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 때의 좌우명은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하자’였다. 약간 운명론적인 사고를 하던 때여서, 하나님께 전심으로 충성하자는 마음가짐이 거칠게 표현되었던 좌우명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다. 대신 ‘귀한 인생,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하자’이다. 정말 인생은 귀하고 소중했다. 주님의 핏값으로 사신 인생이었기 때문이다. 회심하기 전에도 주님은 구원의 서정으로 이끌어가고 계셨던 것이다.
이 평이한 설교는 우리 인생에 대해 귀한 고찰을 하게 한다. 과연, 나는 지금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세상은 하나님 나라를 대적한다. 즉, 성도는 어떤 형식으로라도 핍박받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족하는가? 더 나아가서 충성하겠는가?
피상적인 긍정은 가장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 세상 철학자이지만, 나는 프랑크프르트 학파의 비판철학자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을 매우 가치 있게 생각하고 있다. 그는 어느 대상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정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부정한 대상을 다시 부정해야 한다고 했다. 즉, '부정의 부정의 법칙'을 통해야만 어느 대상을 참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신앙에 적용해보자, 믿기 전의 나는 하나님을 최선의 기업으로 택했는가? 아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므로 하나님을 최선의 기업으로 택하지 않았다. 일단 하나님 나라가 부정된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 나라를 알아보는 단계가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부정을 한 이유는 그 대상을 체험적으로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복음을 들어보고, 그에 대해 반응하는 단계가 있는 것이다. 먼저, 복음을 듣고, 판단하고, 하나하나 나에게 적용해 보는 것이다. 정말 나는 죄인이고, 다 떨어진 걸레조각같은 의를 붙들고 있는지 철저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을 인정한다면, 이제부터는 삶을 스캔해서 송두리째 부정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다. 믿음과 회개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로 죄사함과 칭의를 얻고 성령의 내주하심을 경험해야 비로소 나는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택한 성도가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을 보면, 부정의 부정의 법칙이 적용이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를 처음에는 부정한 후, 그것을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부정한 것을 다시 부정하는 것이다. 이때 참 긍정이 되어 흔들리지 않는 신념체계가 되며, 신앙으로 적용하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진 성도가 되는 것이다.
성도라도, 흔들릴 때가 있다. 핍박과 고난, 그리고 핍박과 고난을 주는 사람들의 번영을 볼 때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부정의 인식이다. 이때 성도는 그 마음을 다시 부정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시편기자와 같이 성소에 들어갈 때 부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시 73:17).
즉, 성도는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세상의 공격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에드워즈 목사님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한다. 거듭나게 되면 그리스도와 영원한 연합상태에 있게 된다.
또한 에드워즈 목사님은 인생 후반에는 ‘경향성’이라는 개념으로 철학적 신앙으로 이 연합상태를 규명했다. 경향성이란, 성령의 속성으로, 성령께서 내 마음에 내주하시어 내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한다.
경향성(거듭난 성도의 성향, 성령)을 얻게 되면, 나는 이 세상에 살아도 무한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시민이 되기 때문에 이 세상의 시민권을 버리고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얻게 된다. 따라서 이 세상의 가치에 얽메이지 않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성령의 권능을 받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며 살아가게 된다.
따라서 성도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최선이 기업이 되는 것이다. 이 세상 그 기업은 시작되는 단계이며, 천국에 가서는 완전한 상태가 된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에드워즈 목사님에 의하면 천국에서도 하나님은 무한하시기에 천국 백성은 하나님에 비해 유한하기 때문에 늘 새롭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영원히 성장한다는 것이다.
성도가 택한 최선의 기업이신 하나님(시 73:25)
조나단 에드워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시 73:25).
