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

천국 도서관장 2010. 2. 3. 18:13

이 소논문은 비교적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의 신학의 핵심을 잘 다루고 있다. <신앙 감정론>을 중심으로 에드워즈 목사님의 구원론과 성령론을 설명하고 있다.

에드워즈 목사님은 신학자이기전에 목회자였다. 에드워즈 목사님의 목회의 경험과 학자적인 자질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신앙 감정론>은 그 중요한 결과물이다.

신앙 감정론에서 affection의 관한 해석은 매우 중요하다.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지정의를 모두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affection을 갖게 되는 것은 성령의 주입과 관계가 있으며, 성령의 주입은 Habitus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신앙은 성령의 주입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성령의 주입은 로크가 주장했듯이 마음에 도장을 찍듯이 마음에 새겨진다. 그것을 에드워즈 목사님은 ‘경향성’이라고 한다. 경향성은 하나님의 실체와 연계된다. 하나님은 경향성의 실체로서, 완전한 현실태이자 성향이다. 따라서 완전하시지만 내적인 완전성을 발산하신다.

성도에게 성령이 주입되면, 하나님의 경향성이 주입되기 때문에 그의 도덕적 성품을 닮아가고 그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실천한다. 그 실천의 목적은 자기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다. 경향성은 목적을 지향한다. 잠재태이지만 현실태로 계속적으로 향한다. 성도는 그러나 그 정점에 도달하지 못한다. 정점에는 하나님이 계신데 하나님은 무한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도는 영원히 행복한 것이다. 무한히 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개념을 확대하여 장경철 교수님은 ‘영광화의 논리’를 전개하기도 했다.


이 글은 어팩션에 대해 다각적으로 접근하여, 에드워즈 목사님의 신학, 특히 구원론과 성령론에 대한 개략적이지만 핵심적인 개념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만 하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

- 감정(affection)의 문제를 중심으로




이진락 목사

현대기독교아카데미 일일집중세미나 (2008년 12월 15일, 교회다움) 


1. 부흥 & 복음주의

* 부흥이란 무엇인가?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부흥(revival)이라는 말은 침체된 상태에서 회복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부흥을 강조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부흥을 침체기에서의 회복이라는 의미로 제한시키지 않고, 정규적이고 일상적인 신앙생활 속에서의 신앙적 경험을 넘어서는 성령의 특별하고 강력한 부어주심의 경험으로 간주한다. 로이드 존스(Lloyd Jones)와 제임스 패커(James Packer)가 이런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이 대표적인 부흥의 사건이고, 사무엘상 7장의 미스바 집회, 에스겔의 마른 뼈들의 소생 사건과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이스라엘 공동체의 회복 운동과 같은 구약의 여러 사건들도 부흥이고, 나아가서 종교개혁과 청교도 운동도 부흥 운동이다. 이런 식이면 약간 이상해진다!


* 도식화의 위험이 있지만 간단히 정리해보자면, 복음주의 운동은 종교개혁의 역사적 정통성을 상당 부분 계승하면서 동시에 부흥 운동적인 차원에서의 체험적 신앙복음 전도의 열정이라는 18세기적인 새로움을 가지고 있는 신앙 운동이다. 그리고 부흥 운동은 18세기에 등장한 복음주의 운동에 18세기적인 새로움을 불어넣어준 가장 중요한 신앙 운동이다.


* 한편, 에드워즈는 부흥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두 부류의 사람들과 대립했다. 한 부류는 부흥을 반대하는 이성주의자들이었고, 다른 부류는 부흥을 왜곡하는 열광주의자들이었다. 에드워즈의 입장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이 양편의 입장과 관련된 문제들 중 몇 가지만 아주 간단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 첫째로, 이성주의자들이나 열광주의자들이나 모두 공통적으로 인간의 이성과 감정을 분리시켰다. 이성주의자들은 이성이 감정을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열광주의자들은 이성과 무관하게 감정이 자신의 열정을 표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드워즈에 따르면, 이성과 감정은 통합된 것이다. 이성과 감정은 함께 간다-감정적인 이성이성적인 감정이다. 거기엔 빛과 열이 공존한다.

다음으로, 이성주의자들이나 열광주의자들은 부흥을 일방적으로 반대하거나 찬성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성주의자들은 부흥에 나타나는 감정의 생생한 뜨거움을 무조건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했고, 열광주의자들은 부흥에 나타나는 감정의 과도한 흥분과 무질서한 혼란스러움까지도 순수한 것으로 정당화시켰다. 에드워즈는, 전반적으로 볼 때 부흥은 분명히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속에 잔존하는 부패와 연약함 때문에 부흥의 역사 속에도 부패와 연약함이 스며들어왔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자 했다. 끝으로, 윤리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성주의자들이나 열광주의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균형 있게 강조하지 못했다. 이성주의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추상화시키고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려고 한다. 반면에 열광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너무 충만해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리를 잡을 여지가 별로 없다. 양자 모두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분리시키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신앙이고 이웃에 대한 사랑이 실천이라고 한다면, 이성주의자들과 열광주의자들은 신앙과 실천을 분리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신앙은 실천 속에서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고, 실천은 신앙 안에서 자기표현의 근거와 가능성을 얻게 된다고 생각했다.


