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신앙-그 기원과 계승자들>, 로이드 존스 저, ‘조나단 에드워즈와 부흥의 중요성’(pp. 359-382).
<들어가는 글>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목회를 하기 직전인 1927년에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의 자료를 접했으나 더 상세한 자료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2년 후 두 권의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을 발견한 후, 극히 값진 진주를 발견한 것 같이 기뻐했으며, 실로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이 에피소드를 접할 때마다 나는 몇 년 전에 두 권으로 된 배너 어브 트루스사 판 에드워즈 전집을 발견했으나, 돈이 부족해 사지 못해 매우 안타깝던 때가 생각나곤 한다). 그만큼 에드워즈 목사님의 저작은 진리를 사모하는 크리스천에게 영적으로 지적으로 매우 가치가 있다.
나는 에드워즈 목사님을 설교와 책들을 읽다가 하나님의 내밀한 심정을 보곤 불에 덴 것처럼 깜짝 놀랄 때가 종종 있었다. 에드워즈 목사님에게 성령께서 강하고 세미하게 역사하셨기에, 그 진리의 말씀을 읽는 나에게도 뜨거움이 전달됐으리라... 또한 목사님은 설교자로서 능력을 받아, 청중들에게 정확한 성령의 음성을 전할 수 있었다고 사료된다.
에드워즈는 사람들로 하여금 조물주와 만나도록 깊은 곳으로 이끌어 주는 사람입니다(p. 372).
실제로, 에드워즈 목사님은 설교자로 탁월했다. 그리고 설교자로서 목사님은 청중에게 다른 무엇보다도 ‘인상’을 남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설교의 일차적이고 근원적인 목적은 정보를 제공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에드워즈가 말하듯이 인상을 남기는 것입니다. 문제는 설교할 때 인상입니다. 그것이 설교한 후에 기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것입니다.(p. 370).
에드워즈 목사님은 설교자뿐만 아니라 뛰어난 체험신학자이자 부흥 신학자였다. 목사님은 성령의 부으심을 부흥이라고 보았다. 목사님이 설교시 인상에 남기는 것을 중요시 한 것도 부흥에 대한 소망 때문이었다. 성령의 부으심은 체험이며, 정말 성령의 부음을 받으면 강력한 인상이 남고, 그것은 곧 거룩한 삶의 열매로 맺혀지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님은 부흥을 고대했으며 사모했다. 윗필드 목사님과 동역한 것도 부흥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두 방향에서 부흥의 공격을 받았을 때, 이를 방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을 했다. 즉, 형식주의와 열광주의 공격에 정면으로 맞서 싸웠으며, 이를 기록으로 남겨 후세의 크리스천에게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는 무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전적으로 부흥을 반대하는 부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칼빈주의자였으나 부흥을 싫어했습니다. 또한 감정적인 요소를 싫어했고 색다른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그 당시 일어나고 있었던 것에 대해 많은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중략...
그러나 이와 정반대의 극단적인 요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거칠었습니다. 그들은 광신주의자들었는데 극단으로 치우쳐서 어리석음의 죄를 범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p. 373).
그가 이렇게 부흥에 대해 옹호하고 방어했던 이유는, 성령의 소멸을 막기 위해서였다. 에드워즈 목사님은 성령의 부어주심을 부흥이라고 보았고, 성령의 소멸을 역부흥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역부흥을 막기 위해, 즉 성령의 소멸을 막기 위해, 그 당시 홀로 고군분투했던 것이다. 이를 늘 눈에 가시같이 여기던 사단은 전 군단을 오로지 하나의 표적, 에드워즈에게 집중해서, 그가 무너질 때까지 공격하고 공격했다(이는 우리 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부흥이란 성령의 부어 주심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요,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위의 주체가 아닙니다... 에드워즈는 부흥이 진정으로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상기시켜 줍니다(p. 379)
그가, 이렇게 부흥을 강조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인간의 구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었다. 에드워즈 목사님은 크리스천으로서, 목회자로서, 설교자로서, 부흥가로서, 신학자로서 또 그뿐만 아니라 그의 전 생애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말한다. 그의 모든 책을 읽어보면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이 사람의 글을 읽고 나서 그가 가장 강조한 것이 무엇인지 포착하도록 합시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어떤 유익을 얻었다고 거기서 머물지 마십시오. 또한 최고의 체험을 누렸다고 거기서 머물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더 알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이것은 언제나 참된 체험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p. 381).
1976
조나단 에드워즈와 부흥의 중요성
조나단 에드워즈와 부흥의 중요성을 다루면서 우리는 올해의 주제인 “미국에서의 청교도주의 실험”을 계속 다루어 결론을 내리려고 합니다. 이 주제를 택한 목적은, 영구그이 멍에에서 벗어난 지 200주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는 우리의 미국 친구들에게 찬사를 보내고 그들의 독립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수적인 이유와 동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17세기 새 대륙에 일어났던 일로부터 무엇인가 배우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올해의 여구모임에서 생각해 왔던 것은 다시 한 번 청교도의 정수를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지적하고 강조했습니다.
실제로 청교도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미국에서의 청교도주의 실험은, 청교도주의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보여 주었다고 믿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청교도주의가 본질적으로 목회 신학에 대한 하나의 관심이라고 믿게 하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청교도주의의 정수는 이미 교리 문제에서 일어났던 개혁을 기독교 교회의 본질과 생활과 정책 속에 반영시켜 실행하려는 바람입니다. 금년도 웨스터민스터 청교도 연구회의주제가 그점을 다음과 같이 입증합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주로 핍박 때문에-대서양을 건너서 이 새로운 나라에 살려고 갔습니다. 그들은 모두 영국 국교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드른 자기들이 진정 믿는 바대로 행할 자유를 얻게 되자 즉시 국교도이기를 단념했습니다. 그들은 감독 제도를 버리고 회중교회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이 점은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교훈입니다. 이 일은 후에 영국에 있는 거의 모든 청교도들에게도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고 믿는 바를 행할 수 있는 기회와 자유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영국에서도 찰스 1세를 대항한 겪고 난 후 30년 만에, 공화정 시절 그리고 1662년 대추방 때에 비로소 실시된 것을 즉각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러므로 미국에서 일어났던 일은 청교도주의의 참된 성격과 본질에 대한 가장 중요한 증거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어쨌든 저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특별히 다루려고 합니다. 저는 그에 댛나 몇 가지 주요한 사실에 대해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는 1703년에 태어나서 1758년에 죽었습니다. 이상스럽게도 그는 천연두 예방 접종을 맞은 결과로 죽었습니다.
그는 매우 탐구적이고 활동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신학뿐만 아니라 과학문제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의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당싱 미국에서 제공되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 다음에 예일대학에 입학했습니다. 1727년 그는 매사추세츠 주 노스햄턴에서 외조부 솔로몬 스토다드의 부목회자로 안수를 받았습니다.
1년쯤 후 외조부가 돌아가시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혼자 목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1750년 교회에서 쫓겨날 때까지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기이한 일 중의 하나입니다. 그것은 교역자들과 설교자들에게 한 마디 격려의 말로 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정말 빼어난 천재이며 능력 있는 설교자로서 대부흥의 중심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1750년 투표 결과 230대 23으로 교회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형제들이여, 여러분의 교회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놀라지 마십시오.
그렇게 노스햄턴 교회에서 추방당한 그는 당시 변경 지역으로 인디언들이 사는 곳인 스톡부리지로 갔습니다. 그는 그리고 보내심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가 그곳에 있는 동안 가장 위대한 걸작들에 속하는 몇 권의 책을 썼기 때문입니다.
