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역사적 평가

천국 도서관장 2010. 1. 26. 19:08

이 글은 에드워즈와 칼빈을 비교하는 글로서 유용하다.

이 작업을 통해 에드워즈는 칼빈주의를 계승하는 한편 재해석하고 발전시킨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관점에서 칼빈이 비교적 스콜라주의에 머물러 있는 반면에 에드워즈는 로크와 뉴턴의 최신 철학과 과학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이를 18세기 신앙으로 격상시켜 하나님을 경향성으로 재해석하는 부분에서 칼빈과 차이가 난다.

 

또한 교회론에서, 칼빈의 권징에 대한 해석과 에드워즈의 권징에 대한 해석이 차이가 남을 볼 수 있다. 칼빈은 적극적으로 성도와 교회를 권징해야 겠지만, 최종적인 판단자는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매우 강조한다. 그 결과 교회의 일치가 유지되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청교도의 후예인 에드워즈 목사님은 극단적으로 권징론을 강조한다. 그런 면에서 에드워즈 목사님은 더욱더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적극적으로 교회론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이면에서는 칼빈이 좀더 옳은 것 같다.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역사적 평가


이양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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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즈는 1703년 10월 5일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지난해 2003년은 에드워즈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였습니다. 에드워즈 탄생 300주년을 바라보면서 2002년 12월 7일 에드워즈를 사랑하는 몇몇 학자들이 모여 “한국에드워즈학회”를 창립하였습니다. 이 창립총회에서는 이상현 박사님을 회장으로 선출하였고, 저는 부회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상현 박사님이 한국에 계셨으면, 이 강연을 이상현 박사님이 맡아 하셨을 텐데 그렇지 못해 제가 맡아서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에드워즈 연구가가 아니라 칼빈 연구가이기 때문에 사실 에드워즈에 대해 깊이 있게 말씀드릴 수 없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 강연을 수락한 것은 한국에드워즈학회 부회장이라는 직임 때문이기도 하며, 또 에드워즈를 누구 못지않게 사랑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한국에드워즈학회는 창립총회 때 이상현 박사님을 모시고 “에드워즈의 사상”이라는 특별 강연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2003년 3월 10일에는 장경철 교수님을 모시고 “에드워즈의 종말론”이라는 주제로 연구발표회를 개최하였습니다. 2003년 10월 22일 “조나단 에드워즈 탄신 300주년 기념 감사예배 및 특강”을 가졌습니다. 특강은 이상현 박사님께서 “신앙과 실천 -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이라는 주제로 하셨습니다. 2003년 12월 13일에는 김성광 박사님을 모시고 “에드워즈의 영성 신학”이라는 주제로 연구발표회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2004년 5월 17일에는 노병기 박사님을 모시고 “에드워즈의 중생론”이라는 주제로 연구발표회를 가졌으며, 2004년 12월 18일에는 양낙흥 박사님을 모시고 연구발표회를 가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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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즈를 예찬하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반면에 에드워즈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20세기 초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도덕주의에 반하여 진보주의가 영향을 미치는 시대였으며, 이 때는 에드워즈에 대하여 비판적이었습니다. 1920년대에 에드워즈 전기를 쓴 팍스(Henry Bamford Parkes)는 에드워즈를 젊은 날의 “범신론적” 통찰을 칼빈 신학의 엄격한 틀 속에 집어넣은 비극적 인물로 보았습니다. 팍스는 에드워즈가 칼빈주의에 대해 심사숙고했더라면 미국 사상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되었을 것이며, 미국의 미래 역사 전체를 변화시켰을 것이라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러나 1949년에 에드워즈에 대한 지적 전기를 쓴 페리 밀러(Perry Miller)는 에드워즈를 미국의 가장 위대한 천재로 묘사했으며, 부수적으로 칼빈의 범주들을 사용한 심원한 현대적 철학자로 묘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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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즈는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평가받을 만합니다. 마즈던도 에드워즈에 관해 “모든 미국 신학자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신학자” 라고 평가하였습니다. 밀러는 에드워즈를 “18세기에 견줄 만한 사람이 거의 없었으며” “그 당시 지적으로 가장 현대적인 사람”이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마즈던은 에드워즈에 관해 “그는 가장 예리한 초기 미국 철학자이었다” 하고 평가하였습니다. 이 위대한 신학자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활발합니다. 에드워즈에 관한 새로운 저서들이 매년 여러 권 나오고 있으며, 수십 편의 논문들과 서평들과 박사 학위 논문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마즈던은 에드워즈에 저작에 관해 “그의 저작들 가운데 적어도 세 저작 - <종교적 감정> <의지의 자유> <참된 덕의 본질>은 기독교 저작의 역사에 있어서 걸작으로 남아 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에드워즈의 저작들은 여전히 많은 평신도 독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정치와 군사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드워즈는 미국 혁명 이전 영국의 한 주에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이 구세계는 엄격한 계급적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 기준으로 보면 귀족정 지지자이었습니다. 에드워즈는 성직자, 행정관, 판사, 군인 지도자, 지방 귀족, 상인 등 지배 계층에 속한 엘리트 가문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에드워즈 가문이 통혼한 스토다드 가문과 윌리암스 가문 등은 커네티켓 강 계곡 혹은 서부 매서츄세츠(햄프셔 군)과 커네티켓의 일부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에드워즈는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문화, 프랑스의 가톨릭 문화, 인디안 문화 등 세 개의 문화들이 갈등하는 소용돌이 속에 살았습니다. 각 문화는 북미를 지배하려고 격렬하게 분투하고 있었습니다. 결과는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문화가 승리하였지만, 에드워즈 당시에는 아직 그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 국제적 맥락이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크게 중요하였습니다. 에드워즈는 로마 가톨릭교와 인디안들에 대해 염려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습니다. 에드워즈는 복음을 위한 전망과 관련된 세계 전쟁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역사를 보았습니다.