2. 감정(affection)이란 무엇인가?

* 에드워즈는 인간의 영혼은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지성(understanding)이다. 지성은 지각하고 분별하고 판단하는 기능이다. 다른 하나는 확실하게 정해진 이름이 없는 어떤 기능이다. 이 기능은 지각하고 인식한 사물들에 대해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쪽으로, 혹은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 기능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 성향(inclination), 의지(will), 정신(mind), 마음(heart) 등.


* 영혼의 두 가지 기능 중 하나인 성향(inclination)은 우리의 관심사인 감정(affection) 개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성향이 행동으로 표현되든지 정신으로 표현되든지 간에 그 표현되는 정도는 매우 다양하다. 완전한 무관심의 상태를 약간 넘어서는 정도로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도 있고, 그보다 훨씬 강한 정도로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도 있다. 성향이 점점 더 강하게 작동해서 좋아함이나 싫어함의 정도가 활발하고 생생하고 뚜렷하게 될 때, 그것을 감정(affection)이라고 부른다.


* 에드워즈는 의지와 감정을 별도의 두 가지 기능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감정은 본질적으로 의지와 구별되지 않는다. 하지만 완전히 동일한 것도 아니다. 감정은 성향의 발휘가 보다 생생하고 감각적으로 뚜렷한 것이고, 의지는 감정이 일어났을 때 감정이 움직이는 만큼 움직이는 것이다. 의지는 감정이 없는 완전한 무관심의 상태에서는 움직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볼 때 의지의 모든 행동들을 감정이라고 부르지 않지만, 본질적으로 그것들은 감정과 다르지 않다. 다만 감정은 성향의 발휘의 정도와 방법에 있어서 차이를 보인다. - 이러한 에드워즈의 설명에는 어느 정도의 모호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 한편, 에드워즈는 감정(affection)과 격정(passion)을 구별한다. 격정은 생생하고 뚜렷하게 나타나는 감정과 달리 급격하게 나타난다. 또한 격정은 인간의 동물적 본능에 미치는 효과가 격렬하기 때문에 정신(mind)이 압도당해서 정상적인 자신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든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구별을 함으로써, 부흥의 시기에 성도들을 격정적인 감정적 분위기로 몰아갔던 열광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이해의 일면을 드러낸다.


* 부정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①affection은 emotion/feeling이 아니다. ②affection은 experience가 아니다. ③affection은 mystery가 아니다.



* 에드워즈가 말하는 affection은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분리되지 않고 통합되어있는 인격의 중심이다. 그러므로 affection은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감정이 아니고, 모종의 강렬한 신앙 체험도 아니다. affection은 지성적 토대 위에서 감정이 움직여서 의지적으로 실천하는 것-인간의 전인격적 중심의 활-이다. 이런 의미에서 affection은 아마도 heart와 거의 비슷한 의미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혹은 disposition of heart(마음의 성향)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 affection이라는 말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서문강 목사의 번역-“정서”, 정성욱 교수의 번역-“감정”, 강웅산 교수의 번역-“감화” 혹은 “열정”, 김남준 목사의 번역-“정동”(이정우 교수의 <개념-뿌리들2>라는 책에서 암시를 얻은 듯). affection을 우리말로 정확하게 번역하기는 매우 어렵다. 일단은 “감정”이라는 말을 사용하되, 그것이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감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 강조하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 같다.


* 정향(情向)? 에드워즈의 중요한 개념인 disposition(性向, 성향)과 짝을 이루는 차원에서 affection을 정향(情向)으로 번역할 수도 있지 않을까?


3. <신앙적 감정Religious affections>의 텍스트 분석

* 참으로 은혜롭고 거룩한 감정을 구별해주는 표지들 12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참으로 영적이고 은혜로운 감정은 마음에 미치는 영적이고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영향력과 작용으로부터 생긴다.

(2) 은혜로운 감정의 첫 번째 객관적인 근거는 신적인 일들의 형언할 수 없이 탁월하고 사랑스러운 본질 그 자체이지 그 일들과 관련된 자기 이익이 아니다.

(3) 참으로 거룩한 감정은 신적인 일들의 도덕적 탁월성의 사랑스러움에 근본적으로 토대를 두고 있다.

(4) 은혜로운 감정은 정신이 조명을 받아서(the mind's being enlightened) 신적인 일들을 올바르게 그리고 영적으로 이해하고 파악할 때 생긴다.

(5) 참으로 은혜로운 감정은 신적인 일들의 실재와 확실성을 판단함에 있어서 합리적이고 영적인 확신을 수반한다.

(6) 은혜로운 감정은 복음적 겸손을 수반한다.

(7) 은혜로운 감정이 다른 감정과 구별되는 또 다른 점은 그것이 본성의 변화를 수반한다는 점이다.

(8) 참으로 은혜로운 감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양 같고 비둘기 같은 영과 기질을 수반하고, 그런 영과 기질을 닮는다는 점에서 거짓되고 기만적인 감정과는 다르다. 다른 말로 하면, 참으로 은혜로운 감정은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것과 같은 사랑, 온유, 평온, 용서, 그리고 자비의 영을 자연스럽게 낳고 기른다.

(9) 은혜로운 감정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며, 기독교적인 부드러움(tenderness)의 영을 수반한다.

