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에 관한 책들을 여러 권 살펴보았다.
요즘 나오는 배려에 관한 책들은 'give and take'의 개념으로 배려를 정의하고 그것을 이용하고 있다. 그래도 18세기에는 본성적인 양심의 능력을 믿고 진실한 배려를 인간이 할 수 있다고 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21세기인은 그것이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서인지, 대놓고, 배려를 이기적인 동기로 오용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주고받기'개념으로 배려를 고려하는 사람은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의 구조는 '주는 영역이 작고, 받는 영역이 크기' 때문에 줄 때는 조금 주고, 받을 때는 많이 받으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는 갈등이 일어난다.
배려의 관한 책들은 그래서 한결같이 이것을 조심하라고 한다. 인간의 마음의 구조를 염두라는 것이다. 그것을 깨달으면, 줄 때는 많이 주고받을 때는 조금만 받으라고 한다. 그러면 그에게 사람들이 모인다고 한다. 이것을 그들은 '인맥'이라고 정의했다. 그렇지 않고 조금 주고 많이 받으려고만 하면 사람들이 그들 주위로 모이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인사가 만사란 말이 있듯이, 세상의 일은 사람의 일이기 때문에, 인맥이 성공과 실패를 좌우한다고 한다. 따라서 인맥을 잘 관리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인맥과 인기를 구별하라고 한다. 인기를 얻기 보다는 인맥을 얻어야 한다고 그들은 충고한다. 인맥이란, 이 사람과 있으면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각인시킬 때 나타난다. 반면에 인기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기란, 그가 좋은 행동을 하고 인간미가 있거나, 잘 생기기고 재미있는 사람일 때 생긴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직접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기에, 인기가 있다고 인맥을 얻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 구조를 이해하고 배려를 이용하여 인맥을 얻으면, 그것을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파동이 좋지 않은 사람과의 인맥을 끊으라고 한다. 부정적인 기운이 강한 사람과 함께 하면, 아무리 그것을 이기려고 해도 그들에게 물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란다. 파동이 좋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으면 좋은 인맥을 다 놓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런 인맥을 빨리 끊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좋은 인맥을 잘 관리해야 한다고 한다. 좋은 인맥이란, Bridge people이라고 한다. 인맥을 관리할 때는 먼저 브릿지 피플과 같은 다른 좋은 사람을 연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만나야 한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이 배려의 활용 기술은 어쨌든 그 실용적인 면에서 참고할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그들의 노골적인 주장이 18세기 도덕론자들 보다 어쩌면 더 현명해 보이기도 하다.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나는 세상의 배려와 <참된 미덕의 본질>에 나온 참된 미덕의 간극이 점점 더더더더더더~더더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체감했다. 이제 사람들은 대놓고 천박해져가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 시대의 참 성도는 상대적으로 더욱더 빛을 발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점점 더 어두워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즉. 현시대의 배려의 모습들이 이기적이고 실용적인 측면이 강하다면 우리(성도들)들은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하는 것이 좋을까?
-<참된 미덕의 본질>과 ‘배려'의 관계는 무엇인가?
세상 사람들의 배려와 참 성도들이 사용하는 배려의 의미는 많이 틀린 것 같다. 세월이 지나면서 배려의 의미도 점점 이기적인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내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18세기 도덕철학자들이다. 그들은 적어도 인간에게는 도덕감각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 도덕감각은 진리를 따를 수 있는 완전한 수준의 도덕적 능력이었다. 이것을 선천적으로 타고 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이 배려란 말을 사용할 때도 조금도 이기심이 없이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상 그런 능력은 전혀 없다.
이기심에서 출발하지 않는 도덕적 품성은 전혀 없다. 이것을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은 <참된 미덕의 본질>에서 인간의 도덕적 감각이 사적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배려를 포함한 도덕 감각이 전혀 이기적이 아니려면 공적이어야 한다. 즉 보편적이고 차별성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적 수준에서는 불가능하다. 아무리 뛰어난 성인군자라도 일반은총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그 일반은총도 아무리 그 범위를 넓혀도 사적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에드워즈 목사님은, 보편적이고 공적인 덕은 성령의 조명과 내주를 받은 성도만이 발휘할 수 있다고 하셨다. 이러한 덕을 소유한 사람은 보편존재에 대해 사랑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참된 미덕을 소유한 사람을 만족적으로 사랑하게 되어 있다.
물론 에드워즈 목사님은 <참된 미덕의 본질>에서 배려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배려’가 참된 미덕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참된 배려는 보편적인 존재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의 배려는 사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공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give and take식의 천박한 배려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내용이 <참된 미덕의 본질>에 전체적으로 내재되어 있다. 굳이 조금 더 관련된 장이라면 미덕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구별해 준 7장이다. 그리고 본성적인 양심과 도덕 감각을 다룬 5장도 참고할 만하다.
나는 이 시대 사람들이 말한 배려를 모두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먼저, 그들의 배려의 관점을 알아야 우리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할 수 있을 지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도 일반은총으로 맞는 말도 하기 때문이다. 가령 예를 들어 파동이 나쁜 사람과 함께 하지 말라는 말이 나에게 많이 와 닿는다. 또한 브릿지 피플 개념도 참고할 만 하다. 우리가 전도를 해도 택자 중에 브릿지 피플을 우선순위로 전도하면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교회도 브릿지 장소가 되는 곳에 있으면 더 효과적이라는 생각한다.
참고로 좀 더 실제로 배려의 차원을 본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한다. 뱀처럼 지혜롭게 인간관계를 맺고, 그들에게 이용당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간, 물질, 체력 등등은 하나님의 것이기에 그것을 이용당하면 죄를 짓는 것이고, 또한 나의 엉성함으로 인해 상대방이 나를 이용하게끔 기회를 주어 그에게 죄를 짓도록 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5리를 가면 10리를 가줄 수 있어야 하고,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대줄 수 있어야 하며, 겉옷을 달라면 속옷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