랄트 턴벌의 <설교자 조나단 에드워즈>를 인용한다. 이 책은 설교자로서의 에드워즈의 사역에 집중한다. 설교는 목회자와 설교자가 한다. 따라서 에드워즈의 모든 사역은 설교에 집중되어 있다. 설교를 통해 그는 목회사역을 했으며, 목양사역을 감당했다. 성경의 말씀이 성도에게 설교로 전해질 때의 작용이 다시 설교와 목양에 적용되었으며, 이 과정은 목회자였던 에드워즈에게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설교를 했으며,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구령의 열정을 동시에 전파했다. 그의 설교의 핵심은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회심이었다. 성령의 조명과 내주를 위해 그는 설교를 청교도적으로 적용하여 구령의 열정을 불태웠다.
그 바탕위에서 신학적 저작과 신학철학적 저작이 열매로 나타났다. 그 내용은 물론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회심이이다. 그러나 이 이질적인 요소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를 아우른다. 왜? 그것이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선순위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턴벌은 이 점을 아주 예리하게 포착하였다. 에드워즈의 설교에 초점을 두고 하나님의 영광과 구령의 열정이 발산되는 과정을 턴벌은 아주 생생하게 그려내었다. 근대에 이런 뛰어난 학자가 있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솔직히 에드워즈를 연구하다보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기 쉽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우가 칼빈주의라면, 좌는 철학자로서의 에드워즈이다. 그러나 턴벌은 우인, 하나님의 영광(칼빈주의는 부분집합으로 들어간다)과 좌인 구령의 열정(알미니안주가 부분집합으로 들어간다)을 아주 균형감있게 서술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선구자적인 연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턴벌에 대한 이력 중 흥미있는 부분이 있어 번역해보았다.
랄프 턴벌(Ralph G. Turnbull, 1901-1985) 은 목회자, 설교자, 교사, 작가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다.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그는 영국, 캐나다, 그리고 미국 교회에서 시무했으며, 시애틀의 제일장로교회에서 마지막으로 시무했다. 시애틀 연구소에서 일하기 전, 그는 피츠버그 웨스트 민스터 신학교에서 10년간 설교학을 가르쳤다. 퇴직 후에도, 그는 오레건, 포틀랜드, 워너 퍼시틱 칼리지에서 종교하 교수였으며, 샌디에고, 베델 신학교 설교학 조교수, 그리고 그 두 곳 외에도 수많은 곳에서 그의 이름을 볼 수 있다.
설교의 역사의 주제 아래 턴벌이 가장 좋아하는 연구대상은 조나단 에드워즈였다. 턴벌이 미국에 오자마자, 그는 미국 설교학에 관해 더 많은 연구를 시도하기 위해 에드워즈에 대해 특별 연구를 했다. 1958년, 에드워즈 설교 방법을 분석한 책, <설교자 조나단 에드워즈>를 출판했다. 턴벌의 다른 책에서처럼 노스햄턴과 스톡브릿지의 사람에 관해 철처히 조사하였다. 비록 그는 에드워즈에게 특별히 호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한 지속적으로 존 웨슬리에게도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설교자 조나단 에드워즈
랄프 턴벌(Ralph G. Turnbull)
차례
1 복음주의적 회심
2 영적 성장
3 시간의 헌신
4 거절당한 주장
5 품위 있는 겸손
6 독서와 연구
7 서적 수집
8 문인(文人), 에드워즈(Creative Study)
9 문예적인 노력
10 설교 스타일
11 상상력이 탁월한 이성
12 설교의 문예성
13 설교문과 흠정역 성경
14 성경 연구
15 노트 정리하기
16 신학적 사고
17 교리적 설교
18 지옥불 설교(Hell Firing Preaching)
19 적극적인 설교
20 설득력있는 설교 전달
21 설교문의 구조
22 목회의 기준
23 개인적 구원
24 부흥의 불길
25 설교동기(Preaching Motives)
26 목회적 관심
27 신학적 저작(Theological Writing)
28 윤리적 현실주의(Ethical Realism)
29 실제적이었던 신비주의자
30 복음 전도의 간절함(Evangelical Passion)
1. 복음주의적 회심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내 영혼에 대해 관심을 많이 기울였으며 다양한 수련을 해왔습니다. "
복음주의 진리의 계승자라는 위치에 설 사람으로, 조나단 에드워즈보다 더 합당한 이름은 없다. 그보다 더 전적으로 복음주의적 영성으로 충만했던 사람도 없었고, 그만큼 교리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옳다고 확신했던 사람도 없었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모든 시험을 견디어낸 인물로서,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와 사역에서 가장 중요하고 매력적이고 신비한 인물들 가운데 하나였다. 19세기의 역사학자 밴크로프트는 “지난 세기동안 뉴잉글랜드 정신이 어떤 역할을 담당해왔으며, 어떻게 고동쳐 왔었는지를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조나단 에드워즈를 연구하는 일에 밤낮으로 정진해야만 한다”고 자신의 확신을 피력한 바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부흥사이며 신학자, 철학자이며 문필가였으며,18세기의 문화적 배경에 반대한 인물로 여겨져 왔다. 그는 죄악을 저주하는 내용의 설교를 많이 했는데, 그 때문에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그를 미워했다. 에드워즈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아귀에 놓인 죄인들”이라는 설교를 통해 문단과 설교계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그를 더 더욱 싫어하게 되었다.
가장 조용하고 과장됨 없이 말씀을 전하던 설교자를 이런 식으로 거부한 것은 교회에 대한 공격이었다. 에드워즈에 대한 세평은 부당하고 불공정한 것이었다. 에드워즈의 설교에 공포와 보복에 대한 내용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에드워즈를 항상 그렇게 특정한 유형의 말씀만을 전하는 설교자로 평가하는 것은 불공정하고 악의적인 작태이다. 에드워즈의 설교가 언제나 듣는 이들을 위협하고 비판만 한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그의 설교는 당시 뉴잉글랜드의 상황과 관련해서 평가되어야만 한다. 에드워즈당시 뉴잉글랜드는 식민지에서 벗어난 상태였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식민지의 정신적 사회적 상황에 머물러 있었다. J.해루투니언은 당시 사람들은 죄악을 "비판하기보다는 죄악을 동정하게 했다"(“조나단 에드워즈 경건에 대한 연구”, Journal of Religion, 1931년 11월호 p.400)고 말했는데, 우리는 그의 이 말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학자들과 교회사가들이 에드워즈에 대해서 압도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단지 18세기의 역사를 평가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다. 그것은 그가 중역을 담당했던 18세기의 신학적, 철학적 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연구의 범위를 그의 생애와 사역의 한 국면인 설교에만 국한시키겠다.
에드워즈가 펼쳤던 다양한 정신적 활동들은 동시대인들에게 비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종교적인 부흥운동기의 두드러진 지도자였으며 신학적 논쟁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들 속에서 때로는 한 가지 본질적인 부분이 잊혀지기도 한다. 그것은 그가 한 일이나 저작들 모두가 자신의 삶에 대해서 품고 있었던 중요한 열정에서 솟아나온 것이라는 점이다. 그의 이 중요한 열정이란 바로 영원한 복음의 선포자가 되고자하는 열정이었다.
에드워즈를 목회자와 설교자로서 평가하기 전에는 신학과 철학에 끼친 그의 공헌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없다. 에드워즈가 남긴 값진 논문들은 목회 활동을 위해 묵상하는 가운데 거두게 된 열매이며 이러한 목회적 묵상은 복음주의적인 신앙의 뿌리에서부터, 그리고 목회자로서의 책무를 수행하면서 얻은 체험으로부터 솟아난 것이다. 그의 신앙과 정신은 그가 설교자로서 24년 동안 회중들에게 선포했던 설교들을 통해서 표출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인물을 목회자요, 설자로서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에드워즈의 저작에서 발췌한 글들을 읽으면서, 그 글들을 통해 에드워즈 자신이 우리들에게 말을 하도록 하려는 데에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복음주의적인 영성이 어떤 것인지를 보게 될 것이다. 영혼을 구원하는 종교란 개인적이고 영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종교이다. 에드워즈에 대한 논의도 이러한 종교를 알아야만 비로소 가능해진다. 에드워즈는 내적인 빛에 대해 설명하였는데, 그의 설명은 듣는 이들을 청교도주의로 초대하고 경험적 종교의 진가를 드러내었으며, 격렬한 열정으로 충만한 기독교의모습을 드러내주었다.
에드워즈는 풍성한 열매를 맺어온 청교도 정신의 전통을 명예롭고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뉴잉글랜드를 세운 사람들은 그들 앞에 놓인 위대한 미래를 향유할 가치가 있는 시점들이었다. 진실과 언어, 문학, 정부 그리고 종교와 같은 명예로운 전통이 융성했던 대표적인 시대에는 그 시대를 가능하게 했던 뛰어난 인물들이 있었다. 이 열정적이고 경건한사람들의 목표는,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는 가운데 자신의 생을 이어나가며, 사적인 생활에서나 공적인 생활에서나 성경의 가르침대로 바르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모들도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았다. 그의 아버지인 티모시 에드워즈 목사는 코네티컷 강변 윈저에 자리 잡은 교회를 담당하고 있었다. 티모시는 한때 솔로몬 스토다드라는 목사 밑에서 사역했는데 조나단의 어머니는 바로 스토다드 목사의 말이었다. 그들의 가계는 영국으로 소급된다. 영국에서 살았던 조상들도 문화와 근면, 그리고 청교도적 절제로 삶을 이어나간 사람들이었다.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더욱더 견고하게 이어져 내려오던 이 경건한 가풍은 1703년 10월 5일 동 (東) 윈저에서 10남매 중 다섯째요, 유일한 아들인 조나단이 태어남으로써 그 정점에 다다랐다. 이 아이가 주변 환경으로부터 지울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모는 당시로서는 매우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조나단 자신도 분명한 종교적 확신으로부터 힘을 얻는 소년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일찍부터 복음주의적 경건이 명령하는 것들과 그 함축적인 의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자신도 “아직 아이였을 때에도 나는 다른 아이들의 놀이에 흥미가 없었다. 나는 진지하게 배우며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충만했다…”(워세스터 편집 「조나단 에드워즈 저작집」Ⅰ.14쪽)고 회상한 바 있다.
이러한 유산의 영향으로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생활과 의무, 구원의 길, 그리고 현세와 내세에 변함없는 영생에 친숙하게 되었다. 이후 그의 저작과 사색의 대상이 된 모든 주제들은 가정과 사랑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유래된 것들이었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정은 그가 속했던 최초의 영적 교회이자 최초의 대학이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사람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었으며 그의 부모님들은 그가 만난 최초의 스승으로서 그에게 삶과 사명에 대해서 가르쳐주었다. 에드워즈가 이미 청소년 시절에 처음으로 영적인 자극을 받았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영적인 자극으로 인해 에드워즈는 인생 최대의 문제인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 사람을 특별히 쓰시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만의 고유한 방법으로 그를 준비시키신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경우에는 문화적인 가정과 외아들에 대해 가족들이 쏟아주었던 관심이 그의 예민한 정신에 필요한 이상과 사고력을 키우는 훈련에 더 없이 값있는 요소로서 작용했다. 가정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은 에드워즈는 대학에 진학했을 때보다 본격적인 학문의 훈련을 받을 충분한 자질을 갖춘 재목으로 자라났다. 그에게 있어서 어린시절은 내면의 영적인 투쟁과 더불어 정신적인 성장을 기하는 시기가 되었다.
에드워즈가 12살 때 쓴 “곤충에 관하여”라는 수필이나 “무지개에 관하여”라는 관찰록에는 대상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관찰한 것을 정확하게 기록할 줄 아는 한 소년의 빈틈없고 정밀한 정신이 드러나 있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한 평범한 소년의 모습도 보게 되는데, 놀이를 하는 에드워즈의 모습이란 자기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놀라움으로 가득 찬 평범한 아이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일찍부터 자기 안에 언제나 영혼의 경이로움과 영혼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관심이 머물러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영원한 것들과 신적인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들은 최소한 몇 살이 되어야 하나님의 은밀한 속삭임을 듣고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일까?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라고 말했다. 세례 요한에게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성령이 임하여 계셨다.
조나단 에드워즈도 이들과 같이 위대한 사명을 숙명으로 안고 태어난 인물이었을까? 우리는 이 놀랍고 빛나는 정신을 가진 인물이 행한 모든 일들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얼굴만 보아도 비범한 영성을 느낄 수 있는 한 특별한 인물이 뉴잉글랜드의 거리를 활보했었다는 사실만은 믿을 수 있을 것이다.
2. 영적 성장
“그 후에 신령한 것에 대한 나의 감각이 점차적으로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회심 후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은총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났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는 게 쉽지 않았다. 비록 그가 거룩한 일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었지만, 다른 종류의 갈등이 있었다. 그가 말한 바와 같이 그에겐 하나의 고민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나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주권(sovereign)에 대해 저항하는 생각들이 가득했다. 이를테면, 하나님이 자신의 의도대로 사람들을 택하셔서 그들에게는 영생을 주시고, 반면에 그 기쁘신 뜻대로 어떤 사람들은 거절하시고 영원한 멸망에 내버려두셔서 영영 지옥에 있게 하시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이런 것들이 내게는 끔찍한 교리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러나 나는,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에 대하여 확신을 갖고 만족하게 되었다. 난 지금도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는지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아니 한참 동안 생각해보더라도 분명 한 사실은 어떤 성령의 특별한 인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지금 내 눈은 더 멀리 보고 있으며, 이성은 하나님의 섭리에 담긴 그분의 공의와 정당성을 깨닫고 있다."(Works, I, P. 15)
이상으로 보건대 에드워즈는 개인적인 위기나 공적인 위기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혼란으로 인해 동요되지 않았고, 묵상을 통해서 점차적으로 이러한 생각에 다다르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종교적 감성' 이 구원과 회심의 부속물로써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성의 각성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이 변화되었음을 강조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이 타당함을 알게 되었고 그의 안에 있던 장애물은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극복되었다. 한 젊은이가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된 데에는 가정환경의 비중이 크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를 다음과 같이 고백했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내 영혼에 대하여 다양한 관심과 훈련을 쏟았다. 하지만 내가 그러한 변화를 느끼기 전에 두 번의 각성 기회가 있었다. 그 기회들은 내게 새로운 생각과 기질을 갖게 했고, 그 이후로 계속 품게 된 사물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갖게 만들었다. 첫 번째 기회는 소년 시절 아버지의 집회에서였다. 대학에 들어가기 몇 년 전이었는데, 나는 그 집회에서 크게 각성했다. 그 감명은 수개월 동안 지속되었고, 나는 종교적인 것에 관하여, 그리고 내 영혼의 구원에 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서 영적인 풍성함을 느끼게 되었다."(Works, I. p. l4)
그는 잠시 동안 예배를 통해 기쁨을 맛보았으나, 이러한 시기는 곧 지나가고 처음의 감흥은 점차적으로 사라져갔다. 그리고 다른 기회를 통해 영향을 받아, 그는 또 다시 감동되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사실 나는 가끔 몸이 좋지 않았다. 그 상태는 대학시절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더욱 심해져 대학 졸업반까지 계속되었다. 그때 나는 내 영혼의 상태에 대하여 매우 불안한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나는 늑막염에 걸리게 되었다. 하나님은 나를 거의 무덤까지 데리고 가서 지옥의 구덩이 위에서 흔드셨다."(Works, I, P. 15)
바로 그때 두 가지 사건이 그를 움직였다. 그가 속한 교구의 부흥은 그의 민감한 생명력을 부추겼고, 그 병은 하나님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게 만든 행운의 기회가 되었다. 그는 목회사역 내내 건강과 힘의 부족으로 인한 어려움에서 벗어난 날이 없었지만, 언제나 부흥운동에 대해서 마음이 열려 있었다. 다양한 관심은 중단되지 않고 끝까지 계속되었다.
에드워즈의 태도 변화는 새로운 확신을 가져왔다. 그것은 이른바 '기쁨에 찬 확신이요, 매우 기쁘고 달콤한 교리'였다. 그는 절대 주권을 하나님께 돌려드렸다.
'내 기억에, 생애 처음으로 하나님과 신성한 것에 대해 일종의 내적이고도 달콤한 기쁨을 맛보았던 날이 있었다. 아마도 디모데전서 1장 17절을 읽던 중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반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Works, I, P. l6)
바로 그 순간부터 에드워즈는 영적인 삶에 있어서 성장하게 되었다. 그의 영성은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심에 대해,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대해 증거할 수 있기까지 자라갔다. 심지어는 자연 속에서도 경이를 연발했다. 그가 그토록 열정적으로 섬기게 된 그 하나님의 능력과 아름다움이 세상에 가득 차 있었다.
만일 우리가 그의 근본적인 회심 체험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그의 설교나 글들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의 종교적 진보는 후에 그가 쓴 모든 글들을 특징짓고 있다. 초기의 영적 감각은 그의 관념론을 뛰어넘었다. 거기엔 어거스틴과 파스칼이 겪었던 것과 같은 영적 훈련과 몸부림이 있었다.
그가 아버지 시대의 문자적인 캘빈주의에 반발했다는 것은, 그가 늘 그러한 해석의 신봉자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회심이라고 하는 전환점, 그리고 영적인 삶에서의 성장은 그의 신학적 확신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확신은 후에 에드워즈가 하는 해석의 길잡이가 되었다. 그리고 젊은 시절 에드워즈의 성숙은 그의 가르침과 설교를 해석하는 열쇠가 된다. 그의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작업을 평가하려는 시도를 무시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진짜 에드워즈를 모르고 지나치는 사람일 것이다. 그 안에는 에드워즈의 참모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업은 실험종교의 영역이자, 천부적인 복음증거자이며 청교도의 핵심인물인 에드워즈의 면모를 다루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3. 시간의 헌신
‘나는 결심하였기에, 결코 잠시도 낭비하지 않았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시간을 활용했다.’
에드워즈는 초년에 아버지의 목회 무대인 윈저(Windsor)에서 지냈고, 예일대학에서 정규교육을 받았다. 가정에서 그의 부모님들을 통해 언어와 문학을 준비한 후, 당시로서는 평범하지 않은 13살의 나이에 대학에 입학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2살에는 거미에 대한 관찰을 다룬 논문을 쓰기도 했다. 14살에는 로크의 오성론을 대하고, 배우는 학생으로서 뿐 아니라 비평가로서 글을 쓰려고 했다. 이 책은 그의 사상체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책 가운데하나이다. 에드워즈는 대학교육을 충실히 받았다. 그는 철학과 신학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부지런한 학생이었다. 1720년 9월, 17살이 되기 얼마 전쯤, 에드워즈는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에 그는 예일에서 목회사역을 준비하면서 2년을 더 보냈다. 신학 연구가 끝나자 목사 후보자로서 복음을 전할자격이 갖추어졌다. 뉴욕의 한 장로교회에서 짧은 목회를 하고 8개월 만에 학업을 마치기 위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다. 1723년 9월 예일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고, 이듬해 봄에 2년 간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주어진 조교가 되어 예일대학으로 돌아갔다.
에드워즈는 주어진 시간을 통해서 평생의 일을 위해 보다 더 많이 준비했다. 그는 처음에 품었던 결심을 부지런히 그리고 열성적으로 실천했다. 읽고 공부하는 것 모두가 그에게 유익이었다. 모든 분야의 지식과 연구에서 성과를 보았다.
훈련의 기간은 그의 마음을 준비시켜 주었고, 그는 모든 면에서 놀랄 만큼 보람있는 삶을 성취할 기회를 부여받았다. 그의 천부적 재능은 예일에서 연마되었고, 노스햄턴(Northampton)에서 목회사역을 시작하려고 출발하던 무렵까지 그는 미래가 촉망되는 인생이었으며, 그는 학문 써클에 가입해서 시야를 넓혔다. 그리하여 집에서 보낸 젊은 시절과 대학에서의 조교생활이 흘러갔다. 그 시기를 통해 그는 성스러운 소명을 수행할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그처럼 좋은 자격을 갖추고 목회를 시작한 사람도, 또한 그처럼 비극적인 상황에서 목회를 끝낸 사람도 없었다. 그의 능력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에드워즈는 거의 24년간을 회중을 섬기며 일했다. 메사추세츠에서 가장 번영한 내지(內池)사회의 목사로서 세음을 받았고, 뉴헤이븐(New Haven)출신의 사라 피에폰트(Sarah Pien-epont)와 결혼했다. 그는 모든 면에서 행복했고, 목회 사역도 만족스러웠다. 그의 편지와 대화의 기록들을 보면, 그는 한가정의 다정한 남편이었고 사랑이 많은 아버지였다. 그는 가정의 안내자였고 상담자였으며, 평범한 삶과 고매한 사고가 그의 가족의 전부였다.
그는 연로한 그의 할아버지 스토다드의 말벗이 되어 노스햄)에 돌아갔고, 그가 24살이 되던 해, 1727년 2월 15일, 그 곳 회중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 기간동안 우리는 학자이자 설교자로서의 그의 습관을 잠깐 엿볼 수 있다. 거의 금욕적으로 생활한 그는 먹고 마시는 것을 절제하였고, 항상 연약한 육신을 잘 관리했다. 하루에 두 번 개인적인 기도시간을 가졌다. 그는 연구하는 데 매일 13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걷기나 나무패기 등으로 운동했고, 좀더 깊이묵상하기 위해서는 말을 타고 숲속을 다니기도 했다. 그는 규칙적으로 살았고, 지식에 대한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어떤 고통도 감수했다. 모든 종류의 서적을 읽었는데, 특히 신학 작품들을 읽었다.
에드워즈는 목사였지만, 소위 심방하는 데는 거의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다. 그는 변명하기를 몇몇 사람들이 이런 일에 천부적 재능을 받았지만 자신은 기질상으로 맞지 않고, 평범한 일상생활에 대해 자연스럽게 말하지도 못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심방과 담을 쌓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회중과 계속해서 만났다. 그리고 그들이 방문을 요청할 때면, 즉시 가난한자들과 병자들을 돌보았다. 그는 사적인 모임을 열었고, 때때로 함께 기도하고 문제를 논하기 위해 그의 집으로 젊은이들을 초대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글을 쓰고 설교하고 또 연구하는 분야의 종교적 확신에 따라 각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그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믿었다. 영혼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그의 집을 방문하는 것은 일상화되어 있었으며, 부흥의 시기에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그에게 영적 상담을 부탁해왔다. 이 시기를 보면, 우리는 자신의 영적 유익을 위해서 시간을 사용해야 할 때에도, 지나칠 만큼 다른 이들의 영적 유익을 위하는 한 영혼, 또 한 쉼을 몰랐던 한 인생을 만나게 된다.
그의 부지런함은 연구에 바친 시간을 보면 명백해진다. 여기에서 게으름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도서관의 귀중한 책들을 읽은 이후에 생각과 묵상의 개요를 써보았다. 성경 연구를 통해서 그는 주해설교와 강해설교를 하게 되었다. 철학적 명상은 후일 논쟁의 소지가 된 논문을 탄생시켰고 그것으로 인하여 그는 사상가로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심지어 말 위에서나 혹은 숲속에서도 그의 지성은 지혜를 얻기 위한 철학적 질문으로 번민했다. 그는 떠오르는 단상 하나라도 잃지 않으려고 외투에 달아놓은 종이조각위에 끊임없이 기록했다. 목회연구의 제한된 범위에서 그의 예리한 지성은 영원한 문제와 원리들과 씨름했다. 그의 사고의 지평은 제한되지 않았고, 저작을 통해서 그는 실제적으로 세상에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그의 영향은 수세기에 걸쳐 지속되었다.
에드워즈는 18세기의 저명한 사상가들의 반열에 올랐고, 그의 설교들은 다른 작품들과 함께 그 가치가 높이 평가 되었다. 드 윗트(J. De Witt)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이룬 모든 업적은 영적 세계에서 한 노예가 한 일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역은 박애주의자나 선교사가 행한 것과는 다른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상가의 업적이었습니다. 그의 시역에서 사용된 도구는 지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저서들에 나타난 탁월성은 지성적이라는 말로 표현될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공들여 쓴 논문들은 물론 설교에서도 그러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의 작품들은 영적인 세계를 지적인 체계로 일구어낸 것 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그의 활동영역에서 탁월한 지성을 보여주었지만, 그것 때문에 거만하지는 않았습니다."("Jonathan Edwards: A Study",Princeton Theological Review, II, Jan., 1904, P.lOl).
에드워즈의 철학적 진리에 대한 이해의 폭과 그것을 서술하는 능력은 그의 지성적인 성향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에드워즈는 그의 철학에 매료된 사람들에 의해 평가받았을 뿐, 설교자로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설교자로서의 에드워즈를 살펴봄으로써 철학자로서의 에드워즈를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그는 철학자와 신학자로서 설교하였던 것이기에, 우리는 설교자로서의 그의 철학과 신학을 해석해 낼 수 있다.
에드워즈의 설교는 심리학 이론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에드워즈는 그의 생애 동안 대각성 부흥의 감동을 경험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타락 그리고 복음의 은혜를 계속해서 설교에 반영하는 그러한 칼빈주의 견해의 옹호자였다. 이들 진리의 한도 내에서 그는 인간본성에 관한 모든 견해에 거슬리는 것으로서의, 미덕의 본질과 의지의 자유에 관계된 이론들을 세워나갔다.
미국 문화의 종교적 배경을 보면, 당시의 부흥운동이 에드워즈의 설교와 배치됨을 알 수 있다. 스위트(W. W. Sweet)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성경에 입각한 공화국에서, 17세기 말엽에 뉴잉글랜드목사들은 교회 조직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만으로도 살아있는 종교가 쇠퇴해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청교도인들의 종교는 비감성적으로 변해서, 부흥과 회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부류의 설교가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그것은 뉴잉글랜드의 전반적인 종교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를 통하여 새롭고 매우 감성적인 반응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대각성(Great Awakening)입니다"'(The Story of Religion in America, PP.79, 96).
에드워즈의 설교는 뉴잉글랜드 사람들과 그 지역 설교자들을 자극했고,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했다. 한 비범한 지성이 습관적인 종교에 젖어 있는 둔감한 세계를 감동시켰고, 그의 영향은 다음세대의 가장 예리한 지성들에게 미쳤다. 에드워즈의 예리한 설교 배후에는 부지런한 학생이자, 매일매일 지적으로 게으를 수 없었던 사람이요, 의식을 교란하고 탐구하는 심리학적 접근방식을 이용한 지성이 있었다. 에드워즈가 자신의 시간을 유익한 것에 투자하였기 때문에, 그는 심판의 날을 위해 계속해서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었다. 게으름이라
는 악덕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4. 거절당한 주장
"저는 여러분을 각성시키려고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설득하려고 노력했습니다. "
노스햄턴에서 24년간의 목회 기간 동안 목사와 성도간의 애정과 사랑은 날로 더해갔다. 그러나 갑자기 그 관계가 깨어지고 결국 에드워즈가 파면되기까지 이른 것은 엄청난 비극이라 하겠다. 사정은 이러했다.
1744년 그는 젊은이들 중 몇몇 이들이 자신의 영적인 삶에 손상을 끼치는데도 불구하고 '문제 거리가 되는 문학작품' 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직원들과 의논한 후에 그 다음 주에 히브리서 12장 15절과 16절을 본문으로 설교하였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에서와 같이 망링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그 사태를 다루고자 특별회의의 소집이 결정되었고, 그 회의에서 에드워즈는 문제가 되는 이들의 명단을 만들었다. 그 명단이 공개되었을 때, 대부분의 가정과 성도들이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러나 감자기 부모들이 자기 아이들이 공석에 불려나가 해명해야 한다는 것을 반대했고, 에드워즈의 목회는 그 영향으로 인해 위축되었다.
또한 이미 문제가 되었던 것은 목사로서 그의 생계를 유지시켜주는 공동체와의 관계였다. 1742년에 그 관계가 나빠졌다. 에드워즈는 그들이 약정에 따라주는 사례와 부수입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더 커진 가족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사레를 올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몇몇 사람은 그가 규모 없는 삶을 산다며, 사례비 인상을 반대하고 그를 비난했다. [(Connecticut의 역사」,II, 197p)에 의하면, 목사와 공동체 사이에 서신 왕래가 있었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고 한다. 틈이 더 벌어졌던 것이다.]
이 두 사건이 교묘히 맞물리면서, 교회 안에서 또 다른 위기가 발생하였다. 목사로 수년 간 일해오신 그의 할아버지 스토다드(Mr. Stoddard)가 에드워즈의 판단으로는 아직 변화 받지 못한 사람들을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사람들의 생각에는 그들이 주의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영생을 얻게 될 수도 있을 것이었고, 또 그러길 희망했다. 마음을 읽을 수가 없고 오직 믿음을 고백하는 것만이 판단의 기준이었기 때문에, 당시 스토다드와 그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은 이들이 성찬식에 참여하여 떡을 델 수 있다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이 관례는 초기 믿음 있는 청교도인들의 후예들 사이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고, 사람들은 이것을 "중도 언약"(Half-Way Covenant)이라고 불렀다. 뉴잉글랜드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에드워즈가 노스햄턴에 갔을 때, 그는 이 관례에 대해 어떤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확신이 없었던 터라 일단 그 관습을 묵인하였다. 그는 스토다드의 계승자였지만, 의심을 갖고 이 문제를 연구했다. 그는 성경을 찾아서 그 행위를 옹호하는 다른 책들과 비교하였다.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있는 한 이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그의 아내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갑자기 이런 견해로 빠진 것은 아니었다. 논쟁이 한창이던 중에 에드워즈의 부인은 한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를 써보냈다. “제가 분명히 증언하는 바입니다. 4년 전, 제 남편 에드워즈가 경건의 고백을 하지 않은 마지막 사람을 이 교회에 입교를 허락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는 이제 다른 사람에게는 허락하지 않을 예정이라고 말했으며… 또한 이 문제에 대해 그의 견해를 말해줄 「종교적 열정」 이라는 책안에 어떤 의견을 밝히겠노라고 말했습니다."(I. W. Clark, "A wifely Estimate of Edwards," The Congregationalist& Christian World, LXXXVIII, Oct. 3, 1903, P. 472').
그 책에 관한 언급 외에 에드워즈는 1749년 <하나님 말씀의 규칙을 위한 겸손한 질문들>을 써서 출간했다. 그것은 가시적인 교회 안에서 온전한 성찬과 완전한 세움을 위해 필수적인 요망사항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진지하게 이 질문을 숙고했고, 그의 반대자들의 글을 주의 깊게 읽었다. 그의 원고에서 우리는 그가 여백에 기록한 참고 문헌들과 각주를 통해 목표를 향한 정직성을 몇 볼 수 있다.
1749년 4월 노스햄턴에서 그에게 강단을 떠날 것을 제안하는 사람들에 대해 답변하는 그의 초고가 남아 있다.
“상기 본인은 여기 서명하고 다음과 같이 천명하는 바이다. 만일 사람들이 본인이 준비하고 있는 바, 교회가 교인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책이 출간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책을 아주 주의 깊게 입고 나서, 그리고 그들이 서로가 인정하는 공회의 충고를 받아들인 이후에, 교회가 나의 사임을 원한다면 나는 목회사역을 그만두겠다. 또한 다음과 같은 제안이 받아들여진다면, 즉 내 책을 읽거나 혹은 그 교리의 변호를 위해 내가 강단에서한 말을 들은 형제들이 이 사건을 결정할 투표자로서 거부당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공동체가 나를 모든 비난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것을 보장한다면, 그리고 공회가 본인이 이 교회의 목사직을 사임하는 것을 승인한다면, 나는 목회 사역을 그만두겠다.”(1749년 4월 13일, Northampton Jonathan Edwards).
이 책은 1749년 보스톤에서 킬(S. Keel)에 의해 출판되었다. 이 책의 첫 장은 욥기서 33장2-3절 로 시작한다. “내가 입을 여니 내 혀가 입에서 동하는구나. 내 말이 내 마음의 정직함을 나타내고 내 입술이 아는 바를 진실히 말하리라”로 시작한다.
그는 목사로서 자신의 경우를 변호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글과 인쇄물을 통해 그가 말한 것이나, 그의 견해를 무시하려는 사람들과 싸우는 정신 등에는 모호한 것 이라곤 없었다. 그는 변화된 삶으로 고백하는 자라야만 명백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성찬식은 오직 그런 그리스도인들만을 위한 것이었지, 회심의 수단이 아니었다. 그의 견해는 많은 이들을 성나게 만들었다. 그런 까닭에 그의 직원들 중에 일부는 그가 설교에서 그러한 문제를 언급하지 않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설교를 계속하였다.
나중에, 그 지방이 처한 상황을 다를 공회가 소집 되었을 때, 에드워즈는 그의 견해에 반대하는 대다수의 투표자에 의해 좌절과 고통을 맛보았다. 그의 회중들은 1750년 6월 22일 투표로 그가 목사직에서 사임할 것을 결정하였다. 외설 책에 탐닉하는 젊은이들을 책망한 일과 관련된 논쟁, 봉급 인상을 요구한 개인적 경솔함 그리고 주요 이슈인 “중도 언약"은 개인적으로 그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연합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는 자신의 성도들을 설복하기 위해 애썼는데, 24년간의 목회직은 대각성 목회였다. 부흥이 하나님의 집에 이르렀다. 그의 설교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그가 은혜의 교리를 가르칠 때 얼마나 강한 인상을 남겼는지 모른다. 가정과 대학에서 보낸 인생의 밝은 여명(1703-1727)으로부터 노스햄턴에서의 절정의 시간들(1727-1750)을 지내고 에드워즈는 이제 스톡브리지(Stockbridge)에서 목사와 선교사로서 암울한 시기(1751-1757)를 맞는다. 그리고 1758년 프린스턴에서 아직은 이른 나이인 55세로 인생의 황혼을 맞았다. 에드워즈의 평전에 이런 내용들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인생의 절정기에 회중들의 손에 실패의 불명예를 맛본 것은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아픈 시련이었다. 대가족이 그에게 의존하고 있었지만, 어디에서도 그의 재능과 능력에 걸맞는 조건으로 청빙해 주지 않았다. 교회 부흥과 재건의 시절에 그와 함께했던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저버리지 않았다. 시간은 진리에 대한 그의 견해가 옳았음을 입증해주었고, 그의 논쟁 정신을 정당화시켜 주었다. 가장 감동적이었던 순간은 그가 ‘고별 설교'를 한 비애의 시간이었다(Works, I, P59). 영적으로 지적으로 충만한 가운데 있었던 그가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미래를 맞았던 것이다. 그는 헛되이 자신을 소모했다. 그의 주장은 거절되었다. 다만 지금 우리들만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실패' 도 있음을 보고 있을 따름이다
5. 품위 있는 겸손
"저는 가장 현명하고 친절하고 신실하다고 생각되는 분들에게 조언을 요청할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완고하거나 독선적이거나 혹은 고집 센 사람이 전혀 아니었다. 그의 설교가 어떤 인상을 풍기든지 간에, 그는 겸손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새롭게 변한 그의 처지에 대해 그가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보자. 그가 노스햄턴에서 해고된 후에 스코틀랜드에 사는 친구들은 그곳에 와서 목회할 것을 권유했지만, 에드워즈는 이런 초빙과 건의를 거절했다. 그런 다음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충고를 무시하는 고집 세고 거만한 성품을 보여주지 않았다. 스톡브리지로, 그리고 나중에는 프린스턴으로, 그는 겸손히 판단하여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되면 어디로든지 떠났다. 노스햄턴에서 이사한 후에 국경 근처의 개척지 스톡브리지에서 목사와 선교사를 겸해서 사역할 기회가 주어졌다. 1751년 8월 8일에 인디언과 영어를 할 줄 아는 소수의 이주자를 대상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시련과 시험, 상실과 수욕의 어둡고 답답한 시기에, 그는 어떻게 노스햄턴의 안정적인 목회에서 돌이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목회의 질적인 풍성함과 함께 양적인 성장을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두 곳의 목회 조건의 현저한 차이에 대해선 더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스톡브리지에서의 생활은 그의 일생 가운데 혹독한 시기로 분류된다. 그가 알 수 없는 미래에 어떻게 적응해갔는가를 보면, 그가 노스햄턴의 회중 앞에서 견지했던 마음과 정신에서 드러난 특성들이 허위가 아니었으며, 그의 설교가 공허한 메아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불굴의 의지와 함께 용기와 믿음 안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게 된다. 그러한 재능을 통해 그의 성격은 제한된 새로운 상황에 적응할 수 있게 된다. 그는 변경(邊境)에서 하는 선교사의 개척 사업이 맞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인디언의 언어도 완전히 습득하지 못했다. 다만 그는 규칙적인 목양사역에 만족했다. 그것은 통역인을 세워서 교리문답교육과 가르침을 베푸는 정도였다. 모든 교회가 그들 최고의 지성을 잔인하게 광야로 추방했고, 그 우울한 날들은 개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스톡브리지의 교회는 에드워즈에게 교구의 최소한의 일을 맡겼고 보다 격리된 생활을 하게 했다. 그는 방문객이나 친구들 혹은 다른 교회에 방해받지 않았고 그들은 그의 설교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사실상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고, 이 6년간 대단히 가치 있는 책과 수기들을 썼다. 그는 스톡브리지의 암울한 전망과 목회지에서의 추방에 용기를 갖고 직면할 수 있었고, 지금은 종결된 긴 목회 경험을 통한 사색과 명상의 열매를 글로 남길 기회도 갖게 되었다. 에드워즈가 남긴 철학과 신학의 위대한 작품들을 생각해 볼 때, 그것이 추방의 시기에 완성되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상상력이 풍부한 그의 이성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그 교구의 작고 허름한 방에 있을 때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다. 그는 고독 속에서 40년간의 연구 결과를 기록해 두었다.
과연 그에게 어떤 미래가 더 펼쳐졌을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단지 그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그의 펜 끝에서 나오는 사상들이 아마 완벽하고도 체계적인 신학과 철학의 사고로 집대성되지 않았을까 추측할 따름이다. 에드워즈의 일생에서 기대치 못했던 변화의 절정은 프린스턴대학의 총장으로 초빙 받을 때였다. 처음에는 그 권유를 거절하려 했다. 그가 사양을 표했던 편지는 기독교인의 겸손과 위엄을 잘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이런 높은 지위에 걸맞지 않다고 여겼고, 그 이유로서 경험 부족과 교육적 배경과 인생의 환경을 들었다. 그는 아래와 같이 편지했다.
“저는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 이러한 일을 떠맡게 되 든 그렇지 못하든 간에, 저를 지목하셨다는 게 분수에 지나친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제 자신의 결점이, 그러한 일에는 적합하지 많고 또한 몇 가지 학문에 부족한데 특히 대수와 보다 높은 수준의 수학 그리고 고전 헬라어에서 그렇습니다. 헬라어는 주로 신약 성경에서 배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생각하기에 이 일의 위대함 때문에 저는 진지하게 이 문제를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일을 감당할는지에 대해 조언을 요청할 생각입니다.”(Works, I,p.47)
그는 노스햄턴에서 그랬던 것처럼, 지금 스톡브리지에서도 조언을 구하고자 이웃 목사님을 찾았다. 그리고 그분들의 조언에 힘입어 프린스턴의 초빙을 받아들였다. 1758년 1월, 아내와 나머지 가족들을 스톡브리지에 남겨 두고, 두 딸만 데리고 새로운 지역에 정착했다. 나머지 가족들도 곧 그를 따를 예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가르침을 기록으로 남겨두지 않았기 때문에 프린스턴에서의 그의 가르침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1758년3월 22일, 바야흐로 대학으로부터의 달콤한 초대를 누리려는 문턱에서 갑작스런 죽음이 그를 막아서고 말았다. 황혼이 너무 일찍 찾아온 것이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에드워즈의 탁월한 겸손을 볼 수 있다. 질병을 이기기 위해 새로이 예방접종을 했는데, 도리어 병약한 상태에 빠지고 만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그 접종에 대해 의심을 갖고 있었는데, 과연 그가 접종받기 전에 조언을 구했었을까? 어떤 경우가 되었든지, 그 누구도 새로운 환경에 대처하는 그의 열린 마음에 대해 트집 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번에도 인생의 초창기 자기 자신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70개의 규율 중의 하나가 실제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깊이 생각한 바에 의하면 노인들은 새로운 발견을 통해 얻은 어떤 이익들을 좀처럼 누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노인들이 지금까지 익숙해온 그런 사고방식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결심한다. 어쨌든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나는 모든 잠정적인 발견들에 대해 열의를 갖고 그 이치를 들어보려 할 것이다. 그것이 만일 합리적이라면, 내가 여태까지 생각해온 사고방식과 아무리 다른 것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수용할 것이다.” (Works, I, "Resolutions")
에드워즈의 겸손과 친절한 정신은 다른 이들에게서 도움을 구하는 것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그가 진실을 가치 있게 여기고, 이미 경험한 적이 있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할 때조차도, 그는 새로운 것에 대해 개방적이었다. 그의 성품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강철처럼 단련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에드워즈가 그의 삶 가운데 타인을 무시한다든지, 어떤 가시 같은 감정이나 날카로운 비난, 혹은 나쁜 의도 등을 전혀 갖지 않았던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그것은 그의 운명과도 같았다. 그 내면의 영혼이 민감하였기 때문에 이따금씩 괴로워했다. 에드워즈는 실수도 했고 그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기도 했다. 스코틀랜드 카르녹의 친구 길레스피(T. Gillespie)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노스햄턴에서 그런 노력을 하게 하는 데 공헌한 한 가지는 나의 젊음이었지만, 더 많은 판단과 경험이 필요했습니다. 내 안에 있는 담대함은 내게 커다란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내 안의 자신 없음도 나에게 상처를 입혔습니다.”(Works, I, P466).
이것은 바로, 교회에서 일어나는 논쟁 가운데 자신은 양심과 확신의 빛 아래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자신이 존경받는 위치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한 영혼의 고통스러운 자기 표출이다. 굴욕과 겸손 그리고 지식과 무지, 확신과 불확신은 얼마나 밀접한 것인가! 이런 기질을 가진 사람이 다른 이들로부터 조언을 구하고, 그 조언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위의 편지는 1751년 7월 1일에 스특브리지에서 쓰여 졌으며, 세월이 무르익어 그에 대한 비난은 완화되었다.
6. 독서와 연구(Solitary Thought)
“나의 지성은 독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묵상으로 시간을 보내기에 바빴다”.
에드워즈는 고독한 사상가였고, 하루중 대부분의 시간을 연구하는 데 할애했다. 노스햄턴에서의 나날은 영적 지식을 추구하기 위한 강렬한 질문으로 가득찬 하루하루였다. 그의 회중은 성소에서 짜내어진 기름과 같은 결과들을 공급받았다. 굶주린 양떼를 먹이고 그의 양무리에게 줄 목초를 공급하기에 쉬운 길은 없었다. 그는 노스햄턴에서 하루 열 세 시간을 묵상과 집필로 지냈다. 만약 끊임없이 자신을 위해 영적 자양분을 축적하기에 힘쓰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목회의 부담을 지탱해내지 못할 것이다. 에드워즈의 삶이 바로 그 사실을 증명한다.