(10) 참으로 은혜롭고 거룩한 감정이 거짓된 감정과 다른 점 또 한 가지는 아름다운 균형(symmetry)과 조화(proportion)이다.

(11) 은혜로운 감정과 다른 감정 사이의 또 다른 매우 크고 뚜렷한 차이점은, 은혜로운 감정은 높이 고양되면 될수록 영혼의 욕구와 갈망이 더 커진다는 점이다. 일정한 영적인 성취를 얻은 이후에도 여전히 영혼의 욕구와 갈망은 더 커진다. 반면에, 거짓된 감정은 그 자체로 만족한 채로 머무른다.

(12) 은혜롭고 거룩한 감정은 기독교적 실천 속에서 발휘되고 열매를 맺는다. 내가 말하려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은혜롭고 거룩한 감정은 감정의 주체인 사람에게 힘과 영향력을 미쳐서 실천하게 만든다. 기독교적 규칙에 전반적으로 순응하고 그 규칙에 의해 나아갈 방향을 제시받는 실천은 그리스도인이 일평생 해야 할 실천이요 과업이다.


* 「신앙적 감정」의 근본 목적은 참된 신앙의 본질에 대한 탐구이지만, 표면상으로는 감정을 분석하고 검토하기 때문에, 우리는 12가지 확실한 표지의 구조를 감정의 관점에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 ①첫 번째 부분은 감정의 원천이나 토대에 관한 것이다. ②다음은 감정이 수반하는(attended) 것들에 관련된 표지들이다. ③마지막 부분은 감정 자체가 가지는 속성을 설명한다. 이러한 분석에 따른다면, 에드워즈는 참된 신앙의 중심을 이루는 감정이 흘러나오는 원천, 그 감정이 흘러나갔을 때 수반되는 결과들, 그리고 그 감정이 가지고 있는 속성들을 탐구함으로써, 참된 신앙과 거짓된 신앙을 구별하는 표지들을 제공하고 참된 신앙의 본질을 광범위하게 규명하고자 했다.

(※ 이제 affection을 둘러싸고 있는 에드워즈 신학의 주요 주제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4. 마음의 감각(sense of heart)과 새로운 영적 감각(new spiritual sense)

① 새로운 영적 감각은 영적이고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감각이다. 영적이라는 말은 성령의 특별하고 구원하는 영향을 미친다는 것-성령이 지속적으로 내주하시면서 새로운 본성의 원리로써 성도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신적이라는 말도 이와 비슷하다. 그리고 초자연적이라는 말은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와 효과가 인간의 본성이나 본성적인 원리의 작용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 새로운 감각은 “기존의 지각이나 감각들을 고양하거나 변경하거나 결합함으로써 산출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새로운 감각은 어떤 형이상학자들이 새로운 단순 관념(simple idea)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반복해서 말하자면, 이 새로운 영적 감각은, “꿀의 달콤함을 맛볼 때의 감각이 꿀을 눈으로 볼 때의 감각과 다른 것처럼,” 인간의 본성적인 감각(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과는 전혀 다르다. 에드워즈는 이 새로운 영적 감각이 생긴 것을 중생과 동일시하는 말도 한다.

② 새로운 영적 감각은 영혼의 새로운 기능이 아니고 본성의 새로운 원리이다. 새로운 영적 감각이 인간의 본성적인 다섯 가지 감각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해서, 새로운 여섯 번째 감각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③ 새로운 영적 감각은 하나님의 도덕적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맛보는 감각이다. 이 말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려면 본성적 선과 도덕적 선, 그리고 하나님의 본성적 완전성과 도덕적 완전성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새로운 영적 감각은 하나님의 본성적 완전성뿐만 아니라 도덕적 완전성까지 아는 감각이다.

④ 새로운 영적 감각은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빛이다. “영적이고 신적인 빛은 하나님에 의해서 영혼에 직접 주어졌으며(imparted), 자연적 수단에 의해서 획득되는 것과는 다른 본성을 가지고 있다.” “이 영적이고 신적인 빛이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일들의 신적인 탁월성에 대한 참된 감각, 그리고 그 감각에서 생기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일들의 진리와 실재에 대한 확신.” 에드워즈는 영적인 빛은 형식상(formally) 마음의 감각(sense of heart) 안에 존재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영적인 빛과 영적인 감각(혹은 마음의 감각)은 동일한 것이지만, 형식상으로는 영적인 빛이 영적인 감각 안에 존재한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⑤ 새로운 영적 감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영적인 감각인 것처럼 오해하기 쉬운 것들이 있다. 먼저,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이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깨닫는 것(conviction)은 영적이고 신적인 빛이 아니다. 성령께서 단지 영혼의 본성적인 원리만 도울 때에도 죄와 비참함을 깨닫는 일은 일어난다. 다음으로, 상상력 때문에 생긴 인상은 신적이고 영적인 빛이 아니다.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도 상상력에서 생기는 생생한 인상을 가질 수 있다. 자연인도 겉으로 보기에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어떤 사람의 모습이나 음성에 대한 인상을 가질 수 있지만, 그것은 영적인 빛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에 담겨있지 않은 새로운 진리나 명제를 제시하는 것은 신적인 빛이 아니다. (내가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식의 주장.) 마지막으로, 신앙적인 일에 대해서 감동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모두 영적인 빛은 아니다. 자연인들도 신앙에 관련된 이야기-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이야기와 다른 성경의 여러 이야기들을 듣고 감동을 받을 수 있다.(소설이나 영화에서 감동받는 것처럼 성경 이야기에서 감동받을 수 있다.)