존 번연이 12년 동안 벧포드의 감옥에 갇혀 있음으로 명작을 쓸 수 있었던 것같이, 조나단 에드워즈도 이처럼 고독하게 됨으로서 명저를 남기게 된 것 같습니다. 그곳에 있다가 그는 뉴저지대학의 학장으로 초빙되었는데, 지금의 프린스턴대학입니다. 거기서 얼마 후에 그는 제가 설명 드린 것같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생애에서 뛰어난 사실은, 그의 노스햄턴 사역시 일어난 놀라운 부흥이었습니다. 그것은 1734년 말부터 1735년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후 1740년 조지 윗필드 일행의방문과 대각성에 참여한 일입니다. 이것은 이 사람의 생애에서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이 연구회에서 언급된 사람들과 이 사람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는 18세기 사람이지 17세기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가 생각해왔던 사람들은 거의 다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와 함께 청교도주의의 새로운 요소와 새로운 요인이 나타났다고 말해도 잘못이 없다는 저는 믿습니다. 위대한 청교도들은 거의 대부분이 학자적 기풍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소양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쓴 저작들의 문체와 제목과 소제목에서 독특한 특징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에드워즈는 비교적 그런 것에서 자유롭습니다. 그 결과 그의 방법은 보다 직설적이고 보다 생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가 생각해 온 전통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계약신학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불충분한 언약 개념을 완전히 거부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1750년 그가 교회에서 축출당한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특정인의 자녀에게 세례를 주지 않으려 했고,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의 행동 및 해위 기준을 주장했습니다. 덧붙여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학습 준비 교육을 전혀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점에서 그는 토마스 후커보다는 존 코튼에게 속합니다. 그는 그의 관점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습니다.
“기독교 세계의 모든 것을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사람이 하늘나라에 갈 자격과 권한을 얻는 것은 어떤 위대한 신적 감화를 단번에 엄청난 변화를 받음으로써이지, 사람들이 자신의 노력을 행사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점진적 변화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지극히 다양하다는 것이 그것을 주장합니다”[전집(works), 2권, 557면], 제가 증명하겠습니다만 그는 성령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영향력과 갑작스럽고 극적인 회심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같이 윌리엄 에임즈의 저작들을 읽기 좋아했고, 그 저작들에 크게 도움을 입어 다른 사람들처럼 칼빈주의자였고 회중교회주의자였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기독교 신앙과 생활의 도덕적, 윤리적 요소들을 크게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감히 주장하고 싶은 바는, 에드워즈를 통해서 청교도주의가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것이 있고, 더 나아가서 청교도의 정신과 삶과 부가적인 생명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것이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에게 그처럼 뛰어난 특징이 있었기 때문에 청교도주의가 그의 삶과 사역에서 만발했다고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그는 교회가 아주 생명 없는 상태로 오랫동안 계속된 후 나타난 사람입니다. 이 점을 인식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도 이와 매우 유사한 시기에 살고 있으므로 이 점은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이 위대한 부흥이 일어나기 직전의 상태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것은 당시의 목회자였던 쿠퍼 목사가 에드워즈의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이란 책의 서문에서 밝힌 것이다.
“그러나 모든 개혁교회들이 그동안 얼마나 죽어 있었고, 얼마나 메마른 상태에 있었습니까? 황금의 소나기가 멈췄습니다. 성령의 감동이 중단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복음은 탁월한 성공을 전혀 거두지 못했습니다.
회심도 드물었고 정말 그러한 일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도 그 전처럼 깨어 있거나 뜨겁거나 규례들을 통해서 새로워지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년 동안 이 나라에 사는 우리들의 서글픈 신앙 상태였습니다(때때로 긍휼의 소나기가 내렸던 특이한 한두 장소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그밖에 다른 마을들과 교회들은 그러한 비를 받지 못했습니다). 신실한 교역자들과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이 슬퍼했던 것과 같이 영적 분별력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할 것입니다.”
쿠퍼가 말하는 것처럼 산발적인 역사는 있었습니다. 특별히 조나단 에드워즈가 목사가 된 그 교회는, 그의 외조부 스토다드가 사역할 때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는 확산딪 않고 간헐적으로 나타났다가 완전히 끝나버린 듯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처럼 교회는 생명 없는 상태를 기속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가뭄 후에 소나기가 쏟아진 것입니다. 생명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최소한 100년 동안, 아이 실제로는 오늘날까지 미국인들에게 영향을 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최근 40여 년 동안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주목하면 매우 놀랍습니다. 제 체험에 비추어서 그 점을 예증할 수 있습니다. 저는 1927년 목회 사역에 들어가기 직전, 옥스퍼드대학교 신학 대학에서 우등을 차지했던 제 친구 중 한 사람에게 읽을 책에 대한 도움을 구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학위를 위해서 읽었던 매우 많은 책을 추천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맥기퍼트라는 사람이 쓴 칸트 이전의 프로테스탄트 사상이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그 책을 통해서 제가 받았던 유일한 인상은 조나단 에드워즈라 불리우는 사람에 대한 장(chapter)이었습니다. 물론 거기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주로 철학자로 다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더 읽을 만한 것이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좀 말해 주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 친구는 그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조나단 에드워즈나 그가 한 일에 관해서 제게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약 2년 후 우연하게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 두 권을 만나게 되어 5실링을 주고 샀습니다. 저는 극히 값진 진주를 발견한 사람의 비유 속에 나오는 자와 같았습니다. 그 두 권이 제게 끼친 영향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1930년대 초반에 에드워즈에 대한 관심이 놀랍게 되살아났습니다. 페리 밀러는 이 일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만이 아니었습니다. 매년 조나단 에드워즈에 관한 책이 여러 권씩 나온 것 같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쓴 설교 원고를 훑어보느라고 예일대학의 에드워즈의 전집을 출판하는 것입니다-완전한 전집을 말입니다. 저는 1967년, 두 사람을 만나서 이 위대한 사람의 설교 원고들 중 몇 편을 다루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최근 배너 오브 트루스(Banner of Truth) 사가 발행한 두 권의 책이 흔히 전집으로 여겨지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1860년대에 그 두 책에서 나타나지 않는 다른 수많은 자료들이 포함된 한 책을 출간한 사람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더 많은 내용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설교들과 서간문들과 때때로 비방록식으로 적어 놓은 글들과 수필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완전한 전집으로 출판된 예정입니다.
물론 이 뛰어난 사실을 설명하려면, 다른 여러 가지 사실들 중에도 조나단 에드워즈는 미국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라는 것을 염두해 두어야 합니다. 누구나 이 점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한 가지 경고를 하려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새로 출판된 책들을 읽을 때 매우 조심하고 분별해야 합니다.
영문학 교수들이 쓴 책도 있고, 철학자들이 쓴 책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위대한 사상가로서 또는 위대한 작가로서 또는 미국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사람으로서의 에드워즈에 관심이 있습니다. 또 어떤 의미에서 그는 영문학에 있어서 낭만주의 운동을 일으킨 선구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아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또는 부지중에 그를 잘못 해석 해석하고 잘못 나타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책을 읽을 때는 분별력을 가지고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200여 년 전에 죽은 이 놀라운 사람이 지난 19세기 내내 계속 영향을 끼쳤던 것과 같이, 지금도 여전히 미국의 사상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에 대한 견해는 여러 갈래입니다. 예를 들어서 올리버 홈즈는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지옥의 가장 깊은 곳에 뿌리박은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후대의 지각을 흔들어 놓을 언어”로 글을 썼다고 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에드워즈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그의 신조는 온화해지고 인간다워졌을 것입니다.”
