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

성령의 증거 I

천국 도서관장 2010. 5. 28. 16:03

이 설교는 열광주의자와 형식주의자의 잘못된 신앙을 타파하며 참된 신앙을 증거하기 위한 설교이다. 참된 신앙은 성령과 우리영이 증거한다. 먼저 성령이 증거하며, 그것을 우리영과 함께 증거한다. 즉, 거듭남을 체험하고 양자의 영을 갖게 되면, 성령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인 것을 우리영에게 증거한다. 그때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통해 그 증거를 확실히 나타낸다. 열광주의자는 성령의 증거만 찾는다. 형식주의자는 우리영의 증거만 찾는다. 그 결과 열광주의자는 곧 신비주의나 광신주의에 치우치게 되며, 형식주의자는 자신의 성품의 변화에 치우치게 된다. 그러나 둘 다 잘못이다. 성경은 성령과 우리영의 증거가 있다고 했다. 먼저 성령께서 증거해주심이 있고, 그 이후 우리영의 증거가 있는 것이다. 거꾸러 되면 안 되고, 이 중에 하나만 있어도 안 된다. 이 설교는 약 20년 후 다시 ‘성령의 증거 2’에서 다루어진다




성령의 증거 I The Witness of the Holy Spirit I



“성령이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 8:16)


1. 이 성경 말씀을 곡해(曲解)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신한다고 하는 것도 바로 깨닫지 못함으로 얼마나 많은 손실을 가져왔는지 모릅니다. 영혼의 멸망을 가져오지는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상상에서 나오는 음성을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영의 증거’라고 잘못 생각하여 한편 마귀의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질없이 추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진실로 나쁜 의미에서의 광신자라고 해야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도리에 대하여 설득되기가 극히 어렵고 특히 그 그릇된 생각(思想)에 깊이 빠져 있다면 더욱 어려운 노릇입니다. 그들 올바른 지식으로 이끌려는 모든 노력들을 그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대항하는 것으로 간주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믿음에 대하여 열심히 강조하는 주장‘이라고 부르는 정신적 성급함과 격렬함이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불리는 모든 평범한 방법을 넘어서려고 합니다.


2. 많은 이성적인 사람들이 이런 망상의 무서운 결과를 보고 할 수 있는 대로 이것으로부터 멀리 하려는 노력 때문에 때때로 또 다른 극단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면 누가 놀랄 일이겠습니까? 즉 어떤 사람이 이 증거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이 증거에 관하여서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심한 과오를 범하고 있기 때문에 그 말을 믿지 않으려 한다고 하여, 또 그들이 대단히 남용되어온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모두 광신자라고 즉각적으로 몰아버린다 하여서 누가 놀랄 일이겠습니까? 저들이 여기서 말하는 이 입증 또는 증거가 일반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냐 아니면 사도 시대에만 있었던 특수한 은사 중의 하나인가 의문을 제시한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닙니다.


3. 그러면 우리는 이 양극단의 어느 하나에 치우쳐야만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들의 중용의 위치를(middle course) 갈 수는 없겠습니까? 다시 말하여 이런 그릇된 정신과 열광주의와 충분한 거리를 지키면서도 그렇다고 하나님의 은사를 부인함이 없이 즉 하나님의 자녀가 가지는 이 큰 특권을 포기하지 않고 나갈 수는 없는 것입니까? 분명히 우리는 그의 그 중용의 도를 걸어 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 현존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다음의 것을 고찰하여 보도록 하십시다.


I. 여기서 말하는 우리 영의 증거 또는 증언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의 증거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십니까?


