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들의 외침

피흘린 발자취(전문)

천국 도서관장 2009. 6. 6. 01:17

 

 

 

피흘린 발자취


 J.M.캐롤

서 문


▶ 1. 이 책의 저자 J.M.캐롤 박사는 1858년 1월 8일 알칸사스주에서 탄생하여 1931년 1월 10일 텍사스에서 작고하였다. 침례교회의 목사였던 그의 부친은 캐롤이 여섯 살 때 텍사스주로 옮겼다. 그 곳에서 그는 구원받고 침례를 받은 후 복음전도자로 임명되었다. 캐롤박사는 텍사스 침례교회들의 지도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 침례교회와 세계적으로 저명한 인물이 되었다.


몇 해전 그가 우리 교회에 와서 이 책에 있는 바와 같은 메시지를 전하였다. 내가 케롤 박사께서 하신 여러가지 연구에 대단히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이때의 일이다. 나 역시 교회 역사상에서 어느 교회가 가장 오랜 교회이며 어느 교회가 신약 성경적인 교회에 가장 가까운 것인가 하는데 대하여 특별한 연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강연회에 참석하여 많은 감명을 받았던 J.M.포터 박사는 캐롤씨에게 만약 이 메세지를 탈고하여 주신다면 책으로 출판하겠노라고 말하였다. 캐롤 박사는 이 강의의 초안을 탈고하여 교회사를 밝히 그려낸 도표(圖表)와 함께 그 출판권을 포터 박사에게 주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캐롤 박사는 이 책이 발간되기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포터 박사는 이를 출판하였고 이 판의 전부는 곧 매진되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제17판 25000부를 선사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 책을 읽고 공부하시는 모든 사람들은 이 책의 출판이 더욱 더 거듭될 수 있도록 나와 함께 기도하시며 이 일에 협력하여 주시기 바라 마지 않는 바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서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감추어져 왔던 신비의 교제가 무엇인지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려는 것이니 이는 이제 교회를 통하여 천상에 있는 정사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다양한 지혜를 알게 하려는 것이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교회 안에서 그에게 영광이 끝없는 세상과 모든 시대에 걸쳐 있을지어다. 아멘. [엡3:9,10,21]


▶ 2. 캐롤 박사가 어찌하여 여러 교파들의 역사에 대하여 - 특히 그 기원에 대하여 많은 흥미를 가지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들어볼 때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70세가 넘어서 이 책을 썼다. 그러나 그는 "나는 어렸을 때 하나님께로 돌아왔었다. 그러나 많은 교파가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어느 것이 주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인가 하고 이상히 여겼었다"고 말하였다. 그는 벌써 그의 청년시절에 성경과 역사를 연구함으로써 어는 것이 가장 오래되고 도한 신약에 기록되어 있는 교회에 가장 가까운 교회인가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 진리의 탐구는 그로 하여금 여러 곳에 돌아 다니게 하였고 교회사에 관한 가장 훌륭한 장서의 수집을 가능케 하였던 것이다. 이 수집된 자료는 그가 작고 할 때 텍사스 포트워스의 서남 침례교 신학원에 기증되었다.


그는 많은 교회사를 보게 되었다. 그 대부분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에 관한 것이었던 것 같이 보인다. 그리고 그가 발견하였던 침례교회의 역사는 피로써 기록되어 있었다. 그들 침례교도들은 암흑 시대에 미움을 받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설교자와 성도들은 투옥되었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사형을 당하였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암흑 시대에 가톨릭 교권제도가 침례교회 위에 내렸던 환난과 핍박에 대하여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교황은 온 세상의 독재적 집권자였다. 이것이 종교개혁 이전에 아나 밥티스트(재침례교도)가 교황을 적그리스도라 불렀던 이유인 것이다.그들의 역사는 당시의 공식적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다음의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그 길을 늠름히 흘러내리고 있는 피의 발자취가 이러한 기록 속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쥬리히에서는 쯔빙글리와 아나-밥티스트들 사이에 많은 논쟁이 벌어진 후 의회는 한 법령을 제정하였는데 이는 곧 전에 침례를 받은 사람이(즉 유아 세례) 다시 침례를 받으려고 한다면 이들을 물 속에 집어 넣어서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엔나에서는 많은 침례교도들이 쇠사슬에 매여 서로 뒷사람을 끌고 바다 물 속으로 들어가 모두 빠져 죽고 말았다.(Vida Supra. P.61)"


"A.D1539년 사우워즈워어크 건너편에서는 두 사람은 아나-밥티스트가 불에 태워 죽임을 당하였고 그들보다 조금 먼저는 다섯 사람의 네덜란드 아나-밥티스트가 스미스필드에서 불에 태워 죽임을 당하였던 것이다.(Fuller Church History)"


"1160년 폴리시안(침례교도)의 일행이 옥스포드에 들어왔다. 헨리 2세는 불에 달군 인두로 그들의 안면에 화인을 찍고 군중들 앞에서 그들을 매질하고 골목 골목을 글고 다녔으며 옷을 허리에서 짧게 끊어서 시골로 쫓아내라고 명령하였다. 그 마을 사람들은 그들에게 거처와 음식을 제공하여 주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말미암아 죽고 말았다.(Moore,Earlier and Later Nonconformity in Oxford12)"


그때의 역사가 스토우는 A.D1553년에 말하기를 "5월 25일 - 런던의 성 바울 교회에서 - 19명의 남자와 6명의 여자가 취조를 받았다. 그 중 14명은 사형선고를 받았고 한 사람의 남자와 여자 한 사람은 스미스필드에서 화형을 당하였으며 남은 12면은 불태워 죽이려고 여러 고을로 보냈다."고 하였다.


영국의 역사가 프로우드는 이러한 아나-밥티스트의 순교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상세한 것은 다 없어지고 그들의 이름도 사라졌다. 다만 이러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은 말할만한 가치조차도 없는 것 같이 보인다. 그들로 인하여 유럽이 동요된 것도 아니요 법정에서는 애도(哀悼)의 조령을 내리지도 않았으며 그들을 위하여 교황의 마음이 의분으로 진노한 일도 없었다. 세상은 그들의 죽음을 만족스럽게, 무관심하게, 혹은 기꺼이 바라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25명의 가련한 남녀 가운데는 화형이나 고문으로 믿고 있지 않은 것을 믿고 있는 것처럼 말할 수 없었던 14명의 남녀가 있었다. 역사는 그들을 찬양할만한 용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피는 헛되이 흘려진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삶이란 우리들의 삶과 같이 가치 없는 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으로써 영국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하여 필요한 대가를 지불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캐롤 박사는 친구들만이 아니라 반대자들의 기록 속에도 그들의 역사를 발견하였고 여러 세대를 통하여 그들의 발자취는 참으로 피로 물들어 있음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트렌트 종교회의의 의장 카디날 호시우스의 말


"만약 침례교도들이 과거 1200년 동안에 비참한 고통을 겪지 아니하였거나 칼로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였다면 그들은 모든 개신 교회들보다도 더 많은 수효로 가득 차있을 것이다."(Hosius, Letters, Apud Opera, p.112,113). 이 "1200년"이란 종교개혁에 앞서 로마천주교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가장 참혹한 방법으로 침례교도들을 핍박하였던 그 시대이다.


아이작 뉴톤의 말


"침례교회는 로마 천주교에 절대로 동화되지 않은 저명한 그리스도인들의 유일한 단체이다."


모세임의 말(루터 교회 역사가)


"루터와 칼빈이 나오기 전에도 유럽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거의 모든 나라에는 현재 네덜란드 침례교회의 교리를 완강히 지키고 있었던 사람들이 은밀히 숨어 있었다."



에딘버어그 백과사전(장로교파에 있는 말)


"침례교회란 전에 아나뱁티스트(재침례교도)라고 기록되었던 그리스도인들과 동일한 교회임을 독자들은 이미 기억하실 것이다. 참으로 이것은 터툴리안의 시대부터 지금가지 지속해 온 그들의 교리였던 것같이 생각되어진다." 터툴리안은 사도 요한이 죽은지 꼭 50년 후에 탄생하였던 사람이다.


▶ 3. 침례교도들은 사도권의 계승을 믿지 않는다. 즉 사도의 직분은 사도들의 죽음과 함께 끝났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서 전도하셨을 때 맨 처음으로 교회를 세우셨던 그때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 항상 그것이 존속할 것을 그 교회들에게 대하여 약속하신 것이다. 주님은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다.


마16:18 "나도 너에게 말하노니, 너는 베드로라. 그리고 이 반석 위에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우리니,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의 교회가 행하여야 할 지상명령을 주실 때 다음과 같이 약속하시었다.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시더라. 아멘.


이 사명- 이 일은 사도들에게만 개인적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과 그들의 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사명을 주셨을 때 그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은 마침내 죽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교회는 제자들을 삼고(사람들이 구원받게 하고) 그들에게 침례를 베풀었으며 그가 예루살렘 교회에 분부하신 그 진리- 그 교리를 가르치면서 여러 세대를 통하여 건재해 왔던 것이다. 이 충성된 교회들은 그들이 피의 발자취를 남기면서 나아갔을 때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축복을 받아 왔었던 것이다.


이 역사는 그의 교회에 주신 주님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어졌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캐롤 박사는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주님께서 맡기신 그 진리들을 가르쳤던 교회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캐롤 박사는 이러한 교리들을 신약 성경적인 교회의 특징이라고 불렀다.


신약교회의 특징


교회의 머리와 창설자 - 예수 그리스도. 그는 명령을 주시는 이요, 교회는 다만 실행 기관일 뿐이다.

(마16:18, 골1:18)


믿음과 실천의 유일한 법 - 성경(딤후3;15~17)


그 이름 - "교회","교회들"(마16;18, 계22:16)

그 제도 - 회중적 모든 회원의 평등(마20:24~28,마23:5~12)

그 회원 - 구원받은 사람에 한함(엡2:21,벧전2:5)

그 의식 - 믿는 자의 침례, 이에 따르는 주의 만찬(마28:19,20)

그 직분 - 목사와 집사(딤전2:1~16)

그 사명 - 사람들에게 구원을 얻게 하고 그들에게 침례를 베풀며(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시는 모든 것에 합당한 침례로써) 그들을 가르치는 것(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 (마28:19,20)

그 재정 정책 - "이와 같이(십일조와 다른 헌금들) 주께서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복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명령하셨느니라." (고전9:14)

그 전쟁의 무기 - 영적인 것이요, 육적인 것이 아님 (고후10;4, 엡6:10~20)

그 독립성 - 교회와 국가의 분리(마22:21)


▶ 4. 어느 도시에서나 서로 다른 교회들이 많이 있는데 제각기 참된 교회라고 주장한다. 캐롤 박사는 이제 여러분께서 하실 수 있는 바와 같이 각기 여러 교회들의 특징과 교리들을 들어서 어느 교회가 이러한 특징과 교리를 가지고 있는가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을 받은 그대로 이러한 특징과 교리를 가지로 있는 교회야말로 참된 교회인 것이다. 캐롤 박사는 모든 시대의 교회들을 이렇게 고찰해 본 후 그는 "이러한 특징과 교리"에서 이탈하고 있는 수 많은 교회들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또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그때부터 날마다 그리고 모든 시대에 이러한 특징에 충실하였던 여러 교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는 베드로라. 그리고 이 반석 위에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우리니,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내가 세상 끝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b).



피 흘린 발자취


"그리스도의 시대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러 세기를 걸쳐온 그리스도인들의 발자취"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말씀과 그의 사도들 및 그 교리에 충성하였던 사람들의 역사"



제 1강(講)


"옛날들을 기억하고 많은 세대의 연수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어 보면 그가 네게 보여줄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어 보면 그들이 네게 말해주리라."(신명기32:7)


1.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서기 25년으로부터 30년경 로마제국의 영토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것이다. 로마 제국은 세께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의 하나였었다.


2. 당시 로마 제국의 영토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거의 모든 세계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티베리우스 캐사르는 그 황제였었다.


3. 종교에 있어서는 당시 로마 제국은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다. 즉 어떤 물질적 또는 가상적인 것을 섬기는 다신교였다. 많은 경건한 신자와 숭배자들이 있었으며 그것은 단순히 국민들의 종교가 아니라 그 제국의 종교였었다. 곧 그것은 법률로써 제정되었고 , 정부에 의하여 유지되어 왔었던 국교였던 것이다(Moshein vol.1, Chap.1).


4. 그 당시 유대 사람들은 독립된 한 민족으로 존속할 수 없었고 전 로마 제국의 영토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루살렘에 그들의 성전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곳으로 예배하러 갔었고 그들의 종교에 대하여 열렬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다신교의 경우와 같이 곧 형식주의에 흘러 점차 힘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Moshein vol.1, Chap.2).


5.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세상의 종교가 아니었으므로 그 창설자는 그것에 지상의 영광이나 세속적인 권세를 부여하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것은 제도나 국가 또는 정부의 도움을 바라지 않았으며 캐사르 황제의 폐위를 요구하지도 았았던 것이다. 그 창설자는 말했다.

"카이사의 것은 카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22:19~22, 막12:17, 눅20:20) 그것은 영적인 교회이므로 세속적인 정부와 싸우지 않았다. 그러나 그 성도들은 법률과 정부를 존중히 여길 것을 교육 받았다.(롬13:1~7, 딛3:1, 벧전2:13~16)


6. 나는 이제 이 그리스도의 교회의 특징과 표라 말할 수 있는 몇 가지 것에 대하여 여러분의 주의를 환기코자 한다. 만약 우리들이 20세기라는 긴 시간을 통하여 특히 순교의 피로 물들었던 1200년간 이라는 캄캄한 암흑시대를 통하여 이 교회들의 자취를 더듬어 보려면 이러한 특징을 잘 알아둘 필요가 있다. 때때로 이러한 특징은 그 형제가 심히 파손된 것이겠지만 언제까지나 지을 수 없는 특징이 몇 개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깊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펴보자. 우리는 많은 허위와 위선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자칫하면 성도들도 배반과 속임을 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능한 한 믿을 수 있는 역사를 통하여 그보다 더욱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과 거룩한 진리의 특징을 통하여 이 교회들의 자취를 더듬어 보기로 하자.


틀림없고 확실한 몇 가지 특징들


우리들이 여러 세기를 통하여 내려오는 동안에 뚜렷한 특징에 의거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나 또는 어떤 다른 것을 기본 교리로써 가르치고 있는 무리들을 만나게 될 것인데 그때 우리는 다음의 사실에 주의를 하자.


1. 이 교회의 창설자 그리스도는 그를 따르는 자들 곧 제자들로 교회를 조직하셨다. 그리고 이 복음이 널리 전파되어 다른 제자들이 삼아에 따라 또 다시 다른 교회를 세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Bapt. Successions-Ray-Revised Edition 1st Chap.)


2. 이 조직체 즉 교회에는 성경과 사도 및 초대교회가 실시하였던 규례에 따라 두 종류 즉 오직 두 가지의 직분- 목자(pastor)와 집사가 있었다. 목자는 감독이라 불리웠으며 목자와 집사 이들은 다 교회에서 선출하되 교회의 종이었다.


3. 교회에는 그 운영과 회중을 훈계함에 있어서 다른 교회로부터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독립되어 있어야 한다.

예루살렘은 안티옥을 다스릴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운영은 회중적 곧 민주적이어야 하며 회중의, 회중에 의한, 회중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4. 교회에는 단 두 가지 의식이 주어져 있는데 이는 곧 침례와 주의 만찬이다. 이러한 것은 계속적인 것으로 또한 기념으로써 시행되어져야 한다.


5. "구원 받은" 사람들만을 교회의 회원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행2:47) 이러한 사람들은 어떠한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다만 은혜로써 구원을 받은 것이며(엡2:8,9)이 구원받은 사람들만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마28:19)그리고 이렇게 구원을 받고 침례받은 사람들만이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으며 이 만찬은 오직 교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므로 교회에서 거행되어야 한다.


6. 영감된 성경 그것만이, 사실은 신약 성경 그것만이 조직체로써의 교회뿐만이 아니라 그 조직체에 속한 회원 각 개인의 신앙과 행위 바르게 하는 유일한 기준과 지침이 된다.


7. 이 조직체의 창설자이시며 그 회중들의 구세주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의 유일한 주시요, 입법자이시며 그 교회의 유일한 머리가 되신다. 교회는 다만 주의 뜻과 완성된 말씀을 실행하는 집행부이며 결코 전해내려 온 진리를 수정하고 삭제하여 새 진리를 제정하는 입법부가 되어서는 안된다.