다음의 기사는 우리에게 에드워즈의 실천의 단면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의 지속적인 신중함과 음식과 수면에 관한 절제, 그리고 신체 단련에 대한 노력 덕분에 허약한 체질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사람보다 더 세밀하고도 계속적인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보통 13시간씩 연구하는 데 보냈다. 그리고 이 시간에는 다른 이들의 사상을 답습하지 않고, 훨씬 더 심신을 지치게 하는 작업 즉, 어려운 주제에 대한 탐구나 독자적인 생각을 착상하고 정리하는 일, 혹은 새로운 주장을 펴거나 사실들과 원리를 발견하는 일들을 했다. 덜 중요한 일들에는 시간을 적게 배분하는 것 같은 특별한 방법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의 한결같은 규칙과 절제, 그리고 습관의 힘으로 인하여, 그의 지성의 힘은 항상 그의 통제 하에 있었고, 맡겨진 일을 지정된 시간에 완수했다. 따라서 그는 매 주마다 설교를 준비할 날을 정해놓고 그 외 다른 날에는 특정한 주제에 투자했다. 질병이나 여행 혹은 어떤 특별한 중단 외에는 늘 그리하였으며 따라서 매 주 일과의 모든 부분을 이행하지 못하거나, 그 일을 하느라 시간에 쫓기는 일을 사실상 거의 없었다.”(Works. I. p. Ixxxi)
위의 묘사 속에는 한 사상가가 그려져 있으며, 그 그림을 통해 에드워즈의 지적 역량을 엿볼 수 있다. 가풍, 영적인 유산 등과 같은 출신 배경, 학생으로 훈련되었던 대학에서의 삶, 그리고 그의 천부적 자질 등이 뛰어난 정신력을 가진 그의 인생 속에서 하나가 된 것이다. 그는 천부적인 학생이었다. 이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성숙했다지나, 그 성숙함 속에 기이한 면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그가 탐구와 배움의 정신에 의해서 기질상 그리고 지적으로 열중했던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타일러는 그를 가리켜, “미국에서 이제까지 배출된 이들 가운데 가장 독창적이고 예리한 사상가”라고 말했다(M. C. Tyler, A history of American Literature). 옥스포드의 맨스필드 대학 학장 페어베언(A. M. Fairbairn)은 증언하기를, "그는 미국이 낳은 가장 훌륭한 사상가 중 하나일 뿐 아니라 18세기의 가장 고매한 천재 사상가이다"라고 했다(Prpphets of the Christian Faith, p. 147). 교회사가인 W. W. 스위트는 말하기를, “여러 면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식민지 미국의 가장 뛰어난 지식인이며, 미국이 낳은 최고의 지성인 가운데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는, 지성적인 통찰력과 뛰어난 상상력의 독창성과 감정의 열정이 유례없이 잘 조화를 이루었다”라고 했다.(미국 종교사, 185쪽).
에드워즈의 습관도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에드워즈가 친필로 카탈로그(Catalogue)라고 이름 붙인 얇은 4절판 메모장이 있었다. 가장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 원고를 통해 그의 내면의 사상 세계를 비춰볼 빛을 얻을 수 있다 (Yale Collection 참조). 메모장은 예일 대학에서 조교로 있을 때부터 그의 목회기간 내내 갖고 있던 것이다. 때때로 그는 그 안에 다양한 문학적 메모를 적어두었는데, 주로 전해 들었던 책이나 혹은 읽고 싶거나 읽을 예정인 책의 제목이었고, 수중에 들어온 잡지나 논문 혹은 친구들이 전해준 흥미있는 주제 중에서 선별된 항목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 메모장 안에 있는 카드식 색인이나 파일 정리체계는 현대 목사나 설교자보다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 기록은 간단명료했고, 그외 관심의 대부분은 신학 서적들에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메모장에서 거의 문학적 전기에 가까운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거기에는 계시의 본질에 대해 상당한 내용이 들어 있다. 이 모든 기록들의 폭넓음은 마치 그가 거했던 노스햄턴의 한적한 시골과 스톡브리지의 황야에 있는 지평선에 필적하는 것이었다.
700개의 목록이 담겨 있는데, 이는 산문과 시 할 것 없이 모든 좋은 문학 작품에 매료되었던 에드워즈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메모장의 각 페이지는 두 단으로 나뉘어 있고 제목과 저자 별로 항목이 세분되어 있으며, 대개 논평이 첨가되어 있다. 많은 제목들에 두 줄이 그어져 있는데, 아마도 그 항목을 구입했거나 읽어보았음을 표시한 것 같다. 예를 들면 그는 벤자민 마틴의 「브리태니커 철학 전집」2권과 사무엘 클라크 씨의 「주석」전작 8권을 적어놓았는데, 이 책은 왓츠 박사의 「정통과 관용」이라는 책 119쪽에 추천된 책이라고 써놓았다.
<스펙테이터>(the Spectator), <테이틀러>(the Tatlter), <가디언>(the Guardian) 그리고 <레이디즈 라이브러리>(Ladies Library) 등은 여러 이유로 인해 그가 구독한 잡지였다. 고전 작가들의 작품으로는 포프의 「호머」와 존 밀튼의 것들이 있고, 철학작품은 버클리, 쿠드워쓰, 허친슨, 그리고 샤프츠베리 등의 것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것처럼, 그 목록에는 청교도 문학이 두드러진다. 그 리스트에는 씨베스(Sibbes), 백스터, 커튼 마더, 틸러트슨, 쉐퍼드, 게일, 퍼킨스, 테일러 그리고 플레이블 등이 들어 있다.
에드워즈가 오래된, 그것도 아주 제한된 극소수의 책을 선호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를 잘못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당시에 가장 좋은 문학작품으로 인정받은 책들을 구입하거나 혹은 빌려서 늘 그 책들을 가까이 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그의 서재가 크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서재에는 모든 종류의 사상에 깃들어 있는 통찰력에 개방적이었던, 그의 지성만큼의 넓이가 있었고, 깊이와 고무적인 것이 있었다.
평범한 책으로서의 카탈로그는 자료집의 역할과 함께 정신적이며 영적인 자극의 보고 역할을 한다. 설교자로서 에드워즈의 발전을 고찰하려고 할 때, 그의 습관과 훈련에 있어서 그에게 미친 이 강력한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에드워즈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당시에 쓰여진 최고의 책들을 간직했으며, 당시에 가장 유익했던 책들을 가까이 했던 것이다.
그의 “성경에 관한 기록”에서 수록 번호 291번은 이렇게 시작된다. "계시록의 권위에 관하여, 소우맨의 Paraphrase 서문 1, 2, 3쪽을 보라." 이 책은 여러 곳에서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에드워즈가 매우 그 책에 의존했고, 거기서 자유롭게 모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에드워즈는 편지를 쓰는 데 있어서도 당시의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이는 T. H. 존슨의 상세한 연구 소고인 “독서에 있어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배경”이란 글에서 이미 지적된 바 있다(Publication of the Colonial Society of Massachusetts, XXVIII, Ces., 1931. pp. 193-22). 과학, 시, 철학, 천문학, 역사, 문학, 신학 등 모든 영역이 독서 대상이었다. 그의 독서 목록을 살펴보면 그는 좁은 마음의 소유자의 생각과는 거리가 먼, 열린 지성을 소유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다양한 관심을 갖고 전 분야를 망라하여 책을 읽었던 것이다.
그는 모든 책들, 그중에서도 특히 신학 서적들을 다 읽었고, 그 결과 자신이 지식을 추구할 때 그 책들로부터 도움을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생각에서, 그는 독서의 범위를 특정 종파나 교파에 한정시키지 않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생각과도 정반대가 되며 신학적으로 진보적인, 저명한 작가들의 책을 접하는 수고마저 아끼지 않았다.(Works, I, p. 125)
그가 폭넓은 독서를 열망했던 것은 단지 지식의 욕구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의 최고 계시에 관계하여 새로운 시각과 해석을 추구하는 것 때문이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모든 지식과 지혜의 보물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었다. 그의 독서와 묵상은 알파와 오메가처럼 그리스도 안에 집중되었다. 연구에 투자된 시간은 영적 지식의 확장을 목적으로 하였다. 에드워즈는 일깨워진 지성의 광채로써, 편협성이나 제한 없이 그의 성도들을 양육할 수 있었다. 그의 영감의 샘의 원천은 바로 그 많은 자료들이었다. 독서로 인하여 에드워즈는 “풍성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7. 서적 수집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에드워즈는 모든 양서의 애호가이자 수집가였고, 그는 마치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듯 그의 서재를 이용하였다. 18세기 서적 생산의 한계를 고려해 볼 때, 그토록 희귀한 책들을 모으는 것은 이 독서광(bookman; 학자)에게도 버거운 일이었다. 구시대에는 아직도 서적 인쇄와 배포가 독점 형태로 이루어졌다. 바다를 건너 온 서적들은 개척지대에 있는 새 정착지의 청교도인들을 돕기 위해 속속히 도착했다. 인쇄가 신세계에서는 아직 요원한 꿈이었고, 그래서 에드워즈는 해외에 있는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아야 했다.
1748년 8월 31일 노스햄턴에서 에드워즈는 스코틀랜드의 커킨틸록(Kirkintilloch)에 사는 존 어스킨(J. Erskine) 목사님께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저는 이번 여름에 1748년 2월 9일에 쓴 당신의 친절한 편지와 아울러, 가장 감사할 만한 선물인 테일러의 원죄에 관한 책(John Taylor, The Scripture-Doctrine of Original Sin, 1738)과, 그의<사도적 문헌의 열쇠>(Key to the Apostolic Writings),,쉽게 쓴 로마서>(Paraphrase on the Epistle to the Romans), 그리고 당신의 설교 등을 잘 받았습니다…. 저는 테일러의 책 두 권을 얻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원죄에 관한 테일러의 책을 전에 빌려 읽은 적이 있었는데, 제 것이 생기니 너무나 기쁘군요. 당신께서 그 책을 보내주시지 않았다면 제가 그것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쉽게 쓴 로마서」라는 다른 책은 제가 들어본 적이 없던 것입니다. 설사 제가 그 책에 대해 들어보았더라도 그것을 입수하기까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살아 있는 한 이 책들은 제게 유용하게 사용될 것입니다. 대서양 저편에서 어떤 종류의 책들이 출간되고 있으며, 특히 매우 훌륭한 책들이 출간되었는지 여부를 더 잘 알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이 세상의 외진 구석 이곳에 살고 있는 저에게는 특별한 유익일 것입니다. 저는 진리에 반대해서 요즈음 쓰인 여러 주목할 만한 책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여러 가지 논쟁, 그 중에서도 특히 알미니안과의 논쟁에 있어서, 우리의 입장을 명확하게 개진한 주목할 만한 작품이 하나도 없습니다. 칼빈주의를 옹호하는 것으로서 최근에 나온 좋은 책이 있으면, 알려주신다면 참 고맙겠습니다."(Works, I, pp.533~637, Dwight's Life).
위 발췌문은 숨겨진 보물을 찾아다니는 전형적인 독서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편지에는 전에는 자연신론을 지지하는 불신앙인이었으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바울 사도의 회심의 진리로 인해 변화되어 기독교를 변증하는 입장으로 돌아선 길버트 웨스트와 로드 리틀튼의 책에 대한 내용도 들어있다. 에드워즈는 그 편지에서 스코틀랜드에 사는 한 친구에게 책 두 권을 보냈으며 서적을 교환하는 관계를 지속하고 싶다고 밝히고 있다.
에드워즈가 목회에서 동료 목사들과 거의 흡사했다는 것은, 이전에는 출판되지 않은 다른 편지에 나타나 있다. 모든 합법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서재를 확충해 나가려는 욕구는 지금이나 그때나 목회생활에서 다를 바가 없다. 한 아량이 있는 평신도가 뉴햄프셔 인근 지방에 사는 목회자에게「의회 백과사전」(Chamber's Encyclopedia)의 복사본을 제공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에드워즈는 그 시혜자에게 자신도 그 신사의 관대함과 선한 뜻을 입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두 번째 간청이 1737년 8월 8일로 기록된 노스햄턴에서 보낸 특별한 편지 안에 담겨 있다. 이 편지는 웬델 경(Honourable Jacob Wendel Esq.)에게 발송된 것이다.
“존경의 마음을 품고 편지를 드립니다. 햄프셔 지방의 목사님들에게 보여주신 당신의 관대함에 힘입어 저는 용기를 얻어서 전에「의회판 백과사전」을 보내 주십사고 요청했었고, 송구스러운 마음이지만 다시 한 번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저는 조심스럽게 저의 요청이 수락되었는지 아니면 거부되었는지를 매우 알고 싶습니다. 만약 당신께서 그 책을 보내주셔서 제가 겨울이 오기 전에 받아볼 수 있을 거라 기대해도 된다면 편지 운반인에게 말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당신께서는 아마 이 지방의 나머지 목사들 중의 하나인 저에게도 은혜를 베푸신 것이 될 것입니다. 당신의 은혜를 입은 겸손한 종, 조나단 에드워즈"(펜실베니아 역사협회, 필라델피아).
그 작품의 제목은「카탈로그」에 수록되어 있으며, 그 책값은 당시의 에드워즈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부담이 되는 가격이었다. 그 편지는 그에게 책 값에 대한 부담을 줄여준다면 책을 얻기 위해서 에드워즈가 “간청"도 마다 않는 자존심 없는 다른 목사들과 같았다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해준다.
스톡브리지에 체류하는 동안 스코틀랜드에 사는 그의 친구와의 서신 왕래는 계속되었고, 에드워즈는 1755년 4월 15일에 어스킨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자신의 “극히 적은 성공과 많은 낙심, 국가 문제, 국내의 관심거리들"에 관해 말하고 있고 특히 책에 관해 토론하고 있다. “지난 12월 초에 나는 편지가 동봉되지 않은 소포를 받았습니다. 겉봉투는 당신의 친필로 쓰셨더군요. 그 안에 다음의 소책자가 있었구요…."
다음에 적힌 몇 개의 제목들로 그 당시 에드워즈가 관심을 갖고 있던 몇몇 책에 대해 알 수 있다.
Casaubon, Enthusiasm; Warburton, Principles of Natural and Revealed Religion; Merrick, Christ and the True Vine; Campbell, Apostles no Enthusiasts; Gilbert, Guilt and Pardon of Sin; Hervey, The Cross of Christ, State of Society in Scotland for Propagating Christian Knowledge; Annals of Persecution of Protestants in France, Resolutions of the General Assembly, of May 22nd, 1736; Rutherford, Power of Faith and Prayer; A Vindication of the Protestant Doctrine of Justification, against the Charge of Antinomianism.)
이는 전형적인 목사이며 설교자의 모습이다. 그는 목회적 책임을 다하면서도 열광적인 책벌레였다. 때때로 이웃해 있는 성직자들에게서 책을 빌렸다. 종종 그가 소속된 목사회에서도 책을 빌렸다. 친구들은 그와 책을 돌려보았지만, 에드워즈의 주된 관심은 자기 책을 소유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연대감에는 한계가 없었다. 모든 분야의 문화가, 또한 폭넓은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주려 있는 에드워즈의 지성의 필요를 채워주었다. 이것은 그가 1747년에,「종교의 부흥을 위한 특별한 기도 속에서의 하나님의 백성의 가시적 연합을 증진시키기 위한 겸손한 시도」(An Humble Attempt to Promote Visible Union of God's People in Extraordinary Prayer for the Revival of Religion)라는 책을 쓸 때, 그 결속에 대해 에드워즈 자신이 선언한 말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가 읽은 책, 혹은 앞으로 구입해서 읽어야 할 책 등을 적어 놓은 목록을 보면, 그의 서재의 (금전적) 가치를 어느 정도 측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유언장 (his Will)에 의하면, 그 책들은 영국 돈으로 모두 80파운드 어치나 되고, 줄잡아 336권의 단행본과 586권의 소책자들이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에드워즈의 지속적인 책 대출을 생각해볼 때, 이것이 그가 소장하고 있던 양의 최종치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카탈로그」는 43쪽 분량의 얇은 갈색 종이로, 가로 세로 8×6인치의 겉표지가 있고, 속지 사이에는 약간 두꺼운 종이가 있다. 제목별로 약 500개의 항목들이 나온다. 책이 열거될 때에는 주제도 나온다.
Affec… 종교적 열정; 성경… 성경에 대한 기록;
Cre… 창조의 목적; 믿음…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음; 메시아… 메시아의 예표들; 지성… 그 지성;
Misrep… 수정된 허황된 이론들;
Observ… 다방면의 관찰;
Qual… 성찬에 참예할 수 있는 자격; 기도… 기도 가운데 하나됨;
Redem… 구속사, 비평… 잡다한 비평; 죄… 원죄; 삼위일체… 삼위일체에 관한 의견; 의지… 자유의지."
제목이 주어지고 작가의 이름도 주어졌다. 가끔 논평이 첨가되기도 하고 메모도 기록되었다. 이것으로 우리는 그의 폭넓은 관심 범위를 알 수 있다.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은 책들에서 인용문을 따왔다.
Willian Ames, De Conscientia(영역본); Aristotle, De Mundo; Isaac Barros, Works; Jaques Basnage, History of the Jews(영역본); Arthur Bedford, Scripture Chronology; Benjamin Bennet, Inspiration of the Scriptures; Daniel Burgess, Original Sin; John Calvin, Institues; Thomas Chubb, Posthumous Works; Samuel Clarke, Demonstration of God; Ralph Cudworth, Intellectual System; Humphrey Ditton, on the Ressurection; Philip Doddridge, Sermon on Regeneration and Scripture Doctrine of Salvation; Epicurius, “The very Worst of heathen philosophers"; John Flavel, Touchstone of Sincerity, Husbandry Spiritualized, Preparation for Suffering, Cause and Cure of Mental Errors, and Sacramental Meditations; Theophilus Gale, The Court of the Gentiles; Alexander Glass, Notes on the Scripture Texts; Thomas Goodwin, Works; Hugo Grotius, De Veritate religionis; Thomas Hobbes, Works; John Hudson,-; Jeremiah Jones, Treatise on Canon; Henry Home(Lord Kaimes), Essays; Richard Kidder, Demonstration of the Messiah; John Locke, Essays; Moses Lowman, Argument from Prophecy; Thomas Manton, Sermons; Isaac Newton, Chronology, Religion of Jesus, and Deism Revealed; Nocil, Conference with a Theist; Charles Owen, Wonders of Redeeming Love; John Owen, Discourses on the Holy Spirit; William Perkins, Works; Plato, De Legibus; Matthew Poole, Synopsis criticorum biblicorum; John Preston, Discourse on Christ, Church's Carriage, and Paul's Conversion; Humphrey Prideaux,-; Thomas Ridgley, Body of Divinity; Samuel Rutherford, Survey of the Authority of Christ; Thomas Shepard, The Sound Beleever, The Sincere Convert and Parable of the Ten Virgins; Thomas Sherlock, Use and Interest of Prophecy; Richard Sibbes, The Bruised Reed; John Smith, Select Discourses; Hohann Friedrich Stadfer, Theologia Polemica; Henry Stebbing, Treatise on the Spirit; Solomon Stoddard, Works; Jean Baptiste Tavernier, Travels; John Taylor, Works; Gilbert Tennant, Sermons; Tertullian,-; John Tillotson, Sermons; Matthews Tindal, Objections against Revealed Religion; George Turnbull, Moral Philosophy; Francois Turrettin, Institutio; Isaac Watts, Essay on Freedom of Will; Edwards Wells, Sacred Geography; Daniel Whitby, Discourses concerning Election; Solomon Williams, Works; Henry Winder, History of Knowledge 등.
에드워즈에 의해 기록된 다른 사람들은 에드워즈와 친숙한 것처럼 적혀 있다. 존 비치(1746년 1월 15일에, 벨라미에게 보낸 편지), 토마스 보스톤(1747년 9월 4일 길스파이에게 보낸 편지), 조지 캠벨(1754년 어스킨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이작 코자본(1754년 어스킨에게 보낸 편지), 조나단 디킨슨(1746년 1월 15일 벨라미에게 보낸 편지), 존 어스킨(어스킨에 자주 보내는 편지), 길버트(〃), 제임스 허비(〃), 사무엘 존슨(벨라미에게 보내는 편지), 페트루스 판마슈트리트(〃), 마샬 몬타규메릭(어스킨에게 보내는 편지), 알렉산더 몬크리프(〃), 헨리 펜버튼(「카탈로그」3쪽), 앤드류 미카엘 램지(〃), 월리엄 워부턴(어스킨에게 보내는 편지), 요하네스 웰레비우스(〃).
「카탈로그」에 아래의 책들이 인용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다음의 책들 역시 에드워즈가 읽고 참고하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Joseph Butler, Analogy of Religion; John Clark, An Essay upon Study; Ebenezer Erskine, Sermons; Herman Fricnk, Discourse concerning Preaching; Nathaniel Lardner, Discourses(무제); Cotton Mather, Manductio; John Owen, Exposition of Hebrews; Michjah Towgood, Answer to Mr. White; Daniel Waterlaw, Queries; George Whitefield, Journal and Sermons; Jonathan Mayhew and Thomas Emlyn, Wigglesworth 교수와의 서신 토론; Pigot, Sermons; Clarksons, Works; St. Augustine, Conversion; Richard Baxter, (자주 언급함); Goerge Bull and the Bishop of St. David(Leighton인지도 모름); Bishop Thomas White, Commentary on the Bible(X표가 되어 있음); John Bunyan, Excellency of a Broken Heart; Gilbert Burnet-; Philo; Tertullian; Josephus; Eusebius; Dr. John Clarke; Jn. Dickson; P. Doddridge(자주 기록되어 있음); Manton; Owen; Robt. Fleming; Watts; Whiston; Charles Owen; Hohn Jowe; Jn. Edwards(역시 자주 기록되어 있음), Locke and Newton(다른 이들보다 더 높이 평가함); Martin Luther, Colloquies, Wm. Beveridge; Thos. Bradbury; Dan. Finch (Earl of Nottingham); Matthew Henry; Robt. Jenkins; Wm. Jameson; Wm. Law; Ed. Leith; Hn. Lightfoot; Simon Patrick; Jas. Ray; Jn Sharp; Wm. Wall; Thos. White; Ed. Wigglesworth; Sam. Willard; Robt. Woodrow. Hume의 책도 역시 독서 대상이었다.
이 외에도 목록에 포함되어 있는 책들은 다음과 같다. Bennet, Hebrew Grammer; Busby, Greek Grammar; Cruden, Concordance; Green and Eight… Grammer; Chamber, Dictionary; Calmet, Dictionary of the Bible. 그 밖에도 철학과 과학에 관한 책도 있었으며, 수필가 중에서는 Richardson, Fielding, Steele, Addison 등이 있다. 시인들로는 Pope의 Hormer를 비롯하여, 밀튼, 웨슬리, 왓츠 그리고 퀘일스가 적혀 있다. Matthew Henry, Life of the Rev. Philip Henry도 기록되어 있다. 비국교도, 감독교회 교인, 프랑스 프로테스탄트,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카톨릭 교회의 작가, 그리고 영국의 자연신교도들도 섞여 있다.
뉴잉글랜드에서의 문학 문화는 초기에 제한적이었지만, 1672년과 1700년 사이에 보스톤에서 약 24개의 서적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책을 구입할 수 있는 경로가 많았기 때문에, 만일 설교자가 책을 구입하고 싶어한다면 얼마든지 책을 구입할 수 있는 여건이었다. 코튼 마더는 1700년 10월 16일 그의 일기에서 3000권에 이르는 전집을 수장하는 자신의 서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아마도 그는 장서의 양에 있어서 예외적일 것인데, 왜냐하면 그는 해외에서 많은 책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그 당시 사람들의 문학적인 수준으로 판단할 때에도 조나단 에드워즈의 서재는 그들보다 뒤떨어지지 않았다.
목록에 오른 책 가운데 가장 가치있고 가장 많이 사용된 책을 추정해 볼 때 에드워즈가 좋아하는 책이 있었거나, 아니면 그가 다른 것보다 더 선호했던 책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의 논평과 주석은 강조점과 호소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다음의 목록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정선된 것이다.
Dr. Manton, Sermons, The Art of Thinking; Dr. Mather, Magnalia; Luther's Colloquies; St. Chrysostom; Baxter, Worth of the Christian Relogion; Flavel, Husbandry Spiritualized; Dr. Parkins concerning Reading of Scripture(이는 William Perkins를 가리키며, 설교와 해석학에 대한 그의 책은 청교도의 교과서였다.); Eusebius, Ecclesiastical History; 성경은 물론, 복음주의자들의 책 읽기; Mr. Charnock의 책 두 권; Baxter, Call to the Unconverted; Milton, Paradise Lost; Watt, Hymns and Spiritual Songs; Wall, History of Infant Baptism; The Septuagint; Berkley,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 Dr. Owen, Works(“헬리버튼이 성 앤드류에 있는 신학교 학생들에게 추천한 것으로 복음의 신비를 참된 관점에서 보게 하는 모든 사람들의 어떤 책 보다 압권적인 책으로 평가 받았다.”), The Life of Monsieur Paschel; Paschel(이는 파스칼을 말한 것이다), Thoughts; Sir Isaac Newton, Observations on the Prophecies; Dr. Doddridge, Family Expositor(“콜맨 박사로부터 예약을 받아 인쇄 신청을 받은 책이다"); Chamber's Dictionary in 3 vols.; Alexander Cruden, A compleat Concordance to the Holy Scripture(“지금까지 출판된 성구사전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 이 책은 단권이다.”); The Life… Hymns and Sacred Poems, John and Chares Wesley 발행, Oxford; H. Scougal, The 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 Scotland(“휫필드씨에게 최초로 빛을 비추어준 책이라고 한다.”); The Fourfold State of Man, The Covenant of Grace(Lowman씨의 Paraphrases on Revelation 서문에 의하면, 이 두 권의 책은 스코틀랜드에서 Boston씨가 출판한 것이며 Abercromby씨가 격찬한 것이다.); Flavius Josephus, Works(영역본 3권); Dr. Owen, Pneumatologia; Erasmus Schmidius, Greek Concordance to the New Testament; Gilbert West, Observations on the History and Evidence of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Butler, Analogy of Religion and Nature(Dr. Doddridge의 책 Rise and Progress, 49쪽을 보라.); 1748년 12월 27일 자 Boston Gazette지에서 발췌-“비국교도 침례교파 목사인 존 길씨가 최근에 책을 썼다고 한다. 그는 에딘버러와 글라스고우 양쪽 대학에서 모두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그 책은 2절판으로 된 3권짜리 전집으로서 신약에 관한 학문적이고도 실용적인 주해서이다.”: Fox, Book of Martyrs; Archbishop Leighton, Select Works; Hutcheson, Essay on the Passion(그의 책 Inquiry into the Original of Our Ideas of Beauty and Virtue에 인용되어 있음); Henry Fielding의 소설, Amelia(선과 부부애를 권하고 있음); Dr. Burtler, Sermons(Turnbull이 그의 책 Moral Philosophy 서문에서 극찬하고 있는 책); Begelius, Annotations on the N. T.; The Eternity of Hell Torments(아마도 Wm. Whitson의 책인 것 같다. 1740년 판. * 에드워즈는 이 책에서 설교 제목을 하나 빌려 썼다).
위의 사실들을 근거로 해서 그의 서재의 책을 통해 에드워즈의 책에 대한 기호와 선호들을 분석해 볼 수 있다. 다음의 요약은 비록 에드워즈가 소유했을지도 모르는 모든 지식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차이가 날지라도 객관적인 사실들을 드러낸다.
종교서적: 452권
교회사 62, 성경 33, 기도서 24, 작품 17, 설교 37, 신학 279권
비종교 서적: 238권
교육 8; 지리학 16; 역사 43; 가족과 에티켓 6; 언어 43; 사전 18; 문학 28; 전기 11; 수학 12; 발달사 23; 철학 19, 분류되지 않은 것 11.
그 중에서 84명의 저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에드워즈는 칼빈주의와 이신론 비판에 관한 내용의 책을 굉장히 선호했고, 알미니안주의와 무신론에 관한 책에도 지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정기간행물 역시 청교도 독서인의 정신적 양식이 되었다. 그가 참고한 정기간행물은 다음과 같다. Monthly Review; Boston Gazette(정기 발행); Scots Magazine; Glasgow Journal; Newcastle General Magazine; Present State of the Republic Letters; the Guardian; the Tatler; the Spectator.
위에 기록되지 않은 책을 에드워즈가 소유하고 또 읽었으리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가 철학의 원리와 더불어 씨름할 때 그에게 영향을 미친 주된 저자들과 책은 다음과 같다. Hobbes; Shaftesbury; Cumberland; Hume; Hutcheson(「카탈로그」에 4번 언급); Newton(「카탈로그」에 다섯 번 언급); Butler; Locke; Mandeville; Berkiley, Aleiphron. 신학 저자로는 Sibbes; Shepard; Perkins; Manton on Pslam 119; Thoephilus Gale, The Court of the Gentiles; William Ames, Medulla Sacra Theologiae, 1628(예일대에서 사용됨); John Calvin; Stoddard; John Taylor on Original Sin; Thomas Shepard, The Ten Virgins; Flavel, Cause and Cure of Mental Errors; Francois Turren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Geneva, 1679~85(신학적인 논쟁점들); Peter van Matricht, Theoretico-Practica Theologia, 1699(1747년 Joseph Bellamy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이 책은 성경 다음가는 것으로 간주됨). 그 외에도 The Scholar's Companion(cf. Little Library에서 추천했음)도 있다. 설교에 한해서는 William Perkins에게 많이 의존했고, Joseph Glanvill의 책도 역시 참조했다(An Essay Concerning Preaching, 1678).
에드워즈는 독서광으로서 자신의 성격 가장 밝은 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가「카탈로그」에 제목을 기입할 때, 그것이 자신이 소장하고 있다든가 혹은 읽은 책 모두를 기록한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의 여러 권의 저서에는 카탈로그에 올라있지 않은 제목들이 산발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카탈로그」는 단순히 그가 나중에 읽거나 언젠가는 손에 넣을 관심 있는 책의 작가와 제목을 기록하는 편리한 방법이었을 뿐이다.
에드워즈를 비춰주는 또 하나의 빛은「카탈로그」에 새로운 소식들을 묵상 내용과 함께 적어 놓은 그의 습관이다. “사무엘 존슨이 석사학위를 받는다는 소식- 1758년 2월 28일 옥스포드에서,” “성경의 열쇠와 비교하면서 성경을 읽는 것"(이것은 그가 성경해석학에 있어서 퍼킨스가 만든 “열쇠"를 제공받았다는 사실의 단서인가? 에드워즈의 스터디-바이블을 검토해보면, 그가 성경의 나머지 부분으로 진도를 나가기 전에 퍼킨스의 가르침을 로마서와 요한복음의 여백에 써넣었음을 알 수 있다.) “Gill씨가 4권의 책 중에서 읽은 5가지 요점을 말해주었음, 내가 보스턴에 있었을 때 프린스와 폭스크로포트 씨는 나에게 그들의 견해를 말해주었다." “Sir Isaac Newton, Observation on the Prophecies: (서평이) 1736년 4월에 런던 매거진에 언급됨."
1747년 1월 17일 조셉 벨라미에게 보낸 편지에서 에드워즈는 해외에서 발간된 책들을 구할 수 있는지에 관해 보스톤 상인에게 물으려 한다고 썼다. 1726년에 2권의 책 출판에 관한 언급에서 코튼 마더를 소개하였는데, 그는 작가로서, 그 당시 청교도 목사에 적잖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었다. 에드워즈는 마더의 책 History of New England, Handbook of Preachers 등을 메모해두었다.
잉글랜드에서 비롯된 것으로 청교도 목사는 교육을 제대로 받고 책을 많이 읽어야한다는 전통이 뉴잉글랜드에도 이어졌다. William Brewster의 서재에는 커다란 서적 목록이 있었다. John Harvard는 대학을 지을 때 엄선된 도서라고 생각하는 책들을 대학에 기증했다. 브루스터 장로와 존 하버드는 리차드 백스터의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기에 가장 허름하든 또는 아담한 수준의 서재이든 꼭 비치해야만 하는" 작가들의 목록을 참조하였는데, 이것은 백스터의 1673년 출판된 기독교인의 훈령집에서 비롯되었고, 그것은 청교도 필독서 목록으로 여러 사람들의 손에 회람되었다. 에드워즈는 아마도 실제 전통에 익숙했을 것이고, 그것뿐 아니라 그의 멈추지 않는 의문은 보다 많은 책을 읽게 하였을 것이다. 그는 “읽을 필요가 있는 책"을 기록하였고 유행하고 있는 훌륭한 문학, 심지어 소설까지도 수록하였다.
사무엘 홉킨스는 그의 책,「조나단 에드워즈의 추억」(Memoris of Jonathan Edwards) 83~85쪽에서 이렇게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는 모든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있는데 특히 신학서적을 읽었으며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그의 지식추구에 있어서 독서를 통해 어떤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생전에 모든 나날은 바쁜 벌과도 같이 활짝 핀 모든 꽃에서 꿀을 수집하듯, 실제로 달콤한 지식 더미를 저장하였습니다. 그리고 해가 더하고 지식이 더함에 따라 그는 진보를 더했고, 그럴수록 그의 펜은 점점 더 바빠졌고, 그의 손은 갈수록 더 빨리 원고를 써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이자 설교자인 그는 서재에서 기른 학구적 습관과 책을 향한 불타는 열정을 통해서 보다 더 폭넓은 목회를 하게 되었다.
8. 문인(文人), 에드워즈(Creative Study)
“제가 목회를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연구 방법은 글쓰기로 인해 매우 풍성했습니다.”
작가로서 에드워즈에 대해 평가하려면 그가 출간한 저서보다는 엄격한 학업을 통해 공부한 규칙적인 글쓰기 습관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그는 학생으로서 일생 동안 글쓰기 방식을 고수하였다. 프린스턴 대학의 이사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에서 에드워즈는 그 연습이 도움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에 전념함으로써 중요한 힌트나 제안 등을 모두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그는 글쓰기 연습을 위해 수많은 주제들에 대해, 최상의 생각이라고 느끼는 바를 써 나갔다.
에드워즈가 이런 식으로 글쓰기를 계속해 나감에 따라, 그 방법은 더 익숙해짐은 물론, 그는 더 큰 기쁨과 유익을 얻었다. 그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내 자신의 재능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판단해 보건대, 나의 동료에게 유익을 끼치려고 한다면 말보다는 글을 쓰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Works, I, P29)
그는 글쓰는 사람으로서 많은 시간을 집필에 보냈고, 그의 펜끝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은 에드워즈의 놀라운 성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 되었다. 그의 문필가다운 삶은 출판된 그의 전집에서 뿐 아니라 출판되지 않은 육필 원고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예일 작품선 참조).
그의 광범위한 저작 목록은 그 자체로 에드워즈의 영향력이 얼마나 멀리까지 미쳤는지를 알게 해주는 분명한 자료이다. 그는 언제나 글을 썼다. 심지어는 밖에서 보내는 시간마저도 연구시간을 보충하는 데에 사용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글에다 번호를 매겼다. 차례대로 한 장 한 장 번호를 매겼고, 알파벳 순으로 주제와 제목을 기록했다. 그가 쓴 것은 대부분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지만, 입수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공들여 글쓰기 작업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예일 작품선에 있는 수필 공책을 통해 우리는 그의 글쓰기 습관을 알게 된다. 1153번의 “도덕적 무능력에 관하여”라고 쓴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의지의 결정은 행동보다 앞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의지의 결정에 따라 이루어지는 행동을 계획하는 일 역시 그 의지의 결정에 달려 있다.…”
이 2절판 전집의 절반이상이 “구약성경에 나타난 메시야의 유형”에 관한 것과 동일한 주제에 관한 값진 색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칭의”, “값없이 받은 은혜”, 그리고 “은혜의 자유함은 어디에 존재할까” 등에 관한 기록이 있다. 다음은 색인에 나오는 전형적인 기록이다. “속죄-구약 성경 63쪽에 의하면, 의례적인 희생 제물로는 참된 속죄가 되지 않는다. 구약성경 69쪽을 보면 메시아만이 명백하면서 실제적이고 합당하며 진정한 속죄가 된다.” 요한계시록에 관한 그의 기록은 “종교국가의 희망적인 면을 보여주는 사건들”(128-167쪽)과 같은 기록으로 가득하다. “여섯 번째 대접을 성취시켜주는 것 같은 사건들 -1747년 10월 16일부터 받아 본 뉴스” 혹시 에드워즈가 나중에 제안받은 작품, 즉 구속사(A History on Redemption)를 위해 이 자료를 모아둔 것은 아닐까?
이러한 그의 모습은 성경과 동시에 「보스톤 가제튼」지를 읽고 있는 설교자를 연상케 한다. 신문에서 발췌된 기사는 당시의 사건들이 교회의 상황에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 알아보기 위한 시도에서 기록되었다. 이 인상적인 발췌기사를 주목해보자. “1755년 1월 13일 런던의 신사가 보스톤에 있는 통신원에게 보낸 편지를 발췌한 것 - ‘기존 교회안에 한 목사의 목회로 인하여 서부 잉글랜드의 종교부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많은 교구에서 회개가 일어나고, 복음적인 설교를 듣고 많은 영혼들이 지속적으로 교회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네 번째 대접과 여섯 번계 대접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는 아이작 뉴들경이 「다니엘의 예언」(The Prophecy on Daniel)이 라는 책의 저자라는 사실도 기록해 놓았다. 에드워즈의 주석에 의하면(pp.116ff), 역사적으로 해석했을 때 그 예언은 교황제도에 적용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때때로 한 사람의 위대함은 말솜씨와, 연설할 때 청중을 감화시키는 형용할 수 없는 특성에 달려 있다. 또한 때로는 설교자의 영향이, 청중의 수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인쇄물을 남기는 것에 달려있기도 하다.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에서 목사요 설교가로 저명한 인물이었을 뿐 아니라, 출판물을 통해서도 후대의 철학과 신학에 영향을 끼쳤다. 에드워즈는 높은 수준의 글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설교문을 쓰거나 혹은 좀더 무게 있는 논문을 쓸 때에도 훈련된 저자임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그는 설교를 하나님께서 회심의 매개체로 쓰시는 도구라 믿었기 때문에 설교를 준비하는 데 아낌없이 시간을 투자했다. 그는 명료하고 알기 쉽게 진리를 밝히고자 애썼다. 에드워즈는 품위 없는 문체를 쓰거나, 수사학이나 문학적인 아름다움을 무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궁극적인 목적에 도움이 되도록 모든 것을 고려했던 것이다. 그는 회중이 그들의 상상력으로 진리의 의미를 파악하기 전에 혹은 그들의 지성이 진리의 중요성과 교의를 확신하기 전까지는, 결코 감정적으로 진리를 수용하도록 사람들을 유도하지 않았다.
그의 목회 사역 초반부에도 그는 일찍 일어났고 긴 시간 동안 연구하면서 설교문을 작성하는데 무척 고심했다. 그는 설교를 시작한 이후 거의 20여 년간이나 설교문의 대부분을 꼼꼼히 작성하였다. 그러나 설교할 때 그가 전적으로 원고에 의지하였던 것은 아니다(S.홉킨스, op. cit., pp. 5-38; Works, I,p9). 주제의 범위와 원문에 충실한 주해, 본문의 자세한 강해를 보면 그가 설교를 작성하는 데 얼마나 빈틈이 없었는가를 엿볼 수 있다. 지적인 설교를 하는 진정한 기술은 설교자의 지적인 면모가 드러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성을 가지고 회중이 이해할 수 있도록 단순하게 전달하여 진리를 명확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에드워즈는 이 부분에 있어서 성공적이었다.
청교도 시대의 설교는 문학작품에 있어서 주류에 속했다. 소책자 저자들의 입지가 분명했으며, 소책자들은 그 당시의 영어고전들 만큼이나 훌륭하게 저술되었다. 그러나 이 설교자 에드워즈는 글맛을 일궈내며, 문체를 만들어내는 사람으로서 탁월한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 설교 집필과 설교집 출판물은 훌륭했다. W. F. 미첼은 그의 책 「앤드류에서 털럿슨까지의 영국 강단」(English Pulpit of Oratory form Andrewes to Tillotson) 516쪽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 저술가(에드워즈)는 거의 틈을 보이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개성대로 글을 쓰면서도, 그 설교문 쓰기는 일생 동안 지속되었고, 영어 산문의 문체에 있어서 그 어떤 산발적인 문학 창작품보다도 더 명백하고도 일관성 있는 방식을 만들어냈다.”
에드워즈는 청교도인들의 설교작성 전통과 이상을 물려받았고, 전임자인 스토다드 할아버지와, 그가 모델로 삼았던 작품들의 저자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에드워즈의 설교문을 다른 청교도의 것과 비교해 보면, 그가 설교문을 문학작품을 쓰듯이 작성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물론, 영적인 목적이 지배적이었지만, 그는 교양적인 필요에도 무감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에드워즈는 문인이요 장인(匠人)으로서, 그의 설교를 듣는 회중과 그의 글을 읽는 독자들이 알아듣도록 분명한 방법으로 설교문을 작성했다. 그 당시 그의 설교문은 대단한 존경과 영예의 대상이었으며, 결국 설교자 에드워즈는 연사일 뿐 아니라 저자까지 겸했던 것이다. 청교도들의 기준에 의하면 에드워즈의 설교는 예술 작품과도 같았다. 숨겨진 예술로서의 그의 기교는 매일 매일의 묵상과 집필 훈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의 설교는 바로 그러한 문예 활동의 산물이었다.
회중은 그 노스햄턴의 목사가 많은 시간을 들여 설교와 본문 강해를 준비하고 집필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모든 신학적 지식과 일반 교육은 이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다. 17세기와 18세기의 이상은 설교가 영문학과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17세기 영국의 전통은 곧 18세기 뉴잉글랜드의 전통으로 이어졌다.
에드워즈는 신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설교자들 가운데 뛰어난 설교가일 뿐 아니라 유명한 저술가가 되었다. 다른 지역에서도 신학과 철학에 심취한 학생들이 그의 책을 읽었다. 그는 설교를 염두에 두고 대부분의 작품들을 썼으며, 그 시대의 조류나 유행하는 산문체 등에는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의 이상은 파우스트와 존슨 두 사람에 의해 집필된 “조나단 에드워즈” 99쪽에 나타나있다. “논리 전개는 타당하고 힘이 넘치며, 열정적이고도 지적이었다. 그러나 화려한 미사어구로 장식되지는 않았다…”
뉴잉글랜드 문화는 잉글랜드를 모델로 삼아 형성되었고, 문예적으로도 탁월해야 한다는 생각이 목회자 양성 교육에도 영향을 끼쳤다. 예일과 하버드에서도 학생들에게 중세의 문법과수사학 공부와 같은 식의 훈련을 요구했다. 에드워즈에게는 설교문 작성의 기술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름다움과 해석의 이론이라는 독자적인 개념이었다. “참된 미덕의 본질”(Works,Ⅲ,pp,271-277)이라는 글에서 그는 균형과 조화가 아름다움의 핵심 요소라고 보고, 균형과 조화의 본질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여러 가지 비유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영적인 삶에 적용하였다.
자신의 연구를 통해서 이렇게 많은 이론에 친숙하였지만 그는 분명한 영적 진리를 선포하기 위해서만 이들을 사용하려 노력하였다. 그의 미학은 단순히 즐거움자체에 목적이 있던 것이 아니었고, 교리를 설교하는 데 도구로 사용되었다. 그는 회심 후에 대하여 이렇게 진술했다.
“신령한 것에 대한 감각이 점점 더 자라나며, 더욱 생생해졌고, 내 안에는 감미로움이 넘쳐났다.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다. 모든 것에 신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 같았다.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그분의 지혜, 그분의 순결함과 사랑이 만물에 나타나는 것 같았다. 그것들이 모든 피조물에 드러나서 나를 사로잡곤 했다.”(Works,I,P.17)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감사는 설교 “그리스도의 탁월함”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 안에는 끝없는 고상함, 그리고 한없는 겸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한없이 위대하고 고상하며…그분은 통치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분이 우주를 통치하십니다. 그런 분임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무가치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영혼을 불러서 담대하게 하시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요 온유하심입니까. 만일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안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강한 사자시요, 당신의 울타리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 앞에 나아갈 때 혹시나 거절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신에게 나아오는 모든 자에게 양과 같아서, 한없는 은혜와 온유하심으로 그들을 받아주시기 때문입니다.”(Works, IV, pp. 180-181)
잘 교육받은 사람으로서 그리고 예일 대학에서 조교로 있던 경험으로 인하여 에드워즈는 일정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기에, 설교를 준비하는 데 있어서 스스로 태만함을 용납하지 않았다. 설교문 속에는 그의 영혼에 대한 부담감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가 목회할 때 했던 설교 중에 많은 것들이 기초자료가 되어 조금씩 더 다듬어진 후에 소논문 형태의 책으로 출판되곤 했다. 고린전서 13장을 본문으로 한 시리즈 설교가 그 좋은 예다. 에드워즈는 나중에 그 설교들을 모아 <사랑과 그 열매>(Charity and Its Fruits)라는 제목의 완결판으로 출판했고, 16번의 강의 자료로도 사용했다.
