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WHO IS POPE?

천국 도서관장 2016. 1. 8. 18:17

교황의 정체

차례

 

들어가는 말

Ⅰ. 교황권의 의미

Ⅱ. 교황 수위(장)권 성립과정 및 비판

 1) 교황 수위권의 성립과정

  (1) 교황권이 발생한 계기-교회에 등급이 발생한 연유

  (2) 로마교회와 교황제의 기원

   ① 교황권의 토대를 놓은 레오 1세

   ② 교황권을 확립한 그레고리 1세

  (3) 교황이라는 칭호의 발달

   ① 교황(Pope)이라는 칭호를 거부한 그레고리 1세 

   ② 로마교회와 콘스틴티노플 교회의 교황권 다툼

   ③ 교황권은 예수님이 준 것이 아니라 인간이 준 것이다

 2) 교황 수위권 비판

  (1) 마태복음 6:16-18절 해석-반석의 의미

  (2) 마태복음 6:16-18절 해석-천국 열쇠의 의미

  (3) 베드로가 로마의 첫 번째 교황인가?

Ⅲ. 교황 무오성 성립과정 및 비판

 1) 교황 무오성이란?

 2) 교황 무오성의 성립과정

  (1) 소극적 교황 무오성

  (2) 적극적 교황 무오성

 3) 교황 무오성이 만든 폐단

 4) 교황 무오성 비판

  (1) 성경적 근거

  (2) 역사적 근거 1

  (3) 역사적 근거 2

   ① 마녀 재판 / ② 십자군 전쟁

   ③ 개신교 핍박 / ④ 다른 사상을 주장하는 자들에 대한 핍박

   ⑤ 세상 권력과의 야합 / ⑥ 기타

  (4) 교황이 무오하다면 왜 성경에 위배되는 교리를 만드는가?

 

Ⅳ. 결론-교황은 적그리스도다!

 

참고 자료

*이 자료는 [유선호, 《천주교도 기독교인가》, 하늘기획, 2003.]를 주로 참고했다.


§들어가는 말

 

“화해와 화합” 교황의 축복…대한민국 위안 얻다

주말 광화문 시복식에 90만 인파 / 원불교 신자, 독일 청년. 미국 수녀-/ 가톨릭 아니어도 진솔한 모습 감명

 

“올해 우리나라에 힘든 일이 너무나 많았는데, 교황의 미소가 상처와 고통으로 얼룩진 우리 마음을 싹 씻어주는 것 같았다.” 16일 광화문과장에서 열린 순교자 124위에 대한 시복식을 직접 본 가톨릭 신자 김00 씨의 말이다.

-중앙일보 2014년 8월 18일 4면 기사 중에서

 

266대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2014.8.14-18)으로, 대한민국은 교황 신드롬이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말 광화문 시복식에 90만 인파가 몰려왔다. 그들 중에는 시복식을 보기 위해 광화문에서 밤을 샌 이도 상당한 것 같았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매스컴의 일거수일투족을 생중계했다.

왜, 이들은 교황에게 열광하는가? 교황은 대한민국에 위안을 줄 만큼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미소가 응어리진 사람의 마음을 풀어주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교황, 그는 정말 상처로 얼룩진 우리의 마음을 씻어줄 수 있는가?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후 11:14).

물론이다. 인간적으로 연민의 정으로도 다친 마음을 보듬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생의 문제는? 이생에서 당하는 아픔을 위로하는 것도 의미 없지 않지만, 영원의 길이 좌우되는 이생에서의 영생의 문제를 그가 보듬어줄 수 있을까? 진정으로 인간을 위하는 길은 거룩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 거룩한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다. 과연, 그는 거룩한 구원의 메신저일까? 아니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가로채 자기 것인 양하는 절도요 강도에 불과할까?

왜 루터는 그를 ‘적그리스도’라고 했을까?

 

3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5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6 저로 하여금 저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을 지금도 너희가 아나니

7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

8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9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살후 2:3-12).

 

* 로마가톨릭 측의 교황에 대한 평가

① 페라리스(Ferraris) - "교황(The Pope)은 아주 존엄하고 위대하기 때문에 그는 단지 사람만이 아니고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만약 천사들이 잘못을 범하게 된다면 교황이 그들을 판단하고 서로 교통시킬 수 있다."

② 그레고리 11세(Gregory XI)의 말 - "그 사람 교황은 하늘의 힘을 가졌으며 자연의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고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낼 수 있으며 불의를 정의로 바꿀 수 있고 그는 모든 힘에 가득차 있다."

③ 교황 대관식에서 교황에게 하는 말 - "이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자와 왕과 왕자들의 아버지임을 잊지 말고 이 삼중관을 받으시오"

④ 교황 이노센트 10세(Innocent X)의 대관식에서의 말 - "가장 성스럽고 축복스런 아버지시여 교회의 우두머리이시고 세상의 통치자이시며 하늘의 모든 열쇠를 가지고 있는 자시며 천사들이 하늘에서 숭배하고 두려운 지옥의 문들과 모든 세상들이 경배하고 특별히 저희들이 당신을 존경하고 숭배하나이다."

⑤ 볼우남샌카탐에서 교황 보니페이스(Boniface)의 말 - "로마 교황은 모두를 판단할 수 있으나 누구에게도 판단받지 아니하고 그 로마 교황으로 말미암아 모든 생물들은 다함께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

⑥ 교황 쥴리어스 2세(Julius II)의 말 - "세상에 있는 다른 또 하나의 하나님"

⑦ 교황 비오 10세(Pius X)의 말 -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⑧ 교황 레오 13세(Leo 13)의 말(1895년 7월) - "우리는 전능한 하나님의 지상 장소에 살고 있다."

⑨ 베이룬 추기경(Bayloone)이 교황을 두고 한 말 - "하나님의 영이 볼 수 있도록 변한 인간이다"

⑩ 1949년 아일랜드 가톨릭 성직자들의 말(교황 레오 12세를 두고 한 말) -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이신 다른 예수이다"

⑪ 데시우스의 말 - "교황은 하나님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러한 로마가톨릭의 교황숭배를 보면, 루터나 칼뱅 등 모든 개혁자들이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Ⅰ. 교황권의 의미

교황(敎皇, Pope)이란 가톨릭교회의 최고위 성직자를 말한다. 교황을 알려면, 교황권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바티칸 공식 인명록인 《ANNUARIO, PONTIFICIO》에는 교황을 다음과 같이 호칭한다.

① 로마의 주교, ②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 ③ 그리스도의 수제자, ④ 베드라 사도의 계승자, ⑤ 전 세계 교회의 최고 고위 사제, ⑥ 서방교회의 총대주교, ⑦ 이탈리아의 수석주교, ⑧ 로마 관구의 대주교 및 수도주교, ⑨ 바티칸 공화국의 최고 통치자, ⑩ 하나님의 종중의 종.

교황에 대한 수많은 다양한 칭호가 교황의 직무의 복합성을 보여준다. 이 모두가 교황의 권한을 말함은 물론이다.

