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

하나님 나라로 침입하라

천국 도서관장 2009. 10. 28. 14:56

 

이 설교에서 에드워즈 목사님은, 성도들에게 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침노하라고 격려한다.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자, 신약 시대의 서막을 여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역할을 했다. 그는 회개의 복음을 전파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회개한 자에게 천국을 허락하셨다. 그는 밤의 계명성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태양이 떠오르자 그 빛은 사라졌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으로 인해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 단, 침노하는 자만 들어간다. 그곳은 한가하게 들어갈 수 없다. 놀면서 들어갈 수 없다. 걸어 들어갈 수 없다. 이리저리 배회하다가 들어갈 수 없다.


침노한다는 것은 쳐들어간다는 것이다. 전쟁이 벌어져서 적의 진지를 침투해 들어가듯이 들어가야 한다. 적은 침노하는 자를 그대로 놔두지 않는다. 물론 우리가 천국에 침노해 들어갈 때는 상황이 좀 다르다. 이 세상의 사단이 침노하는 자를 가만두지 않는다. 죽기살기로 침노하는 자를 막아선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귀순한다고 생각해보자. 북한군이 귀순하는 사람을 가만 두겠는가? 따라서 귀순하는 사람은 오로지, 남쪽으로만 죽기살기로 도망칠 것이다. 남녘의 땅을 밟을 때까지 조금도 쉬지 않고, 적의 공격을 피해서 달아날 것이다. 힘들다고 쉬거나, 배고프다고 쉬지 않는다. 경치가 좋다고 쉬지 않으며 넘어졌다고 쉬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한 길로만 내달릴 것이다.


천국을 침노하는 자도 마찬가지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갈 때 조금도 지체하지 않는다. 쉬면 바로 죽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를 들어가는 것은 유람이 아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다. 가족이 그를 억제할 수 없다. 세상일이 그를 붙잡을 수 없다. 세상적인 유혹이 그를 붙잡을 수 없다.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사단이 주는 어떠한 시험도 그를 쓰러뜨릴 수 없다.


그렇다. 침노하는 자는 자신의 상태와 환멸을 느끼는 자이며,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안다.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곳을 향하려는 의지가 발현된다. 의지가 발현될 뿐만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옮긴다.


천국을 침노하지 않는 자는, 사실 예수님을 모르는 자이다. 천국을 모르는 자이다. 아니 천국에 관심이 없는 자이다. 이 세상이 더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침노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회개할 수 있지’라고 생각하며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은 죽은  믿음, 죽은 소망을 붙들고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은혜뿐만 아니라 그 은혜를 활용할 방편까지 주시기 때문이다. 그 방편은 물론 회개와 믿음이다. 우리는 회개와 믿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로 침노해 들어가는 것이다. 조금도 쉬지 않고, 낙망치 않고, 저돌적으로 돌격해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 나라로 침입하라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눅 16:16).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두 가지 요점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1. 먼저 세례 요한의 소명과 사역이 무엇인가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함에 있어서 율법과 선지자들의 뒤를 이어 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예비하는 임무였습니다. 본문에서 율법과 선지자란 구약시대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구약성경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받았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은 ‘요한까지만’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을 통하여 주어진 계시가 요한 때부터 쓸모가 없어진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계시를 기초로 설립되고 통제되었던 교회의 상태가 요한까지만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때에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서 받은 계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빛을 주로 의지하였습니다.


요한은 가장 먼저 신약시대를 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또는 교회의 복음 상태를 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또는 교회의 복음상태를 소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영광스럽고 신령하고 영원한 특권과 복락들을 동반하고 있는 교회의 복음적인 상태를 일컬어 하늘나라, 또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흔히 부릅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라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음을 전파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것을 가장 먼저 전파하기 시작했고 뒤를 이어 그리스도와 제자들도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니라” (마 4:17). 제자들도 그렇게 전파하라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라” (마 10:7). 하나님의 나라를 예고하고 실제로 건설하신 이는 요한이 아니라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 앞에서 그의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로서의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그것은 옛 세대가 폐해지고, 새로운 세대가 점차적으로 들어오는 일이었습니다. 밤이 깊어지면 점차 낮에게 그 자리를 내어 주듯이 말입니다. 먼저 계명성이 떠오릅니다. 그 다음에 태양빛이 서서히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새벽의 여명의 빛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더욱 더 밝게 비칩니다. 지난 밤 동안 빛을 밝혀주던 별들도 차차 사라져가고, 그 빛이 이제는 필요없게 됩니다. 결국 태양이 떠오르고 세상은 그 태양의 직사광선으로 밝혀집니다. 그 태양 빛도 지평선 위에 더 높이 떠오르면 떠오를수록 더 밝게 빛나고, 결국 계명성도 점차 사라져 버립니다.


대낮의 전조는 여명


세례요한이 자신에 대해, “그가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선구자였습니다. 낮과 같은 복음의 전조였습니다. 마치 아침의 계명성이 태양의 선구자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그 선지자들 중에서 가장 영예로운 직무를 감당했습니다.


다른 선지자들도 오실 그리스도를 예고했습니다. 그는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계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실지로 그를 소개했고 심지어 그리스도의 공생의 엄숙한 시작을 알리는 도구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그리스도에 앞서 왔던 선지자들 중에서 가장 큰 자였습니다(마 11:11). 마치 계명성이 모든 별들 중에 가장 밝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켜 그리스도께서 온전하게 계시하시고 세우실 하나님의 나라를 받도록 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마3:7)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2.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그의 사역이 성공한 것을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그가 그 사역을 시작한 이래 각 사람마다 그가 전파한 하나님의 나라로 침입하여 들어왔습니다. 그의 직무가 크게 성공했다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국면에서 나타납니다.


1) 직무상의 성공을 보였던 사람들의 경우를 살펴볼 때 세례요한의 성공이 컸다는 것을 봅니다. ‘사람마다’라는 하나의 보편성의 어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편성은 개인들 모두를 가리키는 것보다 모든 유에 속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흔히 특이한 하나님의 성령의 부어주심이 있었습니다. 비상한 각성과 구원에 대한 관심이 온갖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나타났습니다. 심지어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나타났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그런 일을 기대하기란 참으로 어려웠는데도 말입니다.


극한 교만과 자기 만족감에 취해 득의양양해 하며, 자기들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에 충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배우는 것을 조소하던 바리새인들도 왔습니다. 또한 사두개인들 마저 그에게 나아왔습니다. 그 사두개인들은 부활이나 천사나 영이나 어떤 내세에 대한 것을 부인하는 일종의 불신앙자들이었습니다. 요한 자신도 그 사람들이 자기들의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서 그에게 나오는 것에 매우 놀란 것 같습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마 3:7).


그밖에 세리들이 왔습니다. 가장 악명 높은 그들은 요한에게 와서 어떻게 해야 자기들이 구원을 받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군인들도 왔습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방조하며, 일종의 방탕아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자기들의 구원에 관하여 물었습니다.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었을 하리이까 하매....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눅 3:12,14)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2) 그가 전파하는 말씀을 듣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방식에서 그의 사역이 성공했음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로 침입하여 들어왔습니다. 다른 곳에서 그 사실을 가리켜 하늘나라로 침노하여 힘으로 그것을 빼앗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바로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라고 하였습니다.



교리


우리가 본문 말씀 속에서 주목할 수 있는 교리는 바로 이것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로 침입하여 들어오는 것을 하나님 나라를 얻을 각 사람에게 관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저는 이 주제에 대해 강론하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항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Ⅰ. ‘하나님 나라로 침입한다’는 표현이 제시하는 바 구원을 추구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1. 소원과 갈래와 정도의 차이


‘하나님의 나라로 침입한다’는 표현이 제시하는 뜻은 소원의 힘‘입니다. 일반적으로 복음의 빛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은 무신론자가 아니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소원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지옥에 가기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로 가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은 삶에서 별로 염려도 하지 않고, 무심히 세속적이고 무분별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편 하나님의 성령이 각성시켜주시는 어느 정도의 은혜아래 있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보다는 차원이 높지만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나라에 침입해 들어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침입하고 있다고 평가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나면서 가진 본능적인 조건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기를 보다 강력하게 소원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현재의 상태가 비참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보다 더 나은 것을 얻어야 할 긴박한 필요성을 인식하여 온 마음을 기울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보다도 구원을 얻는 것을 더욱 소원합니다. 이 관심이 너무 큰 나머지 다른 것에 대한 관심은 아예 차단시켜 버립니다. 그들도 전에는 다른 것들을 향한 욕심에 따라서 기도했습니다. 혹은 이 구원과 다른 것들을 향한 욕심 사이에서 그 마음이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단호히 결심하고 열심히 추구하라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로 침입하는 것’에 합당한 자리에 이르게 되었을 때, 이것에 관한 관심이 다른 모든 것에 대한 관심을 능가하게 되었습니다. 그 관심은 다른 것들을 밀쳐뜨리고, 그 생각에만 몰두합니다. 이 영생을 추구하는 것을 우리의 영혼이 다른 것들과 함께 관심을 가져야 하는 한 가지 문제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구원을 꼭 필요한 한 문제로 추구되어야 합니다(눅 10:42). 시편 27장 4절에서 그 기자가 표현하는 대로 소원하는 오직 한 가지 일로 여겨져야 합니다.


2. 결심의 간절함과 단호함


천국으로 침입하여 들어간다는 것은 ‘결심의 간절함과 단호함’을 제시합니다. 힘있게 갈망하는 것과 힘있는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라는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마음을 온전히 일에 쏟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가 병행해야 합니다. 구원을 향한 열망뿐만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서 이 선을 추구하려는 간절한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전력투구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하며, 모든 의무를 감당하고, 죄의 모든 방식을 거스려 싸워야하며, 그런 추구하는 자세를 계속 견지해야 합니다.