에드워즈의 가치 판단의 기준에서 볼 때 교육받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인문학적인 지식을 사용하여, 명료한 영어로 진리를 표출하는 것을 뜻했다. “기독교 순례자”라는 한 설교에서 우리는 다음의 글을 대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성적인 피조물들에게 최고선이 되어주십니다. 그리고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 우리 영혼이 만족할 수 있는 유일한 행복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기뻐하기 위해 천국으로 가는 것은, 이곳에서 가장 편안한 호텔에 머무는 것보다 훨씬 더 좋습니다. 아버지들과 어머니들, 남편들, 아내들, 어린이들이나 이 세상 친구들인 벗이나 누구든지 그저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은 본질과도 같습니다. 전자는 그저 산만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부이십니다. 전자는 얕은 시냇물이라면 하나님은 샘의 원천이십니다. 전자가 물방울에 불과하다면 하나일은 대양이십니다.”(Works, IV, P.578)
이런 모든 사실로 보아 에드워즈는 교양이 풍부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 외 호소력과 사람을 사로잡는 매력의 일부는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있게 한 훈련된 삶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강단에서 선포한 모든 내용의 설교는 의심할 여지없이 세계 곳곳에 큰 영향력을 미쳤고, 바로 이것은 그의 펜 끝에서 나은 소산물임을 우리는 간과해선 안된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타오르는 정열을 깊은 명상으로 소화해내며, 언제든지 글을 쓸 준비가 되어 있던 문인이었다.
9. 문예적인 노력
“내가 글쓰기를 통해 얻은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먼저 편지를 쓰는 것이다.”
에드워즈에게는 항상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픈 끊임없는 충동이 있었다. 그는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사상가로서 많은 글을 썼다. 예일대학에 소장되어 있는 1,093부의 원고와 앤도버-뉴튼(Andover-Newton)에 있는 55부의 원고는 그의 정신세계가 얼마나 풍요로웠는지를 보여준다. 출판된 설교집과 저서는 영적인 도전을 주며 지금도 그것을 읽는 이들의 마음에 보고로 남아 있다. 에드워즈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글을 섰다. 청구서, 증서, 다양한 종류의 논문 여백 등이 글 쓰는 종이로 사용되었다(현대의 풍부한 종이의 공급과 종류에 비교해 볼 때) 그 당시에는 종이가 부족했고 돈도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강 기록된 단상은 좀 더 보충된 노트의 형태로 확충하기 위해 보존되었고, 나중에 보충된 노트가 그의 원고로 변형되었다. 그는 폭넓은 독서를 통해서 심화된 연구와 응용을 목적으로 인용문과 참고 문헌들을 만들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또 목회기간 내내 지속되었던 독서에서 얻은 보화를 저장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Notes on the Mind"라는 손수 만든 소책자들에 기록해두었다. 그가 손수 철한 책들은 2절판 크기로서, 수백 개의 표제어가 들어 있다. 분주하고 번잡한 생활 가운데 그는 급히 쓰곤 했지만 후일 연구할 때 그것을 되씹어 생각하고 묵상하였다.
청교도인의 문예적 전통은 출판된 설교에서 그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 설교는 문예적 노력의 근간이었다. 이것은 또한 정기적으로 모이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청중에게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에드워즈는 대체 어떻게 제한된 시간과 현대적 설비의 도움도 받지 않고 설교를 출간할 수 있었을까? 광고는 오늘날과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당시 설교는 활자화된 인쇄물 중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것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된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는 에드워즈가 실제적인 사업 능력이 있었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를 공상가. 혹은 몽상가, 그리고 구체적인 사물에 접촉하지 않는 은둔자로 생각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당시 뉴잉글랜드에서 출판된 인쇄물을 상기하도록 해보라. 그리고 그 구체적인 예로 에드워즈의 인쇄된 작품들을 비교해보게 하라.
문체에 관한 기록에서 예일 작품선 “Notes" 17번을 보면 여러 항목 가운데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나는 감히 런던에서 출판하기 전에, 이 나라 안에서 어떤 실험을 한다. 먼저 조그만 게임에 승부를 걸어보는 것이다. 글쓰기를 통해서 얻은 경험이라면 저 영국에 있는 몇몇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고, 큰일을 벌리기 전에 먼저 작은 일에 손이 익도록 하는 것이다.” 위 발췌문은 에드워즈가 겸손했으며, 게다가 현실적이었음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 그는 건전한 의미의 열망을 갖고 있었고. 그럼에도 상식이 부족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실제적이며 규칙적인 사람임을 계속해서 보여주었다. 스코틀랜드와 뉴잉글랜드에 있는 친구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는 자기를 솔직히 드러내는 대목으로 가득 차 있다. 편지들은 그 남자의 성격이 모든 면에서 기민하고 가장 인간적이었음을 보여준다.
많은 편지가 보관되어 있으며, 거기에는 지금까지도 흥미있는 읽을거리들이 많이 들어 있다. 1749년 8월 18일 노스햄턴에서 벨라미 씨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친애하는 벨라미 씨에게,
저는 당신의 책에 대해 서명해 달라는 제안을 신중히 처리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진행하면서 먼저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선 한 통의 편지나 혹은 여 통의 편지를 보낼 것입니다. 셀(Searl)씨가 당신에게 내가 그의 목사 안수식에 참석할 수 있는지를 알려줄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제가 그곳에 가야 한다는 커다란 부담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부담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보기에 썰 씨와 여러분들이 조급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당신이 가서 부디 써전트(Sergeant)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와의 친분을 두텁게 했으면 하고 바랍니다. 당신이 보스톤에 가는 문제와 그 외 다른 문제에 대해 당신과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다면 좋겠군요. 만약 제 편지가 아직 하트포드(Hartford)에게 도착하지 않았다면 당신이 그것을 처리했으면 좋겠습니다. 벨라미 부인께 안부전해주시고, 그리고 저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당신도 아시지요, 저의 어려운 상황을 말입니다(교회안의 분쟁을 말하는 것임). 보스톤에 사는 인쇄업자가 성찬식에 관한 제 책이 약 3주 후면 나올 거라고 말했지요. 예정대로라면 그것은 다음 주가 됩니다. 하지만 전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기 때문에, 그 책은 9월초까지 기대할 수 없을 겁니다(에드워즈의 유머와 기질이 엿보임).
목사요, 당신의 형제이며 영원한 친구,
조나단 에드워즈
(이 편지는 예일 신학교 도서관에 있음.)
회중과의 분쟁과 함께 그들과 멀어진 관계에 대한 언급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인쇄업자에 대한 그의 말은 유쾌하기까지 하며 가장 멋진 표현의 재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지요”라는 표현은 유머 감각이 있으며 농담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의 말솜씨임을 알 수 있다. 작가와 출판업자 사이의 에피소드는 오늘날의 것과 비교해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18세기의 편지 쓰는 일은 의사소통의 수단일 뿐 아니라 훌륭한 문체로 자신의 정신과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편지 쓰기는 예술이며 문학의 한 형식이 되었다. 편지 쓰는 양식은 다른 모든 장르의 글쓰기와 더불어 그 위치를 공고히 했으며, 문화를 고양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모든 글쓰기 방법의 범위 내에서, 편지 쓰기는 영어 산문이 발전하는 독특한 채널을 제공하였다. 에드워즈는 편지로 글을 됐고 항상 고급스러운 문장으로 적절한 이슈와 요청을 다루었다.
1755년 10월 30일 스톡브리지에 사는 윌리엄 부인에게 쓴 편지와 어떤 비난에 대한 답변에서, 그는 그의 행동을 자극하는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해놓았다.
“그 계획, 즉 제 분노를 나타내거나 상대에게 참회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고요함과 자비 속에서 저 자신에게 무엇인가 말한다는 것, 그리고 제 생각을 변론하는 것‥‥ 당신의 지성으로 저의 기질과 행동 중에 맞지 않은 부분에 있어서 가장 불리한 것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제 자신에 대해 말하는 무수한 말, 저의 타고난 기질과 제 행동에서 끊임없이 보이는 양상에 관해 하는 말들을 저는 그런대로 잘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스톡브리지에 있기 전후의 제 행동에 있어서 어떤 부분에 대하여서 모른 채로 지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그곳에 있은 이래로, 당신에게 편지를 보내어 저를 험담했던 사람들은 저의 행위 중 일부를 매우 혼란스럽고 불쾌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를 명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했지만, 제 인생에서 다양한 사건의 연속으로 지나간 20년보다 더 많은 문제들이 이 시골에서 매우 시끄러운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cf.S.Gratz Autograph Collection, American Collection of Clergy, Historical Society of Pennsylvania, Philadelphia).
에드워즈의 인생은 잠자던 18세기를 일깨웠다. 그 당시 역사는 소요 가운데 있었다. 유명 인물의 명단에 올라 있는, 잉글랜드의 웨슬리 형제와 윗필드 그리고 저명한 인물의 명단에 들어 있는 뉴잉들랜드의 마더스(Mathers)와 쉐퍼드(Shepard) 등은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는 “현대”라는 세계의 출현에 공헌했다. 그 시기는 우리 시대의 분수령이었다. 격동의 시대였으며, 신대륙의 국경은 아직 뉴잉글랜드지역의 경계선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사회공동체와 교회에서, 사회적이며 종교적인 범주 안에서 에드워즈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가 무슨 일을 하든 어떤 말을 하든, 그것은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감동과 견해를 가져다주었다. 그의 거침없는 견해와 가르침은 스스로 만족해하는 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신앙이 없는 자들에게 신앙을 촉구하였다. 소위 "시골에서 야기된 소란"은 편지에서 언급된 것처럼 가볍거나 일시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다른 편지들은 에드워즈의 비범한 정신과 다양한 기질을 조명해준다. 넘치는 상상력을 가지고 심미적인 감정과 사상의 높은 경지 속에 살았기 때문에. 그에겐 가정의 유대나 실제적 이익을 생각할 여유는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헌신적인 아버지와 사랑하는 남편을 발견하게 된다. 이 점에 대하여 우리는, 가장 색다르며 가장 아름다운 청혼이 들어 있는 어린 숙녀에게 쓴 편지를 살펴보아야 하겠다.
“여기 뉴헤이븐에 한 소녀가 있으니,
온 세상을 만들고 다스리시는 위대한 분의 사랑받는 자라.
그 위대한 분은 그녀에게 은밀하게 오셔서,
철을 따라 넘치도록 달콤한 기쁨으로 가득하게 하시니
그녀는 아무 걱정 없이 오직 그분을 깊이 생각할 뿐이라네.
그분이 그녀를 너무나 깊이 사랑하는 것과,
그래서 그분이 자신을 멀리 떨궈 놓지 않으심을
확신하는 그녀는 묵상이 깊어지면,
곧 이 세상에서 들려져 그분이 계신 곳에 올라가기를 바라네.
거기서 그녀는 그분과 함께 살고 그의 사랑에 도취되어
영원히 기쁨 가운데 있을 것이리.
그녀 앞에 온 세상의 가장 풍요로운 보배들을 보여준다 해도
그녀는 귀찮게 여기며 거들떠보지도 않으리.
아니 고통이나 근심거리도 개의치 않을 것이네.
그녀의 마음에는 신비스러운 달콤함이,
그녀의 가슴에는 한분만을 향한 고결함이 있으니,
그녀는 가장 의롭고 진실하다네.
아무도 죄악으로 그녀를 설득하지 못할 것은,
세상 전부를 준다 해도
그녀는 그분을 서운케 할 수 없기 때문이리.
그녀의 마음에는 기이한 달콤함과 고요함,
우주마냥 넓은 자애가 있으니,
이는 자신을 나타내신 그분을 닮음일세.
때로 이리저리 달콤한 노래를 부르며 다니고,
기쁨과 환희가 넘쳐날 것이로되
누구도 그 기쁨의 까닭을 모르리.
홀로 있는 시간을 사랑하여 들이나 작은 숲 위를 걸으니,
보이지 않는 분이 항상 그녀와 담소하기에...”
(cf. Dwight's Life of Edwards, PP. 114-115)
이 편지는 에드워즈가 20살이고 쌔라 피어폰트(Sarah Pierrepont)는 13살일 때 찬송가 형식으로 쓴 것이다. 4년 후 1727년에 그들은 결혼했지만, 이 시에 담긴 사랑의 물보라는 신비한 이상을 담은 글 속에 남아있다. 이 편지에는 뭔가 감추어진 비밀이 있다. 만일 사정이 사랑받는 자에게 표현되어야만 하고, 그 사랑받는 자가 비범한 마음의 소유자라면, 언어는 대중을 위하지 않고, 고독한 마음을 위한 것이 된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에드워즈가 글쓰기의 영역에서 얻은 경험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느 누가 영적이며 동시에 세속적 사랑을 하는 자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것은 어디서 시작했으며 어디서 끝날까? 과연 이토록 언어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영적 파트너를 위한 사랑을 읽는 영혼의 서사시를 전달할 수 있을까?
만일 글쓰는 작업이 한 남자를 풍성하게 만든다면, 에드워즈도 그 시대에 뒤지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그의 편지들은 은혜로우며 동시에 강하고. 친절하며 또한 강직한 한 영혼의 성품을 다 드러내지는 못한다. 그러할지라도 그는 모든 경우 글쓰는 작업을 통하여 기술을 연마하였다.
10. 에드워즈의 설교 스타일
"나는 단순하고 꾸밈없는 진실 외에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
전에 살펴본 바와 같이, 에드워즈는 선배들의 청교도 설교방법론에 영향을 받았다. 마터스 형제(The Mathers) 즉 카튼(Cotton Mather), 인크리즈(Increase Mather)같은 잉글랜드의 이상과 기준으로 자신들의 입지나 저술들을 표명했다. 그들은 “평범한 스타일”을 강조했다. 카튼 마터(Cotton Mather)는 그의 책 「목회 지침」(Manductio ad Ministerium)에서 가르치기를, “결국 모든 사람이 각기 자신만의 스타일을 갖게 될 것” 이라고 했다. 그 책은 신학생에게 애독되던 것이었고, 에드워즈의 카탈로그에도 적혀있던 것이었다.
당시 사용되던 다른 교재로는 1638년에 발간된 「신학의 정수」(The Marrow of Sacred Divinity)가 있다. 이 책은 에임즈(William Ames)가 신학을 다룬 것으로서, 18세기 중반까지 하버드와 예일 대학에서 표준적인 교재로 사용되었다. 그 책 역시 평범한 스타일을 옹호했다. 밀러(Perrry Miller)는 “평범한 스타일”에 관한 토론에서 이 시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밝혀주었다.
“평범한 스타일의 원칙과 설교 구성에 있어서의 원칙은 뉴잉글랜드 사람들이 가장 두드러지게 물려받은 지적유산이었다. 그 이론에 의해 설교문과 설교기출이 결정되었고, 그것을 통해 청교도 정신이 가장 완벽하게 표현 되었다.”(The New England Mind, 1939, P.339)
그 당시 많은 설교자들은 청교도 교리를 개진하기 위해 강렬하고도 의도적인 방법들을 사용해보였다. 버나드(Richard Bernard)가 그런 예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케임브리지를 졸업했고,「신실한 목자」(The Faithful Shepheard)라는 책을 저술했다. 이 책은 1607년에 발간되고 1627년 재판되어 널리 읽힌 것으로서, 대체적으로 설교자의 전반적인 의무에 관해 쓴 것이었고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 안에는 강단의 영광스러운 기능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면서, 설교에 있어서 지켜져야 하는 스타일과 방법뿐 아니라, 삶의 단정한 행위와 필요한 학습 등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에드워즈는 이 책과 그러한 강조점에 친숙한 사람이었다. 에드워즈는 설교자로서, 자신의 목소리로 뿐 아니라 삶으로 가르쳤던 사람이다. 그에게는 삶이 지식보다 더 중요했다. 그는 "확실하게 말해야 했을 뿐 아니라 체험적으로" 말해야만 했다. “은혜스럽고 열정적인 마음이야말로 최고의 수사학이며, 가장 달콤한 소리의 조율사요, 가장 강력한 설득자이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마음이 즉각적으로 느낀 것 그 자체를 다룬 사람들의 마음에 전했다. 즉 감동받은 것,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감동받게끔 노력했다.” “바로 그 마음이 그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다른 이들에게 말할 수 있게 하였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이 교육을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가 설교자로서 강단에 설 때, 그는 “모든 종류의 인간지식”을 소유해야 했기 때문이다. “성경 안에 있는 모든 단어들을 정확하고도 분별있게 드러내 보이려고 할 때, 설교자에게 도움이 필요치 않은 학문이 어디 있겠는가? 문법, 수사학, 논리학, 물리학, 수학,형이상학, 윤리학, 정치학, 경제학, 역사학과 심지어 군사훈련까지 모든 것이 그에게 유용했다.”
논리학자이며 동시에 설교자인 에임스의 견해는 신세계의 설교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무미건조한 스타일과 거친 단어 사용은 논리적 구조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반대 이론 속에서 나 자신을 훈련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즉 가르치는 것이 내 목적이라면, 한마디로 할 수 있는 말을 두 마디로 해서는 안되고, 동일한 효과를 내는 황금 열쇠가 없다고 해서, 그것이 나무 열쇠임에도 불구하고 그 열쇠를 가장 잘 열수 있는 열쇠로 택해야만 한다고 말해선 안된다.”
그러나, 말을 아껴 쓰는 것이 오히려 효과가 있었다. 평범한 문체라고 해서 애써 무딘 문체를 쓴다는 뜻은 아니다. 에임즈는 이 부분에 대해 그의 학생들에게 현명하게 가르쳤다.
“사람들은 저마다 골수까지 찔림을 당하고 그것을 느낀다. 즉 사도들이 말한 대로 주님의 말씀은 날선 검과 같아서, 그 말씀에 그들 내부의 생각과 감정이 꿰뚫리고, 뼈와 골수가 쪼개지지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죽은 것이어서는 안되며, 살아 있고 영향력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불신자가 신실한 회중에게로 됐을 때, 신실한 회중 역시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심령이 뒤엎어진 것처럼, 그도 역시 말씀으로 감화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불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의 이상은 다음과 같이 표현되었던 것이다. 즉 수사학을 충분히 사용함으로써 상상력을 통하여 메시지를 사람의 마음에 전달시켜야 하지만, 그것이 남용되어 단순하고 진지한 사람들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후커(Thomas Hooker)는 너무나 화려한 문체의 설교에서 비롯된 결과를 잘 지적하고 있다.
나는 때때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찬탄을 금치 못합니다. 에이 비 씨조차도 읽지 못하는 신사들이나 농민들과 가난한 부인들로 이루어진 교회, 어째서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라틴어나 헬라어나 히브리어나 교부들의 문헌을 인용할 수 있는 목사님이 모시고 있을까? 그 주된 이유는, 그 모든 지식들이 청중들에게 자극을 주지 못하므로, 그들은 자기 죄 가운데 주저앉아 잠들어 있으며, 눈이 가리워진 채 지옥으로 가면서도, 절대로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The Soules Preparation, 1632, P.66)
뉴잉글랜드에 정착하기 삼사십 년 전에는, 사상의 선도자였던 모든 목회자들이 "설교의 유일하고도 적법한 절차" 라는 계획을 따랐다. 그 절차란 채플(William Chappell)이라는 사람이 1656년 발간된 그의 책 「설교자와 설교의 기술과 방법」(The Precher and the Art and Method of Preaching)에서 강조한 것이었다.
여기에 덧붙여서 십스(Ricahrd Sibbes)와 퍼킨스(William Pens)가 에드워즈의 사고의 틀을 형성하고 구체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십스는 영국 청교도 사회에서 가장 위대한 설교자 중 한명으로 문체에 관한 글을 쓴 바 있으며, 그의 저서는 뉴잉글랜드에서 널리 읽혀졌다. 십스는 동료 청교도인 스미스가 쓴 책 「사도신경 개론」(Introduction to the Creed)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한다.
“이 선량한 사람(저자)의 목적은 심령을 꿰뚫는 모든 종류의 방법으로 청중들의 가슴에 자신을 전달하는 것이며, 바로 그것 때문에 그는 모든 종류의 것들을 다 듣는 것이다. 재치있는 말은 오로지 두뇌에만 알려지기 때문에, 머리에만 남게 되고 더 이상 깊이 내려가지 않는다. 허황되고 역겨운 사람들은 마음에까지 가닿는 것을 싫어하지만, 신실한 교사들은 바로 거기에 도달하려고 한다. 하지만 마음에 도달하려면 종종 상상력을 통해야 하기 때문에, 이 경건한 사람(저자)은 상상으로써 사람들의 신앙을 도울 수 있는 생생한 표현을 공부했다. 그것은 바로 이 땅의 방법으로 천국의 것을 표현하신, 우리 주 예수님의 교육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전도서 12장 10절에 나와 있듯이, 설교자가 된 지혜자 솔로몬이 기쁨의 말(한글 개역에는 '아름다운 말'로 되어 있음)을 구한 것과도 같다.
문예적인 모델로서는 퍼킨스만큼 에드워즈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외 교재 「예언의 기술」(The Art of Prophecying, 1592)은 ‘거룩하고 유일하며 참된 설교방법과 태도’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Works. I). 아울러 그 책은 "복음의 신실한 목회자들과 성스러운 지식을 위해 노력하고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헌정되었다. 퍼킨스는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
“설교나 예언은 ‥‥훨씬 더 부지런히 다양하고 많은 교훈으로 꾸며져야 한다. ...중략... 인간의 지혜를 숨기는 것이 드러나야 한다․. 그것이 설교문의 문제이든지, 단어구사의 문제든지 간에 인간의 지혜는 숨기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야 한다. 왜냐하면 설교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선언하는 것이지, 인간의 기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청중 편에서 봐도 자신의 믿음이 사람(설교자)의 재능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 말씀의 능력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사실을 핑계로 설교단에서는 거친 말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음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즉 목회자는 설교를 준비하는 동안에는 예술, 철학, 다양한 독서 등을 마음껏 즐길 수도 있고 또 즐겨야하지만, 그가 공중 앞에 설 때는 이것을 숨기고, 조금이라도 잘난 체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Artis etiam est celare artem, '기술을 숨기는 것이 최고의 기술' 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한명의 청교도 후커는 「영혼의 준비」(The Soules Preparation)라는 책에서 퍼킨스와 같은 주장을 폈다. 퍼킨스는 “설교는 단순 명료해서 사람들의 이해를 돕고 성령의 위엄을 표현하는데 적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퍼킨스에 의해 저술된 다른 책 「목회의 소명에 관하여」(Of the Calling of the Ministerie)에서 그는 두 가지 연구, 곧 소명에 대한 책임과 그 존엄성을 피력하고 있다(Works.III). 에드워즈처럼 뉴잉글랜드의 사람들도 퍼킨스를 대단히 존경하였다. 퍼킨스에게서 그들은 자신의 존엄성과 소명을 보았다.
또한 뉴잉글랜드 사람들은 퍼킨스에게 깊은 존경을 표했다. 퍼킨스에 의하면 설교자는 영적인 선포를 목표로 설교해야만 하고, 설교자가 모든 인문학에 정통하다 할지라도 그는 절대로 자신의 축적된 지식을 자랑삼아 나열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왜 인문학이나 희랍어나 라틴 관용구나 경구들이 설교에서 섞이면 안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1) 그것들은 청중의 마음을 혼란케 함으로써, 청중들이 이전의 잘못된 것들은 이제 새로이 따라야 할 것에 맞추어 고칠 수 없게 한다. (2) 생소한 단어들은 선포된 말씀을 이해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며, (3) 사소한 문제들이 설교자가 지향하고자 하는 목표에서 청중의 마음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독서와 연구의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에드워즈가 한 사람의 설교자로 서기까지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의 설교문은 문예적 노력의 주류였을 뿐 아니라, 해석학적 이상들이 잘 알려진 문예적 모델을 기초로 하고 있다. 청교도 사상을 계승하는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는 마땅히 따라야 하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사상들이 있었다. 에드워즈의 설교를 산출하는데 문화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준비 배경은 명백하다. 우리가 천재가 갖는 개성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개인이라는 독특성보다는 어떤 학파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여기서 학파란 신학적 사고와 해석학적 실천에 있어서의 분파를 일컫는다), 사람을 개성보다는 오히려 어떤 전형에 맞추어 생각하게 된다.
특별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라면 평범한 자료에서도 특이한 요소를 택해서 그것을 특별한 용도로 바꾼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독특성의 질을 좌우하는 것이 재료(특이한 요소)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한 사람의 신학은 그의 책 읽기에 영향을 줄 것이며, 에드워즈의 경우에 있어서 우리들은 그가 모든 분야에서 자료들을 수집했고 특히 풍성한 칼빈주의적 문학분야에 탐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신학은 사고뿐 아니라 표현에 있어서도 어떤 경향을 제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문체가 곧 사람됨"이라고 한다면, 에드워즈의 문체는 고귀한 마음과 지성의 열정으로 타오르는 인격이 드러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설교자였다. 그의 스타일은 깊고 충만한 감정과 사고의 표현이었고, 그러한 감정과 사고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메시지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뜨거운 정열에 사로잡힌 것이었다. 그의 스타일은 이미 준비되어 있는 작가의 펜끝에서 나온 것이며, 그 작가는 자기의 지식을 나열하는 사람이 결코 아니었고 히나님 앞에서 겸비하며 잘 훈련된 영적 지성으로 메시지들을 전달하는 사람이었다.
문체에 관한 에드워즈 자신의 이론은 그의 “Notes"에 나타나 있다(예일컬렉션 참조). 이미 우리가 살펴본 대로, <평범한 책>(The Commonplace Book)은 그의 이상과 방법들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 그의 습관속에서 청교도의 조언자들과 교사들을 필적할만한 것들을 우리는 살펴볼 수 있다. 그는 "Notes"의 겉장에 "스물한개의 규칙"이라는 것을 기록해 두었다.
2. 스타일과 방법에 관해서는 거의 서론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 것. 이런 것들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게 되면, 저자는 않은 손해를 보게 된다‥‥
4. 스타일에 있어서 많은 겸손이 드러나도록 하라.
5.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들을 집어넣지 말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식자(識者)들에 의해 논란을 일으킬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일상적인 사고방식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들에 속하는 논쟁거리에 의존해서 내 논리를 펴나갈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오직 내게서 부인할 수 없는 것만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6. 그럼에도 불구하고 겸손은 동정의 대상이나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되며 오히려 점잖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7. 무엇이든 특별한 관심을 보이기 위해서 의견을 개진할 때는, 모든 사람들이 가장 분명히 뚜렷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그 개념들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는 가장 덜 혼란스러운 것, 덜 모호한 단어들로부터 모든 문제들을 풀어내야 한다.
8. 추론 과정에서는,'~한 것이 분명하다.'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등과 같은 말을 써서, 모든 사람들이 당연히 그렇다고 여기는 것보다 어떤 것이 더 분명한 것처럼 주장하지 말라.
9. 할 수 있는 한 전문 용어는 사용하지 말 것. 혹 사용한다 하더라도 되도록 절제할 것. 내가 마치 글을 많이 읽은 사람인 양, 또 지식 세계에 정통한 사람인 양 하지 말 것
12. 글을 씀에 있어서는, 독자들의 연약함을 충분히 고려할 것이며, Ladies Library Vol.1,P.340 과 1714년에 발간된 후편에 수록된 규칙들을 따라서 써야할 것이다‥‥
21. 손쉬운 말로 할 수만 있다면, 될 수 있는 대로 전문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에드워즈는 글쓰기에 있어서 미학적 이론들의 다양한 양상들을 다루고 있는 The Spectatorr, The Tatler, The Guardian 등을 포함한 영국에서도 익히 알려진 잡지들과, 그가 관심을 갖고 책을 수집하여 카탈로그에 기록했다. 스타일에 관해 규칙 12번에 언급된 Ladies Library를 참고해 보면, 에드워즈가 문예적 기술을 사용함에 있어서 당대의 유행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수사학을 무시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청중들의 마음에 닿는 설교를 하기 위해 그것을 활용했다.
이런 기록들을 면밀하게 조사해 보고 그의 설교를 연구해보면, 에드워드가 스타일의 문제에 대해 얼마나 심사숙고 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는 겸손하고 꾸밈이 없고 평범한 스타일을 얻기 위해 노력했고, 그 점에 있어서 그는 청교도의 모델을 따랐다. 설교자로서 그는 사람들의 지성을 감동시키고 마음을 움직여 그들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는 설교를 하려고 애썼다. 그는 정통적인 방법으로 그 목표에 도달하려고 했으며, 평범하고 신실한 목사의 솔직한 언변을 썼다. 만약 그가 웅변적이며 과장된 말들을 피했다면 그것은 거룩한 일에 대한 관심 때문일 것이다. 이 말씀의 종은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집중시킨다거나 그가 섬기는 주인의 영광을 딴 데로 돌린다거나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에드워즈의 스타일은 평범한 스타일이다. 각각의 설교들은 성경으로부터 신학의 원리만을 뽑아내고 교의적인 순서에 따라 논의하려고 시도했다. 절차로 보면, 그는 분석 방법을 통해 본문을 구성 요소별로 쪼개고, 그것들을 다시 하나의 명제로 제시했다. 성경을 논리적으로 분석한 이후에, 목사요 설교자인 에드워즈는 성경을 삶으로 번역하는 자세로 실제 설교문을 만들었다.
“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점에 있어서 죄를 피할 뿐 아니라 우리를 죄로 이끌거나 노출시킬 가능성이 있는 것들을 피하기 위해서 그들의 의무를 다하도록 권고하는 바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는 것이 이성적으로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볼 때에 분명하고도 확실한 것이라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어찌 그의 의무로 입증된 것에 대해 거부하고 논쟁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요셉의 유혹’이라는 설교에서 인용한 것이다(Work.IV pp.592~596). 그는 그 가르침을 특별히 젊은이들에게 적용시켰는데, 그들의 “유흥”(frolics)이나 사교적인 시간이 그의 관단으로는 영적인 삶을 사는 데 해로운 것이었다.
동일한 설교에서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만군의 주 하나님의 전령(messanger)이기에 말해야 만하는 이 문제점에 대해서, 우리 젊은이들의 귀가 열리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내가 해야 할 말을 듣기도 전에 먼저 내 말을 경청하지 않겠노라고 결정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는 특별한 문제에 걸려 있는 영혼들을 살리려는데 있어서, 자기 주장을 세우기 위해 지적인 솔직함을 사용함으로써 차근차근 추론해갔다. 그는 죄의 비참한 현실을 생생한 스타일로 묘사했다. 오늘날 어느 누가 비슷한 성경 (본문)을 취해서, 거기에서 이끌어 낸 진리를 적용하기 전에 먼저 특정한 죄에 대해 그처럼 담대하게 말하겠는가? 에드워즈는 언제나 "이성과 하나님의 말씀"에 호소하는 말들을 했다.
비록 평범한 스타일에는 산뜻한 구절들 속에 담긴 화려한 장식들이 없을지 몰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스타일은 확신에 차 있으면서도 직선적인 말이었으며, 듣는 사람들 입장에서 스스로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그 호소하는 바가 분명히 이해되는 것이었다. 그의 스타일은 또한 “재치 있는 말” 이라기보다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에드워즈시대의 설교는 재치, 말재주, 재담, 경구 등의 특징을 지닌 것으로 분류되기도 하고, 형이상학적이거나 지적인 것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엘리자베스 시대의 학적인 상징수법을 사용하지 않고 사고를 표현하려는, 언어적 특징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이미 언급된 미첼의 책 5-9쪽에 따르면, "형이상학적"이란 말은 기이하고도 환상적인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비일상적이거나 변덕스런 표현 혹은 이미지를 사용해서가 아니다. 도리어 그런 것들을 사용할 때, 그의 깊은 지식에서 가져와서는, 설교자의 특이한 기질이나 사려 깊은 격려라는 수단으로 그것들을 효과적으로 변형시켜 사용했기 때문이다.
노스햄턴의 목회자 에드워즈의 설교는 지적이기는 했지만, 그의 독서와 지식이라는 광범위한 배경에서 나오는 그런 표현을 쓰지는 않았다. 많은 청교도 목회자들의 설교를 통해서 보듯 그의 설교에서도 매우 드물게 광범위한 독서의 증거들이 발견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하나님의 목자들(특히 에드워즈)은 설교란 오직 영어밖에 모르고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평범한 스타일이 마음에 와 닿는다.
에드워즈 스타일의 풍성함과 자연스러움은 단순함, 솔직함과 맞아 떨어진다. 그의 스타일에는 어떠한 무미건조함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텍스터(F.B.Dexter)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원고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설교를 전반적으로 읽어보면 , 그는 매우 인간적으로 보이는데 , 고답적이거나 추상적인 생각에 골똘한 형이상학자라기보다는, 간절한 열망과 기도의 자세를 가진 경건한 설교자었다. " (Massachusetts Historical Society Proceeding ,XV, 1902, P8).
에드워즈의 지적인 능력은, 오히려 지식을 숨기고 자기 자신을 감추려고 하는 겸손의 제물이 된다. 그는 단순하게 썼고 단순하게 설교했다. 명료한 지성과 열정적인 영이 함께 불타올랐다. 그의 "철저한 추론"은 카탈로그 안에 언급되어 있는 책 속에서 배운 최고의 지식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의 설교에는 천박하거나 우스꽝스러운 구석은 전혀 없었다. 그가 썼던 모든 글은 오직 하나의 목적을 위한 것이었고, 언어는 진리를 직접적이고도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도구였다. 감동을 주었던 것은 그의 메시지였지, 그가 사용한 방법이 아니었다. 그의 설교에는 어떤 주장이나 설득, 호소 등이 있었고, 이따금씩 단호함과 엄격함이 있었지만 거칠지는 않았다. 심판에 관한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그가 묻는 말에는, 절제되었으면서도 극적인 강렬함마저 느낄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옥에서 이 이야기를 기억하겠습니까?”(Works,P.321)
그의 설교는 대부분 목회적이었고, 그 스타일은 섬세하고 열정적이고 신선하였으며, 거의 논쟁점이 없었고 이론이 발생할 만 것이 전혀 없었다. 「사랑과 그 열매」(Charity and lts Furits, op. cit p. 327)를 주의깊게 들여다보라!
“천국에서도 하나님은 바로 거기에 거하시며, 그분에게서는 거룩한 사랑의 시내가 흘러나옵니다. 방울방울마다 모두가 사랑인 그 물은 한 번도 끊이지 않고 흘렀으며, 또 지금도 그분에게서 흘러나옵니다. 그곳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이 무한하고도 영원히 서로 사랑하시는 가운데, 한 분으로서 계십니다. 거기에 자비의 아비시요 사랑의 아비이신 성부께서 거하십니다. 거기에 그리스도, 하나님의 어린양, 사랑과 평화의 왕이 계십니다. 거기에 성령님이 거하십니다. 거룩한 사랑의 영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본질이 흘러나오고, 그 본질이 사랑 가운데 생동하며, 그분의 즉각적인 영향으로 모든 거룩한 사랑이 천상과 지상의 모든 성도들의 마음에 부어지는, 성령이 계십니다.”
이러한 말들을 통해 단순하면서도 은혜로운 에드워즈의 스타일이 지닌 역량을 알 수 있다. 그는 지적으로는 거인이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순수한 어린 아이였다
11. 상상력이 탁월한 이성
"잠언 12장 23절의 말씀대로 행동하기로 결심하고서, 어느 사려 깊은 사람은 자신의 지식을 숨겼다."
1724년 1월 10일 에드워즈의 일기 서두에 나오는 이 말은 청교도 설교자가 가장 흔히 사용했던 모토를 엿보게 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숨긴다'는 말의 의미는 액면 그대로 “어떤 것을 감추다” 라는 뜻이 아니고, 오히려 “말을 내놓다” 혹은 “어떤 것을 보여준다” 라는 말의 반대 의미가 담겨 있다. 예화를 사용하는 방법에 있어서 이 뉴잉글랜드의 설교자는 우리 시대처럼 예화에 대한 적극적인 요구에 굴복하지 않았다. 회중은 그들의 흥미를 높여주거나 그들의 주의를 끌도록 과도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자인 목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자 교회에 왔다. 설교는 회심하는 데 필요한 하나님의 수단이었다. 영혼의 운명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설교자와 그의 메시지에 주의가 집중되었다. 따라서 에드워즈의 심상(image)은 제한적이었고 대개 성경적이었다. 뉴잉글랜드의 설교에 대한 흥미에 관해서는 우리들이 그들의 삶의 정황을 알게 된다면, 설교를 장식하거나 화려하게 꾸미기 위한 것은 똑같은 요구가 아님을 알게 된다. 또한 이것은 설교자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나 혹은 회중과 나눌 수 있는 것을 나열해서는 안된다는 최고의 청교도 전통을 고수하려는 것을 뜻하였다. 에드워즈는 성경적인 설교자였기에 그의 예화들도 주로 성경으로부터 취하였다. 은유나 비유적 표현들도 성경에서 수집하였다. 이것은 그가 영어 성경에 깊이 몰두한 사람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목회 경험 밖의 삶의 이해관계에 관한 이야기들은 자기 자신의 회심이나 성화를 다룬 것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성경적으로 빗대어 한 표현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예를 들면 “거친 바다와 같이 사악한자들,” “겨와 같은,” “그 늙은 뱀,” “죽음의 화살”, “하나님의 진노의 활이 구부려지고 시위가 당겨질 준비가 된 화살”, “정의가 여러분의 마음에 화살을 겨누고 활의 시위를 당깁니다”(Work, IV, op. cit p. 318). 마지막 것은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설교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는 저 유명한 엔필드의 설교에서 가공할 만큼 현실주의적인 언어들을 사용했다. 비록 에드워즈가 그의 동시대의 설교자들의 견해를 공유하기는 했지만, “거미”에 대한 언급은 많은 논란을 유발시켰다.
“어떤 곤충이나 혹은 거미 한 마리를 불 위에서 들고 있듯이, 하나님은 지옥의 불구덩이 위에서 당신을 붙들고 있으며, 여러분을 역겨워하시며 굉장히 화가 나 계십니다. 당신을 향한 그분의 분노는 마치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가느다란 줄에 매달려있고, 거룩한 진노의 불꽃이 그 줄을 향해 타오르고 있습니다.”( WorksⅣ, Ibid, p318)
설교자들은 그가 대개 친숙한 사물들로부터 예화를 발굴하여 사용하는 것을 선호한다는 점을 감안해야한다. 예화들은 설교자의 삶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에드워즈의 설교에서도 그대로 드러났고, 그런 결과로 불평의 말들이 에드워즈에게 던져진 것이었다. 열두 살 때 그는 거미의 습관과 특성에 대해 자세히 써본 적이 있고, 따라서 그에게 친근한 곤충이었다. 이런 심리적인 배경은, 에드워즈를 품위나 감수성이 완전히 결여된 사람으로 보게 하기 보다는, 도리어 그가 왜 이런 예화들을 사용했는가에 대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거미 예화가 다소 혐오스럽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의 배경을 생각해본다면, 그의 무분별했던 말(거미 예화)이 초래한 비난과 오명이 다소 가벼워질 수 있을 것이다.
에드워즈의 심상에 대한 또 다른 특징은 그것이 고전적이었고 성경 외적인 언급들이 제한적이었다는 점에 있다. 이것은 청교도들의 습관과 일치하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에 대한 언급은 결코 허용되지 않았다.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로 이루어진 구절들과 단어의 인용은 설교할 때에 번역된다 하더라도 금기시되었다. 퍼킨스는 해석학과 설교학에 관한 그의 책에서 이같이 가르쳤고. 에드워즈는 이 충고를 그대로 따랐다. 그는 설교문 작성시에 무엇을 사용하든지 간에 그것을 공공연히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가 청교도 스타일에서 살펴본 것처럼 겉치레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화는 제한적이었고, 목사는 그의 지식과 경험의 영역에서 얻은 많은 것들을 사용해서는 안 되었다. 이것은 문예적이며 개인적인 언급이 어떻게 감추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에드워즈의 설교는 꾸밈이 없었고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 좋은 설교를 위한 유용한 부속물들이 결여되어 있는듯하다. 그러나 18세기의 세계는 작은 공동체들로 이루어진 세계였고, 교회나 집회 장소는 그들의 삶의 중심이었고 주된 관심사였다. 그것은 "Meetinghouse Hill" 이라고 불리웠다.(cf. 0. A. Winslow, Meeting house Hill). 그 당시 목사는 탁월한 인물이었고 “성직자” 로서, 사람들을 인도하는 리더로서 그의 말은 존경과 권위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말을 경청하였다. 그러므로 회중에게 복음적인 감동을 주기 전에 접촉점을 찾아내어 본문과 상관없는 외부 세계로 이탈하려는 어떤 시도도 필요없는 일이었다.
에드워즈는 때때로 여행을 했지만 그의 회중 대다수 사람들이 인정하기 싫어하는 보다 넓은 세계와의 접촉에 대해서는 설교에서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주의를 집중시킬 만한 기상천외한 방법을 취하지 않았던 에드워즈인지라 식민지 생활과는 거리가 먼 기발한 비유적 표현과 학자인 척하는 인용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본문을 큰 소리로 읽고 언급된 본문으로부터 교의를 적용하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그는 영적 진리에 있어서 풍부하고도 다양한 경험을 갖고 있었고, 이것은 설교의 구성을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그는 경험적 사상가이며 설교가였다. 그는 자신이 느꼈던 바의 것을 선포 하였다. 그는 좀처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부요함이나 본문의 의미를 조명하기 위한 책 읽기에서 자기의 견해들을 끌어올리지 않았다. 그의 설교는 숨김의 예술이었다. 그가 청중들과 대면했을 때 어떻게 느꼈을는지는 오늘날 몇 명의 설교자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청교도의 미학에서는 “방법론”을 고양시킬 필요가 없었다. 방법론은 진짜 신자들에게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이 사실을 밀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잘 배운 신자들, 설교를 들음에 있어서 자신들의 목사가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기도로 준비되고 감동되었음을 인정하는 신자들에게는, 설교를 듣기 위해 선한 의지나 부드러운 마음, 관심의 집중 따위가 필요치 않았다."(cf. P.Miller op.cip., p.340)단지 “고별 설교”에서 에드워즈는 자신의 목회 사역을 회고하며 지나간 일들과 개별적인 일들을 언급하였다. 가끔씩 교인들의 죽음을 인용한 예가 사용되었다. 나중에 설교가 출판되었다면 날짜가 보존되었겠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문제였다. 그런데 교구에서 발생했던 매우 드문 한 사건 만은 예외였다. 에드워즈는 낡은 교회 건물과 관련된 재난에 대해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교회당 안쪽의 돌출부가 붕괴했지만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고 몇 사람이 다쳤을 뿐이었다. 1735년의 부흥 때에 하나님 집에 출석하는 사람들이 증가하여 이런 일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새 건물이 구상되었다. 새 건물이 완공 되었을 때 남녀간 혹은 결혼한 사람들의 좌석 배치 문제로 상이한 견해들이 대두되었다. 새 집회 장소의 착석 문제가 해결된 1735년 12월 25일 주일, 이날은 성탄절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성탄메시지가 생략되었다.
