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해석학

역사비평

천국 도서관장 2010. 4. 7. 17:16

이 자료는 성경비평이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는지 그 단서를 말해준다. 성경이 허구가 아니라 진실됨을 역사성을 통해 방어하기 위해 역사비평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곧 역사비평은 합리성이라는 틀에 의해 비합리성이 제거되어 버렸다. 고고학의 지원사격은 득도 있지만 성경을 일반역사 수준으로 격하시켰다.



역사비평


안 유 섭 목사

(아르케 아카데미 원장, 반석교회 담임)



역사비평(Historical Criticism)은 성경 본문에 나타난 역사적인 기록의 사실을 입증하기 위하여 본문 기록 당시의 배경과 목적 등을 연구함으로써 성경을 비평하는 학문적 시도라고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기록자와 수신자, 기록 연대와 당시의 역사적, 지리적 상황 그리고 기록 목적 등 주로 외면적인 문제를 연구하게 된다.

역사비평의 목적은 성경의 기록 당시의 상황을 근거 있게 재구성하여 실재성과 역사성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역사비평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순수하게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서 기록의 역사적 사실 여부를 이성으로 검증하여 진위를 밝히려 하기 때문에 최초의 본격적인 성경비평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비평은 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을 허구라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항하여 성경 본문의 기록이 역사에 바탕을 둔 것임을 밝힘으로써 성경의 권위를 높이는데 역할을 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 역사비평의 발전과정에서 지나치게 합리적이고 이성주의적인 태도로 인하여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에 손상을 입히는 일도 있었다. 특히 역사비평은 학문적 성격상 고고학(Archaeology)에 의하여 뒷받침을 많이 받고 있는데, 고고학의 특성상 과학적인 방법으로 입증이 불가능한 초자연적인 기적들에 대해서는 연구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역사비평 역시 성경에 나오는 기적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편이다.

역사비평은 그 출발점이 회의와 의심이기 때문에 성경의 영감이나 초자연적인 기적을 대부분 인정하지 않으며, 성경과 계시를 분리시키려 하고 오직 인간의 이성적 판단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신본주의적 관점에서 성경속의 역사를 보지 않고 인본주의적으로 보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역사비평은 성경 본문을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입증하여 확정하고 그 의미를 분명히 하려는 의도는 좋지만, 시간과 공간의 엄청난 격차와 인간 능력의 한계 때문에 성경 본문의 역사적 진위를 밝히려는 노력은 그다지 대단한 성과를 거둘 것으로 기대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이다.


역사비평의 발전역사

역사비평은 18세기말 가블러(J.P. Gabler)가 교의신학과 성경신학을 분리 선언한 이래 자료비평이라는 독특한 성경비평 방법이 개발되면서 18-19세기에 최고조로 발달하게 되었기 때문에 많이들 근세에 나타난 성경비평방법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면 역사비평은 기독교 이전에 유대교의 공회에서부터 시도되었던 것이다. 고대에 랍비들은 성경을 누가 언제 기록했는지에 대하여 연구하고 개략적이나마 견해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연구와 기록은 현재와 같이 체계적이고 과학적이지는 못하고 매우 추론적이어서 신빙성이 적은 것이 흠이었다.

초기 기독교 교회는 유대교 공회의 역사비평적 입장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켜나갔다. 이때는 기독교를 반대하는 자들에게 성경이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하기 위해서 교회의 필요에 따라 방어적인 측면에서 역사비평이 점차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2세기에 접어들면서 역사비평은 점차 쇠퇴하다가 중단하게 된다. 그 까닭은 기독교에 대한 심한 박해로 인하여 교회 지도자들이 헬라의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가 적어지게 되었고, 또 성경에 대한 비평을 위험한 것으로 여기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또 AD 90년에 얌니아 랍비 회의에서 구약 정경이 확정되고, 397년에는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신약성경에 대한 정경이 형성되면서 성경에 대한 어떠한 비평도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갔고, 이와 더불어 당시 성경해석의 시대적 조류가 영해(靈解) 또는 알레고리적 해석이 크게 유행함으로써 본래적인 의미를 찾는 일이 무의미해져 버린 것도 요인이 되었다.

