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을 2년 여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칭의에 관한 걸출한 단행본인 《거룩한 칭의》가 출간되었다. 1517년에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으로 인해 칭의의 은혜가 널리 선포되어 로마 가톨릭이 지배한 중세 1천 년의 암흑기가 무너졌다. 칭의의 교리가 선포되는 곳마다 부흥의 불이 붙었고, 청교도와 독일경건주의가 나타났고, 복음주의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떠한가? 칭의의 은혜에 대해서 성경적 수준으로 가르치는 곳이 어디 있는가? 루터의 칭의 교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발전되어 오다가 18세기 영국과 미국에서 일어난 복음주의 대각성 운동 이후 쇠퇴를 거듭해 지금은 화석화되어 버렸다. 물론 현대 크리스천도 칭의에 대해 언급은 한다. 하지만 성경적 수준에서 보면 너무 부족하다. 루터의 칭의 교리보다 더 후퇴했으면 했지 발전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거룩한 칭의》의 의미는 남다르다. 2천 년 교회사에서 칭의 교리에 관한 책은 손에 꼽을 정도로 희귀하다. 그것은 칭의 교리의 위력을 아는 마귀가 무엇보다도 실질적인 구원의 역사인 성령의 조명의 의한 칭의의 교리가 선포되지 못하도록 집요하게 공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칭의의 은혜에 대해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성경적 수준에서 기술하여, 마귀의 공격으로 인해 칭의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신음하는 영혼들에게 한줄기 빛이 되어 줄 것이다.
《거룩한 칭의》에서 저자는 칭의의 은혜를 가로막는 사단의 공격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율법폐기론과 율법주의라고 밝힌다. 그리고 이러한 사단의 공격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먼저, 저자는 율법폐기론과 이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 제시한다.
이 책의 저자는 칭의를 다음과 정의한다.
“누구나 그리스도를 믿으면 즉시에 칭의를 얻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칭의를 얻은 사람은 철저히 자신의 악을 회개하고 자기를 부인합니다. 그리하여 거듭남(근본적 성화)의 역사가 동반됩니다. 이처럼 칭의 얻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 있는 믿습니다. 이와 같은 살아 있는 칭의 얻는 믿음은 성령의 조명으로 주어집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칭의이며, 지극히 거룩한 칭의입니다.”(5p)
이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칭의는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칭의 이전과 이후는 구원의 서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즉, 칭의 이전에는 ‘죄의 각성’ 단계가 있고, 칭의 이후에는 ‘거룩한 삶의 단계’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칭의에 접근해야 성경적인 칭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현대 교회는 ‘죄의 각성’에 대해 무지하다. 특히 회개의 교리가 빠져 있다. 그래서 대개 교회만 나오면 칭의의 받고 구원받았다고 인정해준다. 이런 이들로 인해 교회에는 율법폐기론자(값싼 믿음주의자)들이 가득하다. ‘율법’은 복음의 은혜로 나아가는 매개체로 죄를 깨닫게 해주는 은혜이며,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셨다(마 5:17). 즉, 율법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나아갈 때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발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개신교는 율법을 무시하거나 무지하여 회개 없는 교인들을 양산하여, 교회의 윤리적 수준이 세속 사람들보다 떨어지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교회사를 보면, 루터 이후 교회사가들에 의해 칭의의 은혜에는 믿음의 성격에 대해서 회개와 사랑을 포함되며, 칭의와 성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 하나씩 밝혀졌다. 그런데 율법폐기론자, 즉 값싼 믿음주의에서 주장하는 잘못된 믿음으로 인해,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이 목숨 걸고 외친 칭의와 성화의 은혜가 퇴색하고 말았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무엇보다 참된 칭의 얻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잘못된 믿음으로 칭의의 은혜를 구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프리즘에 빛이 통과할 때 일곱 색깔이 나오는 것처럼, 칭의 얻는 믿음의 속성에 대해 성경을 통해서 자세하게 설명한다. 《거룩한 칭의》에는 칭의 얻는 믿음을 여덟 가지로 나눈다. (1) 성령의 조명으로 주어지는 믿음, (2) 지극히 거룩한 믿음, (3)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4) 마음으로 믿는 믿음, (5) 행함이 있는 믿음, (6) 복음적 회개가 수반되는 믿음, (7) 자기 부인의 역사가 동반되는 믿음, (8) 거듭남이 수반되는 믿음.