5. 영적인 지식(지적 감정)


(1) 두 종류의 지식

* 에드워즈는 지식을 두 종류로 구분한다. 하나는 개념적인 지식(notional knowledge) 혹은 이론적인 지식(speculative knowledge) 이고, 다른 하나는 감각적인 지식(sensible knowledge) 혹은 영적인 지식(spiritual knowledge)이다. 개념적 혹은 이론적 지식은 하나님은 거룩하고 은혜로우시다는 견해를 갖는 것이고, 감각적이고 영적인 지식은 하나님의 거룩과 은혜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에 대한 감각을 갖는 것이다. 양자는 꿀이 달콤하다는 합리적 판단에서 나오는 지식과 꿀의 달콤함에 대한 감각을 갖는 것이 다른 것처럼 다르다. 이론적인 지식은 머리(head)로 아는 지식이고, 마음의 감각에 존재하는 지식은 가슴(heart)으로 느끼는 지식이다.


(2) 영적인 지식

* 첫째, 영적인 지식은 마음의 새로운 감각(혹은 새로운 영적 감각) 안에 존재한다. “영적인 지식(spiritual understanding)은 신적인 일들의 거룩함이나 도덕적 완전성의 지극한 아름다움과 달콤함을 느끼는 마음의 감각 안에 존재한다. 이뿐 아니라 신앙적인 일에 대한 모든 인식과 지식은 그러한 감각에 의존하며 거기에서 흘러나온다.”


* 둘째, 영적인 지식은 지성과 감정이 동시에 작용해서 이루어진 지식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감각적인 지식은 지식과 감정을 동시에 내포하는 지식이다. 기본적으로 지식이기 때문에 대상에 대한 지식적 이해가 있다. 동시에 감각적이기 때문에 대상의 좋고 싫음에 대한 감정적인 판단이 내포되어 있다. 감각적 지식은 지식과 감정을 분리시키지 않고 통합적으로 동시에 포착한다. 영적인 지식도 이와 같다. “거룩한 감정은 빛없는 열이 아니다.”라는 에드워즈의 유명한 말은 영적인 지식의 이런 성격과 관련 있다.


* 셋째, 영적인 지식은 영적인 감정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먼저 정신이 조명을 받고 신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파악하면 영적인 지식을 얻고, 이 영적인 지식에서 영적인 감정이 생긴다. 지식이 먼저 있고 감정이 다음에 온다.


* 넷째, 영적인 지식은 일반적 지식이나 교리적 지식과 다르다. 영적인 지식은 하나님의 은혜로 성도들이 얻는 구원에 이르는 지식(saving instruction)이다. 반면에 일반적 지식은 성령의 일반적 사역을 통해서 자연인이 얻는 지식이다.


* 다섯째, 영적인 지식은 영적인 일들을 직관적으로 포착한다. 영적인 지식은 이론적이고 체계적인 지식이라기보다는 지식의 대상을 감각적이고 직관적으로 포착함으로써 생기는 지식이다. 영적인 지식은 새로운 영적 감각이 어떤 대상을 감각적으로 파악할 때 생긴다. 이 새로운 영적 감각은 어떤 대상을 보는 즉시 좋고 나쁨을 느낀다.


(3) 이론적인 지식 혹은 교리적인 지식

* 지식이 없이는 어떤 은혜의 수단도 유익을 줄 수 없다. 예컨대 사람의 정신에 지식을 전달해줄 수 없다면 복음을 설교하는 일은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겠는가?(롬 10:14) 지식이 없다면 사랑도 있을 수 없다. 전혀 알지 못하는 대상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해의 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마음에 도달하지 못한다. 교리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복음에 나타난 교리의 탁월함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성적인 지식이 먼저 있지 않다면 영적인 지식이 있을 수 없다.


6. 회심


(1) 회심의 단계론 혹은 회심의 형태론

* 에드워즈는 회심의 순서나 단계나 방법을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단계와 방법을 뚜렷하게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그것이 회심했다는 확실한 표지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단계와 방법을 따르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회심하지 않았다는 확실한 표지인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단계를 강조하는 일에] 너무 지나쳐서 주의 성령을 지도하여 그분의 발걸음을 정하고 특정한 단계와 방법에 그분을 제한하였다.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성령이 그리스도인들의 회심에서 역사하시는 방법은 헤아릴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다.”


(2) 회심의 정의

* 에드워즈에 따르면, “회심은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이다. 마음을 변화시키고 죽어있던 영혼에 생명을 주입하는 역사이다.” “회심은 종종 소경이 눈을 뜨는 것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과 창조의 역사(피조물이 완전히 새롭게 되는 역사)와 갓난아기가 태어나는 것에 비유된다.”