에드워즈는 이날 요한복음 14장 2절 을 “많은 저택”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이런 경우에 있어서 설교에는 그의 회중과 밀접하게 연관된 삶의 정황과 예화의 타당성이 존재하게 된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천상의 집, 그곳에는 다양한 영광의 좌석과 상이한 등급과 존엄과 행복의 구역이 있습니다."(Sermons of Jonathan Edwards, Sprague Collection, Princeton Sminary Libray, vol. 550) 그날의 설교는 실재적이었고. 자신을 초연한 설교였다. 에드워즈는 그리스도를 지시하였고, 바로 그 객관적 실재성 속에 그의 능력이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적이며 유효한 분이셨다. 그는 섬기는 회중들로 하여금 생명의 주님과 대면 할 수 있게 했다. 그는 주님의 영광을 강조했으며, 다가올 심판을 경고했고, 죄짓는 영혼들에게는 십자가를 제시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설교 안에 자신이나 혹은 다른 이야기를 집어넣음으로써, 하나님과 회중들의 영혼이라는 중심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설교의 모든 것이, 복음을 들으러 온 개개인의 구원이라는 목적에 예속되었다. 1738년 「5개의 강화」(Five Discourses)서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여전히 설교의 미련한 것을 축복하셔서 그것을 통해 믿는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며, 배움이나 혹은 현재와 미래의 지혜를 통해 얻어지는 우아한 언어나 탁월한 문체를 그토록 높이 인정받지 못하게 하실 것 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Works, V, ed. Dwight, p. 349) 에드워즈는 수사학을 경멸하는 듯했다. 그는 과장된 말을 피하고 항상 자기 자신과 자신의 박식함을 감추고자 애썼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에드워즈로부터 신앙의 대상인 주님께로 눈을 돌리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오늘날 우리들은 성도를 위해 예화로써 이해의 맥락을 추구하도록 하는 데에 익숙해 있다. 에드워즈는 우리 시대의 습관과는 꽤나 거리가 먼 것 같다. 비록 그가 노스햄턴 주변의 목회적 풍토에 친숙하고 소수의 양무리를 돌보았다고 하더라도 설교에서 양떼에 관해서 언급할 때 직접적이거나 지방색이 짙은 예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빗대는 표현도 성경 속에서 직접 찾아내어 사용했다. 이를테면, “양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도살당한 양,” “길 잃은 양같이” 등등. 이런 예는 목사와 해석자로서의 에드워즈의 성향을 드러낸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지식을 감추었는데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그는 과시나 겉치레 없는 설교를 하려 했다는 것이다. 둘째로 그가 자족하거나 교만해지지 않도록 그가 발견한 몇 개의 보화로부터 조심스럽게 다른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이 목표를 위해서 그는 속기로 메모할 때 의도적인 감춤이나 숨김의 습관을 이용했다(cf. W. P. Upham, “On the ShorthandNotes of J. Edwards,” Massuchusetts HistoricaI Society Proceedings, XV, 1902,p. 517, cf. also Yale Collection)
자기 자신을 제한한다고 해서 그가 인간본성에 대한 통찰력을 결여하는 어리석음을 범한 것 은 아니다. 그는 “사람 안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았기”에 자신의 지식과 분별력을 적용시킬 수 있었다. 그는 거룩한 사람과 죄인 모두를 다 알았고, 그의 심리학적인 통찰력은 타인들보다 훨씬 탁월했다. 부흥의 시대에 종교적인 체험에 대한 그의 연구는 그런 점에 있어서 그의 기술이 얼마나 예리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가 설교할 때면 비록 예화는 부족할지 몰라도 진리가 사람들 앞에 제시되었고. 마음속을 꿰뚫는 자질이 드러났다. 물론 그는 전력으로 헌신했을 뿐 아니라 성령님의 거룩한 감동이 그에게 임했다. 가끔씩 공동체의 삶에서 일어난 사건을 예로 들었다. 그는 욥기 14장 2절의 본문을사용하면서 새로운 적용을 했다.
예레미야 23장 29절에 대한 특별한 관심도 그중의 하나인데. 1749년 4월1일 그의 목회 사역의 막바지 논쟁의 정점에서 행한 설교였다. 또 다른 것으로는 그가 해고되기 전, 노스햄턴에서 설교한 가장 마지막 것의 하나로서 이사야 22장 17절과 18절의 본문이다. 에드워즈는 자기가 결심한 것들을 충실하게 수행했고, 성경본문에 대한 단순하고도 평이한 해설 외에 특별한 것으로 그의 설교를 장식하지 않았다.
12. 에드워즈 설교의 문예성
"될 수 있는 대로 극소수의 예술 용어를 사용하라"
에드워즈는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 시대의 고전인 King James Version Bible에 흠뻑 젖어 있었다. 설교시 그의 빛나는 표현들은 성경 어휘들에게서 도움을 받은 것이었다. 그의 스타일은 하나님을 향한 강렬한 헌신과 깊은 믿음에서 나오는 충심과 열정어린 마음의 산물이었다. 설교문이 18세기 문예의 한 예로서 자리를 잡은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설교문에는 명료한 언어와 품격 높은 산문이 일관되게 들어있었다. 설교문을 소리 내서 읽을 때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설교가 전달될 때 상당부분이 깊은 인상을 남겼으리라고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에드워즈는 훈련된 지성과 준비된 필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자신의 지적인 능력, 여러 사상들에 대한 철학적인 이해, 신학적 안목, 영어권 최고의 작가들에 대한 친숙함 등으로 인해, 왕성한 집필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저주의 내용을 담은 설교라 할지라도 그것이 목회적 메시지와 융합되어 생산적인 행위가 되었다. 좋은 문학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 글이 생산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헌신과 도덕적 삶을 유발하는 것은 종교집회에서 생기는 감정적 동요가 아니었다. 그의 설교문 읽는 소리 속에는, 감정의 깊이와 오염되지 않은 진리의 근원과 흐르는 시내와 같이 살아 있는 믿음과 같은 것들이 잉태되어 있었다.
문학의 관점에서 그의 설교를 보면, 운율과 조화, 뚜렷한 주장 전개와 탁월한 절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설과 같은 이야기 배열, 대구(對句), 관용구의 강렬한 인상 등이 우리의 감동을 자아낸다. 사고의 논리적 통일성과 명료한 구조를 갖고 있는 논증 등은 그의 설교에 훌륭한 문학적 지위를 부여해준다.
그의 선배 청교도들처럼 에드워즈도 듣기에 부담 없는 단어를 찾기 위해 애썼다. 단지 사람들의 머리만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역사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설교목표였다. 비록 설교가 전달될 때에는 설교자의 개성에 많은 것이 좌우됨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교문은 그 자체가 사람의 머리와 마음에 호소하는 문예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지성과 감성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시적인 요소들이 그의 산문(설교문)안에 나타난다. 다만 색다른 결론으로 귀결된 "지옥 불"이라는 설교의 결론을 빼놓고는. 에드워즈는 극적인 효과를 나타내려고 의도적으로 애쓰지 않았다.
"기도의 의무감이 부족한 위선자들Hypocrites Deficient in the Duty of Prayer“(Works, IV, op.cit. p.481)이라는 제목을 가진 설교에서, 에드워즈는 아래와 같이 잠잠하면서도, 기운차며 리듬에 넘친 글을 썼다.
"거의 기도 없이 사는 인생이, 도대체 어떻게 거룩한 삶과 일치하겠습니까? 거룩한 삶을 사시렵니까, 하나님께 헌신하십시오.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삶을 사십시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구별된 삶을 사십시오. 과연 누가 이처럼 지존하신 하나님의 종 된 삶을 살겠습니까? 거룩한 삶은 곧 믿음의 삶입니다. 참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삶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기도는 바로 이 믿음이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도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믿음으로 산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살아 있는 사람이 숨을 쉬는 것처럼, 기도는 믿는 사람에게 자연스런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살면서도 기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어떻게 보아도 모순되고 황당한 말입니다. 마치 숨 쉬지 않고 산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 없는 삶은 거룩한 삶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것은 세속적인 삶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부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사는 것입니다.“
절 뒤에 또 다른 절이 이어지고, 문장 뒤에 또 다른 문장이 꼬리를 이으면서 전체가 절정을 향하여 나아간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선 모든 것이 성경에 예속된다. 바로 이러한 정신이 그의 설교 속에 나타나는 명료한 사고와 올바른 주석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훌륭한 산문 속에 깃든 운율의 또 다른 예가 “거룩한 빛”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도 발견된다(Works. IV, Ibid, p.273).
“이 빛이, 오직 이 빛만이 , 삶 전반에 걸친 거룩함 속에서 그 열매를 얻습니다. 기독교 교리에 대해 그저 합리적이고 학구적으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이런 열매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빛은 우리 마음 깊은 곳까지 비추어서 우리의 본성을 변화시키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삶 전반에 걸쳐 순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빛은 하나님이 우리의 순종과 섬김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심을 밝히 보여줍니다. 그 빛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으로 이끌어줍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 그것이야말로 참되고 은혜로우며 우리의 삶 전반에 걸친 순종의 유일한 원칙입니다. 그리고 그 빛은 우리에게, 순종할 때에 주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급이 실제로 존재함을 확신시켜 줍니다.”
위에서 예로 든 설교문을 보면, 에드워즈가 문필가이면서 동시에 영적인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설교자로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에드워즈는 항상 완성된 원고를 갖고 설교하지는 않았고. 가끔 설교개요와 요점만을 사용하여 설교하곤 했다. 그의 설교원고는 그가 이런 방법으로 스스로 훈련했던 목회 초기의 산물이었다.
우리가 이미 본 것처럼, 청교도에게 있어서 문예적 스타일은 ‘겉치레'에 불과했다. 물론 그것은 유용하며. 때로는 귄장할만 하기도 하다. 그래서 좋은 글쟁이라면 문예적인 도구들을 어떻게 사용해야하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첫 번째 관심은 언제나 메시지의 내용과 그 확신성을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에드워즈의 산문은 영적인 사랑과 거룩함에 대한 강렬한 열정으로 고양된 것이었고, 그는 자신의 감정을 그 상상력이 풍부한 산문 속에 담긴 시적인 요소에 담아냈다. 사실 영적인 세계가 그의 사상을 장악했고, 그의 미적 감각을 지배했다. 이러한 감수성이 언제나 그의 글속에 있었으며,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적인 열정에 연결되었다. 에드워즈에게 있었던 가장 높고 지속적인 미적 감정은, 물질적이거나 자연적인 아름다움에서 야기된 것이 아니라 거룩함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목회적인 설교들을 해석하는 열쇠이다. 목회자로서, 그리고 강해설교자로서 그의 최고의 설교들에는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이 아름다움과 은혜로 충만했다.
에드워즈를 문필가로서 평가해 본다면, 그는 교육의 이론을 가진 사람이었고, 또한 그의 작품에 깔려있듯이 그는 감각적인 미적 충동을 개발해 나갔다. 유년기 때, 그는 "곤충에 관하여“와 "무지개에 관하여"라는 글쓰기를 통하여 기쁨을 누렸다(Dwight, op. cit., pp .23-28). 이러한 글들은 그의 지성이 성숙해가고 있었음을 드러내주며, 그의 글 ‘거미에 관하여"는 과학적 관찰에 있어서 하나의 경이로서 여겨질 만하다. 앞서서도 로크의 <Essay on the Understanding>에 관한 그의 지식과 열정을 살펴보았는데, 그는 카탈로그 첫 페이지에도 로크의 교육에 관한 생각(Thoughts Concerning Education, 1963)을 적어 넣을 정도였다(Dwight, Ibid.,P.11).
에드워즈의 일부 편지를 보면, 그가 로크와 같이 생각했음이 드러난다. 어스킨에게 보내는 일련의 편지 속에서 (Dwight, Ibid , p.478) 그는 "영어를 가르치는 사람들 사이에 드러나는 일반적인 교수방법론의 총체적 결함'과 같은 내용을 기록했다. 그는 남자아이들뿐 아니라 여자아이들도 교육이 필요하다고 믿었으며, 그의 집안의 아이들은 보다 높은 책임을 감당하기 위한 준비로서, 교육을 받았다. 이런 모든 것들이 그의 목회이상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교육, 저작, 연구, 원고를 다듬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 세상 도처에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향해 마음을 여는 것 등등 이 모든 것들이, 그의 영혼을 양육하여 설교하게 하는 수단이며 통로였다. 그는 목회사역 기간 동안 그의 설교를 품위 있게 하기 위하여 과도하게 고치지 않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숙한 문필가라는 증거를 보여주었다. 그의 기술은 은폐의 기술이었다. 설교문에서는 아주 드물게 문예적 기술이 사용 되었고, 그것도 보조적이며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 사용되었을 뿐이었다. 참 보배가 질그릇 속에 담겨 있었는데, 아마도 그 그릇은 힘과 아름다움을 지닌 것이었으리라.
13. 에드워즈의 설교문과 흠정역 성경
“나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생명력을 느끼며, 가장 훌륭한 관점을 지니게 된다”
에드워즈는 어렸을 때부터 일기 쓰기를 시작했으며 (예일 컬렉션에서 1724. 5. 23. 토요일의 일기를 참조하라), 이 일기 쓰기는 후에 하게 될 사역의 준비가 되었다. 에드워즈가 그 날의 가장 중요한 항목을 기록해 놓은 것을 보면, 우리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여기저기에 적혀 있는 여담에는,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삶을 살려고 했던 에드워즈의 참 모습이 나타나 있다. 성경에 대한 언급을 살펴보면, 그가 성경에 대해 매우 박식하여, 성경이, 그의 인격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음을 주목하게 된다. 성경이 그의 연구와 설교에 있어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는 나중에 살펴볼 것이고, 여기서는 그의 스타일과 글쓰기에 미친 성경의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당대의 출판된 유명한 책들을 폭넓게 읽고 거기에 친숙해지는 청교도풍이 에드워즈의 스타일을 향상시켰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었다. 그는 청교도의 평범한 스타일을 따랐고, “단순하고 순수한 진실” 만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했으나, 그의 사역에는 흠정역 성경이 독보적인 역할을 했다. 그 성경은 파도와 천둥이 되어 그의 마음에 파고들었다. 젊었을 때부터 그는 성경 애독자였고, 목회활동 내내 성경의 언어와 사상에 몰두했다.
1611년 판 성경은 그 문체에 있어서 엘리자베스 시대 영어의 순수함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그 성경이 여러 세대 사람들의 말과 이상에 끼친 영향은 대단했고, 우리 역시 그 성경으로부터 중요한 것을 물려받았다. 11년 판 성경이 유포되었던 때는, 앵글로-색슨 언어가 최고의 경지를 구가하던 때였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어는 오늘날에도 그 탁월함을 능가할 수 없는, 실로 불후의 업적이다. 에드워즈는 그 성경에서 받은 영향을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내 마음은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데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그 인격의 아름다움과 탁월함, 그리고 그분 안에서 은혜로 거저 주는바 그 달콤한 구원의 도를 알고자 함입니다. 성경만큼 그 주제를 그토록 명쾌하게 밝혀주는 책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가서 2장 1절, ‘나는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라는 말씀은, 저를 풍요롭게 해주곤 합니다. 그 말씀은 제게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사랑의 모습을 달콤하게 표현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가서 전체가 제게 기쁨이 되곤 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당시에 아가서 말씀을 자주 읽곤 했습니다.” (Hopkins. 0P. cit., P.28)
에드워즈가 설교시나 어법 사용에 있어서 적절한 표현을 구사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성경의 덕분이었다. 그는 꾸준히 성경을 읽고 연구하여 생생한 말씀(word-pictures)에 자기 자신이 동화되었기 때문에, 그의 지성에는 상상과 표현들이 넘쳐흘렀다. 놀랄 만한 비유들이 등장하고 특정한 단어들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 성경이 그의 문체와 설교문에 크게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성경적인 사고와 성경적인 어법에 흠뻑 젖어들었다. 그는 성경 안에서 다양하게 인용했고, 그의 간결하고 설득력 있는 영적 스타일은 바로 성경적 스타일이었던 것이다. 그의 지성은 성경으로 인해 활기를 띠었다.
성경은 에드워즈에게 가장 중요한 모델로서, 그의 아름답고도 은혜로운 설교에서, 믿음의 교리를 천명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언제나 아름다움을 선호했고, 성경 안에서도 역시 그러한 경향을 나타내었다. 비록 그의 설교마다, 그가 성경 전체의 힘을 입었다는 것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그는 특히 시적인 부분에 더 큰 매력을 느꼈다(Works, Ⅲ op. cit., pp. 271-277, "Beauty").
그의 언어를 한번 살펴보자. “성난 들짐승”, “숲속의 사자”, “나방 같이”, “벌레 같이”, “거미 같이”, “늙은 뱀”, “하나님의 어린 양” 등. 이런 양태는 성경적이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그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당신의 피를 쥐어짜서 그 피를 흩뿌릴 것이며, 그 뿌린 피로 그의 옷을 더럽힐 것입니다.” “역거운”, “비열한”, “불의 호수”, “칠흑 같은 어두움”, (Works, IV, Ibid., p.165, 173, 261). 그러나 이와 같은 저주의 설교에서 방향을 바꾸어, “침노받는 천국” 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할 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땅이 종종 비를 맞으나 오직 가시나무와 엉겅퀴만 냅니다.” “천국”, “소유하다”, “상속하다”, “복이 있다”, “사랑”, “평화”, “안전” 등등, 여기에서도 역시 성경에 나오는 단어들이 반복된다.
설교할 때나 글을 쓸 때, 에드워즈의 밝은 성향과 활달한 마음은, 그로 하여금 성경의 단어를 깊이 묵상하게 했다. 다음 구절에는 성경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저는 그 당시, 그리고 그 전이나 후에도, 성경을 보는 것이 가장 즐거웠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종종 말씀 하나하나가 제 마음에 와닿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제 마음과 그 달콤하고 강력한 말 사이에서 어떤 조화마저 느꼈습니다. 어떤 때는 문장 하나하나마다 너무나 많은 빛을 발견한 나머지, 그 황홀한 맛을 보느라 더 이상 진도를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때는 한 문장과 오랫동안 씨름하기도 했습니다. 그 안에 숨어 있는 놀라운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문장이 제게는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Hopkins, op. cit., PP. 33~34).
이러한 구절들은 그가 성경을 통해 얼마나 많은 영적 기쁨과 풍요로움을 얻었는가를 말해주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성경이 그외 사상과 스타일에 영향을 끼친 유일무이한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확실히 성경의 단어와 구절들은 그의 귀에 달콤한 리듬이 되었고, 그의 스타일을 형성했다. 언어와 스타일, 사상과 교리에 있어서, 성경은, 에드워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는 다른 훌륭한 청교도들과 같이 설교함에 있어서 필요한 모든 기술과 학문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정금과 같은 성경만을 설교했던 것이다.
에드워즈의 스타일 가운데 또 다른 특징은, 그가 "대구(對句)"와 "아름다운"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좀 특이한 습관이었지만, 기독교인의 생활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가를 묘사하는 설교에서 자주 사용하는 좋은 특징이 되었다. “대구”의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구하고 찾으라, 관용과 자비, 노동과 수고, 일치하고 적합한, 편견과 욕망, 기억되고 기념되어야 할.” 이런 표현은 습관적인 어투였으나, 진부한 표현은 아니었다. 어조는 똑바르면서도 대체적으로 힘차고 박력있었다. 아마도 그는 설교할 때 설교문을 크게 읽었을 것이다.
덧붙여, “대구”를 사용함에 있어서 그의 귀가 “아름다움”에 대해 열려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다음 말을 들어보라.
“나는 복음의 진리를 언제나 사랑합니다. 그 진리는 내 영혼의 푸른 초장이요, 가장 귀한 보배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신 구원의 길은, 보편적으로, 그리고 영광과 탁월함으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하게 나타났습니다. 저는 매우 자주 달콤하고도, 간절한, 그리고 갈망하는 영혼으로 그 진리를 묵상합니다.”(Hopkins, op. cit.,pp. 119,238,399).
에드워즈 안에서 이처럼 강화된 상상력은 그가 설교할 때에, 생동감 넘치는 단어들(word-pictures)이 번뜩이게 했다. 그는 영적인 열정에 사로잡혀서, 그 웅장하고도 단순한 진리가 주는 감동으로 우둔한 마음들을 일깨웠다. 사람들은 성경의 이미지를 실제적으로 표현해 주는 것을 깊이 묵상하며 살고자 했고,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된 그의 설교는 그러한 사람들의 신앙을 견고하게 해주었다. 에드워즈는 매우 실제적인 문제들을 다루었는데, 이는 그가 진리의 영이 비춰주시는 영적 조명에 민감했기 때문이다.
성경에 젖어듬으로써 얻게 된 생생함으로 인해, 그의 스타일이 논쟁적인 성격이기보다는, 평화롭고도 권면하는 색채를 띠게 되었다. 사실, 그의 논문은 논쟁적이고 변론적이지만, 설교는 잘못된 교리를 논박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목회적 통찰력과 상담에 할애되었다. “침노받는 천국” 이라는 설교(Works, Ⅳ, ibid. ,p.387)를 보면, 에드워즈가 교리를 실제적으로 적용한 대목이 나온다. “모든 것을 드려 헌신해야 함에 유의하십시오. 구원을 얻으려 하십니까? 그 어려움에 대해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것을 얻는데 지불해야 하는 대가를 힘써 헤아리십시오...” 그는 오직 자기 주인(하나님)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현명한 조언자이자 숙련된 목회자였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생기 넘치는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결과였다.
우리는 그의 초기 설교나 혹은 말기 설교를 볼 때, 항상 그의 어조가 강함을 발견하게 된다. 일찍부터 에드워즈는 성숙했으며, 노스햄턴에서 목회를 시작할 때도 그의 설교는 후일 듣게 될 설교만큼이나 풍성하고 설득력 있었다. 그의 강조점과 교리는 변함이 없으며, 그의 영적 호소는 한결같다. "고별 설교"에는 적의(敵意)나 고통과는 거리가 먼, 기독교 신사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으며, 조리에 맞는 말들이 부드럽게 풍겨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의 영이 그 목회자에게 부여하신 것이었다.
왜 에드워즈가 흠정역 성경의 자극에 이와 같이 반응했을까? 자신의 지식에 그리스도가 필요했다는 사실도 분명하지만, 본성적으로 그는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받은 일반적인 교육과 배경이 그로 하여금 흠정역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결과를 낳게 했다. 그 외 작품에 나타난 언어의 생기와 유창함은 전적으로 매일 글쓰기 훈련을 한 결과였으나, 또한 흠정역 성경의 깊은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에드워즈는 경건함의 소유자이자 명료한 지성의 소유자로서, 신선하고 계몽적이며 오염되지 않은 살아있는 근원으로부터 아름다움과 거룩한 진리의 영광을 잘 전달할 수 있었다.
14. 성경 연구
"나는 성경에 정통하는 것이 내게 큰 이익이 될 것임을 안다. "
그의 ‘결의'(예일 컬렉션 참조)에는 매 페이지마다 젊은 이상주의자이며 열정적인 순례자의 자기 표출이 나타난다. 대부분은 그가 20살이 되기 전에 쓰여진 것인데, 원본은 없어졌지만 다행히 Dwight에 의해 편집된 것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cf. op. cit. , Life of Jonathan Edwards, P. 76). 거기엔 70개의 결심문가 담겨 있고, 그 중 하나는 청교도 지성의 특징이 되어 왔다. 에드워즈의 경우, 몇몇 결심문은 그 시대의 상투적인 문구들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나 목회 준비를 위한 기간인 1722-23년 동안에 예일에서 마지막으로 작성된 것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 분명히 에드워즈는 성경을 삶과 연구의 중심에 두었다. 우리는 예일 컬렉션에 있는 그가 손수 베껴 쓴 「lnterleaved English Bible」을 연구하고 살펴보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이 성경은 4장 앞서 언급된 ‘성경에 관한 기록’ 시리즈 중 마지막 부분에 해당한다. 앞 페이지 제목은 성경에 대한 기타 관찰 이고, 그 성경은 손수 쓴 것이며 가죽으로 제본되어 있다. 크기는 세로가 9와 1/4인치이고 가로가 7인치이다. 페이지는 위에서 아래까지 중앙의 선으로 이등분되어 있고, 성경의 실제 본문은 각 페이지마다 위쪽에 가로 3과 1/4인치, 세로 5와 3/4인치의 공간을 차지하며, 각 페이지의 3/4은 메모를 위해 여백으로 남겨두었다.
에드워즈 소유의 성경에 기록된 자세한 연구내용들은 신학적 해석을 위한 착상과 주석적인 성경의 메모들로 가득하다. 여기 간략한 교리적, 실제적, 강해적 기록이 있다. Grosart는 1805년 이것으로부터 120페이지에 해당하는 하나의 책을 만들었다. 하루 종일 연구하며 보낸 그의 고백이 그 어떤 책보다 성경에서 빛을 얻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의 '결심문' 중 28번을 읽어보자. “성경을 꾸준히 계속해서 자주 연구하기로 결심하였더니 내가 성경의 지식 속에서 자라가고 있음을 분명하게 감지하게 되었다."
에드워즈의 훈련 가운데 묵상의 시간을 통하여 그 열매의 노트들이 오래전부터 차곡차곡 쌓여 왔다 「성경에 대한 메모」로 이름 붙여진 4절판의 책 3권은 그의 훈련 내용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예로서 예일대학 에드워즈 저서 안에 보존되어있다. 성경 연구에 대한 재미있는 언급이 1723년 8월 28일 그의 일기에 나타난다. 다른 공부로 인해 녹초가 되면 그는 성경을 펼쳤다. "내가 읽을 만한 책을 찾을 때, 읽을 만한 아주 좋은 책이 없을 때에는, 그저 그런 책을 읽는 데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으며, 성경을 읽는다든지, 내 결의를 이행하는 것으로, 혹은 성경 안의 예표에 관해서나 다른 것에 관해 글을 쓰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에드워즈가 깊고 심오한 성경 지식이 있었다는 증거는 충분하다. 그리고 그의 스타일이 말해주는 대로, 그는 1611년판 성경에 큰 영향을 받았다. 성경뿐 아니라 논문도 마찬가지로 영적인 언급과 이미지로 가득하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그의 믿음은 그의 지식이 성경에 근거하였음을 확인시켜준다. 성경을 보는 그의 견해는 ‘거룩한 진리에 대한 철저한 지식의 중요성과 유익'이라는 설교에 언급되어 있다(Works.IV.op.cit.p.ll). “여러분 모두가 영적 지식의 보물창고를 각각 소유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의 손에 성경을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보물을 조금만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성경에서 여러분에게 많은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할 수 있는 대로, 그분이 여러분께 하시는 말씀을 알아듣고자 애쓰십시오. 하나님께선 여러분을 모두 깨달을 수 있는 창조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고귀한 능력이나 이해력이 잠자고 있게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에드워즈는 그 당시의 신학적 사상의 문제점들과 씨름하였으며, 성경으로부터 그리고 이성을 가지고 분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의 시각은 분명했고 또한 그는 열심도 있었다. 그는 폭넓게 독서하고 깊이 사고함으로써 잘 준비된 지성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누리는 최고의 영광이었다.
「Interleaved Bible」에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훈련에 대해 많은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 성경의 여백에 적은 아래의 메모를 주시해보자. 신명기 32:35, "보수는 내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 때에 갚으리로다. 그들의 환난의 날이 가까우니 당할 그 일이 속히 임하리로다." 이 텍스트의 반대쪽에 있는 메모는, 악인에 대하여 내리는 하나님의 징벌과 복수에 관한 것이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들' 이라는 연속설교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노트가 그 모판이 된 것은 아닐까? 그것은 설교 준비시 하던 습관이다. 고전 13:8 "사랑은 언제까지든 떨어지지 아니하나." 에드워즈의 말을 들어보자. ’이것에 관한 설교를 참조할 것 교리적인 부분과 맨 처음 추론을 철저하게 살펴볼 것. 또한 뒤의 세 구절에 관해서는 노트 305번을 볼 것.‘ 고전 13:12에 나오는 “희미한 유리"를 '거울-이해하기 어려운, 어두운 말’로 해석하였다. 시 23:6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는 구절에 대해서는 ”하인이나 또는 잠시 동안 초대받은 손님으로서가 아니라('영원히'에 주목) 가족의 일원인 양자로서 거함을 의미한다”라고 해석했다. 레 23:34-36, 초막절. “벧포드 「그의 스승 중 하나, cf., Book List" ch.Ⅶ also 「카탈로그」, 예일 컬렉션」는 그리스도께서 초막절에 태어나심이 개연성 있는 사건임을 주장하였다. 예표들에 관한 경우에서도 역시 같은 주장을 펼침" 욥. 욥기서. 벧포드의 성경 연대기 (pp.365,366)에서 인용함. ”욥이 살았던 곳은 이두메아이다. 욥기서의 기록자에 관하여, 벧포드는 그 문체가 모세오경의 것과 같지 않기 때문에 원래 욥기서는 아라비아에 살던 사람에 의해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앞의 이유 때문에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는 견해라고 생각한다. 주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욥기의 구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만일 ‥‥엘리후 같은 사람이 없다고 생각된다면, 70인역을 참조할 것." 눅 15:15, "돼지 치는 것", "만일 탕자가 유대인이라고 고려해 볼 때, 이 동물에 대해 느끼는 그 민족의 혐오감이 탕자로 하여금 그 일을 특히나 싫어하게 만들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 주님이 가장 천하고 굴욕적인 상태까지 낮아지신 자신을 나타내고자 이러한 환경을 택하셨는지도 모른다(Doddridge 참조)." 요 16:8, "그리고 그가‥‥심판하시리라." 에드워즈는 죄, 정직, 심판에 대해 토론하고 나서, '신약성경에도 나오고 헬라어 성구사전에도 나타나는 것처럼, 심판이란 말은 재판할 수 있는 권한의 실행이란, 가장 흔한 뜻을 의미하고 있다." 잠 30:27, "일꾼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에드워즈는 그 즈음 나타난 메뚜기와 관련하여 8월 23일 트랜실바니아에서 온 편지와 1748년 1월 4일자 이브닝 포스트에서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옮겨 적었다. "그 다음 날 메뚜기떼가 나뭇잎이며 풀을 2시간 반 동안 단번에 먹어치웠다." 같은 기사가 1748년 1월 26일 보스톤 가제트에 실렸다.
이러한 예를 통해, 우리는 에드워즈가 습관적으로 매일 성경을 공부하고 기록하고 규칙적으로 논평했음을 알게 된다. 성경의 핵심을 간파하여 묘사하는데 주저하지 않은 에드워즈의 특별한 성경 읽기는, 주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에 대한 광범위한 관심을 잘 드러내준다. 그는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친숙했으며 그 언어들을 사용했지만, 그가 그러한 지식을 자랑했다는 내용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가 없다.
로마서를 보면, 가장 통찰력 있는 항목을 볼 수 있다. 로마서 1장에는 다음과 같은 명쾌한 주석이 있다. "이 서신과 요한복음은 가장 중요하다‥‥. 풀 추기경의 충고에 의하면, 로마서 12장부터 읽기 시작해서 끝까지 다 읽고 또한 거기에 나오는 금욕과 화답의 원리들을 실천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가장 어려운 칭의와 예정에 관한 로마서의 다른 부분들을 읽으라고 했다." 좀 더 독특한 인용이라면, 로마서를 네 번째 복음서와 함께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밖에 그는 “성경을 여는 열쇠”를 사용함에 대해 이야기하였고, 그의 ,<카달로그>에는 “성경 읽기에 관하여 퍼킨스 박사"라는 표제어가 있다. 월리엄 퍼킨스의 「해석학」책을참고해 보면 ”성경 해석에 관하여"라는 장이 있는데(Pens Works. op. cit., ch. Ⅳ) 그는 거기에서 설교준비와 성경 연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설교를 준비함에 있어서 개인적인 성경연구는 부지런히 해야한다(cf.딤전 4:13, 벧전 1:10, 단 9:2). 신성에 관해 연구할 때는 이 충고를 받아들여라. 첫째, 두 가지 특성을 정의하고 구분하며 설명하여 묘사하는 신성의 내용을 마을과 기억에 부지런히 새겨둘 것. 둘째, 문법적이고 수사학적이며 논리적인 분석방법을 이용하고 남은 나머지 기술을 동원하여 성경읽기에 착수할 것 : 먼저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를 읽고, 그 후 요한복음 (사실 신약성경의 열쇠가 되는)을 읽고, 그 다음에 신약의 나머지 성경을 읽으면 보다 쉽게 읽을 수 있다. 이 모두를 끝낸 후 구약 성경의 교리적인 책들을 연구하는데, 특히 시편, 그 다음에 예언서 특히 이사야를 연구하라. 마지막으로 역사적이지만 중요한 창세기를 읽으라. 왜냐하면 이들 외에 우리가 더 많이 증거할 수 있는 구약성경의 책은 없기 때문이다. 셋째로, 정통적인 글에서 도움을 얻어야 한다. 이 때 최근의 것은 물론이고 고대 교회의 것 역시 살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로마서 1장 서두에서 에드워즈는 퍼킨스의 텍스트북을 사용하였다. 그는 개인적으로 부지런히 연구하라는 제안을 따랐을 뿐 아니라, 성경을 읽고 여백에 그의 의견과 청교도 스승으로부터 얻은 이 고전적 조언을 첨가하였다.
만일 우리가 에드워즈의 설교 자료를 얻고자 한다면, <Interleaved Bible>의 메모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의 설교들로부터, 그가 성경의 어느 부분에 가장 관심을 두었던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일 컬렉션에 수록된 그의 설교들을 볼 때, 인쇄된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이 명백하다. 첫째, 그는 성경을 연구하는 학생이었고 둘째, 그는 주로 시가식에서 본문을 뽑아 설교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재미있는 습관이기도 하거니와 아름다움과 문체를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성경의 모든 책에서 에드워즈는 설교 본문과 주제를 얻어냈지만, 다른 설교자들처럼 그도 특정한 성서에 더 많은 시간을 들였다. 풍부한 상상력과 아름다움을 사랑함으로 그는 영적 정원의 시적인 향기 속에 빠져들 수 있었다. 보다 시적인 성서를 적어도 그의 출판된 설교에서 뽑는다면,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그리고 복음서가 두드러진다. 분명한 사실은 그가 '열렬한 청교도라기보다는(cf. H. B. Parkes, Jonathan Edward The Fiery Puritan), 물이 흐르는 푸른 초장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위의 목록에다 특별히 요한복음, 요한서신, 요한계시록 등을 덧붙일 수 있다. 이는 에드워즈가 신비적 영혼의 소유자였으며 그러한 책들로부터 그가 많은 도움을 얻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출판되어 검토한 69편의 설교에서 에드워즈가 사용한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먼저 구약에서는 창세기2, 출애굽기1, 신명기1, 룻기1, 열왕기상1, 욥기1, 시편 7, 잠언1, 이사야2, 에스겔4, 신약에서는, 마태복음3, 누가복음3, 요한복음5, 사도행전2, 로마서4, 고린도전서19, 고린도후서2, 에베소서2, 데살로니가전서1, 히브리서3, 야고보서1, 요한1서1, 요한계시록2 등이었다. 출판되지 않은 텍스트와 설교를 비교해 볼 때, 역시 시적이며 신비적인 성서가 비슷한 비율의 높은 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부록 참조).
설교의 이미지는 성경의 언어와 은유에 그 근간을 두고 있다. 위협하는 설교를 제외할 때, 그외의 다른 설교에는 ‘아름다운' 말로 가득차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목회할 때 했던 설교는 논쟁을 즐기는 어투가 아니었고, 다음과 같은 단어가 반복되어 사용되었다. '유쾌한‘, '기쁜, '밝은’, '사랑스런', ‘달콤한', '훌륭한’ 등. '하나님과 초자연의 빛' 이란설교(Works,Ⅳ,op.cit.,p.273)에서 우리는 아래와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빛은 유일하고 전 우주적 성스러움 속에 자신의 열매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주는 평화‘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이 평화는 최상의 아름다움이기에, 세상 사람들이 향유하는 평화와는 전혀 다릅니다. 그들의 이해와 개념을 초월합니다. 이 평화는 감미롭습니다. 완전히 이성에 합치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달콤합니다. 왜냐하면 성스럽고 신성한 본질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 자체가 사람들이 누릴 행복인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누리는 평화의 근원은 영원하며, 시간이 흘러도 어떤 변화가 생겨도 파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기쁨, 이것이 바로 영생으로 솟구쳐 흐르는 생수의 근원인 것입니다."
상대편을 설득시키거나 절박한 운명에 빠진 죄인들에게 경고할 때를 제외하면, 그는 성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넘처 흐르는 아름다운 생각이 큰 물결을 이루었다. 그는 그의 시적 소질을 계발하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천국의 영광을 많이 비유했다. "하나님께서 지표면에 흩뿌려 놓으신 나무와 꽃과 식물들, 그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사람의 몸이 지닌 골격의 아름다움, 특히 신체의 완전함은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달과 별의 아름다움은 경이로우며, 저 높은 천국의 아름다움은 탁월하기까지 하고, 빛 가운데 천사의 탁월함은 매우 영광스럽지만, 그러나 창조주의 보다 존귀한 영광과 아름다움에 비교해보면 그것은 모두 흉하고 어두운 것일 뿐입니다."(시 89:6을 가지고 설교한 초기의 설교문에서)
1743년 1월 22일에 에드워즈는 그의 일기를 이렇게 시작했다. “나는 말씀을 묵상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거나, 혹은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거나 아니면 거룩한 주제에 대해 연구하는 중이면, 보통은, 저녁 식사 때문에 하던 일을 중단하는 게 아니라, 차라리 식사를 건너뛰고 하던 것을 계속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위의 구절에서 비사교적인 모습과 가정적이지 못한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성경을 연구하는 학생의 열의라는 측면에서 평가되어 마땅하다. 기록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그는 그의 가족에게 전혀 소홀하지 않았다! 그가 썩어질 육신의 떡을 무시하는 듯 보이는 것은, 썩지 않을 영생의 떡을 추구하는 또 다른 모습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1735년 6월 11일 일기의 서두를 보자. ”특별한 주제에 대한 묵상을 위해서 시간을 따로 떼어놓을 것‥‥ 성경에서 약속된 것 중에서," 하나의 연구방향에 그의 힘을 쏟아붓는 모습이 연상된다.
성경읽기와 묵상은 설교자를 영적으로 계발시키는 데 필수적이다. 에드워즈는 성경 주석자가 되려고 하였었다. 우리는 그가 성경 연구에 그토록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에 그리 놀라지 않는다. 그는 초년부터 시작한 성경연구의 열매를 그의 전 목회기간을 통해 거두어들였다. 성경의 사람으로서 그는 지식의 모든 부분을 파악했고, 그 결과 그가 살던 시대에서 효과적으로 영생을 설교할 수 있었다.
성경을 사용함에 있어서 에드워즈는 평범히 청교도의 관습을 따랐다. 성경 말씀은 설교자가 갖는 최대의 관심사였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교부에게서나 고전 작가들의 지식을 인용하거나 사용할 여지가 없었다. 그 지식은 설교자의 준비 기간에 사용될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에드워즈가 성경에 있는 구원의 말씀에서 예증을 들었고, 말씀 속에 자신을 제한했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은 신약성경만큼이나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그런 것과는 달리, 에드워즈는 그의 성도들을 대신하여 폭넓은 성경지식을 체득화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언급을 통하여 성도들은 기쁨과 깨우침을 얻었다.
구약성경에는 보화와 같은 예화가 나와 있다. 그것은 교부들이 알레고리로 설명하거나 기존의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 예표화하는것이 아니었다. 원자료로서 신약성경을 사용할 때, 그는 예화와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구약성경을 이용하였다. 그는 또한 시가서를 많이 사용하여 기독교인으로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원리를 많이 얻어냈다.
그 시대의 실제적 믿음은 모든 성경을 동등한 가치와 동등한 권위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에드워즈로 하여금 광범위한 관심과 적용 거리였던 기독론을 해석하고 전달할 수 있게 하였다. 그 당시에는 점진적인 계시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찌면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을 읽음에 있어서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 사실 에드워즈는 사도들의 예를 따랐을 뿐인데, 사도들은 구약을 오실 메시아라는 맥락에서 소망의 보고로 사용하였다. 구악성경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종말이 도래할 때를 위한 훈계와 깨우침으로 쓰였다. 그러므로 에드워즈는 신약성경뿐 아니라 구약성경에 대해서도 잘 준비된 학생이요 해석자였다. 그는 참으로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15. 노트 정리하기
에드워즈에게는 심신이 피로할 때 작업을 회복하기 위한 적절한 자극이 필요했다. 그때 그는 자신이 쓴 노트
를 읽음으로 힘을 얻곤 했다. 에드워즈는 그가 생각하고 기록한 모든 것들이 설교의 궁극적 목적에 도움이 되도록 노트를 만들었다. 그는 독서의 결과로 얻은 열매들을 조심스레 모았고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
「비망록」(The Commonplace Book, 예일 컬렉션 참조)은 그의 서재에 있는 책 가운데 정보를 얻기에 편리한 자료였다. 그 자료를 사용함에 있어서 그는 개혁가라기보다는 오히려 모범적인 관습을 따르는 사람으로 보였다.
미첼에 의하면(op. cit., p. 83), 청교도 설교자들은 여러 작가들의 책에서 한 부분을 발췌하거나 개인적인 생각을 모아두기 위해 비망록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18세기초 마더 코튼(Cotton Mather)도 이런 종류의 노트를 만들어 간직하라고 충고한 적이 있다. 마더보다 더 일찍이 윌리엄 퍼킨스가 그의 책에서 설교에 관하여(op. cit., p. 651) 이미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연구를 하다보면 주목할 만한 필요와 가치가 있는 대목에 접하게 된다. 그런 것들을 여러분의 일람표나 비망록에 기록해두어서, 오래 된 것이든 새것이든 금방 찾아볼 수 있게 해야 한다. 지금 비망록의 틀짜기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데, 그것과 관련하여 다음의 몇 가지 충고를 주목해보라. 1. 하나님에 관한 중요한 내용들은 기꺼이 모아두어라. 2. 당신의 비망록에서 주요한 페이지마다 가로 세로의 칸을 여러 개로 만들어두라. 모든 페이지의 상단에 그 페이지의 제목, 요점 등을 기록하고 반대쪽은 비워두어서 새로운 자료가 들어갈 수 있게 하라. 3. 읽은 책마다 다 기록할 필요는 없고, 단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거나 희귀한 책일 경우만 기록해두라. 또한 여러분의 비망록에 저자의 말을 그대로 기록해둘 필요도 없으며, 그저 간단하게 이야기나 사물들의 요점을 적어놓아서, 당신이 그 내용을 사용하려고 할 때, 저자의 주장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으면 된다. 또한 저자 자신의 생각을 이해함으로써 저자가 다루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여, 그것을 비망록에 적으라. 4. 비망록에 기록되었다 하더라도, 어떤 것들은 매우 자주 그 출처를 파악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기 때문에, 비망록 안에는 알파벳 목록표가 있어야만 한다. 5. 항상 당신의 기록을 과도하게 신뢰하지는 말라. 그 기록을 기억 속에 저장하지 않는다면, 기록된 것만으로는 불충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카탈로그」(Catalogue)와 「간지 성경」(Interleaved Bible)에 메모한 주석을 보면 에드워즈가 퍼킨스의 「작품집」(Works)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사색이나 관찰, 독서에서 발췌한 것 등을 그의 노트, 다시 말하면 「비망록」에 적어둔다. 그가 얼마나 「비망록」에 의존했는가는 그가 그것을 사용한 빈도수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연구를 할 때나 외출할 때나 언제든지 그는 설교에 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모두 기록하는 습관을 가졌다. 그 조그마한 노트는(세로 8, 가로 6인치) 에드워즈의 내면세계 계발의 일부분이었다. 다양한 주제에 관해 기록한 노트들이 그의 전생애에 걸쳐 사용되었다. 어려서 시작한 노트 가운데 “정신에 관하여”, “자연과학과 철학에 관하여”, “성경에 관하여” 그리고 “단편들”이라고 제목이 붙은 것을 볼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설교 요지를 시작할 때와 아이디어를 모을 때 그에게 도움을 주었다.
이와 같은 그의 설교 습관이 더욱 계발된 것은, 여러 주제의 노트들, 그 중에서도 특히 “성경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노트를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이 비망록은 영적 통찰력과 건전한 사상의 보고였다. 맨 처음 학장 자리를 거절하기 위해 프린스턴 대학의 이사들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그는 자신이 늘 손에 펜을 들고 기록하곤 했던 면학적인 습관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Works).
예일과 앤도버(Andover)에서 확인된 성경에 관한 노트는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 첫번째는 ‘성경의 조화’(Andover Collection 참조)에 대해 다루었으며 아직 출판되지 않았다. 두번째 부분은 ‘메시야의 모형’에 대해 다루었으며 Dwight에 의해 출판된 에드워즈의 「작품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번째는 ‘구약 성경(시편까지)과 신약 성경에 나타나 있는 특성, 성령, 계시 교리들’(예일 컬렉션 참조)에 관해 다루고 있으며 아직 출판되지 않았다. 사실 에드워즈는 출판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개인적인 연구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라고 고백한다. 이 밖에도 예일 컬렉션에는(500여 개에 달하는) “성경에 관하여”라는 기록도 수록되어 있다.
