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는 근본주의에 대해 개략적으로 서술한 소논문이 있어 인용한다. 근본주의는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만들어진 신학사조이다. 근본주의는 그 시작은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대주의의 수용, 일반계시의 무시, 사회에 대한 참여 등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한편 학문적 배경, 특히 성경관에서는 프린스턴 신학 대학의 아키발드 알렉산더-찰스 하지-벤지민 워필드-그레샴 메이천의 사상을 계승했다. 이점에서는 매우 평가받을 만 하다. 그러나 이 신학사조는 시대적인 분위기와 근본주의 내의 한계로 인해, 퇴색하게 되었다.
만약 조나단 에드워즈와 같은 신학자이자 목회자와 웨슬리와 같은 조직적인 목회자가 있었다면 근본주의는 퇴색하지 않고, 시대와 맞서면서 더욱 발전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근본주의의 문제는 한국교회에도 적용된다. 교권주의에 치우쳐 있거나, 신학연구를 게을리하고, 일반계시에 대한 이해 부족, 성경관에 대한 연구부족은 미국의 근본주의의 쇠락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복음주의 청교도들이 강조했던, 성령의 조명과 내주의 교리가 거의 잊혀졌다는 것이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根本主義 신학의 출현
이 세미나 페이퍼는 조직신학의 세미나 “복음주의 신학”을 이수하기 위한 것임
도학윤
침례신학대학교 M.Div., 1999.
1999. 12. 9.
목 차
서 론
Ⅰ. 근본주의 신학의 개념
1. 근본주의 운동의 배경
2. 근본주의 용어의 형성
3. 세대주의 영향
Ⅱ. 근본주의와 미국 장로교 및 미국 침례교
1. 근본주의와 미국 장로교
2. 프린스톤 신학교의 변화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설립
3. 근본주의와 미국 침례교
Ⅲ. 성경관에 대한 고찰
1. 알취발드 알렉산드
2. 찰스 핫지
3. 워필드
4. 그레샴 메이첸
결론
참고문헌목록
서 론
종교개혁이후 신학의 역사를 개관하면 17세기는 종교개혁의 유산을 그대로 지키고자 노력한 정통주의의 시대이다. 그리고 18세기는 인간의 이성이 가지는 능력이 강조되며 계몽주의시대가 도래하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개신교 자유주의 시대가 된다. 이때에 발전한 신학을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명명한다. 1 교수 목창균은 자유주의의 시작을 “현대에서 종교가 어떻게 가능하며 기독교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하는 본질적인 질문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어느 특정 신앙고백이나 신조에 종속되지 않고 그 시대에 적절하고 타당하게 만들려고 한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신학의 중심을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경험이나 정황에 둠으로써 인간 중심적 신학이 되었다.
자유주의는 동정녀 탄생과 예수님의 기적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등의 관점에서 기독교의 근본이 되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을 부인한다. 자유주의는 성경의 영감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독특한 신성, 죄의 회개 그리고 개인의 부활과 같은 것들을 현대 문화에 내던졌던 것이다. 2 이런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19세기말 미국에서 일어난 근본주의 운동은 본래의 탄생 배경과 맞지 않게 여러 측면에서 오해와 괄시를 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3 근본주의는 1900년에서 1930년에 이르기까지 교회를 휩쓸었던 자유주의 물결에 대한 반대운동으로서 특별히 비일(D. Beale)은 근본주의의 형성과정을 두 시기로 구분했다. 첫째로 1857-1930년까지의 근본주의 운동을 “비순응주의자(nonconformist)"라 하며, 둘째로 1930년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근본주의 운동을 “분리주의자(seperatist)"로 정의한다. 4 결국 비일(D. Beale)의 주장에 따르면 근본주의 운동의 시작은 19세기 중반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먼저 미국 내에서 근본주의 운동이 태동하기까지의 외적인 상황을 먼저 고찰하고자 한다.
Ⅰ. 근본주의 신학의 개념
1. 근본주의 운동의 배경
19세기말부터 미국 개신교는 엄청난 도전에 직면했다. 1861년 발발한 남북 전쟁 후 미국은 산업혁명으로 인한 산업화와 함께 독일로부터 오는 고등비평과 영국으로부터 온 다윈의 진화론이 미국인들의 삶 전체뿐만 아니라 교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후반 미국은 농업국가의 대열에서 이탈하여 세계 주요 산업 강국의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미국 경제의 특징으로는 재벌의 증가와 이들을 통한 파급 효과이다. 반세기도 안되는 짧은 시간 안에 광대한 대륙에 철도가 종횡으로 개통되고 이를 따라서 사람들의 정착과 개발이 이루어졌다. 다행히 이런 일들을 수행한 재벌들은 충실한 기독교인이었다. 5 이와 같이 재벌들의 축적된 부를 통하여 이미 설립된 교육기관에 관대한 기증이 시작됨으로 교육계의 지도력이 전환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당시 미국사회의 변형은 주로 도시로의 인구이동, 이로 인한 도시의 급격한 팽창과 확대, 유럽으로부터의 이민 증가와 새로운 교단의 성립으로 설명된다. 특별히 도시의 성장은 남부보다는 북부에 두드러졌고, 이런 현상은 자연히 농촌 인구의 고갈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인구분포의 변화는 비단 농촌 인구의 유동뿐만이 아니라 이민 인구의 계속적인 증가도 한 몫 하였다. 더구나 해외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은 대부분 카톨릭 교도였으며 비영어권이었다. 그래서 1914년이 되어서는 카톨릭이 미국에서 단연 최고의 교파가 되었다. 6
1차 세계대전은 미국인의 생활에 특히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무렵까지만 해도 미국은 세계사의 중심 무대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전쟁전의 미국은 수많은 다양한 민족들을 동화시키는 문제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목할 만큼 낙관적이었다. 미국의 이상주의와 기술에 의하여 정복될 수 없었을 만큼 심각한 도전은 없었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모든 신뢰와 도덕적 열정을 전쟁의 노력에 쏟아 부었으며, 결과적으로 승리했다. 그러나 성공은 대부분 전쟁에 국한되어 있었다. 일부 상반되는 예상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성화의 체험은 아니었다. 국내에서는 전쟁으로 인하여 급속한 세속화가 이루어지고 재즈(Jazz) 시대가 도래하였다. 7
1918년 11월 1차 세계대전은 승리로 종결되었으나 미국의 성전적(聖戰的) 열정은 교회 이상주의를 더욱 강화하였고 금주운동이 마침내 승리하여 1919년부터 발효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미국은 불안하였다. 러시아가 공산주의 혁명에 의해 적화되고 쿠 쿠룩스 클랜(Ku Klux Klan)이라는 반흑인 조직이 결성되고 후에는 카톨릭교도, 유대인, 비북유럽계까지 적대시하였다. 그리고 1920년대가 되어서는 세속화 현상이 밖으로 공개화 되기 시작하였다. 성(性)에 대한 이야기가 공공연해지고 선정적인 머릿기사의 타블로이드(Tabloid)판 신문이 1919년 시작되었다. 8 여성들이 공개석상에서 흡연하고 신교도에게 금기시 되었던 춤이 사회생활의 일부가 되고 심지어 교회의 청년 모임에까지 도입되게 되었다. 9 이러한 갑작스러운 미국 문화의 변질은 교회와 신학에 대한 심각한 도전을 주었다.
