범하지 않는다”(요일 5:18)라고 하는가를 보이려고 시도했을 때에 그러했습니다.
4. 이것을 분명히 이해하려면 첫째로,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누구든지”(요일 5:18) 하는 표현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를 고찰하는 것, 둘째로 어떤 의미에서 그가 “죄를 범하지 않는가”(요일 5:18)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I
1.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라는 표현의 참된 의미를 고찰해 봅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 표현 “하나님에게서 태어난다”가 포함되어 있는 성서의 모든 장절에서 그것이 단순히 세례를 받는 일, 혹은 어떤 외적 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차라리 그것은 매우 큰 내적인 변화, 성령의 역사로써 영혼 속에 이루어지는 변화, 우리의 존재 양식 전부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전과는 전연 다른 방식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됩니다.
2. 이 표현의 근거와 이유는 쉽게 이해됩니다. 이 위대한 변화를 경험할 때에 우리는 거듭 났다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연적인 탄생과 영적 탄생의 상황 사이에는 매우 가까운 유사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적인 탄생의 상황을 고찰하는 것이 영적 탄생을 이해하는 가장 쉬운 길입니다.
3.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도, 모든 생명을 가진 자가 그러하듯이 실상 공기에 의하여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매우 둔하고 불완전한 방식이외에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 아이는 가령 듣는 일이 있다고 해도 거의 듣지 못합니다. 듣는 기관이 아직 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합니다. 그의 눈은 굳게 닫혀 있으며 전적인 흑암으로 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 탄생의 때가 임박했을 때에는 아마도 생명의 어떤 희미한 시작과 그 결과로서의 어떤 운동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사실로 인하여 그는 단순한 물질적인 덩어리에서 구별되는 것이지마는 그러나 그는 전혀 지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영혼의 모든 통로는 탄생할 때까지 전혀 닫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거의 이 눈에 보이는 세계와는 교섭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또 거기서 생겨나는 것들에 대해서도 거의 아무런 지식도 개념도 관념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4.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눈에 보이는 세계에 대해서 전혀 문외한이라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세계가 멀리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그것은 매우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측면에서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몇 가지 이유는 첫째로 그 아이가 그러한 지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지각이 아직 그 영혼 안에 열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지각에 의해서만 물질적 세계와 교섭을 가지는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매우 두꺼운 베일 늘어트려져 있어서 그것을 통해서 그는 아무 것도 식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5. 그러나 그 아이가 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그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그는 이제 공기를 느낍니다. 그는 공기에 둘러싸여 있으며 공기는 여러 측면에서 그의 속으로 스며들어 옵니다. 그가 숨을 마시고 내어 쉬는 그 속도를 따라 스며듭니다. 이 공기가 스며들어오는 사실로 생명의 불꽃은 지탱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로부터 힘과 운동과 감각의 끊임없는 증가가 발생합니다. 모든 육체적인 지각이 이제는 눈을 뜨고 그 적당한 대상이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그의 눈은 이제 빛을 지각하기 위해 열려 있습니다. 빛은 고요히 눈 위에로 흘러 들어와 단지 그 자체를 나타내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전에는 그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사물의 무한한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의 귀는 열려서 소리가 끊임없이 다양하게 다가옵니다. 모든 지각이 그것에 적합한 대상에 알맞게 사용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입구로 말미암아서 영혼은 눈에 보이는 세계와의 열려진 사귐을 더욱 더 나누게 되며, 태양아래에 있는 모든 만물에 대해 느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더욱더 지식을 더하게 됩니다.
6.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위대한 변화가 수행되기 이전에는 그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살고 있는 것이지마는―왜냐하면 생명이 있는 것은 다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하기 때문에”(행 17:28)―하나님을 감지할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심을 느끼지 못하며 그의 현존에 대한 내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는 그것이 없었다면 한 순간이라도 존재할 수가 없는, 저 신적인 생명의 호흡을 느끼지 못하며 또 하나님에 관한 것들에 대해서 전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 것들은 그의 영혼에 전혀 감명을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하늘로부터 그를 부르시고 계시나 그는 듣지 못합니다. 그의 귀는 막혀 있어서, 따라서 “마술사의 소리”(시 58:5)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는 “마술사가 아무리 지혜롭게 설득할지라도”(시 58: 5) 그는 들을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에 관한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의 이해의 눈은 닫혀 있어서 완전한 어두움이 그의 영혼 전체를 가리고 그를 모든 측면에서 둘러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생명이 꿈틀거리는 새벽을 갖게 되고, 영적인 움직임이 시작되는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그는 영적인 대상을 이해할 수 있는 영적 지각을 가지지 못했으므로, 그는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영적인 것은 영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므로 그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고전 2:14 참조).