에드워즈는 그의 시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종교적, 사회적 운동의 중심에 있던 활동가이었습니다. 그는 그 지역의 놀라운 부흥 운동을 감독하였으며, 그 부흥 운동은 미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적 실천들 가운데 하나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에드워즈의 설교인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은 미국의 가장 유명한 설교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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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즈는 칼빈주의적 전통에 서 있는 신학자이었습니다. 페리 밀러는 홈즈(Stephen R. Holmes)의 표현을 빌리자면 에드워즈를 “원형적 로크주의적 경험주의자”(prototype Lockean empiricist)로 재구성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 체리(Conrad Cherry)는 에드워즈를 칼빈주의적 전통에 굳게 서 있는 신학자로 평가하였습니다. 놀(Mark A. Noll)은 에드워즈의 사상을 역사적 칼빈주의를 18세기의 철학적 언어로 다시 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에드워즈의 사상의 중심적인 원리는 하나님의 주권인데, 이것은 칼빈주의적 유산에 충실한 것이었습니다. 성서에 계시된 것처럼 삼위일체이시며 영원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주의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십니다. 단순하게 말한다면, 하나님의 주권이란 어떤 선, 특히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어떤 선이 하나님의 것이냐 아니면 인간의 것이냐 하는 의문의 문제가 있을 때 그 대답은 항상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통치를 저 멀리 추상화시키는 것을 피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는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원의 위대한 일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우주의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성격을 가리킵니다. 에드워즈의 사상의 중심적 원리가 하나님의 주권이었다면, 그의 삶과 활동의 중심적 실천적 동기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그의 확신이었습니다. 에드워즈는 이 중심적 원리와 이 중심적 원리에 근거한 행동을 다 강조하는 사람으로 사상가이면서 활동가이었습니다.