2. 근본주의 용어의 형성
「근본교리들」(Fundamentals)이란 책자는 근면하고 관대한 평신도 기독인 실업가 라이만 스튜어트(Lyman Stewart 1840-1923)가 자기 소유의 출판사업을 태동시켰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근본교리들」이다. 스튜어트는 1894년 나이아가라 사경회에 참석하여 대표단 가운데 나타난 배교현상과 기독교에 대한 현대주의의 도전을 보고 이를 막고자 결심하게 되면서 딕슨(A. C. Dixon) 목사와 협력하여 「근본교리들」 12권을 한 질로 출판했다. 10
근본주의란 명칭은 자유주의가 근본원리(the fundamentals)로서 배척한 핵심적인 구속교리들을 습관적으로 언급하는 데서 발달된 것이다. 이 말이 사용된 것은 적어도 1909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그 해에 “근본원리”란 제목하에 복음주의 기독교를 해석하고 옹호하는데 기여하게 된 12권의 소책자 중 그 첫 권이 나왔다. 켈리포니아의 어떤 부유한 두 분 인사의 호의로 그 첫판은 영어 사용국의 목사, 전도사, 선교사, 신학생, 주일학교 교장, Y.M.C.A 및 Y.W.C.A 책임자들에게 주소가 입수되는 대로 무료로 다 보내어졌다. 결국 그것은 3백만부 이상 배부되었다. 이 책에 기고한 저자들 가운데는 오르(Adams orr), 워필드(B. B. Warfield), 앤드슨(Robert Anderson), 모올(H. C. G. Moule), 그리피드 토마스(W. H. Griffith Thomas), 토리(R. A. Torrey), 몰간(G. Campbell Morgan)등 같은 해박한 학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논문들 중 상당수가 학구적으로 철저히 다루어진 작품들이었다고 허버트는 그 평론에서 말하고 있다. 그 시리즈에는 논쟁의 내용이 된 근본 원리들에 대한 명확한 성경 해석들이 실려 있었다. 11 이 책들을 가지고 변증학자들은 그 “근본원리”에 반대하는 입장들과 그리스도의 능력에 관한 어떤 인상적이며 사사로운 증언들을 반대했다. 12
이와 같이 근본 원리들이 보수주의의 슬로건으로 사용된 것은 1910년 미 북장로교 총회에서 발간된 “구원”(Deliverance)이란 책자에서부터 였다. 이 때 “근본원리”는 출판 과정에 있었다. 이 책에는 “신앙과 복음주의적 기독교의 근본원리” 들이 다섯 가지 조항으로 상세하게 열거되어 있었다.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 예수님의 신성, 그의 동정녀 탄생과 이적, 우리 죄를 대신한 육체적 죽음, 그리고 육체적 부활과 승천, 이상 다섯 가지이다. 그 이후로 줄곧 미국복음주의자들은 “근본원리”라 하면 단지 이 조항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습관이 된 것 같다. 총회록이 약간의 수정과 첨가를 거쳐 최근의 근본주의 기관의 교리적 신조로 채택되었다. 이 기관들 중 첫째가 1919년에 결성되어 지금도 존속하고 있는 세계기독교 근본원리협회(World Christian Fundamentals Association)였다. 1920년 북침례교 협의회의 복음주의자 대표 일단은 신약성서 신앙의 근본원리들을 재 진술, 재확인, 재강조 하기 위하여 그들 서로 예비회담을 가졌다. 그 후에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이 발행한 침례교 잡지 파수꾼(Watchman-Examiner)에 실린 한 논문에서 “근본원리들을 수호하기 위해 충성을 다해 싸우고자 하는 자들이라는 의미로 근본주의자들”이란 명칭이 만들어졌다. 13
3. 세대주의 영향
근본주의는 자유주의 또는 현대주의적 사조에 대한 반발로, 그들이 사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강하게 주장하는 근본적인 몇 가지의 교리 때문에 그러한 명칭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이 근본주의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어떤 이들은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신학 목록을 중심으로하는 하나의 신학적인 운동으로 보며 샌딘(Sandeen)과 같은 이는 신학 중에서도 영국의 전천년설을 그들의 핵심으로 보며 세대주의 전천년설의 대표자인 다비(Darby)를 근본주의의 전형적인 인물로 본다. 하지만 허드슨(Hudson)은 근본주의 운동은 미국에 있어서 도시와 교외의 갈등이라는 상황을 배경으로 사회적으로 접근하기도 하며 심리학적으로 이해하려는 이들도 있으며 반지성주의, 문화적 갈등현상으로 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는 현대 신학, 자유주의, 현대주의, 특히 성서 해석에 있어서 고등 비평에 대해 극보수적인 반응을 보인데서 근본주의가 생겨났다고 보고 있다. 14
세대주의의 기원은 서로 이견이 있지만, 대개 19세기 초 영국의 형제주의 운동(Brethren Movement)을 주도했던 다비(J. N. Darby)에 의해 골격이 갖추어졌다고 본다. 15 그리고 다비(Darby)는 세상의 역사를 일곱세대로 구분했다. 16 세대주의의 두드러진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성경은 일곱 세대의 패턴을 통하여 모든 역사적 변화를 설명했다는 가정이다. 각 세대마다 하나님은 다른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인간을 시험하셨다. 인간들은 모든 시험에 실패했으며, 각각의 세대는 파멸적인 하나님의 심판으로 종결되었다. 첫 세대는 인간이 타락하여 죄에 떨어지고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남으로써 끝이 났고, 두 번째 세대는 홍수와 더불어 끝났으며, 세 번째 세대는 바벨탑과 더불어 끝났다. 우리는 여섯 번째 시대인 교회의 시대에 살고 있는데, 이 세대도 파멸과 하나님의 간섭의 날을 향하여 가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7년에 걸친 전쟁과 재난의 날이 있은 후, 예수께서는 문자 그대로 예루살렘에 왕국을 세우고 천년동안 다스린다는 것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견해가 성경 특히, 예언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에 근거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고 성경의 무오류성을 진정한 신앙의 시금석으로 삼을 것을 가장 강조하는 계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영국에서 들어온 이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전천년설은 예언을 하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성경을 연구한 예언 수련회를 통하여 미국안에 확산되었다. 기차가 교통수단의 주종을 이루고 있던 시대에 새로운 휴가형태로 유행했던 여름수련회가 특히 효과적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드와이트 L, 무디가 세대주의의 체계에 대하여 동정적이었다는 사실이다. 17