이 시편에서 시인 아삽은 악한 자의 상황을 생각할 때에 그 마음속에 일어난 커다란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2절, 3절에서 다음과 같은 관찰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4절과 그 다음 구절들에서 그는 우리에게 악한 자의 삶의 어떤 것이 그에게 유혹이 되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가 관찰한 첫 번째 것은 악인은 번영한다는 것이고 모든 일이 잘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번영 가운데에서 그들이 하는 행동을 관찰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부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보았고 부를 함부로 남용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이 잘 살도록 계속해서 내버려둔다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이 곤경에서 벗어나는 데에 그가 어떻게 도움을 받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성소에 들어갈 때에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16-17절). 그리고 계속해서 그가 도움을 받았던 생각들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악한 자의 비참한 최후에 관한 고려입니다. 지금 그들은 번영할지라도 무서운 최후를 당면할 것입니다(18-20절). 둘째, 성도의 복된 종국에 관한 고려입니다. 비록 성도는 어려움 가운데 살지만 결국 행복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21-24절). 셋째, 경건한자는 하나님 외에 다른 기업이 없지만 악인보다 훨씬 더 나은 기업을 차지할 것입니다(25-26절).
악인은 형통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같은 고통도 없습니다. 그러나 고통 중에 있지만 경건한자는 훨씬 더 나은 몫을 차지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밖에 다른 아무것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을 소유한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그리하여 시인은 그가 누리는 축복을 인식하고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본문 바로 앞 구절에서 시인은 성도가 이 세상에 있을 때뿐만 아니라 내세에서도 얼마나 행복한 자인지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주의 교훈으로 인도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날 때에도 그들은 여전히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후에는 영광 가운데 영접받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인식이 오늘 본문에서 현세와 내세뿐 아니라 하늘과 땅에서도 다른 어떤 기업을 원하지 않는다는 고백을 하게 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우리는 다음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참으로 경건한 자의 마음은 하늘에서나 땅에서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더 원한다는 것입니다.
경건한 자는 하늘을 사모한다
경건한 자는 실제로 있는 그 무엇보다도 하늘의 하나님을 더 사모합니다. 경건한 자들은 하늘에 그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그가 소망하는 바는 거기에 있습니다. 하늘은 그의 선택받은 나라이고 기업입니다. 먼 나라에 있는 여행자가 그 고국을 사모하듯이 경건한 자는 하늘을 사모합니다. 나그네는 그가 있는 이방 나라에서 잠시 동안 머무는 것에 만족할 수 있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는 고국을 더 사모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11:13-16상).
경건한 자가 하늘을 사모하는 것은 외국에 가 있는 아이가 아버지의 집을 사모하는 것에 견줄 수 있습니다. 아이는 잠간동안 외국에서 지내는 것에 만족할 수 있지만 그가 돌아가서 거하고자 소망하는 장소는 고향집입니다. 하늘은 참된 성도들의 아버지 집이 있는 곳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 14:2). "내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요 20:17).
성도가 그 마음을 하늘에 두는 중요한 이유는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지극히 높은 분의 보좌가 있는 곳입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임재하는 장소입니다. 그의 사랑이 영광스럽게 나타나는 곳이며 성도가 하나님과 더불어 지내게 될 곳입니다. 그가 계신 그대로 하나님을 보게 될 곳이며 하나님을 완벽하게 사랑하고 섬기고 찬양하며 즐기게 될 곳입니다.