다른 말로해서 에드워즈는 “아침 식탁에 앉은 독재자”쓸 그런 류의 작품을 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에드워즈가 그러한 사람임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에드워즈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올리버 홈즈라는 휴머니스트가 바라는 대로의 사람이 아닌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1920년대 초반 스코프스가 진화론을 가르치다가 윌리엄 브라이언과 저 유명한 “원숭이 재판”을 벌이자, 과학 교사인 스코프스를 변호한 클라렌스 다로우는 이렇게 썼습니다. “에드워즈가 세상에서 한 일은 주로 어리석은 아녀자들을 겁주고 자기가 섬긴다고 고백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닙니다....... 혼동되었거나 병든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야 어찌 그와 같이 ‘진노의 하나님 손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설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진노의 하나님 손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에드워즈의 설교를 지적했기 때문에 이 글을 인용했습니다. 여러분은 TV나 다른 여러 통로를 통해서 이 설교를 적잖이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사실 에드워즈를 아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가 그런 제목으로 설교한 적이 있음을 아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에드워즈에 대해서 아는 것은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들은 아마 그 설교를 읽어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설교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한 말을 되풀이 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이 올리버 홈즈의 말을 통해서 들었듯이, 그 설교는 지각을 공격하고 습격한 것이요, 이성을 억누른 폭력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물론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가 어느 누구보다도 폭언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오해받기 쉬운 이른바 매우 강하고 매우 충격적인 말들을 했습니다.
에드워즈 자신이 이 특별한 비평에 대해서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일부 사역자들이 크게 비난받고 있는 또 한 가지 사항―나는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은 그들이 이미 큰 공포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기는커녕 그들에게 공포스러운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역자들이 사실이 아닌 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두렵게 하거나, 사실보다 과장하여 표현하거나, 또는 사실과 다르게 말한다면 그때는 비난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만일 사역자들이 더 많은 빛을 비추고 진상을 보다 더 잘 이해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두렵게 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정당한 일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양심이 크게 각성을 받는 것은 비추어진 빛 때문인데, 이 빛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어느 정도 자기들의 실상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더 많은 양의 빛을 비추면 그들은 더 크게 무서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양심에 더 많은 빛을 비추려 한다든지, 이미 비추고 있는 빛을 가리거나 방해함으로써 그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경감시키지 않는다고 사역자들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믿지 아니하는 사람을 향하여 그가 처한 상황이 엄청나게 무섭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다른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진리만을 밝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행위는 그들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에드워즈는 죄 가운데 죽어가고 있는 어느 사람에 대해 무서운 일을 말하는 성경을 믿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에드워즈가 한 일입니다. 그것은 순전히 성경 말씀을 근거로 추론한 것입니다. 그것은 에드워즈가 말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한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것이 그의 의무라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단서를 붙입니다.
“양심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죄인에게 진리를 그대로 제시해서는 안 되는 한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우울증의 경우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진리가 그들을 상하게 할까봐 진리를 그들에게 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진리를 말한다 해도 때로 그들은 기만을 당하고 오류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들 속에 있는 이른바 사물들을 잘못되게 취급하는 이상한 성향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떠돌며 설교하던 순회 전도자들 중 에드워즈만큼 부당하게 힘을 사용하지 않은 사람도 없습니다. ‘진노의 하나님 손에 있는 죄인들’에 관해 설교한 사람을 무서운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 변호할 반증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제 그러한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고, 미국의 종교 사상계에 주도적인 영향력을 다시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사람을 살펴봅시다. 저는 솔직히 이 일이야말로 제가 시도해 보았던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라고 고백합니다. 이 주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제가 이미 제시했던 이유 때문에 주로 그러합니다.
특히 에드워즈가 제게 미친 영향 때문입니다. 저는 그 사람을 다니엘 로랜드나 조지 윗필드보다 앞에 놓아야 한다는 것을 두렵게 생각하고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참으로 어리석게도 청교도들을 알프스에 비유하고 루터나 칼빈을 히말라야에 비유한다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 산에 비유하고 싶은 시험을 받곤 합니다.
제게 있어서 그는 언제나 사도 바울을 가장 닮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물론 윗필드는 다니엘 로랜드처럼 위대하고 능력 있는 설교자입니다. 그러나 에드워즈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윗필드와 다니엘 로랜드 두 사람은 모두 에드워즈가 가졌던 이지나 지성이나 신학에 대한 이해력을 갖고 있지 못했으며, 에드워즈처럼 철학적이지 못했습니다.
제가 볼 때 조나단 에드워즈야말로 사람들 중에서 아주 빼어납니다. 그러므로 에베레스트 산에 유추해본 이 사람을 추적해 볼 수 있다면, 제가 감당해야 할 임무는 남쪽 계곡을 통해서 에베레스트 산과 같은 이 사람에게 접근할 것인지, 아니면 북쪽 계곡을 통해서 에베레스트 산과 같은 이 사람에게 접근할 것인지를 정하는 일입니다.
이 위대한 정상에 도달하는 길은 대단히 많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분위기는 대단히 희박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거룩이 더욱 찬란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에 대한 그의 강조도 두드러졌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늘로 치솟은 이 큰 봉우리를 바라볼 때 왜소한 등산가의 연약성은 더욱 두드러집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 사람과, 이 사람의 생애와, 이 사람이 행한 일의 윤곽이나마 그려 주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두 권으로 된 그의 전집을 누구나 사서 읽도록 설득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과 목표입니다.
우선 에드워즈 자신부터 생각해봅니다. 맨 먼저 말해야 할 것은 그는 거성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미개발된 나라에서 자라났습니다. 물론 그 당시 그곳에는 유능한 사람들이 있었고, 대학들도 생겨났었습니다.―하버드대학과 예일대학이 그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그를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그는 비교적 외딴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도 대단한 재능을 지니고 있어서 진화론 개념도, 후천적 형질 획득 이론도 무색하게 했습니다. 이 연구회에 다루었던 거의 모든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옥스퍼드나 캠브리지에 가서 공부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있는 그대로 갑작스럽게 능한 지성을 발산했고, 명석한 상상력과 놀라운 독창성을 수반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정직했습니다. 그는 제가 읽어 본 사람 중에서 가장 정직한 주석가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난제를 결코 피해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들을 직면했고 난제를 우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측면에서 진리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빛나는 재능들과 함께 겸손과 온유 그리고 탁월한 영성이 있었습니다. 그는 체험적인 신앙에 대해서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알았습니다. 그는 마음을 크게 강조했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에드워즈라는 사람을 볼 때, 두드러진 사실은 완벽성과 균형입니다. 그는 유능한 신학자였고 동시에 위대한 복음 전도자였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게 되었습니까? 사도 바울처럼 이 사람은 신학자이기도 하면서 전도자였습니다. 그는 또한 위대한 목사였으며, 영혼들과 그 영혼들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는 어린 아이들뿐만 아니라 성인들을 다루는 데도 명수였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의 회심에 대한 대단한 옹호자였고, 어린 아이들에게 대단한 관심을 가져서 심지어 그들이 단독으로 모이는 집회를 허락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정말 모든 것을 갖추고 완벽한 균형을 이룬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는 극단적인 칼빈주의를 반대했으면서도 동시에 알미니안이즘을 반대했습니다. 그의 가르침과 입장에 나타난 균형은 다음의 말 속에서 드러나 보입니다.