* 또한, 회심은 인간의 전 존재를 바꾸어놓는 변화의 원리를 주입하는 것이다. 회심이 일어나는 즉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변화의 원리는 반드시 삶 속에서 표현된다. “인간은 어머니 뱃속에서 생명이 시작되는 순간 인간의 본성에 속한 모든 것들을 받는다. 거기서 영혼과 육체가 함께 시작되고 영혼의 모든 능력들이 부여된다. 몸의 지체들, 모든 혈관, 힘줄, 그리고 모든 감각들이 생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죄인에서 성도로 변화할 때, 인간 전 존재는 새롭게 만들어진다......... 여기에 의지와 성향(inclination)의 새로운 원리가 있다.”


(3) 회심의 추구

* 회심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면 인간이 추구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왜 그렇게 회심의 추구를 강조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신학적 차원이 아니라 목회적 차원에서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회심의 추구는 신학적 차원에 속한 일이라기보다는 목회적 차원에 속한 일로 간주하는 것이다.


(4) 회심 체험의 성격

*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은혜를 주로 감각적인 언어로 묘사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를 영적으로 보고 듣고 맛보고 느낀다는 표현들을 수없이 많이 사용한다. 회심은 소경이 눈을 떠서 빛을 처음으로 보고 느끼는 것과 같은 사건이고, 날 때부터 미각이 전혀 없던 사람이 처음으로 꿀의 달콤함을 맛보는 것과 같은 사건이다. 이전에 한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종류의-완전히 다른 차원의 사건을 영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특히 새로운 영적 감각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아름다움과 달콤함을 느끼고 맛본다는 표현과 같은 것들은 회심이 굉장히 강렬하고 감각적으로 깊은 인상을 주는 사건인 것처럼 생각하게 한다.


* 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회심자가 다 자신의 회심을 그렇게 생생하고 감각적으로 느끼고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럴까? 소경이 눈을 뜨는 것과 같이 감각적으로 강렬한 체험적 역사인데 왜 회심의 순간을 모르는 경우도 있을까? 에드워즈는 회심의 첫 순간에는 영적 감각이 아주 작고 불완전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7. 확신과 자기-기만(혹은 위선)의 문제


(1) 종교개혁 신학에서의 확신 교리

* 칼빈은 신앙을 확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8장 3항에서는 확신이 신앙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신앙을 가진 모든 자가 어느 정도의 확신을 소유하지만 확신의 정도에는 다양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존 머리(John Murray)도 이 견해에 동의한다. 그는 확신은 신앙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반성적 행위 혹은 이차적 행위라고 말했으며, 확실성(certainty)은 신앙에 속하지만 확신(assurance)은 그 확실성에 대한 증언이나 증거라고 주장하면서, 신자들은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여 확신을 강화해나가라고 권고했다.


(2) 확신, 실천, 그리고 위선(자기-기만)

* 칼빈 이후 청교도들은 대체로 실천 혹은 성화를 확신의 주요 수단으로 간주했다. 실천을 통해서 확신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개혁주의자들은 이와 관련해서 실천적인 삼단논법(practical syllogism)을 말했다.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 내가 믿는다는 실천적인 증거가 있다(즉, 나의 성화된 생활). 그러므로 나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객관적 근거도 없고 실천적인 삶의 뒷받침도 없이 무작정 믿어버리는 맹목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확신은 자기-기만적 확신 혹은 위선적인 확신이다. 위선자의 확신은 자신이 확신을 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신하는 척 가장하는 것이 아니고 정말로 자신이 믿고 있다고 확신하지만 실제로는 믿고 있지 않는 거짓된 확신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자기에게 속고 있는 상태에서의 확신이다. 이러한 위선자들의 확신은 “거만하고 고압적이고 격렬한 확신”이며, “바리새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확신”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직접 이러저러한 일들을 계시해주셨다고 믿기 때문에 어떠한 토론도 어떠한 검토도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극단적인 확신을 가지게 된다.


(3) 확신과 믿음의 본질

* 에드워즈는 확신을 믿음의 본질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에드워즈는 스코틀랜드의 토마스 길레스피 목사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펼친 신학적 토론에서 바로 이 확신과 믿음의 본질의 문제를 비교적 비중 있게 다루었다. 토마스 길레스피 목사는 의심은 믿음과 반대가 되기 때문에 성도는 자신의 구원의 상태에 대해서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서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저는 신앙과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은 서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저는 신앙이 없는 것과 신앙이 없는지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은 서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릅니다.”


*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에, 나에게 구원하는 믿음이 있다는 확신이 없을지라도 구원하는 믿음이 있을 수 있다. 다시 한번 다르게 말하면 이렇다. 확신은 믿음의 본질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확신이 없어도 믿음은 있을 수 있다. 에드워즈는 불신앙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동일한 논의 구조를 만들어서 이렇게 표현한다. “좋은 상태에 있는지를 의심하는 것은 불신앙 그 자체의 죄와는 전혀 다르다. 거기에는 불신앙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 없다.” 다시 확신과 믿음의 본질의 문제로 돌아와서, 중요한 한 가지 사항을 덧붙이고자 한다. 확신은 믿음의 한 부분 혹은 한 요소가 아니고 믿음의 효과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가는 길에는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의심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믿음이 생생하고 힘차게 작용하면 할수록 확신이라는 효과는 더 크게 나타난다.


8. 경향성(habit)

* 아리스토텔레스의 경향성 개념 - 습득된 경향성(habit).