중세에는 성경해석에 있어서 다중적 의미를 파악하는 풍조가 지배함으로써 역사비평은 별로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간간히 역사비평적 방법을 통한 성경 연구가 있었는데, 10-12세기경에는 유대학자들에 의해 히브리어 성경의 문법적 연구와 동시에 라쉬의 주석을 비롯한 많은 주석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구약 자료들에 대하여 많은 비평적 평가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14-15세기경에 들어와서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문예부흥으로 말미암아 고대 문헌에 대한 비평적 연구가 활발해졌으며, 그 영향으로 성경비평도 다시 고개를 들게 되었다. 이때 과거를 정확하게 과거로 이해하자는 슬로건 아래 성경을 비롯한 기독교 문헌에 대하여 기원과 역사를 밝히기 위한 노력들이 재개되었다. 또한 어문학, 문법, 본문비평 등이 발전하면서 성경해석에 있어서도 문법적 해석을 중시하게 된다.

16세기의 종교개혁 시대가 되면서 역사비평은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종교개혁가들은 역사비평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들로 인하여 역사비평을 가능하게 했던 중요한 동기를 제공한 것이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모토는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문자적 해석을 역설하였고, 성경이 아닌 관행과 인습을 타파하였다. 따라서 초대교회를 회복하고 복원하려는 시도는 가톨릭 교회내의 관행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평적 태도를 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교회를 마음껏 비평하는 자유가 보장된 것이다. 이는 악용되기도 했지만 성경에 대해서도 비평적인 태도를 가능하게 하는 길을 열어준 셈이 되고 말았다.

또한 16-17세기에 절정을 이룬 과학혁명도 성경 연구와 신학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를 시작으로 케플러, 갈릴레오, 뉴턴 등의 유명한 과학자들이 놀라운 과학혁명을 이루면서 인간 사고도 혁명적으로 전환점을 맞게 되었고 이러한 경향이 모아져서 성경에 대한 비평의식이 한껏 높아지게 된 것이다.

17세기에는 역사비평의 연구를 위한 전제들이 제시되며 본격적으로 역사비평이라고 부를 수 있는 비평방법이 등장한 시기이다. 성경비평을 위한 전제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는 성경도 다른 문헌들처럼 비평적 방법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성경의 계시성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단지 연구방법을 바꾸자는 시도였다.

둘째는 성경은 그 내용을 만들어준 자료를 가지고 있으며, 자료들은 각각 작성된 역사와 전승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료가 지나온 여러 상황들을 파악함으로써 성경의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구약의 처음 5권의 책인 율법서(토라)가 모세 한 사람의 저작이 아니라는 논쟁이 수면 위에 떠오른 것이다. 따라서 17세기에는 오경(五經)에 대하여 성경 자체의 내적 진술이나 문체 그리고 반복 구절 등으로 볼 때 단일인의 작품이 아니라 여러 저자들의 작품이 합쳐진 것이라는 주장이 지배하였다. 

17세기 성경비평가로는 초엽에는 네덜란드의 그로티우스(Grotius)가 유명하다. 그는 성경 기록들은 필요에 따라 시대에 부응하여 삶의 정황(Sitz im Leben)을 반영하여 만들어졌다고 하였으며, 성경 본문의 전승과 고대문헌의 기록 등을 비교한 결과 많은 고전 본문들이 성경 본문의 내용들을 밝혀준다고 하였다. 그의 이러한 견해는 성경의 계시성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지만 당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었다.

중엽에는 1651년경에 영국의 홉즈(Hobbes)가 국가를 거대한 괴물로 비유한 레바이어단(Leviathan)이라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오경은 모세와 다른 이들의 합작품임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또 그는 성경 연구에서 전승을 사용하는 것은 회피되어야 하며 오직 성경 자체의 내증으로 연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였다. 그밖에 프랑스의 페레르와 유대인이었던 스피노자 등도 모세의 단일저작설을 부인하였다.

말엽에는 프랑스 신부 시몽(Simon)이 구약비평사를 저술하였는데, 그의 목적은 가톨릭 교회의 전승적 제도를 옹호하기 위해서 성경이 무오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었다. 1685년에는 장 끌레르끄(Jean le Clerc)가 시몽의 구약비평사를 분석하여 비평을 가하였다. 한편 그는 오경이 유대인들의 포로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주장을 하였다.

18세기는 역사비평이 꽃을 피운 시기인데, 영국에서 시작된 이신론(理神論)에 영향을 받아서 종교에서 신비적이고 미신적인 요소를 제거하려는 시도를 많이 하였다. 이신론은 신(神)을 인정하지만 인격적인 관계가 아니라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우주를 주관하는 신으로 보는 것인데, 영국에서 톨란드(Toland), 클라크(Clark) 등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점차 유럽으로 퍼져갔다. 이 시기에 활약하던 사람들은 프랑스의 볼테르(Voltaire), 루소(Rousseau) 등이 있었고, 독일은 라이마루스(Reimarus)와 아이히호른(Eichhorn) 등이 있었는데, 이들의 특징은 성경의 역사적 사실에 회의적이거나 부정적이며 성경을 이성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하였다.