8. 그리스도의 교회는 개인적인 것이어서 순전히 자발적으로 또는 권유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것이지 강압적으로 또는 정부의 강권으로 되어질 것이 아니다. 분명히 개인적이며 각자가 선택하여야 할 것이다."너희가 택하라"이는 성경의 명령이시며 누가 대신 받아 들이거나 거절하거나 살아갈 수 없는 것이며 강압적으로 되어질 것도 아니다.


9. 주의하시기 바란다. 그리스도께서나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오늘 날 알려져 있는 가톨릭이나 루터교회 또는 장로교회나 성공회 등등 이러한 교파적인 명칭을 주신 일이 없다.(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침례를 주는 자 곧 침례인 요한이라고 부르신 것은 특이함, 마11;11, 그 외에도 10번 내지 12번) 다만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을 제자라 부르셨고 두 사람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제자들이라 부르셨다. 그 제자들의 조직체는 예루살렘이나 안다옥 또는 그 밖의 어는 곳에서나 교회라 불리웠고 이러한 분리된 조직체가 하나 이상 일 때에는 교회들이라 불리웠던 것이다. 교회라는 단수 용어는 하나 이상의 조직체에 대해서는 결코 쓰이지 않았었고 그 모든 교회들을 말할 때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10. 나는 또 하나의 특징을 말씀드려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교회와 국가의 완전한 분리라 말 할 수 있을 것이다.(이 영적인 교회들을 세속적인 정부와 결합 또는 혼돈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모든 사람에게는 완전한 신앙의 자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역사 그 차제에 대하여 말씀드리기 전에 다음의 도표에 대하여 여러분의 주의를 환기코자 하는 바이다.

 

 

만약 여러분이 이 도표를 주의 깊게 공부하신다면 역사적 사실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여러분이 보고 듣는 것을 기억하시는데 많은 도움이 될 줄 믿는 바이다.


이 도표는 2000년에 이르는 교회사가 취급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할 것이다.


이 도표의 상하에 있는 숫자 - 100, 200, 300에서 2000까지 되어 있는 - 에 주의하시기 바란다.


이러한 숫자는 20이란 세기(century)를 표시하는 것이며 종선은 각기 다른 세기를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도표의 아래 쪽에 몇 개의 직선이 도표의 왼편에서 오른 쪽으로 길게 그어져 있는 것에 유의하시기 바란다.


이 선은 수평선과 같은 거리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선의 전부를 볼 수는 없다. 이는 역사상 암흑시대라 일컬으며 검은 점으로 덮여 있는 것이다.


다음에 더 설명하기로 하고 밑에 두 줄 사이에 있는 것은 구가들의 명칭이다. 이탈리아. 웨일즈, 영국, 스페인, 프랑스 등등이며 미국으로 끝나있다. 이러한 나라들은 대부분의 역사가 그들 자신들의 이름으로 불리웠던 때에 만들어졌던 나라들의 이름이다.물론 모든 역사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떠한 역사는 각각 그 시대에 어떠한 나라에서 이루어진 다는 것이며 어떤 특수한 시기에 특별한 국가들에 의하여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이 도표의 하편 조금 위에 있는 다른 선에 주의하시기 바란다. 이는 역시 부분적으로 암흑시대에 덮혀 있으며 거기에도 많은 명칭이 쓰여져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라의 이름이 아니라 다 그들의 적들이 그 사람에게 준 별명이다. [크리스천(Christian)-그리스도인]그것이 첫 번째 이름이다."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11:26) 이는 주후 43년경에 일어난 일이다. 이 성도들과 유대교인들이 그들을 조소하기 위하여 주었던 이름이다.


그 난(欄)에 있는 다른 모든 이름도 다 이렇게 하여 주어진 것이다. 즉 몬타니스트, 노베이셔니스트, 도나티스트, 폴리시안, 알비젠시스, 웰덴시스 등등 그리고 아나 밥티스트, 이 모든 것은 이 강의가 진행됨에 따라 재삼 언급하게 될 것이다.


다시 도표를 보라. 붉은 원을 보라. 이것은 이 도표의 거의 전면에 산재하여 있다. 그것은 교회를 표시한 것인데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그리고 산간 벽촌에 있는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교회들이다. 그것이 피와 같이 붉은 것은 순교자의 피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창설자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요한과 유다 두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도 순교의 죽음을 당하였던 것이다. 유다는 그의 주님을 배반하고 자살하였으며 역사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큰 기름가마에서 죽었다고 한다.


여러분께서는 또한 검은 원을 여러 개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는데 이것 역시 교회들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교회들 즉 생활이나 교리에 있어서 과오를 범하였던 교회들이다. 베드로, 바울 및 요한이 죽기 전에도 이러한 교회가 많이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일반적인 서론과 가장 긴요하고도 근본적인 예비 과정을 끝마쳤으므로 본래의 역사의 이야기에 들어가기로 하자.



제 1 강(講) : A.D 30~500


1. 약간 기이하기는 하겠지만 광야에서 나온 선지자 침례인 요한의 놀라운 선포와 영도아래 그리스도 자신의 감동적인 사랑과 기적을 행하시는 권능아래 그리고 열 두 사도들과 바로 이어진 계승자들의 훌륭한 선교하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시초의 500년간은 힘차게 전파되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무서운 피의 발자취를 남기고 있는 것이다. 유대교와 이교주의는 하나하나의 발전을 방해하고 있었다. 침례인 요한은 그 위대한 지도자들 주에서 그 자신의 목숨을 바친 첫 번째 사람이었다. 즉 그는 참수형을 당하였던 것이다. 그후 얼마 되지 않아서 교회의 창시자인 구세주 그 자신이 돌아가셨다. 그는 십자가에 달리어 비참한 죽음을 당하였던 것이다.


2. 구세주의 뒤를 따라 지체 없이 많은 순교의 영웅들이 쓰러져 갔다. 스테반은 돌에 맞아 죽었고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살해되었으며 마가는 죽기까지 거리에 끌려 다녔으며 누가는 목이 매여 죽었고 베드로와 시몬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드레는 십자가에 달리었고 야곱은 목베임을 당하였으며 빌립은 십자가에서 맞아 죽었고 바돌로매는 산채로 가죽을 벗기웠으며 도마는 창에 찔려 죽었고 동생 야곱은 회당에서 내던지어 주기까지 매를 맞았으며 유다는 화살에, 맛디아는 돌에 맞아 죽었고 바울은 목베어 죽임을 당하였다.


3. 이러한 모든 일이 일어나기까지는 백년 이상의 세월이 지나갔다. 유대교와 이교주의의 이 가혹한 박해는 두 세기 이상이나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힘차게 전파되고 있었다. 복음은 로마 제국을 비롯하여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영국, 웨일즈 및 어느 곳을 막론하고 소위 문명이라는 것이 존재하였던 모든 곳에 침투해 가고 있었다. 교회는 크게 발전하였고 제자들의 수효도 계속 증가되어 갔다. 그러나 어떤 교회는 계속 과오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4. 신약성서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첫 번째의 변경은 그 운영과 교리의 양면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초기의 2세기 동안에 개체 교회들은 급속도로 번성하였고, 초대 교회 즉 예루살렘, 안디옥, 에베소, 고린도 등의 교회는 대단히 컸으며 예루살렘 교회를 예로 들어 본다면 그 회원은 수 천 명(행2:41, 4:4, 5:14) 아마 25000에서 50000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행전과 목회서신을 깊이 바로 잡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와 바울이 미래에 대하여 예언한 것을 보라(벧후2:12, 행20:29~31, 계2:3을 보라). 이러한 큰 교회에는 필연적으로 많은 설교자나 장로(목자)들이 있었다.(행20:17)그런데 그중 어떠한 감독 즉 목자들은 신약성경에서는 그들에게 부여하지 않은 권한을 주장하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여러 장로들과 함께 하나님의 기업 위에 군림하기 시작하였다.(요한삼서 9)바로 여기에 여러 가지 중대하고도 해로운 과오의 삭이 트였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 결국 가톨릭은 물론 다른 교파들이 오늘 날 실행하고 있는 선교상의 잘못된 방법의 시작이 있었으며 초대 교회의 민주적인 근본정책과 운영제도에서 전혀 상이한 결과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불법은 벌써 제 2세기 말 이전부터 조금씩 시작되고 있었는데 아마도 이것이 신약 성경적인 교회제도에서 최초로 변경된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5. 또 하나의 결정적인 변경은 역사상으로 제 2세기가 끝나기 전에 시작되었으리라고 생각되는 교리 그 자체에 관한 것이었다. 유대 사람들은 이교도들과 마찬가지로 오랜 세대에 걸쳐 의식을 강조하는 교육을 받아 왔었다. 그들은 예표를 원형으로 , 그림자를 실체로 또 의식을 실체로 구원받는 방도로 여겨 왔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성경에는 침례에 대한 것이 많이 언급되어 있는데 침례에 관한 의식과 개인의 구원과 관련이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침례에 의한 중생의 관념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이다(Shackelford pages57;Camp p.47; Ben Benedict, p.286; Mosheim, Vol.1.p.134; Christian p.28).


6. 다음에 숨어들기 시작한 중요한 과오 즉 침례에 의한 중생이라는 관념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결과라 말할 수 있는데 어떤 역사가에 의하면(전부는 아니지만)바로 이와 동일한 시대에 시작되었으리라 생각되는 것으로서 침례의 대상이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잘못된 교회에서 침례를 하나의 구원받는 방도와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침례를 일찍이 맡을수록 더욱 좋다는 것에 이르렀으므로 여기에 유아세례가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이전에는 믿는 자만이 침례를 받을 대상이 되어 왔었다. 관수례와 적수례에 관한 것은 여기에서 언급하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을 훨씬 후에 일어난 일이며 수세기 동안은 유아들도 일반 사람과 같이 침수례를 받아 왔었다. 희랍 정교회(가톨릭의 큰 지파)는 금일에 이르기 까지 침례의 근본 형식을 변경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유아 세례를 실시하고 있으나 침수례에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하지 않고 있다. (주: 어떤 교회 역사가는 유아 세례의 시작을 이 세기에 두지만 나는 로빈슨의 교회에 관한 제 연구에서 짧은 구절을 인용하려 한다.)

"처음 3세기동안 동방에 있었던 모든 교회는 각각 독립된 지체로써 존속하여 왔으며 정부의 원조도 받지 않았다. 그 결과로써 각 교회에는 어떤 세속적인 권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 당시에는 다 교회에서 침례를 받았던 것이다. 제롬(주후 370년)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처음 4세기의 사람들은 다 그리스와 시리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은 성장된 사람의 침례에 대해서 많은 역사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으며 370년까지는 유아 침례에 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Shackelford's Compendiam of Baptist History, p.43; Vedder, p.51;Christian, p.31; Orchard, p.50, etc).


7. 여기에 기록한 이러한 변화는 하루 동안이나 일 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서서히 되어진 것이며 또한 전체의 교회에서 일어났던 것도 아니다. 어떠한 교회는 그것을 강력히 거부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AD 251년에 이 충성된 교회들은 이렇게 과오를 받아들이고 또한 실시하고 있었던 모든 교회와는 성도의 교제를 받아들이고 또한 실시하고 있었던 모든 교회와는 성도의 교제를 끊어 버린다는 선언을 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교회사상 최초로 공식적인 분리가 일어나게 되었다.


8. 이러므로 최초의 3세기 동안에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세 가지의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지적될 것이다. 그리하여 의미심장한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니 그 개요의 요지에 주의하시기 바란다.

① 감독과 교회 운영 방법이 신약성서의 가르침에서 변경된 것. 이 변화는 급속도로 발전하였고 더유ㅜᄀ 강조되었으나 완전히 해로운 것이 되고 말았다.

② 구원에 관한 신약성서의 가르침이 "침례에 의한 중생(거듭남)"으로 변경된 것.

③ 믿는 자들이 받는 침례에서 유아 침례로 변경된 것.(이미 마지막 변화는 다음 세기가 되기까지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고 자주 행하여진 것도 아니었다.)


9. 침례에 의한 구원과 유아 세례. 이 두 가지 과오는 정설이 되어 있는 역사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수 세기를 지남에 따라 다른 모든 과오를 한데 뭉친 것보다는 그리고 최근의 세계 대전을 제외하고는 핍박에 관계없는 모든 전쟁보다도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피를 흘리게 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주로 이 두 가지 과오를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암흑시대-12 또는 13세기 동안의 기간만 하더라도 50,000,000명 이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자로서 죽었던 것이다.


10. 다음 3가지의 의미 깊은 사실들이 이 3세기 기간 중에 많은 교회 가운데 나타나 있음이 역사적으로 밝혀져 있다.

① 모든 교회들의 분리와 독립

② 감독 곧 목자(pastor)의 종속적 성격(즉, 한 교회의 종일뿐)

③ 믿는 자만의 침례


나는 여기에 루터파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 모세임의 저서에서 인용하기로 한다.


제1편 p.71과 72 ▶ 이 황금 시대의 교회 감독이 다음 세기의 감독들과 일치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전혀 다른 그 성격을 혼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기와 다음 세기에 있어서의 감독은 일반적으로 개인의 집에 있었으리라 생각되어지는 단독 교회를 맡아보고 있었으므로 그는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 실제로는 교회의 봉사자 또는 종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초창기의 모든 교회들은 다 독립된 단체였으며 그중 하나도 다른 교회의 관할 밑에 종속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사도 자신들이 세운 교회가 때때로 의문이 있을 때에는 상의하는 일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재판권이나 지배권 꼬는 입법권을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모든 그리스도 교회는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모든 점에 있어서 평등한 입장을 존중하고 있었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11. 2세기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환란과 무서운 핍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들은 놀랄 만한 발전을 하고 있었다. 대 로마제국의 전 영토를 훨씬 넘어서 당시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즉 전 세계라고는 할 수 없지마는 거의 모든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었던 것이다. 어떤 교회 역사가들에 의하면 사도들이 조직한 많은 친교회는 여전히 서 있었으며 사도들의 가르침에 충실하였던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아주 뚜렷하고 현저하게 나타난 과오가 여러 교회 안에 숨어들어 영원히 사라지지 않게 되었으며 마침내 어떤 교회들은 대단히 무질서하게 되어 버렸다.


12. 박해는 더욱더 심하여 갔다. 제 4세기 초기에 정부로부터 아마 최초의 박해령이 발표되었다. 교회들의 이 놀라운 발전은 로마에 있었던 이교도 지도자들의 마음을 흔들리게 했으므로 갈렐리우스 황제는 더욱더 가혹한 박해의 명령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AD 303년 2월 24일에 일어나 일이다. 이때까지 이교도들은 어떤 일정한 법령없이 박해를 가해 왔었던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13. 그러나 이 칙령은 복음의 성장을 저지 시키려는 그 목적에서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같은 황제 갈렐리우스는 그 후 꼭 8년 만에 (AD 311년) 첫 번째 칙령을 철회하고 실제로 신앙의 자유를 용납하는 다른 하나의 법령을 발표했던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을 허용하는 법령이었다. 아마 이것이 교회들에게 유리한 최초의 법령이었을 것이다.


14. A.D 313년이 시작됨에 다라 교회들은 이교주의에 대하여 압도적인 승리를 얻었다. 새 황제가 로마제국의 왕위에 올랐다. 그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성장을 계속하는 이 교회들에게는 반드시 어떤 신비적인 힘이 있음에 틀림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역사에 의하면 이 훌륭하고도 현실적인 관찰력을 가지고 있었던 이 새 황제야말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콘스탄틴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창공에 있는 불과 같은 발간 십자가를 보았고 그 십자가 위에 발간 문자로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이로써 네가 정복하라" 그는 이 말씀을 그 자신이 해석하기를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고 또한 사교(邪敎)를 버리고 복음의 이 신령한 권능을 로마 제국의 세속적인 권력 위에 첨부시킨다면 세계를 쉽사리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해석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리스도교는 실상인즉 세계의 종교가 되었고 로마 제국은 전 세계의 제국이 되었던 것이다.


15. 그리하여 콘스탄틴 황제의 지도 아래 휴전과 구애(求愛) 와 구혼(求婚)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로마 제국이 그 황제를 통하여 교회와의 결혼을 모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그대의 신령한 권능을 우리에게 부여하라. 그러면 우리는 지상의 일시적인 권력을 그대에게 주리라 하는 것이었다.