이 여덟 가지가 칭의 얻는 믿음의 성격이다[세부적으로 나누면 (1)-(5)까지가 칭의 얻는 믿음이고, (6)-(7)은 복음적 회개 시의 믿음이고, (8)은 거듭남의 믿음이다]. 이런 믿음으로 칭의의 은혜를 구해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이 외에 다른 믿음으로는 절대 칭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다.
둘째, 율법주의의 폐해와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거룩한 칭의》에서 저자는 율법폐기론을 다룬 후에, 율법주의의 폐단도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율법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거기에서 나와 값없이 주시는 칭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친절하게 안내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교리는 율법주의를 주장하는 로마 가톨릭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다. 초대 교회 교부들은 분명 믿음에 의한 칭의 교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교회사가들은 초대 교회는 박해 가운데 있었고,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에 경도되어 칭의 교리에 무지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초대 교부의 글과 제임스 뷰케넌의 사료를 통해서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믿음의 의한 칭의를 강하게 주장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초대 교회 후반기에 활동한 아우구스티누스 때부터 믿음에 의한 칭의 교리가 의화 교리로 변질되며, 세례를 통해 죄 용서와 의화가 주어진다고 하여 칭의를 얻기 위해 교회에 의존하게 만드는 관습을 낳게 되었다. 이러한 잘못된 칭의 교리는 수정되지 않고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고, 반종교개혁인 트렌트 종교회의 때는 칭의 교리는 성화에 완전히 복속당해 의화 교리는 고착화되고 말았다. 그 결과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씀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나아가 칭의의 은혜에 있어서 예수님의 은혜보다 교회의 성례가 더 중요하게 되었다. 또한 세례 때 성화의 은혜가 주입되어 칭의가 시작된다고 하여, 칭의 교리가 사건이 아니라 개인의 공로를 통해 얻는 일평생의 과정이 되어 버렸고, 이로 인하여 구원의 확신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폐단은 옛 바리새인이 때부터 있어 왔다. 이들은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며 율법을 지키는 데 치중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지도 못했고, 더 심각한 것은 율법을 지킨다고 착각하여 ‘자기 의’를 의존하게 했다. 이러한 전통이 로마 가톨릭에 그대로 전수되어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요즘에도 일부 개신도들 중에는 행위로 구원받기 위해 열심히 율법적 회개를 하다가 지쳐 낙망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이 책에는 율법주의에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해 역사상 가장 쉽게 정확하게 칭의의 은혜를 받는 방법을 제시한다. 칭의의 은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을 때 얻는 것이지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율법주의에 빠진 이들은 대부분 죄의 각성이 어느 정도 되었기 때문에, 저자는 무엇보다 이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에 집중하라고 권면한다. 또한 칭의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속량의 은혜에 있는 것이지 율법을 행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며, 칭의는 즉시 선언해 주는 것이지 되어 가는 과정이 아님을 자세히 설명해 준다.
요약하자면, 《거룩한 칭의》는 칭의의 은혜를 가리는 양대 산맥인 율법폐기론과 율법주의자들의 잘못된 교리를 파하고, 성경적 수준에서 계시된 말씀을 통해 칭의 교리의 정수를 제시한다. 그래서 이 책은 사변적이지 않고, 칭의의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실질적인 은혜를 체험하도록 도와준다. 또한 역사상 신앙 위인들의 경험을 소개해주어, 실질적으로 칭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소망을 불어넣어준다.
주여, 이 말세에 참되고 지극히 거룩한 믿음, 성령의 조명에 의한 믿음을 허락하시어, 주님이 피값으로 사신 영혼들을 구원하여 주시고, 칭의와 성화의 은혜를 허락하시어, 주님께 영광 돌리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