* 이상현 교수는 경향성 개념을 중시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에드워즈는 경향성(habit)이나 성향(disposition)을 자기 사상의 중심 개념으로 삼고 성향적 존재론(dispositional ontology)을 전개했다. 그에 따르면, 경향성은 능동적이고 목적론적이고 원인적인 힘이며 존재론적으로 실재하며 지속하는 원리이다. 또한 순전한 잠재태와 충분한 현실태의 중간 지점에 위한 실질적인 원리로서 사건들과 행동들을 지배하고 일으키는 하나의 모형이다. 그는 경향성의 원리를 온 세계와 사물과 인간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으로 보았으며 나아가서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도 경향성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충분한 현실태인 동시에 경향성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확대하고 재현한다고 주장하였다.

* 스티븐 홈즈(Stephen Holmes)는 이상현의 에드워즈 해석을 정면으로 논박하며 에드워즈는 성향적 존재론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스티븐 홈즈에 따르면, 에드워즈가 배운 개혁주의 전통은 경향성의 개념에 관심이 없었고 신학적 보수주의를 견지했다. 그런데 이상현의 에드워즈 신학 설명에는 과정신학의 주장들과 비슷한 점이 엿보인다.

* 에드워즈는 신앙적 감정이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신앙적 감정이 지속적인 감정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신앙의 정도는 현재 감정이 작용하는 정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감정 속에서 작용하는 경향성의 힘과 고정성에 의해서 판단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거룩한 감정은 경향성을 가지고 있기(habitual) 때문이다. 그리고 경향성의 힘은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결과나 현상, 혹은 마음의 생각이 갑자기 급하게 변해서 생기는 내부적인 결과에 항상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 에드워즈에 따르면, 경향성은 본성의 원리 혹은 행동을 위한 토대이다. 그리고 은혜의 경향(tendency)은 은혜의 본성이자 거룩한 실천의 원리이다. 경향성에 대한 이러한 설명들은 중요하다. 이에 따르면, 경향성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새로운 영적 감각이나 본성의 새로운 원리와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새로운 영적 감각 그리고 거기에 수반되는 새로운 성향(dispositions)은 새로운 기능이 아니라 본성의 새로운 원리이다.”


* 새로운 영적 감각, 본성의 새로운 원리, 본성 안에 있는 토대, 영혼의 기능을 작동시키는 것, 그리고 행동을 위한 토대, 이런 말들이 모두 거의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것들이 경향성이다. 그렇다면 경향성은 성도의 영혼 속에 주입되는 영적이고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원리라고 이해할 수 있다.

에드워즈는 주입된 경향성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표현들은 성령의 내주의 여러 가지 측면들을 담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성령의 주입 혹은 조명이 성도의 영혼 안에 본성의 새로운 원리나 토대로 혹은 경향성으로 자리를 잡으면 영혼의 기능을 작동시켜서 실천하게 한다.


* 경향성은 궁극적으로 실천을 지향한다. 경향성 속에는 실천의 원리가 들어있다. 어떤 면에서는 경향성 자체가 실천의 원리이다. 은혜는 ‘생명’이기 때문에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생명의 운동을 한다. 생명의 운동은 열매를 맺는다. 은혜가 실천 혹은 열매와 연결되는 것은 샘이 물줄기로 흘러나가는 것이나 태양빛이 광선으로 비추어지는 것과 같다. 행동의 원리인 경향성이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과도 같다. 경향성은 행동의 원리로써 지속적으로 머물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실제적으로 행동으로 나타나서 열매를 맺는다.


9. 성품의 변화(지속적 감정)

* 에드워즈는 참된 성도들이 어떻게 지속적으로 은혜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은혜로운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인상적인 비유를 한다. 그것은 별과 유성의 비유이다. 위선자들은 잠시 동안 강력한 불꽃으로 타오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움직임이 지속성이 없고 불규칙적인 유성과 같다. 그 불꽃은 금방 사라져버린다. 그런 유성들은 오랜 기간 후에 한번씩 나타나는 것 같다. 그러나 참된 성도들은 항성(fixed stars)과 같다. 그 별들은 뜨고 지며 종종 구름에 가리기도 하지만 지속적으로 궤도 안에 있으며 지속적으로 빛을 발한다.

에드워즈는 유성과 별의 비유와 함께 다른 비유들도 말하면서, 성도의 은혜의 지속성을 한층 더 강조하고 싶어 한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위선자들은] 소나기가 내리는 동안 그리고 그 이후 잠시 동안 시냇물처럼 흘러서 넘치지만 곧 말라버리는 물과 같지만, 참 성도는 살아있는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와 같다. 그 물줄기는 소나기가 오면 증가하고 가뭄이 오면 감소하지만, 여전히 지속적으로 흐른다.” 위선적인 감정은 바람에 불려가는 구름처럼 불규칙하고 격렬하지만, 은혜로운 감정은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흐른다. 강물은 구불구불 흐르기도 하고 장애물을 만나기도 하지만 바다에 이를 때까지 같은 방향으로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흘러간다.