16. 이 부정(不淨)한 결혼을 완성시켜서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교회회의(혹은 종교회의)가 소집되었던 것이다. A.D313년 그리스도의 교회들과 그 대표자들을 회합시키기 위한 소집 통고가 발표되었다. 전부라고는 할 수 없으나 많은 대표자들이 참석하여 동맹(同盟)을 체결하였다. 이리하여 교권제도(敎權制度)가 형성되었다. 이 교권제도가 조직됨에 따라(-다만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에서 추방되었고 콘스탄틴 황제가 교회의 머리로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17. 이 교권제도는 마침내 오늘날 알려져 있는 가톨릭 또는 우주적 교회로 발전될 하나의 뚜렷한 시작이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가톨릭이 시작된 것은 일부 감독 및 목자들이 성서에 있지 않은 교회정책 운영에 관한 새로운 관념이 현실화되기 시작하였던 2세기 말이나 3세기 초엽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8.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콘스탄틴 황제가 그 교회 회의를 소집하였을 때 거기에 응하기를 거부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침례교도)과 교회들이 있었다는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국가와의 혼인관계를 원치 않았으며 중앙집권적인 교회 정치나 또는 개개의 교회 이외에 어떤 종류의 계급적인 교회 이상의 정치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침례교도)과 교회들은 그 당시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가톨릭의 교권제도 속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19. 이 교권제도가 창설되었을 때에 그 통솔자가 되었던 콘스탄틴은 그 자신은 당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겠다는 것에는 동의하고 있었지마는 그와 함께 이 조직체 안에 들어온 그릇되고 무질서한 교회들이 침례에 의한 중생이라는 이 과오를 채택함에 따라 다음과 같은 심각한 의문이 콘스탄틴의 머릿속에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즉 만약 내가 침례로 말미암아 내 죄를 씻고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침례로 말미암아 내 죄를 씻고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침례를 받은 후에 범하게 될지도 모르는 내 죄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는 후세의 모든 사람들을 당황케 하는 질문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침례는 아직 범하지 않은 죄까지라도 씻어 버릴 수 있는 것인가? 또는 침례 받기 전에 범한 죄를 한 가지 방법(즉 침례)으로써 씻어 버릴 수 있으면 침례 받은 후에 범한 죄도 다른 또 하나의 방법으로써 씻어 버릴 수 있을 것인가?


20. 이와같이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의문을 원만히 해결할 수 없었으므로 콘스탄틴은 결국 교회들과 연합하기로 결심은 하였으나 침례만은 자기가 범한 모든 죄를 한꺼번에 시어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해서 죽기 직전에 받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죽기 직전까지 침례를 받지 않았던 것이다.


21. 전 로마 제국을 위하여 이방종교를 추방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받아들인 콘스탄틴의 이러한 행동은 오마 원로원의 원망을 사게 되었다. 그들은 그의 방침을 저지시키려 하였으며 반대를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의 반대는 마침내 황제의 보좌를 로마에서 비잔틴 고대의 도시이며 후에는 콘스탄틴에 의하여 콘스탄티노플이라 개칭하게 된 도시로 옮기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래서 로마 제국에는 두 개의 수도 곧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이 새긱게 되었고, 서로 대항하는 이 두 도시는 수 세기 후에는 분열된 가톨릭, 로마 가톨릭과 희랍 정교회를 다스리는 중심지가 되었던 것이다.


22. 교권제도가 형성되어 교회와 국가가 서로 결합하기 이전에 있었던 교회에 대한 박해는 유대종교와 이교주의에 의하여 행하여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중요한 변화가 생기게 되었으니 곧 이름만의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콘스탄틴은 그리스도인들이 국가 종교라는 그의 새로운 이념에 협조하여 주기를 열망하고 있어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가르침에서 멀어져 가는 이 중대한 분리에 대하여 많은 양심적인 사람들의 반대가 있었으므로 그는 이러한 사람들을 복종시키기 위하여 정부의 강권을 발동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가르쳤던 근본 진리에 충실하였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가혹하고도 참담한 핍박의 세대와 세기가 시작되게 되었던 것이다.


23. 지금 우리는 주후 300년에서 500년 사이에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콘스탄틴의 영도 하에 조직된 교권제도는 소위 오늘날 천주교라고 알려져 있는 것으로 급속도로 발전되어 왔었다. 새로 발족된 이 교회는 세속적인 정부와 결합하여 이미 신약성경에 완성되어 있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실행기관이 아니라 말씀을 수정 또는 삭제하며 신약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새로운 율법을 제정하는 입법기관이 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24. 이 입법부가 제정한 최초의 법령 그리고 결과적으로 가장 파괴적인 것의 하나는 유아세례를 법으로써 제정한 것 바로 그것이었다. 이 새로운 법률로 말미암아 유아세례는 의무적인 것으로 되어 버렸다. 이는 A.D.416년에 되어진 사실이다. 아마 유아들은 이에 앞서 한 세기 동안이나 세례를 받아 왔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법률이 발효됨에 따라 신약성경에 있는 두 가지의 중요한 가르침이 폐기되었으니 이는 믿는 자의 침례와 자유의사에 의하여 침례를 개인적으로 받으려는 순종이 그것이다.


25. 이 새로운 교리와 법률의 필연적인 결과로써 이러한 잘못된 교회들은 곧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로써 가득 차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그리 오래지 않아서 회원의 대부분이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로써 이루어지게 되었으므로 신령한 하나님의 위대한 영적 사업이 거듭나지 아니한 세속적인 권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26. 물론 충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은 이 새로운 법을 거부하였다. 『믿는 자의 침례』물론 신약성경적인 침례만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유일한 법이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아이들이 세례받는 것을 거절하였을 뿐 아니라 비성경적으로 조직된 교회에서 침례받는 것까지도 거부하였던 교회의 회원이 성경적인 교회의 회원이 되려고 할 때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체험과 재침례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27. 물론 충성된 교회들의 그 정책은 곧 국가 교회 주의자를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많은 사람들의 심한 원망을 사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는 이 칭호는 그때부터 이 새로운 과로를 받아드리기를 거절하였던 충성된 성도들에게는 쓰이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이름을 빼앗기고 많은 다른 이름으로 즉 때로는 어떤 사람에 의하여 때로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써 불리우게 되었던 것이다. 몬타니스트, 터툴리안, 노베이셔니스트, 페이터린 등등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유아 때에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다시 베푼다는 이유로 아나 밥티스트(재침례파)라 불렀던 것이다.


28. A.D 426년 곧 유아세례가 법령으로 제공된 지 꼭 10년 만에 암흑시대라 불리는 무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얼마나 무섭고 캄캄하며 피 비린내 나는 시기였는지!!! 이때부터 10세기 이상이나 걸쳐서 충성된 그리스도인들의 발자취는 대부분 그들 자신이 흘린 피 속에서 물들게 되는 것이다. 도표에 나타나 있는 박해받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다른 이름에 유의하시기 바란다. 때때로 이러한 명칭은 어떤 특수한 지도자들에 의하여 때로는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사람들에게 붙여진 명칭이라 할지라도 때때로 시대가 다르고 국가가 달라짐에 따라 그 명칭이 변하여 갔던 것이다.


29. 실제로 교황제도가 뚜렷하게 시작된 것은 암흑시대의 초기였으며 이는 A.D. 440년에서 461년에 있었던 레오 2세로 인하여 시작되었다. 그러나 교황이라는 칭호가 사용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다. 천주교 역사와 비슷한 이 칭호는 크게 발전하였으며 이는 296년에서 304년까지 로마에 있었던 감독에게 처음으로 적용되었다. 그리고 384년에서 398년에 이르기까지 로마의 감독으로 있었던 시리시우스가 공식적으로 이를 채용하였고 그 다음에 레오2섹가 (440~461) 정식으로 이를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707년부터는 보편적인 것으로 주장되었고 그 다음 수 세기 후에는 그레고리 7세에 의하여 교황에게 독점사용이 선언되었던 것이다.


30. 이제 이 처음 5세기 동안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을 요약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민주주의적인 제도에서 성직자 교회제도로의 점진적인 변화

은혜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에서 침례에 의한 구원으로의 변화.

믿는 자의 침례에서 유아세례로의 변화

교권 제도의 확립. 교회와 국가와의 결혼.

황제의 거소(居所)가 콘스탄티노플로 옮아간 것.

유아세례가 법령으로써 제정되어 의무적으로 된 것.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한 것.

426년에 암흑시대가 시작된 것.

복음보다도 검(劍)과 횃불이 구원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 것.

신앙의 자유라고 볼 만한 모든 것은 시들어 매장되었으며 매장된 그대로 여러 세기를 지나게 된 것.

충성된 신약성경적 교회들은 어떠한 이름으로 불리 우고 있었든지 간에 가톨릭의 새로운 세속적인 권력에 의하여 최후의 곤경에까지 쫓기게 되었다는 것. 온 세상에 흩어진 생존자들은 숲이나 산속 그리고 산 골짜기나 동굴 속에서 그 불안한 피난처를 찾고 있었다는 것.



제 2 강(講) : A.D 600~1300


1. 우리는 제1강을 5세기 말에서 끝마치었다. 그러나 제1강에서는 아직 언급하지도 않았던 많은 사건이 이 초기의 수 세기에 시작되었다. 우리는 세계 역사상에서 바로 암흑시대라 알려져 있는 무서운 시대에 들어왔다. 그것은 어둡고 피비린내 나며 말할 수 없는 무서운 시대였다. 제도화된 로마 천주교에 의한 박해는 가혹하고 잔악하며 계속적인 것이었다. 고의 적인 섬멸전이 끊임없니 참혹하게 여러 나라로 도피해 간 그리스도인들의 뒤를 따랐다. 어느 곳에나 남아있는 것은 거의 전부 피 흘린 발자취뿐 이었으며 특히 영국, 웨일즈, 아프리카나, 알바니아 및 불가리아에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 밖의 어느 곳에서나 신약성서의 가르침에 충성되려고 완강하고 간절한 노력을 하고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2. 이제 우리는 에큐메니칼 또는 전 제국회의라는 종교 회의에 해하여 중의를 환기시켜 보기로 한다. 이러한 모든 종교회의는 표면상으로는 사도들과 그의 다른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개최하였던 교회회의( 행 15:1을 보라)에 기초를 두었고 또한 그것을 모방한 것 같지만 그러나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방한 것 같지만 그라나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처럼 서로 닮지 않은 것은 아마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 여기에서는 다만 여덟 번의 종교(교회) 회의에 대하여 고찰해 보려 한다. 그것은 다 각기 다른 황제들에 의하여 소집되었던 것이며 그중 하나 도 교황에 의하여 소집된 것은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교회회의는 동방 또는 그리스 교회들 사이에서 개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서방 즉 로마 천주교의 대표들도 참석하였던 것이다.


3. 첫 번째 종교회의는 AD 325년 니케 혹은 니케아에서 개최되었고 이는 콘스탄틴 대제에 의하여 소집되었던 것인데 318명의 감독들이 참석하였다.


두 번째 종교회의는 AD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렸고 이는 티오도시우스 대제에 의하여 소집되었으며 150명의 감독들이 출석하였다. (초대에는 감독이라 하면 단순히 개개 교회 목사를 의미하였다.)


셋째 번은 티오도시우스 2세와 발렌티안 3세가 소집하였고 250명의 감독들이 참석하였으며 이는 AD 431년 에베소에서 개최되었다.


넷째 번 종교회의는 황제 마리안이 AD 451년 칼세돈에서 소집하였다. 500명 내지 600명의 감독들과 메트로폴리탄(감독장)들이 출석하였다. (메트로 폴리탄은 도시교회의 목사 또는 큰 교회의 목사를 가르킨 것이다.) 이 종교회의 도안에 소위 오늘날 성모숭배(聖母崇拜)라 알려져 있는 교리가 공포되었다. 이는 곧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를 예배한다는 굉장한 소동을 일으켰으며 심각하게 반대하는 이도 많이 있었으나 결국 천주교의 항구적인 교리가 도미에 따라 승리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 여덟 번의 종교회의 중 다섯 번째 것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리었다. (그 곳은 두 번째 회의가 열렸던 것이다.) 이는 AD 553년 유스티니안 황제에 의하여 소집되었고 165명의 감독들이 참석하였다. 이는 주로 어떤 문서를 정죄하기 위하여 개최된 것 같이 보인다. AD 680년에 여섯 번째의 종교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역시 콘스탄티노플에서 콘스탄틴 페고네이터 황제에 의하여 이단을 규탄하기 위하여 소집되었던 것이다. 이 회의를 통하여 오노리우스라 이름하는 교황이 폐위되었고 파문당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때까지는 교황무오설(敎皇無誤設)이 선포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일곱 번째의 종교회의는 AD 687년 니케아에서 소집되었다. 이는 이곳에서 개최된 두 번째의 종교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성상숭배와 성도 숭배가 정식으로 시작된 것같이 보인다. 이와같이 여러분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이 복음화하기보다는 오히려 노골적으로 이교도화되어 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소위 동방교회 회의라 불리는 이 최후의 종교회의는 황제에 의하여 소집되어진 것인데 AD 869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되었던 것이다. 이는 발실리우스 마레도 황제가 소집한 것이다. 이때 가톨릭은 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가톨릭의 두 지파- 동방 및 서방 빛 희랍파와 파와 지파-동방 및 서방 즉 희랍파와 로마파의 영도자 곧 콘스탄티노플에 있었던 회라의 폰티우스 대제와 로마의 니콜라스 1세 사이에 대단히 중대한 성질의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시비는 대단히 심각한 것이어서 서로 다른 사람을 파문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리하여 잠시 동안이지만 가톨릭에는 그 영도자가 없게 되었다. 따라서 주로 이러한 난관을 가능한 한 해결해 보려고 이 종교회의가 소집되었던 것이다.


서로 우열(愚劣)을 다투었던 가톨릭 교파의 이 분열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만족할 만한 해결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득한 옛날부터 이 분쟁을 돌이키려는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그 후부터는 로마 교황청의 세력이 우세하게 되었고 황제가 아니라 로마의 교황이 모든 교회회의 우세하게 되었고 황제가 아니라 로마의 교황이 모든 교회회의를 소집하게 되었던 것이다. 후기의 종기회의에 관하여서는 이 강의 마지막에서 말하기로 한다.


4. 우리가 주의하여 오지 않았던 한 가지 새로운 교리가 있다. 아마 그 외에도 더러 있겠지만 특히 유아 성찬이라는 것이다. 유아들에게 침례를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 받아들여 교회의 회원이 되게 하였고 주의 만찬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빵을 포도주에 적시어 주는 것으로써 해결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또 하나의 새로운 교리가 첨가되었으니 이러한 유아 성찬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가르치게 된 것이다.


또 하나의 교리가 첨가되어진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이 강의의 후편에서 다시 말씀드리기로 한다.


5. 제 5세기 동안에 곧 451년 칼세돈에서 개최된 제4회 종교회의에서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교리의 목록에 새로운 또 하나의 교리가 오르게 되었다. 이 교리는 성모 숭배 또는 예수님이 어머니 마리아 숭배라 불리었다. 새로운 중보자가 필요하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너무나 멀기 때문에 단 한 사람의 중보자, 설령 그가 하나님의 아들 곧 육신을 입으신 참 하나님의 그리스도라 할지라도 또 하나의 중보자로서 마리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기도는 마리아를 향하여 드리게 되었고 마리아는 그들의 기도를 그리스도에게 전달하도록 되었던 것이다.


6. 제 8세기에 다른 두 가지의 새로운 교리가 천주교의 신앙에 첨가되었으니 이는 787년 니케아에서 열렸던 두 번째의 종교회의에서 선포되었던 것이다. 그중 하나는 성상 숭배이며 바로 하나님의 계명 중 그 하나를 모독하는 것이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출애굽 20 : 3, 4, 5. 이교주의에서 첨가된 또 하나의 것이었다. 이에 따라서 성자숭배라는 것이 행해졌다. 이 교리는 성경 안에 장려되어 있지 않는 것이며 단 한번 성자숭배의 실례가 성서에 나타나 있으나 그것은 성자숭배라는 것이 아주 어리석은 것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는데 죽은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기원하였던 것이 그 예인 것이다. 누가 16 : 14~31??이러한 것들은 교회 역사상 이 시기에 일어난 것으로서 신약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많은 변화의 전부가 아니라 다만 그중 몇 가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7. 우리가 지금 걸어오고 있는 이 시기를 통하여 박해를 당하였던 사람들은 여러 가지 형태의 명칭으로 불리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명칭 중에는 도나티스트, 페이터린, 카타리, 홀리시안 및 아나 밥티니스트 등이 있었으며 조금 후에는 페트로-브루시안, 아놀디스트, 헨리시안, 알비젠시스 및 월덴시스라는 것 등이 있었다. 때로는 이러한 단체의 명칭이 가장 많이 쓰였고 또 어떤 때에는 다른 단체들의 명칭이 사용되었었다. 그러나 이러한 명칭 중에는 그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심한 핍박을 당하여 왔기 때문에 거의 언제나 쓰여진 것도 있었다.