세대주의 그 자체는 놀라운만큼 반현대주의적이었다. 여러 가지 관점에서 세대주의는 현대주의의 반사체였다. 현대주의는 현대문화에 대하여 낙관적이었으나 세대주의는 비관적이었다. 중요한 것은 두 운동이 모두 성경과 역사와의 관계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현대주의는 인간역사라는 렌즈를 통하여 성경을 해석했으나, 세대주의자들은 오직 성경이라는 렌즈를 통해서만 역사를 해석했다. 18
이렇게 해서 생겨난 근본주의 운동은 사경회 운동으로 번져갔고 특히 “나이아가라 휴양지에서 모인 연례적인 성경 연구회”는 가장 대표적이었는데 이 사경회 운동은 과학주의, 합리주의에 짓밟힌 성경의 권위를 되찾고 무시된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확립하자는 운동이었다.
Ⅱ. 근본주의와 미국 장로교 및 미국 침례교
1. 근본주의와 미국장로교
근본주의 논쟁이 시작된 1920년 초반에서 1929년 메이첸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하기까지의 과정을 서술하고자 한다. 1920년대에 갑자기 탄생한 것이 아니고 많은 상황들이 전개되어 있었으나 본격적인 논쟁은 1920년에 시작되었고 극심한 대립의 양상은 1929년을 계기로 쇠퇴하였기 때문이다.
1910년 장로교 총회는 ‘근본주의 5개 교리’를 채택하였다. 그리고 1915년에는150명의 목사들이 “근본적인 것으로 돌아가자”(Back to the Fundamentals)라는 글을 당시 총회장과 3명의 증경 총회장의 서명과 함께 총회에 제출하였다. 20 현대주의에 대한 미국내 근본주의의 대응은 분명해 보였고 활기차 보였다. 그러나 1921년 5월 침례교 목사인 포스딕(Harry Emerson Fosdick)은 뉴욕제일장로교회(Newyork First Presbyterian Church)에서 “근본주의는 승리할 것인가?” 라는 설교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본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포스틱(Fordick)의 의도는 교리나 신조보다는 교회론적인 면으로, 포괄적인 교회와 배타적인 교회를 구분하여 근본주의의 배타적이고 비타협적 교리를 비판하였던 것이다. 21
그러나 이러한 의도와는 달리 필라델피아의 아치 스트리트 장로교회(Arch Stewwt Presbyteiran Church) 목사 클라렌스 에드워드(Clarence Edward Macartney)가 “불신앙이 이길 것인가?”라는 제목을 붙인 설교로 응수하였다. 포스딕에 반대하는 메카트니는 보수주의 운동의 선봉에 서서 필라델피아 노회를 주도하여 뉴욕 “강단”에 대해 즉각 소송을 제기하도록 1922년 총회에 제의 하였다(포스딕은 장로교인이 아니었으므로 직접 그를 처리할 수는 없었다). 21
결국 미국 보수주의자들이 견지해 오던 5대 교리가 교회를 속박하는 역할을 한다고 비판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현대주의 신학에 신학적 논쟁을 벌인 보수주의의 대표자는 메이첸(J. G. Machen)이었다. 먼저 어번 선언(Auburn Affirmation)에 대하여 메이첸은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내었다. 22 그는 어번 선언은 단순히 장로교 교리에만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기독교의 특성에 관련된 모든 것을 반대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메이첸은 그의 저서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를 통하여 비록 자유주의가 관용을 부르짖는다 할지라도 기독교 내에는 자유주의를 위한 여지가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메이첸은 당시의 상황을 “싸움의 시대”로 정의하고 자유주의는 기독교가 아님을 천명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 자유주의 신학자가 기독교 교리를 하나씩 하나씩 적에게 내주고 나서 보유하게 된 것은 전혀 기독교가 아닌 별개의 범주에 속하는 전혀 다른 종교인 것이다.” 23 실제로 어번 선언이 발표된 후, “기독교 세기” 「Christian Century」 잡지가 근본주의와 현대주의는 두 가지 별개의 종교들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양자간에는 더 이상 화합을 이룰 한계를 벗어났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두 세계가 충돌하였다…. 근본주의자의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요 현대주의자의 하나님과 다른 한 하나님이다…. 두 세계의 생득적인 불일치는 상호관용의 단계를 이미 넘어섰다.”라고 선언하였다. 24
메이첸의 저항이 있었지만 교계의 상황은 점점 더 현대주의에 유리하게 되었다. 1924년 미국 장로교총회는 총회장으로 포스딕의 설교에 대응했던 매카트니(C. E. Macartney)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비록 보수주의자가 총회장에 당선되었으나 어번 선언에 대한 문제를 무기 연기하게 되었고, 재판부에서는 교회가 구체적으로 교리적인 요강을 규정한 적이 없었기에 총회가 직분자들에게 교리시험을 실시할 권한이 없다고 판결하였다. 이것은 1910년, 1916년 1923년 5개 신조 선언을 공식적으로 반박한 것과 다름없었다. 결국 보수주의자들 중에서도 중도파 보수주의에 의하여 자유주의의 승리가 촉진되었던 것이다. 25