“유효한 은혜 안에서는 우리가 단순히 수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어느 정도는 하시고 나머지는 우리가 하는 그런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시고 또한 우리가 모든 것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산출하시고 우리 또한 모든 것을 행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산출하신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주체시오 근원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합당한 행동자들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국면 속에 있습니다. 전적으로 수동적이면서도 전적으로 능동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에드워즈의 입장이었습니다. 우리는 제가 강조하는 그의 균형을 주목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없습니다. 궁극적인 이율배반이 아주 완벽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저는 다음과 같다고 서슴없이 말씀드립니다. 이 사람 속에서는 영적인 것이 언제나 지적인 것을 통제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빼어난 지성과 독창적인 사고들과 투쟁했었다고 믿습니다. 더구나 그는 굉장히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올리버 홈즈나 페리 밀러 등이 그에게 바랐던 것처럼, 순전한 지성적인 사람이 되기란 정말 식은 죽 먹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신학이 언제나 제동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그의 특별한 영광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사람의 사람됨을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는 언제나 자기의 철학과 사변을 성경에 굴복시켰고, 그것들을 단순한 종으로 여겼습니다. 어떤 생각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성경이 최고의 권위를 차지했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의 풍부하고 빛나는 재능들은 부수적인 것으로서 항상 종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에 대하여 “그는 열정적인 경건과 심오하고 통합된 지성을 조화시켰다”라고 했습니다.
잠시 설교자로서의 에드워즈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왜냐하면 그는 극히 뛰어난 설교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프린스턴에 가 있던 매우 짧은 기간 전까지 계속해서 뛰어난 설교자로 활동을 했습니다. 만일 그가 계속 자기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면, 언제나 설교자로서, 복음 전도자로서, 교사로서 지냈을 것입니다.
우선 그의 신앙관부터 봅시다. 무엇이 참 신앙입니까? 우리 자신에게 그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는 대답이 아주 명백합니다. 에드워즈에게 신앙이란 소위 오늘 “하나님과 실존적으로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살아 있는 만남입니다.
하나님과 나 자신, 이들 “두 실체”만이 만나는 것입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신앙은 본질적으로 마음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체험적이고 실제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겪은 체험을 기록해 놓은 유명한 글에서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에 알려진 사람 중에서 가장 위대한 천재 중 한 사람이요, 지금까지 미국의 모든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한 사람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그가 말한 것을 들어 봅시다:
“1737년 어느 날 건강을 위해 나는 말을 타고 숲 속으로 들어가 호젓한 곳에 내렸습니다. 경건한 묵상과 기도를 하며 걷는 것이 흔히 하는 나의 습관이었습니다. 그날 나는 내게는 특이한 한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신 성자의 영광과 그의 놀랍고, 크고, 충만하며, 순결하고, 감미로운 은혜와 사랑 그리고 온유하고 부드러운 낮아지심이었습니다.
그토록 고요하고 감미롭게 나타난 이 은혜는 하늘보다 높게 보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은 형언할 수 없이 탁월하여 모든 사상과 개념을 삼켜 버리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런 광경은 내가 판단하기로는 거의 한 시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눈물로 뒤범벅이 된 채 소리쳐 울게 되었습니다. 나는 영혼의 열심이 텅 비어 사라져 버리는 느낌을 느꼈습니다. 달리 뭐라고 표현해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는 티끌 속에 앉아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충만해지고 싶고, 거룩하고 순수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싶고, 그리스도를 의뢰하고 싶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살고 싶고, 그리스도를 섬기며 따르고 싶었습니다. 거룩한 하늘의 정결로 완전히 깨끗해지고 정결해지고 싶었습니다. 나는 이외에도 몇 차례 이와 아주 유사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것들도 역시 동일한 효과를 내게 미쳤습니다.
“나는 여러 차례 성삼위의 제삼위 되시는 성령의 영광을 감지했고 거룩하게 하시는 그의 직무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의 거룩하신 역사를 통해서 영혼에 하나님의 빛과 생명을 전달하시는 것을 의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교통하심을 통해서 신적 영광과 상쾌함의 무한한 샘으로 나타나셨고, 충만하시며, 내 영혼을 채우고 만족하게 하시기에 충분하신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은밀한 교통을 통해서 자신을 부어 주셨고, 영광의 광채로 빛나는 태양처럼 생명과 빛을 달콤하고 즐겁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말씀과 생명의 빛으로 달콤하고, 탁월하게, 생명을 주는 말씀으로서 그 탁월함을 감지했습니다. 그때는 말씀을 간절히 갈망하는 심정도 함께 따라왔고, 말씀이 내 마음속에서 풍성하게 거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도 수반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신앙관의 핵심입니다.
그의 다른 글을 보아도 같은 강조점을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참된 덕이나 거룩은 본질적으로 머리보다는 마음에 있다는 것을 누구나 다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귀결은, 참된 덕이나 거룩은 주로 거룩한 감정에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은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참된 덕이나 거룩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력이 주는 지식은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에 영향을 주지도 못하고 감정에도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신앙에 있어서 고양된 감정을 가벼이 취급하는 신사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참된 신앙과 거룩은 마음에 자리를 잡고 있으므로 영혼 속에서 높은 차원의 일들과 활동을 할 수 있다고 믿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신앙관의 핵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앙은 주로 마음의 일입니다. 머리에서 어떤 일을 한다 해도 마음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글을 인용해 보면 이것을 강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인용문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영혼에게 나누어 주시며, 성경적 교리와 합리적 교리 양자 모두에 의해 입증되는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빛'이라는 그의 유명한 설교에서 따온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페리 밀러 교수의 의견에 찬동하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이 설교는 비교적 짧은 것이기는 하지만 이 속에는 에드워즈의 가르침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개요를 얻게 된다고 합니다. 에드워즈는 영적이고 신적인 빛이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규정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나타난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영광을 아는 참된 지각은, 다른 것들 보다 더 고차원적인 종류이고 보다 고상한 성질을 가진 탁월함, 지상적이고 일시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크게 구별시키는 영광입니다. 바로 그것이 이 신령하고 신적인 빛입니다. 영적으로 조명을 받은 사람은 진실로 이해하고 알고 지각합니다. 그는 단순히 합리적으로 하나님이 영화로우시다는 것을 지각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화로우심에 대한 지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거룩한 것은 좋은 것이라는 합리적 신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이 사랑스럽다는 지각력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우시다는 사변적인 판단도 있지만 그의 신적 속성 때문에 얼마나 친밀하신 분인가를 아는 지각도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신앙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신앙이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시금석으로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이제 에드워즈의 설교 방법으로 시선을 돌립시다. 우리는 즉시 그는 설교를 했지 강의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에드워즈는 기독교 진리에 대해서 강의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자라기보다는 강의자처럼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설교는 강의가 아닙니다. 또한 에드워즈는 어느 한 본문에 대한 주석을 하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것 역시 설교가 아닙니다. 사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설교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설교에 대한 에드워즈의 관점은 그런 것이 아니었으며, 설교에 대한 고전적인 관점도 사실 그런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본문에서 출발했습니다. 또한 언제나 성격적이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어떤 주제를 선택하여 그것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교리를 해설할 때는 예외입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본문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강해식이었으며 한결같이 분석적이었습니다.
또한 분석적 두뇌를 가지고 있어서 본문과 자신의 말을 나누었습니다. 그는 메시지의 핵심을 찾기 원했습니다. 그의 놀라운 지력 속에 들어 있는 비평적이고 분석적인 요소가 활동을 한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어떤 구절이나 대목에서 가르치는 교리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는 교리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는가와, 다른 교리들과 그 교리와의 관계를 제시하고 진리를 확증합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결코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적용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있는 것이지 논문을 발표하고 있는 것이거나 자기 생각을 회중 앞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듣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심어주고 그 진리를 적용하게 하는 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설교란 언제나 “뜨겁고 진지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거대한 지성인과 명석한 철학자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이 원리를 이렇게 말합니다.