8. 그렇다고 해서 박해를 받았던 그 사람들이 항상 신약성서의 가르침에 충실하였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그러한 사람들도 있었지마는 사실 그 중 얼마의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처해 있었던 환경을 고려 볼 때 놀랄 만큼 충실하였던 것이다. 아득한 그 시절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약이든 구약이든 그 일부분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돌 것이다. 아득한 그 시절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약이든 구약이든 그 일부분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돌 것이다. 서적은 인쇄할 수 없었고, 양피지나 짐승의 가죽 또는 그런 것에 어떤 것에 손으로 썼든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방대한 분량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설령 어떤 가정이나 개체 교회가 약간 가지고 있었다 할지라도 성경 전권을 완전히 갖추고 있는 곳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아마 성서의 정식으로 제정되었기(4세기 말) 이전까지는 완전히 신약성서의 사본이란 극히 드물었던 것이다. 지금 알려져 있는 수천의 사본 중에서 신약 전권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겨우 30부 가량밖에 없다.


9. 더욱이 암흑시대와 이 핍박 시기에는 박해를 받았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그 얼마 되지 않는 성경의 사본까지라도 없애 버리려는 과감한 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성경의 극히 일부분만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0. 또 주의하여 바라볼 것은 가톨릭의 교리에 위반되는 어떠한 견해이거나 또 그것이 전파되어지는 것을 방해하기 위하여 아주 극단적인 계획과 수단이 감행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첫째로 어떤 종류의 책이거나 그것이 천주교 이외의 서적임일 때에는 다 모아 불살라 버렸던 것이다. 이러한 계획과 수단은 여러 세기 동안 강력하게 꾸준히 계속되어 왔었다. 역사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것이 바로 정확한 역사를 알아내기 어려운 중요한 원이이 되었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저술가와 설교자들 역시 순교의 죽음을 당하였다. 이는 실로 피비린내 나는 시대였다. 모든 완고한 이교도들(그들은 이렇게 불렸다)은 어떤 특수한수한 이름으로 불이었거나 또한 어떠한 곳에 살고 있든지를 막론하고 처참한 핍박을 받아 왔던 것이다. 도나티스트와 폴리시안들은 초기의 무리 가운데서도 현저히 나타난 사람들이었다. 이상하게 보일는지 모르나 가톨릭은 그들의 신앙에서 벗어나서 자기들과 같이 믿기를 거부한 모든 사람들을 비난하였던 것이다. 즉 이단이라 비난하였고 이단자라고 처단하였다. 이리하여 가톨릭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성경화되기 보다는 오히려 철저히 이교화 되었으며 유대교화되었고 복음적인 힘보다도 훨씬 더 세상권세의 힘으로써 움직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성경을 준수하기 보다는 오히려 더 많은 새 법을 만들었던 것이다.


11. 다음에 말하는 것은 이러한 여러 세기 동안에 신약성경의 교훈 안에 들어온 많은 새로운 변화 중 그 몇 가지이다. 아마 이러한 변화는 언제나 정식으로 공포하여 실시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사실 대로는 이러한 변화 중 어떠한 것은 그 기원의 정확한 날짜를 밝히기가 거의 불가능할 때가 있었다. 말하자면 이러한 변화는 전 가톨릭의 체계와 비슷한 것으로써 갑작스런 변화라 하기 보다는 발전 성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 특히 초기에는 그들의 교리와 가르침이 첨가 또는 삭제 혹은 대치, 폐지로 말미암아 항상 변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사 옛날에는 어떠하였을 지라도 현재의 가톨릭(천주교)는 이미 신약의 교회는 아니다. 그것은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순결한 기관이 아니라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새 법을 성경을 변경하기도 하고 폐하기도 하는 입법기관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12. 이 당시 그들이 만든 새로운 교리 또는 공포한 법령 중 하나는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 - 물론 가톨릭(천주교)는 그들 외에는 다른 교회가 없다고 선언하였던 것이다.- 고 하는 것이 있는 데 이는 곧 가톨릭인이 되든가 그렇지 않으면 버림을 받을 것뿐이요 그 외에는 다른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13. 면죄부의 교리와 면죄부의 매매는 신약성경의 가르침에서 분리된 또 하나의 전혀 새롭고 중요한 교리였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가르침이 실제로 효력을 갖기 위해서는 아주 다른 또 하나의 새로운 가르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던 것이다. 즉 어마어마한 신용대부 증서를 어떻게 해서든지 만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인데 이는 천국에서의 신용 대부증서이면서도 이 지상에서도 통용될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그리하여 구원의 수단으로 또는 필요할 때 신용증서를 통해 대출될 수 있는 보충의 방법으로 선행에 의한 구원의 교리가 가르쳐졌다. 천국의 장부에 계산될 최초의 큰 액수는 물론 주 예수님의 선하신 공로였다. 그는 아무런 죄악이 없었으므로 그 자신을 위하여는 선행이 요구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주님의 선행은 모두 이 증서에 간주될 수 있는 것이며 죄인을 위하여 자산이 되었다. 그리고 이에 가산하여 사도들의 행한 선행의 잔여액 전부(각자 자신들을 위하여 필요했던 것에 계산하여)와 그 후에 생존한 모든 착한 사람들의 선행을 그 신용대부 증서에 가산하여 그것을 굉장히 거대한 것으로 만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막대한 액수 전부가 교회에 위임되었고(그 유일한 교회에?) 교회는 어떤 가련한 죄인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천국으로부터 신용대부가 필요하였던 각 사람들을 위하여 적당한 액수를 지불케 한 권한이 교회에 허용되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면죄부의 판매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또는 그들의 친구를 위하여서도 그것을 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 가격은 이미 범한 죄와 장차 범죄할지도 모르는 죄에 비례하여 가가기 달랐으며 가톨릭인 자신들이 이것을 인정하게 되자 때로는 지나치게 극단으로 흘러가게 되었던 것이다. 어떤 역사 서적과 백과사전에는 면죄부를 팔기 위하여 여러 가지 죄과에 가격표가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14. 이 마지막 두 가지가 완전한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다시 또 하나의 새로운 교리가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니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그 새로운 교리란 [연옥] 곧 지옥과 천국의 중간지대라 불리는 것인데 모든 사람은 지옥에 빠질만한 죄보다 작은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버릴 때까지 이곳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성도라 할지라도 연옥을 통과하지 않으면 아니 되고 불로써 정결함을 입을 때까지 이곳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신용대부 증서의 도움을 얻으면 딴 문제이지만 , 그러나 그것은 다만 살아있는 사람들이 기도와 면죄부에 돈을 지불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면죄부의 판매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성경에서 분리해 나간 한 가지 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또 하나의 분리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15. 여기서 로마 가톨릭과 희랍 정교회의 차이점을 열거하여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① 국적으로 보면 희랍 정교회는 주로 희랍, 러시아, 불가리아, 세로비아 등을 포함한 슬라브 족속들이며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로마 가톨릭은 주로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남부 및 중앙아메리카, 멕시코 등을 포함하는 라틴족속들이었다.


② 희랍정교회는 침례를 받을 때 적수례와 관수례를 거부하였으나 로마 가톨릭은 성경의 근본 방법인 침수례를 변경할 권리를 주장하면서 전적으로 적수례(물 뿌림)를 행하게 되었다.


③ 희랍정교회는 유아 성찬을 계속 실시하였고 로마 가톨릭은 처음에는 그것을 구원 얻는 하나의 방법이라 가르쳤으나 결국 그것을 단념하고 말았다.


④ 희랍정교회는 주의 만찬을 베풀 때에 평교인(평신도)에게도 빵과 포도주를 주었으나 로마 가톨릭(천주교)은 평교인에게는 빵을 주었고 포도주는 신부들이 마시었다.


⑤ 희랍정교회는 사제들의 결혼을 허용하였으나 로마 가톨릭은 신부들의 결혼을 금지하였다.


⑥희랍정교회는 교황의 무오설을 부인하였고 로마 가톨릭은 그 교리를 받아들여 더욱 강조하였다. 이상 말한 것은 적어도 이 두 파 사이에 서로 상반되는 중요한 것들이요 이외의 다른 점에 있어서는 희랍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은 그 처지가 같은 것으로 보인다.


16. 우리의 강의는 바로 9세기까지 끝났으며 이제는 제 10세기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도표를 보아주기 바란다. 바로 이 시기에 로마 가톨릭과 희랍정교회의 사이에 분열이 생겼던 것이다. 우리는 여러 세기가 지남에 따라 곧 다른 새로운 법과 교리를 볼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말할 수 없이 잔악했던 다른 핍박이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피 흘린 발자취 (1)


17. 나는 또 다시 잔악한 박해의 손길이 뻗혀진 사람들에게 여러분의 주의를 환기코자 한다. 만약 암흑시대라 불리었던 1200년 동안에 5000만명의 사람들이 박해를 받아 죽었다고 하면(역사는 확실히 이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이는 100년마다 평균 400만명 이상의 비율로 죽은 셈인데 이는 인간의 머리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되어진다. 전에도 말한바와 같이 이 잔악한 핍박의 쇠망치는 순교의 피바다를 이루면서 폴리시안, 아놀디스트, 헨리시안, 페트로브루시안, 알비젠시스, 월덴시스, 그리고 아나 밥티스트(재침례교도)의 사람들 위에 가했졌던 것이다. 물론 박해의 잔악한 정도는 일정하지 않았으나 우리는 이 이야기의 무서운 부분을 바삐 지나가 버리기로 하자.


18. 물론 계속적인 것도 아니요 시종일관한 것도 아니지만 이제 장구한 전 기독교 연합회의 시대가 출현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종교회의가 있었으나 이것은 전 교회 연합화의도 아니었고 제국 전역에 미친 것도 아니었다. 이러한 종교회의는 거의 전부가 어떤 국가의 법률이나 종교적(?)법을 제정 또는 수정하기 위한 입법기관이 되었던 것이며 그 모든 것은 입법 과정에 있어서나 법 자체에 있어서는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전혀 배치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것은 국가 교회 곹 이교도의 정부와 결탁한 교회들의 행동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는 성경화되어지는 것보다는 더 한층 이교화 되어 갔던 것이다.


19. 어떠한 백성이든지 그리스도인 개인으로나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필요한 모든 법을 포함하고 있는 신약성경을 버릴 때에 그 백성은 망망한 대양을 항해하는 것과 같이 되어 버리고 만다. 어떤 그릇된 법이든지(그리고 어떠한 법이라도 성경에 첨부하는 것은 다 그릇된 것이지마는 필연적으로 곧 다른 법이 필요하게 되고 그 다른 법은 또 다시 다른 법을 필요하게 되어 한정이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그 교회와 목사들에게 입법적인 권한을 주시지 않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더욱 상세히 말하자면 이것이야말로 왜 신약성경이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말로써 끝맺어 있는가 하는 큰 이유가 되는 것이다.


계 22:18 이는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들을 듣는 각 사람에게 증거함이니 누구든지 이것들에 더하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또 누구든지 이 예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삭제하면 하나님께서 생명의 책과 거룩한 도성과 이 책에 기록된 것들에서 그의 부분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주(註) 여기에 이 구절을 넣는 것은 한 경고를 주기 위한 것이다. 침례교회는 때때로 여러 회의에서 통과된 결정 사항, 설령 그것이 훈계적인 것이나 또는 다른 여러 가지 일이라 할 지라도 경계해야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결정사항은 교회 운영의 법이나 규칙으로써 해석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필요한 모든 법과 규칙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20. 너무나 제한된 이 적은 책자 속에서 이러한 종교회의와 입법적인 회의에 관하여 많은 말을 하려 하지 않겠으나 대략 말해보는 것도 필요한 일일 것이다.


21. 이러한 레이터란(Lateran) 즉 서방교회회의는 교황들에 의하여 소집되었고 그 최초의 회의는 AD1123년 칼릭터스 2세에 의하여 소집되었으며 여기에는 약 300명의 감독들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로마파의 사제들은 절대로 결혼하지 못한다는 것이 결정되었는데 이것을 사제들의 금혼법(독신생활)이라고 불렀다. 물론 이 회의에서 결정된 모든 일을 말하려 하지 않는다.


22. 몇 해 후 곧 AD 1139년 교황 이노센트 2세는 특히 페트로브루시안과 아놀디스트로 알려진 두 무리의 대단히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을 처단하기 위하여 또 하나의 종교회의를 소집하였던 것이다.


23. 지난 회의가 있은 지 꼭 40년 후 곧 AD 1179년에 알렉산더 3세는 또 하나의 종교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소위 그들이 과오와 불경건한 자들이라고 불렀던 왈덴시스와 알비젠시스의 무리들이 문책되었던 것이다.


24. 전번의 종교회의 후 36년 만에 또 하나의 종교회의가 AD 1215년에 교황 이노센트 3세에 의하여 소집되었는데 이러한 큰 종교회의 중에서도 출석자가 가장 많았던 회의인 듯 하다. 이 회의에 관한 역사적인 기록에 의하면 412명의 감독 그리고 800명의 수도원장과 부원장들이 출석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회합의 구성으로 보아 적어도 영적인 것은 아무 것도 고려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에 화체설이라는 새로운 교리가 선포되었던 것이다. 이는 곧 주의 만찬의 빵과 포도주가 신부들이 기도한 후에는 실제로 그리스도의 피와 살로 변하여진다는 고의적인 것이었다. 다른 여러 가지 교리 중에서도 이 교리만은 수 세기 후에 일어난 종교개혁의 지도자들을 자극시키는데 많은 관계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 교리는 누구든지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사람은 실제로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이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비밀 고해성사 자기의 사제의 귀에다 가만히 고백하는 것- 라는 것도 이 회의 때에 시작되었다고 생각되는 또 하나의 교리였다. 아마도 세계 역사상에서 사람들에게 가해진 가장 참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것은 소위 종교재판이라 알려져 있는 그 명칭일 것이다. 이는 다른 일반 법정과 동일한 것인데 소위 이단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다루기 위한 것이었다. 전 세계는 이러한 말할 수 없는 잔악한 것을 비난 또는 폭로하는 책으로 가득 차 있는 것같이 생각되지만 오히려 이러한 일을 저지른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가 주께서 인도하시고 지휘하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시작되었고 또한 계속되었던 것이다. 사실상 그 야만성을 말하자면 온 세계 역사상에서 그것을 능가할 만한 것을 절대로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것에 대하여서는 진술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다만 종교재판에 관하여 진술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다만 종교재판에 관하여 기록되어 있는 많은 서적들 중에서 그 몇 가지를 독자들에게 제시하려고 하며 여러분 스스로가 이러한 책을 읽고 연구하여 주시기 바랄 뿐이다. 또 이것 만으로서는 아직도 부족하다는 듯이 또 하나의 법령을 바로 이 회의에서 선포하였던 것이다. 이는 분명히 모든 이단들을 박멸시키려는 의도에서 실시되었던 것이다. 얼마나 암담한 사실인지~! 그렇다. 말할 수 없이 암담한 수많은 사실들이 이러한 무서운 세계 역사 안에 기록되어 있다.


25. AD 1229년 곧 전 번의 그 무서운 회의가 있은 지 바로 14년 만에 다시 또 하나의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것은 교회 연합회의는 아닌 듯 하다) 이것은 타울로스 회의라 불리 우는 것인데 아마 전 가톨릭 역사 가운데서 가장 중대한 사실의 하나가 이 회의에서 선포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모든 평교인 즉 신부들과 고위층 사제 이외의 다른 모든 가톨릭인들에게는 성서, 곧 하나님의 말씀을 임의로 읽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이 공포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밝히 가르쳐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어찌나 괴이한 법인지 모른다.