 

* 교황권은 두 가지로 그 특징-교황수위권과 교황무오성

교황이 거주하고 있는 바티칸시는 일조의 종교 국가이다. 교황은 바티칸시의 수장과도 같은 존재다. 마치 한 나라의 통치자인 대통령과 같은 위치에 있다. 그래서 돈과 재물, 행정과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독재군주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교황의 수장권(首長權, 수위권 또는 지배권)을 베드로 사도에게서 연유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첫 번째 교황이 베드로이기에 지금까지 모든 교황이 그 뒤를 잇는다는 것이다. 교회가 베드로 사도 위에 세워졌기에 교회의 머리는 베드로이며,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감독이 교회의 수장권을 갖는다는 말이다. 이를 교황 수위권이라 한다. 게다가 교황은 교회의 머리이기에 오류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를 교황 무오성이라고 한다. 교화는 오류가 없기에 그가 하는 것은 진리라는 셈이다. 이를 통해 교회는 사제계층과 신도계층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사제계층도 교황-추기경단-추기경-대감독-주교-사제로 계급화된다. 따라서 가톨릭교회는 교황의 말에 절대순명(絶代順命)이라는 순종의 교리를 주장한다. 즉, 교황은 교회의 머리인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절대 무오류한 존재이기에 사제계급과 신도들은 그의 말에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세 중기에는 교황은 교회뿐만 아니라 세속 권력에도 손을 뻗혀 황제 권위를 넘어서기도 했다.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노릇 하기를 원하노라”(고전 4:8).

 

그렇다면, 가톨릭교회에 예수님이 설자리가 있을까? 성경에는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고(엡 1:22) 성도는 그의 지체라고 나오지 않는가? 도대체 교황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해서 교회에 꽈리를 틀게 되었는가?

이를 위해서는 교황제의 성립과정을 자세히 살필 필요가 있다. 특히 교황권의 핵심 요소인 교황 수위권과 교황 무오성에 대해서 연구해야 한다.

 

-교황 수위권[수장권](敎皇首位權,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최고의 통치자라는 교리)

-교황 무오성(敎皇無誤性, 교황은 오류가 없다는 교리)

 

Ⅱ. 교황의 수위(장)권 성립과정 및 비판

 

1) 교황 수위권의 성립과정

(1) 교황권이 발생한 계기-교회에 등급이 발생한 연유

교회 최초의 조직은 매우 단순했다. 직원은 장로들과 집사들이었다. 장로(the elders)는 프레스비터스(prebyters)로 알려졌는데, 프레스비터스는 헬라어로 연장자란 뜻이다.

초대 교회에서 장로는 평신도와 동등한 지위였다. 그러나 각 회중에서 장로 중 한 사람이 인도자가 되어야만 했다. 그는 장로들의 회의의 사회자가 되어야만 했고 예배에 있어서 인도자가 되고 설교를 해야만 했던 것이다. 장로들은 또한 감독자들이라 불려졌다. 감독자를 헬라어로 ‘에피스코포스’('Eπισχοποζ, 감독자)라고 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감독(bishop)이란 말을 취한 것이다. 감독이란 명칭은 장로의회를 인도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감독자 또는 감독되는 장로에게 종속된 것이었고, 감독은 홀로 교회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로 보건대 ‘감독’은 교회 안에서 장로들과 다른 교직으로 제도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3세기에 이르러 감독의 직권이 더욱 강화되고 교회의 중대한 일은 감독회에서 결정하도록 되었다. 4세기에 이르러서는 대감독 제도가 생겨서 한 지방 안에 있는 모든 감독들은 대감독에게 복종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5세기에는 로마의 감독이 모든 지방교회들의 감독들을 통솔하였으니 그가 레오 1세이다.

교회에 계급이 생기고, 최고등급인 교황이 생긴 경유가 이런 역사적 단계를 거치면서 발생하게 되었다.

 

(2) 로마교회와 교황제의 기원

① 교황권의 토대를 놓은 레오 1세

서로마 제국이 5세기 후반 급속히 쇠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로 인하여 로마 제국에는 행정 및 군사적 권력의 공백이 발생했다. 로마 시민은 로마 제국의 유산을 물려받은 교회와 성직자에게 행정적인 권력의 공백을 메워줄 것을 요청했고, 로마교회의 성직자들은 이를 잘 감당했다. 또한 로마교회는 제국의 침공 세력과 협상을 주도했고, 도시를 보호하는 데 있어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중에 로마교회 감독 레오 1세(LeoⅠ, 440-461)가 크게 활약했다.

410년, 서로마제국의 수도 로마 시는 훈족의 수장인 알라릭에게 유린당하고 불태워져 크게 쇠락하고 만다. 434년, 유럽에 세운 훈 왕국의 왕인 아틸라(Attila)가 452년에 이탈리아 침입하여 로마로 향했다. 그때 로마교회 감독 레오 1세가 혈혈단신으로 아틸라 진중에 달려가 담판하여 아틸라로 하여금 로마에서 물러가게 하였다. 455년 반달족이 로마를 함락시켰을 때는 비록 침입자들을 몰아내지는 못했지만, 로마가 방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반달족의 지도자 겐세릭(Genseric)과 협상을 주도한 것도 바로 레오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을 통하여 레오 1세는 로마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레오 1세가 바로 교황 수위권에 대한 기초를 세운 인물로, 그는 “로마교회를 세운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교령(decree)에 대한 반석이요, 기초요, 하늘나라 문지기이며, 결박하고 풀어주는 일을 위해 세움을 입었으며, 그의 판결의 효력이 하늘에 보존되어 있으며, 그의 후계자인 교황을 통해 계속해서 그에게 위탁된 과제를 수행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이 관찰하는 지역의 대중들이 베드로를 공경하듯이 교황을 공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로마의 감독은 “성 베드로의 교황직을 가졌으므로 모든 사람이 그를 순조하라”는 명령이 담긴 칙령을 황제 발렌티니안 3세로부터 받았다. 그는 현대적 의미에서 최초의 ‘교황’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인물이었다.

 

② 교황권을 확립한 그레고리 1세

레오의 사망 후 130여 년이 지난 590년, 레오가 가진 교황제의 이상을 실천에 옮긴이가 등장했다. 그는 교황제의 창시자로 평가되고, 로마 교황 전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교황 중 하나로 평가받고 중세 교회황권의 아버지라는 받고 있는 그리고리 1세(Gregory Ⅰ, 590-604)이다.

590년 교황이 된 그레고리우스 1세는 로마의 공공사업을 정리하고 군대를 조직하여 롬바르드족을 몰아내었다. 야만족이 침입한 시대에 교회는 침략을 완충해 주는 주된 역할을 하였다. 이와 동시에 긍정적인 영향을 더욱 발휘하여 야만족의 신앙을 바꾸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레고리 1세에 대한 로마시민들의 신뢰는 과거의 로마황제와 버금갈 정도로 커져갔다.