II. 이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이 결합된 증거가 어떻게 인간의 자연적인 마음의 추측이나 마귀의 현혹으로부터 분명하게 구별됩니까?


I

1. 첫째로, 우리는 우리 영의 증거 또는 증언이란 무엇인가를 고찰해 봅시다. 나는 여기서 하나님의 영의 증거를 우리 인간 영의 이성적인 증거 안에 삼켜 버리려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관찰하라고 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여기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들의 영의 증거만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또한 하나님의 영의 증거에 대하여서만 말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 영의 증거에 대하여서는 조금이라도 말하고 있는가 관찰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원문을 보면 잘 이해됩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앞 절에서 “너희는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하고 이어서 “Αὐτὀ τὀ Πυεύμα (어떤 사본에 τὁ αὐτὁ Πυεύμα) συμμαρτυρεί τώ πυεὐματι ὴμώυ ὅτι ἐσμὲυ τἐκυα Θεού”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 같은 영이 우리 영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증거하시느니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여기의 전치사 σὐυ은 단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하시는 바로 그 때에 하나님께서 이를 증거하신다는 것을 드러내는 전치사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번역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성경 구절들을 보거나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체험에 입각해서 모든 신자에게는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하나님의 영의 증거와 또한 우리 영의 증거가 있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2. 후자에 관해서 말한다면 그 근거를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을 묘사하고 있는 이런 여러 성경 구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주 명백하게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급한 사람이라도 그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여러 성경 본문은 고금의 많은 저자들에 의하여 수집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상 더 분명히 알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를 들음으로 또는 은밀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또는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담론함으로써 더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 14:20) 한 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신앙은 소멸케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추리함으로써 즉 이런 성경의 표적을 자기 자신에게 적응시켜 봄으로써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첫째로 자기 자신이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아 거룩한 성품과 행동을 하는 사람인 것을 알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이에 대하여서는 성경이 분명한 확신을 주고 있습니다). 둘째로, 나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았으니 “그런고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하고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3. 이것과 일치하게 사도 요한은 그의 첫번째 서간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 2:3),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5절),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29절),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에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3 : 14),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19절). 즉 우리들의 “말로나 입술로만 피차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 진리와 행위로 함이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4:13), 그리고 “우리는 이로써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나니 이는 우리에게 주신 (순종의) 성령으로 말미암음이니라”(3:24).


4. 아마도 세상의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자녀 가운데 이런 말을 쓰고 있는 사도 요한이나 그의 글을 받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버지 된 자들 이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 앞선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도 자신이나 또는 하나님의 전(殿)에 기둥이 된 사람들은 모두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이런 표적들을 자기들의 신앙을 견고히 하기 위하여 자기 영혼에게 적용시킨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영의 이성적인 증거와 증언이요 추리요 이해인 것입니다.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은 한 마디로 해답될 수 있습니다. “이런 표적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표적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5. 그러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이 표적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이것이 아직 남아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그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이 질문이 의미하는 바는 이것이 타인에게 어떻게 나타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에게 어떻게 나타나느냐의 문제임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면 나는 이런 질문을 하시는 분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즉 당신이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당신이 지금 고통 가운데 있지 않고 편안하다는 것이 어떻게 당신에게 나타납니까? 당신은 즉각적으로 그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당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다면 또한 당신이 넘치는 진노의 고통에서 구원받아 온유하고 조용한 영적 평안을 가지고 계시다면 당신은 그것을 즉각적으로 아실 것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즐거워하고 그 안에서 기뻐한다면 같은 방법으로 당신은 그것을 지각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당신이 이웃 사랑하기를 자기 몸 사랑하듯 하며 온 인류에게 친절한 생각을 가지고 양선과 인내로 채워져 있다면 같은 모양으로 당신은 그것을 직접 확신케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인 외적 표적에 대하여서도 곧 사도 요한의 말하는 바 그의 계명을 지키는 일에 대하여도 만약에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당신에게 있는 것이라면 당신은 의심 없이 당신의 마음속에서 그것을 알 것입니다. 당신의 양심은 매일 같이 진실함과 경건함으로 또는 존경하는 마음과 두려운 마음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호를 입술로만 부르는 것이나 아닌지 또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당신은 부모를 공경하는지 당신이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지 안 하는지 또는 당신의 몸을 거룩하고 존귀하게 가지는지 아니하는지 또 먹든지 마시든지 절제 있게 하며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지 안 하는지를 당신에게 고하고 있습니다.


6. 이것은 정말 우리들의 영의 증거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도 거룩하여지게 하고 대화에서도 거룩하게 해주셨다는 양심의 증거를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양자의 영 안에서 또한 그의 영에 의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곧 하나님의 양자와 양녀의 성품을 받았다는 의식입니다.


이 성품은 곧 하나님과 온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는 우리들의 아버지 하나님께 어린아이와 같이 신뢰하면서 매달려 모든 걱정을 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면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신 것과 같이 우리는 형제를 위하여 생명을 버릴 만큼 진실하고 부드러운 사랑을 가지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는 영에 의하여 그의 아들의 형상과 내적으로 일치되었다는 의식으로 곧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것들을 행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의와 자비와 진리 가운데 걷는다는 의식입니다.