“단편들”이라는 노트들이 출판된 경로를 살펴보면 그것이 각기 다른 시대에 여러 친구들에 의해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보고 놀라게 된다. 그는 1724년 예일에서부터 이러한 설교를 위한 “단편들”이라는 노트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몇몇 노트가 인쇄되긴 했지만 이 부지런한 사람이 쓴 양에 비하면 그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1793년 스코틀랜드에 사는 친구 얼스킨(Erskine)이 「신학의 주요 주제에 관한 단편적 관찰」(Miscellaneous Observations on Important Theological Subjects)이라는 제목으로 에딘버러에서 발췌문을 출간하였다. 1796년에 같은 종류의 책이 또 하나 출간되었는데, 제목은 「중요한 신학적 논쟁에 관한 논평」(Remarks on Important Theological Controversies)이었다. 그 후에 스코틀랜드 출신의 또 다른 에드워즈 추종자 그로썰트(Grosart)가, 1865년 에드워즈의 아들인 조나단 주니어의 허락을 받아 「은혜에 관한 논고」(Treatise on Grace)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은 1752년 경 에드워즈에 의해 쓰여진 것이며, 성령에 대한 교리를 주제로 쓴 35쪽의 논문으로서 그의 수작 가운데 하나이다. 1880년에는 ‘그리스도의 탁월성’에 대해 다룬 책 「성경에 나타난 구속의 언약과 삼위일체의 구원계획에 관한 고찰」(Observation Concerning the Scripture Oeconomy of the Trinity and Covenant of Redemption)이 출판되었다. 이 논문은 풍성한 결실의 시기에 나온 것으로서, 소박하고도 화려한 빛을 내는 에드워즈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만일 그 책이 노년의 성숙한 시기에 쓰여졌다면, 장엄하고도 고양된 상상력이 풍부한 영적인 이상주의 시기, 즉 ‘주님을 향한’ 열렬한 구애와 사랑의 시기를 반영했을 것이다. 1903년에 「삼위일체에 대한 소고」(Essay on the Trinity)가 출간되었으며, 그 책에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정통교리와 심판에 대한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최근에는, 하버드의 페리 밀러 교수에 의해 두 개의 발췌문이 책으로 나왔다. 「조나단 에드워즈와 그의 심성」(Jonathan Edwards and the Sense of the Heart, 1948), 「신령한 것의 형상과 영상」(Images or Shadows of Divine Things) 등이 그것이다.
에딘버러 판들은 거의 합해서 500쪽에 달하지만, 이는 에드워즈에 의해 상세하게 기록된 1400쪽이 넘는 2절판의 책 전체와 비교해볼 때 단편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기록된 양으로도 그의 설교 습관을 알아볼 수 있다. 한편 그의 설교가 모두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예일 컬렉션과 앤도버 컬렉션의 약 절반 가량이 설교 노트인데, 어떤 것들은 개요만 잡혀 있고, 또 다른 것들은 속기로 된 것들이다. 그의 설교는 묵상하면서 하나씩 천천히 써내려간 것들이었다. 첨가하거나 수정하기 위해서 여러 다양한 항목들 사이사이에 여백을 남겨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에드워즈에게서 발견되는 풍부한 언어구사와 관찰의 폭은 바로 노트 만들기 방법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들 노트 기록 방법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바람과 생각에 관한 단편 자료들을 다양한 책과 논문으로 엮어냈고, 그 중에 많은 것들이 앞서 말한 대로 그의 사후에 빛을 보게 되었다. 노트로 이루어진 이 귀중한 책 「비망록」은, 만일 에드워즈가 좀더 오래 살았더라면 당시의 교회에 조직적이고도 포괄적인 신학을 제시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유추하게 한다. 노트가 수록된 이 「비망록」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의 감각적인 말씀을 추종했던 회중에게 기쁨을 가져다주기 위해, 많은 꽃송이들을 키웠던 모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에드워즈를 전형적인 사상가로 꼽으려 한다면, 다른 이들의 사상에 자극받곤 했던 그의 습관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에드워즈의 노트 만들기 습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다른 이들의 지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설교자는 없을 것이다.
16. 신학적 사고
“회심한 이후로, 나는 해결해야 할 신학적 원리가 생각날 때마다, 그 즉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실행에 옮기곤 했다.”
에드워즈는 성경지식과 철저한 연구를 통해 설교할 교리를 얻어냈다. 그는 논리적 사고방식으로 인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수 있었고, 그의 문예적 기술 역시 청교도 지성을 향해 효과적으로 진리를 전달하게 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설교의 근간을 제공한 것은 다름 아닌 신학적 신념이었다.
처음에 얼핏 보면, 그가 주로 어떤 효과를 얻기 위해 내적인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설교를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메시지를 면밀히 검토해보면 그가 단순한 감성 이상의 것을 소유한 사람임이 밝히 드러난다. 그는 회중을 이해시키기 위해 의심나는 부분을 풀어주고, 그들의 의지를 일깨우는 길을 모색했다. 그의 설교에서 표면적으로 아름답게 꾸민 감동적인 열변은 찾아볼 수 없지만, 성실한 학습태도와 부지런한 지식의 추구, 그리고 힘을 겸비한 지성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에드워즈는 설교시 따뜻하고 보다 더 감정에 호소하는표현을 살려내긴 했으나, 그것은 신학지식과 신념의 결합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신학에 능통했다는 사실은 그의 학습훈련과 글쓰기가 보여주는 바이다. 그는 예일대학에서 월리암 에임스(William Ames)가 쓴 <신학의 정수>(Medulla Sacrae Theotogiae), <신학의 논제와 그 사례>(The Theses and Cases) 등과 같은 책으로 훈련을 받았다. 그 당시의 청교도 서적들을 통하여 성경 연구를 계속함으로써 자신의 교리 체계를 완성했다. 그는 존 칼빈이 쓴 <기독교 강요>를 항상 그의 곁에 두었다.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칼빈에 대하여 열광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칼빈을 매우 존경했다(Works, I, op. cit.). 십스(Sibbes), 프레스톤(Preston), 맨턴(Manton), 후커(Hooker), 쉐퍼드(Shepard), 튜레틴(Turrettin), 매스트리히트(Mastricht) 등의 작품이 특별히 그의 신념을 형성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신학적 과제를 ‘해결’ 하려는 시도가 에드워즈로 하여금 꾸준히 글을 쓰게 만들었고, 그 연구는 결국 설교본문의 주해에 사용되었다. 그가 신뢰하는 바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의심하는자는 하나도 없었다. ‘신령한 진리를 철저하게 아는 것의 유익과 그 중요성’(Works, IV, op. cit.,PP.1-3)이라는 설교에서,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회중에게 말하였다. “신학이라 함은, 기독교 전반에 걸친 진리와 원리 모두를 포괄하는 교리학을 의미합니다. 신학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는 삶의 원리(교리)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신학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그의 회중들이 신학을 잘 이해하도록 격려했다. 그의 신학적 통찰력과 견해는 모든 곳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의 생애 후기에는 좀더 발전된 논문들이 출간되는데, 거기에 담긴 철학적인 고찰들은 그의 설교에서 추출된 것들이다. 따라서 <자유의지>(The Freedom of the will), <참된 미덕의 본질>(The Nature of True Virtue)과 그 외의 여러 논문의 서문은, 그의 설교가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신학은 그가 크게 외치며 설교하고 생각하면서 형성되었다.
그가 신학에 관해 내린 정의는 중요하다. ‘종교란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께 끓어두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이 말을 “하나님을 향하는 삶”(living to God)이라고 해석했으며, 그러한 인생은 신앙에 결부된 엄청난 의무를 진 인생을 의미했다. 이러한 연결에 있어서, 그는 그리스도의 중보에 강조점을 두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였다. 기독교 외에는 그 어떤 종교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를 맺게 해주지 못한다. 에드워즈는 기독론에서 신앙을 해석하기를, 마음뿐 아니라 이성까지도 충성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외 설교 가운데 몇몇은 뉴잉글랜드에 몰래 들어온 알미니안주의에 반대한 것이다. 그들 설교는 바른 교리를 지켜야 할 필요가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칼빈주의적 해석에 의한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인간의 신뢰로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 이라는 설교(IV.,P.169)에서, 그가 항상 강조하였던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아무리 보아도 인간의 도덕적 주도권은 설 자리가 없는 듯하다. 그리고 그는 ‘신령하고도 초자연적인 빛’(Works, IV, ibid., P.438)이라는 설교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이라는 진리를 다음과 같이 멋지게 ‘성경적이며 이성적인 교리’로서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구속자를 주셨으며, 그분이 대가를 지불하심으써 우리가 선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구속자가 되시며 그분만이 구원을 얻기 위한 대가를 지불하신 분이십니다. 또한 선을 사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며, 그분을 통해 주어진 것이며, 그분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1장 36절에서 이르기를,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로 돌아감이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 안에 있다는 표현은 고린도전서 8장 6절과 동일합니다.”(Works, IV, op.cit., P.170).
에드워즈는 사역 초기부터 교리 연구에 빠져 있었다. 그는 회심 후에 기록한 <사적인 이야기>(Works, I,op.cit.,P.15)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이후로, 나는 신령한 것에 대하여 점점 더 많을 것을 깨닫게 되었다‥‥나는 거의 모든 시간을 신령한 것에 대해 생각하며 보냈다‥‥나의 마음은 천국에 대한 묵상에 푹 잠겼다. 그리고 나서 거룩함이라는 것이 내게 다가왔고, 나는 그 거룩함에 대해 묵상한 것을 적어보았다‥‥내가 기록했던 바와 같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영혼은 이런 모습이다.”
이것은 에드워즈가 자신을 돌아보며 기록한 노트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는 구절이다. 에드워즈의 신학적 지식은 깊고 풍부했다. 그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살았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무엇인지 밝혀주고, 믿음에서 나오는 힘과 절제를 도덕적 삶에 적용하도록 가르치는 것이었다. 교리와 의무, 신앙과 행동이 서로 묶여 하나가 되었다.
신학적 사상가로서 에드워즈의 위치는 A.V.G 알렌(op. cit.,P.162,Jonathan Edwards)의 말에서도 명백하게 입증된다. “그러므로 실제적으로 에드워즈는 대각성의 원조이며, 감독자이며, 큰 공헌을 한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도 그는 칼빈주의를 부흥시킨 가장 위대한 신학자가 되었다.”
이러한 말에 비추어서, 우리는 그의 설교에 나타나는 어떤 강조점을 찾아낼 수 있다. 그는 목양하는 설교자로서. 사랑이야말로 기독교인의 은혜와 덕목의 정수라고 믿었고, 또 그렇게 가르쳤다. 다만 교회 생활의 상태가 (너무나 말씀과 거리가 먼 나머지) 주님의 두려운 모습을 설교하게끔 만든다고 느꼈다. 그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회중의 위선적이며 불신앙적인 행위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성직(聖職)이란 영적 생활과 도덕적 행동이라는 기준으로 점검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설교는 신학적이었다. 수필 같은 혹은 그럴 듯한 권면의 설교는 찾아 볼 수 없다. 그의 설교가 ‘삶의 정황’ 으로 시작되지 않을 때는, 삶의 정황은 (설교 내용 가운데서) 교리의 빛에 의하여 아주 실제적으로 다루어졌다. 에드워즈는 오로지 질긴 고기와 같은 말씀을 회중에게 전했던 것이다. 설교문이 특별히 좀더 형식적인 강좌와 더 무게 있는 논문의 기초가 되곤 했지만, 회중에게 전달될 때에는 어디까지나 삶을 위한 교리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의 속죄의 교리에 대해 살펴보면. 안셀무스나 칼빈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에드워즈의 생각으론, 죄인은 벌을 받아 마땅하기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죄를 심판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심을 나타낸다. 바꿔 말하면, 이는 곧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죄인을 벌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선 인류의 죄(sins)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시고 고난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선 우리 모두의 허물(iniquities)을 그에게 담당시키셨고, 예수님은 그 모든 짐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선 세상의 죄를 짊어지시고, 자신을 그 죄를 위한 희생제물로 드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범죄(guilty)를 씻었습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이 의롭게 되었고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Works, I, op. cit., pp. 582-617, “Miscellaneous Remarks”).
에드워즈는 죄인들의 범죄에 대하여 죄값을 지불하지 않은 빚이라 여겼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그 빚을 갚아드리고 속죄해 주셨다고 생각했다.
"속죄(satisfaction, 채무 변제의 의미)와 공로(merit)는 비교적 많이 다르지 않다. 그 둘은 값비싼 대가, 즉 헤아릴 수 없는 값어치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단지 갚아야 할 빚이라는 관점에서는 속죄라 부르는 것이며, 그로 인해 얻게 되는 유익이라는 관점에서는 공로라 부를 뿐이다. 그리스도의 값주고 사심에 대하여 이와 같이 설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Works, Ⅲ, op.cit.,0.296, “History of Redemption”).
에드워즈의 이러한 견해는, 십자가를 아버지 히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한 그리스도의 최종요악으로 보게 하였다. 그리스도는 빚을 갚아주었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행복을 주시려고 일종의 자격을 사서 주신 것이다. 에드워즈의 생각은 분명하다. 의롭게 되는 것과 기독교인의 생활이 함께 맞물려 간다.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바로 이러한 진리를 깨달아야만 하는 것이다.
'가장 극악무도한 죄인들을 항한 용서'(Works, Ⅳ, op. cit.,P.424)라는 설교에서 그러한 해석을 되짚어 볼 수 있다. 그의 감동적인 말을 들어보라.
"그리스도의 속죄는 극악무도한 죄를 제거하기에 충분합니다. 적어도 요한일서 1장 17절이 말하는 바와 같습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요.’ 우리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진실하시다면, 자비를 구하며 진정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자들의 모든 죄가 속죄함을 받을 것입니다. 진정,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지어다! 그리고 그들이 죄의 속죄를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결코 의심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모든 죄를 완전히 속죄하시다면, 다시 말해서 이 모든 죄들을 사하기에 충분할 만큼 속죄를 이루셨다면, 이제 올바른 태도로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들의 극악무도한 죄들이 다 용서받을 것이며, 그 어느 것도 예수님의 영광의 거룩한 희생을 거스리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선 자신의 거룩함을 훼손하지 않고도 극악무도한 죄인들을 용서하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거룩하심으로 인해 조그만 죄도 용인하지 않으실 것입니다만, 그것은 오직 죄를 혐오하는 그분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미 죄를 속하셨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은 아무리 죄가 많은 죄인이라 하더라도, 그의 죄를 용인치 않으시면서도 그를 사랑하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그 모든 범죄를 떠맡으심으로써, 그분이 죄를 얼마나 미워했는가를 입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는가를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만일 모든 인류가 영원한 저주를 받았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는가 하는 것은 알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또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부패, 그리고 은혜의 복음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이미 유명한 교리들이었다. 그는 늘 이러한 것들에 관해 글을 썼고, 그것들이 언제나 설교의 핵심이었다. 그 교리들에 대한 강조는 일종의 장애물이 되었는데, 이는 그가 인간의 자유를 배제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에드워즈가 신앙이 살아있을 때의 인간영혼이 지니는 영광을 간과한 것이 아니다. 단지 곤경에 처한 인간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다룸에 있어서는, 인간의 엄청난 죄를 느꼈던 것이다. 그는 섭리를 선포하신 하나님의 주권이 임의적이라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그의 견해는 심각한 오해를 가져올 수도 있었다. 그는 그 교리를 사용하되, 사람들을 천국으로 이끌려고 매질하는 데 이용하지 않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를 극대화하는 데에 사용했다. 그리하여 그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이 계신 천국으로 들어가도록 강권할 수 있었다. 앞서 그의 회심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위엄에 대한 느낌에 압도되었던 것이다.
그의 설교 전체를 통하여 구원의 길이 제시되었다. 은혜의 길이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나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탁월함이 드러났다. 자연인은 성령의 일들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도움 없이는 아무도 구원하시는 사랑이 주는 바 유익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설사 자연인이 회개하고 기도한다 할지라도, 소경으로 태어난 이가 색을 모르듯, 그는 하나님의 참 본성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기독교의 일들이 신령하고도 가장 탁월하다는 것을 느끼는 참된 감각,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구속의 사역, 하나님의 사역과 그 방법에 대한 감각은 바로 복음에 나타나 있다”(Works,Ⅳ,ivid.,p.441).
그의 설교에는 신학적인 교리가 기독교인의 경험의 기초로서 가득 차 있었다. 그 교리 안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그리스도의 영광과 탁월함 그리고 인간 심성의 무력함이 드러나 있다. 에드워즈의 복음 메시지는 세 가지의 중요한 점을 보여주면서, 마치 경종을 울리듯 사람들에게 회개와 믿음을 촉구하고 있다.
“우리는 바로 구속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불가사의한 지혜를 목격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으로 인해 빠지게 된 공허하고 불쌍한 상태, 그의 비천하고 상실되고 멸망한 상태를 변화시켜, 보다 나은 영광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되게 하셨습니다‥‥더욱 더 보편적이고도 명확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들이 겪고 있는 비애와 죄의 깊은 구렁텅이로부터 이끌어내시기를 기뻐하시고, 그를 존귀한 존재로 높이시고 가장 높은 복과 영광의 상태로 이끄시기를 기뻐한다 하실지라도, 우리 피조물에게는 한 점의 영광도 없습니다. 실로 모든 영광은 분명 하나님께만 속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단순히 그리고 완전하게 의지하는 거룩한 의존에 있는 것입니다‥‥그리하여 하나님은 구속의 사역 가운데서 자신을 만유 가운데 만유로서 나타내신 것입니다.”(Works,Ⅳ,ibid.,p.169).
위의 설교에 나오는 바, '하나님께서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할 때 영광을 받으신다'라는 대목은 에드워즈의 신학적 신념이었다.
신학으로서의 그의 설교들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진리의 연장이었다. 그 교리는 곧 그의 모든 신념과 설교의 기초였으며, 에드워즈는 그의 생애 전체를 통해 그 교리를 ‘풀어내고자’ 했다. 에드워즈는 설교하는 신학자(preacher-theologian)였다. 그 신학자는 설교 가운데서, 그 신학자를 만들어낸 열정(heart)을 선포했던 것이다.
17. 교리적 설교
"나는 죄인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이 드러나는 설교보다 더 은혜로운 설교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
에드워즈는 자신의 신학사상을 풀어나갈 때, 하나님의 주권을 특별히 강조했다. 이러한 진리는 감히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선포되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신정정부와 청교도의 법 개념에 근거한 식민지 통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므로 이 진리는 자명하고도 확실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나님의 주권은 에드워즈의 설교에서 지배적인 특징이 되었다. 청교도의 신정국가론은 성경적인 공화국을 건설하는 데에는 거의 실패했지만, 에드워즈가 목회했던 교회의 성도들은 여전히 그들의 젊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식하였다. 그 당시는 삶이 도덕적으로 타락해가고 영적으로 능력이 없는 신앙고백만 무성한 때였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계속해서 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양심을 사로잡았다. 에드워즈는 이 교리를 그의 성도들에게 생동감있게 전했기 때문에 그의 교리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동시에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식했다. 로마서 9장 18절을 본문으로 한, '하나님의 주권"이란 설교에서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의미하는 것은․ .말하자면,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에 조금도 손상을 입지 않고, 사람의 아들들 누구에게든지 구원을 주실 수도 있고, 그것을 거절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Works, IV, op. cit., p.550). 이는 인간의 영원한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었다. 하나님이 전적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방법을 고안하시고 실행하실 뿐만 아니라, 그것도 전적으로 그분의 단순한 의지와 기쁨으로 하신다는 것이다. 설교를 적용함에 있어서도 에드워즈는 이 교리를 사용하여, 구원을 얻고자 하는 이들을 두개의 상반되는 극단 즉, 섣부른 가정이나 절망에 빠지지 않게 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차고 넘치지만, 그는 주권자이십니다. 그분이 기뻐하시는 대로 구원 여부를 결정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이 욕되게 한 하나님의 영광에 털끝만큼도 해를 입지 않고서 당신에게 은혜를 내릴 수 있으십니다. 당신이 어떠한 죄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그분은 당신을 구원함으로서 스스로 큰 영광을 얻으실 것입니다."(Works,1V,op.cit.,p.560)
그 교리가 선포되었을 때, 놀라운 결과가 있었다. 그는 <놀라운 회심 이야기>(Narrative of Surprising Conversion)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 인가를 상세히 말했다.
'나는 로마서 3장 19절 말씀 중 일부, 즉 '이는 모든 입을 막고' 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을 거절하시고 유기하시는 것이 영원히 합당하다는 것을 증거하고자 했으며, 내가 어떤 방식으로 청중들에게 전하든지 간에, 즉각적으로 구원의 열매가 맺히는 것을 많이 보았다"(Works, Ill, ibid.., P.245). 이러한 그의 설교는, 모든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라는 범위 안에 살고 있다는 확신에서 온 것이었다.
위와 같은 18세기의 설교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상황을 살펴보아야만 한다. 그 당시 지옥에 대한 신념은 오늘날 중력의 법칙을 믿는 믿음만큼이나 견고하고 확실했다. 설교자에게 그것은 마치 엄청난 것을 들어올릴 수 있는 지렛대와도 같다. 에드워즈가 히나님의 주권에 대해 설교했을 때도, 지옥에 대한 이러한 신념이 강력한 배경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러한 마음의 자세로 에드워즈에게 영향을 받았다. 에드워즈는 논리적 설득력과 생생하고 번뜩이는 상상력을 하나로 묶었고, 그의 회심이라는 강력한 경험에 기초한 종교적 감성으로 그것에 불을 밝혔다. 지적인 통찰력, 감성적인 열정, 경험적인 신앙, 이 모든 것들이 함께 어울려 그를 강력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주제는, 로마서 9장 18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흘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게 하시느니라"는 말씀을 본문으로 한 설교에서 더욱 발전되었다. 그가 지적한대로, 하나님은 각기 다르고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을 다루시며, 그렇게 사람들을 대하시는 근거는 바로 그분의 주권적 의지와 기쁘신 뜻이다. 이 교리를 완전한 문장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인류의 영원한 구원을 통하여 그분의 주권을 실행하신다."(Works,IV, op. cit., p.550)
“하나님이 나라 전체를 키질하셔서 선택된 알곡만을 이 뉴잉글랜드의 광야로 보내셨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남편 되심과 섭리의 기본요소로 받아들여졌다. 에드워즈를 교회에서 쫓아낸 회중은, 그의 교리를 거절하는 것보다 그것을 단순히 피하는 것이 더 쉬웠다. 이후로 계속된, 칼빈주의에 대한 반대 운동은, 지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이며 사회적인 것이었고, "논리(전개 과정)에 대한 반대라기보다는 결론에 대한 반대였다"(cf. H. S. Comager, 미국종교의 현장" , The Nineteenth Century and After, January, 1948. London).
하나님의 주권 이라는 진리는 에드워즈의 모든 설교에서 반복되어 나타난다. 그 외 배경은 칼빈주의였다. 이는 회중들의 사회적 삶의 배경이 아니라, 목사와 회중이 공유하고 있는 영적인 사고방식 이었다. 영적 가치에 대한 선이해가 설교의 강조점을 결정지었다. 에드워즈는 그 당시의 칼빈주의를 해석한 것이 아니라 교리의 본래 광맥으로 돌아간 것 이었다. 이는 성경 계시를 실재화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초기의 종교적 경험으로 인해, 목회하는 동안 하나님께 대한 압도적인 느낌과 하나님의 자충족성과 전적인 통치, 그리고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 등의 교리에 사로 잡혔다. 그리고 그의 목회의 주된 목적은 그 진리를 선포하는 것 이었다. 통치하시는 하나님에 관해서는, 거룩하신 존재와 그의 지혜와 능력을 찬양하는 설교를 했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인간의 삶이 덧붙여졌다. 이는 자연 상태의 인간은 무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고방식과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다. 인간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의지가 없기 때문에, 죄인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초자연적인 힘이 필요했던 것이다.
에드워즈는 어려운 시기를 맞았다. 즉 뉴잉글랜드 신학이 막 변질되기 시작하며 쇠퇴기에 접어든 것이다. 신학은 형식에 치우치게 되었고, 도덕적 기준이 낮아지는 가운데 세속화가 확산되었다. 이렇듯 진정한 칼빈주의가 무시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신앙적인 삶을 부흥시킬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설교에는 적실성이 있었으며, 자기 자신이 정한 가치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세대의 의표를 찔렀기 때문이다. 그는 약간의 수정이 가해진, 일종의 새로운 칼빈주의를 태동시켰다.
"그는 신정정치라는 칼빈주의 이상중의 사회적 원리들을 무시했고, 칼빈주의적 경건을 하나님과 개인 영혼과의 관계에 관련된 문제로 만들었다. 그는 영적인 기초에 근거할 뿐만 아니라 실제 삶의 사실이라는 관점에서 그 교리를 재천명했다. (에드워즈를 통해) 칼빈주의 신학은 (태동)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관점과 분리되어서, 인류에게 영원한 의미를 지닌 하나의 종교로서 재진술되었다." (J. Haroutunian, Piety versus Moralism,1932, P. xxi)
하루투니언의 판단은, 에드워즈와 설교가 사회적, 정치적 적용이 없었다고 말한 점만 빼놓고는 옳은 말이다. 에드워즈는 주저하지 않고, 그 당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에 대해 거듭 사람들의 관심을 요구했으며. 당시에 사회를 장악하고 있던 비리들을 지적하며 사람들의 양심을 꼬집었다. 그는 설교를 통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적, 정치적으로 행동할 것을 촉구했다. 에드워즈는 바로 이런 분야에서 일관된 세계관을 가지고 일했으며, 바로 거기에서 논리적이고도 불같은 설교가 나왔던 것이다. 만일 그가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현대인들만큼 사회적 상황을 강조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개인의 행동을 강하게 촉구하는 설교였기 때문일 것이다. 개혁의 열정은 영혼의 개혁에서 시작된다.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각 개인을 움직이고자했다. 그는 설교가 회심의 도구인 것을 강력하게 믿었다. 사람이 회심하기 전까지는, 그들은 당대의 사회, 도덕의 문제에 별 관심 없이 냉담하게 지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설교를 통해 설득하고자했던 것이다. 그의 설교는 단순히 교리 그 자체로 그치지 않았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것은 멋부리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들의 인생을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다스리고 있는 사회 질서를 개혁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일 것 이라는 믿음의 근간이었던 것이다.
18. 지옥불 설교(Hell Firing Preaching)
에드워즈의 말을 살펴볼 때, 그의 언어는 신앙적으로 쉽게 타협하는 관용적인 세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언제나 충격적이고 너무 놀랍게 다가온다. 그러나 일인 숭배나 집단 수용소, 그리고 세뇌 작업 등의 특성을 지닌, 전체주의 국가시대를 지닌(그 시대로 돌아가야만 느낄 수 있는) 지금에 와서는 우리가 아무 느낌도 얻을 수 없는 그런 말들이, 우리 인간의 본성 깊은 곳을 찌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에드워즈는 어린이들을 사랑하고 양육했으며, 언제나 변함없이 따뜻한 마음과 선한 뜻을 함께 나누는 가정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에게 이토록 평범한 일상생화의 기쁨이 있었는가 하면, 그는 또한 설교에 있어서는 신학적으로 심판의 의미를 지니고 격렬한 효과를 내는, 그래서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인정하게 만드는 언어를 사용했다.
많은 현대인들이 그 용어들의 의미를 오해한다. 그런 말들은 인간존재 안에 있는 어떤 기본적 요소도 하나님에게 반응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에드워즈는 교리를 해석할 때, 사람은 선하든지 악하든지, 경건하든지 경건치 못하든지 간에 모두가 다 똑같이 죄인들이고, 어떤 삶의 영역도 죄에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노력했다. 전인격이 죄에 빠져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교리를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고귀한 관점과 대비하여 가르쳤다.
당연히 그의 이러한 관점은 신랄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 관점으로 죄의 본질과 인간의 책임을 설명하려 애썼다. 선택할 자유가 있고 행동할 자유가 있기에, 또한 자유로운 도덕적 능력 때문에 죄를 범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해 힘껏 외쳤다. 따라서 그는 설교할 때, 그처럼 강력한 논리와 죄를 자각케하는 간절함으로 사람들의 양심에 호소했다.
에드워즈는 자유를 가리켜 인간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지음으로써, 이보다 더 고매한 자유는 없음을 단언했다. 그는 결코 자유의지를 부정하지 않았다. 참으로 수동적인 성향을 지닌 시대에, 자유를 이와 같이 규정함으로써 그것이 인간의 충동 아래 행해질 수 있는 힘이라고 제한했다.
논문에서뿐 아니라 설교에서도 그 교리는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다음은 ‘죄인들을 저주하시는 하나님의 의’라는 설교의 한 대목이다.
“하나님을 대항하는 어떤 악이나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명백한 죄악입니다. 왜냐하면 일단 어떠한 죄든지 그 죄는 하나님을 진노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의도적으로 반역하고 대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동에는 전혀 잘못이 없다고 논박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반증하고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주장은, '하나님의 섭리와 원죄로 인해 사람들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또한 그런 필연성 때문에 자신들의 행위가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행위로 진리를 거부하며 믿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하나님이 그들을 정죄하시겠습니까?”(Works, IV, op. cit. P.237).
그는 인간의 죄가 도덕적 필연성에 의해 수행된 악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동에 있어서 동기는 언제나 사람 안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가 의지하는 바를 행한다. 마음이 악하면 악할수록 악을 행하기 쉬우며, 따라서 용서받기 어렵다. 왜냐하면 마음이 악한 자는 그만큼 올바르게 행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에드워즈가 인간의 완고한 본성에 대해 얼마나 강하게 말하고 있는가를, 다른 설교를 통해 들어보자.
“사람은 죄의 권세 아래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이며, 주권적인 은혜를 입지 않고는 진정으로 선한 것이라곤 단 하나도 행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그토록 위대한 하나님을 무시한다면, 하나님이 당신을 경멸하거나, 불쾌한 조그만 피조물로, 한 마리 벌레나 그저 하찮고 보잘 것 없는 벌레로 보신다고 해서, 그것도 천지의 주재께 반기를 드는 벌레를 대하듯 경멸한다고 해서 , 그것을 악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Works, IV, op. cit., P.237)
그가 죄인의 악행에 대해 깊이 생각할 때, 극악한 죄악이 심장에 파고 들어왔다. 에드워즈에게 있어 인간이란 전적으로 이기적이며 자기 유익을 좇아 사랑하는 존재였다. 인간의 전 본성이 죄로 더럽혀지고 타락한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가 이처럼 확신에 찬 교리를 선포할 때, 또 다른 세상(하늘)의 능력과 죄에 대한 보응이 임박했다는 느낌이 사람들을 엄습했다. 진리를 확신시키는 방법이며, 그런 방식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가 열정적인 마음을 지였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그는 복수하는 마음으로 설교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지워진 죄 짐을 지고 그렇게 단호하고도 힘 있는 설교를 했던 것이다.
만일 에드워즈가 거기에서 그쳤다면, 그는 청중을 참담한 상태에 빠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지각 있는 영혼이라면 공허만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치유와 구원이라는 주제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했다. 하나님의 주권에 압도되고, 섬세한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깊이 감동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비록 죄인이 마음의 부패로 인해 저주의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미치기만 하면, 당장 그를 구원하신다는 은혜를 선포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절규였고, 그들을 구원했던 복음이었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했다.
“사람들이 성령께 힘을 얻어 죄를 씻지 않게 될 때마다. 그들은 절제의 은혜에 붙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씀과 성찬을 통해 그 아래 있음으로 해서 절제하게 되는 것도, 모두가 다 절제의 은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본성의 빛에 의해 절제하는 것 역시 절제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절제하셔서 그의 섭리로 (더 이상의) 타락을 막으시는 것 역시 절제의 은혜입니다. 무서운 죄의 행위에서 자신을 지키는 경건한 사람들은 이 절제의 은혜를 크게 입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도록 내어주시는 데서 나타난 하나영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요! 원수를 사랑하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본질상 하나님과 원수인 것입니다.”(Works, IV, op. cit., pp.55,63)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록을 보면서, 에드워즈가 인간의 죄와 악행에 대해 강조하고 있음에 찬사를 보내야 할 것이다. 이는 설교할 때 드러난 그의 신학의 정수였다. 만일 사람이 전적으로 자기 사랑에 빠져 있다면, 이는 그의 부패한 본성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그 웅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참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만 할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람 스스로는 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셔야만 한다. 그것은 그가 스스로 경험한 진리였다. 왜냐하면, 존 번연이 그랬던 것처럼 , “그는 스스로 놀랍게 깨달은 것을 설교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생애에서는 이 교리에 반대했던 때도 있었다. 왜냐하면 무한하신 주권과 은혜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회복하시고 구원하시는 역사에 관을 씌우는 것이 은혜임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그는 설교 중에 그 진리를 드러내며 기뻐했던 것이다.
에드워즈는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강조했다. 그리하여 <놀라운 회심이야기>라는 그의 책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영적인 갱신을 가져올 수 있다는 진리를 수립하려고 했다. “확신 아래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구원받아야 함을 간절하게 구하며, 은혜로 기름부음 받은 수단을 부지런히 활용하기 시작한다.”(Works, III, ibid.,P.231)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빛’이라는 설교에서 그는 이 교리가 성경적이고도 합리적인 진리임을 보여주었다. 자연인들도 자신의 죄와 비참함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으나, 이것은 영적이고 신령한 빛에 의한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 영적이고 신령한 빛은 어떤 상상에 근거한 감동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빛은 하나님의 말씀에 담겨 있지 않은 새로운 진리나 주장들이 있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 빛은 사람들이 종교에 대해 여러 가지로 알고 있는, 영향력 있는 생각들도 아니다. 이 영적인 빛 가운데에는 참된 의미에서의 신앙적인 것들에 대한 거룩하고도 비길 데 없는 탁월함이 깃들어 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 그리고 그 구속사역과 복음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역과 그 방법이 얼마나 탁월한가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 빛은 자연적인 방법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 부터만 나온다. 이는 사람들의 힘에 의해 움직이는 방법을 사용하거나 자연적인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 거룩하심과 은혜로 인한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알게 되는 것은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인 것이다.(Works, IV. op. cit.,PP.439~450)
뉴잉글랜드지역에서 칼빈주의가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주일에 설교되는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임'을 경고하는 교리가 주중에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고부터였다. (왜냐하면 그 교리보다는) 주중에는 친절함이나 예의, 이웃 간의 정, 가족과 공동체 내의 사랑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신앙고백이 지적으로는 고백되고 받아들여졌는지는 모르지만, 그 힘과 구속력은 점차로 쇠퇴했다.
에드워즈가 내뿜었던 뜨거웠던 용암 줄기는 이제 회색빛의 용암으로 굳어진 채로만 남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에드워즈 시대에 그 열정적인 설교자로 인해 사람들이 점차적으로 확신하고 회개했던 것처럼, 그러한 변화 역시 점차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사람들은 결단의 골짜기로 내밀려졌던 것이었고. 이 완고한 설교자와 지옥불에 대한 두려움은, 많은 사람들에게 결단의 순간을 갖게 하는 감동이었고 동시에, 간절히 호소하는 힘이 되었던 것이다.
19. 적극적인 설교
“나는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께 돌아와 구원받으라고 권면함으로써 설교의 결론을 맺는다.”
설교에 있어서 에드워즈의 목적은 삼중적(reefold)이었다. 첫째로, 그 그는 이기심을 자극하여 감정에 호소한다. 그는 그러한 감정이 삶에 있어서 근본적인 원동력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기심이나 두려움과 같은 원초적인 본능에 호소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를 비평하는 이들은 그의 설교에 있어서 이와 같은 특징에 대해 별로 동의하지 않았지만(cf. Commager, op. cit.), 그것은 분명 그의 방법 가운데 가장 강한논법 중 하나였음에 틀림없다. 그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감정이 동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수동적인 존재라고 믿었다.
“모든 사랑과 증오, 희망과 두려움, 분노와 질투와 애정 어린 소망을 없애버려라. 그러면 세상은 거의 움직이지 않고 죽은 것처럼 될 것이다. 왜냐하면, 감정이 사라지면 인류 안에서 활동이라든가 성실하게 무엇을 수행할 만한 동기가 없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Works, III, oP, cit., PP. 19,20, "Religious Affections")
대각성 운동을 비판하는 입장에 대하여 그것을 옹호하는 에드워즈는, 자신의 입장을 그 시대의 심리학적 원리를 가지고 표현했다
“감정은 행동의 원천이므로 생명력 있는 종교는, 감정을 실천하는 것과 하나님이 택한 사람들에게 부어주신 초자연적인 감각이 생겨나게 하는 종교적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 (Works, III, ibid., 0.215, 'Thoughts on Revival")
저주 설교에서는 특별히 두려움이라는 요소가 아주 중요한 것 같다. 이기심과 천국에 대한 인간의 소망에 호소하는 것도 그런 설교들 속에 나타나 있다. 어느 누구도 구속의 기쁨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축복,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충만함에서 오는 더 없는 행복에 대해 에드워즈처럼 강렬하게 표현한 이가 없었다.
두번째, 올바른 판단을 위하여 양심을 일깨우는 것이었다. 그는 각각의 선택이 갖고 있는 것을 분명히 맞혀내어, 그것이 가치 있는 삶이라는 궁극적인 목적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복음은 인간의 도덕적 본성과 연관되기 때문에, 그는 옳고 그름의 원천(앙심)에 호소했다. 그는 도덕적 의무 없이 성경만 읽는 평론가가 아니라 고뇌하며 호소할 줄 아는 복음주의자였다. 사람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계몽된 마음이 아니라(설사 그렇다하더라도)감동된 마음이었다. 위험한 수준까지 임박했던 당시 뉴잉글랜드의 종교적 무관심과 도덕적인 방종을 막기 위해 이 특별한 설교에는 불타오르는 신념이 수반되었다.
설교를 통한 그의 의도는, 청중들이 하느님과의 개인적이고도 즉각적인 교제를 통해서, 그들의 마음속에 따뜻하고도 감동적인 형태의 신앙을 마치 만지는 것만큼이나 생생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바로 그런 교제 속에. 영적인 생명과 능력을 상실한 형식주의와 신앙고백의 해독제가 담겨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것은 도덕적 방종으로부터 그 공동체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윤리적 이상과 도덕적 기준을 제시하는 토대가 되었다. 그 목적에는 영적인 갱생의 열매로 나타나는 도덕성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죄인이 구원을 받게 되었는가? 어떻게 사망의 잠에서 일깨워졌는가? 이기심과 두려움에 대한 호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냉엄한 논리의 틀 속에 담겨 있는 그 두려움은, 현대의 독자들이 읽기에는 좀 이상할 것이다. 그러나 그 설교문들이 정열적인 이미지와 열정이 담긴 신실함에 의해 조명 받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가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들' 이란제목의 설교를 할 때, 그 모습이 어떠했는가하는 것을 그 당시 사람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인근 마을 주민들은 자신의 영혼을 위하여 크게 고뇌하고 있었지만, 코네리컷주 엔필드 마을사람들은 아무 걱정도 없고, 해이했으며, 허영에 빠져 있었다. 엔필드에서 에드워즈가 설교하기로 되어 있었던 그 전날 밤, 그곳에 온 인근 주민들은 엔필드 사람들의 경솔함과 경박함에 너무나 놀랐다. 그런 까닭에, 집회 때에 자신들에게는 은혜의 소나기가 내리는데, 엔필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심지어 그들 중에 상당수가 마치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목자라도 된 것처럼 엔필드 사람들의 영혼을 위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 정도였다. 주변에서, 그리고 상당히 먼 거리에서도 목회자들이 집회장소를 찾았다. 그리고 그들이 들어갈 때에도, 엔필드 회중의 모습은 그야말로 아무 생각도 없이 헛되기만 했다. 그들은 최소한의 예의도 표하지 않았다.
마침내 노샘프턴 출신의 에드워즈 목사가 설교를 시작했다. 그런데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설교가 끝나갈 무렵, 모든 회중은 자신의 죄와 자신이 처한 위험한 상태에 대해 놀라운 확신을 갖게 되었고, 깊은 감동에 젖어 굴복하게 된 것이다. 얼마나 깊은 탄식과 울음소리가 나왔던지, 설교자는 회중이 설교 소리를 듣지 못할 것 같아 자중해줄 것을 요구할 정도였다“.(Trumbull, Histroy of Connecticut, II, op. cit., P.112)
에드워즈는 또한 그의 '고별설교 에서 이렇게 강조 했다. "저는 여러분이 두려움으로 인한 사망의 잠에서 깨어나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설득하려고 노력했습니다."(Works, op. cit.,P.75)이러한 고백은 그리스도와 그 양떼를 위해 참된 목자가 되려 했던 하나님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설교의 세 번째 목적은 삼중적인 논법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의 설교는 마음을 살피게 하는 설교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설교주제를 대변하는 결론으로서, 다음과 같은 제안이 마치 후렴구처럼 등장하기 때문이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은 끝없는 죄악, 즉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선함에 대항하는 죄악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심판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으며,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만이 그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이 심판은 우주적이고 영원하며 견딜 수 없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며, 영원히 진노하시는 영원한 하나님께서만 고안해내실 수 있는 최고의 심판입니다‥‥ 유일한 탈출의 희망은,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노력으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가 미친 듯이 그 구원을 얻으려는 마음으로 열심을 다해 하나님이 말씀하신 모든 의무를 이행하려고 한다고 칩시다. 물론 하나님께선 그렇게 할 의무는 없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실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위해 미치십시오.(works, III, op. cit., P.245)
에드워즈가 외쳤던 이러한 이야기들은 가장 두드러지게 축복 받은 설교였다. 그의 설교에는 이 삼중적 요소가 계속해서 반복된다. '놀라운 회심이야기'(Narative of Surprising Conversion)라는 책에서도, 그는 똑같이 삼중적 요소를 강조한다.
“전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목사가 그런 상황에 처한 무리들 가운데서 영혼들을 구원할 유사한 경우를 만났다고 합시다. 그가 누구든지 간에, 하나님은 그분께 돌아오지 않은 어떤 자연인에게도 자비를 베푸실 하등의 의무가 없다는 사실을 필연적으로 강하게 주장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그분 안에서 참으로 회개하기 전에는, 그가 하는 어떤 일을 통해서도, 절대적인 의나 거저 주시는 약속 같은 것에 반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주장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전 또 이렇게 생각합니다. 고통 가운데 나를 찾아오는 이들에게 다른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그들을 멸망시킬 지름길을 가르쳐주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그들에게 감화를 주시는 하나편의 성령의 물결을 거역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orks, IV, ibid., PP.387391)
에드워즈의 설교의 목적은 이처럼 본질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들은 그가 믿었던 교리의 본질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설교 때마다 열정과 열심을 가지고, 그 본질적인 것들을 선포했던 것이다. 진정한 설교를 하나의 의사소통의 기술로 본다면, 에드워즈는 성공적 설교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계시지는 소극적(negative)이지 않고 적극적(positive)이었으며, 어느 누구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20. 설득력있는 설교 전달
"내 재능에 대해서 스스로 판단해 보건대, 나는 말하는 것 보다 글쓰기를 더 잘하는 것 같다."
글쓰기가 에드워즈가 목회자로서 갖고 있던 습관이었음을 생각해볼 때, 설교시 그의 전달방식이 다양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뒤에 남겨진 원고가 대부분 메모와 개요인 것을 보아서도 에드워즈가 한 가지 방법의 노예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우리에게 ‘자유로운’ 설교자로서의 인상을 거의 남겨두지 않았다.
청교도인들은 예배의 중심을 강조함에 있어서, 설교를 읽는 습관을 도입한 사람들이었다. 청교도 설교자의 대표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리처드 박스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A. Gorden,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 ed. by sir L. Stephen & sir S. Lee. London, 1937). "나는 스무 살 이후로 설교하기 시작한 뒤부터는 짤막한 기도 한 마디, 단한편의 설교도, 결코 성경 없이 배우거나 말한 적이 없다." 아마도 이러한 말은 청교도 방식의 설교가 자리 잡기 이전에 사용되었던 방법에 대한 반작용이었을 것이다.
동시에, 즉석에서 행하는 성질의 '예언하기'가 당시의 설교에 일반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유형의 설교는 존 번연이 말하는 바와 같이 '내가 느낀 것을 설교하기, 내가 정말 뼈저리게 느낀 것을 설교하기'이기 때문에, 일종의 즉흥적인 말솜씨가 제일 중요했다.