“최근에 유행하는 빈번한 설교는 무익하고 선입견적이라는 비평을 특이하게 받아 왔습니다. 설교를 자주 듣다 보면 한 설교가 다른 설교를 밀어내는 경향이 있다는 반론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전혀 유익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한 주간에 두세 편의 설교를 해야 사람들이 기억하고 소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빈번한 설교에 대한 그러한 반론은 신앙에 대한 적대감에서 나온 것이 아닐지라도, 설교가 회중에게 유익을 끼치는 법을 신중하게 숙고하지 않은 데서 온 것입니다. 설교를 통해서 얻는 주요한 유익은, 설교 당시 마음속에 생긴 인상이지 전달받은 것을 후에 기억함으로써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할 때 들었던 것을 후에 기억하는 일이 때로 매우 유익할 수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기억이란 설교할 당시의 마음에 인상 깊게 느껴졌던 말로부터 연유되는 것입니다. 기억이 그 인상을 새롭게 하고 증가시킬 때 유익한 것입니다.”
부연하고 싶은 것은, 저는 설교하면서 노트를 사용하는 것을 자주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주의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의 관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트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영성의 표지는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설교의 일차적이고 근원적인 목적은 정보를 제공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에드워즈가 말하듯이 인상을 남기는 것입니다. 문제는 설교할 때 받는 인상입니다. 그것이 설교한 후에 기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에드워즈는 어떤 의미로 탁월한 청교도 습관과 실제를 비평한 셈입니다. 청교도 선조들은 설교자가 말했던 것에 대해 문답을 만들어서 자녀들에게 묻곤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에드워즈는 설교에 대한 참다운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설교란 일차적으로 정보 전달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설교를 쓰고 있는 동안 성령의 영향에 속한 어떤 것을 놓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설교자로서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단순한 정보 전달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책을 읽고 거기에서 정보를 얻으라고 해야 합니다.
설교라는 일은 그러한 지식을 살아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동일한 것이 대학의 강의에도 적용됩니다. 많은 강사들이 단순히 노트를 줄줄 불러 주고 가련한 학생들은 그것을 받아쓰는데, 바로 그것이 비극입니다. 강사나 교수의 임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학생들은 스스로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교수의 임무는 불을 붙이고, 힘을 내게 하고, 자극을 주고, 살아 생동하게 하는 일입니다. 설교의 일차적인 임무도 바로 이것입니다. 이 점을 마음에 명시합시다. 에드워즈는 이것을 크게 강조했습니다. 오늘날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감동적이고 열정적이고 능력 있는 설교입니다. 설교는 “뜨거워야”하고 “진지해야” 합니다. 때로 에드워즈는 자신의 설교 원고를 완전히 다 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회중들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때로 그는 설교 요점들만 적어서 설교했습니다.
이제는 신학자로서의 에드워즈를 살펴봅시다. 이 점에 대해서는 간단히 살펴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난 그의 두 권의 전집에서 신학자로서의 면모를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할지라도 두 권의 전집 속에서 신학 대요를 얻게 됩니다. 그가 이것을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가르쳤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받았던 교육을 받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가르쳤다는 말입니다. 그는 주요한 주제들은 거의 다루었습니다. 원죄, 의지의 자유, 이신칭의, 구속사(救贖史) 등을 말입니다.
그는 설교할 때 복음주의의 원리를 언제나 밑에 깔았으며, 영혼의 영원한 구속에 대한 강론을 다섯 차례 했습니다. 그는 종말론이나 말세에 속한 교리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를 기다리는 궁극적인 영광에 대단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는 유능한 신학자였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러한 여러 주제에 대해서 무엇인가 진정으로 알고 싶다면 에드워즈의 글들을 읽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그 교리가 기술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은 크게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문제는 접어 두고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가장 괄목할 만한 것을 살펴봅시다. 그는 탁월한 부흥 신학자요, 체험 신학자요, 어떤 사람의 말대로 ‘마음의 신학자’였습니다. 거성, 이 능력 있는 지성인에 관한 가장 놀라운 사실은 조나단 에드워즈만큼 인간―중생한 사람과 중생하지 못한 사람 모두―의 마음 작용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종교 심리학, 회심, 부흥에 대해서 진정으로 알고 싶으면 에드워즈의 책을 읽어 보십시오, 여러분이 그의 글을 읽어 보면 윌리암 제임스(William James)의 《신앙 체험의 다양성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이 내용이 충실한 책에서 싸구려로 바뀌는 것 같은 생각이 들 것입니다. 스타벅(Starbuck)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진노의 하나님 손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유명한 설교를 언급했던 윌리암 사잔트(William Sargant)의 나태한 호언장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에드워즈의 전집을 읽어 보면 그 모든 것의 답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단순한 초심자로서 그저 대양의 해변에서 노닥거리는 사람들이라면, 에드워즈는 사람들로 하여금 조물주와 만나도록 깊은 곳으로 이끌어 주는 사람입니다.
이 분야에 있어서 에드워즈는 너무도 탁월하여 견줄 사람이 없습니다. 1960년대에 홉스타터(Hofstadter)라는 이름을 가진 미국 사람이 《미국 생활 속의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일부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이것을 최근에 발견한 모양인데, 그들은 이전의 자세를 바꾸어서 지성에 큰 강조점을 두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러한 주장에 대한 대답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을 읽어 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반지성주의가 아닙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말하면서 반지성주의라는 어휘를 쓸 수 없습니다. 그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성령으로 불타고 성령으로 충만한 지성을 발견합니다. 우리 모두 그래야 합니다. 제 주장은, 에드워즈가 이와 관련하여 쓴 것은 하나의 독특한 문학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제가 알기로는, 또한 제가 들어 왔던 바로는 어떤 방법으로도 그가 썼던 것에 필적할 만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는 여러 방면에서 그러했습니다. 또한 사람들의 체험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저는 이미 에드워즈의 체험에 대한 것을 인용한 바 있습니다. 그의 개인적인 비망록이나 일기를 보면 더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가 겪은 놀라운 체험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더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아내는 그만큼 뛰어난 성도였습니다. 그는 정말 거의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체험을 했으며, 그러한 것들을 기록하고 시험했습니다. 두 권의 전집 속에 나오는 짧은 글들 가운데 《놀라운 회심에 대한 진술A. Narrative of Surprising Conversions》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아마 이 글은 여러분이 볼 수 있는 글 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가장 감격적인 읽을거리일 것입니다. 읽어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그것들을 읽어 보십시오. 일단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의 글 가운데 중요한 또 다른 부류는 부흥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는 부흥에 대해서 기록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의 논문들 가운데 하나는 뉴잉글랜드(미국)에서 일어난 신앙 부흥에 대한 것입니다. 그 글은 보스턴에 있는 친구들에게 발송되었고, 그 다음에 영국까지 왔습니다. 영국과 스코틀랜드에 있는 사람들은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그것을 읽었습니다. 그의 대부분의 편지들과 설교에는 부흥과 부흥 때 일어난 일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그러나 독특하고 가장 훌륭한 것은 그가 체험들을 분석하는 방법입니다. 개인적인 체험이든 전반적인 부흥 때에 일어났던 것이든 말입니다. 그가 극히 탁월한 사람이라는 점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만일 여러분이 참된 부흥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싶다면 에드워즈에게 문의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 마음에 대한 그의 지식, 인간 본성에 대한 그의 심리학은 정말 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가 그러한 것을 쓴 것은 쓰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비평과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언제나 두 전선에서 싸우고 있었습니다. 성령 운동이 그의 교회에서 일어나서 매우 광범위하게 다른 교회에까지 파급되었습니다. 그리고 1740년에 대각성이 일어났는데, 에드워즈와 윗필드와 다른 사람들과 관련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람들과 교회들을 두 부류로 나누어 버렸습니다.