1925년은 근본주의자들의 쇠락이 더욱 두드러진 해이다. 테네시주 데이턴(Dayton)에서 열린 세기의 재판, 즉 스콥스(Scopes) 재판이 열렸다. 26 이 재판은 실제로 근본주의 논쟁의 정점에 해당하는 사건이었다. 1925년 봄 테네시 주에서는 가장 강력한 반진화론법이 제정되었고, 이 법은 공립학교에서 다윈설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제정되었다. 이때 스콥스는 주법을 어기고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다. 이때 기독교 측에서는 브라이언(William Jenning Bryan)이 반진화론적 입장을 취하였다. 재판의 결과는 브라이언의 참패였다. 대로우(C. Darrow)의 공세에 밀려서 성경의 문자적 해석과 관련된 문제에 대하여 전혀 대답하지 못하였다. 브라이언은 대로의 쉴새 없는 심리로 종교영역에서 그의 피상적인 사고와 부족한 준비를 드러내며 실수를 연발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전국으로 퍼지자, 근본주의자들의 무지와 고집스러움이 집중적으로 거론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브라이언은 죽었지만 근본주의는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27
1925년 총회는 오하이오 주에서 모여 어드만(C. R. Erdmans)을 총회장으로 선출하였다. 「근본교리들」의 기고가인 어드만의 피선은 근본주의의 승리처럼 보였으나, 어드만은 본래 교리적 논쟁보다는 평화와 관용을 선호한 사람이었다. 어드만은 ‘15인 위원회’를 구성하여 교단내 영적 상태와 불안 조성 원인을 규명하며, 이를 차기 총회에 보고하여 교회의 일치와 진보를 도모하려 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1926년 총회에 이르러서는 어번 선언에 관하여 토의조차 하지 않고 논쟁의 유예기간을 가졌다. 그리고 1927년 총회에서는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대한 목사의 서명 수락 문제를 처리하며, ‘15인 위원회’는 교회가 ‘본질적 교리들’을 정의한 적이 없다고 선언하였다. 28 결국 1927년을 기점으로 미국 장로교회는 자유주의에 항거하거나 교회 자신의 신앙을 정의 내릴 수단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2. 프린스톤 장로교 신학교의 변화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설립
프린스톤 신학교는 현대주의의 유입으로 미국 교계가 어려움을 겪을 때, 신학적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그러기에 미국 장로교회에서 보수주의자들이 패배하고 자유주의가 승리함에 있어서 프린스톤의 역할과 위치, 신학적 태도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 교회가 현대주의에 서서히 젖어가자 프린스톤 역시 한 세기 이상 지켜 오던 신학흐름이 변질되었던 것이다.
1914년 관용주의적 보수주의자 스티븐슨(J. R. Stevenson)이 학장이 되기 전, 프린스톤은 ‘장로교 전통신앙의 난공불락의 요새’라 일컬어진 패튼(F. L. Patten)에 의해 보수신학을 고수하였다. 스티븐슨이 보기에 그동안 프린스톤은 구학파만을 고수하였으나 그의 교육방침을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통합된 구학파와 신학파의 기관이다. 그러므로 신학교 학장으로서 나의 야심은 이 신학교를 어떤 특정한 당파의 학교가 아니라 전체 장로교회를 대표하는 학교로 만들려는 것이다.” 29 프린스톤 교수들은 이에 대하여 반대하였으나 몇몇 교수들이 학장의 의도에 도도함으로 분열이 시작되었다. 학장과 동조한 교수들은 현대주의자들은 아니었으나 당시의 신학사조에 상당히 관용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투적 보수주의자로 메이첸이 이들과 대립한다. 그는 강의실에서, 교회에서, 책이나 논설 속에서 어디에 있든지 자유주의에 대항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의 지상과제는 프린스톤에 신학교 초기의 신학전통을 그대로 고수하는 것이었다.
프린스톤은 당시에 2개의 이사회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나는 교육프로그램을 관리하고 총회의 승인을 얻어야 하는 운영이사회와 1822년 설립되어 재정을 관리하는 재정이사회이다. 장로교 논쟁이 치열할 때, 재단이사회는 스티븐슨 학장을 지지하며 메이첸의 교수직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반대로 운영이사회는 메이첸을 지지하였던 것이다. 이에 총회는 1926년 프린스톤 사태를 연구할 위원회를 발족시켜서, 프린스톤의 분열은 교수진의 분열이라 평가하였다. 30 이 위원회의 보고가 채택되어서 1929년 33인의 새로운 재단이사회를 구성되어 1/3은 구 재단이사회에서, 1/3은 구 운영위원회, 1/3은 교회 전체에서 선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스티븐슨 학장의 권위를 극대화하였고, 보수주의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프린스톤 이사회에 어번선언에 서명한 두 사람이 포함되게 되었다. 31
이렇게 프린스톤의 상황이 변화되자 메이첸은 프린스톤 신학전통을 계승할 새로운 신학교 설립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1929년 7월 18일 약 7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프린스톤 신학교가 오랫동안 영예스럽게 견지해 왔던 하나님의 말씀과 웨스트민스터 신조에 대한 충성 정책을 흔들림 없이 계속할 새로운 신학교”를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메이첸은 3사람의 보수주의 교수들, 곧 윌슨(R. D. Willson), 반틸(C. Vantil) 그리고 앨리스((O. T. Allis)와 함께 새로운 신학교를 시작했던 것이다. 32 메이첸이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한 취지는 그의 개강예배 설교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프린스톤 신학교는 죽었지만, 프린스톤의 고귀한 유산은 살아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 전통을 손상시키지 않고 지속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33 결국 메이첸은 프린스톤 신학 전통을 수호하기 위하여 새로운 신학교 설립과 교단의 분열까지도 감내하였던 것이다.