7. 그러면 이 증거 위에 덧붙여지는, 아니 합쳐지는 하나님의 영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합니까? 하나님께 속한 이 깊은 일을 표현할 적당한 말을 인간 언어에서는 발견하기가 곤란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체험하는 것을 적절하게 표현할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이 표현을 시정하거나 부드럽게 하거나 또는 강하게 하는 법을 배운 사람이 있다면 좋을 터인데) 하나님의 영의 증거라는 것은 영혼 위에 나타나는 하나의 내적 인상(inward impression on the soul)으로 이로써 하나님의 영은 우리 영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직접으로 증거하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이로써 하나님의 영은 우리 영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매 나의 모든 죄는 도말되고 나, 아니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께 화목되었노라고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8. 이 하나님의 영의 증거는 그 성격에 있어서 우리 자신의 영의 증거에 선행先行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음의 한 가지를 보아도 분명합니다. 즉 우리는 우리가 마음과 그 생활이 거룩하다는 것을 우리의 의식 속에서 발견하기 전에, 우리는 실제로 마음과 생활이 거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거룩하다는 우리 영의 증거를 가지기 전에, 우리는 먼저 마음과 생활이 거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전적으로 거룩하여질 수 있기 전에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성결의 근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를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또한 우리는 성령이 우리 영에게 증거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므로 성령의 증거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모든 성결을 힘입는 것에 앞서야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성령의 증거는 이에 대한 우리의 내적 의식 즉 이에 대한 우리 영의 증거에 선행하지 안됩니다.


9. 그 때에야 즉 하나님의 영이 우리 영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너를 사랑하여 그의 아들을 너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로 주셨으니 하나님의 아들이 너를 사랑하사 그의 보혈 안에서 너를 죄에서 씻었느니라”하고 증거하실 때 비로소 우리는 그가 우리를 먼저 사랑한 까닭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그로 인하여 우리 형제자매도 또한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랑에 대하여 우리 자신이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값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우리는 알며, 또한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것을 압니다. 이것이 곧 우리 영의 증거로서, 이것을 우리가 계속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동안은 하나님의 영의 증거와 계속적으로 합동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10. 이 문제에 대하여 언급함에 있어서 마치 하나님의 영의 역사를 우리들의 영의 증거에서 배제하는 양 이해하여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서 선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또한 그의 하시는 일을 드러내며 그가 하신 일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에 의하면 우리들이 성령을 받는 하나의 큰 목적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은혜를 우리가 알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순진함과 진실함에 영향을 주므로 우리 양심의 증거를 강하게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주 똑똑히 분별하도록 하려는 것이 성령을 받는 큰 목적입니다.


11. “하나님의 영이 어떻게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의심을 버리고 그의 자녀 된 사실을 증명하느냐?”라고 또한 물으신다면 그 대답은 위에서 상고하여 본 것에서 분명합니다.


첫째로, 우리 영의 증거에 대하여 보기로 합시다. 영혼이 땅 위에서 어떤 것을 사랑하고 좋아하면 그것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아는 것과 같이, 영혼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할 때 그것을 친히 또는 분명히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혼이 존재하느냐 안 하느냐에 대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과 같이, 영혼이 사랑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는가 안 하는가 하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공정히 추리한다면,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겸손한 기쁨과 거룩한 즐거움과 순종하는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곧,


     “나는 이와 같이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고

     좋아하고 기뻐한다.

     그런고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라고 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결코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앞의 명제에 관하여는 성경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에 대한 확신과 꼭 같은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서도 극히 자명한 내적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영의 증거는 가장 온전한 확신과 더불어 모든 의심을 넘어서서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 됨을 우리 마음속에 증명합니다.


12. 하나님의 증거가 어떻게 우리 마음에 현현(顯現)되느냐 하는 그 방법에 대하여는 나는 감히 설명하고자 노력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지식이란 나에게 너무도 놀랍고 탁월한 것이 되어 나는 그런데 도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불면 그 소리는 듣지만 그것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의 일은 그 속에 있는 사람의 영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 사실만은 우리가 압니다. 즉 하나님의 영이 신자에게 그의 양자 된 증거를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영혼에 나타났을 때는 그 사람은 그의 자녀 됨의 현실성을 마치 사람이 태양 빛의 화염 속에 섰을 때 그 태양이 빛나고 있음을 의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의심할 수 없습니다.