이런 강한 결심을 위해서 그 사람이 취할 두 가지 자세가 있습니다. 긍휼을 구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며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또한 긍휼을 얻을 기회에 대한 지각이 있어야 합니다. 아니면 긍휼을 구하기 위한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결심의 세력은 하나님께서 이 일들에 대해 마음에 주시는 지각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 지각이 없는 사람들도 결연한 결심의 자세를 스스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스스로에게 약속하며, 자신을 향해 “내가 살아있는 한 추구할 것이고, 내가 얻기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을 속이고 맙니다. 그들 스스로 그런 일을 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어떤 결심도 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입으로 하는 결심이지 마음으로 하는 결심이 아닙니다. 그 마음은 다른 데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그들이 입으로 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강한 소원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결심의 확고성은 해내겠다고 결심하는 바로 그것을 하려는 마음의 충만함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침입하여 들어가는 자는 필요한 모든 것을 할 마음의 성향을 갖고 있으며, 자기들의 힘이 닿는 데까지 그 일을 계속하겠다는 마음의 이끌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간절함뿐만 아니라 결심의 단호함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물결따라 이리저리 요동하고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는 그런 변덕스런 마음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얻는다는 것은 영원히 부단하게 그 나라를 얻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3. 열심의 대단함


하나님의 나라로 침입하여 들어간다는 것은 ‘열심의 대단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도서 9장 10절에서,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앞에서 미리 언급한 사항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귀결입니다. 강한 소원과 확고한 결심이 있는 곳에는 그것과 상응하는 열심도 있는 법입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그들의 마음속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쓸 것입니다.” 천국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할 것입니다. 그 들의 실제 생활은 잠언 2장에서 지혜자가 권고하는 것과 부합할 것입니다.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잠 2:1-5).


여기서 간절한 소원과 힘있는 결심을 지혜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명철에 두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인다는 말은 큰 열심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은을 구하는 것같이 지식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다는 것은 바로 그 열심의 대단함을 함께 뜻하고 있습니다. 그런 소원과 결심, 그런 열심히 함께 갑니다.


4. 적극적으로 뛰어듦

하나님의 나라로 침입하여 들어가는 것은 ‘간절함과 직접 일에 뛰어드는 것’을 제시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그 일을 직접’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매우 큰 연단을 받고 있고 마음에 고통을 겪고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들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크게 염려하며 영적인 것들에 대해 마음이 사로잡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지 않고, 그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서 직접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의 행사가 구원을 추구하는 일에 직접 나서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방편들을 부지런히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닌 다른 일에 마음을 둡니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한 일들에 관해 관심을 가지든지 은밀한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하고 있든지, 그런 것들의 비밀을 캐내려고 애를 쓰고 있을지 모릅니다. 또한 자기들이 어떤 것을 결정하기 위해 표적들을 구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적어도 하나님께서 알게 하시기 전에 먼저 자기들이 성취한 것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평가받는지를 추측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은 선택받지 못했다는 두려움으로 마음을 괴롭히거나, 아니면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거나, 자기들의 날이 다지나갔다고 생각하면서 괴로워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법정적이고 최종적인 심판을 받도록 그들을 내버려 두시고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 의향아 전혀 없으시다고 생각함으로 자기들의 마음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는데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원죄나 자기들의 이해를 훨씬 능가하는 다른 신비로운 교리들을 가지고 자신들을 괴롭히곤 합니다. 내세의 영원한 상태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크게 염려하는 것처럼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일들로 자신들을 답답하게 만드는 처사를 많이 합니다. 그런 경우에 그런 것들을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거나 염려하지 말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침노하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들 은 ‘자기들의 일’이 아니라, 자기들의 일에 방해가 되는 것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힘쓰고 있다면 자신들을 ‘얽매는’ 일에 힘쓰고 있는 것이고, 자기들의 지레 스스로 거침돌을 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앞으로 전진해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시간만 허비하는, 아니 그이상의 더 나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 있는 거인들을 쫓아내기 위해 맞붙어 싸우지 않고 오히려 자기들의 시간만 허비하면서 길옆에 드리워져 있는 자기들의 그림자와 싸우느라 힘을 소진하고 있는 셈입니다.


한사코 가야 할 나라, 그만한 가치가 있기에


따라서 사람들이 구원에 관해 크게 염려하고 괴로워한다는 것만 가지고는 그 사람의 길이 소망스럽다고 판단하거나 구원을 추구하는 데서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레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더 나을 뻔한 불필요한 괴로움을 자청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너무 지나쳐서 우울증의 이상증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 자주 그렇습니다.


물론 영혼의 역경이 큰 유익을 가져오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 정신이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에 가 있고 그들 영혼의 모든 성향이 하나님의 방편에 기울어져 있어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시고 지시하신 것을 행할 마음을 가질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있습니다.


사도는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고전 9:26)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시간은 정말 짧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유익도 없는 것에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모든 힘을 동원하여 대처하고 싸워야 할 난제들과 원수들이 정말 많습니다. 허상과 싸우느라 시간을 보내지 마십시오.


5. 돌파하여 승리를 쟁취함 

하나님의 나라에 침입하는 것을 여기서는 ‘모든 대적과 난관들을 뚫고 이겨’나가는 것으로 제시합니다. 그 표현 속에는 분명히 어려움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대적이 하나도 없고 그 길이 깨끗하게 열려있다면 침입하여 들어갈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로 침입하여 들어가는 사람들은 그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수많은 난관들을 뚫고 나가야 합니다. 그 사람들은 구원을 위해 세움을 받았으므로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진행해 나가 그런 것들을 극복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와 같은 난관에서 용기를 잃고 주저앉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천국을 소유하려 할 때는 어떤 방도를 통해서든지 그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면 소유하겠다는 결연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 방편들이 어렵거나 쉽거나, 또는 고통스러울지라도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조건이라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반드시 해야 할 때는 그 일이 어려우랴 쉬우냐를 저울질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내 본성적인 성향과 맞는지, 흥미가 있는지의 여부를 따져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고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 그것이 필요불가결한 방편이 아닌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사도는 빌립보서 3장 11절에서, “어찌하든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그러한 표현을 통해 자기가 겪었던 어려움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말하면서 모든 것을 상실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극히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게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침입하여 들어가고 있는 사람은 보통 그 길에서 만나는 것이 자기가 생각한 것과는 정반대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앞에 있는 십자가를 보고 멈추지 않고 그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일이 그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그것이 그의 본성적인 기질과는 전혀 맞지 않기 때문에 그가 행하기에는 너무나 어렵고 지겹습니다. 자기 위상에 손해를 감수 하지 않고서는 그 일을 해낼 수 없다고 생각해 봅시다. 또한 그 일을 하자면 다른 사람의 눈에 이상하고 괴이하게 보일 것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는 틀림없이 조롱과 비웃음을 살 것입니다. 또는 이웃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수도 있습니다.


부딪히는 모든 것들이 정말 마음에 맞지 않고 자기 자신의 본성적인 소유욕과는 정반대가 되는 것으로써 십자가를 지는 고통과도 같습니다. 그런다 할지라도 그는 ‘그러한 모든 난관들을’ 뚫고 나갑니다. 자기가 경주를 해나가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면 모든 것을 다 벗어 버립니다. 그것이 금이나 진주 마큼의 가치가 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그를 방해하는 것이 오른손이라면 그는 그것을 잘라버리고 오른 눈이 방해한다면 그 눈을 뽑아버리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의 구원을 철저하게 구하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에 그런 것들은 극복하기 어려운 난제들입니다. 그들이 결단코 넘어갈 수 없는 거침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로 침입하여 들어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안일한 자리에서 떨쳐 일어나기 전에 오랜 동안 그 양심을 달래거나 논박하기 위해 채용해 왔던 것들을, 하나님 나라로 침입해 들어가는 자는 이제 더 이상 유보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 전에는 육신적인 일을 동원시켜 여러 가지 구실과 논증을 만들어 양심을 무마시켰던 것입니다. 그는 이 끝없는 논박과 논증을 통해 양심을 잠잠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모든 난관들을 뚫고 나갑니다. 그가 나가는 길에 그 무엇이 가로막는다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는 그가 반드시 얻어야 할 것입니다. 어려움이 없이 그 하나님 나라를 얻지 못한다 할지라도 반드시 얻어야 합니다.


그는 시험도 만납니다. 마귀는 자주 그의 귀에다 대고 속삭이며 그 앞에 여러 가지 미끼를 던져 놓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하고 있는 일이 너무 어려우니 그만 포기하라고 설득합니다. 그런 난제들을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동원하여 그의 용기를 꺾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간절한 마음을 주셨고 유지시키시기 때문에 마귀가 그의 길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그는 마귀가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일 만큼 한가롭지 않습니다.



Ⅱ. 하나님 나라로 침입하는 방식으로 각 사람이 추구해야 하는 이유들


1. 절대적인 필요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필요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 나라를 정말 지독히도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서는 우리는 전적으로, 영원히 멸망받습니다. 하나님 나라 밖에서는 결코 안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결코 안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곳에는 결코 피난처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만이 도피성입니다. 모든 경건치 않은 사람들을 추적하는 그 보수자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줄 피난처는 바로 그 하나님 나라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응은 이 나라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따라가 사로잡고 영원토록 파멸시킬 것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사람들은 용솟음치며 노도하는 진노의 불못에 삼킴을 당할 것입니다. 그들이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울면서 ‘주님, 주님, 문을 열어주십시오’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은 뒤로 던져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아무런 긍휼을 베푸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영원토록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보응이 그들을 사로잡을 것이고, 마귀가 그들을 붙잡을 것입니다. 모든 악이 그들에게 임할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거나 도와주는 자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입장은 전적으로 절망일 것이요, 무한한 슬픔일 것입니다.


사생결단으로 싸워 이기면 기쁨이 더 크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하심으로 베풀어 주시는 모든 긍휼의 선물과 약속의 말씀을 끝내 그들에게서 거두어들일 것이고, 그들은 어떤 소망도 갖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안녕에 대해 어떤 관심도 갖지 않으실 것이고, 어떤 원수나 악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생각을 전혀 갖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 그들에게 무서운 원수가 되실 것이며, 물론 그 진노를 집행하실 것이며, 말로 할 수 없이 무서운 방식으로 보응하실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처할 사람들은 참으로 가련하게 멸망받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파멸로 떨어져,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아래로 무한히 떨어져 내려갈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분노의 능력을 알겠습니까? 누가 그 가련한 버러지 같은 인생, 긍휼없는 그 하나님의 집행을 받고 있는 자의 고통을 알겠습니까?


2. 기회가 짧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기회가 짧고 마감시간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몇날이 지나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우리의 기회도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날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계를 주셨으며 우리는 그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이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한 하나님의 진노가 사로잡힐 위험에 항상 처해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가 빨리 그 한계선에 도달하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그 한계선 너머에는 아무 일도, 지혜도, 지식도, 계책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있는 힘을 다해야 할 일이 있다면 바로 그 일을 해야 합니다.


3. 쉬운 일이 아니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그와 같은 방식으로 추구해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 길에는 수많은 난관들이 있어 그것을 이긴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려고 시도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충분한 결심과 용기와 일관성을 같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포기했고 멸망했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그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 난제들이라는 것이 너무 많고 너무 큽니다. 그들은 계속 그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길로 나가지 않고 중도에 포기하였기에 결국 멸망당했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 7:1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니라”(눅 13:24).