에드워즈는 17세기 퓨리탄 전통과 유럽 대륙의 칼빈주의적 전통에서 이어받은 신학에 중실하였으며, 18세기 국제적 복음주의의 출현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마즈던은 “에드워즈는 후의 복음주의자들에게 나타나는 몇몇 특징들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칼빈주의적 사상가였다는 사실과 그가 철저하게 지성적이었다는 사실과 그리고 그가 18세기에 활동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그의 복음주의적 후예들과는 매우 다르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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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즈는 그의 신앙론에 있어서 칼빈과 칼빈주의적 전통에 서 있었습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신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습니다. 즉, 신앙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애에 대한 확고하고 확실한 인식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진 약속의 진리에 근거한 것이며 성령을 통해 우리 지성에 계시되고 심정에 인쳐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정의에 의하면 신앙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칼빈은 “신앙은 성령의 주된 일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성령의 은밀한 에너지에 의해 우리는 그리스도와 모든 그의 유익들에 이르며,” “성령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신에게 효과적으로 연합시키는 띠이다”라고 칼빈은 말하였습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신앙이 성령의 일이듯이 에드워즈에게 있어서도 신앙은 성령의 일이었습니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크리스천의 사랑에 대해 말할 때 마치 그것이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령과 동일한 것이거나 혹은 적어도 영혼 속에 있는 성령의 으뜸가고 가장 자연스러운 호흡과 활동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에드워즈는 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을 설명할 때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특별한 행동을 하기 전에는 아무도 구원의 상태에 있을 수 없으며, 또한 믿음이 역사하기 전에는 한순간도 성화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은 사실일 수 없다. 모든 경우에 행동이 있기 전에 원리가 있어야 한다. 변화에 수반되는 행동이 있기 전에 먼저 죄인의 마음속에서 변화가 있어야 한다. 성결이 실행되어지기 전에 성결의 원리가 있어야 한다. (원인이 결과 앞에 오듯이) 본질상 믿음의 행위가 있기 전에 변화가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만약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이 성공적인 행위가 되려면, 즉 정신의 한 생각과 행동이 어떤 식으로든 다른 것을 뒤따르는 행위가 되려면 적절한 시간 안에 이루어져야 한다.” “먼저 정신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관념, 즉 그에 대한 적합하고 참으로 어울리는 관념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영혼이 성화되기 전에는 있을 수 없다. 또한 참된 믿음, 즉 받아들이려는 의지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도 성화 전에 있을 수 없다. 또한 그리스도를 죄에서의 구원자로 받아들이기 전에 죄에 대한 증오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또한 이것은 성화 없이 있을 수 없다.” 이에 대해 체리는 “‘마음의 변화’, ‘성결의 원리’,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선행하는 지성 안에 있는 관념적 행위는 에드워즈가 다른 곳에서 성령의 임재를 표시한 것이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신앙에 있어서 지적인 면도 있지만 의지적인 면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 점에서 칼빈과 에드워즈는 견해를 같이했습니다. 칼빈의 신앙 정의에 의하면 신앙은 성령의 일인데, 우선 성령은 우리 지성에 계시합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태양과 같아서 그것이 선포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비치지만 맹인에게는 아무 효과를 끼치지 못한다. 이제 우리 모두는 본성상 이 점에 있어서 맹인들이다. 따라서 성령이 내적 교사로서 그의 조명을 통해 말씀을 위한 입구를 만들지 않으면 말씀이 우리의 지성 속에 들어올 수 없다.” 성령은 우리의 지성에 계시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심정에 인칩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심정이 성령의 능력에 의해 강화되고 지원을 받지 않는다면 지성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조명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스콜라 학자들을 비판하여 “이 문제에 있어서 스콜라 학자들은 완전히 잘못 되었다. 그들은 신앙을 고려하면서 신앙을 지식에서 나오는 발가벗고 단순한 동의와 동일시하며 마음의 신뢰와 확신을 배제시킨다”고 말하였습니다.