전적으로 부흥을 반대하는 부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에드워즈와 같은 신학을 주장하는 정통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칼빈주의자였으나 부흥을 싫어했습니다. 또한 감정적인 요소를 싫어했고 색다른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그 당시 일어나고 있었던 일에 대해서 많은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비평에 대해서 부흥을 변호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와 정반대의 극단적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거칠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친 불길과 함께 부흥의 기간 동안에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들은 광신주의자들이었는데, 극단으로 치우쳐서 어리석음의 죄를 범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에드워즈는 역시 그들도 다루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 전선에서 싸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유일한 관심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에 있었습니다. 그는 쟁론자가 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변호하기 위해서 글을 써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체험 분석과 체험과 부흥의 정당성을 변증하는 글들을 포함하는 주요 저작은 《종교적 감정에 관한 소논문(A Treatise Concerning the Religious Affections)》이라는 글입니다. 이 책은 그의 가장 유명한 책 중 하나입니다. 이것은 사실 베드로전서 1장 8절 한 구절에 대한 일련에 연속적 설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이러한 책들에서 그가 한 일은 체험의 영역에서 참된 것과 거짓된 것 사이를 구분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다양한 논문들의 주제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이 일은 두 가지 측면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곧 반대자들과 광신주의자들을 동시에 다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종교적 감정에 관한 소논문(A Treatise Concerning the Religious Affections)》에서 그 주제를 이런 방법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는 이 글을 세 부분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다음은 그 줄거리입니다. Ⅰ부는 “감정의 본질과 종교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 관하여”입니다. 그는 감정이 합당한 것이라는 것을 입증해야 했습니다.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대단한 교리 설교를 했지만 그 설교들은 차가왔고, 따라서 감정이나 열정이 자동적으로 타부시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에드워즈는 그러한 감정들을 정당화하고, 그러한 것들을 위한 자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했습니다. 그 다음 “참된 종교는 감정과 지대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런 다음에 “거기에서 나오는 추론들”을 말합니다.
Ⅱ부는 “종교적 감정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진정으로 은혜롭다거나 은혜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는 표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에드워즈의 전형적인 자세입니다. 즉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모두 다루는 것입니다. 그는 감정이 “극히 높게 고양되었다는 사실이 감정이 진리라는 어떠한 표증도”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한 몸에 그 감정이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도 표증이 되지 못하며, “또 유창함이나 열렬함도 그러한 진실성의 표증이 될 수 없고”, “감정이 우리에 의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표증이 될 수 없고”, “성경 본문과 함께 나타났다 할지라도 감정이 진실된 것이라는 증거는 결코 되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또 사랑의 나타남이 있다는 사실이 표증은 아닙니다.” “많은 종류의 종교적 감정도 그것이 진실한 것이라는 표증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순서로 따라오는 기쁨도”, “많은 시간과 열심을 들여서 의무를 감당하는 것도”, “찬양과 대단한 확신을 표현하고, 대인 관계에 미친 영향을 표현한다해도” 그것이 확실한 표증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어느 것도 그것들이 진정한 것인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 것인지를 보여 주는 필연적인 참 표증은 되지 못합니다.
그런 다음에 Ⅲ부에서는 진정으로 은혜롭고 거룩한 감정의 특별한 표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은혜로운 감정은 신적 영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감정의 목적은 하나님께 속한 것들의 탁월성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실제는 다른 사람들에게나 우리 자신들에게 주요한 표지입니다.”
에드워즈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쉽사리 속아 넘어가는 사람도 아니고 극단적인 비평가도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두 측면을 검토했습니다. 그는 1740년대의 부흥기에 있었던 주목할 만한고 비상한 현상들을 변호해야만 했습니다. 즉 몸마저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변호해야 했고 변호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에드워즈의 부인이 공중에 뜨는 것으로 알려진 현상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그녀 자신의 노력이나 애씀이 없이 방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졌습니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기절을 하고 집회 때 무의식 상태가 되기도 했습니다. 에드워즈는 그러한 현상들이 마귀에게 속한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것에 대해서 인상적인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양편에 경고했습니다.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범하지도 말며, 또한 육체로 이끌림을 받거나 육체를 통해서 사단에게 기만을 당하지 않도록 하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경고했는데, 한 번은 자기와 함께 머물고 있었던 조지 윗필드를 경고하기까지 했습니다. 윗필드는 “충동”에 복종하고 순응하려는 경향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는 충동에 따라서 행동하기도 했습니다. 에드워즈는 그것 때문에 윗필드를 감히 비평했고 가능한 위험들을 경고해 주었습니다.
에드워즈가 이 놀라운 일을 했던 방법에 대한 몇 가지 예를 보겠습니다. 이것들을 보면 그가 철학이나 역사의 차원에서 부흥을 전체로 거부하는 위험과 부흥의 특별한 측면들만 보고 부흥을 전체적으로 생각하거나, 부흥의 주목할 만한 결과들을 고려하지 않는 위험을 얼마나 경고했는지를 보여 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경계한 방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문제들을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판단하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들의 개인적 체험에 비추어서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지적한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회, 특별히 복음적인 교회들이 만나는 큰 위험 중 하나는 성경의 위대한 진술들 중 일부를 우리 자신의 체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습관입니다.
예를 들어서 에드워즈가 종교적 감정에 관한 소논문에서 설교했던 베드로전서 1장 8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오늘날, 이 말씀을 자신들의 체험의 차원에서 해석하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그 기쁨을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체험한다고 말합니다. 에드워즈는 그러한 위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나는 적지 아니한 사람들이 성경을 이러한 일을 판단하는 유일한 척도로 삼지 않고 대신, 자기들의 체험을 척도로 삼아서 현재 고백되거나 체험되고 있는 어떠어떠한 일들을 자기들이 느끼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거부하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자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완전과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과 사랑에 대한 그 위대하고 갑작스러우며 특이한 체험, 그리고 이로부터 오는 두려움을 주로 이러한 근거 위에서―비록 독단적인 정죄는 아닐지라도―의심하고 꺼리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그러한 격렬한 감정과 사랑과 기쁨과 같은 황홀한 상태나,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비통해 하는 마음과, 위대한 효력을 가진 마음의 체험들을 체험하지 못했다고 해서 정죄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느끼지 못한 것은 쉽게 의심하는 강한 성향이 있습니다. 많은 선한 사람들도 이러한 오류를 범한 적이 있음을 두렵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덜 부당한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근거 위에서 특이한 것들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죄의식, 하나님의 영광의 발견, 그리스도의 탁월성, 복음 진리에 대한 내적 확신 등 하나님의 성령의 직접적인 영향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들이 구원의 필수적인 것이라고 상정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지혜에 굴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무류한 척도를 삼는 대신, 자기 자신의 경험을 판단 척도로 삼는 사람은 지극히 높으신 자의 명철에 대한 고찰을 폐기하는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성령의 역사에 대한 특이하고도 경이로운 체험을 옹호하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을 받는 어떤 사람들이 일종의 황홀경의 상태에 들어가서 자신을 잊어버리고 강하고 유쾌한 상상의 세계로 넘어가 일종의 환상을 보고, 마치 자신이 하늘에까지 올라가 영광스러운 광경을 목격한 것처럼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러한 일이 하나님의 성령께 속해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나는 그러한 경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설명하는 데 마귀의 도움을 빌릴 필요가 조금도 없습니다. 또한 선지자들이나 사도 바울이 낙원에 끌려 올라가 받은 환상과 그러한 것들이 같은 성질이라고 상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강력한 일과 감정 속에 인간 본성을 계산해 넣으면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 영과 더불어 증거하는 것에 대해서 그가 말하는 것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오늘날 이 점에 대해서 대단한 혼란이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5, 16절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조나단 에드워즈는 성령의 증거를 이렇게 다루고 있습니다.