4. 가능성이 있기에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그 하나님 나라를 얻을 ‘가능성’입니다. 비록 그 나라를 얻는 데 있어서 그처럼 많은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전혀 불가능한 것을 아닙니다. 성경은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행 8:22)라고 하였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딤후 2:25)라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큰 죄인이고 그의 처지가 어떠하다 할지라도 그가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이루실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것을 성취할 수 있으며, 그 구원을 위해 충분한 구원의 길을 예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충분성이 부족하거나 죄인이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거나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얻을 기회가 짧고 또 거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수반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확인하면 그 하나님 나라를 침노할 마음의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욘 3:8, 9).


5. 그 나라가 위대하기에

하나님 나라는 ‘그 나라의 탁월한 위대성 때문에’ 그렇게 추구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우리는 하찮은 가치밖에 없는 땅에 속한 것들을 얻기 위해 큰 열심을 부립니다. 아무리 많은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속한 것보다 무한히 더 위대한 가치와 탁월성을 지닌 그 하나님의 나라를 큰 열심히 추구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에게 정말 합당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얻기 위해 그런 방식으로 추구하기를 하나님께서 바라시고 요구하시는 것이야 말로 얼마나 합당한 일입니까!


6. 기쁨이 더 크도록 준비시키기에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얻었을 때의 ‘기쁨이 더 크도록 준비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간절함과 철저한 열심을 방편으로 사용하셔서 당신이 누구인가를 알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보게 하시며 그들 자신이 무능하다는 것을 깨달아 자기 자신의 힘과 의에 대해 절망하게 만드시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그렇게 부단하고 열심있는 자세로 구하도록 영혼을 준비시켜 그 하나님의 나라를 보다 기쁘고 감사하게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또한 그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했을 때 그 하나님의 나라를 더욱 더 크게 자랑하고 가치있게 여기도록 준비시키십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그 하나님의 나라를 그렇게 열심있게 구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은 그 자신의 영예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를 긍휼이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적    용


1. 필요성을 인식하고 마음을 기울이라


저는 이 교리를 이용하여 그리스도가 없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라는 ‘권면’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중 누군가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까? 어떤 것이 구원을 얻는 길이고, 어떻게 하면 구원을 쉽게 얻을 수 있는지를 여러분이 알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거룩한 말씀이 지시하는 길에 대해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는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나라로 ‘침노하여’들어가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과거에 구원을 추구하였지만 이런 방식으로 구하지 않아서 결국 구원을 얻지 못해 지옥으로 가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해마다 그 구원을 구했으나 실패하였고 결국 멸망하였습니다.


잠긴 문이 아니기에 밀면 열린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에 사로잡혀 있으며, 무서운 저주의 비참을 지금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밤낮 쉬지 못하고 구원을 구할 더 이상의 기회를 얻지 못하며, 결코 끝나지 않는 고통과 비참을 겪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식으로 구원을 추구하지 말라고 권면하십시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으로부터 침노를 당하게 하라고 권면해야 합니다.

저는 여기서 먼저 한두 가지 반론에 대해 답하고자 합니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의 나라로 침노하여 들어가는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반 론]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일을 해낼 수 없다. 앞에서 말한 그 간절한 소원과 확고한 결심을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다. 내가 있는 힘을 다해서 결심하고 온 정성을 드려 추구한다 할지라도 결국 실패할 것이다. 지금 내 생각들은 그 일에서 떠나 있다.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을 지라도 나는 너무 우둔하고 집중력도 부족하다.”


[답 변]

물론 마음의 간절함이 즉시 여러분이 주장하는 대로 될 수 없다 할지라도 방금 위에서 말한 그 간절한 마음의 ‘필요성’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서 분발하게 하는 수단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감동이 없이는 이 일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방편을 통해서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어떤 생각들을 하지 않고는 그 철저한 간절함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사람이 구원의 필요성을 절감한다면, 그 구원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너무나 많기에 구원에 이르는 길이 극히 어렵고 그 기회 또한 짧고 마감시간이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가능성이 있으며, 그 기회가 열려 있음을 인식한다면 이 문제에 전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결연한 자세를 가지기 위해 그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태만하게 그 문제를 뒤로 미루며 아직 마음에 확고한 결심이 서지 않았다면 그것은 이런 것을 충분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오직 외길이라면 힘들어도 가라

강한 소원과 결심이 여러분의 힘으로 되지 않는 일이라 해도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방편들을 사용하는 수고를 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 수고는 정말 큽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지키며 죄와 싸우는 일에 매우 열심일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서 수많은 부패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을 지라도, 그런 부패된 요소들을 주시하고 싸우기 위해 매우 큰 힘을 들일 수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모든 규례들에 참여하고 공적인 예배나 사적인 종교의 의무를 감당해 나가는 것은 여러분에게 부여된 책임입니다. 자기가 가진 힘 이상으로 그런 것들을 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전력을 다해서도 그런 것들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순된 일입니다. 둔하고 무감각한 마음과 태만이 그들의 자원하는 심령을 방해할 수는 있어도 그들의 수고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애를 쓰는 모습이 드러나는 것은 바로 그 점에서입니다. 곧 여러분의 둔함을 깨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무디고 게으른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수고를 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수고를 하지 못하게 하기는커녕 수고해야 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사람이 마땅한 도리를 감당하면서 싸워야 될 어려운 요점들 중에 하나입니다. 또한 투쟁하고 애를 쓸 기회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구원을 추구하는데 아무 어려움이 없다면 힘써 싸워야 할 기회가 전혀 없게 될 것이고, 싸울 대상을 전혀 갖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모든 의무에 참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모든 의무를 늘 생각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들을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선한 목적을 가지는 경우라 할지라도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어렵다고 해서 애를 쓸 수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면 애를 쓸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일에는 노력하고 투쟁해야 할 어려움이 있기 마련입니다.


간절한 마음과 부지런히 노력을 경주하는 것은 서로 보완시켜주며 서로를 촉진시켜주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을 간절히 기울이는 사람은 그것에 대해 수고를 할 것입니다. 모든 마땅한 일에 부지런하고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은 아마 머지않아서 자기 심령의 열심과 자기 마음의 분별력이 크게 증가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반  론]

어떤 사람들은 이런 반론을 펼지도 모릅니다. 간절하고 열심있는 마음으로 큰 수고를 한다면, 자기들이 하는 일에 의지하는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의무를 해놓고 그것을 의의 공로로 삼을까 두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답  변]

보편적으로 구원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게으르고 둔한 사람처럼 자기들이 하는 일을 지나치게 의뢰하지 않습니다. 물론 철저하게 겸손하지 않으면서도 구원을 추구하는 것은 다 자신들의 의를 의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들의 의를 더욱 온전하게 의뢰합니다. 물론 자기들의 의를 ‘의뢰’한다면 언제까지나 그 의를 믿고 ‘잠잠하게’ 있지 않습니다.


자기 확신으로 크게 떠벌리는 사람들 (그러므로 그 자기 확신에서 온전히 벗어날 가장 많은 가능성이 있는 자들임)은 무책임하게도 구원의 길을 계속 진행해 나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은 가장 간절하고 철저한 열심을 가지고 그 일에 매진해야 합니다. 부분적으로 그에 대한 이유를 말씀드리면 그런 길에서는 양심이 더 예민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경험 방식으로 열쇠를 만들어서는 안돼

각성받은 양심은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의무를 행했다고 안심하고 있지를 못합니다. 우둔한 감각으로 구원을 추구하는 사람의 양심은 자기 자신들이 한 일이나 성취한 것에 크게 만족해하며 안주할 것입니다. 그러나 철저하게 각성받은 양심은 그런 것들로는 평안을 얻지 못하고 잠잠하게 있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나태하고 게으른 방식으로 구원을 추구하는 사람들보다 자신들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들의 마음을 더 잘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 훨씬 더 많은 체험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통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서 발견한 것이나 체험을 이용하여 자신을 의뢰하는 모든 믿음을 끊게 만드십니다. 그러나 구원을 가장 간절한 방식으로 추구하는 것만큼 자신들에 대한 지식을 빨리 가지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간절한 방식으로 원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들의 죄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게 되고, 자신들을 더 엄격하게 지켜보며 그 마음에 대해서 더 힘쓰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힘을 발휘하여 시도해 보지 않은 사람보다도 자신의 연약을 더 많이 체험합니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의로 돌아가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런 사람은 다른 어떤 곳에서도 안식을 찾지 못합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이 일에서 저 일로 방황하며, 자기의 불안한 양심을 안돈시킬 곳을 찾아다닙니다. 그는 이 피난처에서 저 피난처로 황급히 옮겨가며,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나아가며, 안식을 찾아 헤매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조만간 그는 어떤 피조물 속에서든지 안식을 발견할 수 없으며 믿을 것이 없음을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가질지 모르는 그 생각, 곧 많은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것을 더 의뢰하게 될 것이라는 관념은 아주 그릇된 것입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입니다. 많은 것을 추구하면 할수록 자기들의 행할 일을 덜 의지하게 될 것이고, 조만간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종교적인 의무든지 공의와 사랑이라든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의무를 잘 감당하면 필경 자기들의 의를 의뢰하는 쪽으로 나가게 되고 말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의무를 게을리하는 사람들은 정말 그 유익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간절하게 구원을 추구할 때 자기들이 한 수고를 의뢰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공통됩니다. 그 점은 아주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보통보다 더 느슨한 방식으로 나가는 사람들은, 열심을 다해 하나님의 나라로 침입하여 들어가고 있는 사람들보다도, 자기들의 우둔한 봉사들을 완전한 것으로 더욱 의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종교에 나태한 것과, 자기 자신들의 의를 의뢰하는 것과는 아주 깊은 연관이 있어서 상호간에 그 도를 더해줍니다. 자기들이 행한 것과 자기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의뢰하는 것이야말로, 그들로 하여금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주저않게 만들며, 자기들을 일으켜 앞으로 나아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반면에. 그들의 나태함은 무감각을 부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에 대해 무지한 나머지 가장 비참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어리석게도 충분한 것으로 만족하며 안주합니다. 그런 방식에 길들여진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깨우치시는데 더욱 철저한 방법을 쓰실 것입니다. 그들을 깨우치사 간절한 마음을 갖게 하려면 그들의 옛 기초를 깡그리 흔들어 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옛 처소에서 빠져 나오도록 합니다. 그럴 때 그들은 이전에 자기들을 안전하게 지켜준다고 생각하던 것들에 대해 이제는 마음을 바꿀 것입니다.