체리는 에드워즈의 신앙관을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에드워즈의 신앙 안에서의 ‘맛봄’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해 줄 수 없고, 다른 사람에게 줄 수도 없는 경험이다. 그것은 무엇에 대한 단순한 인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인식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꿀의 달콤한 맛을 지각할 수 없으며,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듯이, 신앙의 지식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도달할 수 없고 다른 사람에게 줄 수도 없다.” 또 체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꿀의 달콤한 맛에 대하여 알 때가 아니라 실제로 지각할 때만 꿀의 달콤한 맛을 참으로 알듯이, 신앙의 단순한 관념을 관조하기 위해 뒤로 물러갈 때가 아니라 그것을 직접 지각할 때 신앙의 단순한 관념을 참으로 안다.” 체리는 “맛의 비유에 내포된 인간 감정에 대한 강조는, 에드워즈가 신앙을 묘사함에 있어서 인식과 살아 있는, 감정적 의지의 작용이 상호 밀접하게 결합된 것으로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에드워즈는 “영적인 이해는 주로 영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마음의 감각으로 이루어진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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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에게 있어서 신앙과 구별되는 구원의 확신이라는 가르침이 있었는가, 혹은 칼빈에게 실천적 삼단논법이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막스 베버(Max Weber)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이라는 저작이 나온 이후 많이 논쟁되어 온 문제이긴 합니다만, 칼빈에게 그런 사상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비크는 칼빈에게 실천적 삼단논법이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빌립보서 1:6 주석을 인용합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유익들을 끊임없이 명상하라. 이는 그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격려하고 확증하며 그들의 마음속에 항상 이 삼단논법을 숙고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예언자가 증거한 것처럼(시 138:8; 사 64:8) 그 자신의 손들이 시작한 일을 버리지 않는다. 우리는 그의 손들의 일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우리 안에 시작한 것을 완성할 것이다.” 이어서 비크는 “요컨대 칼빈은 실천적 삼단논법의 오용에 대해 경고하는 만큼 그것을 부인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칼빈은 요한일서 주석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신앙이 행위들에 근거한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비록 모든 사람이 그의 행위들로부터 그의 신앙에 대한 증거를 가지지만 신앙이 행위들에 근거된다는 것이 아니라, 행위들이 표시로서 첨가된 후속적 증거이다. 신앙의 확실성은 그리스도의 은총 속에만 있다. 그러나 삶의 경건성과 거룩성은 참된 신앙을 하나님에 대한 허구적이고 죽은 지식으로부터 구별지어 준다.” 이 구절을 볼 때 칼빈은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부정하지만 신앙에는 행위가 따르며, 그 행위는 참된 신앙의 증거임을 주장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표시로서 첨가된 후속적 증거입니다. 신앙의 확신의 문제에 있어서 중심적인 것은 하나님의 은총, 그리스도의 공적, 성령의 역사이지만 삶의 표적들도 주변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성령이 성도의 확신을 위해서 성도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에 그런 작용을 할 때 의지가 변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의지가 변할 때 그 변화는 실생활 가운데 식별됩니다. 그곳에서 의지는 내적인 면뿐만 아니라 외적인 면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생활의 투쟁과 시련 가운데서도 크리스천의 삶을 이행하려고 노력할 때, 인간의 영에 대한 성령의 증거는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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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에드워즈는 삼위일체적 도식에 있어서 칼빈과 생각을 같이 하였습니다. 신앙에 관한 칼빈의 정의에 있어서도 삼위일체적 도식이 나오지만 다른 곳에서도 삼위일체적 도식이 많이 나타납니다. 칼빈은 이런 자기의 도식이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에 부합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동인은 하나님 아버지시며, 질료인은 그리스도이시며, 형상인 혹은 도구인은 신앙이며, 목적인은 하나님의 공의, 혹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22:16을 주석하면서 “그러므로 죄의 용서에 있어서 우리는 하늘 아버지 이외 다른 창시자를 찾지 말아야 하며 그리스도의 피 이외 다른 질료인을 상상하지 말아야 한다. 형상인으로 말하면 성령이 참으로 지도적인 역할을 하시지만 복음의 선포와 세례와 같은 하급 도구가 첨가된다.”라고 말합니다.