26. 다시 또 하나의 종교회의가 리용에서 개최되었다. 이는 AD 1245년 교황 이노센트 4세에 의하여 소집되었으며 이 회의 목적은 주로 독일 황제 프레드릭 4세에 의하여 소집되었으며 이 회의의 목적은 주로 독일 황제 프레드릭 1세를 파문하여 폐위시키기 위한 것같이 보인다. 313년 콘스탄틴 대제 시대에 국가와 결탁하여 간음한 신부 곧 가톨릭이 이제는 그 집안의 주인이 되어 국가와 정부의 시책을 지휘 명령하였고 국왕과 여왕의 폐위를 마음대로 좌우하게 되었다.


27. AD 1274녀에는 대 가톨릭의 분파인 로마파와 희랍파를 재통일시켜 보기 위하여 또 하나의 종교회의가 소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대회는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실제로 돌아가고 말았다.



제 3 강(講) : A.D 1400~1600


1. 다음의 3세기 동안 즉 15, 16,17세기는 세계 역사상 가장 다사다난(多事多難)하였던 세기였으며 특히 교회 역사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가톨릭 교회(로마와 희랍파 둘 다)의 내부에서는 일종의 종교개혁을 모색하는 혁명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잠잠하고 있었던 정의의 양심들은 드디어 각성되었고 순수한 종교개혁의 요구는 바로 13세기에 도는 그보다 조금 먼저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는 그것을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다.


2. 조금 전 시대로 돌아가 보기로 하자. 신약성경의 가르침에서 아주 분리되었으며 기이하고 잔악한 많은 법령과 말할 수 없이 부패된 도덕적 상태 그리고 손과 옷이 수백만의 순교자들의 생생한 피로써 물들어 있었던 가톨릭은 많은 가톨릭 신자 자신들의 증오와 심각한 배척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조직이나 법령 그리고 교리나 의식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톨릭 안에서도 가장 용감하고 뛰어나고 영적인 신부들과 지도자들의 얼마는 한 사람 또 한 사람씩 가톨릭의 가장 그릇된 교리와 법령을 개혁하고 돌이켜 최소한 신약의 뚜렷한 가르침에 접근시켜 보려고 시도했던 열렬한 사람들이 있었다. 몇몇 저명한 실례를 들어 보기로 하자. 우리는 다만 어느 정도의 그리고 어느 곳에서 개혁의 봉화가 일어났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주의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개혁의 지도자들에게도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한 지도자들은 모두 가톨릭의 사제들이나 또는 어떤 종류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악한 세대 속에서 약간의 선(善)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이 당시에는 신약의 교리가 조금도 곡해되지 아니하고 그 본래의 순결함을 보존되고 있었던 것은 거의 하나도 없었다.

이제는 몇몇 개혁자들과 그들이 활동하였던 곳에 대하여 주의하여 보기로 하자.


3. 그러나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위대한 종교개혁 시대에 앞선 여러 세기 동안에도 가톨릭의 이단적인 교리에 항거했던 수많은 저명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열렬히 성경에 충성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행한 일이란 오직 피 흘린 발자취뿐이었다. 이제 우리는 잠깐 동안 이 유명한 시대 즉 종교개혁에 대하여 연구하여 보기로 하자.


4. 1320년에서 1384년까지 영국에 있어서는 온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존 위클리프"였다. 그는 가톨릭 교회의 내부에서 참된 개혁을 단행하여 보려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던 용감한 사람들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는 역사상에서 때로는 종교개혁의 새벽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는 진실하고 보람 있는 생애를 보냈던 사람이었다. 존 위클리프의 전 생애를 포함하는 역사를 만들려면 실로 여러 권의 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가톨릭의 교권제도의 지도자들에게서 온갖 미움을 받았었고 언제나 그의 목숨을 엿보는 사람들로 인하여 피해 다녀야 했으며 결국 중풍병으로 몇 해 후에는 그의 위골을 파내어 불사르고 그 재는 바다에 뿌려 버리게 하였다.


5. 존 위클리프의 뒤를 이어 멀리 보헤미아에서 한 저명한 인물 "존 후스"(1373~1415) 라는 사람이 나왔다. 그의 마음은 영국의 새벽별인 위클리프의 찬란한 빛에 감화되어 이에 호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생애는 용감하고도 다사다난하였으나 애석하게도 짧은 일생이었다. 그는 참된 개혁에 호의를 가지고 있었던 가톨릭 교인들의 심금(心琴)을 움직이게 하는 대신에 공포와 증오 그리고 반대를 일으켰으며 그 결과로 그는 화형(火刑)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자신의 국민들에게 죽임을 당한 순교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국민들이 선양하여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는 주님을 사랑하였고 그의 국민들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죽어야만 했듯이 그들 중 하나가 되었다.


6. 보헤미아의 존 후스 다음에는 이탈리아의 훌륭한 사람 곧 놀라운 설교자 "사보나롤라"(1452~1498)가 나타나게 되었다. 존 후스가 화형을 당한 것은 1415년이며 사보나롤라가 탄생한 것은 이보다 37년 후였다. 후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경건한 가톨릭 교인이었으나 국민의 지도자들과 자기 국민들(이탈리아 사람들)역시 보헤미아의 지도자들과 같이 모든 개혁에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많은 사람들의 양심을 각성시켰고 상당한 수의 제자들을 얻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교권제도 안에서의 참된 개혁을 한다는 것은 그 조직체의 상부층을 완전히 무너뜨려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었다. 그러므로 사보나롤라는 가장 뛰어난 존재였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싸운 상대는 강대한 조직체였으며 또한 그 단체도 존속하기 위해서는 개혁 운동자들과 싸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사보나롤라는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7. 물론 이 시대에 있었던 개혁자들의 이름을 열거함에 있어서도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다 들지 못하게 되었고 이곳에 서는 가장 현저하게 역사상에 나타난 사람들의 이름만을 말하기로 한다. 황금의 혀를 가지고 있었던 이탈리아의 웅변가의 뒤를 이어 스위스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쯔빙글리는 사보나롤라가 죽기 전에 탄생하였고 그는 1481년에서 1531년까지 살았으며 그 불길은 점점 빨라져서 급속도로 확대되어서 이제는 이것을 조정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어 버렸다. 쯔빙글리로 말미암아 일어난 이 봉화는 다른 또 하나의 불길이 일어나기 가지 약간 부분적으로 시들어 갔으나 남아 있는 다른 모든 것보다 참된 것이었으며 독일에서 폭발되었던 것이다. 쯔빙글리는 전쟁 중 죽었다.


8. "마틴 루터"는 15,16세기의 모든 개혁자들 중에서도 가장 저명한 사람이었으며 1483년에서 1546년까지 살았었고 그 연대로 비추어 보아 쯔빙글리와 거의 도일한 시대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쯔빙글리보다 1년 먼저 나서 15년간이나 더 오랜 살았다. 아마 역사가 명확히 진술하는 이상으로 더욱더 그의 위대한 선배들은 그에 앞서서 험난한 길을 평탄케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더욱이 그는 선배들이 당하였던 험악한 경험에서 배웠고 그후 자기 자신이 당하였던 경험을 통하여 가톨릭 내부에서의 순수한 개혁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을 더욱 철저하게 알 게 되었다. 넘나 많은 개혁의 방법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한가지의 방법은 다른 도 하나의 방법을 요구하게 되었고 다른 또 하나의 방법이 필요하게 되었다.


9. 그리하여 마틴 루터는 가톨릭의 지도자들과 여러 가지 어려운 싸움을 겪은 후 멜랑크톤과 그 외의 저명한 독일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1530년, 대체로 그 시기에 전혀 새로운 교회로서의 조직체 즉 루터교회라고 부르는 단체를 창설하게 되었던 것인데 그 후 이는 독일교회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로마에서 직접 갈라져 나온 조직체의 하나였으며 가톨릭 모교회(가톨릭교회는 이렇게 불렸음으로)에 대한 모든 관계를 거부하고 존속하여 왔다.


10. 이제 우리는 초기의 루터교회 다음에 일어난 영국교회에 관한 것을 잠깐 제쳐놓고 대륙의 종교개혁을 살펴보기로 하자. 1509년에서 1546년 사이에 도 하나의 위대한 종교개혁자가 되었으니 프랑스 사람 "존 칼빈"이었다. 그는 당시 스위스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사실 그는 유능한 사람이었고 30년 동안은 루터와 같은 시대에 살고 있었으며 즈빙글리가 죽었을 때 그는 22세였다. 칼빈은 장로교회의 창설자라고 불리고 있는데 어떤 역사가 중에는 쯔빙글리가 그 창설자라고 한다. 역시 믿을 만한 증거에 의하면 아무래도 칼빈이 그 창설자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루터의 그것과 곡 마찬가지로 쯔빙글리의 활동은 칼빈의 사업을 대한히 용이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조차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1541년 루터가 루터교회를 설립한지 꼭 11년 만에(바로 그 해로 보인다.) 장로교회가 창설되었던 것이다. 이것 역시 루터교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개혁한 사제 또는 적어도 직분을 맡고 있었던 사람들에 의하여 지도되었던 것이다. 이들 여섯 사람 - 위클리프, 후스 , 사보나 롤라, 쯔빙글리, 루터 및 칼빈 등 종교개혁을 위한 그 위대한 투쟁의 지도자들은 가톨릭이 근본적으로 뒤흔들릴 만한 타격을 가했던 것이다.


11. 1560년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칼빈이 처음으로 장로교회를 조직한지 19년 만에 칼빈의 제자 존.녹스는 스코틀랜드에서 최초의 장로교회가 스코틀랜드의 국교가 되었던 것이다.


12. 종교개혁에 요구되는 이 모든 어려운 사정이 벌어지고 있었을 때 그 개혁자들에게 끊임없이 귀중한 원조를 제공하여 준 것은 아나- 밥티스트(재 침례교도)였다. 설령 그들이 어떠한 이름으로 불리 우고 있었을 망정 이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험악한 운명에서 벗어나 그들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어떠한 길을 찾아 그들의 피난 터에서 나와 개혁자들과 함께 용감히 싸웠다. 그러나 그들은 무서운 실망의 길을 걷는 운명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제 그들은 자시들을 핍박하는 두 적을 대하게 된 것이다. 루터교회나 장로교회들은 다 모교회(母敎會)인 가톨릭에서 많은 악습을 그냥 계승하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국가교회라는 이 관념이었다. 이 두 교파는 곡 국교가 되었고 그들은 다 모교회(母敎會)보다는 조금 못하였다 할지라도 곧 핍박을 일삼게 되었던 것이다.


피 흘린 발자취 (2)


이렇게 오랜 동안을 시달려 온 침례교도들의 운명은 슬프고도 두려운 것이었다. 이제 세상은 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지 않았고 네 사람의 잔악한 박해자들은 민망스럽게도 아나 - 밥티스트(재 침례교도)의 뒤를 쫓고 있었다. 실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피 흘린 발자취뿐이었다.


13. 같은 때에 사실은 장로교도들보다 몇 년 앞서 대륙에서가 아니라 영국에서 또 하나의 교파가 일어났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형식으로 일어났다기보다는 그것이 종교개혁을 도운 것은 확실하지만 가톨릭으로부터 실제적인 분리 또는 분열의 형식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는 마치 869년에 동방 가톨릭이 서부로부터 분리하였고 그때부터 역사상에서 희랍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지게 된 그러한 분리와 비슷한 것이었다. 이 새로운 분리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사정에서 오게 되었다. 즉 영국와 헨리 8세는 스페인의 캐더린과 결혼하였으나 얼마 후 불안한 그의 마음은 앤 볼레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캐더린과 이혼하고 앤과 결혼하기를 원했지만 이혼이란 그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는 교황만이 그것을 허가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특별한 이유였으므로 교황은 그 허가를 거절하였다. 헨리는 대단한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왕은 이러한 일에 있어서는 자기 자신의 의사대로 처리할 권리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의 수상( 그 당시는 토마스 크롬웰이었다)은 왕에게 조언하기를 어찌하여 왕께서는 이러한 일에 교황의 권리에 복종하려 하시나이까 하였다. 헨리는 그의 조언에 따라 교황의 권세를 없이하고 자기 자신의 영국교회의 주인이 되었으니 여기에 새로운 영국교회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는 1534년 내지 1535년에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므로 그 당시의 영국교회는 교리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었으며 다만 교황의 권세만을 폐기하였던 것이다. 헨리 역시 그의 마음 속에 자기 자신의 개신교인이 되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으며 가톨릭의 신앙을 가지고 죽었다.


14. 그러나 이 분리는 결국 어떤 깊은 변화 또는 개혁을 가져오는 결과가 되었다. 내부에서 또는 교화의 권세 아래서 종교개혁이 단행되었던 때에는 루터나 그 외 다른 사람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불가능하였으나 일단 분리한 후에는 이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크랜머, 라티머ㅡ 리들레이와 그밖에 여러 사람들이 다소의 중요한 변화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 후 몇해가지나 이러한 사람들은 메리(피의 메리) 곧 이혼당한 캐더린의 딸이 영국의 왕위에 올라 새로운 교회를 다시 권세 아래 넣으려 하였을 때 그러한 변동의 대가로써 피를 흘리게 되었다. 이 무섭고 참혹한 변혁은 메리의 피로 물든 통치 5년으로써 종말을 고하였으나 이 동안에 많은 사람들의 머리가 메리의 피 묻은 도끼 아래 잘라져 갔으며 메리 자신의 머리도 그들과 함께 잘라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앤 볼레인(그녀 때문에 캐더린은 이혼당하였다.)의 딸 엘리자베스가 여황이 되었을 때 영국교회는 다시 교황의 권세를 던져 버리고 재건되었던 것이다.


15. 이리하여 16세기 말까지는 다섯 개의 기성(국가)교회가 있게 되었다. - 세속 정부에 의하여 유지된 교회 - 이는 곧 로마 가톨릭과 희랍정교회의 둘과 영국교회와 루터교회 곡 독일교회, 그리고 오늘 날 장로교회라 알려져 있는 스코틀랜드 교회들이 그것이다. 그들은 아나 밥티스트라 불리었던 사람들과 왈덴시스 그리고 독립적인 여러 교회들 곧 어떠한 점에서나 가톨릭과 아무런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던 교회들의 성도들을 모두 다 심히 미워하였고 핍박하였던 것이다. 종교개혁을 위하여 싸우고 있었을 때 베풀어 주었던 것이다. 종교개혁을 위하여 싸우고 있었을 때에 베풀어 주었던 그들의 큰 원조는 벌써 잊어 버렸으며 또한 전혀 무시하여 버렸던 것이다. 그칠 줄을 모르던 핍박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각성되고 고취되었던 그 위대한 소망은 피로 물든 망상이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생존자들은 험준한 알프스 산속에서 그 불편한 피난처를 찾았었고 다른 사람들은 온 세상에서 그들의 은신처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16. 가톨릭에서 분리하였거나 또는 거기에서 나온 이 새로운 조직체들은 그 가톨릭이 가지고 있었던 가장 해로운 과오를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 몇 가지를 들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교직자 교회의 제도(외형적으로는 조금씩 다름)

국가교회 (교회와 국가의 결탁)

유아세례 

적수례 또는 관수례(머리에 물 뿌림 세례 : 역주)로 침수례를 대신함

침례에 의한 중생(만약 많은 역사가들의 말이 믿을 만한 것이라면 적어도 약간)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핍박(최소한 몇 세기 동안)

17. 초기에는 이러한 모든 국가교회들이 다른 교회를 박해하였지만 1555년 아우스그버그에서 개최되었던 종교회의에서 서로 다른 교파의 사람들을 핍박하지 않겠다는 것에 동의하는 소위 아우그스버그의 평화라 알려져는 일종의 평화조약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한편에 가톨릭교가 또 다른 한편에는 루터 교회가 조인하였다. 즉 우리에게 상관치 말라! 우리도 너희를 간섭치 않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가톨릭인이 루터교인들과 싸운다는 것은 곡 독일과 전쟁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고 루터 교인들이 가톨릭인들과 싸우며 그들을 박해한다는 것은 곧 가톨릭교가 우세가 모든 나라들과 전쟁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피 흘린 발자취 (3)