“전에 뉴잉글랜드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으로 황홀경에 빠진 사람들이 울부짖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클랍 대위(Captain Clap)의 회고록 속에서도 그 한 예를 볼 수 있습니다(프린스 목사가 출판했음). 그는 어리석은 여자나 아이가 아니라 분명한 이해력을 가진 남자입니다. 그는 영적 기쁨으로 크게 황홀해질 때 자기 침대에 누워 큰소리로 울부짖게 되었습니다. 그의 말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내 영으로 더불어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함께 증거하셨습니다 (내가 그렇게 믿습니다). 또 그리스도는 나의 것이라는 온전한 확신으로 내 마음과 영혼을 충만케 하셔서 내가 황홀해졌고 침대에서 큰 소리로 주께서 오셨다. 주께서 오셨다라고 외치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이러한 증거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느끼고 압니까? 이처럼 영광스러운 진술을 우리의 가련하고 작은 체험의 수준으로 저하시켜서는 결코 안 됩니다. 같은 문단에서 그는 존 플라벨(John Flavel)이 여행을 하던 중 겪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체험을 언급합니다.
다음은 자기 아내에게 주어졌던 놀라운 체험들을 그가 변호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 아내의 체험을 상세히 기술한 다음에 그 체험들을 분석하고 평가합니다. 아직도 이러한 모든 것을 하나의 환각 상태와 공상과 지나친 상상력의 소치로 기각시켜 버리려는 많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때도 그러했습니다. 에드워즈가 그것에 대해서 논평하는 것을 들어 보십시오.
“그러한 것들이 광신이거나 병든 뇌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나는 내 뇌가 그런 병에 오래 걸려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만일 그것이 정신 착란이라면, 인간 세계가 이러한 자비롭고 온유하고 덕스럽고 아름다운 영광스러운 정신 착란으로 다 사로잡힐 수 있기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여기서 설명한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가진 종교에 대한 관념은 어떤 것입니까? 다음의 성경 표현들과 부응하는 것은 무엇이 있습니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것, 영광 충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심,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니 주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라고 한 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심― 마음에 떠오르는 샛별 등등입니다.
만일 지금 언급한 이 경우들이 이러한 표현들과 서로 상응하지 않는다면 그것들과 상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에드워즈는 특별한 시기에 베풀어지고 있었던 비상하고 예외적인 체험을 그런 식으로 변호했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에서 분석하고, 시험해 보고 질문을 던져 보고 의심해 보지만, 결국 우리로 하여금 혼란케 하거나 혹은 낙담케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사람이 에드워즈입니다. 토마스 쉐퍼드(Thomas Shepard)가 “열 처녀 비유”연구에서 했던 것처럼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에드워즈는 고무시키고 자극하고 우리로 하여금 낙담케 하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 속에 이러한 것들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간절함을 불러일으킵니다.
이제 적용의 말씀을 드림으로써 끝을 맺겠습니다. 적용하지 않고 끝내는 것은, 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을 기념하는 일을 거짓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조나단 에드워즈로부터 배워야 할 교훈들은 무엇입니까?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오늘날의 기독교 상태와 관계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사람처럼 필요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해 온 모든 것을 취하고 그 위에다가 1748년에 그가 쓴 논문을 첨가해 보십시오. 그 논문의 제목은 이 땅에서의 신앙부흥과 그리스도의 나라 확장을 위해서 특이하게 기도하는 일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 분명한 일치를 이루고 눈에 보이는 연합을 이루도록 촉진해 주기 위한 겸비한 시도(An Humble Attempt to Promote Explicit Agreement and Visible Union of God's People in Extraordinary Prayer for the Revival of Religion and for the Advancement of Christ's Kingdom on Earth)였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일부 친구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기도하기 위해서 함께 모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에드워즈에게 편지를 써서 이것에 대해서 말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에드워즈가 이런 일에 동조하고 있는지, 이것에 대해서 책을 쓸 것인지 물어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함께 참여하라고 간청하는 이 위대한 논문을 썼던 것이고, 일단 한 달에 한 번씩 그렇게 하되 방법은 다양하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 영광이 드러날 때가 가까이 옴에 따라 귀중히 여기는 것들을 중심으로 매우 특별하게 주장하고 간청했습니다. 그것은 능력 있고 영광스러운 진술입니다. 분명히 부흥은 현재의 필요와 교회의 상태에 대한 유일한 해답입니다.
저는 그것을 이렇게 진술하겠습니다. 성령의 사역을 최고로 강조하지 않는 변증학은 철저하게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하고 있었던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극히 철학적이고 논증적인 변증학을 소개해 왔습니다. 또한 현대의 예술과 현대의 문학과 현대의 드라마, 정치, 사회관에 대하여 논증했습니다. 마치 필요한 것이 그것인 양 말입니다. 필요한 것은 성령의 부어 주심, 기름 부어 주심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부어 주심의 필요성을 끝내 인식하게 하지 못하는 어떠한 변증학도 끝내는 소용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제가 믿기로 1730년대의 그러한 일이 일어나기 이전의 상황과 매우 방불한 상황 속에 우리가 처해있다고 봅니다. 지난 세기에는 보일 강좌(Boyle Lectures)가 개설되어 변증학을 발전시켜서 복음과 신앙을 변호해 왔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무모하게 똑같은 일을 해 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버틀러 감독의 유명한 유추(Analogy)도 또 다른 방법으로 복음을 변증하기 위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전체 상황을 바꾸는 요인들이 되지 못했습니다. 전체 상황을 바꾸어 놓은 것은 부흥이었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부흥입니다. 우리는 다른 모든 것을 다 해보았습니다. 에드워즈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부흥의 필요성을 깨우쳐 줍니다.
그가 이 점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했는지를 분명히 알아 둡시다. 부흥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전도 운동과 부흥 사이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들은 서로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부흥 시에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과, 사람들에게 결신을 요청하는 것은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몇 년 전에 유명하고 뛰어난 복음주의 지도자가 저에게 어떤 전도 운동에 참석해 달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주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가셔야 합니다. 그것은 놀랍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사람들이 떼를 지어 앞으로 나옵니다. 아무런 느낌도 아무런 감정도 없는데도 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을 읽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감정이 하나도 없는지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만일 사람들이 아무런 감정을 가지지 않고 그리스도를 향한 결단을 내릴 수 있다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영원히 지옥에서 보내야 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깨닫는 일이나,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게 되는 일, 하나님의 아들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자기가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일을 어느 사람이 아무런 느낌 없이 할 수 있겠습니까?
부흥에 대한 에드워즈의 글을 읽어 보십시오. 그가 늘 사용하는 어휘는 ‘성령의 부어주심’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쇄신(renewal)’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흥이라는 어휘를 싫어합니다. 그들은 오히려 ‘쇄신’이란 말을 좋아합니다. 그들이 이 말을 통해서 나타내려는 의도는 우리 모두 중생 시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이미 가졌음을 깨닫고 그것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흥이 아닙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대로 해보면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부흥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부흥이란 성령의 부어주심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요,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위의 주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어떤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을 자각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부흥이 진정으로 뜻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상기시켜 줍니다.
그래서 성령을 소멸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로 연결됩니다. 오늘날도 그러한 죄를 짓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최근에 작고한 로날드 낙스(Ronald Know)가 광신주의에 대해서 책을 썼는데, 일부 복음주의자들에게 매우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것들에 관해서는 전혀 모르는 로마 가톨릭의 지성인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에드워즈나 그의 유명한 설교를 언급합니다.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사실 우리는 많은 면에서 그러한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온통 신학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성령을 소멸할 수도 있습니다. 또 기독교를 산업에 적용시키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거나, 교육이나 예술이나 정치에 적용시키는 것만을 염두에 둠으로써 그러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에드워즈는 체험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에게 유사한 경고를 합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균형만큼 두드러진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신학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붙는 신학이어야 합니다. 빛뿐만 아니라 뜨거움과 열도 있어야 합니다. 에드워즈에게는 이런 것들이 이상적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 위대한 교리들이 성령의 불로 뜨거워져 있습니다.