7. 이 때문에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와 거의 교섭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과 같이 영적인 것에 대한 지식도 거의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것이 멀리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니 그는 그 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그렇게 부르는데 이 다른 세계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멀지 않습니다. 그것은 위에 아래에 모든 측면에 있습니다. 다만 자연적인 인간만이 그것을 식별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영적 지각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영적 지각에 의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매우 두꺼운 베일이 내리어져 있으므로 그는 어떻게 꿰뚫어 볼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8. 그러나 그가 하나님에게서부터 성령으로 태어날 때 그의 존재방식은 얼마나 변화할 것입니까? 그의 영혼 전체가 이제 하나님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확실한 경험으로써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나의 침상 곁에 또는 나의 길 가까이 계십니다.”(시 139:8 참조). 나는 당신을 내가 걷는 길 어디서나 느낍니다. “당신은 나의 전후를 두루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시 139:8). 하나님의 영 혹은 숨결이 즉시 새로 탄생된 영혼 속에 불어넣어져서 호흡하게 됩니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이 같은 숨결이 하나님에게로 돌아갑니다. 그것이 부단히 신앙으로 인하여 받아지는 것처럼 그것은 부단히 사랑과 기도와 찬미와 감사로 돌려집니다. 사랑과 찬미와 기도라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에게서 난 모든 영혼의 숨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종류의 영적 호흡으로 인하여 영적 생명은 다만 유지될 뿐만 아니요 영적 능력과 활동과 감각과 함께 날마다 증가합니다. 모든 영혼의 지각이 이제 눈을 뜨고 영적 선악을 식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9. “그 이해의 눈”이 이제 “열려서” 그는 “보이지 않는 그 분을 보는”(히 11:27) 것입니다. 그는 믿는 자들을 향하여서 “하나님의 능력”과 그 사랑과의 “대단한 위대함”(로마 1:16 참조)이 무엇인가를 봅니다. 그는 하나님이 죄인인 자기에게 대하여 자비로우시며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그 독생자로 인하여 화해하였음을 봅니다. 그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과 하나님의 모든 “가장 귀하고 큰 약속들”(벧후 1:4)을 다 분명히 느낍니다. “‘어두움 속에서 빛이 비쳐 나오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으로써 그를 계몽시키기 위하여 “그의 마음속에 비추어 주셨습니다.”(고후 4 : 6). 또 비추어 주고 계십니다. 이제 모든 어두움은 지나갔고 그는 하나님의 얼굴의 빛 속에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10. 그의 귀는 이제 열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은 이제까지처럼 불러도 헛되지는 않습니다. 그는 하늘의 부르심을 듣고 복종합니다. 그는 자기의 목자의 음성을 알고 있습니다. 영적인 모든 지각이 이제는 깨어나 있으므로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와 분명한 교섭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더욱 “이전에는 마음에 떠오르지”(고전 2:9)도 않았던 일들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평화란 무엇인가, 성령 안에서의 기쁨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전에 하나님의 빛과 음성, 지식과 사랑을 중단시키고 있던 장막이 제거되어 있으므로 성령으로 난 사람은 사랑 안에 거하며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계십니다”(요일 3:24 참조).
II
1. “누구든지 하나님께로 난 사람은”(요일 3:9)이란 표현의 의미를 고찰해 왔으므로 둘째로 어떤 의미에서 그는 “죄를 범하지 않는”(요일 3:9) 것인가를 묻는 일이 남았습니다. 이제 위에서 이미 설명한 것과 같이 그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끊임없이 그 영혼 속에 하나님께로부터의 생명의 입김, 하나님의 영의 은혜로운 감화를 받고 또 그것을 돌려보내고 있는 자, 그렇게 믿고 또 사랑하고 있는 자, 믿음으로써 그 영혼 위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역사를 느끼며 또 일종의 영적 반응으로써 그 받는 은혜를 끊임없는 사랑과 찬미와 기도에서 돌려보내고 있는 자,―이 사람은 자신을 그 상태에 보전하는 동안, 단지 죄를 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씨가 그 사람 속에 있는”한,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요일 3:9).