레오 1세에 의하여 시작된 교황의 수위권 요구를 그레고리우스가 같은 근거 위에 다시 지상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것을 분명히 하여, 전체 교회에 대하여 로마교회의 지상권을 주장했다.

그는 능력 있는 설교자로 또한 유능한 신학적 저술가였다. 오리게네스 이후 윤곽을 잡아 오기 시작한 ‘연옥설’은 그레고리우스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반포가 되었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와 성자(聖者)들에게 하는 연옥 신앙이 증대하여가자 자연히 ‘면죄부’ 및 ‘죽은자를 위한 미사제도’가 동반하여 함께 발전하였다.

그레고리우스 1세는 그밖에도 교직자가 된 후 결혼을 금하게 하였고, 교황청의 교회 감독권을 강화하고 ‘종교재판을 주도’하면서 교회와 성직자들의 지위를 향상시켰으며, 성직자 지침서와 같은 『목자의 서』를 지어 성직자들을 지도했다.

그는 예배음악(그레고리안 성가)을 포함해 서구의 예배의식을 통일했으며 수도원을 후원했다. 그레고리는 이처럼 교세를 넓히고 교황의 권위를 높인 것은 물론 기독교의 교리와 예배의식(미사)을 정리하고 통일하는 데 기여했다.

이와 같은 활약으로, 그레고리 1세는 단지 로마 교구의 감독이 아니라 로마 시와 그 일대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로마의 감독이나 로마의 대주교라는 역할을 단지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면에 그치지 않고 세속 군주의 역할과 같은 것으로 올려놓았던 것이다. 이제 로마의 감독은 중부 이탈리아의 독립 군주와 같은 존재였다. 이런 연유로 후대의 사가들은 그레고리를 실질적 ‘초대 교황’이라고 평가를 내린다.

 

(3) 교황이라는 칭호의 발달

① 교황(Pope)이라는 칭호를 거부한 그레고리 1세

그레고리 1세가 교황권을 확립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로마교회의 수위권을 주장하기는 했으나 ‘교황’이란 칭호는 한사코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교황이라 부르는 것도 거부했다. 단지, 로마 교구가 상당한 정치적 위치와 재력을 가진 거대 교구였기 때문에 그 무게가 더 해 있었을 뿐, 최고위(首) 감독이나 교황이란 개념을 그는 공식적으로 거절했다.

그레고리는 당시 로마제국의 수도가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이전된 지 100여 년이 훨씬 지났기에, 콘스탄티노플교회의 위상이 로마교회 이상으로 부상했다. 자연히 콘스탄티노플교회 대감독 요한은 자신을 ‘보편적 총대감독’(THE UNIVERSAL PATRIARCH)이라고 스스로 칭하며 교회의 수위권을 확보하려 하였다. 이때 로마 감독이었던 그레고리 1세는 그것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반대하면서 그러한 칭호를 쓰는 것은 악하고 불경건하고 가증하다며, 그에게 쓰지 못하도록 압박했다. 또한 자신에게도 그러한 칭호가 붙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실제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율리기우스가 그레고리 로마감독을 ‘보편적 교황’(UNIVERSAL POPE)이라고 칭했을 때 그는 격노하면서 다음과 같이 율리기우스를 꾸짖었다.

 

“귀서의 서두에 저를 보편적 감독(교황)이라고 부르시며 제가 금지한 호칭을 저에게 일부러 쓰셨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을 하시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치에 닿는 것 이상을 남에게 주시면 귀하는 그만큼 자신의 것을 빼앗기게 됩니다. 형제의 영예가 손상되는 것을 저는 영예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레고리 1세는 어떤 대감독의 수위권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POPE(교황, 수감독)이나 PATRIARCH(총대감독) 등의 호칭이 수위권을 상징한다면, 그 누구에게도 주어지거나 가져서는 안 될 가증한 것으로 여겼다. 이는 그의 여러 서신들에서도 잘 나타난다.

 

② 로마교회와 콘스틴티노플 교회의 교황권 다툼

초대교회에서 단지 행정상의 구분에 불과하던 교구의 서열이 교리상의 교회의 수위권으로 오해되고 비화된 것은,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여 로마교회의 위상이 높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로마 교회에 행정상 수위권이 주어진 것도 로마제국의 수도에 로마교회가 위치했고 로마 황제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로마 황제가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후에는 당연히 콘스탄티노플교회성직자들도 제국의 위엄을 위해 그들이 로마교회에 버금가는 지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제1차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콘스탄티노플교회의 이런 주장이 관철되어 콘스탄티노플교회도 로마교회에 버금가는 권한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가결됐다.

이때부터 로마교회와 콘스탄티노플교회와의 수위권 다툼이 직접적으로 시작된다. 이 결정에 대해 로마교회 감독 레오 1세는 맹렬히 반대하였다. 하지만 총회의 결정은 그대로 유지된 가운데, 그 후 콘스탄티노플교회 감독 요한이 로마교회 감독 그레고리 1세에 대해 도전장을 내었으나 앞서 설명한대로 그레고리 1세는 레오 1세와는 달리 로마교회의 수위권을 거절하면서 어떠한 교회나 사제의 수위권도 부정했다.

 

③ 교황권은 예수님이 준 것이 아니라 인간이 준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레고리 1세가 그토록 반대한 로마교회의 수위권, 즉 교황권이 확립될 수 있었을까? 그 연유는 다음과 같다.

콘스탄티노플의 요한 대감독의 도전을 받던 그레고리 1세는 끝까지 교황제도를 부정하고 거절한다. 그러나 마우리케 황제의 후원을 받던 동로마제국의 요한 감독은 끝까지 교회의 수위권(교황권)을 관철시키려 노력하게 되고, 그의 후계자 키리아쿠스 감독도 그와 같은 길을 걸었다. 그런데 이때 의외의 상황이 벌어진다. 그것은 동로마에서 플라비우스 포카스(Flavius Phocas Augustus, ? - 610)가 황제 마우리케를 살해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른 것이다. 포카스는 큰 어려움 없이 로마에서 황제 대관식을 올리고(그 당시에는 로마교회가 동로마제국의 관할하에 있었음), 정치적인 이유로 그레고리가 그렇게 반대했던 교회의 수위권을 당시 로마 감독 그레고리의 후계자 보니파우스(607)에게 수여하였다.

수위권의 내용은 “로마교회가 모든 교회의 머리가 된다”는 것이었으며, 보니파우스를 정식으로 ‘교황’(교회총대감독)이라고 호칭한 것이다. 이로써 로마교회의 수위권과 교황권에 대한 논쟁이 종식된다.

말하자면 교황이 교회최고수위권을 갖게 된 것은 가톨릭교회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과 베드로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황제 포카스가 준 것이며 그 첫 수혜자는 보니파우스였다(607년).