두 가지 특별한 적용의 말씀으로 끝을 맺으려 합니다.
첫째는 설교자들에 대한 것입니다. 에드워즈가 그 당시 설교자들에게 한 말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긴급하게 필요합니다.
“나는 내 의무를 감당하는 데 있어서 청중들이 오직 진리로만 감동받고, 그 감동이 주제의 본질에서 이탈하지만 않는다면 할 수 있는 한 청중의 감동을 최대로 불러일으키고 싶습니다. 나는 매우 진지하고 열정적인 설교 방법이 오랫동안 멸시받아 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학식의 많음과 논리 정연함, 방법과 언어의 정확성이 설교자의 자질을 높이 평가하게 만드는 풍조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 설교가 설교의 목적에 부합하는 가장 좋은 성향으로 생각되어온 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 부족 또는 합당한 고찰 부족에서 기인했다고 겸손하게 생각합니다.
현재와 과거 시대의 경험은 이것을 충분히 입증해 줍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신앙의 진리에 대한 교리를 다룸에 있어서 명확한 구분, 예증, 논리 정연함, 좋은 방법 등이 많은 면에서 필요하고 유익하며 또 무시되어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신학에 관한 사변적 지식 증가가 우리 교인에게 다른 것만큼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런 유의 빛은 풍부하면서도 열심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날 이런 지식의 소유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논리의 힘과 침투력, 학식의 정도, 명확한 분별력, 바른 문체, 표현의 명확함 등이 이처럼 빼어난 세대가 언제 있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사람들이 죄를 이처럼 의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천국을 사모하는 일, 그리고 삶의 거룩함이 이처럼 빈약했던 적이 언제 있었습니까? 현재 우리 교인들은 머리에 많은 것을 축적시킬 필요보다는 마음이 감동받을 필요가 더 급합니다. 그들은 이런 일을 할 훌륭한 성향을 가진 유의 설교를 가장 크게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교인들에 대해 한 마디 하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절망감을 갖게 합니까? 여러분 자신이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했습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충고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을 읽어 보십시오. 이제 그 많은 집회에 다니는 것을 중단하시고, 오늘날 복음주의 집단에서 그처럼 유행하는 여러 형태의 오락을 즐기기를 멈추십시오, 집에 머무르는 법을 배우십시오, 다시 읽는 법을 배우십시오. 우리는 독서법을 잊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어떤 현대인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만 읽지 마십시오. 견고하고 깊고 사실적인 것들로 돌아가십시오.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 두 권과 같은 책을 읽은 결과로 부흥이 시작된 적이 자주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을 읽으십시오, 그렇게 결심하십시오, 그의 설교문을 읽어 보십시오. 그의 실천적 연구문을 읽어보십시오. 그 다음에 신학적 주제에 대한 위대한 강론을 계속 읽어 보십시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는 설교자이든 청중이든 ― 이 사람의 글을 읽고 나서 그가 가장 강조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포착하도록 합시다 ―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어떤 유익을 얻었다고 거기서 머물지 마십시오. 또한 최고의 체험을 누렸다고 거기서 머물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더 알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이것은 언제나 참된 체험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과 하나님의 주권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외경심과 경이감을 느낄 필요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 내에 기이함과 놀라움이 있습니까?”
조나단 에드워즈가 언제나 전달해 주고 일으키는 인상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일들이 가장 미천한 그리스도인에게도 가능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는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게 설교했고 사역하였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러한 일들이 그들 모두에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 외에 지금과 같은 위기와 불확실성의 시대 속에서도 그 사람이 ‘복된 소망’에 대해 강조한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이 없다고 봅니다. 유명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의 장례식 때에 그가 한 설교문을 읽어 보십시오, 그것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을 기다리고 있는 천국과 그 영광에 대한 묘사입니다. 모든 것이 우리 눈앞에서 와해되는 멸망의 세상 가운데서,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머리와 눈을 들어서 임박한 영광을 쳐다보아야 할 때가 아닙니까?
영국의 경제 상태가 붕괴되고 모든 것이 다 무너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목적은 분명하고 확실합니다.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목적을 포기하게’ 할 수 없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서 예비된 것입니다. 영광은 이러한 것을 진실로 고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위대하신 하나님과 구주의 복되신 나타남’을 기다리고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말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에 대해서 말한 것을 인용함으로써 끝을 맺기로 합시다. 에드워즈 자신에 대해서 말하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탁월한 그리스도의 사역자를 관찰해 볼 때, 그와 동일한 복음 사역을 위해 부름을 입은 우리를 자극하여 대단한 열심과 헌신을 가지도록 고무시켜 우리의 일을 똑같이 충성되이 행하도록 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우리로 하여금 동일한 영으로 충만해지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라는 순수하고 열렬한 불꽃으로 활력을 입고, 우리의 주요, 우리의 진정한 상전이신 그분의 나라의 발전과 영광, 그리고 시온의 번영을 위해 갈망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이러한 원리들이 그리스도의 종의 일생을 얼마나 덕스럽게 했으며, 이 종의 죽음을 얼마나 복되게 했습니까?
때는 곧 옵니다. 우리가 땅 위의 장막을 버리고 우리를 추수하라고 보내셨던 우리 주님께로 가서, 우리가 한 일을 계산할 때가 금방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 향방 없이 달리지 않고, 허공을 치는 사람처럼 싸우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우리가 들었던 것이 우리를 고무하여, 우리의 큰일을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원을 의지하게 하며, 성령의 능력을 열심히 구하고, 금식과 기도로 우리의 수고가 성공을 거두도록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야 마땅합니다.
이 사람은 금식과 기도하는 일에 넘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임종 시에 곁에 서 있던 목회 후보자들에게 자기가 얻었던 큰 유익을 바탕으로 진지하게 이것을 권고했습니다. 그는 사역자들이 사역할 때 그리스도의 영을 얼마나 많이 필요로 하는가를 자주 말했습니다. 또한 그것 없이 사역자들이 사역을 한다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결과를 가져 올 것인가도 말했습니다.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특별한 감동 아래 있을 때, 그것이 그들을 지탱해 주고 사람들의 양심을 파악하게 하여 말하자면 사람들을 손으로 어루만지게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리 논리 정연하고 웅변적인 방법을 동원한다 해도 우리는 손대신 발을 사용하는 격입니다. 이것을 그는 얼마나 자주 말했습니까?’
이 특이한 인물을 통해서 보았고 들었던 것들, 그의 거룩, 그의 훌륭함, 그의 노력, 그의 일생에 걸친 자기 부인, 마음으로와 실제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 자신과 모든 것을 드린 그 뛰어난 헌신, 죽음과 죽음이 가져온 고통과 고뇌 앞에서 그처럼 견고하게 나타난 그의 견고한 심지, 이 모든 것들이 우리 모두(목사와 평신도)를 고무시켜 우리가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의 위대함, 완전한 신앙이 경험으로나 실제로나 탁월하고 고귀하다는 사실, 그러한 삶의 최후가 복되다는 사실, 그리고 육신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게 될 때 그런 것들이 가져다 줄 영원한 상급의 무한함 등을 깨닫게 하고, 우리도 그렇게 노력하는 가운데 마침내 그런 복된 최후를 마치도록 노력하게 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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