3. 그 나라로 침입하는 몇 가지 방안

저는 이제 하나님의 나라로 침입하는 몇 가지 효과적인 방안을 제시하려 합니다.


① 여러분의 영혼의 영원한 이익을 위해 필요하다면 ‘모든 것’을 회생시키십시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 열중하십시오. 여러분이 그처럼 열중하게 되면 그 일에 모든 다른 것을 복종시키게 될 것입니다. 그 정도로 열심을 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여러분의 결심 앞에 그 어느 것도 서지 못하게 하십시오. 어떤 이유에서든지 여러분이  늘상 편리하고 바람직한 일로 여겨왔던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그 큰일을 가로막는 것이라면, 주저말고 밀쳐놓으십시오. 그것이 그 일에 방해가 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면 아주 관계를 끊어 버리십시오. 더 이상 그것으로부터 어떤 것을 얻으리라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만일 과거에 세상적인 유익을 얻기 위해 종교적 의무를 철저하게 감당하지 않고 사업에만 몰두하였다면 세상적으로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방향을 바꾸십시오. 아니면, 여러분에게 올무가 되어왔고 어떤 방식으로든지 이 큰 일에 방해 끼칠 것 같은 무리들과 이제까지 교제했다면, 그 옛친구들로부터 비난을 받거나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 할지라도 그들과의 교제를 끊어 버리십시오. 구원을 추구하는 여러분의 길을 막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여러분의 영혼의 유익을 위해 모두다 한꺼번에 희생시키십시오.


그것이 어떤 은밀하게 애호하는 쾌락이든지, 아니면 강한 육신의 소욕이든지, 사회적으로 명예와 신용을 얻는 것이든지 또한 여러분이 높이 평가했던 그 무엇이든지 간에 그 모든 것을 희생시켜 버리십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위험을 초래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해야합니다. 여러분이 그 친구들로부터 괴이하고 이상한 자로 여김을 받으며 그들의 눈에 멸시어린 존재가 된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 어는 것도 구원을 추구하는 일과 경쟁을 벌이지 못하게 하시고, 오히려 구원의 문제에 앞에 모든 것을 부복하게 만드십시오.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십시오. 아끼지 말고 십자가에 못박으십시오.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도 마십시오.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 5:24)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세상적인 즐거움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구원만이 오직 여러분의 관심이 되게 하십시오. 분명히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저하는 일도 바로 그것입니다. 구원을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하는 것은 극복하기 어려운 거침입니다.


줄은 내가 서지만 입장 순서는 하나님의 주권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고 감명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로 침노하여 들어갔습니다. 헤롯은 그의 설교로 큰 번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요한의 말을 듣고 많은 일은 했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사랑하는 헤로디아와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바로 거기에서 머뭇거렸습니다. 그는 바로 그 요구에 자신을 복종시킬 마음이 없었습니다(막6:18-20).


부자는 구원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따라서 많은 방면에서 그는 엄격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네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런 다음에 나를 좇으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 그는 그 마음으로 주님의 요구에 찬동할 수 없어서 슬퍼하면서 돌아갔습니다.


그는 대단히 많은 소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재산을 크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것과 관계를 끊을 수 없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자기 재산의 상당 부분만을 포기하라고 그에게 말씀하셨다면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 재산의 절반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셨다면 그 요청에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내던지라고 지시하셨을 때 그 제안에 매달려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문이 좁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려고 애를 쓰다가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대해 큰 생각을 가지고 그 구원을 소유하기 원하여 시간을 떼어 할애합니다. 그러나 필요한 방편들에 응하지 않습니다.


②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십시오.

다시 말하면 여러분이 한 일을 그만 생각하고, 온전히 여러분이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마음을 쓰십시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뒤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죄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보라. 네 행한 바를 알 것이니라.”(렘 2:23)라고 선지자는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신앙적인 면에서 해 놓은 일이 얼마나 곤고한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종교적인 마땅한 의무를 행하는 데 얼마나 부족했던지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또 여러분의 직무가 얼마나 더럽혀졌는가도 생각해 봐야 하며, 하나님께서 그 일들로 말미암아 여러분을 받지 않으시고 또한 싫어하시는 것이 얼마나 정당한지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구원을 위해 자신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를 흐뭇하게 생각하느라고 뒤를 돌아보며 시간을 헛되게 보내지는 말아야 합니다. 자기들이 얼마나 큰 수고를 했으며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얼마나 어떻게 했는지를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얼마나 더 할 수 있는가는 생각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이 구원을 얼마나 오랫동안 추구해 왔으며,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들이 더 많은 일들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마땅히 베풀어 주셔야 하는 긍휼을 베풀지 않으셨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오히려 자기들의 울부짖음에 하나님께서 귀를 막으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낙담하여 하나님께 불만을 가집니다.


여러분은 지나간 과거의 일에 시간을 보내지 마십시오. 앞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이 앞에 있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 여러분에게 하라고 명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십시오.


사도는 빌립보서 3장에서 자기가 유대인으로 있을 때 어떤 일을 했는지, 누가 자랑할 수 있다면 자기도 자랑할 만한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말합니다. 그러나 자기는 그런 것들과, 뒤에 있는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고 앞의 것을 향해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 푯대를 향하여 좇아간다고 했습니다. 


③ 끝까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마음을 철저하게 가지도록’ 애를 쓰십시오.

간절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렇게 마음을 먹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잠시 동안은 크게 감동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금방 다 사라져 버리고, 더 이상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철저하게 자원하는 심정으로, 있는 힘을 다해 구원을 추구하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일생 동안 그런 마음을 먹는 것이 지나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를 위해 두 가지 충고를 드리겠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언제라도 여러분에게 긍휼을 베푸시려 한다면, 그 ‘때’에 관한 하나님의 주권을 사용하실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금방 긍휼을 베풀어 주시고, 또 다른 사람의 경우에는 오랫동안 그 긍휼을 구하도록 미루어 두십니다. 만일 다른 사람은 금방 빛을 받아 위로를 얻는데 여러분이 어둠 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다면 기다리는 도리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의도대로 하실 것이므로 여러분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간절하게 힘을 써 투쟁하면서 하나님의 때에 이르기까지 기다리는 것을 만족하게 여겨야 합니다. 만일 그것을 싫어한다면, 도중에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후에 여러분 자신이 중도에 포기하게 된 것을 알고 그 처방책이 없는 것을 알 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얼마나 원망하겠습니까. 끝까지 견디는 인내심이 부족하고 끝까지 애를 쓰는 수고를 싫어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구원의 큰 가능성을 놓쳐버린 데 대해 얼마나 자신을 원망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빠른 시간 내에 긍휼을 베푸시면서도 자기에게는 그런 긍휼을 베풀지 않으셔서 그렇게 오랫동안 구원을 추구하는 일을 참아낼 수 없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여러분의 양심 앞에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의 경우에 몇 날, 혹은 몇 시간 동안 구원을 간절히 구하니 금방 그 은혜의 증거를 주셨다 할지라도, 여러분의 경우에는 여러 해 동안 힘을 써 그 구원을 구할 필요가 있었음이 드러난다면 여러분의 입장을 어떤 방식으로 바꿔 놓겠습니까?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으로 말미암아 비교적 작은 수고를 가지고도 다른 사람들이 구원을 얻었다는 이유 때문에 구원을 위해 큰 수고를 기울이는 것이 그렇게 가치없는 일입니까? 만일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비교적 쉽게 회심하는 은혜를 얻었고, 다른 사람은 여러 해 동안 그 구원을 위해 최대한으로 간절함 힘을 기울여 그 구원을 얻었다면, 두 사람 다 구원을 얻었으니 결국 그 차이는 적습니다.


규모에 있어서 한 사람이 구원을 위해 드린 모든 ‘수고’와 고통과 오래 계속되는 어려움과 투쟁을 모두 다 합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얼마나 적은 손해밖에 되지 않습니까, 또한 다른 사람이 비교적 쉽게 구원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 용이함이 그 사람에게 얼마나 보탬이 되겠습니까. 구원받은 무한한 은혜에 비추어 본다면 이익이나 손해본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실로, 만일 여러분이 천 년을 살며 그 기간동안 하루같이 큰 간절함을 가지고 애를 쓰고 분투했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은 받은 은혜의 중요성에 비추어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일단 영원한 영광을 누려보고, 여러분이 피한 그 비참이 무엇인지 알게되면 그 모든 것이 틀림없이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드린 수고나 시간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계속 전진해 나가야 합니다. 있는 힘을 다해서 끝까지 버텨야 하며, 여러분이 그 모든 것을 이루어 냈을 때 그것에 대해 계산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구원을 추구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언제라도 당신의 때에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만 하면 그 외에 다른 어떤 것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그 모든 것을 다해 놓고도 하나님께서 마땅히 여러분에게 긍휼을 베푸셔야 할 당위성에 있는 것은 아님을 인식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이 지겨운 싸움


둘째,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겪어야 할 어려움을 철저하게 재어보려고 애를 쓰고 구원을 구하는 데 있어서 참는 것의 ‘대가를 계산’하도록 노력해 보십시오. 지금 일을 시작하고 있는 여러분께(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최근에 그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심령을 깨우치사 그 일을 시작하도록 하신 것을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찬미하나이다!) 바로 이 방향에 대해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해 드립니다.  여러분이 바로 이 일을 감당하려면 여러분의 남은 여생 전부를 드려야 된다는 생각을 가져야지 그저 일부분만 드려서 해내겠다고는 생각지 마십시오. 그 일을 해내는데 있어서 일생 동안 많고 큰 어려운 문제들을 감당하겠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속으로 짧은 시간 안에 얻게 될 것 같으면 그 일을 시작하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성령께서 부어주는 바로 이 시기 안에 그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것을 스스로에게 약속하거나, 어떤 다른 주어진 제한적인 시간 내에 그런 일이 여러분에게 일어날 것이라고 스스로 약속하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시작할 때는 (매우 간절히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주 오랫동안 그 일을 추구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위해 스스로 준비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막상 그 일이 생각한 것과 다르고 예기치 못한 어려움을 만나게 될 때는 무방비 상태가 되어 쉽게 넘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구원을 구하고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어떤 생각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는 바입니다. 오히려 참아내기 어려운 것들을 생각하고 그러한 난관들을 이겨내겠다고 마음먹으며,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해내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자, 지금 미리 생각하십시오. 여러 해 동안 구원을 추구하기 위해 온갖 노력과 최선의 열심을 다 드려도 구원에 이르렀다는 위로받을 만한 기쁨을 전혀 얻지 못하게 되면 그것이 얼마나 지루한 일인가를 생각하십시오. 아마 그 일을 해 나가면서 절망에 이르게 하는 큰 시험이 얼마나 많을까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더 이상 구원을 구하기 위해 나아가는 것은 쓸모없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실 의향이 전혀 없기 때문에 은혜는 베풀지 않으셨다’라는 이러한 논리에 빠지기 쉽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십시오. 