그러나 이때 교황권이 확립된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그 후에 동로마제국의 후퇴와 서로마지역이 격변하는 정세 속에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동로마와는 연락이 두절되고 관계가 멀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감독에 대한 다른 지역의 교회들의 복종은 마음에 드는 경우만 따르고 아니면 거절하고 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또 하나의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서로마제국을 계승한 프랑크 왕국의 페핀의 정권 찬탈사건이었다. 프랑크왕국(신성로마제국의 원조) 궁재였던 페핀이 또한 서로마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합법적인 황제를 추방하고 자신이 정권을 잡는데 성공하는데, 이때 로마 감독 자카리아스(Zacharias)가 페핀에게 협조해 준다!

페핀은 정권을 찬탈한 후 자신에게 협력한 자카리아스 로마 감독에게 드디어 모든 교회의 수위권을 주게 되는데(754년) 이를 뒷받침하는 조치로 로마 시의 영토와 특히 재판권까지 부여하는 협정을 맺는다! 이로써 로마 감독이 교회최고수위권을 가진 교황이 되어 모든 교회를 통치하는 교회 황제의 자리에 등극하게 된다. 그러므로 실제로 모든 실권을 쥔 로마 교황권의 등장은 자카리아스로 교황 때부터였다.

또한 그 후 768년 프랑크왕국의 샤를마뉴 대제(768-814) 때에 와서도 역시 같은 정치적 상황으로 교황의 덕을 입은 샤를마뉴가 스테파노 3세에게 교황권을 강화시켜 주는 협정을 맺으면서 교황권을 더욱 튼튼하게 뒷받침해 준다.

결국 역사적으로 보면 교황권은 예수님이 아니라 인간인 포카스와 페핀 황제, 샤를마뉴 대제가 내려준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내용은 약 200여 년간의 걸친 역사를 약술한 것이며 참으로 중요한 교황권과 교황교리 탄생의 직접적 역사적 사실이다. 가톨릭의 유명한 신학자인 한스큉도 교황의 수위권의 정당성을 확정지을 성서적 근거가 희박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교회의 역사에서 보자면 교황의 수위권은 3~8세기에 역사적 과정을 거쳐서 형성된 교리인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공식적으로 이런 과거의 역사자료들의 진실이 밖으로 알려지기는 것을 막기 위해 교황권을 성경 마태복음 16:13-19절의 말씀을 근거로 삼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교회수위권을 주심으로 온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므로 일반 신도들이 교황권의 유래와 확립에 관한 내용에 대해 오해하게 된 것이다.

 

2) 교황 수위권 비판

(1) 마태복음 6:16-18절 해석-반석의 의미

로마 가톨릭교회는 마태복음 6:16-18절을 근거로 교회가 초대 교황인 베드로 위에 세워졌다고 주장한다.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그러나 마태복음 6:18절의 가톨릭교회의 해석은 성경의 왜곡해서 본 결과이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 구절에서 “베드로”란 말은 남성명사인데, 그것은 물론 “베드로”라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다음에 나오는 “이 반석”이란 말은 여성명사이므로 그것은 베드로를 의미하지 않고, 베드로가 주님에게 고백한 그의 신앙고백(“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을 비유한 것이다.

이 성경구절에 대한 초대교부들의 견해를 보면, 반석이 베드로를 가리킨다고 믿은 사람은 17명, 반석을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이라고 믿은 사람은 45명, 반석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입장이 16명, 반석이 모든 사도들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18명으로, 반석을 베드로 믿은 사람은 전체 96명중 17명뿐이었다. 이것은 17세기 가톨릭 학자 라우노이가 밝힌 사실이다. 또한 이것은 성서학을 공부하는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는 내용이다.

만약 여기서 베드로가 반석이라고 가톨릭교회식으로 주장할 경우 바로 뒤에 나오는 마 16:22, 23절에 보면, 베드로가 곧 사단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그렇다면 이런 모순이 어디 있는가, 예수께서 사단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것인가!

따라서 예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가 그의 교회를 베드로의 인격 위에 세우시겠다는 의미가 아니고,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세우시겠다는 의미로 하신 것이 분명하다.

 

(2) 마태복음 6:16-18절 해석-천국 열쇠의 의미

천국 열쇠에 대해서 로마가톨릭은 주장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셨다는 말은 당신을 대리해서 세상 교회를 다스리는 전권을 부여했다는 것이라”고 하는데, ‘천국 열쇠’ 자체를 어떻게 해석하든지간에 중요한 것은, 매고 푸는 권세가 베드로에게 독점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18:18절에서 그와 동일한 권세가 제자들 모두에게 주어졌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카르(Carr)는 이 ‘열쇠’에 대하여 유대교에서 서기관들이 임직할 때 상징적인 열쇠를 준 것을 들어 설명하는데, 누가복음 11:52절에서 “화 있을찐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신 것에 비추어 볼 때, 여기서의 열쇠는 사도들의 복음 선포(말씀 사역)와 관련된 청지기직으로 해석함이 옳을 것이다. 이와 같이 열쇠는 복음 선포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열도록 해주는 권위를 상징한다.

베드로는 제자들 가운데서 첫째로 유대인 세계에 천국에 들어가는 믿음의 문을 연 최고의 영예를 얻었는데, 사도행전 2:41-44절에 나타난 바 오순절에 3,000명의 유대인이 회심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쇠는 얼마 후 다른 제자들에게도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복음을 선포했을 때 주어졌고, 이렇게 복음을 전하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문을 여닫는 동일한 특권은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주어져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마 28:19, 20)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가톨릭의 주장과는 달리 베드로가 제자들 중의 우두머리 세우심을 받았거나 교황이 베드로의 후계자라는 내용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3) 베드로가 로마의 첫 번째 교황인가?

가톨릭의 전통에 따르면 베드로는 로마의 첫 번째 교황이고, 그는 로마 교황으로 주후 42~67년까지 25년 동안 직무를 수행하였으며, 주후 67년에 순교했다고 한다. 로마 주교가 교황이 된 이유는 베드로가 그곳에서 사목하다 순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과 역사는 베드로가 로마에 갔다거나 로마의 주교로 사역했다는 어떠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는다. <가톨릭 백과사전>의 ‘베드로’ 조항에 의하면 베드로가 주후 42년부터 67년까지 25년 동안 로마의 주교였다는 신조는 3세기 초에 등장했다고 나온다. 이러한 전설은 이단적인 그룹인 에비온파의 위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 로마의 유명한 고고학자 마루치는 그의 강의에서 베드로가 로마에 있었다는 어떠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고고학자 디 로씨는 40년 동안 로마에 머물면서 베드로가 로마에 있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포기했다고 시인했다.

오히려 성경을 연구해 보면, 44년경 베드로는 예루살렘 회의에 참석하였고(행 15), 53년 안디옥에서 바울과 합류하였고(갈 2:11), 58년 바울이 쓴 로마서에 보면, 로마에 있는 27명의 신자들과 지도자들에게 아부를 전하고 있으나 베드로에 대해서는 그 이름조차 없다(롬 16). 당시에 베드로가 로마의 주교였다면 바울이 그의 이름을 빠트릴 리가 있겠는가!