청교도 설교자의 임무와 성령의 관계를 고려해 볼 때, 그 당시 설교 전달방식의 전통이 어떠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피스크(Fiske)에서 돈(Donne)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위대한 설교자들이 책(원고) 없이 설교했다. 윌리엄 퍼킨스는 1592년에 초판 되었던 「성경해석의 기술(Art of Prophecying)이라는 그의 책에서, 그 당시 ‘설교자들이 따르던 회중 앞에서 암기하여 설교하는 전통’에 대하여 지금도 말하고 있다(F. E. Hutchinson, Cambridge History of English Literature, IV, P. 226; also G. F. Nuttall, The Holy Spirit in Puritan Faith and Experience, Blackwell, Oxford, 1946.).
따라서 에드워드 시대까지 이 두 가지 방법이 검토되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가 ‘자유롭게’ 전달하는 사람들을 따르지 않고, 원고를 읽는 이들을 따랐다는 것이다. 설교 전달에 있어서 자유로운 설교자일수록 청중에게 미치는 힘이 더 크다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추론할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그렇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설교문을 읽으면서 생겨난 놀라운 일들이 생겨난 경험으로 가득하며, 또한 그 당시의 다른 설교자들과도 똑같은 효과와 영향력을 발휘했다.
에드워즈의 설교 전달방식을 평가하려면, 먼저 그의 설교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언급한 말을 들어 보아야한다. 사실 인쇄된 원고로는 설교가 전달되었을 당시의 인상과 효과를 재생산할 수 없다. 에드워즈의 전기 작가들은 그가 명료하고 정확하게 말했지만, 강하고 큰소리로 말하지는 않았다고 한다(Works, I, op, cit., p.29, cf. Dwight and Hopkins especially).물론 그가 설교문을 읽을 때에는 성도들과 함께 나눈 영적인 열정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에게 웅변 기술 따위는 없었다. 에드워즈는 초기 목회 시절에는 설교문을 완전히 작성하여 원고를 읽었다. 그의 몸짓은 원고의 페이지를 넘기는 그 이상은 취하지 않았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그의 생애 후반부에는 설교문을 완전히 써서 설교하지 않고 메모와 개요를 사용했다. 그는 강대상에 기대서서 습관적으로 왼손엔 노트를 쥐고 오른손으로는 원고를 넘겼다. 잘 다듬어진 차분한 음성은 사람들이 그의 메시지에 동의하기를 바라는 마음의 간절한 열정과 조화를 이루었다. 에드워즈 설교의 강렬함은, 그의 영이 하나님의 대변자이며 영혼들에 대한 영적 권위를 갖고 있음을 온전히 확신하는데서 나오는 것이었다.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들"이란 설교의 전달방식을 논함에 있어서, 예일대학에 소장되어 있는 원고의 원본을 보면 에드워즈의 특이한 경험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1741년 6월의 26번 설교원고를 보면, 에드워즈가 같은 본문으로 두 번 설교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1741년 6월에 노샘프턴의 자기 회중에게 설교한 것이었으며, 두 번째는 1741년 7월 8일 엔필드에서 놀랄만한 힘으로 다시 선포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에드워즈 비평가들이 간파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는 자기 사람들에게는 평소에 하던 대로 설교했다. 그들은 에드워즈가 그 날 어두운 주제를 무서운 심판의 경고와 임박한 심판 날에 대해 엄히 경고하면서 상세히 풀어주는 말씀을 들었다. 그 날 아침 그들이 하나님의 집을 떠났을 때, 그들은 둘러 모여서 설교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고 마찬가지로 날씨와 곡식, 지난주의 가정사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설교에 나타난 신학은 두려운 것이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도 그날 감동적으로 마음이 움직였다든가 자극이 되었다고 이야기 한 이 가없고, 어떤 신앙 부흥도 일어나지 않았다. 에드워즈의 교회에 신앙 부흥이 일어났던 것은 지옥 불에 대해 설교했을 때가 아니고, 고전 13장을 본문으로 해서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랑에 대해 일련의 강해 설교를 했을 때였다.
거의 한 달 후에, 에드워즈는 엔필드에서 지역 회의 혹은 장로회에 참석했다. 단번에 그에게 설교 부탁이 들어왔다. 그때 그는 전에 한 적이 있는 설교를 꺼내어 고쳐 쓰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아직 그 설교가 기억에 생생했기 때문에, 결론을 내기 위해 약간의 어구만 수정했을 뿐이었다. 그는 설교 전달시 원고를 꼼꼼하게 읽어나가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나 예일대학에서 연구된 원문을 보면, 그 설교문은 완벽하게 완성되었던 게 아니었다. 따라서 그 설교를 할 때에는 전통적인 방법에 거의 의존하지 않았던 것이다.
에드워즈가 처음 설교를 얼마나 더 확장시키고 변화시켰는지를 알려면, 현대인들도 만족하게 수긍할 수 있도록, 표준구(locus classicus)를 비교해 보면 된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마치 불에 떨어뜨리려고 거미나 다른 징그러운 벌레를 붙들고 있는 사람처럼 지옥의 구덩이 위에서 당신을 붙들고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을 혐오스러워하시며 당신에게 무섭게 분노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신이 불에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고 계시는 것은 오직 그분의 손뿐입니다.” 이것이 원래 원고이고 이 부분과 대응하는 두 번째 설교문은 다음과 같다. “당신은, 지금 마치 어떤 사람이 거미나 어떤 징그러운 벌레를 불 위에 들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지옥 구덩이 위에 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손은 여러분을 놓아서 그 구덩이에 빠지게 하십니다.” 우리는 에드워즈가 가는 펜으로 원문의 일부분을 지우고 다시 채워 넣은 부분을 통해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추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엔필드에서의 부흥을 일으켰단 말인가? 왜 이 설교가 다른 모든 설교보다 뛰어난 것이라고 알려진 것인가? 아마 설교 전달 시에 주어진 어떤 중압감이 가장 중요 했을 것이다. 역사가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그 골짜기의 사람들이 큰 기대에 차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하나님의 대언자(prophet)는 그의 메시지로 그 결정적인 순간에 부응했던 것이다. 그가 사용한 어휘들을 고찰해 볼 때, 다음과 같이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죄에 대해 심판하시며 죄인들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음을 믿었고, 그렇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손은 회개하는 자에게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다는 것을 믿었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설교를 반복했다는 점에서 다른 설교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당시 엔필드의 특별한 상황이 그의 설교에 효과를 더해 주었고, 진리가 사람들의 양심을 찔렀다. 죄에 대한 사회적 감각과 그 지역의 행악, 그리고 개인적 두려움과 마음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에드워즈는 심판 날에 대해 청중을 위협하지 않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분노를 정의로운 것으로 받아들였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영원한 종말을 개인적이며 즉각적인 것으로 느끼게 했던 것이다. 이처럼 그의 설교문에서 아무런 구원의 소망도 없이 주어지는 적용, 그로 인한 위기의식과 긴박감 등이 청중에게 확신을 주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었다.
H. W. 비처(Henry Ward Beecher)는 인디애나폴리스에서 며칠을 보내며 기록한 글, “다시 찾은 고향”(Home Revisited, Cambridge History of American Literature, II, pp. 215~221)에서 에드워즈의 설교를 최고라고 회상하며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있다. 그가 생각하기에 에드워즈의 설교가 성공적이었던 것은, 청중을 겨냥한 설교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앉은자리에서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들’이란 설교를 결코 단 번에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 생각에 윤리적 감각이 있는 사람이 한 밤에 혼자 그 무서운 글을 읽고 있었다면, 아마 그는 거의 미쳐버렸을 것입니다.”
에드워즈에 관해 그의 설교는 많이 읽었지만, 그 외에 별로 접해보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비처의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 설교를 직접 듣는 것과 읽는 것이 다른 것처럼, 설교가 행해진 당시 상황을 고려하지 않으면 이해를 못할 수도 있다. 인쇄된 설교로는 전달될 당시의 설교를 재현할 수 없다. 분명 에드워즈의 언어는 파멸과 심판의 언어였으나 이는 대부분의 청교도 목사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의 설교는 그 혹독함과 단호함에 있어서 날카롭고 무자비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만 할 것은,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난 이들은 영원히 버림받으며, 지옥이란 한 마디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상태라고 굳게 믿었다는 점이다. 만일 우리가 그때의 상황을 되살릴 수 있고, 그 어조와 열정적인 전달을 되살릴 수 있다면, 그의 설교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1758년 4월 10일자 New York Mercury지(誌)의 사망기사에는, 에드워즈의 설교 전달에 대해 흥미로운 논평이 담겨 있다. 그는 설교가로 잘 알려져 있는 바, 그의 말투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그가 구사한 어휘는 풍요로웠지만 꾸밈은 없었다. 그는 말보다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 예민한 정서와 명료한 말씨가 그의 스타일의 특징이었다. 중년에 그는 열의에 찬 연구 활동과 힘든 노동으로 수척해 보였다. 따라서 그의 목소리는 많은 회중에 비해 다소 낮았지만 적절한 강조와 적당한 억양, 발음의 정확한 구분 등이 설교를 받쳐주었다. 드와이트도 그의 책 Travels에서 에드워즈의 이러한 특징을 언급하였다(Dwight, Works, IV, pp. 326-327).
에드워즈에게는 다른 요인도 중요하다. 손수 만든 “간지 성경”(cf.「예일컬렉션」) 뒷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각주가 있다. “성령에 대하여 그리고 성실과 열의에 관하여는 비망록 p.183을 보라.” 이것이 에드워즈의 어조를 이해하는데 단서가 될 것이다. 그는 몸짓을 절제해야 한다고 윌리엄 퍼킨스에게서 배운 바 있다.
목소리는 매우 높아야 한다. 그래야 모두가 들을 수 있을 테니까. 교리를 설교할 때는 보다 온화해야 한다. 권면할 때에는 강하고 열정적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자를 우아하게 보이도록 몸짓은 엄숙하게 하라. 그러므로 몸통과 다리 부분은 곧고 경건하게 하고 그 외 모든 부분, 이를테면 팔이나 손, 얼굴, 눈 등은 마음의 경건한 감정을 표현하고 말하도록 움직여야 한다. 눈과 손을 쳐들어 올리는 것은 확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대하6:13,14; 행7:55; 눅8:13). 몸짓에 관하여 달리 더 전할 것은 없으나 하나의 방식보다는 이런 부분에서 좋은 본이 되는 목사님들로부터 배우는 게 나을 것이다.(Perkins, op. cit., ch.10)
퍼킨스의 충고는 에드워즈의 훈련에 있어 거울이 되었다. 그날 엔필드에서 보여준 그의 몸짓과 엄숙함이 어떠했든지 간에 성령에 관해 앞서 언급한 것을 보면, 에드워즈의 영이 어떠했을지 알 수 있다. 그는 성실함과 열의로 능력 있는 주제들과 (그것을 깨닫는) 영감을 자주 받았다. 그는 완전히 주님께 드려졌으며 자신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도구임을 알고 있었다.
에드워즈를 특징짓는 정신 자세는, 그리스도께서 회개치 않는 악인들에게 내리시는 영원한 심판의 무서운 현실에 대해서 가르치신 것과 연결되어 있다.
내가 만일 지옥에 떨어질 위험에 처해 있다면, 지옥의 무서움에 대하여 가능한 많이 알고자 할 것입니다. 내가 만약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마땅히 해야 할 걱정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면, 예수님은 최고의 친절로서 나에게 지옥이 어떠한 것인지 그 진실을 알려주시고, 가장 생생하게 나의 비참한 처지와 위험을 제시해주실 것입니다(Works, I, op. cit., The Distinguishing Marks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
이것은 신앙 부흥의 발단과 특징으로 논의되는 1741년 뉴 헤이븐에서의 설교를 옮긴 것이다. 에드워즈는 천국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토록 격정적으로 설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록 그가 강해 설교에 헌신한 신실한 목회자였을지라도, 그의 신앙이나 위에서 인용한 말들과 같은 관점에서, 그는 저주 설교도 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에드워즈는 더욱 신실한 복음 전도자였다. 그가 성령에 대해 언급한 말을 보더라도, 하나님이 택하신 사자(便者)에게 성령의 부으심, 은혜의 기름부음, 그 불같은 세례로 녹이고 태우시는 신비한 일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엔필드 설교의 비밀이었다. 그는 거룩한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힘 있게 선포하도록 만들어진 메시지를 글로 쓰기를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21. 설교문의 구조
"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이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도록 설득하는 데 적당한 말이 무엇일까 그것을 저는 계속 찾고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설교와 강의를 준비할 때 항상 청중의 필요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 주일 설교가 끝나면 보통 매주 목요일에 성경교리나 성경의 한 부분에 대한 강의가 있었다. 그 당시 그의 관심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최선의 삶을 살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는 설교를 준비할 때 개요를 구상하고 분석한 후 그 틀 안에 들어갈 적절한 낱말을 선택하였다.
그는 설교문을 작성할 때 적합한 말이 쉽게 떠오르지 않을지라도 말을 조급하게 그러모으지 않았다. 설교문에 사용된 낱말들은 인공적인 산물이라기보다는 잘 재배된 식물 같았다. 그는 언어연구가였다. 마치 식물학자가 꽃을 분해하듯 단어의 비밀과 메시지를 찾아내려고 낱말을 '연구'하였다. 언어는 시대에 따라 변하기도 하는 것이므로 에드워즈는 진리를 표현하는데 알맞은, 적합한 말을 얻고자 애썼다. 물론 어휘와 문법 둘 다 정확해야했다. 말은 변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아예 완전히 소멸되기도 한다. 또한 새로운 필요에 의해 새 단어가 생성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단어선택은 항상 난제였다. 이렇게 준비된 그의 설교를 듣는 이들은 그 단어 속에서 구원을 발견하곤 했다.
에드워즈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오랫동안 글쓰기 연습을 했기 때문에 글 쓰는데 그리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설교하고 싶은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청중이 은혜를 받아 곧 행동에 옮길 수 있도록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서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설교하기 전에 항상 묵상과 글쓰기 과정을 거쳤다. 사고의 뼈대를 만들 때 윤곽을 잡는 식으로 준비했지만 경우에 따라서 성경적 배경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붙이기도 했다. 이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는 비망록과 관련하여 진행되었다. 중심 사상이 분명하고 명확한 진술로 구체화되면 그때 비로소 설교문이 전개될 준비가 된 것이다.
에드워즈는 설교 틀을 짤 때 그 당시의 틀을 따랐다. 청교도 설교는 뜻이 분명하게 선포되었으며 스승들에 의해 혹은 성스러운 기술의 모범을 따라 만들어진 표본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먼저 본문이 낭독되고 하나의 주제 하에 교리가 설명되었다.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들’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그는 4개의 요지를 담은 서론으로 설교를 시작하였다. 그 다음엔 논리적 순서로 10개의 단락을 개괄한다. 뒤따라 나오는 적용에는 주제의 전개, 예화, 추론 등이 포함되어 있다.
틸럿슨(Ti11olson)(cf. Mitchce11, op. cit., P. 516)은 대부분의 청교도인 들에게 그러했듯이 에드워즈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들에게 설교에 대해 가장 많이 가르친 사람은 윌리엄 퍼킨스인데, 그는 「성경해석의 기술」(The art of Prophesying)이라는 책에서 고전적인 설명을 했다. 잉글랜드의 앤드류스에서 틸럿슨까지 그들의 설교를 살펴보면 어떤 특정한 방식이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에드워즈의 설교에서도 그러한 유형의 구조를 신중히 추적해야 한다(cf. C. F. Richardson, English Preachers and Preaching, 1640~1670, P. 73).
그의 설교에는 계속 반복되는, 그리고 때로는 흠을 찾을 수 없는 질서정연한 틀이 있다. 각 주장마다 제목이 붙고 주장을 뒷받침하는 요점에 번호가 매겨졌으며 상반된 이론이 펼쳐질 때는 첫째, 둘째, 셋째로 이론에 대한 반론을 제시했다. 그는 설교를 할 때 자주 주제를 확인시켜 주면서 진술을 펼쳤다. 이렇듯 명료함과 간결함이 에드워즈설교의 특징이다. 이것은 그의 문예적 창의력을 보여주는 독특한 특징이었다. 교리는 물론 규칙을 따르는 관념적 신학 교리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히 명제의 형식으로 진술된 설교의 주제일 수도 있다.
요한복음 1장 41-42절에 대한 출판되지 않은 설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교리를 선포하였다.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오려고 시도할 때 그들은 자연스레 다른 이들도 함께 데려가고 싶어합니다.’ 출판되지 않은 다른 설교 중요한 요한복음 3장 7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전혀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장 7절을 가지고 한 설교도 그 교리가 위와 비슷하게 단순하다. "실로 회심을 한다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때때로 거의 드문 일이긴 하지만 교리의 언급이 생략될 때도 있다. 본문이 그 자체로 주제를 충분히 대변한다고 여겨질 때 그렇다. 이에 대한 예가 "너희는 훔치지 말지어다 ― '절도의 죄'"라는 설교에 나온다.(Works,. Ⅳ. cit., P. 601)
그의 설교는 삶에 대한 실제적 통찰력을 가지고 적용할 길을 찾으면서도 신학적 사고 틀에서 엄밀하게 추론되었다. 에드워즈는 글쓰기에 있어서 조직적인 틀을 따랐지만, 준비 과정은 시시때때로 다양했다. 어떤 설교는 정서된 후 한마디 한마디 읽혀졌다. 어떤 것들은 단연코 많이 사용된 방법으로서, 단순한 메모들, 즉 손에 들어온 신문 스크랩에 작성한 메모들이었다. 그의 사고의 윤곽을 더듬다보면 그는 설교를 할 때 매순간 가장 적합한 언어를 찾고 싶어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목회 후기 성숙의 산물이었다. 왜냐하면 대부분 그의 설교는 청교도의 모범에 근거하였고 글쓰기의 기본으로 잘 훈련된 사고와 필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의 설교에는 하나의 사고를 강조하는 것이 보인다. 모든 설교에서 하나의 사고에 집중하는 것이 그의 설교의 특징이었다. 그는 동시에 여러 진리를 다주지 않았고 결코 부차적 이슈로 화제를 돌리지 않았다. 설교에서 주를 이루는 주제는 강조하고 반복하였다. 에드워즈의 설교에는 통일된 사고와 질서정연한 전개가 펼쳐지고 대지마다 요점이 강조되었다. 그는 주제를 정한 후 그가 의도하는 바대로 개요를 작성했던 것 같다. 그는 각 부제 밑에 새로운 것을 첨가하기 위해 여백을 남겨두었다. 여백이 확충되면 새로 설교 문을 완성하였다.
연구를 통하여 그는 직선적이며 전통적인 성경 강해에 열중할 수 있었다. 다른 것은 이 하나의 목적에 비하면 부수적인 것이었다. 그는 본문에 준하여 진리를 풀이해 주었고 교리를 설명하였다. 그의 설교나 강의에는 눈에 띄는 이상함이 없었다. 부수적인 문제와 토론거리로 방해받지도 않았다. 강한 어조의 설명과 분명한 대지가 그의 설교의 특징이다.
그는 설교를 구성하는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 에드워즈의 설교방식에 놀랄만한 요소도 없고 설교 형식에 변화가 거의 없다면 그것은 그가 청교도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또한 학생이 자문필가로서의 그의 기질에도 부합하였다.
"룻의 결단"(works,, Ⅳ, ibid., P. 412)이라는 설교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는 문맥상의 참고 사항들을 서두로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룻의 이야기를 전형적인 교회의 부름과 모든 신자의 회심으로 다루었다. 다음으로는 그녀의 삶의 배경을 추적하고 새로운 삶에 그녀가 어떻게 매료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데 그것은 (1)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므로 (2) 하나님의 백성은 탁월하므로 (3) 다른 곳에서는 행복을 찾을 수 없으므로 (4) 하나님께 돌아온 이들의 모범 때문에 (5) 하나님께 돌아가기로 함에 있어서 우리의 결단이 확고하고 강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적용은 다양한 부류의 죄인들에 맞게 만들어졌고, 롯처럼 행하라는 권고가 설교의 절정이었으며 그리하여 설교는 본문의 인용으로 끝났다.
직설적인 설명의 예를 보자:
“그들의 하나님이 영광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분이 없습니다. 그는 영광과 탁월함이 무궁한 분입니다. 그는 높으신 하나님, 거룩하신 영광의 하나님, 경이로움을 행하시는 찬양 받으실 경외스러운 하나님, 그의 이름은 온 세상에 탁월하고 그의 영광은 땅과 하늘 위에 있습니다. 신 중에 그분과 비교될 만한 신이 없고 위대한 자의 아들 가운데 그와 견줄 만한 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며 마르지 않는 샘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완벽하게 만족시켜주는 하나님입니다. 그는 영광의 하나님이며 강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이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는 단단한 바위이자 높은 탑입니다.”(works, Ⅳ, cit, P. 414)
에드워즈의 설교에는 리듬이 있고 차분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의 설교는 에드워즈가 찬미하는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맡기기로 결단하려는 청중에게 매력적이었고 또한 호소력이 있었다. 그는 '시편'에서 뽑아낸 실로 '메시지'라는 음감을 완성하였다.
그는 시인의 영혼을 소유했고 또한 상상력이라는 재능을 마음껏 사용했지만 설교의 구조는 청교도의 판례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개인적으로 관찰한 결과나 시에 대한 지식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비유를 사용할 때 보통, 그 비유의 사용을 영원한 세계의 실제성을 강조하려는 한 가지 목적에 제한시켰다. 에드워즈에게는 비전이나 시, 상징 혹은 은유가 너무 실제적이었기 때문에 유한한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그것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단순한 교방식이 구조를 구성하는 뛰어난 능력으로 보충되었다.
그의 설교를 비평하기 위해선 당연히 먼저 이러한 요소를 주목해야 한다. 그의 설교들은 같은 패턴을 따랐기 때문에 다양하지 않았다. 구상의 질서와 균형을 깨뜨리는 강조점은 없었다. 정확한 윤곽을 잡아주는 요점을 반복하여 쉽게 기억하도록 만들었다. 많은 대지와 세분은, 물론 교리 교육을 받고자 경청하고 있는 청중에게 유용한 것이었다. 20세기 독자에게도 그것은 수준 이상의 논리적 설득력을 펼치는 듯하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에게 있어서 그의 설교는 너무 길고 장황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알아듣거나 이해하려면 문장을 줄여야할 것이다.
오늘날과 비교해볼 때 당시에는 에드워즈에게 은혜를 갈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장점이 있다. 오늘날엔 사람들이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설교자가 특별한 지지를 받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닫힌 사회에서 애써서 뜻을 이루어야하는 것이다. 에드워즈의 설교가 교리를 전하는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방식을 보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말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려내는 화가의 상상력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그가 예언자로서 그리고 성경적 시인으로서 영적 세계를 그릴 때, 그것은 실존하며 분명하고도 긴급함을 갖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그러기에 그가 사용한 말들은 '기꺼이 수용할 만한 말'이었다.
각 시대마다 의사소통의 문제를 안고 있기 마련이다. 역사에서 비추어볼 때 에드워즈가 복음을 전하고 난 결과를 평가해보면 그가 결코 설교에 실패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설교를 듣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리스도를 구주로 맞이하게 되었는가? 이것이 바로 '기꺼이 수용할만한 말을 평가할 수 있는 마지막 기준이다.
22. 목회의 기준
에드워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목회에 대한 그의 이상과 기준에 대해 물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그는 설교 한 편 때문에 악명을 얻고, 우리에게 잊혀져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보았던 것처럼 이러한 견해는 그의 설교 전체를 두고 판단되어야 하며, 그의 신학이라는 견지에서 평가받아야 한다. 또한 에드워즈 자신의 말들을 통해서, 그의 목회사역의 근간이 되었던 이상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혀내야 한다. 그러한 이상들은 그의 목회를 도와주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24년 동안 그는 자신을 영적 인도자요 목자로 여겼던, 그러나 단지 마지막에만 그에게 등을 돌린, 한(one) 회중을 담임한 목사였기 때문이다.
한 전기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에드워즈는 이 시대에 거의 모든 목회자 중에, 훌륭한 설교자로서 가장 보편적인 특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의 설교를 듣고도 그를 훌륭한 설교자라고 부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종교적 원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동일한 진리를 설교할 때에는 더 불쾌하게 여겼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이제껏 들어본 모든 사람들보다 그가 월등하다고 칭찬했다.”(Hopkins, op. cit., p.50)
에드워즈는 뛰어난 설교가이자 노련한 논리가이며, 사상가였을 뿐 아니라 복음 전도자로서의 일을 감당한 목사였다. 그의 목회는 직접적인 접근으로 유명했으며, 신세대나 구세대를 향한 그의 매력은 풍부한 영적 생활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에드워즈의 설교가 지닌 힘과 능력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물을 때마다, 그를 향한 이 찬사의 말을 되새겨본다면 확실히 그를 유명한 설교자(the preacher)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는 아마도 세계의 위대한 사상가의 반열에 오를 만한 자격이 있는 유일한 미국의 지성인일 것입니다. 우리 역사상 다른 사람의 이름은 몰라도 그의 이름만큼은 제왕(諸王)의 반열에 올라 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A. E. Hoyt, The pulpit and American Life, p.19).
그는 “그 당대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Allen, op. cit., p.126)였을 뿐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여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에드워즈가 남긴 유산을 살펴보면, 그는 목사의 소명과 부르심에 대해 서술한 책이나 설교에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설교자의 직무와 소임에 대해 그가 갖고 있던 개념은 무엇이었을까? 한 사람이 목사로 목회를 시작하기 전에 필요한 것이자 모든 설교의 초석이 되는 것은, 거룩한 부르심에 대한 그 자신의 내적 확신이었다. 그는 삯군이었을까 목자였을까, 전문 중개인이었을까, 아니면 하나님을 대신하는 소리였을까? 에드워즈에게는 자신의 위치에 대해 불분명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주된 일이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그에겐 복음을 전파한다는 소명의식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에드워즈는 경건함과 섬김의 도가 충만한 가정에서 양육받았다. 그런 가정에서 자라난 독자(獨子)가 하나님이 부여해주신 소명감을 발견하고 그 소명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하늘의 부르심은 결코 멀리에 있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메시지를 선포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 메시지의 어리석음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며, 그 메시지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실 것을 굳게 믿었다. 방법이나 방식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깊은 것들을 개인적으로 체험하고 거기에서 우러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었다. 바로 이 선포 사역의 적합함, 즉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생명 사역에 이 선포 사역이 적합하다는 숭고한 느낌이 그로 하여금 그 사역을 끝까지 이루게 했고, 그것을 그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한 것이다.
우리는 그의 설교가 명성을 얻게 되었던 시대를 흐르고 있던 배경, 즉 뉴잉글랜드와 청교도의 이상(ideals)을 놓쳐선 안된다. 당시 사람들은 인쇄된 종이를 읽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설교자의 말을 듣는 것에도 많은 준비를 기울였다. 바로 이런 상황과 에드워즈 같은 설교자가 함께 어우러져 위대한 설교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이런 환경에 둔감하지 않았으며, 그의 설교에서는 억제되어 있기는 하나 하나님의 만족하지 못하시는 마음까지도 느껴진다. 그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좁은 문을 가리키며 그 너머에 있는 찬란한 빛과 십자가를 보여주는 복음 전도자였다. 그는 하나님의 대변자로 여겨졌으며, 사람들은 상당한 존경심과 때로는 두려움마저 품으면서 그의 말을 들었다.
하나님은 여러 방편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실 수 있었지만, 그분에게 무엇보다도 기쁨이 되는 것은, “그분께서 자신의 온전히 합당한 성품 가운데 자기 성도들을 부르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그분의 대사(大使)를 고용하시어서 그분의 은혜를 원인과 결과라는 논리적 절차에 맞추어서 전하게 하는 것을 더 좋아하셨다”(Miller, op. cit., p.297).
에드워즈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넘어지기 쉽고 죄 많은 사람 중에 하나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또한 그는 자신이 설교를 할 때, 하나님께서 설교를 경청하는 이들에게 은혜의 영을 전해주실 것을 믿었다. 그가 사용한 ‘아름답고’, 또 ‘유쾌한’ 청교도의 말들은 ‘구원하는’ 말이기도 하였다. ‘신실한 목회자가 말씀을 근거로 말할 때에는, 무엇이 되었든지 그것은 그리스도의 음성’이라는 사실은 당시에 일반적인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젊었을 때 이런 배경에서 자라고 또 거룩한 직무를 준비하였던 것으로 보아, 에드워즈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라는 확신을 갖고 목회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 어찌 놀랄 만한 일이겠는가? 만일 그가 그 직무에 실패했다면, 아마 하나님의 일은 성취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의 저서에는 목회직을 사랑하는 강한 열정이 물줄기처럼 흐르고 있다. 위대한 전통을 보면, 이러한 열정은 예언자적이며 사도적인 설교에 최우선으로 요구되는 요소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 설교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기회였다. 이런 까닭에 노샘프턴(Northampton)에서 스톡브리지(Stockbridge)로 옮길 때 일어난 변화는 그에게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스톡브리지에서는 이러한 말씀 목회에 대한 필요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며, 그러한 변화는 그의 정신을 훈련시키는 아주 매력적인 훈련을 가질 기회(incentive)를 앗아가 버렸다. 그는 영적인 생활과 영적인 세계에 관심이 있었다. 설사 우리가 그의 기이한 인격 전체를 분별해낼 수 없고, 또 그의 모습을 거의 발견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그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정치나 문학이나 조형 미술, 심지어는 지적인 인문과학에도 그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때로는 종교보다 더 깊이 지적 추구에 몰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장년기에 접어들어 행했던 지적 추구는, 순전히 영적 사역에 온전히 그의 능력을 집중시키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이다.”(J. De. Witt. op. cit., p.99)
에드워즈가 강하고 굳은 소명감을 갖고 살았으며 하나님이 그를 위해 예비하신 그 직무를 즐겼다는 것만큼 분명한 사실은 없다. 그는 진지하고도 헌신적인 자세로, 목회 후보자가 자신의 종교적 성향과 도덕성뿐 아니라 자신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원리에 대해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긴 바 있다. 그는 비뚤어지거나 신실하지 못한 목사가 목회를 할 땐 교회에 유익이 되기보다 더 많은 해를 끼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소명의식이 그 자신과 타인에게 요구하는 바는, 사람은 그 신앙과 영혼이 건전해야 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고귀한 부르심에 충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의하십시오.… 그(목회자)는 자신이 견지하고 있는 교리의 구조에 있어서, 아주 건전한 원리를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참된 신앙과 경건을 겸비하고 있으며, 인격이 다듬어진 사람을 찾으려고 노력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또한 그분에 의해 주어진 구원의 길을 전혀 모르는 사람, 생명의 종교가 지닌 본질을 경험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을 목사로 삼는다면, 여러분은 참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될 위험에 스스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진정 필요한 사람은, 진리와 경건을 추구하여 마치 챔피언처럼 우뚝 서는 사람입니다”(Works, I. op. cit., p.80).
에드워즈는 노샘프턴에서 성도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면서 그들에게 이처럼 권면했던 것이다. 그는 지금 떠나는 차에, 그의 후임자로 청빙될 목회자에 대하여 고심하면서 그들의 미래에 대해 염려하고 있었다. ‘고별 설교’에서 그는 목사로서 그가 얼마나 자신의 의무에 충실하였는지 언급하는 말 속에서, 자신의 열정과 헌신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저는 여러분의 영원한 행복(welfare)을 위해 분투하며 제 인생의 황금기를 보냈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제 증인입니다. 제가 게으르지 않고 제가 지닌 힘을 얼마나 쏟았는지… 도리어 나 자신을 사역에 바쳐서 밤낮으로 수고하며, 그리스도께서 제게 주신 이 위대한 사역을 위해 나 자신을 일깨워서 그 일에 나 자신을 바쳤습니다. 저는 여러분 가운데서 섬김의 일을 한 것이 진실로 위대한 일이었음을 이미 발견했습니다.”(Works, I. op. cit., p.72)
에드워즈가 사용한 언어는 사도 바울의 말과 다르지 않았으며,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한 고별 인사를 생각나게 한다(행 20:17~38). 어쩌면 에드워즈가 그 성경의 패턴을 따라 설교문을 작성했는지도 모른다. 어휘가 거의 똑같기 때문이다. 여기에 에드워즈의 사역을 지배한 이상이 있다. 분명 어느 누구도 그처럼 일찍 일어나 긴 시간 동안 일에 전념한, 부지런한 이가 없었다. 그는 목사 위임식과 안수식에서 설교할 때 이와 같이 역설했다.
“충분한 자질이 있는 사람이 목회직을 위임받아 그 신성하고 거룩한 복음의 사역을 합당하게 감당해 나갈 때,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교회에 장가든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이 지구 전체에 있는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를 목회하는 사람이 아니며, 우주적인 목사와는 거리가 멀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반 성도들보다는 보편적인 교회를 향하여 남다른 관심을 갖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는 일반 성도들과 똑같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부름을 받는 곳마다, 혹은 거룩한 일들을 섬기는 종으로 부름을 받는 곳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사역자로 받아들여져야 하며, 만군의 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보내신 사자(使者)로 영접되어야 합니다.”(Works, III. ibid., p.562).
우리는 위와 같은 현명한 충고에서도, 에드워즈의 보편성을 되짚어볼 수 있다. 그의 독서 스타일을 보면, 그가 하나님의 모든 교회의 최고 지성들과 얼마나 깊이 사귀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에게는 교파나 파벌적인 성향이 없었다. 따라서 그는 목회자의 안수를 생각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람은 지역교회에 제한되지 않고 보편적인 교회 전체를 섬기도록 구별된 것이지, 자신을 오직 지역교회에 제한시켜서 그 중의 일부만 섬기는 것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는 소위 ‘회중 교회’(Congregational Church)를 섬기는 목사였으나, 실제적인 임직과 사역에 있어서는 장로교 목사 같았다. 그는 개인주의자였으나 교회에 관한 한 독립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안수받은 사람의 직무는 하나님의 주재 아래에 있는 거룩하고 구별된 것으로 여겨졌다. ‘만군의 주 여호와의 사자’가 되는 것은 그에게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에드워즈의 설교를 통해 우리는 그의 목회에 관한 기준들을 간접적으로 발견하게 된다.
“그(목사)는 자신의 교리에 있어서, 순수하고 명료하며 온전해야 합니다. 그는 가르칠 수 있는 자여야 하며, 미숙하거나 무지한 사람이거나 혹은 훈련되지 않은 사람이어서는 안됩니다. 그는 하나님에 관하여 잘 연구하며,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하며, 성경의 능력을 잘 아는 자여야 합니다. 그는 실로 구주와 구원의 길에 통달하여야 하며… 소경을 인도하는 소경이어서는 안 됩니다. 경험적인 신앙을 잘 아는 자여야 하며, 하나님의 성령의 내적인 작용에 무지하거나 사탄의 궤계에 무지한 자여서는 안됩니다. 이는 여러 영혼들을 그들이 처한 위기에서 잘 인도할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천명하고, 듣는 자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숨겨두어서는 안됩니다.”(Works, III. op. cit., p.586)
이러한 권고의 중요성이 과소평가되어서는 안된다. 에드워즈는 다른 사람들을 신성한 직무를 위해 구별함에 있어서, 자신의 목회 방침이었던 원리들을 책으로 펴냈다. 목사는 반드시 거듭난 사람이어야 하고 영적인 생각을 지닌 사람이어야 하며, 그가 설교할 때 자신의 영혼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에 압도되어서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적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에드워즈는 자신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복음을 섬기는 자의 일과 직무는 말 그대로 종의 사역이다. 사람들의 영혼을 닦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이루어지며, 그것이 바로 목사의 주된 업무이다. 성경은 에베소서 5장 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이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Works, III. ibid., p.594)
바로 여기에 목회의 목적이 있다. 말씀의 종으로서, 그 말씀에서부터 나온 목회자의 메시지가 듣는 성도들의 양심을 깨끗게 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교회가 바로 이 영혼을 깨끗게 함(soul-washing)에 의해서 세워지고 든든하게 되므로, 따라서 목회자의 으뜸가는 중요성은 바로 강해 설교자가 되는 것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 신앙의 진리는 이론적으로 학습된 무미건조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모든 진리는 반드시 개인적 체험이라는 매개체를 먼저 통과한 것이어야만 했다. 이는 그가 하나님과 화해하려고 애썼던 유년기 시절 그의 몸부림을 통해 이미 우리가 본 바다. (확신에 대해 점차적으로 눈을 뜬 것으로 보이는) 회심의 경험으로 인해, 이 논리가의 지성에는 신앙을 합리적으로 확신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런 확신이 없이는 의심에 차 있는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고 도와줄 수 없었다. 거룩한 부르심에 응하기 전에 먼저 회심해야만 한다는 일관적인 주장이 에드워즈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는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선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교리를 체험적으로 알기를 추구했다.
“고별 설교”에서 그가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떠올릴 때, 그의 말에는 최소한의 자기연민도 없었다.
“목자장이신 그분 앞에서 우리가 다시 서로를 만날 때를 생각하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얼마나 고귀한 것이 되었는지요. 내가 내 삶에 대하여 설명해야 할 때, 우리의 마음은 다 뒤집혀서 보여지게 될 것입니다. 그때, 내가 선포하고 책으로 펴낸 교리들이 그리스도 그분 자신의 교리였는지 아니었는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또한 이 교리를 선포함에 있어서, 선포한 교리에 맞게 행동함에 있어서, 혹은 이 일에 있어서 일반적인 내 행동이 과연 그분의 것과 같았는지 아니었는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행한 일들이 내 주님이요 주인이신 그분의 의지에 부합하는, 신중하고 엄하면서도 부드러운 것이었는지 아니었는지가 드러날 것입니다.”(Works, I. op. cit., p.72)
이는 곧 자신이 지금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음을 알고, 심중에서 회개하는 사람, 겸손한 사람의 영의 고백이다. 앞서 말한 고별 설교에서도 에드워즈는 회중에게 하나님 말씀을 더 많이 아는 목사를 만나야 한다고 부드럽게 권면했다. 그는 회중에게 이르기를 목사를 청빙할 때, 영혼의 문제를 좀더 잘 알고 있고, 자신을 좀더 좋은 영혼의 상담자가 되게 할 수 있는 훌륭한 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좀더 엄격하고 확신을 주는 설교를 할 수 있는 분을 찾으라고 당부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목회를 향해 에드워즈가 품고 있는 이상의 핵심부를 볼 수 있다. 그는 고상하고 논리적이면서도 동시에 살아 있는 종교의 정확한 기준을 갖고 살았다. 그리하여 그는 필연적으로, 목회의 ‘주된 업무’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러한 신뢰와 청지기 의식 속에서, 그는 목회가 ‘위대한 일’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23. 개인적 구원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지 않고는 어떤 결심도 헛될 뿐입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복음사역자의 주된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대로 그리스도의 구속시적이 지닌 구원의 효과를 선포(preach)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의를 이루기 위한 율법의 완성이셨다. 죄 많은 인간이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은혜가 인간의 역사와 삶 가운데 개입해야만 한다. 은혜란 하나님이 우리를 기꺼이 돕고자 하며, 사랑으로 우리를 찾아 나서고. 우리에게 구애하고. 우리를 구원하려는 정신 가운데 나타나는, 비할 데 없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에서 나오는 사랑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다. 에드워즈는 신약성경과 청교도 전통을 따라 사람들에게 이 은혜를 강조하고 역설했다.
몇몇 비평가들은 에드워즈가 개개인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에 대해서만 지나치게 강조했다고 혹평했으며. 그의 설교에는 사회 구원의 영역이 다소 소홀히 여겨졌음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에드워즈의 설교문을 그릇 해석한 것이다. 에드워즈 당시는 종교가 쇠퇴하고 형식적인 신앙고백만 늘어갔기에, 전혀 사회 구원의 노력을 찾아볼 수 없었던 시기였다. 따라서 개개인의 양심을 찌르는 설교자가 절실히 요구되었던 것이다. 개개인이 죄에 대한 무관심의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는, 사회 구원을 거의 바랄 수 없었다.
에드워즈는 열정적이고 정서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회중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뜻에 헌신하도록 호소함으로써 정통 기독교신앙을 부흥시켰다. 거기에서부터 공동체 안에는 새 생명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려는 열망이 샘솟기 시작했다. 에드워즈가 은혜의 교리에 담긴 사회적 의미를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몇 편의 설교문과 많은 인용구를 통해 우리는 그가 은혜의 교리를 인간의 필요에 적용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734년에 마태복음25장 24-28절을 본문으로 한 "달란트 비유"라는 설교에서, 구세계에서 오는 새로운 영향에 내재되어 있는 부패의 위협이 신대륙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지적했다. 당시 위험에 빠져있던 식민지문화를 에드워즈가제대로 평가했던 것이다.
특별히 특권 속에 살아가면서도 신실하지 못한 회중들을 보면 그는 날카롭게, 거의 노여움으로 그들을 책망했다. 그러나 택한 자들과 신실한 자들에게는, 마태복음 22장9-10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에서처럼,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모든 부류의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셨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의 설교를 통해 그 당시 사회의 단순한 신분 계층을 추정할 수 있다. 에드워즈는 '어린이, 청소년, 중년. 노년' 에 대해 말을 했고, 그 다음엔 '남성과 여성'을 언급했고, '하층민과 중산층'과 같은 다양한 계층에 대해 논했으며. 그들 각각의 도덕적 상황에 말함으로써 결론을 맺었다.
이러한 구분은 회원자격을 제한하는 식민지와 본토 교회, 혹은 마을이라는 배경에 상반된 것이었으며, 결국에는 실패로 끝난 교회법과 신정국가를 도모한 법률제정 등에도 반대되는 것이었다. 설교에서는 어떤 사회적 현상도 사회학적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관점에서 판단되어야한다. 은혜는 그 공동체 안에서 변혁을 이루어내는 힘이었기에, 에드워즈의 설교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의 도구로써 인정받았다.
이러한 칼빈주의적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진리를 개인에게 적용시키려는 의도는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사회 지도층인사로서 자신이 깊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그 공동체를 비난하지 않고, 그는 각 개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나님의 주권교리와 인간의 전적인 부패교리에 대한 믿음 때문에,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여 그 은혜를 간구하는 것이 매우 긴급함을 주장했다. 그리고 회개와 믿음이란 개인의 영혼이 하나님의 뜻을 성령으로 조명받을 때, 반응하게 될 때에 오는 것 이라고 주장했다. 에드워즈는 사회로서의 세상이나 보편성에 근거해서 교회를 구원하려 하지 않고 개인을 구원하려는 열정에 사로 잡혔다. 그는 선택 교리에 관해 언급한 <신앙 감정론>(Religious Affections, Works. I, op, cit…p. 179)을 저술하였다. 이것은 교회의 궁극적 승리를 보증하기 위해 저술된 것이 아니라, 각개인의 영혼에게 윤리적 구속 가운데서 나오는 구원을 확신시키고자 쓰여진 것이었다. 신성과 인성의 구별은 에드워즈의 가르침에서 가장 근본적이며 자주 반복되는 주제라 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신앙에 대한 바른 견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다. 그는 개개인이 하나님과 대면하도록 했음에 틀림없으며,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헛되이 수고했던 것이다. 이 점은 '고별설교" (Worh Iid.ibid.,p.76)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지금부터 누가 여러분의 영적 지도자로서 여러분과 관계를 맺게 되든 간에, 제 바람과 기도 제목은 양무리의 목자장이신 그분이 여러분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여러분의 인도자가 되시며, 또한 영원한 빛의 근원이신 그분이 여러분의 눈을 열어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 아래서 하나님께로 여러분을 이끌어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죄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거룩해진 이들 가운데서 유산을 받기 바랍니다. 그 위대한 날에, 여러분과 저의 재판관 앞에서 서로 다시 만날 때, 우리는 기쁨과 영광 가운데 다시는 헤어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각 개인이 바로 이 설교자의 관심이었다. 실제로 그는 회중의 진실한 목사이며 신실한 목자였다.