3. 근본주의와 미국침례교
기독교와 자유주의간에 투쟁이 교파 내에서 격화됨에 따라 분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 신조나 고백이나 조직신학에도 입장 표명을 하지 않는 자율적인 침례교인들조차, 자신들의 지교회들을 넘어서 자기들의 종말론 견해를 방어하는 데 그들의 장로교 형제들이 근본주의 초창기에 느꼈던 것보다 덜 강박감을 느꼈다. 비록 침례교인들은 이 운동의 처음 기간 곧 1857-1920년 동안 고참 보수파 근본주의의 지도력에서 장로교인들보다는 뒤졌지만 그들은 주요 공헌을 하였고 특출한 지도력도 제공하였다. 34
침례교인들은 근본주의자들이 천명한 신학적 견해를 받아 들였지만 정통주의의 교리적 입장이 만장일치의 옹호를 받는 신앙성명서가 되어야 한다는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에는 찬동하지 않았다. 35 남침례교와 북침례교의 거의 모든 무리들은 원래의 근본주의자들의 특징인 보수주의 신학을 학문적으로 제시하는데 높은 재능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종종 일어나고 있는 바와 같이, 원래 지도자들의 높은 이상들은 그들의 활동과 견해를 지지해 주는 동지들을 성공적으로 보유하지 못하였으며, 근본주의는 급격히 완고한 율법주의로 전락되고 말았다. 그리고 많은 침례교 학자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지지할 수 없었는데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이에 대한 과격한 논쟁들 가운데 종종 나타나 있다. 물론 몇몇 침례교 학자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지속시켜 나가는데 참여하였으며, 그들 자신들이 그들 다음 세대의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완고한 자들임을 종종 입증한다. 36 근본주의 약점들은 1920년대를 넘어서면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극단의 세대주의, 과도한 정서주의, 사회에서의 도피, 은둔, 복음에 대한 문화적인 도전 앞에 가지는 공포, 윤리적 문제에 대한 소홀함, 호전적인 신학 논쟁, 경건주의적 개인주의 등의 상당한 부정적 요소들을 포함하는 운동으로 발전했다. 37 이러한 후기 근본주의자는 신근본주의(Neo-Fundamentalism)라고 불린다. 신근본주의는 남침례교와 북침례교에 각각 분파를 형성하는 요인이 되었다. 38
근본주의자들과 현대주의자들의 논쟁이 일어났던 시기에 서든침례신학교(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학장으로 에드가 영 멀린스(Edgar Young Mullins)가 선출되었다. 그는 이 시대에 남침례교인들을 안정시키는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에스텝(William R. Estep)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멀린스와 로버슨(A. T. Robertson)은 모두 주도적인 근본주의자들의 집단에서 커다란 존경을 받았다. 어떤 탁월한 미남침례교인도 조직화된 근본주의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 39 하지만 멀린스와 로버슨은 미남침례교인들의 삶과 신학에 다른 학구적인 지도자들과 똑같이 영향을 미쳤음은 의심할 바 없다.
멀린스는 비록 신학적 방법에 효과적으로 변화를 가져왔지만 침례교의 신학적 사고를 약화시키려는 의도는 조금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성서의 완전한 진리 성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멀린스에게 있어서 성서는 오류가 혼합되지 않은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였다. 성서의 목적은 종교적인 것이며 따라서 성서는 그러한 견지에서 해석되고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성서는 어느 부분에 있어서나 사실적이며 진리를 갖고 있다. 40 이른바 근본주의자들과 현대주의자들 간의 논쟁이 있던 시기에 멀린스는 그리스도교 교회의 역사적 믿음을 옹호하는 글을 썼다. 1924년 미남침례교 교회학교부(Sunday School Board the Southern Baptist Convention)는 그의 「십자로의 그리스도교」(Christanity at the Cross Roads)를 출간하였다. 그 책의 두드러진 구별 속에서 멀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신약이 무엇을 가르쳐 주느냐에 대한 논쟁은 이제 거의 찿
아볼 수 없다. 과학적 지식은 우리의 복음주의적 신앙을 옹호하는 쪽에서 이 문제들을 결정하여 왔다…. 공격은 이제 기록들 자체의 기초들에 대하여 가해지고 있다…. 중재 자들과 중립자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눈을 감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그리 스도교의 기초들을 그 역사적 기록들을 의심함으로써 파괴시키려는 시도가 행하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멀린스가 말하였거나, 믿었던 것이 무엇이냐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그의 저술들에서 취하고 있는 입장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의심도 주어지지 않고 있다. 그는 신학적으로 칼빈주의적 침례교회 전승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제기한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이 칼빈주의 독특성에서 나온 것들은 아니며, 심지어 침례교 교리의 독특성에서 나온 것들도 아니다. 41