여러분 스스로 다음과 같이 생각할 가능성이 얼마나 많은가도 생각하십시오. ‘나는 얼마나 불안한 삶을 살고 있는가! 저 세상에 속한 일들에 대한 생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얼마나 많이 괴로워하며, 얼마나 많은 시간을 유쾌하지 못하게 보내고 있는가! 저들은 평안히 자기들의 세상적인 즐거움 속에서 위안을 받고 있는데 말이다’ 라고 말입니다.


또한 여러분보다 훨씬 늦게 하나님 나라를 구하기 시작했던 다른 사람들이 적은 수고와 짧은 각성 기간 뒤에 금방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고 느끼면서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날이 지나고 해가 거듭되어도 헛수고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경우에 여러분이 얼마나 쉽게 시험을 받을 것인지도 생각하십시오. 자, 그러한 시험들을 지금 대비하십시오. 그러한 시련들과 난제들에 직면했을 때 어떤 이상한 일을 당하는 것처럼 생각지 않기 위해서 그 시련들과 난제들을 미리 염두에 두십시오.


이제까지 말씀드린 것을 주목해 온 사람들은 이제는 본문의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 어느 정도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로 침입해 들어가기 위해 어떤 방식을 따라야 하는지도 지금쯤은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제가 방안으로 말씀드린 것에 부합하게 행동하도록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곧 여러분이 여전히 앉아 있으면 여러분은 죽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뒤로 물러가면 죽게 될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반대로 여러분이 앞으로 나아간다면 살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없어 그리스도 밖에 있는 동안에 사람이 행한 어떤 일에도 매이지 않으시는 분이지만, 이러한 권고에 귀를 기울이는 길에서 여러분이 살 큰 개연성이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 계속 참아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결국 하나님의 나라로 침노하므로 차지하게 될 개연성도 큽니다. 주어진 방안에 귀를 기울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어린 도우심을 통해 그 방안들에 따라서 실제로 행해나가는 여러분들은 아마 그러한 모든 어려운 것들을 이겨낼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옵기는 이 사람들이 의의 두루마기를 입고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시온 산에서 어린 양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수고와 땀이 풍성하게 보상받고, 그러한 많은 고통을 겪고 그처럼 오랫동안 기다리면서 자신을 그렇게 많이 부인했던 것이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그 날에 말입니다. 이 자기 부인, 이 기다림은 그 때에 여러분의 눈에 아무것도 아니게 보일 것이고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이 소유하여 영원토록 누리게 될 그 영광을 일분만이라도 누리고 나면 여러분이 겪은 그 모든 수고가 다 삼켜져 버릴 것입니다.


④ 하나님의 성령을 부어주시는 이 현재의 시기를 잘 활용하십시오.

그 일이 어떤 일이든지 간에 신중하게 해 나간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여러 기회들을 포착하고 그것들을 잘 활용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영적으로 부유하고 싶으면 외면적인 번영을 추구할 때 그런 점에서 조심하듯이 여러분 영혼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도 신중해야 합니다.


동물들도 자기의 생존을 위해 기회를 신중히 살핍니다. 신중한 농부는 씨 부리는 때와 추수할 때를 잘 분별하여 활용합니다. 또한 하늘에서 주어지는 소낙비와 햇빛을 잘 이용합니다. 또한 신중한 상인은 자기의 기회들을 잘 분간할 것입니다. 시장이 서는 날에는 게으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자신을 부요케 할 기회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듯이 의의 열매와 지혜의 풍성을 간절히 추구하는 자들도 영적 부요와 행복을 위해서 주어지는 기회들을 잘 활용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지금 매우 주목할 만한 방식으로 우리 중에 당신의 성령을 부어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정말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릴지어다!). (이 설교를 할 당시 그가 목회하는 그 지역에 성령이 부어 주시는 놀라운 역사가 있었음을 독자들은 유념해야 할 것이다.- 역자주) 회심하는 은혜를 얻고 싶어 하고 천국에 가고 싶어하는 여러분들을 위해 바로 지금 이 기회들이 주어진 것입니다! 자, 만일 여러분이 자신의 구원에 대해 어떤 분별력을 가지고 지옥에 가고 싶지 않다면 바로 이 시기를 활용하십시오.


기회는 지금 그대 손 안에 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때입니다! 지금은 구원의 날입니다! 과거에 부르심을 받고도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랫동안 하나님의 명령과 권고를 듣지 않았던 여러분들이 오늘날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음성이 여러분을 부르고 있는 동안에 말입니다. 이와 같은 여러분의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활용할 마음만 가진다면 지금 여러분은 지혜를 얻기 위해서 특별하고 주목할 만한 값을 치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행사할 날들을 정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무섭게 임하셔서 그 진노를 퍼부으시는 어떤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 때는 당신의 분노를 집행하는 날입니다. 그 날을 가리켜 원수를 갚는 날이라고 하였습니다(잠 6:34). 그런 때는 하나님께서 죄 때문에 찾아오실 것입니다(출 32:34). 반면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조건적인 뜻으로 주목할 만한 긍휼을 베푸실 시기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와 인자하심을 다른 어느 때보다 더 행사하심으로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성경에서는 그러한 때를 가리켜 놀라운 날, 은혜받을 만한 때, 구원의 날, 하나님께서 권고하시는 날 등으로 일컬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긍휼의 방식으로 권고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눅 19:44) 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바로 지금 이 마을에 그러한 때가 찾아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권고하시는 날이 지금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 있으면서 은혜의 방편을 누리고 있는 한 우리는 은혜의 날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이런 때는 특별하고 특이한 방식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죄인들을 위해서 긍휼의 문을 열어 놓고 계십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특이한 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사야서 55장 6절에서는 주님을 만날 만한 때에 찾고,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만일 지금까지 그리스도가 없이 살아오던 여러분이 이상하게 마음이 요동되고 열중하게 된다면,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이와 같은 기회를 활용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늘이 여러분에게 가까이 있고 샘이 특이한 방식으로 우리 중에 열려 있는 바로 이런 때에 하나님 나라를 얻으십시오. 바로 지금이 여러분의 멸망하는 영혼이 긴급하게 필요로 하는 것들을 얻을 시기입니다!  바로 이 날은 하나님께서 우리 중에서 그처럼 자유롭고 풍성하게 죄인들을 다루시는 이 때에, 죽기 전에 회심할 마음을 가진 죄인들을 위해 이렇게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안식일마다 우리 속에서는 회심과 구원의 일이 진행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로 침노하여 들어가고 있습니다. 뒤에 처지지 마시고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나아가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깨우침을 받고 선한 열심을 갖게 되고, 침노하므로 천국을 차지하였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들과 함께 기업을 나누고 싶고 그들이 취함을 받는 그 큰 날에 버림당하지 않고 싶으면 그들의 본을 따르라고 여러분에게 간청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이 이 기회를 지금 잡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놀랍습니까!  여러분은 그 기회를 실제로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 기회가 지나가 버렸다면 그 기회를 다시 돌릴 힘이 여러분에게는 없습니다. 어떤 피조물의 능력으로도 그것을 다시 여러분에게 되돌아오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기회는 지나간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날에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오늘이라 일컫는 바로 이 날은 은혜받을 만한 때입니다! 그러한 때에 여러분은 그냥 가만히 앉아 있으렵니까? 추수 날에 여러분은 잠자코 있겠습니까? 게으른 손을 모으고 그저 뒤에 나태하게 머물러 있겠습니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주의 선하심을 바라고 쏟아져 나오고 있는 이 때에 그저 욕심에 빠지거나 사소한 문제거리로 마음을 쓰며 모른 체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아직도 뒤에 처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간절히 자신을 채찍질하지 아니 하시면 들어가는 수가 다 차게 될 때 뒤에 처지는 위험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시기가 다 끝나고 나서 뒤에 처져 남는다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이 공중에서 주를 만나기 위해 날갯짓하며 올라가는 바로 그 날에 뒤에 처져 있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위협받은 그대로 정말 무서운 일이 될 것입니다. 미리 위협된 그 모습 그대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특이한 방식으로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기회가, 지금 여러분을 감독하는 자로서,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여러분에게 파송된 자로서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을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뜻이요, 그리스도의 말씀에 부합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제가 말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음성으로 듣는 것은 그리스도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지금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나라로 침노하여 들어가라고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누구이든, 젊은이든, 노인이든, 큰 자든 작은 자든, 여러분이 큰 죄인이고 침륜에 빠졌던 자이며 성령을 소멸했던 자라면, 어떤 반론도 제기하지 말고 여러분 자신을 깨우쳐서 그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있는 힘을 다 해서 그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앞에서 부르고 계십니다. 그의 은혜와 영원한 은택을 베푸시고 계십니다. 진노가 여러분 뒤를 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생명을 위해서 날쌔게 뛰어나가되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마십시오!


저는 여기서 아직도 의의 길에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에게 몇 가지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I. 약간의 각성과 구원에 대한 관심을 조금 가진 분들에게 드리는 권고

어느 정도 각성받고 자기들의 구원에 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그러나 아직은 죄인일 수밖에 없는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기회를 가지고 있으니 기뻐해야 합니다. 그 기회를 정금보다 더 높일 이유가 있습니다. 그 기회를 아주 보배롭고 가치 있게 활용하도록 하기 위해 몇 가지 요점을 생각해 봅시다.


1. 하나님께서는 의심할 여지없이 지금 어떤 사람들에게 권하시는 은혜의 복락을 베푸실 의향을 갖고 계십니다. 이미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러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그 일을 다 마쳤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다른 사람이 흑암에서 벗어나 기이한 빛으로 옮겨지는 것을 우리는 족히 희망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오늘 오셔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나머지 사람들 중에서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매우 비상한 방식으로 우리 속에 임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은혜롭고 긍휼어린 계획을 이행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가련하기 짝이없는 비참한 영혼들을 멸망의 상태에서 구원해 내셔서 복된 상태로 영원한 영광으로 옮기실 계획을 수행해 나가고 계십니다! 이것이 이미 여러분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말씀과 여러 규례들을 통해서 언제나 그 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원하는 것과 애쓰는 것은 다르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각성하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의 특별한 감화로 말미암아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특별한 선물이 우리 중 많은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여러분들을 그냥 지나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여러분의 마음의 문에 오셔서 당신에게 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자신에게 주어진 이점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분별력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이 바로 여러분의 기회임을 알 것입니다.