2. 죄라는 말에서 나는 여기서 보통 인정되는 뜻을 따라 그 말의 분명한 외적 행위 죄(outward sin)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현실의 의도적인 율법의 위반(voluntary transgression of the law) 입니다. 계시되고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의 위반, 위반될 때 하나님의 계명으로 인정되고 있는 그 하나님의 계명의 위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요일 3:9)는 믿음과 사랑에 머물러 있는 한, 기도와 감사의 생각을 갖는 한, 단순히 죄를 범하지 않을 뿐 아니요 그러한 방식으로 죄를 범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가 이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붓는 한, 그는 하나님이 금하셨다고 알고 있는 것을 말하거나 행하거나 함으로써 하나님의 어느 계명에도 자발적으로 위반할 수가 없습니다. 그의 속에 머물러 있는 저 씨, 저 사랑하며 기도하며 감사하는 믿음이 하나님의 눈에 혐오될 만한 것이라고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하도록 그를 강요하는 한, 그러한 일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3. 그러나 여기서 즉시 어려움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 어려움은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극복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였고 그들에게 사도의 명백한 주장을 부인시키며 하나님의 아들들의 특권을 포기시킨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로부터 참으로 난 자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사람들인 우리가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그들에 대한 이 절대로 잘못됨이 없는 증거를 주신 것이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죄를 범할 수가 있을 뿐 아니요, 실제로 죄를 범한 사실입니다. 더구나 큰 외적 죄를(outward sin) 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금하셨다고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하거나 혹은 행하거나 해서 그들은 분명히 알려져 있는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한 것입니다.
4. 이처럼 다윗은 의심 없이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왕이 되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기에 앞서 하나님께로부터 났습니다. 그는 자기가 믿고 있는 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믿는 가운데 굳건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롬 4 : 20) 그는 말했습니다.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1 이하) 그는 사랑에 충만해 있어서 가끔 외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주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 18:1, 2). 그는 기도의 사람이어서 생활의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 그의 영혼을 쏟아 부었습니다. 또 그는 찬미와 감사로 충만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당신을 향한 찬미를 내 입에서 계속하리로다”(시 34 :1)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시 18:28) 그러면서도 이러한 하나님의 자녀가 죄를 범할 수가 있었으며 또 실제로 죄를 범했습니다. 실로 간통과 살인의 무서운 죄를 범한 것입니다.
5. 또한 성령이 좀 더 풍부하게 주어진 뒤에까지도, “복음을 통하여 생명과 썩지 않음을 밝히 보이신”(딤후 1:10) 뒤에라도, 우리는 역시 의심 없이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씌어진 동일한 우울한 종류의 실례를 얻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러한 실례가 사도들로 인하여 “바나바” 곧 “‘위로의 아들’로 불리어진”(행 4:36) 사람의 경우입니다. (아마도 이 호칭은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형제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그 대금을 가져온 데서 붙여진 것이리라) 그는 안디옥에서는 매우 존경을 받았고 모든 제자들 가운데서 사울과 함께 선택되어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원조를 가지고 갈 정도였습니다. 그는 유대로부터 돌아오자 성령의 특별한 지시에 의하여 엄숙하게도 “하나님이 그에게 맡긴 일을 행하기 위하여 다른 예언자들이나 교사들로부터 성별된”(행 13:1-4) 것입니다. 즉 이방인 가운데의 위대한 사도와 동반하며 모든 곳에서 그의 동역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바나바가 나중에 성 바울과 매우 크게 다투어서 자기도 그 활동에서 떠나버릴 정도였던 것입니다[다툰 이유는 성 바울이 “전에 밤빌리아에서 일행을 떠나 행동을 함께 하지 않았던 요한은”, 두 번 째 그 형제들을 방문하려고 할 때 “데리고 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행 5:38) 일 때문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요한을 데리고 구브로로 건너갔던”(행 15:39) 것입니다. 이처럼 바나바는 성령에 의해 그처럼 직접적인 방식으로 맺었던 사람을 버린 것입니다.