이 본문들을 보면 칼빈은 대체로 하나님을 동인으로, 그리스도를 질료인으로, 성령의 활동을 형상인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17년 구마(Louis Goumaz)는 <존 칼빈의 신약성서 주석에 따른 구원론>이라는 저서에서 위와 비슷한 해석을 한 바 있습니다. 구마는 하나님 아버지를 구원의 동인으로, 그리스도를 질료인으로, 성령의 활동을 형상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인으로 해석했습니다.

홈즈는 에드워즈의 신학을 삼위일체론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또한 대너허(William J. Danaher Jr.)도 에드워즈의 윤리를 삼위일체론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성부는 구세주를 지명하고 제공하시며, 스스로 그 값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도록 허락하신다. 성자는 그 자신을 바치고 스스로 그 값이 되심으로 구세주가 되신다. 그리고 성령은 자신을 전달해 주심으로써 값 주고 산 그것을 우리에게 직접 전달해 주시는데, 그가 값 주고 산 것이다. . . . 그래서 우리의 유익이 구매된 것도 성령에 의해서이며, 그것을 구매하신 분도 성령이며, 구매된 대상도 성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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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과 에드워즈가 자연에 나타난 계시를 중시한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칼빈은 우리에게 있어서 세계의 아름다운 질서는 하나님을 명상하는 거울이라고 말했습니다. “정교하게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는 이 세계야말로 일종의 거울이요, 바로 이 거울로 달리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정관할 수 있다.”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보여 주는 증거는 하늘과 땅에 셀 수 없이 많다. 그것은 천문학이나 의학, 또는 일체의 자연 과학의 엄밀한 연구 대상으로 정해진 심원한 것들만이 아니라 가장 배우지 못하고 가장 무지한 자라도 보지 않을 수 없게 제시되어 그들이 눈을 뜨기만 하면 반드시 그것들을 목격하게 되는 것들이기도 하다. 사실 이러한 학문을 다소나마 수학한 사람들이라면 그 도움으로 하나님의 지혜의 비밀을 보다 더 깊이 통찰할 수 있다.” 이어서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학문에 무식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창조와 솜씨를 충분히 관찰할 수 없다든가,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별의 운행을 조사하고, 그 위치를 정하여, 그 간격을 측정하고, 그 특성들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기술과 정밀한 수고가 필요하다. 이러한 것을 연구할 때, 하나님의 섭리가 한층 더 명백하게 그 자체를 보여 주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 눈으로만 배운 일반 대중이나, 가장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그 기술의 탁월함은 깨닫게 마련이다. “그것은 특수하면서도 질서 정연한 천상의 무수한 다양성이 그 자체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물 가운데서도 특히 인간의 몸은 창조주의 슬기를 잘 나타낸다. “우리가 갈렌(Galen)의 노련한 기술로 인체의 관절, 균형, 미, 효용 등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재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체의 구조가 정묘하기 때문에, 그 창조주가 당연히 놀라운 일꾼으로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것이다.”

이상현 박사님에 의하면, 에드워즈는 자연과학이라는 관념 속에 들어가 그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지적하려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에드워즈가 아주 젊었을 때 쓴 글들 중에 원자에 대한 논문이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원자라는 것은 그 이상 부술 수 없는 물체, 더 이상 어떤 힘도 그것을 쪼갤 수 없는 그 무엇, 그것이 원자라고 했습니다. 에드워즈는 그 당시 과학자들의 정의를 받아들이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원자라는 것이 모든 물체의 근본적인 어떤 무엇이며 더 이상 부서질 수 없는 무엇이라고 할 것 같으면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힘이 아니냐, 하나의 어떤 행위가 아니냐, 즉 부서지는 것을 저항하는 그 행위, 결국 원자의 본질은 힘이요 행위다. 그런데 세상의 어떤 유한한 것도 그것을 부술 수 없다면 그건 무한한 힘이 역사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런 무한한 행위가 곧 원자라면, 원자는 결국 무한하신 하나님의 행위”라고 에드워즈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상현 박사님은 “이렇게 에드워즈는 자연과학의 도전에 겁을 먹기는커녕 과학자들이 얘기하는 원자 그 속에서 실제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지적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대담하고 독창성 있는 신학자로서의 또 철학자로서의 지성을 엿볼 수 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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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즈는 칼빈처럼 창조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에 두었습니다. 칼빈은 제네바 교회의 교리문답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인간의 삶의 최고 목적이 무엇입니까?” “인간들이 자기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로 당신이 그렇게 말합니까?”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영광을 받기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이 세상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의 시원이시기 때문에 우리 삶이 그의 영광을 지향하는 것이 확실히 적절합니다.”