3. 다른 때보다 그와 같은 때 회심케 하는 은혜를 얼마나 더 쉽게 얻을 수 있는지요! 하나님께는 그 모든 일이 항상 쉽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이러한 때에 훨씬 더 쉬워집니다.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권고하시는 날입니다. 말하자면 당신의 은혜를 보다 자유롭고 풍성하게 나누어 주기 위해서 정해 놓으신 날이라는 것입니다. 또는 하나님의 팔을 넓게 벌리고 있는 날입니다. 우리가 체험한 것이 그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시고, 합당한 죄에 대한 깨달음을 주시고,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도움을 주시며, 신적 빛에 들어가게 하실 더 큰 의향을 보이시는 것 같습니다. 또한 당신의 능력이 보다 더 영광스럽게 드러나도록 그의 일을 행해 나가시는 것 같습니다. 사단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굵은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사람들이 전에는 두려워 주저하던 그 어려운 난제들과 시험을 갈수록 쉽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더 빠르고 신속하게 이루어져 나가는 때는 흔히 갑작스런 회심이 일어납니다. 사도시대에 이제까지 있었던 그 어느 경우 보다 하나님의 성령을 가장 특이하게 부여주시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사도시대의 회개가 얼마나 신속하고 갑작스럽게 일어났는지요. 빌립도 감옥의 간수와 같은 경우에 이사야 66장 7절, 8절의 예언이 얼마나 풍성하게 성취되었습니까.


“시온은 구로하기 전에 생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자를 낳았으니, 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뇨.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순식간에 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구로하는 즉시에 그 자민을 순산하였도다.


하나님의 성령을 특이하게 부어주시는 때마다 어느 정도 그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한 효력이 분출되어 나오는 것에 비례하여 그러합니다. 다른 때에는 그렇게 신속한 회심이 일어나는 일이 드뭅니다. 사람들이 그러한 특이한 때처럼 여러 가지 시험과 얽매임에서 그렇게 금방 벗어나는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광야에서 더 오랫동안 방황하고 어둠 속에서 더 많은 시간을 더듬어 찾을 뿐입니다.


4. 그러나 아마 여기에 자기들의 구원에 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앞으로는 그러한 것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감동을 받고 깨우침을 받은 자들이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모두 다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지금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사람들 가운데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크게 부어주시던 과거에 한동안 자기들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느냐고 의문을 가졌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넘어지고 마음이 굳어져 그 전의 안일한 수법으로 돌아가 버리고 마는 일이 있었지 않습니까? 지금 깨우침을 받은 여러분 모두는 구원을 얻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지금처럼 감동하시는 때에는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갈 권리를 얻을 소망을 다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말하기가 두렵고 생각하기도 두렵지만) 여러분 중 몇 사람은 지옥에서 영원토록 불타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다 지옥을 무서워하고 있기에 지금은 그 지옥에서 건짐 받기 위해 수고를 다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이 불과 유황이 타는 불못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생각을 전혀 갖지 않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죄의 깨달음을 얻은 다음에 아주 짧은 시기에 쉽게 구원을 얻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사실 그들 가운데는 결코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자각을 곧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각성이 현재에는 매우 양호해 보이지만 그 각성을 끝까지 붙잡지 못하고, 매우 많은 난관들을 뚫고 계속 그 구원을 추구할 마음을 전혀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하늘을 향해서 발걸음을 떼어 놓기 시작하며 다른 사람들처럼 하나님나라를 얻을 소망을 똑같이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어떤 사람들은 지금과 같은 때에도 그 감동을 사그러뜨리고 나태함에 빠져 있습니다. 비록 현재에는 큰 열심을 낼지라도 시간이 흐를수록 나태해져 급기야는 그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죄에 대한 각성이 대단히 크게 보입니다. 그리고 그 각성을 일으키게 된 계기가 아주 새롭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기 시작함에 따라서 점차 그 각성의 활기가 사그러지고 나중에는 다 낡아빠져 버립니다. 여러분이 각성하게 된 경로를 살펴보면 어떤 사람의 회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거나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 중에 나타내시고 있는 것같은 특이한 섭리를 본 경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의 새로움과 신선함이 가면서 점점 줄어져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마음을 감동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죄에 대한 각성이 아주 없어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를 보다 더 풍성하게 베풀어 주시고 그 구원을 얻기에 더 큰 이점을 가지고 계시지만, 어떤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다른 때에 각성을 받을 경우보다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위험이 지금 더 클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보통 그러한 특이한 시기는 길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시기가 끝나면, 말하자면 수많은 커다란 무리들이 그 죄에 대한 깨달음을 아주 상실해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중에 그러한 복된 때를 허락하신 것을 아주 큰 복으로 말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더 비참한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그러한 때를 만나지 않았으면 더 나을 뻔하였습니다. 그런 경우를 전혀 보지 않았거나 아니면 그와 유사한 것을 전혀 겪어 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보다 심판날이 더 참기가 쉬울 것입니다.


나중에 위대한 심판장께서 바로 이 일에 대해 엄격하게 책임을 추궁하실 사람들이 여기에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은혜의 샘을 활짝 열어 놓았는데도 왜 그러한 기회를 더 낫게 활용하지 못했느냐”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추궁을 받을 자들이 여기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큰 소리로 불렀고 내 영으로 감동하여 깨우쳐 특별하게 너희에게 임하여 흔들어댔건만 어째서 너희는 그러한 기회를 더 낫게 활용하지 못하였느냐?” 그 때 재판장에게 보고할 좋은 자료를 전혀 갖지 못하고 입이 닫혀져 유구무언으로 서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여기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참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렇게 실패한 사람들 중에 들어있지 않기 위해, 또한 확실하게 상을 얻기까지 싸우고 달려갈 수 있기 위해서, 이 일에 매우 간절하고 결연한 자세를 보여야 합니다.


5. 하나님의 성령께서 특이하게 역사하는 때에 회심을 하지 않은 채 있는 사람들의 처지가 얼마나 서글픈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거듭나지 아니한 상태에 있는 자신의 조건이 얼마나 서글픈 것인지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보통 그들은 보다 더 비참한 조건에 자신들을 방치합니다. 그들은 무섭게 굳어진 마음의 상태로 떨어지게 되고, 죄책이 더 커지게 되며, 그들의 영혼은 더 무서운 사단의 지배 아래 있게 됩니다.


지옥에 있는 자에겐 영원히 기회가 없다


구원을 위해서 특이하게 은혜를 베푸시는 때가 지나고 나면, 그러한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고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그 특이한 시기로 인하여 자기들의 저주받은 상태를 고정시켜버리는 경우가 흔합니다. 그런 때에 그들이 회심하지 못했다면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그를 버려두십니다. 그들을 혹독한 심판 아래 내버려 두십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눅 19 : 41, 42).


6. 그러나 여러분이 이와 같은 때를 또 만나게 될지는 매우 불확실 합니다. 만일 그러한 때가 다시 온다 할지라도 그 때 살아 있을지도 확실치 않습니다. 그런 때가 다시 온다 할지라도 구원에 관해서 지금 관심을 가지는 많은 사람들이 그 때에는 무덤에 있을 것입니다. 그 때가 오기 전에 지옥에 있을 사람도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기회를 놓친다면 여러분에게 그런 일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그 시점에, 여러분이 전에 살던 곳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임하신다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겠느냐고 울부짖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지옥에 있는 여러분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무저갱 속에서 갇혀 울며 영원한 불 속에서 이를 갈고 있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령을 부어주시는 이 기회를 이용하십시오. 여러분이 지상에 있는 이 때에, 하나님의 성령이 이렇게 부어지는 곳에 살고 있는 이 때, 그 성령의 깨우치시는 감화를 얻고 있는 이 때에 그 기회를 이용하십시오. 그래야 지옥에서 울며 이를 갈지 않고 대신 영원토록 하늘에서 구속받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7. 만일 여러분이 또다시 그러한 때를 만나게 된다 할지라도 그 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불리한 조건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더 나이가 들어있을 것이고 마음이 더 굳어져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을 가능성이 더 작아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죄 속에서 너무나 강퍅하게 되고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어 지금과 같은 은혜를 베푸시는 때를 만나도 그렇게 큰 각성과 감동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지상에 있을 수는 있으나 거의 감동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복된 때가 다시 허락되고 살아있을 때 그 일을 만난다 할지라도, 여러분이 그와 같이 불리한 조건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경우에는 모든 가능성이 지금과는 전혀 다를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때까지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은혜 밖에서 계속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훨씬 더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고, 올무와 비참에 더 깊이 얽매여 있을 것입니다. 마귀는 여러분을 시험하고 혼란케 하는데 훨씬 더 큰 이점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8. 하나님께서는 크고 지독한 심판이 이르기 전에 선택한 백성들을 모으고 계시다는 것밖에 우리가 아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백성을 내몰아 그 무서운 멸망케 하는 심판을 받게 하시기 전에 선택한 백성들이 안전하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먼저 모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지 못하도록 쫓아 내시기전에 유대인들에게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첫 부분에서 읽는 바와 같이, 사도들과 전도자들의 전도를 통해서 성령을 부어주시고 선택한 백성들을 모으는 일이 선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끌어 모으는 일이 끝난 후에 나머지 사람들은 눈이 멀었고 마음이 굳어졌습니다. 복음이 그들에게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유대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하고 쫓겨났습니다. 그들의 도성과 땅이 가공할 방식으로 로마 사람들에 의해 훼파되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세대 동안 하나님에게 버림받았고 아직도 완고하고 배척받은 백성들로 남아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초두에서 우리가 보는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멸하시는 심판을 내리려 할 때는 먼저 그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십니다. 선택한 백성들의 마음에 인을 치셔서 구속의 날까지 인치시는 그의 성령의 구원하시는 감동과 내조하심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계 7 :1-3).


지금도 그러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이 땅을 버리시어 이 백성을 포기하시고 그들에게 무서운 심판을 내리려 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지금 당신의 선택한 백성들을 모으사 그 참화에서 그들을 보호하시려고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나라와 이 국가가 그러한 일에 대해 지금처럼 위협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 전개되고 있는 여러 국면들이 종교에 대해 지극히 치명적인 위협을 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종교의 기초가 되는 진리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런 경우라면, 하나님께서 우리 중에서 구속받을 자들을 끌어모으기 위해서 당신의 성령의 감동을 주고 계시는 동안에, 인도함을 받지 못하고 내버려 둠을 당하는 사람들의 경우가 얼마나 끔찍하겠습니까?