6. 위의 두 가지 보다도 더욱 놀랄 만한 실례가 성 바울에 의하여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편지로 보내졌습니다. 늙은 베드로, 열심있고, 사도들중의 제 일인자요, 주님께로부터도 가장 총애를 받았던 세 사람 중의 하나였던 베드로가 “안디옥에 왔을 때에 그가 잘못한 일이 있어서 나는 그를 면박했습니다. 그 사건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가 이방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었는데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그리로 왔습니다.”(갈 2:11, 12)―이방 사람이란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한 이교도를 말합니다. 베드로가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은 것은 특히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속 되게 여기거나 깨끗하지 않게 여기거나 하지 말라고”(행 10:28) 베드로에게 지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오자 그는 할례 받은 사람들이 두려워서 그 자리를 떠나 물러났습니다. 다른 유대 사람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행했고 마침내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함께 끌려갔던 것입니다.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대로 똑바로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 앞에서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도’” 모세의 의식에 관한 율법을 중히 여기지 않고―“이방 사람 같이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들더러 유대 사람 같이 되라고 강요합니까?”(갈 2:12-14) 여기에도 또 의심없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에 의하여 되어진 분명한 부정할 수없는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이것이 분명한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생각할 때, “누구든지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요일 3:9)는 성 요한의 주장과 일치할 수가 있습니까?
7. 나는 대답합니다. 오랫동안 인정되어온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신 분이 그 사람을 지켜 주시는”(요일 5:18) 한, (하나님의 은혜로써 그에게는 그것이 가능하지만) “악한 자가 그를 다치지 못합니다.”(요일 5:18) 그러나 그가 자기를 지키지 않는다면, 즉 신앙 안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면 그는 다른 사람과 같이 죄를 범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서 누구나 그 견고함에서 흔들려졌을지라도 오히려 사도로 말미암아 선언된 하나님의 위대한 이 진리가 굳게 흔들리지 않은 채 서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서 그 견고함에 동요를 가져올 만한 사람은 그들에게 넉넉한 저 하나님의 은혜로써 “자기를 지키지”(요일 5:18) 못한 것입니다. 먼저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소극적인 내적인 죄(negative inward sin)에로 떨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속에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을 불 일듯 일으키지”(딤후 1:6) 않았기 때문이요, “언제나 깨어 기도하지”(눅 21:36) 않고 “하나님께서 위로 향하여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얻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지”(빌 3:14)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그는 신앙을 잃고 용서의 하나님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약해지고 다른 사람처럼 되어 버려서 그는 외적인 죄까지(even outward sin) 범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8. 특정한 실례로 이를 설명해 봅시다. 다윗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는 진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말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사람이거나 물건이거나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시 73:25). 그러나 아직도 그의 마음속에 모든 악의 씨인 저 본성의 부패가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었습니다.”(삼하 11:2) 아마도 그 영혼이 사랑하던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에 그는 아래를 보고 밧세바를 보았습니다. 그는 유혹을, 악을 향하는 생각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그것이 죄라고 그에게 느끼게 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의심 없이 경고의 음성을 듣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소간 그 생각에 굴복하고 그래서 그 유혹이 그를 이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써 그의 영은 더럽혀졌습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전보다 훨씬 희미해졌습니다. 그는 같은 정도로서가 아니었습니다. 같은 힘과 열정으로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를 책망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영은 깊이 슬퍼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비록 점점 더 약해 졌지마는 여전히 속삭여졌습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 나를 쳐다보라, 그러하면 너는 구원을 받으리라.”(창 4:7 참조) 그러나 다윗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 보았으나 그것은 하나님 편이 아니요 금지된 대상의 쪽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본성이 은혜를 지배하게 되었고 그의 영혼 속에서 욕망을 불태워 일으켰습니다.
그의 마음의 눈은 이제 다시 닫혀지고 하나님은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신앙 곧 신적인, 초자연적인 하나님과의 사귐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함께 멈춰 버렸습니다. 거기서 그는 전투에로 달려가는 말처럼 돌진하여 그 외적인 죄를(outward sin) 범한 것입니다.