 

 

Ⅲ. 교황 무오성 성립과정 및 비판

 

1) 교황 무오성이란?

교황의 무오성(Papal infallibility) 또는 교황의 무류권(無謬權) 교리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학에서 교황이 전 세계 교회의 우두머리로서 신앙이나 도덕에 관하여 사도좌(使徒座)에서 엄숙하게 정식으로 결정을 내릴 경우(excathedra), 그 결정은 성령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올바르며 결단코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교리이다. 이 교리가 정식으로 공포된 것은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입니다.

1870년 7월 18일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결의하여 공포한 교황의 무오성은 다음과 같다.

 

“로마 교황이 교황좌에서 선언할 때, 즉 모든 그리스도인의 목자요, 스승으로서 사도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최고의 권위로써 신앙이나 도덕에 관한 교리를 온 교회가 믿어야 할 교리로 정의하고 선포할 때, 성 베드로를 통하여 그 후계자인 교황에게 약속된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해 교황은 무류성(오류가 없음)을 지닌다. 하느님은 당신 교회가 신앙이나 도덕에 관한 교리를 결정할 때 이 은총을 내리신다. 따라서 교황이 사도좌에서 내린 교리에 관한 결정은 교회의 동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개정할 수 없는 것이다”

즉, 교황이 사도좌에서 공식으로 신앙이나 도덕에 관한 교리를 제정하고 해석하고 선포할 때에 그 제정과 해석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을 받아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이 공식적으로 선포된 교리는 누구의 동의도 필요치 않으며 또한 누구도 개정할 수 없고 철폐할 수 없는 완전한 진리라는 선언이다.

 

2) 교황 무오성 성립과정

(1) 소극적 교황 무오성

기독교 교회가 형성된 후 2세기 무렵부터 로마교회는 다른 지역 교회들에 대한 영향력을 높아지기 시작했다. 당시 영지주의라든가 마르시오니즘이 교회에 위협을 가했는데, 이때 교회들이 모여서 '사도전승'이란 개념을 만들었다. 이단들은 자기네가 예수로부터 비밀전승을 받았다고 하며 이단 교리의 정당성을 주장했었는데, 이에 대해 기독교 교회들은 예수로부터 누가 무언가를 받았다면 그것은 사도들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사도가 세운 교회가 정통이라고 주장했다.

‘사도전’승 개념은 원래 포괄적이다. 모든 사도를 기반으로 하는 전승이란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사도 중 베드로에게만 정통의 기반을 두는 협소한 내용으로 변질되었다. 그 후 로마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의 붕괴에 따른 주도권 장악에 성공했고, 이단에 대응하며 영향력을 높혔고, 로마제국의 국교화로 종주권을 갖는 교회가 된 로마교회에서 베드로 사도의 정통성을 잇는 참된 사도적 교회라는 주장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래서 로마교회 주교가 ‘교황’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교황권이 강화되다가 중세를 통해서 쇠퇴와 갱신을 반복하며 자리 잡아 갔다. 교황이 무오하다는 주장은 종교개혁 이후에나 형성되었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1545년부터 1563년까지 몇 차례에 걸쳐 교회 회의가 소집되었다. 트렌트 공의회로 불리는 이 회의에서 로마교회는 종교개혁의 공격에 대항해 교권을 수호하기 위한 새로운 규정들을 발전시켰고, 그 결과 교회는 협소화되었다. 중세교회는 그나마 열린 교회였다. 실례로 중세교회에서는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 실재론자와 유명론자, 성서주의자와 신비주의자 등 다양한 대립이 가능했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트렌트 안티개혁을 통해 종교개혁운동에 반대하는 운동을 일으킨다. 오늘날의 가톨릭교회는 이 회의의 결과로 형성된 교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트렌트 회의는 직접적으로 교황의 무오성을 확립한 회의는 아니지만 이후 이런 주장이 나오게 된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 알아두어야 할 회의이다. 왜냐하면 이 회의를 통해서 ‘권위에 대한 교리’를 확립했기 때이다.

루터가 율법주의적인 형식과 내용을 가진 외경에 정경적 타당성을 부여하는 것을 거부했던 것에 반대해, 이 회의는 외경은 전통적인 성서와 같은 권위를 갖는다고 확인했다. 외경의 정경화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또한 전통은 성서와 똑같은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성서와 전통은 동등한 경건과 경외를 가지고 받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한편으로는 성서의 독점적 권위를 거부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의 권위를 높였는데, 이때 전통을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밝히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전통이란 교황청에서 그때그때 내리는 결정과 동일시될 수 있게 되었고, 교황은 자의적으로 전통을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받게 되었다. 물론 자의적 해석은 공의회나 교령에 의해 확정되어 있던 기존의 전통에 의해서 제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무엇이 전통으로 승인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그때그때 내려지는 결단은 교황의 영역이 되었다. 아울러, 누가 성서를 해석할 자격을 가지는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도 트렌트 회의는 거룩한 로마교회만이 성서를 해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고 확정했다.

이렇게 트렌트 회의는 종교개혁자들이 공격하며 개혁하려 했던 내용과는 정반대의 결정을 하였다. 그 결과, 교황의 지위는 누구도 공격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교황은 비판을 넘어서 있으며, 그 외 어떤 권위도, 심지어 성서까지도 교황에 대치될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교황만이 성서해석에 대한 중대한 결단을 내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미 트렌트 회의에서부터 교황의 무오성은 소극적인 측면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교회의 분열을 확정지은 트렌트 회의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 중 하나는 교황과 공의회 사이의 관계의 문제였다. 트렌트 공의회에서는 두 가지 의견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교황주의와 공회주의가 그것이다. 교황주의란 교황은 보편적 주교이며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주장입니다. 즉, 모든 주교들의 힘은 교황의 힘에서 도출된다는 말이다. 반면 공회주의는 교황은 ‘primus inter pares’, 즉 ‘동등자 가운데 제일인자’이며 교회의 통일과 질서를 가진 대표자라는 주장이다. 이때 궁극적 결정권은 공의회에 있게 됩니다. 궁극적 결정권이 교황에게 있느냐 공의회에 있느냐 하는 문제는 트렌트 회의에서 결정을 보지 못했다.

 

(2) 적극적 교황 무오성

16세기 이후 교황과 로마교회에 중대한 위협을 가하던 국가 교회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프랑스 독립 교회 운동은 로마교회에 위협을 주어왔고, 독일, 오스트리아의 교회들도 주교들의 지도력에 따라 오랜 시간 세속 권력자와 동맹을 맺으며 교황권에 대항했다. 그런데 역사가 진행되며, 프랑스의 나폴레옹이나 독일의 제후들이 자국 주교와 갈등관계에 놓이면서 교황청의 힘을 끌어들여 주교들의 국정개입을 교란시켰다. 이 과정에서 교황의 지배력이 강화되었고, 결국 1870년 1차 바티칸 회의에서 교황의 무오성이 선언되었다. 이 시기 교황 무오성 주장을 이끌어내는 데 기여한 또 하나의 힘은 예수회였다. 예수회는 종교개혁기에 형성되어 활동영역을 넓혀서 주교의 권위도 위태롭게 하였다. 예수회는 오직 한 교부만의 권위를 인정했는데, 그것은 살아 있는 교황이었다(이번에 방한한 266대 프라치스코 교황도 예수회 출신이다. 그는 개혁주의 인물로 1237년 만에 아르헨티나의 비유럽출신의 교황이 되었다.).