남침례교인들은 「침례교 신앙과 메시지」 (Baptist Faith and Message)로 알려져 있는 신앙 고백문을 작성하여 통과시킴으로써 1925년 진화론적 및 현대주의적 이론들에 응답하였다. 이 신앙 고백은 남침례교 총회의 교리적 통일성을 보여주었다. 42 그리고 북침례교인들은 신학적인 자유주의를 지향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운동에 대하여 심각한 논쟁을 지속적으로 벌여왔다. 이러한 논쟁은 20세기 전반에 그들의 총회의 특징이 되었다. 반면에 남침례교인들은 그들의 신학적 확신들에 대하여 훨씬 더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한 조화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예증될 수 있다. 예컨대 텍사스 출신의 근본주의 지도자였던 노리스(J. Frank Norris)는 남침례교회의 지도층을 한번도 성공적으로 공격하지 못하였다. 그는 한 때 대단히 극단적인 견해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심지어 죠오지 워싱톤 트우엣(George W. Truett: 달라스의 제일침례교회 목사)을 성서적 진리를 훼손시키는 인물로 비난하기까지 하였었다. 신학적으로 남침례교인들은 거의 모두 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의 대다수는 노리스가 믿었던 것과 똑같은 교리들을 믿었다. 하지만 그들은 노리스 같은 근본주의자들의 신랄한 논쟁적 체계에 대하여서는 동조하려고 하지 않았다. 남침례교인들은 1925년 중요한 신앙고백을 투표로 인정하였다. 이 신앙고백은 비록 몇몇 사항들에 있어서 애매 모호하다는 비평을 받아 왔기는 하지만 보수주의적 신학 체계를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침례교인들은 북침례교인들과는 달리 그들이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로 나뉘는 명백한 분열을 경험하지 않았다. 43
북침례교 총회는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선교사들과 교회들 내에서도 자유주의에 직면하였다. 자유주의와 관련된 문제들은 너무나도 심각하여졌기 때문에 침례교 근본주의자들의 총회를 개최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이 회의는 1920년 북침례교 전국 총회가 있기 바로 직전 뉴욕 주 버팔로(Buffalo)의 델라웨어 에버뉴 침례교회(Delaware Avenue Baptist Church)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발표된 모든 메시지들은 침례교 근본주의(Baptist Fundamentals)라는 한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44 회의의 참석자들은 총회가 전통적 침례교 교리들에 대한 교수들과 학교 이사들의 태도들을 조사할 것을 요구하는 안건을 투표로 통과시켰다. 보수주의자들은 그 조사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생긴 논쟁은 비통함과 긴장을 만들어 내기 시작하였으며 그 다음 해 까지 계속 되었다. 학교들을 조사하는 임무를 받았던 위원회가 다음 해에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이 학교 조사 위원회는 몇몇 문제들이 있음을 인정하였으나, 본질적으로 보고서가 침례교 교육기관을 옹호하였다. 총회가 신앙 고백문을 채택하도록 만들고자 한 보수주의자들의 시도들은 거듭 거듭 실패하였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이러한 20년대의 논쟁은 30년대, 40년대에도 계속되었고, 북침례교 총회에서 보수주의자들은 같은 교단 안에 있는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세력을 모으기 위한 “근본주의자”협회를 구성하였다. 45
Ⅲ. 성경관에 대한 고찰
근본주의 논쟁의 핵심은 성경관이다. 많은 신학자들이 “근본주의”를 정의할 때 ‘성경관’을 논하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근본주의 논쟁은 전통적으로 고수되어 오던 성경관을 지키려는 무리들과 새롭게 변화된 세계관으로 과거의 성경관에 반기를 든 무리들의 싸움이라 할 수 있다. 현대주의는 새로운 성경관을 제창하였다.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수용되지 않는 성경의 내용은 사실로써 수용하기를 거부하고 초대교회가 신화로 첨가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독론에 관한 것,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동정녀 탄생, 육체적 부활, 성육신 등에 대하여 반대하였다. 이러한 도전에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초자연적이고 동시에 역사적 사실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두 본성, 동정녀 탄생, 성경의 영감, 성경의 권위를 세우고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성경관은 미국 장로교회에서 프린스톤 신학자가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기에 이들의 성경관은 곧 근본주의 성경관이라 하겠다. 46 이에 프린스톤 신학자들, 알렉산더, 찰스 핫지, 워필드, 메이첸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성경관을 개괄적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1. 알취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프린스톤 신학의 출발점은 초대학장인 알렉산더(A, Alexander)이다. 성경관도 예외는 아니었다. 1812년 그는 학장 취임연설에서 성경을 신학교 존립을 위한 기초로 설정하기 위하여 요한복음 5장 39절 “성경을 찾으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47 그의 저서인 「변증학」의 6장에서 12장까지는 성경이 확증적이고 영감을 받아 기록된 것이며, 정전(正典)이라는 외증들을 요약하고 성경의 권위는 성경 자체의 내증에 의하여 더욱 분명하게 설명된다고 말한다.