II

1. 그러면 다음으로 우리는 이 하나님의 영과 우리 영이 함께 하는 증거(joint testimony)를 어떻게 사람의 마음의 추측과 또한 마귀의 현혹으로부터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두 번째로 고찰하여 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자기 영혼을 스스로 속이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이를 상고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가장 지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잘못 되면 그 사람은 대체로 가장 치명적인 결말을 가져오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이런 과오를 범한 사람이 자기의 실수를 발견하였을 때에는 이미 늦어서 이를 해결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2. 그러면 먼저 이 증거가 자연적인 인간이 그 마음에 갖는 추측과는 어떻게 구별되는 것입니까? 죄를 깨닫지 못해본 사람은 늘 은근히 자기를 높여 자기를 특별한 영적 일에 있어서 마땅히 생각해야 할 그 이상으로 생각을 합니다. 여기에서 육신의 생각으로 쓸데없이 교만해진 자가 자신 가운데 있는 참 그리스도인의 이 특권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자기도 틀림없이 그들 축에 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나아가서는 자기도 이런 것을 이미 가졌노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이런 예가 지금도 세상에 많습니다. 각 시대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이 우리 영과 더불어 증거하는 이 참 증거가 해로운 억측과 어떻게 구별되어 지겠습니까?

나는 대답합니다. 성경에 이들을 분간케 하는 표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아주 평이하게 이 하나님의 영이 신자의 영과 더불어 참되고 순수한 증거에 앞서는 또는 동반하며 그후에 오는 여러 환경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를 조심스럽게 비교하며 이런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는 자는 누구든지 이 분명한 것을 모를 사람이 없습니다. 영의 참 증거와 그럴 듯한 가짜 증거와의 사이에는 이런 모든 면에서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양자(兩者)를 혼동할 위험도 없고 그럴 가능성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4. 이리하여 하나님의 은사를 공연히 헛되이 하고 있는 사람은 그가 참으로 이것을 원하기만 한다면 분명히 자기가 지금까지 하나의 심한 망상에 빠져 있었고 하나의 거짓을 믿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이 은사에 앞서거나 동반하거나 또는 뒤를 따르는 여러 명백한 표적을 말하고 있습니다.은사들은 그들이 전에는 몰랐지만 조금 생각하면 모든 의심을 초월하여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면 성경은 회개 곧 죄를 깨닫는 것은 늘 이 사죄(赦罪)의 증거에 앞서오는 것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3:2).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행 2:38)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행 3:19)하였습니다.


우리의 교회도 또한 이와 일치하여 늘 회개를 사죄나 사죄의 증거 앞에 놓고 있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회개하고 거짓없이 그의 거룩한 복음을 믿는 자를 용서하시고 사면하여 주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마음으로부터의 회개와 참 믿음을 가지고 자기에게 돌아오는 모든 자에게 사죄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회개에 대하여는 낮선 사람이며, 상하고 통회하는 심정을 모르는 자이며, 죄가 기억나서 심히 근심해보지 못하고 그로써 견딜 수 없는 무거운 짐을 느껴 보지 못한 자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런 말들은 반복하지만 자기가 말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을 듣기 좋게 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앞서 하시는 일 (곧 회개―역자 주)이 없었다면 그는 단지 그림자만을 붙잡았을 뿐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참된 특권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응당 믿어야 됨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5. 다시 성경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데 대하여 묘사하기를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 크고 강한 변화에 대한 확증에 앞서야(先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변화는 흑암에서 광명으로의 변화요,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이니 곧 사망에서의 부활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말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2:4). 그리고 또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느니라”(5, 6)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그 사람의 이와 같은 변화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그는 이 문제는 전적으로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입니다. 그는 당신에게 자기 자신은 늘 그리스도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언제 그런 변화가 필요한 때가 있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에 의하면 또한 그가 곰곰이 생각한다면 그는 아마도 자기가 영적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기가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연의 소리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6. 그러나 우리는 과거에 체험하고 또는 체험 못한 것들을 이리 저리 생각하는 가운데 현재의 이 표적들에 의하여 우리는 그 주제넘게 스스로 속이고 있는 자들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를 손쉽게 구별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 성령의 증거에 따르는 주안에서의 기쁨을 겸손한 희락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기쁨은 아주 겸비하여져서 용서함 받은 죄인으로 하여금 “오 나는 미천합니다. 내가 무엇입니까? 내 아비의 집은 무엇입니까? 내가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하고 부르짖게 만드는 기쁨인 것입니다.