만약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하늘에 계시지 않는다면 성도는 하늘을 그처럼 간절하게 찾지 아니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광야의 힘든 여행을 하는 수고를 하지 아니할 것이며 또한 그가 죽을 때에 하늘로 간다고 하는 생각이 수고와 고통중에 처한 그에게 위로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순교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하며 하늘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할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하늘로 향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핍박자들로부터 잔인한 고통을 받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그들의 영광스러운 구주와 하늘 아버지와 함께 지내게 될 희망을 갖지 않았다면. 수많은 성도들이 그랬듯이 가난 속에 유리하며 추방을 당하며 멸시를 받으며 고통과 고문을 당하면서도 세상 것을 가지고 하늘의 기업을 바꾼다는 희망 속에서 그들의 세상 소유와 그들의 세상 친구들을 기꺼이 포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신자의 마음이 하늘에 있는 것은 그들의 보물이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자는 하늘에 있을지도 모르는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모합니다. 하나님과 비교할 만한 것이 하늘에 실제로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동등하게 사모할만한 것이 거기에는 존재할 가능성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다른 것을 하늘에서 즐길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예를 들면 이슬람교도들은 하늘에 가면 온갖 육욕적인 기쁨과 쾌락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모하메드가 상상한 것들은 그가 고안해 낼 수 있는 것 가운데서 가장 인간의 육체적인 욕망과 취향에 맞는 것들이고 그의 추종자들을 그럴듯하게 유혹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참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한 것, 영광스러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그의 본성과 욕망에 일치하는 것을 고안해 낼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모든 죄가 제거될 것이고 완벽하게 하나님을 본받게 될 것이며 영원토록 하나님을. 격조 높게 사랑하는 일과 그의 사랑을 즐기는 일로 보낼 것입니다. 만약 하늘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없고 단지 엄청난 부와 무한한 보물과 황금과 세상에서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존경과 육욕적인 즐거움과 쾌락의 충만함밖에 없다면,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없는 것을 보상해줄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하늘은 공허하고 우울한 곳일 것입니다.
성도는 모든 피조된 것들이 주는 즐거움에 그 영혼이 만족할 수 없도록 지음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그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신자에게 여러분이 원하는 어떤 것을 제공해주어도 만약 여러분이 그에게 하나님을 부인하게 한다면 그는 자신을 비참한 존재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소망하는 것의 중심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의 영혼을 그 정당한 중심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한 그는 결코 평안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이 신자의 본성
성도는 그가 소원하는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는 보이는 것이나 일시적인 것을 보이지 않는 것과 영원한 것보다 더 좋아하지 않습니다(고전 4:18). 이 세상에서 그가 즐기는 것은 하나님의 것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더불어 조금 사귈 뿐이며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의 현현 중에서 조금만 즐길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후에 충만한 즐거움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세상에 있는 가장 귀한 보석보다도 신자에게는 더 소중한 것입니다. 복음은 임금님의 보물창고나 인도의 모든 광산보다 더 귀한 보물을 담고 있습니다.
신자는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현세에서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것을 더 추구합니다. 현세에서 신자들이 획득할 수 있는 영적인 것에는 커다란 격차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님과 더 깊은 사귐과 교제를 하며 그를 훨씬 더 닮은 경지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라 하더라도 미래의 것과 비교할 때에는 지극히 작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도는 영적인 것을 얻는 데 진보할 수 있고 좀 더 획득하기 위해서 전력해야만 합니다. 이미 얻은 정도에 만족해서는 안 되고 굶주리고 목마른 것처럼 의를 사모해야만 하며, 갓난아기처럼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고 그로 인해서 성장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더 알고 싶고. 보다 더 하나님을 닮아가고 싶고, 생활과 언행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더 닮고 싶은 것이 신자의 소원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 27:4).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시42:1-2).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하여 이와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시63:1-2).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130:6).
비록 성도들마다 이 시편기자가 가졌던 것과 동일한 정도까지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지 못하지만 성도들은 모두 동일한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더욱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것은 특별한 성도들의 소원일 뿐만 아니라 성도들 모두의 일반적인 소원입니다. 이사야서 26장 8-9절에는 특별한 성도들이 아니라 일반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이것이 나타납니다. “여호와여 주의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 곧 주의 기념 이름을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 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아가서 3장1-2절,5 장6~8절을 참조하라).
성도라고 해서 은혜 안에서 언제나 활기있게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은혜 중에 있을 때는 그 은혜를 민감하게 활용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세상 모든 것보다 더 갈망하여 은혜 안에서 부요해지는 것을 세상의 모든 부를 획득하는 것보다 더 갈구합니다.