9. 만일 여러분이 지금 주어진 이 기회를 소홀히 하고 끝내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성령을 부어주시는 지금 회심한 자들이 심판날에 일어나 여러분을 고소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웃들과, 친척들과 친지들과, 동료들 중 회심한 자들이 그 날에 여러분을 쳐서 말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버려져 있는데 그들은 공중에서 주를 맞기 위해 기쁨으로 날개치며 올라갈 것입니다. 주님의 오른손에 영광스러운 성도들과 천사들을 대동하시고 오게 될 그 날에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마귀들과 함께 버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심판날에 일어나 여러분을 ‘대적하여’얼마나 무서운 송사를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서로 아무리 친하게 지냈으며 친밀한 대화를 나누었을지라도, 여러분 중에 회심한 자들은 그 때 분명히 여러분을 쳐서 말할 것입니다. 그들은 증인으로 일어나 여러분의 잘못한 것을 고발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보배로운 기회를 누렸으며, 그 기회를 어떻게 활용하지 못했으며, 계속해서 어떻게 불신앙적으로 살았으며, 구원의 선물이 특이한 방식으로 주어지고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라는 설득에 순복했을 때도 어떻게 그리스도를 배척했는지를 선언할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얼마나 나태하고 게을렀는지, 여러분의 살던 시절에 여러분의 평안에 속한 것들을 어떻게 알지 못하였는지를 선언할 것입니다.


갑작스런 죽음이 온다면 어떻게 하려고


그뿐만 아니라 위대한 재판장과 함께 그들이 여러분을 재판할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이 여러분을 쳐서 증거하기 위해 나타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선고를 내리는 일에 재판장과 함께 할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전 6:2)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과 함께 세상을 판단할 영예를 성도들에게 허락하실 것입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리라.”(계 3:21)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그리스도의 통치 보좌에 그리스도와 함께 앉을 것이며, 심판 보좌에도 함께 앉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심판받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재판장이 될 것이며 그와 같이 여러분을 정죄하는 데도 함께 할 것입니다.


10.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령을 부어주시는 이러한 시기의 끝까지 살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도중에 취하여 감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성령을 부어주시기 시작하는 초기에 취하여 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섭리로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것을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곧 최근에 마을에서 죽은 젊은 사람의 경우를 통해서 말입니다(조셉 클라크라는 사람의 아내로 최근에 결혼한 젊은 여자였는데 이 설교가 전해지기 바로 전 주에 갑자기 죽었다).


우리 중에 젊은 사람들이 거듭 죽는 일을 통해 최근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해서 매우 외경스럽게 계획하고 계십니다. 바로 이 사실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보다 더 서둘러 하나님 나라로 침입하여 들어가도록 촉구해 줍니다. 죽음이 언제 올지라도 안전할 수 있기 위해서 말입니다.


지금 이 시기는 복된 시기요, 복된 기회입니다  그러나 그 기회를 얼마나 누릴지 여러분은  모릅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보다 그 기회를 아주 적게 누릴 수도 있습니다. 갑작스런 죽음이 찾아와 여기 있는 영혼들이 그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 누리고 있는 모든 이점들을 다 빼앗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두르십시오. 당신의 생명을 위해 피하십시오. 한 순간도 지체한다면 그건 위험한 일입니다. 진노가 여러분을 추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수하시는 손이 회개하지 않는 모든 사람의 머리 위에 있습니다.


모두 각자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이 기회를 활용하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은 구원을 받고 영원한 영광의 후사가 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은 원죄와 사단의 가련한 노예로, 잃어버린 양으로 멸망하고, 불행한 피조물로 이 땅에 왔던 그 비참한 서글픈 상태에 그대로 남아있어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져서는 안됩니다.


또한 예레미야 17장 6절에서 말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해당되어서도 안 됩니다. 예레미야는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은 땅에 거하리라.” 라고 말하였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규례를 선용하지 못한다면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것처럼 이 후에 그것 때문에 슬퍼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것을 슬퍼하지 않으면, 영원한 비참 속에서 그것을 기어하면서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II. 아직도 각성하지 못한 분들에게 드리는 권고


저는 이제 아직까지도 각성받지 못한 분들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 우리 중에 아직도 안일한 상태에 빠져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저는 여기서 그러한 사람들에게 간절히 충고하는 바입니다.


1. 지금 말고 각성받고 감동을 받을 더 좋은 때가 있으리라고 기대 하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아직까지 그리스도가 안계십니다. 그러면서도 여러분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늘에 가고 싶어합니다. 그러므로 분명 여러분은 죽기 전에 회심하고자 하는 생각은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먼저 각성받고 영혼의 복락을 위해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하게 구하기까지는 그러한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언제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생각 속에서 그 일들을 어떻게 설계하며, 아니면 이 문제에 관해 어떠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까? 지금처럼 사람이 각성받기 좋을 때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안일한 자리에 있다가 뒤늦게 잠에서 깨어나,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으리까?’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봅니까!


그러나 여러분은 아직도 안일한 상태에 빠져있습니다! 둔하고 죽어있는 것과 같은 때에 더욱 쉽게 각성받게 될 것이라고 자신을 달래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각성을 받는 지금 나는 아직 느끼지를 못하고 있지만은 다른 사람들이 느낌이 없을 때 각성받으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안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 후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또 부어 주시리라고 기대하십니까? 하나님은 그 때가 되면 복음의 외침들과 모든 은혜의 방편들을 더 이상 거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까? 그 때가 되면 여러분이 하나님을 더욱더 격동시키고 여러분의 죄와 그 죄책이 훨씬 더 커지기 때문에 그 때 지금보다도 하나님의 성령의 필요한 감화를 하나님께서 더 주실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과 같은 은혜의 때를 끝까지 저항하며 버텨나가는 것이 특이하게 각성시키는 방편을 거스리는 증거가 되는데 그것이 여러분에게 어떤 유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이후에 성령의 구원하시는 역사를 위한 좋은 준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2. 여러분은 무슨 방도로 각성받기를 기대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무서운 사실들을 인식시켜 주시되, 말씀을 전파하는 자들이 할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이 방식으로 제시하여 주셨습니다. 아직까지 자신의 처지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주어진 엄숙하고 특별한 경고를 여러분이 자주 받았으며, 때에 따라서 지금도 계속 그 경고를 받고 있습니다.


무서운 섭리에 의해 여러분은 깨우침을 받기를 기대하십니까? 여러분은 최근에 정말 사람들로 하여금 각성받게 하는 일들을 연달아 만났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통해서 감동받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는 최근에 거듭해서 그러한 경우들을 봤습니다. 노인이나 젊은 사람들이 죽는 일들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올해는 꽃봉오리 같은 나이에 있는 젊은 사람들의 죽음으로 특이하게 기억될 해입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매우 갑작스러운 죽음을 만났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회심을 통해서 감동받기를 원하십니까? 지금처럼 사람들을 더 크게 분발시키는 일을 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최근에 빈번하게 일어난 여러 사건들 속에서 이 점에 대해서 여러분은 시험을 받았습니다.


비싼 값을 헛되어 버리지 말라


그러나 아직까지 여러분은 그 분발케 하시는 하나님의 감화를 거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보편적으로 부어주시는 일과, 모든 유의 사람들이 구원에 관하여 관심을 두고 있는지를 보아야 여러분이 감동받겠습니까? 사실 지금 여러분이 그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효과도 없습니다.


아니 여러분은 이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엄숙한 경고와, 죽음이라는 외경스로운 여러 사건들과, 다른 사람들의 회심, 그리고 구원에 관한 보편적인 관심들을 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을 다 보고도 여러분은 자신의 비참한, 그러나 불멸하며 보배로운 영혼에 관하여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무슨 방도로 각성받기를 기대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각성받고 있는 사람이라 해도 어떤 사람들은 결코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하물며 지금 각성받지 않은 채 어리석은 자리에 그냥 머물러 있는 여러분이 결코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얼마나 분명하겠습니까. 이와 같은 때에 감동을 받지 못하는 자들이 성인의 나이에 이르게 되면 법정적인 심판에 버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인지 두려워해야 할 이유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결론’내릴 이유가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럴 위험성에 대해 두려워할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셔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문을 두드리시는데, 하필이면 여러분의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는 사실이야말로 여러분에게 얼마나 어두운 조짐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중에 당신의 성령을 그처럼 보편적으로 주셔서 분발시키시는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여전히 지각없는 상태에 남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걱정스러운 일입니까?


3. 그러한 감화를 받지 않고도 구원을 얻으리라 생각하십니까? 구원을 얻기 위해서 구원을 구할 필요성이 있음을 인식하고, 그것을 구할 의향을 가진다면, 여러분이 이와 같은 때에 주어지는 감화를 피할 수 없다고 누구나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항상 안일한 자세로 게으르고 무분별하며 방종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하늘에 갈 의향을 가지고 있는지 자신을 잘 탐문해 보십시오.


4. 아니면, 여러분은 지옥의 저주를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삼키는 불과 영원히 태우는 불을 참아낼 수 있다고 상상하십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띠를 두르사 진노로 옷을 입으실 때 그분의 원수 갚으시는 것에 대적하여 싸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까? 하나님을 거스려 자신을 무장시키고 그와 힘을 겨룰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도는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고전 10:22)라고 반문하였습니다.

마귀와 그 악한 술사들을 위해 예비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속에서 자신의 영을 지탱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 달래고 계십니까? “내가 네게 보응하는 날에 네 마음이 견디겠느냐. 네 손이 힘이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룰지라.”(겔 22:14)라는 경고의 말씀을 듣고도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심판날에 무관심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III. 여러 해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거듭나지 못한 분들에게 드리는 권고


저는 이제 상당히 여러 해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 있는 분들을 향하여 말씀드립니다. 저는 지금 이 특이한 기회를 선용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침노해 들어가라고 간절히 여러분에게 권고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전에 여러분이 가졌던 많은 이점들을 놓쳤기에, 다른 사람들이 가진 바로 그 이점을 여러분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입장이 많은 이웃들의 입장과 전혀 다릅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은 그러한 기회를 선용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제 지금 여러분 자신을 깨우쳐 하나님의 나라를 취하십시오! 다음과 같은 요점들을 생각하고서 말입니다.


1. 지금은 나이든 죄인들에게 문이 활짝 열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모든 유의 사람들에게 은혜를 값없이 베푸시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의 손이 넓게 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전에 하시는 대로 노인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더 젊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유리한 입장에 처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놀랍게 섭리하사 노인들도 그 이점에서 부족함이 없도록 하셨습니다. 죄 가운데 오랫동안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새롭고 특이한 이점을 여러분의 손에 넣어 주셨습니다.