* 성도의 영혼 속에서 성령이 내주하시면 새로운 영적 감각이 생기고 본성의 새로운 영적 원리가 작동하게 되면 영적인 지식이 생기고 감정과 의지가 새로운 원리에 따라서 마음을 변화시킨다. 성도의 전 인격에 걸쳐서 전반적인 성품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인의 성품들 중에서 특별히 다섯 가지를 강조한다. 마음의 거룩에 속하는 모든 것은 참으로 그리스도인의 성품에 속하는 것이지만, 그 중에서 특별히 복음의 본질과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의 본질에 더욱 일치하는 기질이나 성품이나 덕이 있다. 에드워즈는 그런 덕을 “겸손, 온유, 사랑, 용서, 자비와 같은 것들”이라고 말한다. 성품의 변화와 관련된 이 다섯 가지 덕에 대해서 에드워즈는 자세하게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기서 그 세부적인 내용을 다루지는 않겠다.


10. 실천(실천적 감정)


(1) 실천은 표지들 중의 표지이다.

* 에드워즈는 기독교적 실천은 표지들 중의 표지라고 주장했다. “기독교적 실천은 경건의 모든 다른 표지들을 확증하고 최종적으로 판정해주는 중대한 증거라는 의미에서 표지들 중의 표지이다.” “본성상 은혜보다 열매를 맺고자 하는 경향(tendency)이 더 큰 것은 이 세상에는 결코 없다.” 그리고 “은혜가 주입되는 하나님의 역사인 중생은 실천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실천은 은혜의 목표이다. 모든 사역은 이러한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들이다(엡 2:10). 참으로 실천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목표이다.” 실천은 은혜의 목표이며 그리스도의 구속의 목표라는 선언은 실천의 중요성에 대한 강력한 진술이다. 구원의 은혜는 마음속에만 머물지 않고 성도의 변화된 성품을 통하여 삶 속에서 실천적으로 활동한다. 실천은 구원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증거이고 표지이다.


* 그러나 실천 그 자체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을 실천했는가(실천의 내용)하는 것만으로는 참된 은혜의 표지로서의 역할을 충분하게 수행했다고 말할 수 없다. 왜 실천했는가(실천의 동기)와 어떤 근거에서 실천했는가(실천의 토대 혹은 근원)를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천은 가장 훌륭한 표지이고 증거이다. 실천하지 않는 신앙은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며, 실천으로 표현되어야만 증명의 영역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2) 실천은 영혼의 행동을 표현하는 몸의 행동이다.

* 은혜의 작용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1)내재적인 행동(immanent act), (2)실천적이거나 효력 있는 작용(practical or effective exercise). 내재적인 행동은 영혼 안에 머무르면서 거기에서 시작되고 끝나는 은혜의 작용이다. 이것은 외적인 행동이나 실천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이것은 성도들이 종종 묵상할 때 경험하는 은혜의 작용이다. 이것은 마음의 생각을 넘어서 나아가지는 않지만, 멀리 떨어져서 간접적으로 실천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한편, 실천적이거나 효력 있는 작용은 직접적으로 행동과 관련된다. 이것은 외적인 행동을 지시하는 의지가 명령하는 행동을 통해서 생기는 은혜의 작용이다. 그러므로 내재적인 행동과 외적이고 실천적인 행동은 연합하여 기독교적 실천으로 나타난다.


* 실천은 분명히 외적으로 드러난 몸의 행동이지만 영혼의 행동(동기/마음의 성향)과 연합하여 영혼의 행동을 표현하는 몸의 행동이다. 내적인 마음과 외적인 실천을 이렇게 밀접하게 연합시킴으로써 에드워즈의 신앙실천주의가 성립한다. 신앙은 실천을 통해서 증명되는 것이다. (이것이 오용되면 실천을 통한 결과만 보는 결과중심주의로 전락할 수 있다.)


(3) 실천은 내적 체험과 연합을 이루는 중요한 체험이다.

* 에드워즈에 따르면, 내적 체험과 외적 체험인 실천이 있다. 모든 실천은 체험이지만, 모든 체험이 실천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체험하기를 원하는 자는 실천하라! 내적인 체험이 얼마나 영적이고 신적인가를 알려면 그 체험이 얼마나 실천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이 큰 깨달음과 사랑과 기쁨을 체험한 척 할지라도 그것이 실천에 미치는 영향 이상으로 존중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말도 있다. “신앙은 많은 부분이 거룩한 감정에 내재한다. 그런데 참된 신앙을 뚜렷하게 구별해주는 감정의 작용은 실천적인 작용이다.” 영적으로 실천하게 만들지 않는 감정은 참된 은혜에서 나온 감정이 아니다.


(4) 실천은 이신칭의 교리와 모순되지 않는다.

* 에드워즈는 기독교적 실천에 대한 강조가 결코 이신칭의론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역설한다. 실천은 은혜의 근거가 아니라 은혜를 증거하는 표지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면, 실천을 강조하는 것은 이신칭의론과 모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필요한 일이다. “우리가 행함(실천)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지 않기 때문에 행함(실천)을 무시하는 것은 사실 모든 신앙, 모든 은혜, 참된 복음적 거룩, 그리고 모든 은혜의 체험을 무시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거룩한 실천을 참된 은혜의 근거로 생각하는 것은 율법주의이지만, 참된 은혜를 구별해주는 표지로 생각하는 것은 결코 율법주의가 아니다.