놀은 에드워즈가 하나님의 영광을 전하는 것을 목회자와 신학자로서의 자신의 의무로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에드워즈 신학의 통합적 중심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였습니다. 에드워즈는 실체와 형상으로 실재를 설명하는 전통적인 서구의 형이상학으로부터 이탈하여, 그것을 성향적 힘(dispositional forces)이나 경향성들(habits)과 같은 하나의 역동적인 조직체로서의 실재라는 아주 현대적인 개념으로 대체하였습니다. 이상현 박사님은 뉴턴과 로크가 현실재에 대한 정태적이고 입자적인 견해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반면, 에드워즈는 그것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았습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완전한 현실태일 뿐만 아니라, 계속적인 활동을 통하여 완성된 그 현실태 자체를 계속 재현(repetition)하는 성향, 즉 경향성입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마음의 경향성은 합리성과 도덕적 행위를 가능케 하는 기능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경향성은 존재와 생성의 원리임과 동시에 앎의 원리입니다. 이러한 경향성을 통하여 앎은 존재와 생성에 연결됩니다.

역사 안의 모든 순간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의 재현 또 그 재현의 반복으로서 이해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한한 하나님의 영광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재현은 무한한 시간을 요구하며 다 성취되는 한 초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는 본질적으로 아름다움인데, 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그 본성에 의하여 “드러나며, 빛을 내며, 나타내고, 또 자기를 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아름다운(beautiful) 존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아름답게 만드는(beautifying) 존재입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이며, 다른 모든 존재들과 구별되며, 또한 그들보다 뛰어난 것은 주로 그의 신적 아름다움에 의해서”입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의 가장 기초적인 성향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 기뻐하는 성향, 곧 하나님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는 경우 기뻐하는 성향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완전한 관념을 가지는 동시에 하나님 자신을 무한히 사랑하십니다. 충만한 가운데 현실태로 존재하는 하나님은 또한 아름다운 관계들의 증식을 통하여 자신의 자아를 더욱 확대하고 증대하며 증식시키는 경향성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움에 아름다움을 더할 수 있으며, 또한 존재에 존재를 더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이상현 박사님은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가 아직도 현실화의 과정 속에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원초적이며 영원토록 완성된 현실태가 관계의 팽창을 향하여 아직도 나아갈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세계를 만드신 것은 자신의 영광을 전달하고, 피조물은 그 영광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인데, 이는 그 영광을 지성과 가슴으로 받도록 하기 위해서이다”고 말했습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시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자기 재현의 과정은 무한한 시간을 필요로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내적인 충만성이 무한히 완전하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을 사랑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피조물들에 의해 존경받는 것을 참으로 사랑하신다. 이는 모든 이들이 자기들이 사랑하는 자들에 의해 좋게 생각되는 것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이 하나님께 참으로 기쁨이 되도록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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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즈가 교회론에 있어서도 칼빈주의 전통에 충실하였는가 하는 것은 논쟁되는 문제입니다. 적어도 당시 미국의 칼빈주의 전통에 서 있던 사람들과는 불화했습니다. 에드워즈는 자기의 외조부 스토다드(Solomon Stoddard)와는 다른 입장을 가졌으며, 그의 이종사촌인 윌리엄스(Solomon Williams)와도 다른 입장을 가졌습니다. 윌리엄스는 에드워즈를 재세례파, 독립파, 영국 국교회를 후원하는 자, 독립적인 반율법주의적 분리주의를 후원하는 자라고 비판하였으며, 회중에게 독재를 하는 로마주의적 사제들과 연결시켰습니다. 그래서 놀은 에드워즈의 교회론은 청교도 전통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았습니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의 왕국을 위한 두 경쟁자, 즉 그리스도와 사탄이 있다. 종교를 공적으로 고백하려는 계획은 사람들이 어느 편에 있는지를 선언하려는 것이다.”