그는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끌고자 애썼으며 은혜가 그의 모든 열정의 중심이 되었다. 따라서 그런 견해는 에드워즈로 하여금 은혜에 대해 설교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하였다. 에드워즈에게 있어 설교는 구원의 매개체였다. 설교는 또한 자신의 마음에 담긴 은혜의 결과물이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종교가 타락하고 형식적인 신앙고백이 늘어가는 시대에 회심의 방편으로 성례전을 강조했을지도 모르지만, 에드워즈는 예배의 중심에서 설교의 우선됨을 회복했다. '성례전은 회심의 매개체가 아니라 이미 선택받고 회심한자들의 특권' 이라는 주장으로 인해 한때 그는 자신의 삶과 목회의 터전을 잃을 위험에 처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설교가 예배와 목회의 초점임을 재확인했고. 동시에 하나님과 영혼사이의 만남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작용하는 시간임을 강조했다. 자기 노력과 발전을 향한 모든 결심들 역시, 만일 은혜가 그 의지들을 돕기 위해 적극적으로 역사하지 않았다면 다 허사였을 것이다.
이것은 청교도 교리에 일치한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자신이 설교할 때. 사람들이 그 설교를 통해 회심하고 거듭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그에게 있어서 방법론이 아니라 설교가 최우선 되게 하는 이유였다. 그는 어렸을 때에 경험한 영적 조명의 영광과 경이로움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다. 이 경험이 설교할 때 그에게 영감을 주었다. 설교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극대화시키고 다른 이들의 회심을 추구하는 것 이었다.
"선택된 사람들 중에 열이면 아홉이 설교를 통해 그들의 소명을 깨닫게 되었고 또한 좋은 설교를 계속 들으면서 자신의 소명을 재확인하였다."(Miller.op. cit..P.298) 설교는 영혼을 비추는 조명의 수단으로서, 많은 이들을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는 한 방편이었다. 따라서 에드워즈의 생각에는 교회라 불리는 조직체가 성도들에게 그다지 연연해할 필요도 없었고, 목회자 역시 그렇게 많은 권위를 소유할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요즈음은 로마가톨릭교회의 오래된 규율이나 심지어 국가교회조차도 성례전으로 그들을 속박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성도들은 '그 신실한 말씀의 소리'를 통해 회심이 일어날 때, 은혜의 기적이 역사하는 것을 보았다.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에드워즈는 은혜의 효과를 증거했던 것이다.
24. 부흥의 불길
“신앙과 영원한 세계의 위대한 것들에 대한 지대하고 진지한 관심이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에드워즈의 목회가 세계 지성에 미친 영향을 평가함에 있어서, 우리의 시대가 그 당시와는 전혀 다르게 변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당시엔 교회가 공동체 생활의 중심지였고, 설교자는 괄목할만한 인물로 존경받았으며,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이 확고하고 견실했다. 혁명적 사고들이 아직 믿음의 균형을 깨뜨릴 만큼 스며들어 있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일정한 지역 교구에 속하여 확실한 믿음을 갖고서 질서정연한 생활을 하는 상황이었기에, 설교자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엔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하는 청중만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드워즈는 실로 놀랄만한 은사를 지닌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회심이라는 지속적 경험에서 비롯된 놀라운 신앙적 감동은, 그가 설교할 때 그에게 ‘부수적인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수많은 이들이 새 삶의 필요를 자각하게 되었다. 그의 목회는 노샘프턴을 공략했으며, 마치 하나님이 주시는 강한 숨결이 뒤덮는 것 같았다. 마른 뼈들이 소생하고, 교회는 마치 출전하는 군대처럼 일어섰다. 부흥이라는 말은, 회중을 일깨우는 설교를 전하는 임무를 받드는 청교도 목사들을 떠올리거나, 혹은 그들의 설교를 직접 들을 때 사람들이 자주 되뇌는 말이었다.
그의 사역(ministry)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죄의 흉악성으로 인한 죄에 대한 자각이 있었다. 청중은 인생 위에 내리실 하나님의 심판과 회개치 않는 자들에게 임박한 최후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압도되어, 영적으로 몸부림치며 부르짖게 되었다.
“마을 전역에서 그리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각계각층의 사람들 속에서, ‥‥ 지대하고 진지한 관심이 ... 보편적인 것이 되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본질적으로 비참한 상황을 자각하고 자신이 영원히 멸망당할 위험에 처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Works, III, op, cit, p.234)
그래서 에드워즈는 나중에 <놀라운 회심이야기>(A Faithful Narrative of the Surprising Work of God) 이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하게 된다.
그가 섬겼던(ministered) 성도들은 성경 진리를 잘 알았지만, 그들의 신앙적 기준은 죄나 낮은 도덕적 기준과 타협하는 수준까지 타락했다. 그런 그들에게 그의 설교 효과는 즉각적이고도 주목할 만했다. 1734년의 ‘영적인 회복(quickening)’은, ‘당신께서 보기에 합당하도록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증오’, ‘끝내 회개치 않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위험’. ‘하나님과의 교제의 축복’ 등과 같은 문제에 대한 설교에 뒤이은 것이었다. 1735년에 그는 ‘죄인들을 저주하시는 하나님의 공의’(The Justice of God in the Damnation of Sinners)라는 제목으로 설교했고, 율법이 주는 무서운 공포와 죄의 흉악성에 대한 강조가 사람들의 양심에 깊이 와 닿았다.
“죄인을 영원히 유기하고 멸망시키는 것은 하나님께 공의로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율법이 정죄한 벌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말하는 바는, 모든 종류의 반대를 말하는 입들을 그치게 만들며…, 모든 죄의 악한 본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끝없는 죄악들과 죄의 극악무도함을 생각해 보십시오.”(Works, IV, op.cit.,p.227).
이 설교에는 ‘극악한’, ‘극악무도’, ‘부패한’ 이란 말이 마치 후렴구처럼 자주 등장한다. 그와 같은 말들에 대한 강조는, 곧 죄의 자각을 강조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적용 부분에 도달하여 이렇게 선포했다.
“이 교리를 개진함에 있어서, 저는 무엇보다도 먼저 유죄판결(conviction)을 통해 저주를 두려워하는 죄인들에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을 영원히 거절하고 멸망시키시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정당하고 의로운 일일 것이라는 사실, 바로 그 사실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죄를 자각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마저 없는 여러분은 정말 저주받은 불쌍한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여러분 위에 머물러 있으며, 하나님이 여러분을 어떻게 처리하실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어떤 일이 생길까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의 죄를 깨닫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여러분의 지나간 삶을 돌이켜 보십시오…. 얼마나 않은 사악한 죄를 저질렀는가를!”(Works, IV, op, cit., p.232-233)
하나님과 양심 앞에서 죄의 극악함을 다루는 것 뿐 아니라 죄에 대하여 직선적인 언어를 사용했던 그의 설교는, 곧 하나님의 성령의 강권 아래서 죄를 회개하게 만들었다. “그가 죄에 대하여 책망하시리라”(요 16:8).
둘째로, 죄의 자각과 더불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삶으로의 회개가 있었다. 부흥 기사는, 사람들이 양식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사람들은 마음의 고통과 몸부림에서 벗어났다. 회개의 영과 변화, 회심의 경험 등에 있어서, 뉴잉글랜드는 관습적인 종교의 위치로 돌아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설교를 듣고 각성하고 그 경고를 받아들인 수많은 사람들은, 곧 죄로 가득한 관행들을 청산하고, ‘구원받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면서, 구원의 방편에 대한 진지한 적용, 즉 성경읽기, 기도, 묵상, 하나님의 집의 성찰, 재인적인 수련 등에 헌신했다. 어떤 이들은 두려움에 압도되어 예배 도중 울부짖거나 심지어는 경련을 일으키기까지 하였다. 또 다른 이들은 실제로 너무 큰 충격을 받아 그로 인해 쇠약해지고, 건강이 나빠지기까지 하였다.”(Works, III, ibid., p.231-233).
그 당시에 에드워즈가 전한 설교는 경고와 긴박감이 서린 것이었고, 두려움에 호소한 것이기도 했다. 두려움과 자기 이익에 호소하였던 점 때문에 에드워즈를 비판하는 소리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강한 색채와 저주의 언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분노를 선포했을 때, 우리는 그 모습의 또 다른 면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에드워즈의 정신과 언어 속에는, 사랑과 자비 속에서 구애하는 특성과 같은 보완물이 항상 드러난다.
<뉴잉글랜드의 신앙 부흥>(Revival of Rgligion in New England)이라는 책에서(Works. III, op. cit., p.338-339), 그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설교가 영혼을 밝히고 양심을 깨워서 자신의 필요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 설교가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목양설교에는 은혜가 들어 있지만, 그는 자기 성도들이 죄의 유혹에 약하며 죄와 타협하는 이들임을 알고 있었다. 구애의 특성은 ‘구원에 나타난 지혜’(Wisdom Displayed in Salvation)라는 제목의 설교에 등장한다.
“저는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나아와 이러한 방식으로 그분의 구원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함으로써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구원을 얻도록, 그리스도께 나아오며, 진정으로 그분을 가까이하며, 그분을 신뢰하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이 초대를 받아들인다면, 여러분은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고안물이 주는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오로지 여러분만을 위하여 고안된 것인 만큼, 여러분은 이 모든 유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지혜로써 구원자의 위격(person)안에 우리를 그분에게로 이끄는 온갖 매력이 있도록 고안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죄인들을 향해 위대한 사랑을 지니신 한 분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가능한 가장 소중한 방식으로 그 사랑을 보여 주어야 했습니다. 티끌 속의 벌레 같은 이들을 향한, 신성을 지니신 분의 사랑보다 더 겸손한 사랑이 있을 수 있습니까? 원수를 향한 사랑보다 더 아낌없는 사랑이 있을 수 있습니까? 죽는 사랑보다 더 위대한 사랑이 있을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이를 위해 죽는 것보다 더 깊은 사랑의 표현이 있을 수 있습니까?”(Works,IV, ibid, p.165-167).
육체적이고 감정적인 현상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의 나약함 때문인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에 있어서, 그 현상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가졌던 사람은 오히려 다른 사람이 아닌 에드워즈였다.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경험 속에 자주 보이는 혼합적인 것들, 말하자면... 자연적인 것이거나 타락한 것이 거룩한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발견했다(Works.III.op.cit.,p.339).
에드워즈는 부흥 기간에, 그의 설교가 많은 사람들을 바른길로 돌이키는데 사용되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것은 바로, 그러한 설교의 결과로 일어난 기독교의 부흥이었다. 그가 속한 지역사회에서나 대각성운동의 시기에 미국 전역으로 널리 퍼진 모든 운동을 제외하더라도. 에드워즈는 당시에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조지 휫필드가 미국을 방문하여 많은 복음적인 운동에 참여하였고 동시에 많은 부흥사건을 목격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뉴잉글랜드의 부흥은 부흥사들의 방문결과 때문이 아니라 에드워즈와 다른 헌신된 청교도목사들의 신실한 목회 때문이었다.
에드워즈의 부흥설교가 끼친 유익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독단적인 의지나 하나님의 보복적인 분노 등의 교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불쾌한 성질의 것이었지만, 에드워즈는 다른 진리의 말씀들도 강조함으로써 그러한 선입견이 주는 좋지 않은 인상을 수정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1735년에, 사람들로 하여금 풍성한 삶을 찾게 해 준 것은, 저주설교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칭의’라는 제목으로 행해진 일련의 설교였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칭의의 믿음은, 복음적인 회개로 이어졌다.
“저주의 상태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가납(可納)할 상태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근거는, 우리의 탁월함이나 선함이나 의로움, 그 어느 것도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얻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와 존귀함 때문입니다.”(Works, IV, ibid., p.128).
에드워즈는 인간이 죄로 가득함을 선포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도덕적이고 선한 삶을 살 수 없는 존재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모든 사람을 가장 악하고 엄청난 죄를 가지고 있는 동일한 수준의 사람으로 획일화시키지 않았다. 만일 그렇게 말했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고 부추기는 꼴이 되었을 것이다. 오히려 에드워즈는 도덕적 안정을 가져오고 관례화된 신앙생활에 활기를 자아내는, 복음적인 윤리에 대해 강조하였다.
그 당시 뉴잉글랜드의 삶은 형식적이고 틀에 박혔으며 도덕적 의무에 관심이 없는 삶이었다. 십계명이 암송되었는지는 몰라도 실생활에서는 손쉽게 무시되었다. 에드워즈의 설교는 바로 이런 사람들의 앙심을 찌르고 윤리 감각을 일깨워 주었다.
“부흥된 기독교의 경험 가운데 장점을 들자면, 수많은 이들이 그리스도께 회심한 것과 교회에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든 것, 그의 교구 외에 다른 교구들에서도 일어난 영적인 자극들, 잉글랜드에서 “복음주의의 부흥”으로 알려진 것과 같은 운동을 격려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조지 휫필드가 에드워즈를 방문했을 때, 그들은 상대방에게 서로 매료되었다. 휫필드와 웨슬리 형제의 주도로 진행된 복음주의 운동이 에드워즈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을지는 쉽게 가늠할 수 없으나, 그사이에 깊은 관련이 있었음은 분명하다.“(cf, Halevy, also J.W.Bready, England:Before and After Wesley).
위에 언급된 장점들과 더불어 교회로 돌아온 새로워진 선교 비전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소책자 보급단체 설립과 같은 것이다.(e.g., the American Tract Society and the Willard Tract Depository in America; in England, the Religious Tract Society and the 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쇼). 그리고 사회적 노력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종교가 주요한 주제이자 하나님 말씀의 실체가 되었다.”(Works,III, op .cit., p.235) 감정적인 열정이 가라앉자 다른 결과들이 공고해졌다. 에드워즈의 증언을 들어보자.
“그러한 경험의 참된 특징들은 이러하다. 신령한 것들의 확실함과 그 존재와의 관계를 인식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신적인 것들의 탁월하고도 온화한 본성을 이해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유익과 그들의 도덕적인 탁월함을 도모했다. 또한 복음적인 겸손함이 있었다. 그리스도인다운 영적인 따스함과 사랑, 온유함, 자비 등 그리스도를 닮은 정신 가운데 보이는 성품의 변화가 있었다. 영적인 성취를 갈망함과 동시에 영적인 욕구가 더해 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의 행동 속에 나타나는 열매가 있었다. 이 열매는 자기 양심은 물론 이웃에게까지 진실하게 증거되었다.”(Works, Ill, op. cit., p,234, "Narrative").
이러한 신앙의 역사(役事)가 미국 전역에서 이처럼 강하게 일어난 적이 있었던가? 많은 사람들이 회심자를 25,000명에서 50,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지만, 믿을 만한 통계치는 아직 없다. 바잉턴(Byington)에 의하면 뉴잉글랜드의 교회 생활에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흐름이 있었다. “에드워즈를 추종하는 사람들로서 그의 칼빈주의적 견해를 따르는 정통회중교회주의자로 알려진 사람들과 그리고 여전히 구원방법의 사용으로서 불완전한 언약(the Half-Way Covenant)을 고수하고, 부흥운동에 호의적이지 않으며, 유니테리언으로 알려진 사람들이었다”(Byington, “Jonathan Edwards and the Great Awakening.” Bibliotheca Sacra. LV., 1898, p.127).
그 종교적인 결과의 흐름이 어떠하든 간에, 후일 예일대학의 학장이 된 에즈라 스타일스(Ezra Styles)목사에 의하면 1740년과 1760년 사이에 뉴잉글랜드에 설립된 교회가 약 150여 개가 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경험적인 기독교는, 갇혀 있는 경건한 죄의식을, 인간의 필요를 채워 주는 새롭고도 창조적인 통로가 되도록 풀어 주었음이 분명하다. 에드워즈의 설교와 그 결과에는 인도주의적인 주장이 부족한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에드워즈의 신학이 쇠퇴한 것은, 18세기 뉴잉글랜드의 이상에 영향을 미치거나 당시 사회의 즉각적인 필요를 채워 주기에는 부적합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의 사회세력과 정치 세력이 에드워즈 신학정신에 불리하거나 부적절한 원칙들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Haroutunian, op. cit., p.xxii). 이와는 대조되는 견해도 있다. “에드워즈의 교리는 박애정신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W.Walker,p.256).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하나있다. ‘신앙과 영원한 세계에 대한 관심’이 그 당시 기독교의 상황에서, 진정한 신앙 체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이것은 능동적이고 일깨워진 양심을 지닌 사람들이 행하는 실제적이고 사회적인 일들의 전례(前例)가되었다. 아직은 월리엄 제임스나 하버드의 시대, 즉 [종교 체험의 다양성](The Varieties of ReIigious Experience)과 같은 시대가 아니었다. 제임스보다 앞서서. 종교적 감각에 근거한 회심이라는 문제를 놓고 심리학과 신학사이에서 고뇌하였던 이가 바로 조나단 에드워즈였다. <신앙감정론>(Religious Affections)과 <뉴잉글랜드의 종교부흥에 대한 고찰>(Thoughts on the Revival of Religion in New England)이라는 에드워즈의 작품은, 종교 심리학에 관련하여 다른 연구의 길을 열어 주었다.
에드워즈는 심리학이 자기인식의 수단이 되기 전부터 벌써 심리학자였다. 그는 잘 관찰하고 성실하게 기록하였으며, 실용주의적인 접근은 설교자로서 그가 지닌 천재성에 핵심이 될 정도였다. 에드워즈식의 설교결과는, 그가 영향력을 미쳤던 공동체 안에서 죄를 깨닫게 하고, 삶을 회개하게 하며 신실한 신앙심을 부활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처럼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좀 더 친밀하고 개인적으로 다루었으며, 바로 그 바탕에 근거하여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진보가 뒤따랐던 것이다.
25. 설교동기(Preaching Motives)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그가 모든 설교에서 지향한 위대한 목적이었다.”
에드워즈를 바로 판단하려면, 그를 신학자요 철학자일 뿐 아니라 설교자로서 보아야만 한다. 그는 평생을 이 열정에 지배를 받으면서 살았다.
그가 노샘프턴에 있는 회중들 가운데 있었던 때를 보건대 그는 야망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으로 사람들을 섬기려고 했다. 그가 좀더 일찍 발탁되었더라면 학계에서 더 많은 업적들을 이루었을 것이며, 그 업적을 일일이 따져본다면 그를 프린스턴 대학 학장으로 선택한 것은 때늦은 일이었다. 당연히 그의 진지하고도 건전한 책들은 인정받게 될 것이고, 18세기 지성의 산물들을 알고자하는 사람들에 의해 계속해서 읽혀지고 연구될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에드워즈에 대해, 멋진 계산으로 어려운 철학적 논문들을 만들어내는, 태엽이 잘 감긴 기계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설교와는 관계없는 몇몇 작품들, 이를테면 감정과 영혼의 내면세계 속에 있는 정서를 다룬 작품들 속에 있는 것이다. 냉랭하고 동떨어진 지성은 에드워즈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다. 정서는 종교적 경험 속에 있는 행위의 원천이다. 그 당시의 상황을 세심하게 관찰한 한 사람에 의하면, 에드워즈는 지금 우리가 평범하게 여기는 일들에 많이 관여했음(즉. 학문의 개척자였음)을 알 수 있다.
종교적 감정의 전반적인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그는 심리락이 학문으로 인정되기도 전에 벌써 심리학자였다. 진실과 정확한 관찰이 모든 학문의 기초라면, 에드워즈는 최상급의 심리학자였다. 사람들의 감정적인 삶의 다양한 사실들을 신실하게 기록함에 있어서, 그는 <참회록>에 나오는 성 어거스틴을 생각나게 할 정도다. 사실을 해석하는 일에 있어서, 그는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의 선구자였다. <신앙감정론>(Religious Affection), <사고와 부흥>(Thoughts and Revival), 이 두 책은 그동안 망각은 아닐지라도 무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오늘날에는 다시 읽혀져야 한다. 그렇지만, (설사 읽는다 해도) 그 책들을 깊이 파헤쳐서 분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력을 다해 씨름해야만 할 것이다(Sperry, Religion in America).
이런 말에 비추어 보면, 그의 설교 또한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설교문들은 그의 대작들 속에 발전되어 있는 많은 사상들(ideas)의 뿌리이자 모판이었다. 그의 기이한 인격의 핵심은 바로 이 설교문들 속에서 찾아야한다. 그렇게 되면, 그의 설교 유산을 단순히 엄격하고, 교조적이고, 저주가 담긴 것으로 치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불같은 사상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이면에는 사랑과 거룩함을 추구하는 열정적인 마음이 있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거룩한 사랑이었기 때문에, 그는 설교가 하나님의 위엄을 더 크게 드러낼 것임을 확신했다. 무엇이든지 좀더 쉽게 하려는 우리 세대에는, 오늘날의 설교 속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와 같은 요소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의 사역의 목적(end)은 그가 지향했던 바(aim)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 그가 추구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복하는 삶을 살도록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의 설교는 이 목적을 향해서 매우 열정적이었다. 삶과 섬김에 있어서 모든 것들, 그리고 그가 읽고 묵상하는 중에 얻은 모든 것들이, 바로 이 영광스런 목적과 고상한 사상에 바쳐졌다. 좀 어려운 그의 작품보다는, 그의 설교가 모든 사람들과 교통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는 말로써, 그리고 후에는 인쇄된 설교문으로써, 사람들을 얻으며 설득하고자 했다. 그는 판결문 같은 설교를 했다(preached for a verdict). 그의 다음 세기 사람 존 헨리 뉴먼과 같이, ‘청중의 구원’이 그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어느 설교선집(Works, V, ed. Dwight, op. cit., p.249, “Preface to Five Dis-courses,” 1738)에 붙인 서문에서,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자신을 표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독자들이 이 설교들 속에 가장 중요한 진리가 드러나 있으며, 그 진리가 강하게 양심에 전해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면, 사람들을 일깨우고, 확신하게 하고, 겸손하게 하며, 굳게 세우는 진리를 발견한다면, 경건함이 진지하게 흐르고 있음을 발견하고, 자신도 억제할 수 없는 경건함 마음이 생긴다면, 정독하는 가운데 영원한 것에 대한 실재와 그 무게를 느낀다면, 최소한 아그립바처럼 거의 크리스천이 될 정도로 설득된다면 그는 적어도 이 책을 읽은 것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게 될 것이다. 만일 내가 실수하지만 않는다면, 강단에서 선포되는 것이든 책자로 배포되는 것이든지 간에, 그런 것들은 바로 내 설교에서 추구하는 위대한 목적이다. 또한 그것은 소위 설교라는 이름 하에 전달되는 현대의 세련된 이야기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목적이기도 하다. 그런 설교들은 키케로나 세네카 같은 사람이나 <방관자>(Spectator) 같은 잡지에서 다루었다면 더 좋았을 법한, 그리고 세속의 철학자들에게서 거의 복음을 발견할 수 없는 것과 다름없이 복음을 담고 있지 않은, 도덕적인 주제에 대한 장광설에 불과하다. 지금 내가 언급한 이 중요한 목적들은, 진실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며, 출판하는 일에 겸손한 종이 된, 나 조나단 에드워즈의 진정한 바람이다.”
이처럼 자신을 드러내는 서문은, 그가 설교의 목적에 대해서 얼마나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는가를 보여 준다. 그는 복음이 모호해지고 흐려지는 설교들에 대해 비난하는 사람이었으며, 동시에 도덕적 수필들은 그가 구독했던 <방관자>와 같은 잡지에나 실릴 것이지, 기독교 강단에는 적합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에는 일종의 아이러니가 드러난다! 사람들을 설득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 바울의 말이나 에드워즈의 확신 속에는 바로 그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어느 세대의 설교자에게든지 문제는, 어떻게 하면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대가가 될까. 어떻게 하면 청중으로 하여금 영원한 것에 대한 실재와 그 무게를 느끼게 할 수 있을까? 이는 결코 쉽고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거나 대충하는 설교자는, 자기 자신의 진정한 필요를 모르는 청중을 설득할 수 없다. 강단에 서는 사람은 절실한 마음이 없이는 실패하고 만다. 지성에 덧을 던져 주고, 만족감을 주거나, 심지어는 고난당한 사람을 위로할 수도 있지만, 그들을 일깨우지는 못한다. 사람들을 일깨우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설교자의 가장 우선되는 임무다!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증거들만 봐도 에드워즈는 사람들을 일깨웠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가 대중 연설의 기술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그의 영이 지닌 신실함과 헌신적인 목적 때문이었다.
설교에 있어서 그의 위대한 목적은 로마서 4장 5절을 본문으로 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Justification by Faith Alone)라는 설교(Works, IV, op. cit. , p. 64)에 잘 드러나 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에드워즈는 각각의 단어와 구절들을 하나씩 차례대로 주도면밀한 추론적 논의에 끌어들이면서, 그의 주해 기술을 보여 준다. 그는 서론에서 먼저 네 가지 요점을 제시한다. (1) 칭의는 사람을 ‘경건치 아니한 자’로 여긴다. (2) “일을 아니한” 자는 곧 경건치 않은 자로 보인다. (3) 여기서 말하는 믿음 곧,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것”은 순종과 똑같다. (4) 그러므로 사람자신에게 있는 칭의는 어떤 것도 결코 그에게 의로 여겨질 수 없다.
그는 이러한 교리(진리)를 다음과 같이 발전시킨다.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우리 자신의 어떠한 태도나 선함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다음과 갈이 전개한다. (1) 그것에 대한 설명. (2) 그 진리에 대한 증거를 생각해 보라. (3) 복음에 순종하는 것이 이 일에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보여 주라. (4) 반대에 대답해 주라. (5) 이 진리의 중요성을 생각해보라.
에드워즈가 교리를 취해 그것을 상세하게 풀어 전도 방식으로 적용하려 했다는 점을 보면, 설교 준비에 있어서 그 중요한 목적들을 항상 염두에 두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복음 전도는 그를 움직였던 성령의 산물이었다. 에드워즈는 분명한 목적과 성령의 조명이 가득한 주해를 설교에 담았고 아래의 사실들을 항상 염두에 두었다. (1) 설교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진리가 드러나고, 그 진리를 강하게 강조하여 사람들을 일깨우고, 확신을 주며, 겸손하게 하고 굳게 세워 주는 것. (2) 듣거나 읽는 이로 하여금 진지한 마음상태를 갖게 하는 경건함의 지속적인 흐름. (3) 정독하게 되면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경고를 받아서, 어느 정도 영원한 것에 대한 실재와 그 무게를 느끼게 하는 것. (4) 적어도, 아그립바처럼 거의 그리스도인이 될 정도로 설득당하게 하는 것. 이러한 네 가지 전제들은 에드워즈 설교의 “위대한 목적”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이 ‘복음 전파의 열정’ 이라는 동기에다 그 모든 것들이 채워지면서 그의 설교에 기여했던 것이다.
26. 목회적 관심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십시오.”
에드워즈는 절정에 다다른 호소 가운데서 청중에게 결단과 헌신을 촉구하곤 했다. 사람들에게 간청하는 복음주의자의 영혼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는 손에 성경을 들고 서서, 입술에는 진리의 법을 담고, 세상을 등진채로,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각 개인을 제외하고 다른 것에는 아무관심도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삶에는 사회적이고 공적인 의무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복음주의자의 외침은 언제나 끝이 아니라 새 삶의 시작일 뿐이었다.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17장과 23장), 에드워즈는 사회적 의식이 있는 사람이었다. 종교적 경험의 본질에 대한 연구와 영혼의 상태에 따른 부흥연구, 매우 친밀한 관계를 지닌 농경 사회에서 살았다는 사실 등이 그의 공동체 의식에 기여했다. 그는 영혼의 목자요 설교자일 뿐 아니라 시민이자 친근한 이웃이었다.
그에 대한 가혹한 비난 가운데 하나가 “지옥 불” 설교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청교도 전통의 관점에서 보아야 마땅하다. 그는 그의 수하에 있는 가족들을 돌보았고 노샘프턴의 도덕적 상태를 염려했다. 그 당시 노샘프턴에서 멀지 않았던 보스턴에서는 주류판매가 무절제와 타락을 야기시키며 사회를 장악하고 있었다. 불법적인 노예 매매도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부도덕이 일반화되고 기독교에 대한 무관심이 수천 명을 지배했다. 사회적 상황이 뉴잉글랜드라는 성경적 국가의 이상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거룩한 시도가 그리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
에드워즈는 여행을 통해서 이러한 상황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설교목표중의 일부는, 침체된 교회를 일깨워 제자리를 찾게 하고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개인에게 설교하면서도 사회적 의식을 갖고 있었다. 에드워즈는 자신을 복음의 대를 잇는 한 사람으로 여겼다.
그는 토마스 후커(Thomas Hooker)와 토마스 쉐퍼드(Thomas Shepherd)의 연구자였고, 그들의 저서에 큰 영향을 받았다. 우리는 그가 쉐퍼드의 저서, <종교적 열정에 관한 소고>(A Treatise Concerning Religious Affections)에 얼마나 크게 영향을 받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쉐퍼드의 저작물을 여러 번 인용하고 있다. 특히 그는 쉐퍼드의 <열 처녀 비유>(The Parable of Ten Virgins, 1695)를 사용하면서 그것이 유익함을 알게 되었다. 그 책에서 쉐퍼드는, “저 유명한 신(神)의 체험”(that famous experimental divine)이라는 제목으로(Works, I, op.cit., P.58), 잘 알려진 비유에 대해 시리즈로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에드워즈도 후에 동일한 성경 본문인 마태복음 13장에 대해 일련의 강해설교를 했다.1653년 출간된 쉐퍼드의 저서 <건강한 신자>(The Sound Believer) 역시 에드워즈의 내적인 삶에 양식이 되었다. 이 모든 사실을 통해, 주관적인 연구와 많은 자기반성에 몰두한 결과, 복음 전도자로서 설교할 때에 사회적인 내용을 염두에 두지 않았으면서도, 실제는 그렇지 않았던, 한 사람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영혼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부르심이 사회의 필요와 균형을 이루었다.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이 어우러졌고, 사회 구원 속에 개인의 신앙이 표현되었다. 각 개인들을 향한 복음의 부르심 속에는 사회적인 프로그램이 내재되어 있었다. 에드워즈는 그의 설교에서, 식민지 문화와 뉴잉글랜드의 자치구, 그리고 그 당시 일어난 사건들을 언급했다. 드물기는 했지만, 분명 그런 언급이 있었다.
그는 마태복음 22장 9절 10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이들로 하여금, 바로 오늘,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하여 그리고 그의 섭리가운데,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게 하십시오. 청년들과 아가씨들과 노년과 중년과 어린이들이, 남녀와 흑백인종 모두가, 신분의 고하와 빈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또한 큰 죄인들과 위대한 빛에 대항하는 죄인들과 양심의 가책을 거부하는 죄인들과 타락한 모든 사람들이, 오래 된 죄인들과 구도자들이, 자기 의를 매세우는 자들과 하나님과 언쟁하는 자들 모두가 그분의 부르심에 귀기울이게 하십시오. 죄를 뉘우치는 사람들, 무감각하면서도 걱정 없는 사람들, 도덕적이면서도 나쁜 사람들, 선하면서도 악한 사람들, 가난한 자,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돼지와 함께 쥐엄 열매를 먹는 탕자들이나 부랑자들, 큰길이나 울타리에 머무는 걸인 등 어떤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든, 어떤 상황에 있는 단체든, 모든 정당과 모든 교파와 그 외 어디에 속해 있든지 그분의 부르심에 귀 기울이게 하십시오.”(cf. Andover Collection and MS).
어떤 부류의 사람도 여기에 누락된 자가 없고 어떤 사회 계급이든지 여기에 다 포함되어 있다.
“많은 설교 원고에 대해 기록이 적혀 있는데, 이것을 보면 에드워즈가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원칙은 밖에서 얻은 예화들이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언급함으로써 설교를 윤색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의 설교시 재료선택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한 기록을 보면 그가 해마다 추수감사절만 특별한 설교를 하는 날로 지켰을 뿐 아니라. 그 다음주도 그렇게 한 것을 알게 된다”(Yale Manuscripts참조)
1745년 9월 19일 인디언과의 전쟁 선포-이사야 8장 9,10잘을 본문으로 설교;금식일 -1741년 프랑스 함대 도착 - 프랑스와의 전쟁 - 이사야 33장 19절을 본문으로 설교 - 끝; 1748년 1월, 법원 화재 - 이사야 30장 12, 13절을 본문으로 설교 ; 1742년 12월 8일 수요일 밤 Logwood House의 화재와 아이들 - 미가서 6장 9절을 본문으로 설교 ; 1743년 7월 아침 예배 시 온전한 십일조에 대해 - 말라기 3장 10, 11절을 본문으로 설교 ; 1745년 3월 1일(금식일), 반역의 경우 -마태복음 16장 18절을 본문으로 설교.
거의 모든 가정들이 교회에 소속되었기 때문에 교구의 문제는 곧 공동체 전부의 문제였다. 에드워즈가 노샘프턴의 위기와 징계라는 제반 문제에 직면했을 때, 거기엔 그럴 수밖에 없었던 두 가지 사회 문제가 있었다. 약혼한 젊은 남녀가 옷을 입고 같이 잠자리에 드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요셉이 겪은 유혹”(Works, IV, op. cit., p.585)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한 적이 있다(bundling ; 웨일즈나 뉴잉글랜드에서 있었던 풍습으로서, 대가족이 작은 집에서 함께 기거해야했기 때문에 사생활의 보장부족으로 인해 발생한 한 풍습임). 에드워즈에 의하면, “그 풍습은 젊은이들을 죄로 이끌었으며 죄에 노출시켰다.”(cf. Hopkins, op. cit., p.166).
그가 당시의 젊은이들과 다른 견해를 갖고 있음이 드러난 것은, 젊은들이 경박한 소설을 읽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들었을 때였다(그 당시의 몇몇 소설들이 그러했는데, 그때는 문제시 되었지만 오늘날은 그렇지 않음).특별히 어떤 한 책을 읽음으로써 죄를 범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있다는, 보다 심각한 증거가 있었다. 이 책은 그 당시 산파들의 교재로 사용되었던 <산파의 업무>(Work of Midwives)라는 책이었다. 그 책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돌려 읽혀지고 있었고, 그리하여 최악의 가정이 추론되었다. 당회에서는 조사에 착수했으나 그 젊은이들은 그들을 비웃었다. 그때 목사 에드워즈는 그 사실을 공표했고, 그리고 강단에서 당혹해 하는 회중에게 젊은이들 중 몇 명의 이름을 밝혔다. 사람들은 그 사실(젊은이들의 행동을 안 것)에 대해서는 그리 당황하지 않았으나, 그런 행동(명단공개)을 한 목사에 대해서는 분노를 표시했다.
이것은 그를 사임하게 만든 과정을 언급할 때 앞에서 이미 논의된 바 있다. 여기서 위의 사건을 거듭 언급하는 이유는, 복음적인 열정을 지녔던 에드워즈가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대해 편협한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는 도덕적 권고나 훈련을 요구하는 사회적 위기를 모른 체 넘어가지 않았다. 목사로서 사람들을 다룰 때 그에게는 두려움이 없었다. 에드워즈에게는 두터운 가족애가 넘치는 가정에 태어난 열 한명의 자녀가 있었다. 사라 에드워즈(Sara Edwards)는 손님을 후히 대접할 줄 알았고, 친절했으며, 부지런했고, 필요할 때는 아이들에게 엄격했다. 그녀는 에드워즈를 한 남자로서 존경했으며 또한 그를 영적인 지도자로 여겨 잘 섬겼다. 인디언을 대상으로 한 선교사이자 그의 딸 중 한명에게 구혼했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는 그의 집에서 간호를 받았고, 사망할 때까지 돌봄을 받았다.
그 가정의 신앙에는 언제나 기쁨이 뒤따랐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정생활의 규범으로 여겨졌다. 에드워즈의 아내는 어떻게 그가 하루에 열 세 시간동안 방해받지 않고 연구할 수 있게 해 주었을까? 그녀는 인자하면서도 강인한 여인이었으며 시련과 불행의 시절에 그의 곁에 있어 준 사람이었다. 에드워즈는 가정적인 남자로서 속세를 떠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또한 좋은 아버지이자 헌신적인 남편이었다. 그는 ‘12개의 긴 파이프’를 포함한 일반적인 가정용품들의 대금으로 세 달에 두 번씩 지불 청구서를 받았다. 그는 인간미가 있는 사람이었으며, 그에게는 과도한 연구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랠 위안거리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커다란 모조지(foolscap ; 17 × 3인치 크기에 ‘풀스캡’ 무늬가 있었음)와 봉랍, 그리고 철자법에 관한 책 등의 평범한 구매 가운데 그가 가장 만족했던 것은, 아마도 ‘4실링 6펜스짜리 장난감’과 같은 약간의 목록이었을 것이다. 보스턴에 가서 자녀들을 위해 장난감을 사는 에드워즈의 모습을 한번 훔쳐보는 것도 괜찮은 일일 것이다.
설교는 오래 된 영수증이나 편지, 혹은 습자책 위에 쓰여 있었다. 홉킨스(Hopkins)가 쓴 <에드워즈의 삶>(Life of Edwards)이라는 저서를 보면, 가정사에 대해서는 그의 아내에게 그 공적을 돌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편지를 통해 에드워즈가 가정사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에드워즈는 그의 모든 자질과 더불어 사업 분야에 있어서도 현실적이고도 실력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일생을 통해서 그가 수입을 얼마나 현명하게 관리했는지 그의 절약과 검소함에 대해 생각해 보자. 세 명의 시집간 딸에게 재산을 분배해 주고 한명의 아들을 대학교육을 시켰으며, 대가족을 부양하고 난 후 그가 사망할 당시 그가 남긴 재산은 상당히 넉넉한 금액이었다. 그것은 영국화폐로 환산해서 900파운드로 추정되고 있다.
그의 건망증에 대한 일화들이 되풀이되고 있지만, 설교 끝에 교회에 알려야 할 공지사항이나 공식행사를 큰글씨로 자세히 적어 놓는 것이 그의 습관만 빼면, 설교 원고 속에서는 그의 건망증을 추측할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오늘날 설교자들도 같은 습관을 갖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는 그들이 모두 건망증이 심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단지 기록을 통해 기억을 도우려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모든 것을 통해서 드러나는 사실은 에드워즈의 평범한 모습과 융통성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하는 그의 권고가 설교에서 반복되는 이유는 그것이 개인 구원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그 개인적인 구원은 개인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저울과 하나님의 척도를 통해 동포들이 갖고 있는 죄를 보게 되었다. 그는 인생들이 죄가 많은 데다 무감각하기 때문에 다른 방법으로는 깨우쳐지지 않을 것을 알고 “지옥 불” 설교를 했던 것이다. 만일 삶의 거룩함과 온전함이 공동체를 구원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기본적인 욕망의 찌끼조차 태워 없어질 때가 벌써 왔을 것이다.
그의 설교가 그 사회에 불러일으킨 결과는, 뉴잉글랜드의 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선술집이 문을 닫고, 영적 무관심이 양심의 각성으로 무너지고, 회심한 이들이 교회를 그들의 진정한 안식처로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 공동체는 도덕적 상처에서 정결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으로 보아 에드워즈는 모든 사람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설교의 목표를 “모든 이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귀 기울이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정확하게 주장하는 이의 설교라면, 진정 어느 누구도 반대해서는 안된다.
27. 신학적 저작(Theological Writing)
"내 머리와 가슴 속에는 언제나 신학의 본체라는 위대한 작품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 우뢰의 아들은 만군의 주 여호와의 사자로서 주의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그는 사역을 향한 부르심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 분명했으며, 해석된 교리라는 진리를 그 누구보다도 더 확신했다. 그의 설교에는 청교도의 신학적 경향이 나타났고, 그 당시 사람들에게 소개된 체계적인 구원의 도식으로부터 벗어날 여지가 거의 없었다.
그에게는 설교와 관련해서 보다 폭넓은 독자층을 위해 메시지를 인쇄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많은 설교가 소책자 형식으로 발행되고, 종종 그런 것들이 책이나 소논문의 시작이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확인했다. 1738년에 고린도전서 13장을 본문으로 한 16개의 설교문이 인쇄되었다. 그것이 '사랑과 그 열매'(Charity Its Fruit)라는 책이다(제8장 참조). 1852년, 말년에 그의 친구이자 편집자가 된 타이런 에드워즈(Tyron Edwards)가 이 작업을 책임지고 수행했다. 모든 덕목의 총체인 사랑을 다룸에 있어서도, 아마 위의 책을 시작으로 해서 1738년부터 더 많은 생각과 묵상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1755년에 <참된 미덕의 본질>(The Nature of True Virtues)이라는 소논문을 만들어 냈다.
그의 저서 중 가장 철학적인 것으로 알려진 <의지의 자유>'(The Freedom of the Will)에 관한 책도 마찬가지였다. 이 책은 에드워즈가 스톡브리지에 머무는 동안이었던 1754년에 출간되었는데, 이는 30여 년에 걸친 그의 사색과 글쓰기의 산물이었다. 그것을 주제로 많은 설교를 선포했고, 그 결과 그 주제가 자연스럽게 발전되었던 것이다. 무엇이 그 사상을 싹트게 했을까? 1738년 노샘프턴으로 시절까지 돌아가 보면, 에드워즈가 마태복음 11장 16-19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와 만날 수 있다(Yale Collection and MS, with notation참조). 그 설교에는, 의지라는 주제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함께, 기본적인 틀을 가지고 그 주제에 대해 분석에 분석을 거듭했던 흔적이 있다. 거기에 담긴 모습은 의지 문제와 씨름하면서 설교할 때 '크게 외치는' 설교자의 모습이다. 어떤 설교들은 그의 신학에서 나온 것임에 반해, 그 설교들은 하나의 신학을 산출하는 것이었다.
사람의 인격 속에 내재된 '기능' 에 관해서 토론하던 시대에, 에드워즈는 오로지 '의지' 만이 인간의 선택이라는 행동에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全人)이 인간의 선택 행동에 기능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 소논문은 다음과 같이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1부-용어들에 대한 정의/2부-도덕적 행위자의 자유가 과연 의지의 자유에 근거할 수 있는가의 여부에 관한 토의/3부-의지의 자유가 도덕적 행위에 필수적인가의 여부/4부-결정론에 대한답변 등. 거기에 나오는 논의는 간결하고단순하며 , 성경은 예화를 들 때에만 사용되었다. 무엇이 의지를 결정하는 것일까? 분명히 동기일 것이다. 자연 본성의 세계에서처럼 도덕의 세계에서도 모든 것이 필연적인 우연의 사슬에 매여 있고, 그것이 모든 행위자로 하여금 자신의 본성에 따라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유는 무조건적인 방종(liberty of indifference)이 아니라, 각자가 기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기회이다. 밀러(Miller)가 요약한 대로 '당신은 당신이 할 수 있는 바를 자유롭게 행할 수 있지만, 원치 않는 바는 자유롭게 할 수 없다‥‥당신은 얼마든지 의로울 자유가 있다'(cf. Miller, Jonathan Edwards, p. 258). 이 책에서 에드워즈는 논쟁자들을 향해 그의 철학적 신학을 설교하였다.
신학은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원동력(lifeblood) 이었다. 그가 쓴 글에는 신비적 요소가 많아서 사용된 용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늘 분명했던 것은 아니다. 그의 노트를 보면 뒤에 나오는 작품들을 더 잘 알 수 있는 힌트와 제안들이 담겨 있다. 죄에 대한 강조는 분명했다. 사람은 죄인이며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다. 사람의 본성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비추어 볼 때 완전히 죄로 가득했다. 하나님의 완전함과 사랑은, 인간타락의 비극과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격을 드러냈다.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 주기 위해,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이 선포되었다. 에드워즈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부패를 가져온 죄에 빠져 있음을 믿었다. 자신이 아무가치도 없는 존재임을 느꼈고,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직을 제의받았을 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여러 면에서 볼 때 어두운(unhappy)성격을 지녔습니다. 몸은 나약하며, 기질 또한 생기 없고 진득진득한 점액질이며, 영적으로도 침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말이나 행동거지가 어린애처럼 유약합니다. 거기에다 대화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무뚝뚝하고 딱딱합니다. 특히 대학이라는 조직에는 더욱더 맞질 않습니다.”(Works, I, op. crt., p-47)
그는 단지 겸손한 자세로써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죄로 가득한 영혼이라는 견지에서 자신을 판단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가 가족 중에 자기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어린이들을 가리켜 '독사'라고 말한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 악명 높은 설교에서 그가 사용한 '거미' 라는 단어는, 그가 다른 상황에서 알미니우스파 사람들을 가리켜 말했던 것에 비추어 볼 때, 주의해서 이해해야 한다. 지옥에 대해 언급했던 에드워즈는 또한 천사와 같이 천국에 대해서도 말했던 것이다.