18. 그러나 박해는 그치지 않았다. 미움을 받았던 아나-밥디스트들은 (지금은 밥티스트라 불리운다) 그 이전의 모든 박해와 또한 오천만이라는 사람들이 이미 순교자로서의 죽음을 당하였다는 이 무서운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지껏 생존해 있었다. 외길로 되어 있는 유럽의 한 도로 가에 30마일의 거리에 이 도로를 따라 두 서너 자의 간격으로 화형의 말뚝이 하나씩 꽂혀 있었고 그 뾰족한 말뚝 끝마다 순교당한 재 침례교도들의 피 묻은 머리가 달렸던 것도 바로 이 시대에 일어난 일이었다. 인간의 상상으로써 이렇게 무서운 광경을 그려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더욱이 믿을 만한 역사에 의하면 이러한 일을 행한 것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제자라 자칭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19. 가톨릭은 성경을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과 지침서로 존중시 아니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그들은 사실 성경을 오류가 없는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이와 똑같은 절대적인 두 가지 다른 것이 도 있는데 이은 곧 신부들의 저서와 교회(가톨릭)의 법령 곧 절대 무오한 교황의 교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톨릭(천주교)와 개신교 가톨릭(천주교)와 침례교회 사이에는 끝까지 합의될 만한 근거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결국 만족할 만한 논의는 도저히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가톨릭인들에 관해서만은 성경만으로써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20. 그러면 침례에 관한 문제 그리고 침례의 실시와 방법에 있어서 그 최종적인 권위에 대하여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성경은 의심할 것 없이 침례를 가르치고 있으며 또한 그 유일한 방법으로서 침수례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도 이와 동시에 그들은 그들의 완전 무결한 교회가 그 방법을 침수례에서 적수례(물뿌림 세례)로 변경시킬 수 있는 완전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며 동시에 절대 무오한 교황의 권위 외에는 다른 아무도 그러한 권리와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21. 여러분께서는 물론 이러한 사실을 알고 놀라시겠지만 나는 이 강의에서 극히 조금밖에 인용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나는 단 여섯 시간의 강의에서 2000년에 이르는 교회사의 중요한 골자를 여러 사람에게 보여주려 하는 이 어려운 일에 정성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22. 바로 여기서 이 무서운 세월 동안에 성경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관하여 주의를 환기시켜 놓는 것이 좋을 듯하다. 기억하여 두셔야 할 일은 그 당시에는 성경이 인쇄되어 있지 않았으며 설령 인쇄술이 발명되어 있었다 할지라도 인쇄할 만한 종이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 당시에는 성서를 기록할 만한 종이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 당시에는 성경을 기록할 만한 종이가 전혀 없었다. 양피지 또는 염소나 양의 가죽 그리고 파피루스(어떤 종류의 나무 제지 원료)라는 것이 글자를 쓰는데 사용되었던 재료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은 펜이 아니라 일종의 철필 같은 것으로써 손으로 쓰여진 것인데 성경과 같은 큰 서적은 아마 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운반해 다닐 수 없었다. 따라서 당시 온 세상에 성경 전권이 구비되어 있었던 것은 30부 이상이 되지 못하였으며 대체로 마태, 누가, 마가, 요한복음이나 사도행전 또는 서신 중의 몇 권 그리고 요한 계시록이나 구약 중의 어떤 것, 이렇게 몇 권씩 여러 부분으로 되어 있었던 성경이 있었을 따름이다. 전 세계 역사상에서 가장 뚜렷한 기적의 하나는 - 나의 생각으로는 - 하나님의 백성들이 복음의 중요한 요점에 대하여 각각 생각하며 믿고 있었던 것이다 같이 비슷하여 다는 이 사실이다. 물론 이는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오늘 날 우리들이 각각 자기 모국어로 되어 있는 성경전서의 완전한 사본을 누구나 다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가장 영광스러운 사실이다.


23. 성경에 관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사실에 대하여 심각하게 특별히 고찰하여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강의에서 이미 대체로 언급한 바 있거니와 극히 중요한 사실이기 때문에 한 번 더 말씀드리는 것도 현명한 일이라 생각되어진다. 이것은 AD 1229년에 개최되었던 타울로스 종교회의에서 가톨릭이 취하였던 행도인데 이때 그들은 그 교인의 거대한 무리 곧 일반 평신도들은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못하도록 결정하였던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다만 그들이 그 종교회의 석상에서 논의하였던 것을 그대로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최근 어떤 가톨릭(천주교)인이 내게 조용히 말하기를 우리가 그렇게 한 목적은 그들이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위하여 어떤 책을 기록하게 하시고 그 백성들이 그것을 읽는 것을 원치 아니하신다는 것은 여간 우스운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이 책에 의하면 사람들은 이 책의 가르침에 따라서 심판 날에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 선포되어 있는 것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성경에는 "너희가 성경(이 책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는 말씀이 있다. 이 무서운 책임은 가톨릭(천주교)인들이 감당하여야 할 것이다.



제 4 강 (17,18,19 세기)


1. 이 강의는 17세기 (AD 1601년)의 초엽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이 중요한 교회들의 역사를 너무 바삐 지나와 버렸으니 이는 부득이 한 사정이었다.


2. 이 삼세기 동안 전혀 새로운 교파가 설립되었다. 어떤 역사가들이 회중교회(처음에는 독립파라 불렀음)가 시작된 연대를 1602년 이라 말하고 있음은 정확한 것이다. 그러나 쉐프 - 헬조그는 그 백과사전에서 회중교회의 기원을 그보다 훨씬 앞서 16세기에 두고 있으며 루터교회나 장로교회와 같은 시대에 된 것이라 말하고 있다. 종교개혁 와중에는 가톨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루터나 칼빈이 영도하였던 종교개혁의 범주에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교직자가 교회를 다스린다는 관념을 버렸으며 콘스탄틴의 교권제도에 가담하기를 거부하였던 사람들이 이제까지 15세기 동안에나 지켜 내려온 신약성경의 민주적인 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결정하였던 것이다.



3. 이 특수한 개혁을 요구하는 이 새로운 단체의 확고한 주장은 그들의 머리 위에 가톨릭이나 루터교회 그리고 장로교회와 영국 교회 등 모든 기성교회로부터 가혹한 핍박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교파 역시 가톨릭이 범한 수많은 과오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침수례 대신에 유아세례나 물뿌림 세례 베푼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극단적인 국가 교회의 관념을 채택하여 이를 실시한 것 등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미국으로 피난하여 온 후에는 그들 자신이 또한 가혹한 핍박자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4. 독립파 혹은 오늘날 회중교회라 불리는 이 명칭은 그들이 만든 교회의 운영 제도에서 온 것이다. 쉐프 헬조그의 백과사전에 기록되어 있는 영국 회중교회의 특수한 주장 몇 가지를 들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①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한 머리시며 하나님의 말씀은 그 유일한 법이라는 것.

② 눈에 보이는 교회들은 순수한 신앙적 목적 하에 이 세상에서 뭉친 경건한 사람들의 특수한 단체이며 이 세상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③ 분리된 이러한 교회는 그들 자신의 직원을 선정하며 규율을 유지해 갈 수 있는 충분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④ 내부적인 관리에 있어서는 모든 교회는 독립이며 동시에 국가의 관리를 받지 않는다는 것.



5. 이러한 주장은 가톨릭은 물론이요 루터교나 장로교 그리고 영국교회의 감독주의와는 전혀 상이하지 아니한가? 그러나 오늘날의 침례교회와 옛날의 침례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기본 가르침에 아주 동일하지 아니한가?



6. 1611년에는 킹 제임스 판의 영어 성경이 나타났다, 이때 까지는 성경이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주어진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일반에게 전파되기 시작함에 따라 갑자기 교황의 권리는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적어도 여러 세기만에 처음으로 신앙의 자유라는 관념이 싹트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7. 1648년에 [웨스트팔리아의 평화]라는 것이 이루어졌다. 이 평화조약의 결과로써 나타난 여러 가지 중에는 큰 교파간에 삼자협정이라는 것이 있었다. 즉 이것은 가톨릭, 루터교회, 장로교회가 서로 더 이상 박해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교파사이의 박해는 곧 그 교파를 지지하고 있었던 정부와 전쟁하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성도들 특히 아나-밥티스트 교도들은 이러한 교파의 사람들로부터 예전과 다름없는 가혹한 대우와 처참한 핍박을 계속 받아야만 했다.



8. 제17세기 동안에는 웰덴시스, 아나-밥티스트 및 밥티스트(이제 어떤 곳에서는 아나라느 말이 떨어져 버렸음)들에 대한 치명적인 박해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를테면 영국에서는 존 번역과 그의 여러 사람들이 증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영국 교회에 의하여, 독일에서는 루터교도들에게, 스코틀랜드에서는 스코틀랜드 교회(장로교)에 의하여, 이탈리아와 프랑스 그리고 교황의 제도가 권력을 잡고 있었던 모든 곳에서는 가톨릭교인들이 그들을 핍박하고 있었다. 이제 국가교회 또는 그중의 어떠한 교회와도 타협을 하지 않았던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곳에서나 편안함이 없었던 것이다.



9. 정확한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벌써 4세기의 옛날에 교권제도에 가입하기를 거절하였고 유아 때 받았던 세례를 부인하며 침례에 의한 중생의 교리를 부인하였고 또한 교권제도하에 있었던 사람들로서 그들에게로 온 사람들에게 재침례를 요구하엿던 이러한 사람들이 아나 밥티스트(Ana-Baptist) 라고 불리웠던 것은 의미 깊은 일이다. 그러나 그때 그들에게 어떠한 명칭을 붙이었든지 상관할 것 없다. 그들은 항상 아나 밥티스트라 불리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6세기의 초엽에는 아나가 떨어지고 그저 밥티스트라는 단순한 이름으로 되었으며 그 후에는 차츰 다른 이름은 다 떨어졌던 것이다. 만약 존 번연(John Bunyan)이 좀 더 이전 시대에 살고 있었더라면 그 제자들은 번연니스트(Bun-yanist)혹은 아나 밥티스트라 불리웠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번연 이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두 가지 이름으로 불려졌을 것이다.


10. 밥티스트(Baptist)라는 명칭은 별명인 바 이는 그 반대자들이 그들에게 붙여준 이름이다. (만약 명칭이 주님께서 요한을 밥티스트라 부르셨을 때와 같이 구세주 자신이 그들에게 주신 것이라면 바로 적합한 것이 되었을른 지도 모른다.)이때까지는 어떤 단체의 침례교도들이라도 이 이름을 공식적으로 채택한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름은 확정되었고 그들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또한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이다. 사실 그 이름은 꼭 알맞은 명칭이었다. 이는 오늘날 침례교회가 지키고 있는 교리를 처음으로 가르쳤던 그리스도의 뛰어난 선구자의 칭호였던 것이다.


11. 나는 쉐프 헬조그의 백과사전 1권 p.210 에 있는 유럽의 침례교회사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몇 마디를 인용하려 한다.


밥티스트가 스위스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1523년경 인데 거기서 그들은 쯔빙글리와 로마 가톨릭의 박해를 받았었다. 그들은 1525년에서 1530년 사이에 남부 독일과 티롤 그리고 중부 독일에서 크고 충실한 교회들을 조직하였다. 이러한 모든 곳에서도 박해는 그들의 생활을 참혹한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주- 이것은 모두 개신교 곧 루터교회가 성립되기 이전의 일이다.) 계속하여 좀 더 인용하기로 하자.


모라비아는 크나큰 자유를 약속하는 곳으로 보였다. 그러므로 침례교도들은 그곳으로 이주해 갔다. 그러나 그들의 희망은 기만당하였을 뿐이었다. 1534년 이후에는 그 수효가 늘어 갔으며 북부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 윌룬 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그들은 그 저지대 나라의 알바의 지배하에서도 그 수효가 증가되어 갔으며 놀랄 만한 선교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주 - 선교열, 오히려 어떤 사람들은 완고한 사람들이 초기의 침례교도라 말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침례교도는 어디서 온 것일까? 그들은 종교개혁 시절에 가톨릭에서 나온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들은 종교개혁 이전에도 큰 교회들을 가지고 있었다.


12. 대단히 흥미있는 사실이지만 여러 세기가 지나감에 따라 영국에 종교적 변화가 있었던 것에 대하여 유의하시기 바란다. 복음을 영국으로 전파한 것은 사도들의 손이었지만 영국의 교회들은 제 4세기 초엽 교권제도가 확립되기까지 또 그 후 한세기 이상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가톨릭적인 교회로 급속도로 발전되어 교권제도의 권력하에 놓이게 되었고 영국의 교회들은 가톨릭 그대로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헨리 8세의 통치하 1534년에서 35년까지 일어났던 분열 때까지 그것은 영국의 국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당시 그것은 영국교회라는 명칭을 받게 되었다. 18년 후 곧 1553년에서 1555년까지 여왕 메리(피의 메리)가 통치하는 동안에 영국은 가톨릭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던 바, 피의 5년간이란 바로 이 시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메리의 이복동생 즉 앤보레인의 딸 엘리자베스가 1558년 왕위에 오르자 다시 가톨릭을 뒤집어엎어 버렸으며 영국교회가 재차세도를 부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다음 한 세기 동안 모든 것이 그대로 계속되었으며 짧은 기간이나마 장로교회가 우세하게 되어 마치 장로교회는 스코틀랜드에서와 같이 영국의 국교가 된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올리버 크롬웰 시대에 뒤이어 영국교회는 본래의 위치에 돌아오게 되었고 그 후부터는 영국의 국교로써 존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13. 영국의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 국가교회의 가혹하고 잔악한 박해가 점차로 완화되어 가고 있었던 것에 주의하시기 바란다.

① 그 교회가 시작된 지 154년 후인 1688년에 최초의 관용령이 나왔다. 이 법령은 두 교파 즉 가톨릭과 유니테리안을 제외하고는 영국에 있는 모든 교파를 믿어도 좋다는 것이다.

② 두 번째의 관용령은 89년 후 즉 1778년에 나왔다. 이 법령은 가톨릭을 믿는 것을 허락하였으나 여전히 유니테리안의 신앙은 허락하지 않았다.

③ 세 번째의 관용령은 35년 후 곧 1813년에 나왔다. 이 법령에는 유니테리안도 허용되어 있다.

④ 1828년과 29년에 이르러 소위 선서조령이라는 것이 발표되었다. 이 법령은 비국교화(죽 영국 국교와 의견이 상반되는 신앙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 관직과 국회의원이 될 수 있는 길을 허락하여 준 것이다.

⑤ 1836년에서 37년 사이와 1844년에 등록령과 혼인령이 나왔다. 이 두 법령은 비국교도들이 행하는 침례와 결혼을 합법화한 것이었다.

⑥ 개혁 법안이 1854년에 나왔다. 이 법안은 비국교도의 학생들에게도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두 대학의 문호를 개방시켜준 것이다. 이때까지 비국교도의 자제들은 이 유명한 대학의 어느 쪽에도 들어갈 없었던 것이다.


14. 이렇게 영국에 있어서는 신앙의 자유에 대하여 발전이 있었지만 참다운 신앙의 자유라는 것은 국교가 확립되어 있다든지 또한 그것이 존속하고 있는 나라에 있어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며 참다운 신앙의 자유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한 나라 안에 있는 여러 교파중에서 단 한 교파만이 정부에 의하여 유지되며 정부의 편애와 지지를 받고 다른 모든 교파를 배척하는 한 완전한 신앙의 자유와 평등의 가능성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15. 바로 18세기 초엽에 세 아이가 영국에서 탄생하였으니 이들은 후에 깊숙하고 또한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겨 놓았다. 이 사람들은 죤 웨슬레와 찰스 웨슬레 그리고 조지 휫필드였다.


죤과 찰스 웨슬레는 에프워어쓰(여기에서 에프워어쓰 연맹이라는 명칭이 생기게 되었다.)에서 탄생하였으며 죤 웨슬레는 1703년 6월 28일에 찰스 웨슬레는 1714년 12월 27일 글로우시스터서 태어났다. 여기서 이들의 전 생에 관한 것을 말할 수는 없으나 말할 만한 가치가 있으며 되풀이하여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들은 다 같이 영국교회의 회원이었으며 성직자가 되기 위해 공부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들 중에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그 당시 영국의 성직자들은 거의 구원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 당시 정상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종종 부모가 그들의 직업이나 유산을 아들에게 계승 시키려고 직업을 결정하였다는 것을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다.)그런데 이 사람들은 마침내 구원받고 말았다. 실로 놀랄 만한 변화였다.