칼빈도 그의 교회론에서 권징을 강조했습니다. 칼빈은 교회 안에 참된 신자가 아닌 사람들이 들어와 있는 것은 “그들이 합법적인 재판에 따라 정죄되지 않거나 엄격한 권징을 마땅히 해야 할 만큼 항상 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칼빈은 이 점에서 교회 안에 사악한 자들이 많이 있다는 재세례파의 주장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사실상 교회들이 질서가 잘 잡혀 있다면 그 품안에 사악한 자들을 품고 있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목회자들이 권징을 게을리하거나 아니면 엄격하게 권징을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드러난 악인들조차 성도들의 집단으로부터 제거되지 않고 있습니다.

칼빈은 “나는 이것을 잘못이라고 인정하며 가볍게 보려고 하지 않는다” 하고 말했습니다. 칼빈은 사악한 자들과의 친교를 삼가는 것이 경건한 사람들의 임무임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인들의 장막을 피하는 것과 그들을 싫어하여 교회와의 친교를 끊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권징을 통해 가시적 교회 안에 있는 위선자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시적 교회 안에 위선자들이 있다고 해서 교회를 떠나 다른 집단을 형성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구속활동을 하는 두 방편은 말씀과 성례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순수하게 전파되고 성례가 바르게 집행되면 하나님의 교회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옛날의 카타리파나 노바티아누스파나 도나투스파 그리고 칼빈 당시의 재세례파는 교회의 일치를 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5:32의 말씀처럼 양과 염소를 분리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유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순결하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교회에서 분리해 나가는 일은 그리스도를 찢는 일이어서 용납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양떼로부터 제외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한 머리 아래 한 몸으로 모으는 것을 제외하고는 희망할 안전이 없기 때문이다. . . .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로부터 찢어지지 않을 것이며 찢어질 수 없다. 그것에 그는 불가분리의 매듭으로 결합되어 있다. . . . 그래서 우리가 신자들과의 일치를 이룩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단절된 것으로 본다.”

칼빈은 삶의 순수성의 문제로 분리해 나가는 것도 잘못이지만 교리에 다소 불순성이 개입된다 하더라도 분리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더욱이 교리들에 있어서나 성례들의 집행에 있어서 어떤 잘못들이 들어올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를 교회내의 교제로부터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참된 교리의 모든 조항들이 동일한 종류에 속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것들은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것으로서 모든 사람들은 그것들을 종교의 고유한 원칙들로 확정하고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 그리스도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해 있다는 것 등등이다.”

칼빈에 의하면 교리들 가운데 본질적인 것이 있고 비본질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런 본질적인 것이 부정되면 참된 교회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들 중에는 신앙의 일치를 깨뜨리지 않는, 논쟁이 되는 다른 것들이 있다.” 즉, 비본질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칼빈은 빌립보서 3:15을 인용하고 나서 “이것은 이런 비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불일치가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분열의 자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지적해 주지 않는가?” 라고 묻습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시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향의 충만한 실행이며, 하나님의 외향적 자기 재현의 완전한 실현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된 것의 영속적인 재현으로 의도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성향이 참으로 행사된 이후에도,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자신의 신적인 성향을 행사합니다.