겸손이 있는 곳에 온유와 인내와 양선과 오래 참음이 있습니다. 거기에 부드러움과 복종하는 정신이 있고 온유함과 선함이 있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혼의 부드러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열매들이 주제넘은 사람들의 추측으로 생긴 영의 증거에 따르는 것입니까? 정반대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있다고 상상하면 할수록 그는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깔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어떤 책망도 받을 수 없게 되고 어떤 거슬리는 일이라도 참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보다 온유하고 친절하며 가르칠 만하고 듣기는 빨리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는 대신에, 그는 듣기는 더디하고 말하기는 빨리하며 누구에게도 배우려 하지 않고 그 성격이 보다 팔팔하고 과격하여져서 대화에도 화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때로는 그 사람은 마치 하나님의 손에서 일을 빼앗아 자기가 하면서 원수를 삼키려는 것처럼, 그의 모양에서나 말과 모든 품행에서 그 맹렬함을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7. 다시 한번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이것의 분명한 표적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요일 5:3).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나를 사랑하는 자이다”(요 14:21) 하셨습니다. 사랑은 즐겨 순종하고자 합니다. 사랑은 무엇이든지 사랑하는 자에게 수락될 만한 것은 즐겨 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자는 그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위에서 그 뜻을 행하기를 서두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 하는 주제넘은 사람들의 특징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계명을 불순종하고 범하고 지키지 않는 자유를 주고 있는 셈입니다.


아마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두려울 때는 그의 뜻을 행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기 자신들이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보는 까닭에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는 데도 전보다 열심이 없으며 악을 피하는데도 덜 조심하고 자기 마음을 지키며 자기 입술을 지키는 데도 소흘히 하고 열심을 덜 냅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는 데도 전보다 진실하지 못합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려 그는 자기가 자유함을 받았다고 상상한 까닭에 그 생활의 전모가 변화 된 것입니다.


그는 벌써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하지 않으며 혈과 육과 싸우는 것뿐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싸우는 일도 어려운 일을 참는 일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애쓰는 일도 하지를 않습니다. 그들은 천당으로 가는 아주 쉬운 길, 넓고 평탄하고 꽃이 핀 길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거기서 자기 영혼을 향하여 “영혼아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자기 영혼의 참다운 증거를 갖지 못하였다는 결과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갖지 못한 그 표적들을 가졌다고 의식할 수는 없습니다. 곧 겸손, 온유, 순종 또 진리의 하나님의 영이 거짓을 증거하거나 분명히 마귀의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증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8. 스스로 속이는 불쌍한 자여, 당신 자신을 발견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부하고 있는 자여,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내 안에 증거가 있으니 모든 원수를 능히 대적할 수 있다고 하는 자여! 그대 자신을 발견하시오. 당신은 저울에 달아서 모자라는 사람입니다. 성소의 저울에 달아서 모자라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이미 그대의 영혼을 시험하여 그대는 버림받은 은(銀)이라고 증명하였습니다.


당신은 마음이 겸손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영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은 자비롭지 못하고 온유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기쁨이 아무 가치가 없고 그 기쁨이 주안에 있는 기쁨이 아닌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성령을 모신 자도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당신의 영과 더불어 그대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듯이 이것은 분명하고 확실한 것입니다.


오,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당신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도록 그리하여 당신 자신을 알려진 그대로 알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대는 부르짖어 그대 자신 안에서 사형 선고를 받아 마침내는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음성. “안심하라 그대의 죄를 사하였느니라. 그대의 믿음이 그를 성케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도록 하십시오.