9. 당신은 은혜로부터 죄로 떨어지는 의심할 수 없는 과정을 봅니다. 다음과 같이 그것은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는 것입니다. (1)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 속에는 사랑을 행하게 하는 신적 씨앗, 곧 승리하는 신앙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그가 그 사람을 지켜주시므로”(요일 5:18) “죄를 짓지 않습니다.”(요일 3:9) (2)유혹이 생깁니다. 이 세상으로부터든가 육체로부터든가, 혹은 악마로부터든가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3)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죄가 가까이에 있다고 경고를(warning) 주며 더 자주 깨어서 기도하라고 명합니다. (4)그는 어느 정도 이제 자기를 기쁘게 해주는 유혹에 자신을 양보합니다. (5)성령은 깊이 슬퍼하십니다(grieve). 그의 신앙은 약해지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냉각하게 됩니다. (6) 성령은 더욱 날카롭게 그를 비난하여(reproves) 말씀합니다. “이것이 길이다. 그 안에서 걸으라”(골 2:9 참조) (7)그는 하나님의 고통스러운 음성을 피하여 유혹과의 즐거운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8)악한 욕망이(evil desire) 그의 영혼 속에 시작되고 퍼져가서 마침내 신앙과 사랑이 소실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외적인 죄를(outward sin) 범할 수가 있습니다. 주의 능력이 그에게서 떠나버렸기 때문입니다.
10. 이것을 다른 실례로 설명해 봅시다. 사도 베드로는 신앙과 성령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신앙과 성령으로 충만해 진 사실로서 자기를 지키고 있었으므로 그는 하나님과 사람을 향하여 죄없는 양심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단순함과 경건한 성실성 가운데서 걷고 있었으므로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기까지 그는 이방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갈 :12)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은 천한 것도 아니요 불결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오자”(갈 2:12) 베드로의 마음에 “그 할례받은 사람들이 두려워지는”(갈 2:12) 유혹이 생겨났습니다(할례받은 사람들이란 유대인 개종자로서 할례와 모세의 율법에 속하는 다른 의식에 열광하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유혹은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칭찬보다도 이 사람들의 호의와 칭찬을 얻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는 성령으로 죄가 가까이에 있다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느 정도 그것에 자신을 양보했습니다. 즉 죄 많은 인간의 두려움에 양보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신앙과 사랑은 거기 비례해서 약화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시 그를 악마에게 굴복한 일 때문에 책망하셨습니다. 그래도 그는 자기 목자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자신을 그 노예근성의 두려움에 맡겨버려 그것으로서 성령을 소멸한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사라졌습니다. 신앙과 사랑이 사라져 버렸으므로 그는 외적인 죄를(outward sin) 범했습니다. 똑바로 걷지 않고, 다시 말해서 “복음의 진리대로”(갈 2:14) 걷지 않고 그는 그리스도인 형제들로부터 “그 자리를 떠나 물러갔던”(갈 2:12) 것입니다. 그렇게 하라고 조언은 하지 않았다 해도 그의 나쁜 실례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들더러 유대 사람 같이 되라고 강요한 것입니다.”(갈 2:14) 이방 사람들을 다시 한번 “종의 멍에”(갈 5:1)를 메워주려고 한 것입니다. 실은 그 멍에로부터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해방시켜 주신”(갈 5:1)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은 자기를 지키고 있으면 죄를 짓지 않으며 지을 수도 없다는 것은 의심없는 진실입니다. 그렇지만 만일 그가 자기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게걸스럽게 모든 종류의 죄를 범할는지도 모릅니다.