성경의 영감에 대해서도 알렉산더는 설명한다. 곧 영감은 성경 기자들이 성경을 기록할 때 감독의 역할을 한다. 곧 성령의 감독하에 성경이 기록되었기에 오류로부터 보호받는다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한 역사가가 성령에 의해 감동되어 성경을 기록할 때, 섭리된 목적에 부합되는 사건과 상황들을 선택하도록 역사한다. 그리고 사건이 내용 속에 모든 실수와 잘못들로부터 보호되도록 사건을 해설하게 돕고 힘을 준다.” 그래서 영감받은 이들은 영감 받지 않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스스로의 문체나 표현 방법을 그대로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알렉산더는 영감을 정의하며 완전영감(Plenary Inspiration)을 주장한다. 49 결국 알렉산더는 성경의 어느 부분이라도 오류가 존재한다는 것을 철저하게 거부한다. 그에게 있어서 이와 같이 성경의 권위를 높이는 것은 곧 하나님을 높이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2. 찰스 핫지(Charles Hodge)
찰스 핫지는 알렉산더를 계승하여 확고한 프린스톤 신학을 정립하고, 더욱 강력한 성경의 권위를 확립하였다. 핫지(Hodge)의 출발점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사실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첫째,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이다. 둘째, 성경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성경이 진리라고 증언하는 것은 모두가 진리이다. 넷째, 성경이 옳다고 하는 것은 모두 옳으며 틀리다고 하는 것은 모두 틀리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50
그리고 핫지(Hodge)는 계시와 영감을 구분하여 설명한다. 영감은 신자의 마음속에 단순한 영적 조명이나 성화 하는 능력이 아니고 초자연적인 영향으로 성경을 기록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계시의 목적은 사람을 더욱 지혜롭게 하여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요, 영감의 목적은 오류를 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책들과 모든 부분은 꼭같이 영감된 것이다. 제한이 있을 수 없고, 저자와 저작 모두 영감 되었다는 것이다. 핫지(Hodge)는 영감론이 저자의 언어까지 영감 되었다고 주장한다. 51 성경 저자들이 정확한 언어를 선택하도록 영감 하셨기에 성경의 모든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도덕이나 종교적 진리에만 무오한 것이 아니고 과학, 역사, 지리에 관하여 모두 무오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핫지(Hodge)의 성경관에서 독특한 것은 원본(Autographa)의 무오설이다. 성경 속에서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동일한 사건에 대하여 상이한 진술을 설명하기 위하여 제창되어진 것이다. 핫지(Hodge)의 시대에도 원본 무오설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존재하지도 않는 원본의 무오성은 사본만이 남아있는 현재에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본무오설은 워필드(Warfield)에 의하여 체계적으로 발전된다.
3. 워필드(B. B. Warfield)
워필드(Warfield)가 활동하던 시기는 선배들보다 기독교 진리에 관한 변증에 더욱 어려움을 겪는 시기였다. 독일신학의 유입, 진화론, 슐라이에르마허의 영향으로 신앙의 주관주의와 같은 도전이 거세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워필드(Warfield)는 성경 영감설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요 계승자로써 영감의 방법이 축자 영감인 것을 주장하였다. 워필드(Warfield)가 성경 영감 교리에 공헌한 것은 참으로 지대하다. 철저하게 구프린스톤 신학전통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이 이론에 관한한 전무후무한 공헌을 하였다. 성경이 그 자체의 영감을 교훈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는 신구약 성경 전체를 망라하고 성경 속의 세부 원리와 일반 원리를 통원하여 영감교리를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의 문헌집 대부분이 “성경의 영감과 무오교리”를 옹호하는 것이었다. 1881년 핫지(A. A. Hodge)와 함께 출판한 “영감”(Inspiration)이라는 글에서, 성경의 축자영감 사상에 관한 교회의 역사적 확신을 기술하고, 당시대 양측 곧 보수주의와 현대주의의 전제들을 기술한 이후에, 성경의 자증에 기초한 전통적인 성경관을 주장한다.
워필드(Warfield)가 보기에 영감에 관한 성경의 주 본문은 세 가지 있다. 요한복음 10장 35절, 디모데후서 3장 16절, 베드로후서 1장 20절에서 21절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디모데후서 3장 16절이다. 53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의 성서 해석은 교리 중심의 해석이 되기 쉽고 따라서 본문 전체를 개관적으로 보지 못할 위험이 뒤따르기도 한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은 성서의 영감성과 무오성의 교리를 입증하는 구절로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다. 54
워필드(Warfield)의 성경 영감교리는 많은 비판을 받는다. 신정통주의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부룬너(E. Brunner)는 워필드(Warfield)가 프린스톤의 역사적 교리를 언어적 무오(Verbal Inerrancy)의 극단으로 끌고 갔다고 공격한다. 55 그러나 워필드(Warfield)의 성경관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은 주로 원본 무오설에 집중된다. 즉 영감은 성경 저자들이 최초로 기록한 원본에만 적용된다는 이론이다. 이에 대한 워필드(Warfield)의 견해는 단호하다. 그는 말하기를 “원본, 어떤 부분의 참 의미가 오늘날 결정적으로 알려진 역사나 과학의 진리 또는 명백히 확인되고 해석된 성경의 다른 부분과 직접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일치하지 않음을 증명하라”고 선언한다. 56
4. 그레샴 메이첸(John Gresham Machen)
프린스톤 신학의 마지막 주자로 일컬어지는 메이첸(Machen)은 그의 선배들이 축척하고 주장해온 신학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는 구프린스톤에 철저하게 서 있는 찰스 핫지(C. Hodge)와 워필드(B.Warfield)의 제자였다. 메이첸(Machen)은 1881년 A. A. 핫지(A. A. Hodge)와 워필드(Warfield)가 저술한 “영감”(Inspiration)이란 글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성경은 물론 원본에 있어서도 완전하고, 무오하고, 유기적 영감의 책으로 전혀 오류가 없다고 한다. 57 메이첸은 이와 같이 선진들의 신앙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며 당대에 일어났던 현대주의에 대항하여 선배들의 이론을 보완하였다.