에드워즈는 회심과 중생의 필요성에 대해 가르쳤다. 새로운 삶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었다. 그는 인간 양심의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작용을 거절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거스르는 것으로서 싸워 이겨야 할 악이었다. 그는 회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최우선의 요소로 받아들였다. 의지에 관한 연구에서 그는 회개나 믿음보다는 하나님의 주권과 중생으로 사고의 방향을 전환했다. 사람은 자기 기질을 따를 때에만 자유롭다. 거룩함을 지향하는 기질은, 곧 우리 안에 직접 성령을 나눠 주심이다.
"Miscellaneous Notes" (예일 컬렉션 참조)가운데 겉장에 '경건의 표지라는 제목이 달린 부분이 있고, 또 그 안쪽에는 "은총의 표지"라고 쓰여 있는 부분이 있다. 거기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여기서 은혜의 진정한 성경적 표지가 무엇일까 묻고 싶다. 마태복음 13장23절에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라고 되어 있다. 요한1서2장4절과 3장6절을 참고할 것”
이제 영적 진보를 기대하며 작성한 그의 개요를 따라가 보자
1.하나님의 말씀이해하기 2.열매 맺기 3.그리스도의 명령 지키기 4.선한일하기 5.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기 6.우리의 혀를 제어하기 7.영적인 것에 주리고 목마르기 8.로마서 8장9절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의 영을 갖기 9.특별히 온유하고 용서하는 영을 갖고 그것을 실천하기 10.형제 사랑 11.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가슴으로 믿고 확신하기 12.시험 속에서 인내하기 13.하나님께 신실하기(마24:45,46:단12:3:벧전5:4참조) 14.성실함에 대한 증거로 인내하기 15.포괄적인순종(사울처럼 하지 않고) 16.하나님을 신뢰하기 17.하나님과 그리스도안에 있기를 원하고 그 안에서 안식하기 등등.
'책' 끝에는 에드워즈에 의한 각주가 첨가되어 있다. '성실과 열심에 관하여 그리고 성령에 관하여 비망록 183쪽을 보라." 그는 성령에 대한 교리에 많은 주의를 기울였고, 부흥시대의 회심에 대한 연구에서 성령의 역사에 대한 증거들을 기록했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통해, 똑같이 내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입증하려고 했다.
에드워즈는 이미 오래 전부터, 지식은 본유적인 사상(innated ideas)을 바탕으로 하는 게 아니라 경험과 감각에 근거한다는 로크(John Locke)의 이론에 매혹되었다. 경험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졌으며 그것은 아마도 회심을 요청할 때 가장 강했을 것이다. 그러나 감각에 대해서는 로크와 견해가 달랐다. 로크는 물질적인 것들이 감각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가르쳤지만,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감각은 영혼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영향력이었다.
에드워즈는 설교할 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사람들을 움직이심을 보았고, 그런 결과를 야기 시키는 설교는 사람들의 감동을 유발시킨다고 생각했다. '거룩하고 초자연적인 빛"이라는 제목의 설교와 <인격적인 이야기> 라는 그의 책을 비교해 보면, 에드워즈의 입장 에서는 그런 생각이 필연이었음이 예증된다. 후기 논문에는 설교시 그 자신의 경험에 대한 자료들이 문서화되어 있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신학적 신념에 따라 자신만의 방법을 형성해 나가면서 보다 체계적이고 완벽한 저작물을 완성하려는 욕망을 갖게 되었다. 그의 노트에는 씨가 되는 생각(germinal idea)들이 많이 들어 있으며, 때로는 이미 방대한 저작물을 쓰기 시작했다는 암시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 일을 완수할 수 있기도 전에 그에게 죽음이 닥쳐왔다. 그가 스톡브리지에 사는 동안 그는 사상가요 철학자로서 자신의 입장을 출간하려는 의도를 어느 정도 수행할 수 있었다. 그 기간은 저작활동이 열매를 맺었던 시기였다. 그 어두운 시기에, 에드워즈는 흥미 있는 주요 저서 네 편을 완성했다 <의지의 자유에 대한 조심스럽고도 엄밀한 연구>(Careful and. Strict Inquiry into Freedom of the Will, 1754),<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목적>(Concerning the End For which God Created the World 1755) <참된 미덕의 본질>(The Nature of True Virtue,1755),<원죄를 옹호하는 기독교의 위대한 교리>(The Great Christian Doctrine of Original Sin Defended,1758).
목회 초기부터 그는 <도전받는 기독교 주요 교리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A RationaI Account of the Main Doctrines the Christian Religion Attempted)이라는 포괄적인 책을 완성하기 위해 노트를 축적하고 있었다. 이 책은 “모든 인문학과 과학이 완전해질수록 종국에는 신학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그의 글쓰기나 기록습관은 이런 생각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심지어 그의 설교 중 많은 부분이 일부분 갈은 생각을 반영하였다. 그러나 출간된 두 저서, 즉<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목적에 관하여>(Concerning the Eng of Creating)와<참된 미덕의 본질>(True Virtue)은 보다 방대하면서도 그의 지성이 갖고 있던 경향을 보여 주 는 한 저작의 일부분이었을 것이다.
또 다른 중요한 기획은 <구속사>(History of the Work of Redemption)라는 작품이 되었다. 이것은 역사 형태로 된 '신학의 본체'(a body of divinity)였다. 그는 노샘프턴에서 이따금씩 이 역사의 흐름을 따라 설교했으며, 성경 연구를 보충할 만한 것 이라면 모두 읽었다. 이렇게 기획된 저작의 한계와 범위는 '영원에서 영원까지'였고, 이는 에드워즈의 신학적 대작(magnum opus of theology)이 되었다. 교의학의 영역에는 <신학대전>(Summae Theologicae)이 지금까지 출간되었으며 지금도 계속 출간되고 있다. 만일 에드워즈가 그와 같은 저작물을 출간 할 때까지 살았다면, 그것이 사상과 신학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을까? 우리 그의 초안과 구상의 일부분이 그의 아들에게 남겨졌고, 그의 아들은 설교에 대한 부분을 에던버러의 얼스킨(Erskine)에게 주었고, 그것이 1774년에 거기서 출간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현재까지 인간에 대한 성경 역사 이야기를 하나님과 연관시켜서 자세히 말한 것으로서, 독창적인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역사는 교회를 통해서 종교개혁 때까지 계속되고 있었고, 에드워즈는 앞으로 다가올 세대를 통 틀어서 종말론을 쓰기 시작한다. 이 부분에 있어서 그는 천년왕국(계 20장)에 대하여 후천년설을 따랐고, 그에 수반되는 사건들을 역사의 종말로 보았다. 그는 어쩌면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그때를 나타내는 징조들을 읽기 갈망하는 오늘날의 천년왕국 신봉자들과 별다르지 않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기서 다른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에드워즈의 한계에 주목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가 역사의 포괄적인 해석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과학자로서 저명한 아이작 뉴턴경은 많은 점에서 에드워즈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었으며 , 에드워즈는 뉴턴의 저서와 그의 과학적이고 성경적인 해석을 높이 평가했다.
우리 시대는 지금 역사와 시간에 대한 연구로 돌아가고 있고, 그 맥락 속에서 중요한 연구가 종말론에 집중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에드워즈는 몽상가였을까, 아니면 예언자였을까 ? 그는 분명 다방면에서 지적으로 추구한 유산을 남겨 주었다. 그는 계속해서 종교적 경험의 영역을 탐구하였으며. 지식의 경계선을 넘어 영적 세계까지 발돋움하였다. 그의 연구는 방대한지식의 보고(寶率)와 도서관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우리에게 도전을 준다. 꾸준히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문자화 했던 에드워즈는, 아직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서 쏟아져 나오는 진리와 빛으로 향하는 길을 가리키고 있다.
28. 윤리적 현실주의(Ethical Realism)
“사랑은 모든 덕의 총화(總和)이며, 선을 행할 마음이 있게 합니다.”
에드워즈의 설교에는 구석구석마다 ‘팽팽한 윤리적 긴장감이 흐른다.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일관성을 가지고 회심한 삶을 살라는 단호한 요청은, 바로 교리적인 설교에서 나왔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Works, IV, op. ck. , p. 575)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는 지금 우리의 삶이 앞으로 다가올 삶의 준비 과정이라면 이 땅의 일상적인 것들에 많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즉, 에드워즈가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에드워즈는 그같이 편협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은 천국으로 가는 바른길이었습니다.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가야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바로 그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순종과 자비와 선을 행하는데 열심을 내면서 그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고난 중에도 인내하면서 그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는 “선을 행하는데 열심”을 내야한다는 말 속에서, 선한 삶에 대한 개념을 설명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의 가르침이 사회적인 악들을 다루는데 적합하지 못했다고 비난해왔다. 그러나 정식 논문을 보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는 전제 아래 사람을 향한 자비’라는 내용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생각에는 두 가지 큰 계명이 한데 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 노샘프턴 목사의 생각 속에는 항상 타인에 대한 인간의 의무가 들어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행실이야말로 참된 신앙의 모든 증거 가운데 으뜸”이라고(Works, II, ibid. , PP. 182-228, “참된 미덕의 본질”)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그의 설교 속에는 주요논문들의 서문을 찾아볼 수 있는데 신령한 은혜에 관하여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관 이란 이 두 가지가 그의 주된 사상이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없을 때를 가정해서 , 에드워즈는 <원죄>(Original Sin)에 대한 논문을 썼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행위’ 에 대해 물을 때, 하나님의 통치 방식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대답이 바로 <의지의 자유>(The Freedom of the Will)라는 책 속에 나와 있다. 그리고 은총의 수여에 관해 묻는다면 <은총>(Grace)에 대한 논문이 그 답이 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행해지는 (인간의) 도덕적 행동에 대한 그의 생각을 알고 싶으면, 그의 저서 <신앙감정론>(Re1igious AfFection)을 펼치면 되고, (우리의) 도덕적 품행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알기 원할 때는 <참된 미덕의 본질>(The Nature of True Virtue)을 보면 된다.
유년기에 형성된 에드워즈의 철학적 이상주의는 후일 그가 강조했던 것들의 기초가 되었다. 그의 도덕철학에 대한 주관심은 형이상학적이거나 사색적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목회현장에서 일어나는 개인적인 문제들을 대처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는데, 이것은 수집된 많은 설교에서뿐만 아니라 다양한 논문 속에서도 발견된다. 그의 설교들은 지극히 복음적이며 윤리적이었고, 각 설교마다 진지한 도덕적 목적이 주는 긴장감이 스며 있었다. 그는 설교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실제로 시험해봤고, 묵상하는 가운데 자신의 철학을 위한 보다 분명한 공식을 찾아냈다. 「사랑과 그 열매」(Charand Its Fruits)라는 제목의 시리즈 설교에서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를 염두에 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사람에 대한사람의 의무에 대해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께 대한그리스도인의 의무는 보다 유명한 설교들 가운데 잘 선포되었지만, 고린도전서 13장을 본문으로 한 이 시리즈에서는 이웃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에드워즈에게는, 사랑이야말로 참된 도덕성의 핵심이요, 자비(benevolence)의 동기였다. 그는 다른 청교도들과 마찬가지로 인도주의적인 호소에 무관심하지 않았는데 헌신적인 아내와 자녀들로 이루어진 그의 가정, 그리고 가난한 이들과 불행한 이들에 대한목회자로서의 관심 등으로 볼 때, 그는 이 진리를 균형있게 인식했으며 바른 시각을 갖고 있었다.
한편, 에드워즈에게 있어 종교는 합리적이어야 했고, 또 그만큼 윤리적이어야 했기 때문에, 그의 설교에는 인간의 도덕적 삶이 갖는 본질과 그 운명에 대한 이해(a view)에서 나온 윤리적 역동성이 있었다. 그는 인간이 하나님께 의지해야함을 주장했고, 또한 성령에 대한 교리를 개진하면서, 영적인 은사들은 거룩한 사랑이라는 윤리적인 세례를 받을 때 그 정점에 달한다고 역설했다. “사랑은 모든 덕의 총화이며, 선을 행하게 한.다”는 표현은(Works, II, op. cit. )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해주길 원하는 대로 그들에게 하라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그의 박애 철학(benevolent philosophy)의 핵심이었다.
비록, 섀프츠베리(Shaftesbury)나 허치슨(Hutcheson)과 같은 18세기 철학자들은, 쾌락과 자비가 윤리학의 기본적인 개념이라고 가르쳤지만, 에드워즈에게는 쾌락을 구하는 단순한 욕망이상의 무엇이 있었다. 그는 초월적인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세계에 자신을 드러내셨던 하나님에게서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았고, 그 하나님이요 사람이신 분 안에서 참된 아름다움과 선함이 지닌 탁월함을 보았다.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심은 이기적인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극도의 고통을 당하시기까지 한 거룩한 사랑과 자기희생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사람의 도덕적 본성 위에 비추고 그 위에 불타오르는 참된 아름다움을 포착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참된 자비와 그 열매에 대해 설교하고 가르쳤으며, <참된 미덕의 본질>(The Nature of True Virtue)에 대한 논문을 쓰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때, 사랑은 삶을 완성했다(Love crowned life).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자연인의 자비심(natural benevolence)을 뛰어넘는 독특한 애정이요, 자연인의 양심이나 도덕심을 초월한 것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 자연인이 타고난 자질은, 그러한 특별한 의미에서 볼 때 거룩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진정한 덕이란 환경의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경험은 모든 자연적인 애정에 앞서는(Primary) 애정이다. 그 체험이 자연적인 애정을 변화시키며, 그 자연적인 애정에 최상의, 혹은 초자연적인 성격을 부여해준다. 결국 완전한 의미에서 , 그 사랑에는 사욕이 없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는 사랑의 특징은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완벽하게 구현되었고, 이는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그의 영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에드워즈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이 사랑 외에는, 그 어디에서도 삶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탁월함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비록 에드워즈에게 있어 기독교는 윤리 법전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은 지극히 윤리적이며, 사랑은 모든 덕의 극치(crown)였고, 그래서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있는 은총의 증거로서 아주 실제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29. 실제적이었던 신비주의자
"야고보 사도가 제시한 온전한 인간이 지니는 표지를 확신하도록 결심했다."
이 말은 에드워즈의 목표이자, 그가 실현한 바였다. 그는 1723년 7월 18일자 일기에 그렇게 기록하였다. 인생의 초년 시절 그는 '해 질 무렵'이라는 말을 덧붙었다. 이는 그가 또 하루의 긴 연구를 마쳤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에드워즈가 그의 말년에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해 주는 것일 수도 있다. 그가 청교도로서 거룩한 죽음으로 인생을 끝냈을 때, 과연 거룩한 삶이라는 그 찬란한 절정에 이르렀는가?
1723년 1월 12일, 위의 기록보다 조금 이르게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내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했고 그것에 대해 기록해 두었다. 조금도 내 것이 될 수 없는 미래를 향하여 존재하기 위해, 또한 어떤 점에서도 자신에게 권리가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기 위해, 나는 자신과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리고 다른 어떤 것도 내 행복의 일부가 될 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또 그렇게 행동하며, 하나님을 나의 모든 분깃이요, 비할 수 없는 행복으로 삼기를 엄숙히 맹세했다. 또한 내 힘을 다하여 인생의 끝날 까지 세상과 육체와 마귀를 대적하여 싸우고, 그분의 율법을 내 순종의 지속적인 법칙으로 삼기로 했다.”(cf. Yale Collection, Diary).
말하거나 행동하는데 있어서 부족한 부분이 있음을 인정했던 것으로 보아 그가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정숙하게 됨' 이라는 성경적 의미에서 그는 온전함에 도달하였을까? 비평가나 평론가에 의하면 그는 이 부분에 있어서 다른 이들보다 높은 경지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뉴잉글랜드에서 목회한 이후로 2세기 동안 그의 저작물들이 계속해서 연구되고 있다. 연구의 한계가 있다면 오직 70여 편의 설교만 출판되었을 뿐,1100여 개 이상의 원고를 입수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다만 그의 주요 신학저작과 동시대인들이 그에 관하여 남긴 기록을 발췌한 것으로부터 그의 특징 몇 가지를 추적할 수 있을 뿐이다.
그에게는 비밀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신비가 그를 둘러싸고 있다. 묘한 카리스마가 그를 덮고 있다. 청교도 관습에 따라 자신을 감추었기 때문에 사실 그를 있는 그대로 보기는 어렵다. 신학자, 철학자, 문필가 등등은 그를 표현하는 여러 방식들이다. 이러한 시도에 있어서 우리는 그동안 그를 목양적인 설교자로 여겨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그는 완전한 사람이었을까? 그가 노스햄턴에서 입교인의 자격 문제, 자신의 월급인상, 젊은이들에 대한 징계 등을 강요했을 때 오류를 범했던 것은 아닐까? 만일 그가 그 당시에 좀 더 인내하고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여 회중의 연합과 화평을 위해 타협하였더라면 그가 목회자로서 그 교회에서 종신토록 섬길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그의 건강도 좋아지고 수명이 연장되지 않았을까? 위대한 신학저작을 쓰려고 했던 그의 계획과 그것을 완성했을 가능성은 또 어떠한가? 만일 그가 노스햄턴에서 프린스턴으로 초청을 받았더라면 그 당시 그 대학에서 유행하던 교육체계에 영향을 끼쳤을까?
이러한 것들은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질문들이다. 학생으로서 따로 떨어져 홀로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이 참된 목회자로서 길을 갈 때에 나쁜 영향을 끼치진 않았을까? 그는 사람들을 심방할 때 수줍음과 임기응변의 부족함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 그는 그가 했던 것보다 더 바르게 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많은 부분에 대해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의 강한 성격과 고귀한 이상과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데 자신을 드리게 한 영적 열정을 평가하려고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설교자로서 그를 평가할 때, 그는 수세기를 통틀어 위대한 경지에 오른 이들 중에서도 으뜸을 차지해야 한다. 그는 뉴잉글랜드의 뛰어난 지성인이며 전 미국 역사에서 선각자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사상과 깊은 통찰로 옷 입혀진 생각들을 보면, 그는 독특하고도 천재적인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 스코틀랜드의 찰머스(Thomas Chalmers)는 에드워즈에게 깊이 영향을 받은 사람이자 한 국민으로서 다음과 같은 경의를 표한 바 있다.
“에드워즈의 인격 속에는, 한편으로는 기독교 목사로서의 단순함과 디를 한편으로는 철학에 있어서 거장의 힘과 솜씨가, 가장 진귀하고도 탁월하게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다. 그는 그 사실을 인식하며 그를, 전례없이 깊은 지성이 '헌신된 영성'과 '성별됨'에 결합된, 자장 위대한 신학자로서 평가해왔다.”(Chalmers Works,1,p.318).
그는 복음을 전하는 목사로서 자신이 확신하는 것이 '회중에게' 어떤 의무를 요구한다면, 이런 문제들을 회피하거나 타협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가 그의 성도들에게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강요했든지, 아니면 그 성도들이 그를 쫓아냈을 것이다. 그의 저주설교에는 그의 마음과 성격의 특성이 드러나는데, 그 특성은 자신의 믿음에 대한 강한 확신과 불유쾌한 사실을 피하거나 감상적으로 대하지 않는 건전한 사실주의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노스햄턴에서 면직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 비극적이지만 사실이다. 직선적이며 잔인하고 무자비한 사람이라는 평가가 에드워즈에게 합당한 최종적 평가일까? 엔필드(Enfield)에서 무서운 하나님을 자애로운 아버지로 표현하고 그분을 사랑으로 나타내는 설교를 사실적 표현으로 증거하는 사람을 에드워즈라고 할 수 있을까? 무엇이 에드워즈의 진정한 모습일까?
한편으로 그는 회심할 것을 강권할 때 기독교인의 훈련과 양육방법을 무시했던 설교자로 평가되고 있다. 기독교인의 삶에서 자기반성과 '믿는' 기쁨을 없앴다는 이유 때문에, 부흥의 시대에 악습과 비이성적인 광신을 고무시켰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또한 죄와 인간본성의 참담함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사람을 냉소적으로 만들었으며, '지옥불' 설교로부터 얻은 것이 있다면 쓰디쓴 유산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가 교회에서 중도 언약(Half-Way Covenant)사상에 반대하였을 때, 성례전 존중의 경향을 몰아내고 실제 영적생활을 도왔음을 인정하는 이들도 있다. 그는 인간내에 존재하는 참 자유를 인식함으로써 신학과 종교적 경험 속에 있는 이성에 호소하였다. 자애심에 대한 교리는 사랑을 신학적 윤리의 중심에 자리잡게 하였다. 성령에 의한 중생을 강조함으로써 그는 기독교의 신앙고백을 그리스도의 고귀함을 아는 경험적 지식으로 회복시켰다. 베인턴(Bainton)은 에드워즈 안에서 문예부흥과 종교개혁, 계몽운동 그리고 경건주의 등이 독특하게 결합되어 흐르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cf.Yale and the Ministry, p.17). 요컨대 그는 비범한 청교도였던 것이다!
설교자로서 평가할 때 우선적으로 그는 영혼에 대해 조심스러웠으며 죄 많은 인간을 경이로운 하나님의 은총으로 일깨우고 싶어했던 목회자이자 대중전도자(pastor-evangelist)로 볼 수 있다. 그를 가리켜 가혹하고 무자비하게 동료를 비난하는 자로 표현하는 것은 왜곡되며 불공정한 평가이다. 인간적인 애정의 끈이 아무리 튼튼하다 해도 사악한 죄인의 운명을 바꾸어 주지 못한다는 이 끔찍한 신념을 가지고 어떻게 그가 가정에 평안히 앉아있을 수 있었겠는가? 그 당시 그러한 믿음은 특별히 에드워즈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회 양쪽에 보편적인 것이었다. 목회자요, 아버지로서 갖고 있는 자상한 성품은 고약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설교자로서 그의 위대함은 바로 이러한 요소들이 독특하게 결합된 결과였다.
패티슨(T.H.Pattison)은 <기독교 설교의 역사>(The History of Christian Preaching)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에드워즈에게는 이런 특이한 결합이 있었다. 진지한 성격과 깊은 통찰력, 생생한 상상력에 기인한 내적 사실주의, 자신의 연구에 대한 철학적 이해력, 논리적인 명확성, 굳은 의지와 유연함의 드문 결합. 또한 불타오르는 헌신된 마음, 일심불란의 자세,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영혼을 구하고자 애쓰는 숭고한 노력에서 발견되는 의지와 지성과 감성의 완벽한 이치 등이 있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영광에 자신의 삶을 고귀하게 바친 성자였다. 그는 뛰어난 영적인 인물로서 그런 패턴을 따라 그의 사역을 산위에 우뚝 세웠다. 그는 신비주의자로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신비를 들여다보는 특권을 받았다. 우리는 그를 시대에 뒤떨어진 철학이나 형편없는 신학의 한 예로 치부해서는 안된다. 악명 높은 설교로 인해 그를 무정한 신학자로 간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의 목회사역에 관해 연구해 보면, 그런 견해가 정당하지 않음이 입증된다. 그의 인생은 믿음과 신의라는 확실한 기반에 근거하였으며 그의 메시지는 영원한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우리는 에드워즈가 당시 하나님을 대변하는 목소리로써 목회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대를 배경으로 그를 평가해야 한다. 사람과 메시지가 함께 하나가 되어 인생을 구속시키는 영원한 진리를 찬양하는데 사용되었다. 설교자로서 그는 상상력이 깃든 이성을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하나님의 영이 주는 신비한 기운이 없을 때에는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런 것을 줄 수 없다. 그의 지성에 주어진 '성령의 조명', 그리고 영적인 확신으로 불타는 감정을 보면, 우리는 그 비밀을 여는 열쇠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가 더럽혀지고 윤리가 땅에 떨어졌던 시기에 영원한 교리를 선포하면서 설교하였던 실제적인 목회자로서 그를 평가해야 한다. 그는 가망이 없어 보이지만 소망이 필요한 시대에 부흥의 경로에 물을 대 준 거룩한 도구였다. 에드워즈는 의지에 호소함으로써 건조한 신앙고백의 교리를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는 죄인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때까지 그를 설득하는 설교자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인이 믿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 진리로 설득하는 것이며, 능력 있는 사랑으로 설득하고 확신시키는 행위였다. 그러한 일은, 우리에게 사실적인 설교로 기억되는 지옥의 구덩이 위에 매달려 있는 죄인의 모습에 의해서가 아니고, 자비와 은총을 주시는 손, 그리고 갈보리 십자가에서 못박히고 상처난 손, 즉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의 모습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에드워즈가 효과적인 설교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영과 시역이 완벽하게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목표는 뚜렷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구원에 관심을 가진 나머지, 자신의 비전을사용하여 선견자로서 그가 설교하는 회중이 감동 받게 하려고 했다. 그러한 의지가 가장 강한 동기가 되어야하기 때문에, 그는 최고의 탁월함으로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호소했다.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자신의 좁은 소견 속에서 논쟁하며, 전통적인 신학들과 다투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러한 사람들을 끌어올려서, 지혜 가운데 움직이고 사랑 가운데 구속되는 우주의 영광을 보게 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경고하기를, 그 놀라우신 하나님, 존귀하신 구원자에게 거역하는 일을 중지하라고 했다.
그는 한 세대 전체가 무한한 거룩에 대항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뉘우치면서 재를 쓰고 엎드릴 때까지, 강력한 논거로 주장하였다. 그러한 겸비함 가운데, 그토록 줄기차게 추구했던 자유의지의 기가 꺾였다. 먼저는 그의 교회에서 하나님을 향해 대적하는 것을 포기했고, 그 다음으로는 100여 개의 교회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이 오해하고 거역하였던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그분을 향한 성별된 삶으로 돌아왔다.(W.L.Anderson, The Preaching Power of J.Edwards, Congregationalist & Christian World,LXXXVIII, Oct. 1903, p.466.
30. 복음 전도의 간절함(Evangelical Passion)
“저는 지금 어떻게 하면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를 침노할 수 있는지,몇 가지 지침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주권 아래 있기를 즐거워하였던 그에게 하나의 신비와 수수께끼가 있다. 우리가 그의 서적과 설교집을 연구하다보면, 사람은 죄 앞에서 너무도 무력하기 때문에 구원을 향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구원은 오로지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자 구원자이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일 뿐이다. 영혼을 설득하는 역할을 하는 은총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고유한 원리이다. 죄인은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지만, 그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에드워즈가 계속 강조하는 이 원리는 바로 칼빈주의에 들어 있다. 하나님의 주권은 죄인을 구원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役事)를 요구한다. 알미니안의 해석을 반대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다. 그 해석은 인간이 제시된 복음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하게 될 때,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행위와 인간의 믿음을 높이 사기 때문이다. 그는 전투적인 자세로, 당시 새 교리를 가지고 뉴잉글랜드 사람들을 감염시킨 알미니안 설교자들에 대항하여 설교하고 저술했다. 에드워즈의 설교는 대부분 평화로웠으며 자주 권면하기도 했다. 에드워즈는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다녔던 윗필드나 웨슬리와는 달랐다. 그는 한곳에 머물러 있는 목회자로서, 복음전파자의 사역을 해냈다. 바로 여기에 비밀(mystery)이 있다. 어떻게 칼빈주의 신학자가 알미니안 복음전도자처럼 설교하였을까?
영혼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신비한 사역에 대한 연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드러낸다. 다시 말하면 에드워즈는 무릎 꿇고 기도할 때는 철저한 칼빈주의자였지만, 반면에 행위에 있어서는 알미니안주의자 같았다는 점이다. 이 말은 그가 항상 알미니안의 용어나 신학을 사용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설교와 가르침 속에서는, 홀로 영혼위에 역사하고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그는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선포할 때에는, 권고자의 언어요 전도자의 언어를 사용했다. 아마도 그의 마음속엔 요한복음 6장 37절의 말씀이 들어있었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그의 설교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이율배반이 존재했고, 에드워즈는 실제적인 방법으로 그 이율배반을 풀어냈다. 그는 오직 하나님께서만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다고 가르치면서, 동시에 그의 성도들에게 천국으로 들어가라고 권면했다. 그는 요한복음 6장 37절 말씀 중에 "내게로 오는자․․.'라는 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그토록 권면했던 것이다. 인간은 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자유로웠으며, 실제로 그러했다.
에드워즈는 '천국을 침노하라(Pressing into the Kingdom)‘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열정적으로 선포하고 있다.
“제가 이 교리 사용하고자 하는 것은 주님이 없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침노하도록 권면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어떻게 하면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를 침노할 수 있는지, 몇 가지 지침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1. 여러분 영혼의 영원한 유익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십시오.
2.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십시오.
3. 끝까지 지속하고 견뎌내도록 여러분의 마음을 온전히 지키십시오.
a.하나님께서 늘 여러분에게 자비를 베푸신다면, 그분은 주권적인 은혜를 사용하실 것이며, 또한 그렇게 하실 때를 기피하실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b.이제 힘써, 구원을 추구할 때 어려움과 인내의 대가를 철저히 달아보고 계산하십시오.“
(Works,IV,op.cit. PP.387-391)
이것은 에드워즈가 호소하는 전형적인 모습이며, 거기에는 전도자의 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개인들에게 결단하기를 촉구했다. 의지는 자유롭기에, 구원이 발견될 수만 있다면 전인격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한다! “침노하십시오. 침노하십시오!"라고 에드워즈는 외쳤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 따라서 천국을 얻으려면 침노해야한다. 이처럼 호소하는 말들 속에서, 우리는 천국밖에 있는 사람은 결국 잃어버린 자라고 믿었던 사람의 급박한 심정을 느낄 수 있다.
그의 설교에 나오는 역설을 대하게 되면, 그의 칼빈주의적 견해로 인해, 그가 일관성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에드워즈는 심리학자로서, 천국문 앞에서 인간과 하나님의 만남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심지어 두려움이나 이기심에 의해서라도, 자극 받고 권면 받을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한 이유에서, 그는 사람들에게 침노하라고 촉구했던 것이다. 원죄와 무조건적 선택 그리고 의지의 종속 등과 같은 칼빈주의적 가르침에 의하면, 전도가 그다지 긴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사람들에게 천국을 침노하라고 요청할 때, 에드워즈에게는 신학의 체계보다는 구령의 열정이 더 강했다. 파스칼이 말했던 것과 같이, 마음(heart)에는 이성(reason)으로는 알 수 없는 이치(reason)들이 있다. 이처럼 자기 모순적인 입장들 속에 에드워즈가 해결하지 못한 역설이 포함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에드워즈의 태도가 오늘날에는 어떤 적절성이 있을까? 시대가 다르고 사고의 틀도 변해버렸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기본적으로 똑같다. 그 전문용어를 우리 시대의 말로 옮길 수 있을까? 그런 게 필요하다기보다는, 과연 그의 성경신학적인 견해가 오늘날 우리들의 필요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지옥불’ 설교를 오늘날에 한다면 과연 어떨까? 에드워즈의 항구적인 가치와 유용성에 반대하는 주된 비난은, 저주 설교에 대한 반대로 집약된다. 불행하게도 그의 성격에 대한 평가가 그의 목회 일부분에만 근거하여 평가되어왔다. 그 청교도의 사명(mission)은 설교를 통해 신학을 종교적인 체험으로 옮겨주는 것이었다. 그는 삶과는 무관한 진리 체계를 다루는 이론가가 아니라, 그의 성도들의 실제적인 필요에 관계된 복음을 전해준 목회자였다. 훗날 남게 된 그의 유산 중에 하나인 신학은, 바로 설교라는 그의 거푸집에서 나온 것이다.
그가 견지한 칼빈주의의 논리적 근간은, 인간의 전적 부패, 무조건적 선택, 불가항력적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교리들은 쉽게 그 강조점들과 결과들을 정당화시켰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사람들의 종교적 경험에서 또 다른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가 주목 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깨달은 후에, 구원을 얻고자 스스로 노력하여 마침내 성공하고, 회심한 자로서의 삶을 사는 명백한 증거를 보여준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무조건적 선택과는 정반대되는 가르침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가장 열심인 자들을 선택하셨을까? 그리하여 에드워즈는 “천국을 침노하라” 고 가르쳤던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성경은 인간더러 스스로 구원하라 명하며, 실제로 그게 이루어진다. 전적 부패의 교리에 의하여 인간은 무능하며, 그를 소성시키려면 하나님이 필요하다. 그럴지라도 에드워드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촉구했다.
우리는 이러한 문맥에서 저주설교를 판단해야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다가올 진노를 피하고 그리스도를 구원자시며 구속자로서 받아들이라고 촉구했다. 영적인 세계와 죄에 대한 보응을 믿는 믿음이, 설교를 듣는 사람들 에게 회개치 않는 자에게 마땅히 내릴 심판을 생생히 느끼게 해준 것이었다. 에드워즈의 설교 방식과 어투가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세계 속에는 죄의 비참함과 인간의 무법적인 본성이 여전히 확연하다. 항상 그렇듯이 죄에 대한 징벌은 지금도 도덕적 삶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 시대의 정신적이며 영적인 배경은 열정적인 불신이다. 충분히 믿어질 만한 믿음이 크게 불신되고 있다. 지난 백년 동안 이 의심 많은 세상은 인간본성을 잘못 가르쳐왔다. 에드워즈는 너무나 잘 알았던, 인간 속에 있는, 죄의 실체를 도외시 해왔던 것이다.
우리 시대는 이런 것들이 영속된다는 본성을 망각해왔기 때문에, 설교는 반드시 성경의 실재성(realism) 즉 인간의 본성과 임박한 심판을 다룸에 있어서 에드워즈의 특징이 되는 그 생생함을 조금이라도 되찾아야만 한다. 그가 기독교인의 삶과 사랑의 법에 관해 언급한 것이 많다고는 하지만, 사실 설교문학에 있어서 지표로 남아있는 것은 바로 경고와 심판에 대한 설교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들이, 이 점을 간파하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사이만을 시계추처럼 오가고 있다. 종국에는 모든 것이 바르게 될 것이라는 식의 불분명하고 애매모호한 전달은, 하나님의 계시의 충만함을 다루는 설교가 아니다. 에드워즈는 "성령의 역사 분별방법"(The Distinguishing Marks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 Works, I, op. cit.,PP.537-538)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그외 강조점에 반대하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어떤 역사(後事)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은 게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이 주는 두려움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그것도 진심과 열정으로 강조되는 목회자에게서 온 것처럼 보인다고 주장하는 건 아닙니다. 만일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믿는 것처럼, 그토록 끔찍하고 고통이 끊이질 잃는 지옥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사람들에게 그것을 감지할 수 있도록 애를 쓰는 것이 어찌 적절치 못하다는 것입니까? 내가 정말 지옥에 갈 위험에 처해 있다면, 그 지옥의 끔찍함에 대해서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아는 것으로 기뻐해야 하지 않습니까...목사들이 지옥에 대해 설교하고, 냉랭한 어조로, 그것도 아주 혐오스런 말들을 써서, 죄인들에게 그걸 피하라고 말할 때, 그들은 스스로 모순된 일을 하는 겁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행동에는 말뿐 아니라 언어가 있는 겁니다. 설교자의 말들이 죄인들의 상태를 지독히 끔찍스러운 것으로 표현한다 하더라도, 실제로 그의 행위와 태도는 그런 말들 자체를 거스르고 있으며, 자신의 목적을 포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설교자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는 겁니다... [즉, 죄인들의 상태를 끔찍한 말로 표현한다고 해서, 죄인들이 그렇게 되길 바란다는 게 아니라, 도리어 그러한 상태가 그들에게서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설교자가 실제 하는 말(죄인들의 상태)과는 달리 간절한 사랑의 마음(그들 영혼의 구원)을 갖고 말한다는 뜻] 율법뿐만 아니라 복음이 선포되어야만 합니다. 율법은 복음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 설교되어야 합니다. 복음이 더욱 더 효과적으로 선포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러한 설교가, 에드워즈가 닦아놓은 정신으로 고무되고 이루어질 때, 오늘날에도 설 자리가 있게 된다. 사람의 양심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심판을 총체적으로 인식하게 되어 있다. 한 설교자가, 거룩한 상상력이 담긴 용어나 은유를 가지고, 또 눈물로써 바르고 겸손한 영을 지니고 설교한다면, 오늘날에도 이 시대의 양심을 일깨워 그 사실을 깨닫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조(creed)란 믿음에 대해 부주의한 사람들을 다시 확신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도덕적인 부분까지 완전할 순 없다. 따라서 영혼을 치료하기 위한 일환으로서 자주 설교가 필요하다. 우리는 신학적으로 철학적으로 그리고 성경적으로 지옥의 가능성에 대해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는 사람들에게 가장 선한 것에 불충함으로써 겪게 되는 위험에 대해 경고하기 위함이다. 만일 영생이 우리의 것이라면, 언제나 그것을 잃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자, 우리가 다시 인간의 본성에 대한 현대의 의문점을 생각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에드워즈적인 해석의 부활을 의미하는가? 시계추는 이제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며 진보와 운명의 주인이었던 태평스러운 낙관주의 시대에서 그 반대편으로 돌아가고 있다. 현대의 잔인한 전쟁 양상과 국제적 무질서와 극악무도함은, 인간의 본성이 전부 다 좋은 게 아님을 깨우쳐 주고 있다.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인간의 본성과 운명의 토대를 재검토하고 있다.
인간은 행위뿐 아니라 본성 자체가 그릇 되었다는 진리는, 이미 사도 바울에 의해 발표되었고 어거스틴과 칼빈에 의해 강조되었으며 에드워즈에 의해 확인된 진실이었다. 이러한 죄인의식은 인도주의적인 관점에 여지를 남기지 않았던 것처럼 보이는, 에드워즈 설교의 기본교리(tenet)였다. 그에게 인간본성에 대해 신뢰가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일반은총을 믿었고 그의 성도들을 사랑했으며 예술과 인생의 아름다움의 진가를 인정했다. 그러나 이 후세대들은 하나님을 주변으로 밀어낸 채, 인간을 인생의 중심이라고 말해 왔다.
오늘날 우리는 이전의 해석으로 돌아감을 목도하고 있다. 생물학적, 심리학적, 환경학적 결정론이 더 이상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많으며, 죄인인 인간에 대한공격이 가르쳐지고 있다. 인간이 교만죄와 하나님의 주권을 거스린 죄에 물들어 있는 피조물임을, 사랄들은 깨닫고 있는 것이다. 현 인류의 붕괴는 더 이상 진보를 보장하지 못하는 무능력과, 근본적인 악과 불합리성이라는 인간본성 가운데 있는 실존(즉, 부조리)에서 발견된다. 죄에 대해 인식하지 못함은, 인간이 죄인이 아니라는 가정으로 발전되었다. 만일 인간이 스스로 올바르다면 죄의 무거움은 감지되지 많을 것이다. 오늘날 신학적 물음에 대해 다시금 인간은 죄인이라는 진리가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물음은, 설교시 에드워즈의 강조점과 견해를 재검토할 계기를 마련해준다. 에드워즈가 하나님의 심판에 비추어서, 인간의 죄와 그의 절실한 필요에 대해 인식했다면, 그가 사람들로 하여 지금 천국을 침노할 것을 강권하고 열정적으로 설교했다는건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 견해가 다시 수용되게 하라. 그리고 설교는 반드시. 죄로 인해 오인되고 왜곡되었으며 두려움으로 가득하게 된. 인간본성의 필요를 채우기에 합당한 복음을 밝히 말하는 것이어야 한다. 인간 스스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믿음을 되살리라. 에드워즈의 장단점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 만일 인간이 죄인이고 자신을 구원할 힘이 전혀 없다면, 만일 죄인이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린다면, 그리고 만일 그 죄 된 본성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아래 있다면, 그렇다면 저주의 설교가 우리 시대에도 그 위치를 차지하고. 새로이 하나님의 심판을 가르칠 것이다. 아무쪼록 설교자들이 에드워즈의 견해를 숙고하여 사람들이 '천국을 침노하도록 촉구하기를 바란다.
후기
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설교들에서 흘러나온 살아있는 물줄기를 완벽하게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국가, 교회 그외 어느 곳에서도 그의 이름은 잊혀질 수 없다. 에드워즈의 자손에 대한 계보 연구가 그의 삶과 성품이 얼마나 경건하고 지성적으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증거가 된다." 그들 중에는 8개 대학의 학장들. 약 100 여 명의 대학교수들, 100명이 넘는 변호사. 60여 명의 의사, 30여 명의 판사, 80여명의 주요공직자, 25명의 육, 해군장교, 수를 셀 수없는 성직자와 선교사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E.A.'Wmship,"The Human Legacy of Jonathan Edwards," World' s Works, Oct.1903).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와 같은 성품들이 놀랍게 결합되어 있음으로 해서, 사람들의 의지에 다가가는 자질과 영혼 수술에 필요한 영적인 지혜가 주는 통찰력 등에 있어서 대가가 되었다. 이글거리는 열정으로 그는 극도의 긴박함 가운데 기독교를 예증하였고, 심판의 골짜기에 있는 많은 청중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했다. 바로 그 결과가 뉴잉글랜드의 각성이었으며, 또한 세계 복음전파에 앞장서고 있는 앵글로-색슨족의 확산이었다. 에드워즈에게 주어진 특권은, 경험적인 기독교 안에서 복음이 명령하는 요구와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비전을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능력은 그의 비밀에 있었고, 그 비밀이란 곧 그리스도와 같은 경험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프린스턴 대학의 및 소홀(Nassau Hall)이나 예일 대학의 조나단 에드워즈 칼리지에 가보면 실제적이었던 신비주의자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초상화는 시간을 들여 쳐다보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감동을 준다. 학자이자 신비주의자의 진지함이 깃들어 있는 영적인 표정에는 부드러움과 고상함이 엿보인다. 강렬하면서 그윽한 그의 눈은 꿰뚫는 듯한 응시로 우리를 붙든다. 여기 그토록 풍부하고 다양하게 천부적인 재주를 받은 천재가 있다. 세월의 행보와 논란의 상처는 이제 지워졌다. 그 설교자는 거룩한 승인을 잃지 않고 인간적 필요와 타협하지도 않고 영계(the unseen)의 휘장을 관통해 멀리 있는 고지를 보았다. 그 열정적인 순례자는 영적 방랑에서 그의 신앙과 설교를 입증하기에 충분한 것을 발견하였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프린스턴 묘지에 있는, 마지막 이정표를 가리키는 그의 무덤이다. 그러나 그 것 이상이다. 많은 후손과 흩어져 있는 설교집과 서적들이 있다. 한 낡은 책상이 에드워즈 칼리지에 남아 있는데, 그 책상은 옆면과 위에 책꽂이가 부착된 것으로 그 안에 몇 권의 그의 책이 꽂혀 있고 오랜 시간연구에 몰두한 습관을 엿보게 해준다. 그리고 예일 도서관에는 에드워즈의 가늘고 긴 필체와 신비스러운 메모와 더불어 방대한 기록들이 있어서 그의 비밀을 기다리는 또 다른 세대에게 유산으로 남겨져 있다.
자신의 과업을 신중하게 생각하는 설교자와 목회에 대한 꿈을 품고 있는 신학도들에게,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1. 에드워즈는 가장 높은 사역 기준에 의거해 살았던 사람의 한 예다.
2. 에드워즈는 연구를 통해서 독서와 저작활동을 하였던 훈련되며 헌신된 목회자였다.
3. 에드워즈는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되는 지성과 열정을 겸비한 복음적 설교자였다.
4. 에드워즈는 설교가 사람들을 회심시키는 하나님의 대리 행위라고 깊게 믿었다.
5. 에드워즈는 영혼 안에서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시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았던 복음적 신비주의자로 살았다.
6. 에드워즈는, 어렵고 인기가 없는 제시의 주제들을 피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전부를 선포하였다.
7. 에드워즈는 자신이 하나님을 대변하는 목소리라고 믿으면서, 그가 예민하게 느낀 것을 설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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