16. 이 사람들은 새로운 교파의 창설자가 되려는 욕망을 가졌던 것 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영국교회의 내부에서 순수한 신앙의 부흥과 정신적인 개혁이 일어나기를 열망하고 있었으며 또한 성실히 노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영국과 미국에서 이 일을 수행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그들 자신들의 교회였던 영국교회는 그들에게 문을 닫아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집회는 때때로 야외에서 또는 어떤 개인의 집에서 개최되엇고 특히 휫필트의 경우에는 다른 교파의 집회소에서 열기도 하였다. 휫필드의 위대한 설교는 그가 가는 곳곳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17. 감리교회가 창설된 정확한 날짜를 알아내기는 퍽 어려운 일이지만 의심할바 없는 것은 감리교의 정신은 감리교 교회보다 앞서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 세 청년이 대학을 졸업하기 전부터 감리교도들이라 불리었으며 그들의 최초의 조직체는 소사이어티(society)라 불렀다. 영국에서 그들이 첫 번째 연례총회는 1744년이었다. 감리교 감독파 교회는 1784년 미국의 발티모아에서 공식적으로 조직되었는데 그 성장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교회 즉 성공회에서 그들이 나올 때 모교회(母敎會) 또는 조모교회(祖母敎會)가 갖고 있었던 많은 과오를 함께 가지고 나왔다. 이를테면 감독제도나 성직자 교회운영체제 간은 것이다. 이러한 점에 관하여 그들의 내부에는 많은 다툼과 분열이 있었으며 그 외에도 허다한 논쟁과 문제가 있었으니, 이는 유아세례를 베푸는 것과 침례대신 세례를 행하는 것 등이다. 그러나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한가지의 위대한 것이 있으니 이는 곧 그들이 모교회에서 나올 때 함께 가지고 나오지 않았던 영적 믿음인 것이다.


18. 1788년 9월 2일 아일랜드의 안트리움에서 한 아이가 탄생했다. 그는 장차 세상 모처에서 신앙 각성 운동을 일으켜 새로운 교파의 창설자가 될 아이었다. 이 아이는 알렉산더 캠벨이다. 그의 아버지는 장로교회 목사였다. 그의 아버지 토마스 캠벨은 1807년 미국으로 건너왔었고 그의 아들 알렉산더는 그때 대학에 다니고 있었으나 후에 도미했다. 견해의 차이로 인하여 그들은 장로교회를 떠나 크리스천 협회라는 독립된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브레스런(Brethren:형제교회)교회로 알려져 있는 단체였다. 그들은 1801년 침수례에 의한 침레를 채택하였고 한 침례교회의 목사로부터 침례를 받았으나 침례교회와는 연합하지 않겠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알렉산더는 모두 침례를 받았다. 1813년 그들의 독립교회는 레드스토운의 침례교회 협회와 연합하였다. 그러나 10년 후 그들은 논쟁으로 인하여 그 협회를 떠나 다른 단체에 가입하였고 그 후에도 논쟁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그들은 또다기 그 단체를 떠나고 말았다. 그들은 결코 침례교도가 아니었으며 지금가지 내가 읽어 본 기록에 관한 그들이 침례교도였음을 주장할 아무 근거도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교회의 역사 특히 침례교회의 역사를 논하면서 존 번연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영국사나세계사에서 각장 유명한 인물 중 한 사람이 침례교회 목하 존 번연은 12년간이나 벧포드의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감록에 있는 동안 그는 온 세상에서 가장 이름 높고, 성경다음으로 널리 보급되고 있는 천로역정을 기록하였다. 그는 가혹한 박해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이다. 또한 존 번연의 이야기는 주일학교의 도서실에도 반드시 갖추어 두어야 할 책일 것이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이 책을 읽는다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교회 역사중 가장 감명을 주는 이야기 중 하나는 웨일즈 침례교도들의 이야기이다. 미국의 침례교도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영향을 웨일즈 침례교도에서 받았다. 완전히 조직된 여러 침례교회들이 한꺼번에 웨일즈에서 미국으로 이주하여 왔기 때문이다(Orchard p.21-23; Ford chap. 2).


웨일즈에서 복음 사역이 시작된 이야기는 대단히 흥미가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신약에서부터 시작된다(행 28:30-31, 딤후4;21). 클라우디아와 푸데가 로마를 방문한 것, 바울의 설교를 듣고 구원받은 것, 또 그들의 조국 웨일즈에 복음을 가지고 돌아간 것 등은 대단히 흥미있는 일이다. 바울이 로마에서 이 설교를 한 것은 A.D 63년의 일이었다. 그 후 곧 클라우디와 푸데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 중에서 두 설교자가 함께 같은 복음을 영국 특히 웨일즈에 가지고 갔던 것이다. 웨일즈 침례교도들이 미국의 침례교도들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는지는 실로 측량할 수가 없다.



제 5 강 : 미 합중국의 종교


종교적으로는 가톨릭을 믿는 스페인 사람들과 그 외의 다른 라틴 족속들이 남부 및 중부 아메리카의 교회들을 대표하는 최초의 사람들이 되었다. 그러나 멕시코를 제외한 북부 아메리카에서는 그들의 세력이 강대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금의 미국 영토 안에서는 한때 멕시코의 영토가 되어 있었던 그러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종교적인 견해가 법으로써 제정되었던 적은 없었고 식민지 시절에도 결코 강력했던 적은 없었다.


식민지 시대가 시작된 17세기의 초기에 최초의 정착지가 버어지니아에 그리고 조금 후에는 오늘날 뉴잉글랜드 주라고 알려져 있는 지방에 지정되었다.


영국이나 유럽대륙에 있었던 신앙상의 박해,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비인간적인 박해는 적어도 미국이라는 나라에 정착지를 설치케 한 중요한 원인중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제임스 타운의 일단(1607)과 필그림이라고 알려져 있는 단체(1620)를 제외하고도 최초에 들어온 이민단 중에는 두 단체가 있었다. 최소한 그중 하나는 퓨리탄(청교도0이라 불리웠는데 이들은 회중교회의 교도들이었다. 엔디코트 총독이 그들의 식민지를 통치하고 있었다. 또 다른 하나의 단체는 장로교도들이었다. 이 두 단체가운데는 그들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는데 그들 역시 핍박에서 해방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미국에서 피흘린 발자취


이 피난하여 온 회중교회 사람들과 장로교인들은 따로 식민지를 만들었고 즉시 그 영토 안에서 그들의 독특한 신앙상의 견해를 법으로써 제정하였다. 다시 말하면 회중교회주의와 장로교회주의를 그 식민지 안에서 법적인 신앙상의 견해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이는 곧 다른 모든 신앙관을 전적으로 배척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들 자신들은 아직도 그들 위에 내렸던 핍박의 피어린 자국이 남아있는 고국산천을 떠나서 자신들을 위하여 자유의 나라를 찾아왔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들 자신들이 식민지를 지정하고 이 새 나라에서 권력을 잡게 되자 곧 다른 사람들의 신앙의 자유를 부정하고 그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가혹한 수단으로 핍박하였던 것이다. 특히 그들은 침례교도들을 그렇게 취급하였던 것이다.


버지니아 남부 및 북부 캐롤라이나의 식민지에 정주한 것은 주로 영국 성공회 사람들이었다. 이 독특한 종교관은 이들 식민지의 법으로 제정되었다. 이리하여 수많은 회중교회교인들과 장로교회 교인들 그리고 성공회 교인들이 자신의 양심이 명하는 대로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특권을 찾아서 왔던 이곳 미국의 새 천지에는 곧 법으로써 제정된 세 교회가 설립되었다. 정부에서 권위를 갖고 있는 사람 외에는 아무에게도 신앙의 자유는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의 후손들은 선조들의 피어린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었으며 그들 자신의 종교개혁은 아직도 완성되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에 이민 온 사람과 함께 많은 침례교도들이 분산적으로 들어왔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아나-밥티스트(재침례교도)라 불렸다. 미국으로 행하는 모든 선박 안에는 침례교도들이 몇 몇씩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비교적 적은 무리를 이루어 왔으며 결코 큰 이민단의 형식으로는 들어오지 못하였다. 그러한 방법으로 오는 것이 용납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이민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식민지가 완전히 확립되기 이전에도 침례교도들은 그 수가 늘어갔고 거의 어느 곳에나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곧 세 개의 국가 교회의 무거운 손길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복음을 전파하는 것, 그들의 자녀들이 침례 받는 것을 거절한 것, 유아 세례를 반대한 것, 그 외 침례교도들로서 양심적인 행동을 했던 여러 가지 것들이 모두 무서운 범죄가 되어 체포당하고 투옥되었으며 벌금을 물었고 채찍을 맞았으며 추방당하였을 뿐 아니라 재산까지 몰수당했다. 이러한 모든 일이 이곳 미국에서 행해졌다. 여러 가지사실 중에서 그 몇 가지 실례만을 들어 보기로 하겠다.


메사츄세츠 베이의 식민지가 지정된 지 20년이 되기 전에 그곳의 국교가 된 회중교회는 침례교회 및 다른 교파를 배척하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다음은 그 법안의 일부분이다.


"다음과 같이 승인되었으므로 이에 명한다. 이 법령의 권한 아래 있는 자로서 유아 세례를 공공연하게 비난하거나 반대하는 자 또는 그것을 인정하여 실행하고 있는 사람들을 은근히 미혹케 하는 자, 그리고 그 의식을 시행할 때에 고의로 그 집회를 이탈하려 하는 자는 소정의 기간이 경과되면 유죄로 인정한 후 주방의 선고를 받게 될 것이다."


이 법령은 특히 침례교도들에 대해 단행되었다.


이 같은 식민지 당국에 의하여 로저 윌리암스와 그 외 여러 사람들이 추방을 당했다. 그 당시 미국에서 추방을 당한다는 것은 절망적인 문제였는데, 이는 곧 인디안 소굴에 들어가 거기서 사는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윌리암스의 경우에는 인디안들의 친절한 영접을 받았고 얼마동안 그들 가운데서 살았으며 또 후일에 그를 추방한 그 식민지에 대하여 커다란 축복을 끼치게 되었던 것이다. 즉 그는 인디안에게 간청하여 식민지를 파멸의 손에서 구했던 것이다. 그 후 로저 윌리암스는 여러 식민지에서 추방당한 사람들과 함께 그들 자신의 식민지를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중에는 침례교 목사 존 클라크도 있었다, 아직 그렇게 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한을 영국 정부로부터 받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해 보는 것이 현재의 식민지에서 무서운 신앙상의 제약을 받고 사는 것보다 더 현명한 일이라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직까지 어느 식민지에서도 그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고 이었던 한 작은 땅을 발견하여 그곳에 그들의 식민지를 지정하기로 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로드아일랜드라 알려진 곳이다. 이는 1638년 곧 메사츄세츠 베이 식민지가 지정된지 10 년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합법적인 인가를 얻게 된 것은 그로부터 25년 후인 1663년이었다.


1651년경에 로저 윌리암스와 존 클라크는 만일 할 수 있다면 그들의 식민지를 설립할 수 있는 합법적인 허가를 얻을 목적으로 영국에 파송되었다. 그들이 영국에 도착하였을 때 올리버 크롬웰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그는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로저 윌리암스는 미국으로 돌아왔고, 존 클라크는 여국에서 머물러 있으면서 탄원을 계속하였다. 마침내 크롬웰이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찰스 2세가 영국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역사는 찰스를 교회에 대한 가장 무자비한 박해자들 중의 한 사람이라 평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그는 1663년에 이를 허가하였고 클라크는 12년이란 긴 세월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그 허가장을 가지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따라서 1663년 로드아일랜드는 합법적인 식민지가 되었고 침례교도들은 그들 자신의 헌법을 세울 수 있었다.


헌법은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온 세상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이 헌법에는 세계에서 최초로 신앙의 자유가 선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도 절대적인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일어났던 투쟁은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역사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장구한 세월을 통하여 침례교도들은 단독으로 싸워 온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만 그들 자신만을 위하여 싸웠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싸웠던 것이다. 침례교도들의 최초의 식민지가 된 로드아일랜드는 그 허가를 얻기 위하여 탄원한지 12년만에 침례교도들의 작은 무리들에 의해서 설립되었으며, 이는 이 지구상에서 신앙의 자유가 법률로 보장된 최초의 곳이었다. 이곳이 식민지가 된 것은 1638년의 일이요, 이 식민지가 합법적으로 지정된 것은 1663년이었다.


이 식민지가 합법적으로 설립되기 이전에도 이곳에는 두 개의 침례교회가 조직되어 있었다. 이중 하나는 언제 조직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로저 윌리암스가 프로비던스에 교회를 조직한 날짜가 1639년이라는 데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일치하고 있다. 뉴포트에 존클라크가 세운 또 다른 교회의 날짜는 후에 알려진 모든 증거에 의하면 1638년이거나 혹은 그보다 수 년 후이다. 로저 윌리암스가 프로비던스에 조직한 교회는 겨우 몇 달간 존속한 것같이 보이나, 존 클라크가 뉴포트에 세운 교회는 지금까지 남아있다. 나 개인의 생각으로는 뉴포트 교회가 설립된 것은 가능한 모든 증거에 기초하여 보면 1638년이라는 것이 정확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나는 이 연도(1638년도)를 정확한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의 몇몇 주에서 일 났던 박해에 대하여 이제 그 실례를 몇 가지 들어보기로 하자. 이는 존 클라크 교회의 한 사람이 병들었을 때의 기록이다. 그들 가족은 메사츄세츠 베이 식민지의 경계선을 바로 넘어 그 식민지 안에 살고 있었다. 존 클라크 자신과 순회목사 크란돌 그리고 오바댜 홈스라는 사람과 셋이 그 환자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들이 그 집 가족들과 함께 기도를 하고 있을 때 곧 그 식민지의 관리들이 그들에게 달려들어 체포한 후 재판소로 끌고 갔다. 역시 그 기록에 의하면 그들을 재판에 회부하기 위하여 확실한 죄상을 잡으려고 그들의 손을 묶어 교회(회중교회)의 집회에 끌고 나갔다. 그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그들에 대한 문책은 "집회에서 모자를 벗지 않았다는 것이었다."그들은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엔디코트 총고이 참석하고 있었으며 "너는 유아세례를 부인하였다"(이것은 그들을 정죄할 만한 조건이 아니였다) "너는 사형에 처해야 마땅하다. 나는 내 관활 구역내에 그런 쓸데없는 것을 들어오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였다. 그들에게 내린 처벌은 벌금형 혹은 채찍질이었다. 크란돌(그는 방문객이었지만)의 벌금은 5파운드(25불)였으며 클라크(목사)의 벌금은 25파운드(125불)였고 훔스(그는 기록에 의하면 처음에는 회중교회의 교인이었으나 후에 침례교회로 들어온 사람이다)의 벌금은 30파운드(150불)였다. 클라크와 크란돌의 벌금은 친구들이 지불해 주었으나 홈스는 나는 아무런 잘못한 것이 없다고 말하며 벌금의 지불을 거절하였으므로 매를 무척 맞게 되었다고 한다. 기록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허리까지 벗겨 가지고 어떤 특수한 매로 쳐서 온몸에 피가 흘렀고 다리를 얻어맞아 피가 구두를 채우고 넘쳤다고 한다. 또 몸에 너무나 많은 상처를 입어서 2주일 동안 침대에 누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나는 구타와 그 외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기록과 홈수 자신의 저술까지도 읽어보았는데 이보다 더 끔찍한 것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실로 미국에서 이러한 일이 행하였졌던 것이다.


어떤 화가는 "내 아들이 세례받는 것을 거절한다. 그리고 유아 세례는 비성경적인 의식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감금되었고 매를 맞게 되었다. 윈드로프 총독은 말하기를 그 화가는 "주님의 의식을 비난하였기 때문에 "매"를 맞은 것이라고 하였다.


장로교가 국가 종교가 되어 있었던 식민지에서도 이에 반대한 사람들 (침례교회와 그밖에 다른 교파)도 회중교회가 국교로 되어 있었던 매사츄세츠 베이 식민지에서와 사정이 비슷했다.

이 식민지에는 침례교도들의 거주기가 있었다. 그 곳에는 겨우 다섯 가족이 있었을 뿐이며, 기록에 의하면 그 침례교도들은 그곳의 법률을 인정하였고 순응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 식민지 당국에서 침례교도들의 거주지 안에 장로교회의 예배당을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교회를 세우자면 세금을 많이 징수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침례교도들은 이 새롭고 엄청난 세금을 징수하려는 장로교인들의 권리를 인정은 하였지만 세금징수에 반대하는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우리는 이제 겨우 거주지에서 생활을 시작하였을 뿐이다. 우리의 작은 집도 겨우 세웠고 조그만 채소밭도 이제야 겨우 마련되었을 뿐이다. 우리는 아직 제초도 하지 못하였다. 인디안의 습격에 대비하는 요새를 쌓기 위하여 방금 우리는 과분한 세금을 징수당하였다. 우리는 이제 또 하나의 세금을 도저히 바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탄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들은 도저히 세금을 낼 길이 없었다. 마침내 그들의 거주지는 경매를 당하게 되어 그들의 작은 집과 정원, 채소밭, 심지어는 묘지까지도 방매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아직 개간치 않았던 빈 들판만은 팔리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365파운드 5실링은 상당의 재산이 35파운드 10실링으로 팔렸다. 그 중에는 그곳에서 목화를 하고 있던 목사가 산 것도 있었다고 한다. 그 거주지는 황폐할대로 황폐되고 말았다고 한다.