1870년 1차 바티칸회의 헌장에서 발표된 것은, 첫째로 교황에게 교회의 다른 모든 힘 상위에 교황의 사법적 권한을 부여했다. 그래서 교황에 항변할 수 있는 어떤 합법적 주체도 있을 수 없게 되었다.

둘째로, 교황은 보편적 주교라고 선언되었다. 이 말은 교황이 각 지방 주교를 통해서 온 가톨릭교인을 지배하는 힘을 갖는다는 것이다. 만에 하나 어떤 주교가 교황에 따르지 않으면 교황은 그 지역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자신의 힘을 직접 행사해 그 주교에 반항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교황이 교황의 자리에서(ex cathedra) 말할 경우 교황은 무오하다고 선언되었다. 물론, 이 결정은 가톨릭 내에서도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일단의 가톨릭 교인들이 로마교회를 떠나 나름의 가톨릭을 만들기도 했다.

넷째로, 교황은 교회의 어떤 행위에 의해서도 개혁될 수 없다고 선언되었다. 일종의 탄핵 불가능성을 말한다. 중세까지만 해도 어떤 교황은 퇴위해야 했고 어떤 교황은 견책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교황을 물러나게 할 어떤 힘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교황은 탄핵을 받지 않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황에 대한 어떤 법적 소송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3) 교황 무오성이 만든 폐단

교황 무오성이란, 정확히는 교황이 죄가 없다는 주장은 아니다. 하지만 누구도 교황의 죄를 물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교황 무오성은 교황이 하는 모든 발언이 무오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교황의 자리(ex cathedra)인 사도좌에서 나온 선언만 무오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교황의 자리에서 처음 나온 선언이 성모 마리아의 몸의 승천에 관한 것었다는 것이다. 성모 승천은 하나의 전설로서 교회사에서는 천년 이상 받아들여졌다. 수많은 중세 그림들은 이런 민간신앙을 표현했다. 그런데 성모 승천이 교회에서 관대하게 받아들여져야 할 ‘경건한 의견’(pia opinio)인가 ‘믿어야만 할 ’것(de fide)인가는 논란이 될 수 있고, 실제로 논란이 되어왔다. 그런데 1950년 성모 승천이 믿어야 할 것으로 선언되면서 모든 가톨릭 교인은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여야만 하게 되었다. 따라서 가톨릭 신자는 그 누구도 성모 승천을 의심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성모 승천을 거절하는 사람은 영혼의 구원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이런 선언에 대해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당황해했지만, 교황 무오성 때문에 복종해야 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사람들이 기대를 걸고 있었던 가톨릭과 개신교, 그리고 인문주의 사이의 접근과 일치는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황무오성으로 인하여 1854년 선언된 마리아의 무원죄 수태설에 관한 교리까지도 타당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도 교황이 교황의 자리에서 선언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전까지 가톨릭 내에 있었던 문제제기(도미니코회는 믿지 않았다)는 설자리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 외에도 교황이 선포한 모든 교리들이 소급되어 타당성을 갖게 되었다.

 

4) 교황 무오성 비판

(1) 성경적 근거

성경 어디에도 ‘교황’이란 말도 없거니와 교황이든 베드로이든 간에 어느 누구의 무오성을 말하기는커녕, 오히려 성경은 인간이 부패하고 거짓되다고 말하고 있다(렘 17:9; 시14:2, 3; 롬 3:10, 23).

 

(2) 역사적 근거 1

교황의 수위(장)권과 무오성은 교황권이 절정에 달한 중세에도 정식으로 규정되지 못했는데 이는 당시 교황들의 비리가 만연하여 대중에게 설득력이 없었던 까닭이다. 역대 교황들은 베드로의 후계자, 그리스도의 대리자를 자처했지만 그 가운데는 누가 보아도 그 자질이 의심스러운 교황들이 많이 있었다.

 

형제지간이었던 베네딕트 8세(1012∼1024)와 요한 19세(1024∼1032) : 뇌물로 교황직을 매입하여 교황이 되었다.

베네딕트 9세(1033∼1045) : 교황직을 매입했다가 2명에게 교황직을 다시 팔아 치부했다.

그레고리 6세(1045∼1046) : 전임교황 베네딕트 9세에게 고액의 은전을 지불하고 교황직을 사들였다가 이 일이 빌미가 되어 이듬해 퇴위 당했다.

 

교황직을 매입한 교황들은 당연히 추기경이나 주교직을 많은 돈을 받고 매매했으며, 취임세를 부과하여 재산을 모았다. 교황들이 앞장서서 교황직을 사고팔았기 때문에 당시 성직매매는 일상적인 일로 간주될 정도로 성직자들의 부패가 심했다. 교황직에 따르는 막대한 세속적 권력과 이익 때문에 교황이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들도 많았다.

교황 보니파키우스 6세(896)부터 스테파누스 7세(928∼931)까지의 32년간 14명의 교황이 즉위했다. 평균 재위기간이 2년 반이라는 것은 그만큼 교황직 쟁탈전이 치열했음을 의미한다.

보니파키우스 6세 : 재임 2주 만에 독살당했다.

크리스토포루스(903∼904) : 전임교황 레오 5세(903)를 투옥하여 독살한 교황, 그는 몇 달 후 자기도 전임자와 같은 처지에 내몰려 살해당한다.

세르기우스 3세(904∼911) : 크리스토포루스를 살해하고 등극한 교황. 로마 집정관의 딸 마로치아와 타락한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그의 정부 마로치아와 그의 언니와 그의 모친은 가톨릭교회의 ‘원로’가 되어 수십 년 동안 자신들의 정부(情夫)와 사생아들을 교황으로 천거했다. 사가(史家)들은 이 시기를 ‘음녀 정치’시대라고 칭합니다.

요한 10세(914∼928) : 마로치아의 언니 테오도라의 지지로 선출된 교황. 5세의 어린아이를 랭스의 대주교로 임명하기도 하는 등 부정을 저질렀는데 결국 마로치아에게 축출되어 살해당했다.

레오 6세(928∼929) : 마로치아의 사랑을 받아 교황이 됨. 하지만 다른 여인을 사랑하였다가 마로치아에게 암살당한다.

요한 11세(931∼935):마로치아와 교황 세르기우스 3세의 아들. 10대의 나이로 등극했지만 정적들에 의해 독살당한다.

요한 12세(955∼964) : 마로치아의 손자로서 18세에 등극한 교황. 살인, 성직매매, 서약 위반, 음행 등의 각종 범죄행위로 종교회의에 회부되었다. 회의 결과 그는 퇴위 당했지만 이를 인정치 않고 자신의 퇴위에 동조한 반대파들을 잔혹하게 처벌합니다. 그러나 그는 유부녀와 간통하다가 습격을 받아 며칠 후 사망한다.