19세기에는 역사비평이 자료비평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발전하여 한껏 무르익은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신약비평은 바우어(Bauer)가 있으며, 구약은 JEDP 문서설로 유명한 벨하우젠(Wellhausen)이 있다. 이들에 대해서는 '성경해석의 간추린 역사'에서 자세히 설명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자료비평

자료비평(Source Criticism)은 역사비평에서 파생되었는데, 성경 본문이 만들어지기 전에 성경 기록자가 어떤 자료들을 근거로 본문을 썼을 것이라는 전제 아래 그것들이 무엇인지를 발견하여 성경 본문에 얽힌 구조를 밝히려는 연구로서 역사주의적 자료비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성경이 아닌 일반 책의 경우는 저자들이 책을 쓰기 전에 자기의 사상을 뒷받침하는 어떤 배경과 자료들을 가지고 있기 마련인데, 자료비평가들은 성경도 이런 이치를 적용해서 만들었다고 본다. 즉, 성경 본문을 구성하는 원자료들이 있어서 성경 기록자들이 그것들을 잘 편집함으로써 성경이 이루어졌다는 견해이다.

자료비평이라는 독특한 분야가 선을 보인 것은 바우어가 신약에 대하여 시도함으로써 이루어졌으나, 가장 유행하게 된 것은 벨하우젠의 오경에 대한 JEDP 자료설이 체계화되면서부터이다. 오경에 대한 논의는 그전부터 계속되어왔었는데, 핵심은 오경이 모세의 단일 저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세의 죽음 이후의 기록이 있을 뿐 아니라, 민 21:14에 언급된 '여호와의 전쟁기'라는 책은 훨씬 후대의 책이며, 여호수아서의 야살의 책(수 10:13)도 당대의 기록은 아니라는 점 등이다.

벨하우젠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서문>이라는 책에서 구약의 역사비평 연구방법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이론을 전개함으로써 후대에 JEDP 문서설을 확산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의 문서설을 원천가설이라고 하는데, 오경에 하나님의 이름들이 상이하다는 것과 내용상 독특한 것이 있음에 착안하여 원자료 문서를 네 가지로 분류한 것이다. 즉, 상이한 하나님의 이름에 따라 엘로힘(Elohistic) 문서와 여호와(Jehovistic) 문서로 나누고, 신명기가 오경 중에서 다른 네 권의 책과 언어와 문체가 다르다는 점 때문에 신명기(Deuteronomy) 문서를 구별하고, 또 레위기를 제사 관련 문서로 분류하여 제사장(Priest) 문서라고 하였다. JEDP 가설은 이들의 두음(頭音)을 따서 지어진 이름이다. 이는 오늘날까지 주장하는 사람이 매우 많은데,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성경의 무오성을 크게 훼손하는 문제점이 있다.

오경에 대한 견해는 원천가설 말고도 단편가설, 보충가설, 단일저작설 등이 있는데, 단편가설은 18세기말 영국의 게디스(Geddes)와 독일의 화터(Vater)가 주장했는데, 오경이 수많은 독립된 단편들이 모여서 이루어졌다는 생각이다.

다음 보충가설은 19세기에 에발트(Ewald)가 최초로 주장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오경은 기본적으로 모세 저작의 원(原)문서가 있고 후에 다양한 자료들이 시간 경과에 따라 약간씩 부과되었다는 견해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정통보수적인 견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모세 단일저작설은 단순히 유대인의 전승을 따르는 것으로 모세의 죽음에 대한 기록 등 앞에서 언급한 것들에 대한 대항 논리가 전혀 없는 주장이다.

신약에 관해서는 복음서간에 자료가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따지는 작업이 계속 되어왔다. 고대에는 지금의 성경 책 배열대로 마태, 마가, 누가복음 순으로 기록되었다고 보거나 마태, 누가, 마가의 순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19세기말부터 대부분의 학자들은 4복음서 중에서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고 본다. 20세기의 옥스퍼드 가설은 최초에 마가복음과 Q 자료가 있어서 나머지 두 복음서가 그것을 원자료로 사용하여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또 요한복음은 세 권의 책을 모두 원자료로 사용하고 전승도 많이 참고하여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자료비평은 책들을 비교하고 검토하는 과정에서 단어 하나 하나를 정확하게 분석해야 하므로 사실상 매우 어려운 작업인데, 연대와 문서, 저자 등의 자료 중심을 대상으로 주로 외면적인 문제에 집착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성경 본문을 소홀히 여기는 한계 때문에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결국 양식비평이라는 새로운 비평방법을 탄생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