우선 현대주의에서 가장 심하게 부인한 두 가지 기적을 역사적 사실로써 옹호하였다. 곧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이 그것이다. 58 그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The Virgin of Christ)을 통하여 성경의 초자연적 무오성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완전영감에 대하여 부가적인 설명을 더해주고 있다. 곧 완전영감은 성경의 모든 부분이 똑같이 아름답다거나 똑같이 가치 있다는 것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이는 성경의 각 부분이 똑같이 참되다는 것과 각 부분은 자신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59 선배들은 영감의 방법, 범위, 결과 등에 대하여 논의하였고, 메이첸(Machen)도 이를 동의하는 동시에 영감 받은 성경의 각 부분이 연합과 통일성이 공존함을 보완하였다. 또한 메이첸(Machen)은 성경이 종교와 영감의 책일 뿐만 아니라 “과학”과 “외적 역사”(external history)에도 무오하다고 말한다. 곧 성경의 과학적인 면을 더욱 강조하는 그의 태도이다. 성경은 사실이며, 과학이다. 이에 메이첸(Machen)은 말하기를 “기독교는 과학과 무관하지 않다. 기독교는 다른 지식 분야와 상호 관계가 없는 악의 없고 무익한 부수 현상이 아니다.” 라고 하여 성경과 과학, 타학문과의 조화를 강조하였다. 또한 메이첸에게 있어서 성경은 교리에서 시작을 한다. 그는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평하며 말하기를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만을 청중들에게 전했던 것이다. 어떤 계획과 권고는 없다. 단지 사실들, 교리들이었다.… 성경 어디에서나 그렇다. 처음은 교리이다. 그리고 그 다음이 생활이다.” 60 결국 메이첸(Machen)에게 있어서 교리는 복음에서 추론한 것이 아니다. 메이첸(Machen)에게 있어서 교리는 처음부터 복음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결 론
근본주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험물인 듯한 인상을 주었고, 또 일종의 열광주의를 연상케 하고 있지만 그 본질에는 인간 생활의 기반이 되는 신앙이 깃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신앙이다. 그러나 그 곳에는 충분한 위안과 영감으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이 신앙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성서로 돌아가서 비평가들의 초인간적 지도를 따르지 않고도 자유로이 성서를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61 사람들은 이런 신앙 가운데서 가치와 존귀의 의미를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어떤 지위에 있는 사람이든지 속죄함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이웃에게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손을 뻗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근본주의가 초자연주의를 강조하고, 성경의 객관적 계시와 정확무오한 권위에 정면 도전하고, 그리스도의 처녀탄생, 그리스도의 신성, 대속교리, 부활, 재림등 기독교의 근본교리들을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나, 거기서 몇 가지 약점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첫째로, 근본주의의 약점은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깊이 보지 못하는 점이다. 구약시대의 신자들 가운데는 율법으로 구원을 얻고, 신약시대의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은 다같이 은혜언약에 속하는 구원방법의 계시이다. 구약이 은혜의 약속에 대해 계약이라고 한다면, 신약은 그 성취에 대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양자는 연속성과 통일성을 갖는 것이다. 둘째로, 근본주의 약점은 일반은총(자연은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세속 학문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 하여 마침내 반(反)지식주의로 흘러가고 말았다. 셋째로, 근본주의는 개인의 종교경험을 강조하는 경건주의적 경향을 보이면서 기독교의 사회적, 문화적 명령을 무시한다. 종교는 개인의 기도생활과 성경공부, 그리고 교회출석에 국한되고, 경제학이나 사회학, 그리고 자연과학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하여는 무관한 생활을 한다. 그러므로 문화, 과학은 성경신학에 의하여 지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한정되고 제약을 받는다.
지금까지 근본주의의 운동의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자유주의의 도전에 대항하여 다시 한번 성경의 권위를 확인하려는 그들의 노력을 이해하려고 하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주의 내에서 발생한 분열과 또한 세대주의 운동 등의 측면으로 가급적 이해하고자 하였다.
우리 한국적인 교회의 상황도 보수주의, 개혁주의를 앞세우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근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근본주의, 즉 1920년 이전의 초기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성경의 기본적인 것들을 수호하고자 하는 신앙의 결단과 응징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퇴색하고 변질된 근본주의의 갈림길인 신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의 현상은 우리가 경계해야만 하는 신학적 위험성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단행본
간하배. 「현대신학 해설」. 서울: 한국개혁주의신행협회, 1982.
김기홍. 「프린스톤 신학과 근본주의」. 서울: 도서출판 창조성, 1989.
. 「프린스톤 신학과 근본주의」. 서울: 아멘출판사, 1992.
목창균. 「현대신학 논쟁」. 서울: 도서출판 두란노, 1995.
오덕교. 「장로교회사」. 서울: 합동신학교 출판사, 1995.
이형기. 「세계교회사」. 서울: 장로교출판사, 1994.
Beale, David O. 「근본주의의 역사」.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Bush, Russ L. Nettle, Tom J. 「침례교인과 성경」. 서울: 요단출판사, 1986.
Geisler, Norman L. 「성경무오:도전과 응전」.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85.
Hoffecker, Andrew W. 「프린스톤 신학사상(1)」. 서울: 한국로고스연구원, 1991.
Hordern, William. 「프로테스탄트 신학개요」 서울: 대한기독서회, 1983.
Kantzer, Kenneth S. 「복음주의의 뿌리」. 서울: 생명의 출판사, 1983.
Longfield, Bradley J. 「미국 장로교회 논쟁」. 서울: 아가페출판사, 1992.
Machen, John G. 「기독교와 현대신앙」.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1.
Marsden, George M. 「미국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이해」. 서울: 성광문화사, 1992.
Maurois, Andrew. 「미국사」. 서울: 홍성사, 1982.
Packer, James I. 「근본주의와 성경권위」.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73.
Torbet, Robert G. 「침례교회사」. 대전: 침례신학대학교출판부, 1991.
Wells, David F. 「프린스톤 신학」.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92.
정기간행물
권종선. “침례교신앙과 성서해석 정신.” 「복음과 실천」, 제10집 (1987), 37-53.
김동완. “세대주의의 새로운 동향.” 「목회와 신학」, (1995,2), 91-95.
박동규. “프린스톤신학과 보편실재론.” 「神學指南」, 가을 (1994) 245-260.
피영민. “최근의 남침례교 논쟁.” 「복음과 실천」, 제17집 (1994), 489-509.
신종철. “한국장로교에 있어서 근본주의.” 「신학석사학위논문」, 고신대학교 대학원,
1996.
정세훈. “미국 근본주의 신학이 한국 장로교에 미친 영향.” 「신학석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1998.
한태선. “근본주의자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서울대학교 대학원, 1995.
'신조, 교리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칭의의 교리를 설교하라 (0) | 2010.04.28 |
---|---|
비교 성찬론 (0) | 2010.01.30 |
세대주의와 개혁주의의 차이점 (0) | 2010.01.19 |
divine person-human nature (0) | 2010.01.12 |
존 오웬의 구속에 대한 삼위일체적 이해 (0) | 2010.0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