그들은 사람이 주는 명예보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존경을 더 사모하며(요 5:44) 세상 모든 쾌락보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더 갈망합니다. 그들은 바울 사도가 나타내는 것과 같은 정신을 소유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성도는 이 세상 어떤 것보다 그가 이미 얻은 하나님께 속한 것을 더 사모합니다. 회심할 때 그 심령 속에 유입된 것을 세상이 줄 수 있는 어떤 것보다 더 보배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간간이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탁월하심에 관한 관찰을 악한 세상의 모든 보화보다 더 귀중히 여깁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서 있는 그 관계. 그의 영혼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있는 결속을 세상의 최대의 신분보다 더 귀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의 영혼 속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땅의 어떤 장식보다 더 가치있게 여깁니다. 그의 생각에는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 장식되는 것을 빛나고 값진 진주의 찬란함 같은 외형적인 아름다움을 사모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혼에 허락하시는 의의 옷을 왕자들이 입는 예복보다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가 때때로 하나님 안에서 얻는 영적인 기쁨과 즐거움을 죄의 낙보다 훨씬 더 귀한 것으로 여깁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
하나님을 더 좋아하는 성도
성도는 세상에서 소유한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더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일시적으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무엇이든지 그는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더 좋아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시 16:5-6).
성도는 세상에서 부요할 수 있지만 그의 마음은 하늘의 부요함에 두고 살아갑니다. 그는 세상 친구보다 먼저 하나을 택하고 동료인생이 그에게 보여줄 수 있는 어떤 존경보다도 하나님의 호의를 택합니다. 비록 무의식중에 이런 것들이 마음을 차지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너무 많이 자리하기도 합니다만 하나님을 위한 자리를 그는 항상 마련해두고 있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
그는 그가 내어다볼 수 있는 세상의 어떤 즐거움보다도 하나님을 더 즐거워합니다. 인생들은 그들이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보다 그들이 소망하는 세상적인 행복에 더 마음을 두고 추구합니다. 그러나 경건한자는 이 세상에서 가질 것으로 내다보는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더 선호합니다. 그도 어떤 때는 타락한 인생이기에 세속적인 즐거움에 휩쓸릴 때도 있지만 그는 다시 자기 자신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그것은 그 자신의 본성이 아닙니다. 그는 다른 정신을 가지고 사는 자입니다.
상상할 수 있는 어떤 세상이 줄 수 있는 즐거움보다 하나님을 더 좋아하는 것이 신자의 정신입니다. 그는 그가 지금 소유한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더 좋아할 뿐만 아니라, 동료인생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더 귀하게 생각합니다. 만약 그가 갖고 싶은 만큼 많이 세상의 물질을 소유할 수 있을지라도, 마음먹는 만큼 세상의 물질을 소유할지라도, 상상하는 만큼 엄청난 재물을 가진다고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 안에서 그가 가진 몫을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는 세상 모든 나라들보다 그리스도의 나라를 더 좋아합니다.
하나님을 최고로 존경하는 사람
여기에서 우리는 신자가 세상을 살아갈 때에 어떠한 변화를 겪더라도 그는 행복한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변치 않는 하나님이 그가 택한 몫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도 세상적인 손실을 만나기도 하고 세상적인 즐거움의 많은 것을 박탈당하기도 하지만, 모든 것보다 더 좋아한 하나님은 여전히 남아 있으며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그는 변화무쌍하고 고통스러운 세상에 머물지만 행복합니다. 그의 행복의 기반이 되는 그가 선택한 몫은 세상을 초월하고 모든 변화를 초월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날 때에도 여전히 행복할 수 있는 것이 그의 기업이 계속해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을 성도가 박탈당할지라도 그의 가장 중요한 기업은 박탈당할 수 없습니다. 그의 유산은 확실히 남아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이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세상적인 쾌락들을 보장할 길을 찾을 수가 있습니까? 그들이 세상을 살 동안에 상실하거나 손상당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있습니까? 그들이 귀하게 여기는 모든 것은 다 그들 자신만큼이나 불확실한 것들입니다. 그들이 마음을 쏟고 있는 세상적인 즐거움들은 종종 가장 사라지기 쉬운 것들입니다. 그러나 모든 선한 것의 원천이 되신 분을 선택한 자들이 누리는 행복이 얼마나 큽니까! 