오! 지혜를 얻기 위해서 여러분이 가진 이 값을 선용하십시오. 오랫동안 좁은 문에 들어가기를 애써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문 밖에 있었던 여러분에게 지금이야말로 좋은 기회니 그리로 침노하여 들어가십시오. 오랫동안 광야에서 여러 시험들과 싸우며, 낙담케 하는 여러 가지 조건들 아래서 포기하고 싶었고 수없이 절망에 빠졌었지만,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열어 놓으신 문을 보고 있습니다.


왜 지레 절망하십니까? 지금은 절망할 때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한 일이 무엇이며,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느라고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구원에 대해 회의를 품거나 마음을 연약하게 하는 여러 가지 시험들에 자신을 내어주느라고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방식으로 이 보배로운 기회를 낭비하지 마십시오.


그와 같은 일에 떼어 줄 시간이 여러분에게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다른 것을 향하도록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이 시간을 선용하여 구원을 추구하고 그 구원을 위해서 싸우십시오. 그 구원을 방해하는 일들에는 시간을 쓰지 마십시오. 지금은 마귀와 노닥거리고 있을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크게 불러 외치며 하라고 하시는 일에 자신을 드리십시오.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들은 이미 놓쳐버린 기회를 안타까워합니다. 특별히 젊은 날의 사간을 놓쳐버린 것을 서글퍼합니다. 다시 그처럼 좋은 기회가 왔으면 하고 바라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오! 만일 내가 다시 젊어진다면 그러한 이점을 잘 선용할 텐데.”라고 말할 것입니다. 과거에 여러분이 가졌던 그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것을 다시 오게 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은 중죄인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


그러나 하나님께서 또 다른 이점을 여러분에게 줄 수 있습니다. 매우 큰 이점을 말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지금 그런 일을 하고 계십니다. 지금 여러분의 손에 새로운 기회를 쥐어 주고 계십니다. 전에 가졌던 것이나 여러분이 상실했던 것과 똑같은 종류는 아니라 할지라도 어떤 방면에서 대단히 큰 기회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과거의 기회들을 소홀히 하여 잃어버린 자신의 어리석음을 슬퍼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에게 주시는 기회를 태만히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그것을 위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드린다 해도 이런 기회는 결코 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손에 그 기회를 쥐어주시되, 하나님의 주권적인 긍휼로 값없이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 기회를 얻었으면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2. 이런 노인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의 경우보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가 될 가능성이 훨씬 더 많습니다. 회개치 않는 죄인들에게 구원의 특별한 선물을 주시는 마지막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창 6 : 3)라는 말씀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사람들의 마음 문을 계속 두드리십니다. 그러나 ‘마지막’ 두드리심이 있을 것입니다. 다시는 더 이상 누리지 못할 ‘마지막’부르심이 있을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의 마지막 부르심은 가장 큰 소리로 외쳐집니다. 그 때 만일 죄인들이 그 부르심을 듣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끝내 그들을 버리십니다.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오랫동안 살아왔던 많은 사람들의 문들을 얼마나 오랫동안 두드리고 계셨습니까! 이것이 이제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두드리시는 것이 될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여러분은 과거에 하나님의 성령을 거스렸습니다. 거듭해서 여러분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언제나 그런 식으로 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오랜 세월이 지나간 지금, 여러분이 듣지 않는다면 아주 여러분을 버리사, 여러분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실 위험이 있습니다. 


바로 이곳에 계신 노인들 중에 선택받은 사람이 단 한 사람만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섭리로 그 사람을 지금 인도하여 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스토다드(Stoddard) 목사님의 목양을 받으며 오랫동안 살아온 어떤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아주 버리지 아니하신 자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스토다드 목사님의 목양 아래서 누렸던 그 큰 방편 아래 있으면서도 완고하게 지금까지 왔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지금 그들 가운데서 남은 자를 인도하시기 원합니다. 그러나 그처럼 특이한 방편을 오랫동안 누렸던 자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상관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령을 이 마을에 부어주시는 경우를 여러 번 만났었습니다. 그 때 다른 사람들은 은혜로 취함을 입었고 여러분은 남아 있었습니다. 그 때 다른 사람들은 어둠에서 불러내심을 받아 귀한 빛으로 들어가 영광스럽고 복된 상태로 들어갔는데도 여러분은 그 좋은 일이 있을 때에 아무 유익을 얻지 못했습니다. 만일 이번의 기회도 계속 거부하여 뒤에 남아 있다면 여러분의 상황은 얼마나 어둡겠습니까! 여러분이 히브리서 6장 7, 8절에서 언급하는 자들과 같지 않은지 주목하십시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살음이 되리라” (히 6 :7, 8).


우리는 그러한 유의 땅이 있음을 압니다. 소낙비가 더 많이 쏟아지고 풍요의 계절이 다가오면서 찔레와 다른 쓰잘데 없는 해로운 식물들이 깊이 뿌리를 박고 번성하게 되는 그런 땅이 있음을 압니다. 그런 땅에 대해서 사도는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살음이 되리라”라고 말합니다. 농부는 그 땅에 불을 놓아 거기서 자라는 풀들을 태워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기회를 놓친다면 여러분이 완전히 버림을 받아 결국 불살음을 당할 위험이 있습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여러분이 저주함에서 아주 가까이 있지 않나 하는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이미 죄 가운데서 오랫동안 살아오다 지금 각성을 받았는데, 그 죄에 대한 각성이 사그러들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다고 합시다. 그것이 언제라도 여러분은 제게서 들은 것을 기억하시고 그것으로 마음을 분발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IV. 죄에 대한 특별한 각성을 처음으로 하게 된 젊은이들에게 드리는 권고


이제 저는 나이가 젊고 특별한 죄에 대한 각성을 처음으로 하게 된 분들을 향해 말씀드립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이 기회를 선용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침입하여 들어가라고 간절히 부탁하는 바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사항을 생각해 봅시다.


1.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에게 집중되어 있는 모든 방식의 이점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누구나가 큰 유익을 얻을 때입니다. 그러나 젊은 여러분들의 이점은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더 큽니다. 지금 여러분처럼 크고 복된 기회를 가진 사람들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곳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화된 큰 이점을 누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하나님의 성령을 특이하게 부어 주시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큰 이점, 특별히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성령의 각성시키는 감화를 받지 않았습니까? 그 외에도 여러분은 젊다는 점에서 특히 유리합니다. 이에 덧붙여서 또 다른 말로 할 수 없는 유리한 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여러분이 처음으로 죄에 대한 깨달음을 지금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에 자기 마음을 강퍅하게 한 적이 없고 침륜에 빠져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거스린 적도 없으면서도 지금 하나님의 성령의 깨우치시는 감동을 갖고 있다면 그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철저하게 그 기회들을 사용할 수 잇도록 그를 조정하시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보다도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가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어떤 유의 사람들보다도 그런 사람들에게 구원하시는 은혜와 성령의 위로를 베푸시되 말하자면 용이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베푸시곤 하십니다. 빠르고 갑작스런 회심이 일어나는 경우를 살펴보면 거의 그러한 사람들 중에 일어난 경우입니다. 자기들 손에 쥐어져 있는 그 기회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가를 알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성령을 모시고 있으면서 그 성령을 소멸치 않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가나안 지척에서 되돌아서지 말라


만일 여러분이 구원의 필요성을 의식하고, 그것이 참으로 가치있고 귀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얻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식을 취하려고 할 것입니다. 아니면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을 택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처음으로 죄에 대한 각성을 받은 이 기회를 철저하게 선용하려고 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적어질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성공할 가장 큰 가능성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영생을 얻을 기회를 손에 쥐고 있다는 것은 정말 얼마나 가치있는 일입니까.


하나님의 성령을 부어주시는 지금과 같은 때야말로, 각성을 받고 있는 여러분들 중 많은 사람들이 철들고 나서 처음으로 목격하는 경우입니다. 그 때문에 여러분은 지금까지 가졌던 기회 중에서 가장 큰 기회를 만나고 있는 것이며, 아마 앞으로도 이보다 더 큰 기회를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 있는 분 가운데 그런 기회를 가졌으면 하고 희망하는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그러나 그 많은 분들이 모두 그 기회를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돈 주고 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기회를 여러분은 소유하고, 원하기만 하면 그것을 선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생각해야 할 요점이 남아 있습니다.


2. 어떤 몇 가지 이유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보다 여러분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죄에 대한 각성을 철저하게 잘 활용하여 끝까지 잘 참아내는 면에서 실패할 위험이 더 큽니다. 젊은 사람들은 나이든 사람들보다 견고성이 적습니다. 전에 죄에 대한 각성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몰두했던 일의 어려움을 덜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구원을 쉽게 얻으려는 경향이 크며, 또 여러 가지 낙담케 하는 난제들을 만나면 쉽게 좌절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침륜에 빠지게 하는 여러 가지 시험에 대항하여 자신들을 온전히 방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여러분은 지금 더욱더 힘써야 합니다.


모든 수단을 강구해서 구원을 얻는 오직 그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십시오! 구원을 얻기 위해 철저하게 일하는 것을 최우선에 놓으십시오. 구원을 얻기 위해 애를 쓰다가 여러 번 중단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을 훨씬 더 불리한 위치에 놓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자기들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주고, 많은 올무에 자신들을 얽어맵니다.


그러한 많은 난제들을 만나서 어둠과 답답함 속에서 오랫동안 애써 왔던 사람들, 한동안 죄에 대한 각성을 가지고 있다가 그 감동을 소멸시키고, 그러다간 또 다시 시작하고, 조금 있다 다시 뒤로 물러가는 그런 일들을 계속 반복했던 자들이 누구입니까? 광야에서 40년 동안 헤매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그들은 용기가 생기면 자기들이 처음 시작했던 대로 계속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확정된 마음이 없었기에 다시 애굽으로 되돌아가려고 하곤 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시는 대로 용기를 가지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면, 그들은 금방 가나안 땅을 차지했을 것입니다. 가나안 근방까지 갔다가 그들은 되돌아 나왔습니다. 그런 후 광야 생활을 청산하기까지 38년이라는 기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영혼의 유익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면 요동하는 마음으로 중도에 포기했다가 다시 시작하거나, 혹은 뒤로 물러가는 등의 일로 그 같은 어려움에 자신을 빠뜨리지 마십시오. 이제부터 계속 앞으로 밀고 나아가십시오. 그 일이 아무리 크고 어렵고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할지라도 회개케 하고 용서하는 은혜를 얻는 그 일 한 가지만을 생각하고 나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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