III
1. 이상의 고찰에서 우리는 첫째로 가끔 마음이 성실한 많은 사람들을 당혹시켜온 의문에 대해서 분명한 그리고 토론의 여지가 없는 대답이 주어졌음을 배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의문이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죄는 신앙 상실에 앞서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뒤를 따르는 것인가? 하나님의 자녀는 먼저 죄를 범하고 그리고서 그로 인하여 그 신앙을 잃는 것인가, 혹은 죄를 범할 수 있기 전에 그는 먼저 그 신앙을 잃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대답합니다. 적어도 어떤 태만의 죄(sin of omission)가 필연적으로 신앙의 상실에 앞선다는 것입니다. 어떤 내적인 죄(inward sin)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상실이 외적인 죄를 범하는 일에 앞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신자는 자기의 마음을 검토하면 할수록 다음의 사실을 확신할 것입니다. 사랑으로 활동하는 신앙은(faith working by love) 깨어서 기도하는 영혼에서 내적 외적 양쪽의 죄를(inward and outward sin) 제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에라도 우리는 특히 쉽게 우리가 빠지기 쉬웠던 죄의 유혹에 걸리기가 쉽습니다. 만일 영혼의 사랑의 눈이 하나님을 향하여 고정되어 있으면 그 유혹은 얼마 안되어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즉 만일 우리가 (사도 야고보가 1장 14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εζεμκομενοι,즉 우리 자신의 욕망을 따라 하나님의 밖으로 끌려나가δελεαζομενοι,즉 현재의 혹은 약속된 쾌락의 유혹으로 꾀임을 받는다면 그 때에는 우리가 마음에 품은 그 욕망이 죄를 낳습니다. 그리고 그 내적인 죄로 인하여 우리의 신앙을 멸한 뒤에 그것은 우리를 거꾸로 악마의 함정 속에 던져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외적인 죄라도 범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이상에서 말해진 사실에 우리는 둘째로 다음의 사실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신자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참된 의미에서 무엇으로 성립되는 것인가, 그것으로 인하여 직접적으로 또는 필연적으로 무엇이 의미되는 것인가 하는 것들입니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또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의 끊임없는 영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영혼 속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는 일, 그리고 영혼이 하나님께로부터 먼저 받은 그 입김을 토해 돌려보내는 일입니다. 영혼 위에 부단히 하나님께서 활동하시고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여 반응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끊임없는 임재, 마음에 대하여 나타내시고 신앙으로써 인정되는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사랑과 찬미와 기도를 끊임없이 하나님께 돌려보내고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거룩한 희생제물이 되도록 우리 마음의 모든 생각, 입의 모든 말, 손의 모든 행동, 육체와 영혼과 정신을 모두 바치는 일입니다.
3. 이 사실에서 우리는 셋째로 이 영혼의 반응)이(그것이 무엇이라 불리어지든지 간에 영혼 속에서의 하나님의 생명을 존속시키기 위하여 절대로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분명한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영혼이 하나님께 반응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영혼 위에 계속 활동하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신 축복을 가지시고 우리에게 선수(先手)를 쓰십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십니다. 우리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하나님은 당신에게로 우리를 초대해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 주십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신 하나님을 우리가 그 때에 사랑하지 않는다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만일 우리가 눈을 하나님께로부터 돌려서 하나님께서 우리 위에 부으시는 빛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영은 언제든지 노력하시지 만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점차로 후퇴하여 우리를 그 마음의 어두움에 두어 버리실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다시금 하나님을 향하여 숨을 토해 돌려보내기 않으면 우리의 사랑과 기도와 감사가―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매우 기뻐하시는 희생 제물이지만―하나님께 돌려 보내지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 속에 숨을 계속 불어넣으시지 않을 것입니다.
4. 끝으로 우리는 “교만한 마음을 품을 것이 아니라 도리어 두려워해야 합니다.”(롬 11:20) 하는 위대한 사도의 지시를 따를 것을 배웁시다. 우리는 죽음 혹은 지옥 이상으로 죄를 두려워합시다. 우리는 자신들의 기만에 찬 마음에 매달리지 않기 위하여 질투하는 (그러나 아픔은 주지 않는) 두려움을 가집시다. “서 있는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고전 10:21) 이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에, 이 세상을 이기는 신앙 가운데에 굳게 서 있는 자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적인 죄 가운데 떨어져 그로 인하여 “믿음이 파선을 당할”(딤전 1:19)는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외적인 죄가 그의 위에 그 지배권을 다시 얻기는 얼마나 쉬울 것입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인 당신은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언제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면 안됩니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쏟아내어 언제나 어디서나 끊임없이 기도하도록 유의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당신은 언제나 믿고 언제나 사랑하며 그리고 결코 죄를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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