 

교황직을 놓고 다툼이 벌어져 신임 교황이 전임 교황을, 또는 2, 3명의 대립교황이 서로를 비난하고 파문했으며, 정적들에게 피의 복수를 감행하기도 했다. 이 가운데 ‘시체공의회’ 사건은 그야말로 엽기적이다.

스테파누스 6세(896∼897) : 9개월 전 사망한 교황 포르모수스(891∼896)의 시체를 무덤에서 파내어 교황의 옷을 입히고 그의 죄상에 대해 재판했다. 재판 결과 전 교황의 모든 서품과 공적인 행위가 무효화되었으며 교황 퇴위가 선언되었다. 이어서 시체에 입혔던 교황복이 찢겨져 나가고, 교황이 축복을 베풀 때 사용하던 오른쪽 손가락 세 개가 절단된 채 시체는 티베르 강에 던져졌다. 정치적인 이유로 이런 가공할 만한 재판을 벌인 교황 스테파누스 6세는 이 일로 인해 자신도 결국 교좌에서 쫓겨나 교살당한다.

 

교황의 성직매매, 축첩, 간음, 사치, 방탕, 정적 살해 등의 비리는 특정한 때, 특정한 교황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교황에게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요하네스 23세(1410-1415) : 볼로냐의 추기경으로 있을 때에 수많은 남의 아내와 첩와 소녀를 능욕했는데 그 수가 무려 2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알렉산더 6세(1492∼1503) : 가톨릭에서도 가장 형편없는 교황으로 간주하는 교황. 끝없는 탐욕과 방탕생활로 결국 매독에 걸려 죽음. 그를 악마로 그려놓은 당시 풍자화는 민중이 타락한 교황을 얼마나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파울루스 3세(1534-1549) : 안코나의 교황사절로 재직시 명문귀족의 아내를 능욕하고 또한 자신의 둘째누이와도 불륜의 관계를 맺었으며 또한 추기경 자리가 탐나 알렉산더 6세 교황에게 누이 율리아를 바쳤다

율리우스 2세(1503-1513)과 레오10세(1515-21) : 끝없는 음란생활로 매독에 걸려 죽었다.

 

어떤 교황들은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은 물론, 선출된 후에도 여러 명의 첩을 거느렸고 그 가운데서 태어난 자식을 자기 조카라고 하면서 요직에 앉혔다. ‘교황의 조카’들은 어린아이라도 추기경 같은 고위 성직을 받았으며 10대, 20대의 나이에 교황직을 물려받기도 했다. 교황과 성직자들의 음란한 생활은 속담과 풍자화를 통해 민중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로마(교황청)에서는 성령의 날개가 잘려 없어졌다”는 민중의 비아냥거림을 보면 왜 중세 교황들이 그렇게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이 공의회에서 가결될 수 없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개혁을 추구한 일부 모범적인 교황도 있었겠지만 대부분 교황들의 ‘인간적인 면모’는 민중에게 결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비춰지지 않았던 것이다.

 

(3) 역사적 근거 2

① 마녀 재판

교황들의 개인적 비리로 인해 가톨릭교회에서는 20세기 들어 교황 무오성을 선언할 때에도 “교황이 사도좌에서 발언할 때”라는 전제조건을 달아놓았다. 그러나 과거 교황들의 사적인 비리보다는 그들이 교좌에 앉아 정식으로 발언한 결정으로 인한 폐해가 더욱 컸다. 종교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내려진 교황의 명령은 수많은 사람들을 이단, 마녀로 몰아 죽게 만들었다.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이라 하여 교황권의 절정기를 이루었던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1198∼1216)는 종교재판소를 창설했다. 종교재판소는 이후 약 500년 동안 100만 명에 달하는 사람을 처형하며 교황권의 유지·강화에 이용되었다.

1229년에는 “일반 신도들이 성경을 소유할 수 없고 읽을 수 없으며 번역할 수 없다”는 교황 그레고리 9세(1227∼1241)의 교서가 내려졌다. 일반인들은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도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엄벌에 처해졌고 심지어 화형당하기까지 했다.

1318년 교황 요한 22세가 마녀 재판을 이단 심문의 관할 하에 두는 교서를 내리고 이어서 후임 교황들이 잇달아 강화령을 내림으로써 ‘마녀사냥’의 이상 열풍이 유럽 전역을 휩쓸었다. 마녀로 간주되어 화형당한 사람도 적게는 30만 명 정도에서 많게는 약 900만 명까지 추정된다.

 

② 십자군 전쟁

타종교를 용납할 수 없었던 교황은 ‘성전(聖戰)’을 호소하여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1095년 교황 우르반 2세(1088∼1099)가 주창하여 200년간 계속된 십자군 전쟁은 오늘날까지 그리스정교회와 가톨릭, 이슬람권과 서구 세계가 반목하는 큰 원인을 제공했다. 가톨릭교회와 교황의 권위에 항의하는 항의자(protestant), 즉 개신교도들에 대한 학살을 명한 사람도 교황이었다.

 

③ 개신교 핍박

교황들은 이단자들을 “독있는 뱀처럼 박살내라”는 교서를 연속해서 내렸다. 종교개혁이 태동할 때에 후스, 제롬 등 개혁자들은 이단자로 화형을 감수해야 했다. 그 후 개신교도들은 모두 이단자로 낙인찍혔고, 개신교도들이 집단 거주하는 도시가 교황에게서 천국을 약속받은 가톨릭 신자들로 구성된 진압군의 습격을 받아 시민 전부가 몰살당하기도 했다. 한 예로, 1572년 8월 14일 성 바돌로매 대학살은 가톨릭 축제일 밤에 프랑스 파리에서 위그노 신자(프랑스의 칼뱅파 신교도) 1만(어떤 자료에는 10만) 명을 학살한 사건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교황 그레고리 13세(1572∼1585)는 교회에 가서 “하나님 사탄마귀들을 척결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감사의 찬송을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이 학살사건을 주도한 사람에게는 포상금을 주고 또한 이 날을 기념하여 주화를 만들기도 했다.

 

④ 다른 사상을 주장하는 자들에 대한 핍박

가톨릭의 신앙과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 지동설과 사상의 자유를 믿었던 성직자 브루노는 화형 당했고, 과학자 갈릴레이는 이단으로 판정받아 사형이 언도되자 자신의 학설을 부인하고 종신 연금형을 받았다. 근대과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수도사 로저 베이컨은 그의 과학적인 실험이 악마의 저주가 깃든 기적으로 간주되어 10년간 투옥되었으며, 300년 동안 그의 저서는 출판 금지 당했다.