엄청나게 과중한 징세, 여러 가지 가혹한 처사 등은 주로 침례교도들에게 가해졌다. 이런 세세한 탄압의 유형을 기록할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영국 교회(성공회)가 지배하고 있었던 남부의 식민지 캐롤라이나와 특히 버어지니아에서는 침례교도들에 대한 박해가 심하게 계속되었다. 그들의 설교자는 빈번히 벌금을 물었고 투옥되었다 식민지 시대의 초기부터 독립전쟁이 시작될 때 가지 100년이상 이나 침례교회들에 대한 이러한 박해는 계속되었다. 버어지니아에서 침례교도들이 핍박을 당하였던 몇 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오늘날에는 좀 이상하게 생각되기도 하겠지만 버어지니아는 로오드 아일랜드의 뒤를 이어 이 세상에서 신앙의 자유를 채택한 두 번째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는 한 세기 이상이 지난간 후에 된 일이다. 그러나 박해는 30명의 목사가 각각 때를 달리하여 단 한가지 죄과로 투옥되었던 것인데, 즉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을 전파하였다는 이유에서였다.


제임스 아일랜드의 경우는 이에 적당한 실례일 것이다.

그는 투옥되었다. 그를 감옥에 가둔 후 그의 적들은 화약을 폭발시켜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것이 실패하자 다음에는 그가 갇혀 있는 감옥의 창문아래서 유황을 태워 그를 질식시켜 죽이려 하였다. 이것 역시 실패하자 그들은 의사와 공모하여 그를 독살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다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는 감옥의 창 너머로 군중을 향하여 설교를 계속하였다. 그러자 군중이 감옥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또 그도 밖을 내다보지 못하도록 감옥 둘레에 담을 쌓아 버렸다. 그러나 그는 이런 어려움까지도 극복하였는데 즉 사람들이 모이면 긴 막대기 끝에 손수건을 달아서 담 위로 높이 들어올려서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을 아일랜드에게 알리면 그것을 보고 군중들이 자기의 설교를 들을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 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의 설교는 계속되었다.


그후 세 사람의 침례교회 목사(루이스, 죠세프 크레이그 및 아론 블렛소우)가 같은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적어도 그 중 한 사람은 『R.E.B.베일러』와 혈연 관계가 있었으며, 다른 텍사스 침례교회 목사 몇 사람과도 혈연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목사들은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패트릭 핸리는 수십 마일이나 떨어진 먼 곳에 살고 있었으며 그 자신이 영국교회(성공회)의 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소까지 말을 타고 달려와 그들의 변호를 담당할 것을 자청하였다. 그의 변호는 상당한 것이었지만 나는 여기서 그 일을 상세히 말할 수는 없으나 그의 변호는 법정을 뒤흔들었고 결국 그 목사들은 석방되었던 것이다.


로우드 아일랜드 이외의 곳에서도 서서히 점차적으로 신앙의 자유가 오게 되었다. 예를 들면 버어지니아에서는 한 법률이 통과되었는데 이는 한 군 단위에 한 사람의 침례교회목사들을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목사가 두 달에 한 번 이상 설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후 이 법률이 수정되어 매달 한 번씩 설교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그 군의 어느 일정한 장소에서 낮에만 한 번 설교할 수 있었다는 것 뿐이요, 밤에는 절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버어지니아에서 만이 아니라 다른 식민지에서도 어떠한 종류의 전도사업이라 할 지라도 전면적으로 금지한다는 법률이 통과되었다. 이것이 바로 아도니람 져드슨으로 하여금 최초의 외국 선교사가 되게 한 이유였었다.전도 사역을 법률로 금지하였던 것이다. 버어지니아 주 의회에서 이 법률들이 대폭적으로 수정되기까지는 많은 어려운 논쟁과 오랜 세월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분명히 미국에 있어서 신앙의 자유에 가장 큰 장애가 되었던 것은 - 아마 이에 대해서는 온 세계가 다 그렇겠지만 - 지나간 여러 세기를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라난 확신 즉 종교라는 것은 정부의 지지 없이는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곧 어떤 교파라 할지라도 교인들이 자진하여 바치는 헌금만으로써 유지 번성해 나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버어지니아에서 영국교회의 폐지 문제를 에워싸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을 때나 또한 그 후 신앙의 자유란 것이 의회에서 논의되었을 때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의제(議題)였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침례교도들은 그 싸움을 거의 단독으로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로오드 아일랜드는 1638년에 식민지가 성립되기 시작하였으나 1663년 까지는 합법적으로 인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이 바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게 된 최초의 주(州)가 되었다. 두 번째 곳은 버어지니아이며 이는 1786년에 이루어진 것이다. 의회는 1791년 12월 15일 시행의 헌법 제일 수정조항을 선포하였다. 이는 곧 모든 국민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침례교도들은 국민들에게 이 축복을 가져오게 한 장본인으로서 인정받게 되었던 것이다.


초기 미국 의회에서 일어난 사건 하나를 말해 보기로 하자.


미국은 하나의 국교를 가져야 할 것인가 또는 여러 개의 국교를 가져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며 종교는 자유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논의되었다. 몇 개의 법안이 제출되었으며 영국 교회(성공회)를 국교로 추천하는 이도 있었고 또 회중교회를 추천하는 이도 있었으며 장로교회를 추천하는 이도 있었다.


당시 침례교도 중에는 의회의 의원이 한 사람도 없었으나 절대적인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열렬히 싸우고 있었다. 제임스 매디슨(후에 대통령이 됨)은 그들의 중요한 지지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 패트릭 헨리가 일어나서 타협안을 제출하였다. 그것은 하나의 국교 대신에 네 개의 국가 교회(혹은 교파)로 하자는 것이었는데 이는 여국 교회 즉 성공회와 회중교회 그리고 장로교회와 침례교회였다. 그중 어느 것으로도 유일한 국가 교회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각각 헨리의 타협안을 받아들기로 동의하였다. (이 타협안이한 세금을 바치는 모든 사람등 누구든지 이 교파 중 어느 곳에서나 자기 들의 세금을 바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침례교도들은 이러한 모든 것에 반대하는 싸움을 계속하였다. 교회와 국가가 결합한다는 것은 침례교회의 근본적인 교리에 위배되는 것이었으므로 그것이 표결에 붙여져도 그들은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헨리는 침례교도들에게 간청하기를 자기는 그들을 도우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존속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이에 항거하였다. 투표를 하자 거의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법안이 되기 위해서는 세 번이나 더 투표해야 했다. 매디슨과 침례교도들은 싸움을 계속하였다. 두 번째 투표 결과 역시 헨리의 능란한 연설에 힘입어 거의 이의 없이 가결되었다. 그러나 다시 세 번째의 투표를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나타났다. 헨리가 버지니아의 주지사로 임명되어 의회를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세 번째의 투표를 할 때에는 헨리와 같은 대항하기 어려운 연설이 없었으므로 그 투표는 무효가 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침례교회는 그들 자신의 가장 엄숙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법으로 제정한 국가 교회의 한 종파가 될 뻔하였다. 이것은 침례교회가 국법으로서 인정될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이 국가교회의 회원이 될 번한 기회였던 것이다.


그후 오래지 않아 영국 교회는 완전히 미국에서 폐지되었고 중앙 정부에 의하여 유지되는 교파는 하나도 없게 되었다(아직 몇 주에서는 주립교파가 있다). 전 미국에 관한 한 국가와 교회는 완전히 분리되어졌다. 그러나 교회와 국가, 이 둘은 그 외 다른 곳에서는 적어도 1500년동안 (A.D. 313년 이래) 불순한 결합을 하여 왔던 것이다. 신앙의 자유는 최소한 미국에서는 부활하게 되었으며 다시는 멸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야 신앙의 자유가 점차적으로 온 세상에 확대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교회와 국가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개념은 청산되지 못한 채 신앙의 자유가 미국의 헌법에 채택된 이후에도 국가교회는 몇몇 주에서는 오랫동안 존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미국에서 국가교회라는 개념을 가장 먼저 시도하던 매사츄세츠 주에서도 결국 이 개념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개념은 두 세기 반이나 그곳에 존속하고 있었다. 전세계에서 최초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이를 사랑하였던 위대한 나라의 체면을 더럽힌 최후의 장소는 유타주였다. 정부가 단 하나의 특별한 종파를 지지하고 있는 나라에서는 참되고 완전한 신앙의 자유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밥티스트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때때로 받은 일이 있다. 만약 어떤 국가(國家)나 주(州)가 침례교회를 한 교파로서 법률에 의하여 국교로 제정하여 주겠다는 제안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들은 그러한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었는가? 또 만약 그들이 그러한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하면 가톨릭이나 성공회 또는 루터교회나 장로교회, 회중교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다른 교파의 사람들을 박해할 것인가? 아마 이러한 의문을 조금 생각해 보는 것도 그릇된 일은 아닐 것이다. 사실 침례교도들이 그러한 기회를 가져 본 일이 있었던가?


한 때 네덜란드의 국왕이 (그 당시 네덜란드는 노르웨이, 스웨덴, 벨기에, 홀랜드, 및 덴마크를 포함한 나라였다.)국교가 있어야 하겠다는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을 하였다는 것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가? 당시 이 왕국은 국가교회를 가지고 있었던 국가와 정부에 의하여 사방이 둘러 싸여있었다. 즉 그러한 종교는 정부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었다. 그 홀랜드의 국왕은 한 위원회를 지정하여 당시 존재하고 있었던 모든 교회들과 교파들의 주의 주장을 조사하여 어는 것이 신약성경적인 교회로서 가장 올바른 주의 주장을 가지고 있는가를 조사하게 하였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그 위원회는 침례교회가 신약의 가르침에 합당한 대표적인 것이라고 보고 하였다. 그리하여 국왕은 침례교회를 그 왕국의 국가교회 또는 교파로 만들 것을 제의하였다. 침례교도들은 그에게 진심으로 사의를 표하였다. 그러나 그 제안은 그들의 근본적인 교리와 확신에 배치되는 것이라 말하며 이를 거절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그들의 교회가 한 국민의 국가교회가 될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는 아니었다. 확실히 그들은 로오드 아일랜드의 식민지가 지정되었을 때에도 그러한 기회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교파를 박해한다는 것 - 그것은 아마 그들이 침례교도로 존속하고 있는 한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원래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실로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신앙의 근본신조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들은 교회와 국가는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교회와 국가의 결합이라는 문제에 대한 침례교들의 확신은 대단히 견고한 것이었으므로 그들은 언제나 국가에서 제안한 모든 원조를 다 거절하였다. 여기서 두 가지 실례만을 들어보기로 하자.


그 하나는 텍사스에서 또 하나는 멕시코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오래 전 베일러 대학교가 발족하였던 바로 그 당시 텍사스 주(州)에서 원조를 제안하여 왔었다. 그러나 그들은 비참한 곤경에 빠져 있었지만 그 원조를 거절하였다. 바로 그 당시에는 텍사스의 감리교회는 빈약한 학교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국가의 원조를 받았던 것이다. 결국 그 학교는 국가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멕시코에서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W.D 파우웰이 멕시코에서 침례교회의 선교사로 있었을 때의 일이다. 그의 선교사업은 코아윌라 주의 총독 마데로에게 침례교회에 대한 대단히 좋은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마데로는 만약 침례교회가 멕시코의 코아윌라 주의 훌륭한 학교를 설립하기를 원한다면 국가에서 상당한 원조를 하겠노라고 제의하였다. 파우웰은 이 일을 선교부에 넘겨주었다. 그러나 이 기금은 국가에서의 원조라는 이유로 거절하고 말았다. 후에 마데로는 개인적으로 막대한 금액을 기증하였다. 그 기금은 받아서 마데로 학원을 설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후 기 (後 記)


1. 암흑시대의 기간에도 가톨릭과는 하등의 관계도 없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그리고 독립된 여러 교회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사도들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교회들도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가톨릭과 그 교리를 전적으로 부인하고 배척하였던 것이다. 이는 믿을 만한 역사가 밝히 증명하고 있는 사실이다.


2..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던 잔악하고 무서운 핍박의 대상이 되었다. 역사가 나타내는 바에 의하면 A.D 426년부터 시작되었던 약 12세기 동안의 암흑시대에 무릇 5천만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자의 죽음을 당하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암흑시대 이전과 이후에도 수 십 만명의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잔악한 박해의 손길 아래 죽어갔던 것이다.


3.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세기 동안 계속되었던 이 암흑시대를 통하여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렸던 것인 바 그러한 명칭은 다 그들의 적들이 그들에게 준 것이었다. 이러한 명칭은 때로는 특히 뛰어난 어떤 영웅적인 지도자의 이름을 다라 또는 다른 이유에 따라 붙혀진 것이며 동일한 견해를 갖고 있던 같은 사람들이 각각 그 지방의 이름에 따라 다르게 불리웠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변천해 가는 여러 가지 명칭 중에서도 전 암흑시대를 통하여 적어도 어떤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떨이지지 아니하였던 이름 즉 명칭이 있었으니 이것이 곧 아나-밥티스트(Ana-Baptist)였다.어떤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던 이 합성어는 제 3세기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곧 유아세레가 생긴 직후의 사실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며 더욱더 암시적인 사실은 가톨릭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이전의 일이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나 -밥티스트라는 명칭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인들 무리의 이름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4.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뛰어난 특징은 이러진 세기에도 한결 같이 계속되었다. 그들은 유아세례라는 인위적인 교리를 부인하고 유아 때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도 또 그것이 침수례의 침례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들어올 때는 재침례를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 특징으로 인하여 그들이 아나-밥티스트라 불리우게 되었던 것이다.


5. 이 특수한 명칭은 여러 가지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합한 것이었다. 이는 특히 도나티스트, 폴리시안, 알비겐시스 그리고 고대의 웰덴시스와 그 외의 사람들에게 꼭 알맞는 명칭이었다. 그 후의 세기에는 이 명칭이 한 특수한 무리들에게 적용된 보편적인 이름으로 되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다만 아나-밥티스트라 불리게 되었고 다른 모든 명칭은 차츰 없어지게 되었다. 바로 16세기의 초엽에 모든 개신교 교회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나타났던 루터교회가 생기기 이전에 아나라는 말이 떨어지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단순히 밥티스트라 불리웠던 것이다.


6. 암흑시대에 들어가서도 어떠한 점에 있어서나 가톨릭과 동일시할 수 없었던 많은 교회들의 무리가 있었다. 다음에 소개되는 것은 암흑시대에 들어갔을 때에 그들이 지켰던 몇 가지의 기본적인 교리들이며 암흑시대를 지나서도 그들이 고수하였던 몇 가지의 기본적인 교리들이고 또한 오늘 날에도 그들이 굳게 지키고 있는 몇 가지의 기본적인 교리들이다.


침례교도[Baptist]의 기본적인 교리


영적인 교회- 그 창시자,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시며 입법자(立法者)이시다.

그 교회의 의식(儀式) - 침례와 주의 만찬 두 가지 뿐이다. 이것은 상징적이며 기념하는 것 뿐이요 구원을 위한 것은 아니다.

직분 - 감독 즉 목사와 집사 단 두 가지이며 그들은 교회의 종이다.

그 운영 - 순수한 민주주의이며 법을 시행하는 기관이요 입법기관이 아니다.

그 법과 교리 - 신약성경 그 것뿐.

그 회원 - 믿는 자에 한함. 행위로서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구원받은 사람.

교회가 요구하는 것 - 구원받은 자가 교회에 들어올 때는 침수례(浸水禮)에 의한 침례를 받고 신약성경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며 이에 충실할 것.

여러 교회들 - 말씀과 회원의 훈계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책임에 대해서는 각각 분리 독립되어 있지만 사역은 서로 협조한다.

교회와 국가의 완전한 분리.

모든 사람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의 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