* 에드워즈는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경이 실천을 강조하는 만큼 우리도 실천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이 크게 강조하는 것들을 가볍게 여기고 강조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의 신앙에 나쁜 영향을 준다.


11. 마무리 (*)


※ 조나단 에드워즈 관련 저서 소개 - 한국어 번역판을 중심으로

Edwards, Jonathan.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Vol. 1 : Freedom of the Will. Edited by Paul Ramsey.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57.

<의지의 자유> 채재희 옮김, 예일문학사, 1987. (절판)

Edwards, Jonathan.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Vol. 2 : Religious Affection. Edited by John E. Smith.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59.

<신앙감정론> 정성욱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5.

<신앙과 정서> 서문강 옮김, 지평서원, 2000(개정판).

<영적 감정을 분별하라> 김창영 옮김. 생명의말씀사, 2001. (현대적인 영어로 표현을 고치고 요약한 책을 번역한 것.)

Edwards, Jonathan.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Vol. 4 : The Great Awakening. Edited by C. C. Goen.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72.

<부흥론> 양낙흥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5. (이 책에는 <놀라운 회심 이야기>,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 및 <균형잡힌 부흥론>, 이렇게 3권의 저술이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부흥과 개혁사에서는 ‘조나단 에드워즈 클래식’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이 책들을 각각 분리하여 개별적인 책으로 만들어서 출판하기도 했다.)

<놀라운 회심 이야기> 정부흥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97.

<부흥을 원하면 고정관념을 버리라> 배응준 역, 나침반, 1998.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을 번역한 번역서. 그리고 이 책의 말미에 에드워즈의 유명한 설교인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장중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설교도 수록했다.)

Edwards, Jonathan.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Vol. 5 : Apocalyptic Writings. Edited by Stephen J. Stein.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77.

<기도합주회> 정성욱, 황혁기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0. (에드워즈의 묵시록적 저술들 중에서 합심 기도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부분만 따로 떼어서 번역한 책.)

Edwards, Jonathan.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Vol. 7 : The Life of David Brainerd. Edited by Norman Pettit.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5.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생애와 일기> 윤기향 옮김, 크리스찬다이제스트, 1984.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생애와 일기> 송용자 옮김, 복있는사람, 2008.

Edwards, Jonathan.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Vol. 8 : Ethical Writings. Edited by Paul Ramsey.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9.

<조나단 에드워즈의 사랑과 그 열매> 서문강 옮김, 청교도신앙사, 1999. (에드워즈의 윤리적 저술들 중 고전 13장 강해 설교 부분을 번역한 책.)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 존 파이퍼, 백금산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3. (이 책의 제2권에 해당하는 부분(171-357)은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천지창조 목적>을 번역한 것이다.)

<참된 미덕의 본질> 노병기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5.

Edwards, Jonathan.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Vol. 9 : A History of the Works of Redemption. Edited by John F. Willson.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9.

<구속사> 김귀탁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7.

Edwards, Jonathan. <기독교 중심> 이태복 옮김, 개혁된신앙사, 2002. (이 책은 1734년에 행한 에드워즈의 설교 “이신칭의론”과 예일판 에드워즈 전집 21권에 수록되어있는 <은혜에 관한 논문>, 두 저술을 번역합본한 것이다.)

Jonathan Edwards의 설교 선집들도 여러 권 번역되었다. 책 소개는 생략하니 각자 찾아보실 것.

Cherry, Conrad. The Theology of Jonathan Edwards: A Reappraisal. Garden City, NY: Anchor Books, Doubleday & Co., 1966. Reprinted, Bloomington, Ind.: Indiana University Press, 1990.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 주도홍 역, 이레서원, 2001.

Lee, Sang Hyun. The Philosophical Theology of Jonathan Edwards.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8.

<조나단 에드워즈의 철학적 신학> 노영상, 장경철 옮김, 한국장로교출판사, 1999.

Lee, Sang Hyun. ed. The Princeton companion to Jonathan Edwards.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5.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 이용중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8.

Marsden, George M. Jonathan Edwards: a lif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3.

<조나단 에드워즈 평전> 한동수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6.

Murray, Iain H. Jonathan Edwards: a new biography. Carlisle, Pa.: Banner of Truth Trust, 1987.

<조나단 에드워즈, 삶과 신앙> 윤상문, 전광규 옮김, 이레서원, 2006.

Nichols, Stephen J. Jonathan Edwards: a guided tour of his life and thought. NJ: P&R Publishing, 2001.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채천석 옮김, CLC, 2005.

Piper, John.; and Taylor, Justin., eds. A God Entranced Vision of All Things. Wheaton, Ill.: Crossway Books, 2004.

<하나님 중심적 세계관> 이용중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7.

이상현, <삼위일체, 은혜 그리고 믿음> 대한기독교서회, 2003. (이상현 교수는 예일대의 에드워즈 전집 발간위원회의 편집위원으로서, 제21권의 편집을 담당했다. 본서는 제21권의 편집자 서론 부분을 본인이 직접 번역한 것이다.)

양낙흥, <조나단 에드워즈, 생애와 사상> 부흥과개혁사, 2003.

국내의 에드워즈 신학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사람들로는 강웅산 교수와 장경철 교수가 있다. 이들의 논문을 찾아서 읽어보실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