 

⑤ 세상 권력과의 야합

최근 20세기에 들어와서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된 것도 교황이 무솔리니와 히틀러 정권과 야합한 것이 주원인의 하나라고 역사가들은 말하고 있다. 일찍이 교황 비오 11세는 무솔리니 정권과 라테란조약(무솔리니 정권을 지지하는 대신 교황청의 독립권과 자치영토를 보장해 주는 내용)을 체결하면서 무솔리니를 “이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부여 받은 하나님이 새롭게 세운 지도자”라고 치켜세우고 또한 히틀러 정권과도 종교협정을 맺으면서(가톨릭이 독일 정치에 대해서 관여하지 않는다) 무솔리니(이탈리아)를 지지하고 히틀러(독일)를 옹호함으로써 이들이 아무 거리낌이 없이 전쟁을 일으키는데 일조 하였다.

이어서 독일이 폴란드를 침략하면서 전쟁이 터진 해에 즉위한 비오 12세도 전쟁초기 이들을 지지하다가 전쟁의 종반에는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므로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다. 이것을 20세기의 교황들의 중대 과오로 손꼽힌다.

 

⑥ 기타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던 교황 레오 10세(1513∼1521)가 화려하고 장대한 교회 건물을 짓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도록 한 교서는 종교개혁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신대륙에서 특히 남아메리카에서 라틴계의 가톨릭 성직자들이 원주민을 가톨릭으로 강제 개종시키고 이에 따르지 않는 원주민을 대량 학살한 것도 교황의 중대 과오 중 하나로 꼽힌다.

 

(4) 교황이 무오하다면 왜 성경에 위배되는 교리를 만드는가?

교회 집정에 있어 무오하다는 교황들이었지만, 1400년 동안 성경의 내용에 위배되는 잘못된 교리를 제정하기도 했다. 그 오류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마리아, 죽은 성인들, 천사들에 바치는 기도(A.D. 600)

-모든 공식 종교행사의 언어를 라틴어로 규정함(A.D. 600년경)

-교황(Pope)으로 공포된 최초의 사람 보니페우스(Boniface) 3세[중세 가톨릭교회의 토대를 놓은 그레고리 1세는 자신에게 교황이라는 붙이지 못하게 했다.](A.D .607)

-교황의 세속적인 권력이 프랑크 왕조의 왕, 페핀에 의해 주어짐(A.D. 754)

-권위를 부여받은 십자가, 성인상 각종 형상들, 성물에 대한 숭배(A.D. 786)

-요셉 숭배(A.D. 890)

-교황 요한 15세에 의한 죽은 성인들의 시성식(A.D. 995)

-사제들의 독신생활(A.D. 1079)

-이교 기도수행자인 피터에 의해 도입된 로자리오 묵주기도 도입(A.D.1090)

-베로나(Verona) 공회에서 설립된 종교 재판소 설립(A.D. 1184)

-면죄부 판매(A.D. 1190)

-피터 롬바드(Peter Lombard)에 의해 규정된 7성사(12세기경)

-이노센트 3세에 의해 규정된 성찬의 화체설(A.D. 1215)

-하나님 대신 사제들에게 죄를 고백하고 사함 받는 고해성사(A.D.1215)

-성병(聖餠)숭배가 교황 호노리우스3세에 의해 법으로 공포됨(A.D. 1220)

-발렌시아공회에서 평신도들이 성경 읽는 것을 금지시킴(A.D. 1229)

-콘스탄스공회에서 성찬시 평신도들에게 성체성사의 잔이 금해짐(A.D. 1414)

-플로랜스 공회에서 정식교리로 연옥 교리가 공포됨(.A.D. 1439)

-트렌트 공회에서 교회의 전통이 성경과 같은 권위로 선포됨(A.D. 1545)

-트렌트 공회에서 11문서를 외경으로 인정.(A.D. 1546)

-교황 피우스 9세, 마리아의 무염시태와 무흠교리 선포(A.D. 1854)

-바티칸공회의 믿음과 도덕적인 문제에 대한 교황의 무오성 선포(A.D. 1870)

-베네딕토 15세에 의해 마리아가 은총의 중재자라고 확정 발표됨(A.D. 1917)

-피우스 11세, 무솔리니 정권과의 라테란 조약 체결(A.D. 1929)

-피우스 11세,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교리를 재확인(A.D. 1931)

-피우스 12세, 마리아의 몽소승천(성모 마리아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승천하였다는 주장) 선포(A.D. 1950)

-마리아의 육의 썩지 않은 부활 승천 교리 보강(A.D. 1951)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평생 동정녀 교리 선포(A.D. 1962)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마리아가 교회의 어머니로 선포(A.D. 1963)

 

상기한 과거 1400년간의 역대 교황들의 여러 가지 추악한 범죄와 과오, 성경의 내용에 위배되는 여러 가지 잘못된 교리의 제정으로 인하여, 오늘날 유럽에서 교황의 교회 집정에 있어서 오류가 없다고 하는 교리를 사실로 믿는 가톨릭신자들은 프랑스나 독일이나 스페인에서는 10%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로마가톨릭의 종주국인 이탈리아에서 조차도 20%밖에 되지 않는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있다.

 

Ⅳ. 결론-교황은 적그리스도다!

 

교황이라는 말은 성경에 찾아볼 수 없다. 교황의 칭호는 적그리스도의 표현이라고 생각한 초대교회의 많은 감독들이 이 칭호를 사용하는 것을 거부했다. 하지만 동로마의 폭군 포카스 황제가 610년에 로마감독에게 처음으로 교황이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교황의 모든 권리는 성경의 정신과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본다면 신성모독이라 할 수 있다.

바울과 요한은 세상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에 대해 기록하였다. 교황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도 그 표현에 적합하다. 그것은 장래의 적그리스도의 모형에 지나지 않는다(살후 2:3~12; 계 13:18).

루터나 칼뱅 등 종교개혁자들은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지적하였다. 이 칭호는 개신교도 널리 공용되었다.

루터는 이탈리아의 탁월한 인문주의자 로렌조 발라의 저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로렌조 발라는 콘스탄틴 황제가 로마 감독에게 문둥병을 고침 받고 로마와 이탈리아 영토 전부와 라테란 궁전과 제국의 모든 휘장들을 하사했다는 ‘콘스탄틴의 기증’이 위조문서라는 것을 증명했다. 이러한 발견은 루터로 하여금 아무 의심 없이 교황은 ‘적그리스도’라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였다.

루터와 같이 칼뱅도 교황권의 거짓됨을 공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것은 교황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교회를 다스리시고 진리를 높이시도록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황권 밑에는 하나님의 참된 교회가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불렀다.

‘웨스터민스터 신앙 고백’에서도 “교황은 적그리스도이며 죄인이고 멸망의 아들”이라고 규정했다.

 

참고 자료

유선호, 《천주교도 기독교인가》, 하늘기획, 2003.

유스토 L. 곤잘레스, 《중세교회사》, 은성, 2007.

최형걸, 《중세교회사》, 이레서원, 2005.

존 D. 하나, 《차트 고대와 중세 교회사》, 2010.

http://k.daum.net/qna/view.html?category_id...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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