하늘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보다 그분을 더 귀하게 여기는 자들은 영원토록 그분을 상실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으로 우리 자신이 성도인지 아닌지를 살펴봅시다. 이런 것이 성도들의 태도인 동시에 그들에게만 있는 고유한 것들입니다. 성도 외에는 아무도 본문의 진리를 고백할 수 없습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한 사람의 선택은 그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자기 몫으로 하나님을 선택한 자는, 하나님을 모든 다른 것보다 더 좋아하는 자야말로 신자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을 하나님으로 택했고 예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하나님으로 존경하는 것은 그분을 세상 만물보다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자기 하나님으로 존경한다면 그 분은 그의 하나님입니다. 그 사람과 참 하나님 사이는 연합되어 있으며 언약관계가 있습니다. 자기 하나님이 누구냐에 따라서 한 사람이 누구인가가 결정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한사람이 신자인지 아닌지를 알고자 하신다면 여러분은 그의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만약 그가 참 하나님을 최고로 존경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참 하나님의 일꾼일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생각하는 그 무엇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신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이 어떠한지 물어 보십시오, 여러분은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더 좋아하십니까? 이 문제를 만족할 만큼 결정짓는 것은 때로는 어렵습니다. 경건치 못한 자도 거짓된 열정에 속을 수 있습니다. 경건한 자도 우둔한 중에 혼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관해서 여러분 자신을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한 문제에 관해서 충분히 말할 수 없지만, 여러분은 다른 문제에 관해서는 분명히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는 이유
죽어서 천국에 가고 싶은 주된 소망은 무엇 때문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별로 천국에 가고 싶은 큰 소망이 없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지옥에 가는 것도 상관치를 않습니다. 그리고 또한 지옥으로부터 안전할 수만 있으면 천국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천국에 대한 소망을 여러분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왜 그런지를 물어보십시오.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고 그분과 교제하고 싶고 그분을 닮아가고자 하는 것이 주된 이유입니까? 하나님을 보고 싶고 거기서 그분을 즐거워하고 싶습니까? 이런 생각들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과 소원이. 천국에 가고자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죽음을 피할 수 있고, 그것이 여러분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일이라면 여러분은 하나님 없이 이 세상에 항상 사는 편을 선택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에 세상을 떠나서 그와 함께하고자 하십니까?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의 임재와 교제를 박탈당한 채 영원토록 지상의 소유와 함께 여기에 살고자 한다면 그분과 여러분의 영혼 사이에는 아무런 영적 교제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여러분은 영원토록 서로 낯선 관계입니다.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에 거하기를 원하십니까? 거기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영광스러운 특권을 즐기기를 원합니까? 하나님을 향한 거룩하고 완전한 사랑과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기를 원하십니까?
다른 모든 것보다 하늘에 이르는 길로써 그리스도를 좋아하십니까? 참으로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을 더 좋아합니다. 아버지를 자기 아버지로서 아들을 자기 구속자로서 성령을 그의 성화자로서 귀하게 여깁니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하나님을 제일 귀한 행복으로 즐기기를 선택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에 앞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에 이르는 길로써 귀히 여기는지를 물어보십시오.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에 대한 의식,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길이 탁월함을 인정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주권적 은혜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복되시고 영광스러운 구주의 보혈과 의가 생명에 이르는 가장 탁월한 길이요, 거저 주시는 은혜의 길이라고 여기십니까? 그것이 하늘의 기업의, 가치를 부여하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 기업이 전달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자신의 의를 통해서, 여러분 자신의 업적을 통해서. 혹은 다른 중보자를 통해서 구원받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것으로 여기십니까?