9. 그러나 자기 안에 진짜 증거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이를 추측과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반문합니다. 당신은 어둠에서 빛을 어떻게 구분하십니까? 또 대낮에 태양 빛에서 별빛과 가물거리는 촛불을 어떻게 구별하십니까? 이 양자 사이에는 본질적인 고유한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당신의 감각이 올바르다면 당신은 그 차이를 즉각적으로 또는 직접적으로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와 같은 모양으로 영적 광명과 영적 흑암 사이에도 아니 의의 태양과 함께 우리 마음 위에 비추어지는 빛(光明)과 단지 우리 자신의 감정적 흥분의 불꽃에서 일어나는 깜박거림 사이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차이도 우리의 영적 감각이 올바르다면 즉각적으로 또는 직접적으로 감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0. 우리가 이런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보다 자세하고 철학적인 설명을 요구한다거나 또는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알 수 있는 어떤 표준 또는 본질적인 표적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대답될 수 없는 억지 요구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관해 아주 깊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도 대답할 수 없습니다.


예로서 바울이 아그립바 앞에서 대답합니다. 한 현명한 로마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대는 하나님의 아들의 소리를 듣는 일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었다고 너는 어떻게 아느냐? 무슨 표준 무슨 본질적인 표적에 의하여 너는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 줄 아느냐? 이것을 인간의 소리나 천사의 음성과 구별하는 방법을 나에게 설명하라.”


그러면 바울이 그런 쓸데없는 요청에 대답해 보려고 한 번이라도 시도하여 보았다고 믿을 수 있습니까? 그렇지만 저는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의심 없이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인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이것을 알았느냐 하는 것을 누가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아마 어떤 사람도 심지어는 천사라도 못할 것입니다.


11. 한 걸음 더 들어가 하나님께서 지금 “어떤 사람에게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하고 말씀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알기를 원하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쓸 데 없이 말씀하시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할 때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시니까요. 또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그를 수행하십니다. 따라서 영혼은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확신케 됩니다. 그러나 자기 속에 그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 음성을 아직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 설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한 설명될 수도 있다고 기대해서도 안됩니다.


만약에 하나님께 속한 이것들을 체험치 못한 사람들에게 증명할 수 있는 어떤 육체적인 매개물이나 또는 설명할 수 있는 육체적인 방법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육에 속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알고 식별할 수 있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 바울의 주장한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사도는 말하기를 “저는 깨닫지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함이니라”하였습니다. 신령한 것은 신령한 감각으로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이 신령한 감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12. 그러나 나의 영적 감각이 올바른 형편에 놓여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것 역시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만약에 이것에서 잘못 된다면 그 사람은 끝없는 과오에 또는 미혹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성령의 음성을 결코 잘못 알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분명히 알 수 있습니까? 당신은 당신 자신의 영의 증거하는 바에 의하여서 곧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대답에 의하여 알 수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역사로 당신 영에 이루어진 그 열매에 의하여 당신은 하나님의 영의 증거를 알 것입니다.


이에 당신은 과연 미혹에 빠져 있지 않고 당신 자신의 영혼을 속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마음속을 주장하고 계시는 성령의 즉각적인 열매는 곧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친절과 오래 참음입니다. 또한 외적인 열매는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며 누구에게도 악을 행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 걷는 것, 곧 열심으로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한 마음으로 순종하며 걸어가는 것입니다.


13. 이와 같은 열매들에 의해서 당신은 마귀의 현혹으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구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교만한 영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도록 만들지 못합니다. 그 영은 당신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을 찾기 위해 애통하거나 그를 아버지로 사랑하는 그런 마음으로 녹여지게 할 수 없습니다. 당신으로 하여금 이웃을 사랑케 하고 온유, 양선, 인내, 그리고 절제를 주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의 적이 아닙니다. 마귀는 스스로 분쟁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의 일 곧 죄를 멸망시키는 자가 아닙니다. 이 일은 바로 마귀의 일을 멸망시키려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 외에 다른 사람이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결이 하나님께 속한 것과 같이, 죄라는 것은 마귀에게 속한 일이고 당신이 속에 가지고 있는 이 증거는 마귀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14. 그러면 당신은 ‘하나님의 이 말할 수 없는 선물에 대하여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의뢰하는 분을 알 수 있게 하여 주시고 또 그의 아들의 영을 내 마음에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며 지금도 나의 영과 더불어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여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그리고 입술로만이 아니라 당신의 생활로서 그를 찬미한다는 것을 아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치셨습니다. 그러니 몸으로나 마음으로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여러분의 몸과 마음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당신 속에 이 소망이 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깨끗하신 것과 같이 당신 자신들을 깨끗하게 하십시오. 당신은 지금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을 갖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고 있습니까? 그러면 그럴 때에 당신은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모든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가 되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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