하나님이 계속적으로 자신의 신적인 성향을 행사하는 것은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이미 성취된 바로 그것을 증대시키기 위함입니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마치 그리스도가 교회를 향해 자연적 경향성을 가지고 있어서 교회가 없으면 그리스도가 완성되지 않은 것인 양, 교회는 그리스도의 완성이라고 말한다(엡 1:23). 우리가 어떤 것을 향한 자연적 경향성이 있는데, 그것이 결여되어 있다면 우리는 불완전하다. 남자는 여자 없이 불완전하다. 여자가 남자 그 자신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신부 없이 불완전하다. 영혼은 육체 없이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들은 육체 안에 거하려는 자연적 경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 . 성자는 하나님의 충만이며, 교회는 하나님 아들의 충만이다.” 그리하여 교회의 점진적 세워짐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의 증대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한 세대에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에드워즈는 교회의 실재를 완성된 실재로 보는 동시에 점점 더 충만해지며 완벽해지는 과정 속에 있는 실재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에드워즈는 교회의 가시적 성격을 강조했습니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가시적 그리스도인들 혹은 성도들,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모든 제자들 혹은 청중들은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성서 관념에 따라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의 관심을 고백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에 대한 관계를 고백하는 것임이 명백하다” 이 고백은 심정의 경건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심정의 경건과 관계된 것들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교적인 것 혹은 그리스도의 종교를 고백한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 에드워즈는 가시적이고 고백적인 성도들이 아닌 사람은 그리스도의 가시적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에드워즈는 구원의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에게만 성찬 참여를 허락할 것을 주장하다가 결국 노샘턴 교회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칼빈과 에드워즈 두 사람이 다 권징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여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밀한 예정에 따라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많은 양들이 밖에 있으며 많은 이리들이 안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에드워즈만큼 나가지 않았습니다. 요컨대 칼빈은 교회 안에 예정받은 자와 예정받지 않은 자가 있음을 주장하지만 누가 예정받은 자인지는 하나님만 아신다고 말함으로써 권징을 끝까지 밀고 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칼빈의 이 구별을 회심을 경험한 자와 회심을 경험하지 않은 자로 나눔으로써 구별의 기준을 가시적이 되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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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즈는 비교적 단명했습니다. 1703년 10월 5일에 태어나서 1758년 3월 22일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55년을 채 살지 못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356년부터 430년까지, 루터가 1483년부터 1546년까지, 칼빈이 1509년 7월10일부터 1564년5월 27일까지, 웨슬리가 1703년부터 1791년까지 산 것과 비교한다면 가장 단명하였습니다. 에드워즈의 부모들에 비교하면 그는 훨씬 단명하였습니다. 에드워즈의 아버지는 1758년 89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어머니는 1771년 98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에드워즈가 좀더 오래 살았더라면 더 많고 더 훌륭한 저작들을 세상에 내놓았을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훌륭한 후손들을 많이 두었습니다. 그의 아들인 조나단 에드워즈 2세(Jonathan Edwards Jr., 1745-1801)는 에드워즈의 신학 전통을 계승하였으며, 그의 손자인 드와이트(Timothy Dwight, 1752-1817)는 1795년 예일 대학의 총장이 되어 부흥 운동과 개혁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윈쉽(Albert E. Winship)은 1900년 <죽스와 에드워즈: 교육과 유전에 관한 연구㰡>(Jukes-Edwards: A Study In Education and Heredity)라고 하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윈쉽은 이 책에서 죽스(Max Jukes) 가문과 에드워드 가문을 비교하였습니다. 죽스 가문의 1,200명의 후손들 중에는 300명 이상의 “직업적인 걸인들”, 50명의 탈선 여성들, 7명의 살인범들, 60명의 절도범들, 130명의 다른 죄수들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에드워즈 가문의 1,400명의 후손들 중에는 수십 명의 성직자들, 13명의 고등 교육 기관 총장들, 65명의 교수들, 그리고 다른 많은 명사들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