당신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면 다른 모든 방법보다 하나님과 항상 동행하는 길을 택하겠습니까?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하나님을 더 귀히 여기는 자는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 이르는 길로써 하나님을 선택합니다. 그들은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편을 원합니다. 세상 길의 마지막에 도달했을 때뿐만 아니라 순례의 길을 걸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 길은 힘든 길이며 조심해야 될 길이며 자기 부인의 길이기도 하지만 성도들은 타락과 욕망을 충족시키는 죄의 길보다 그 길을 택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고 싶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없이 세상번영 속에 영원히 살고 싶습니까? 아니면 궁핍하고 비천한 처지에 살지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속에 있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며 섬기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며 그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자신을 여러분 의 하나님으로 나타내시며 그의 영광을 보여주시며 그의 사랑을 표현하시며 그의 자비로운 얼굴빛을 여러분에게 비추십니다. 궁핍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편안하고 번영 가운데 세상 것들로 풍부하게 살면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나그네로 지내시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과 자녀로서 서는 것에 만족하며 그와 더불어 은혜로운 교제를 즐기는 것을 원하시며 그의 자녀로서 그분을 알아가는 특권을 가지는 것에 만족하지 않으시렵니까? 세상물질이 풍성하지만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을 여러분은 비천한 삶으로 여기십니까? 만약 최종적으로 세상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참되고 진지하게 원하는지에 대해서 결정하는 데 의혹이 있고 어려움이 남아 있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 결정을 지을 수 있는 확실한 길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지를 보여주는 최상의 근거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가
주님으로 만족하는 마음이 강하게 느껴지는 경우, 어떤 사람이 교리 부분에서 말했던 것과 같은 정신을 가질 수 있고 아주 낮은 단계에서 실천할 수도 있지만 그런지 안 그런지에 대해서 의심하는 자리에 머물러있고 만족스러운 결단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탁월함을 발견할 기회를 주길 기뻐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모든 의심을 넘어서 바울이 말하는 것과 같은 확신을 갖게 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그리고 그들은 오늘 본문에 나온 것과 같은 고백을 담대히 할 수 있게 하십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그런 때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참사랑을 가졌는지 어떤지에 대해서 만족하게 알 만한 사역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분명히 보고 느낍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의 성령과 더불어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점에 대해서 수긍하신다면 진지하게 그것을 얻기 위해서 구하십시오. 이러한 정신이 분명하게 생명력 있게 행사하기를 구하십시오.
이 목표를 위해서 여러분은 은혜 안에서 자라도록 애써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나간 때에 그러한 경험을 했을 수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을 만족시켰지만 지금 다시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런 경험을 보다 자주 하도록 구하십시오. 거기에 이르는 길은 않을 향해서 열심히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때에 여러분은 하나님과 더불어서 보다 더 깊은 사귐을 갖게 될 것이고 은혜 안에 강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더 큰 은혜를 더욱 활기 있게 더욱 자주 사용하는 길이며 여러분이 하나님에 대한 지고한 사랑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또 다른 길은 여러분이 다른 모든 것보다도 하나님을 실제로 더 좋아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더 좋아하는 것을 실천할 기회가 왔을 때 실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나 저것에 집착하는지, 아니면 다른 것을 포기하든지 하나님을 포기하든지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가장 집착해 있는 세상 것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지 그때 실제적으로 보여줄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께 집착해서 이와 같이 그분을 섬기는 자의 삶입니까?
진지하게 그 마음속에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더 좋아하는 자는 실제로 그것을 행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다른 것들이 경쟁적으로 다가올 때 한 사람이 무엇을 택하는지가 정당한 시험방법일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 무엇을 선택하는지가 자기가 누구인지를 결정해줍니다. 그러므로 이와같이 성경이 그렇게 많이 강조하는 것에 대해서 진지한 표시가 없다면, 우리 자신은 모든 것을 팔고 세상을 포기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가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고 고백하는 우리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확실한 가운데 서 있지 말고 달려가십시오. 허공을 치는 것 같이 하지 말고 열심히 싸우십시오.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키십시오. 이미 획득했던 것에 만족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해서, 그리스도 예수를 향해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상을 위하여(빌 3:12) 좇아가십시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 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벧후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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