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이야기Personal Narrative>
조나단 에드워즈
An account of his early years and testimony to his own saving faith in Christ.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얻은 믿음에 대한 간증과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
나는 어린 시절부터 영혼(soul)과 그 활동에 관해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두 번의 각성의 시기보다도 더 크게 변화되는 새로운 경험을 했던 적은 없었다.
그 첫 번째는 아직 대학에 입학하기 전인 소년 시절에 아버지의 교인들과 함께 각성하는 경험이었다. 나는 그때 매우 감격하여, 여러 달 동안 신앙과 내 영혼의 구원문제에 관해 생각했다. 그래서 구원에 요구되는 일에 충실했다. 하루에도 다섯 번 골방기도를 드렸고, 친구들과 신앙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많은 시간을 그들과 함께 기도로 보냈다. 그때 나는 신앙에 어떤 기쁨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 후 나는 신앙에 경도되어 의로운 기쁨을 느꼈다. 그리고 신앙적인 의무를 충분히 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학교 친구들과 함께 개울가의 한적한 곳에 오두막을 만들어 놓고, 그곳을 기도처로 삼았다. 나는 그 옆의 숲 속에 나만의 기도처를 만들어놓고 기도하였다. 그렇게 기도할 때 나는 때때로 큰 감동을 받았다. 나의 감정은 매우 고무되었으며, 쉽게 감동받았고, 신앙적인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 내게 큰 기쁨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감정과 만족감을 진정한 신앙적인 기쁨이며, 은혜라고 착각했다는 것을 후에 알았다.
사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전에 느꼈던 죄의 뉘우침이 사라졌고, 그로 인한 감정과 기쁨을 잃어버렸으며, 지속적으로 해오던 골방기도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대학 후반기에 들어서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뉘우침을 기쁘게 여기셨는지 하나님은 나에게 늑막염에 걸리게 하시어, 나는 매일 밤 지옥에 있는 무덤 구렁텅이까지 갔다 와야 했다. 그러나 얼마 후 회복되었고, 그 후 다시 예전의 죄악의 생활로 돌아갔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더 이상 고통을 허락하시지도 않으셨고, 한동안 침묵하셨다. 나는 많은 사악한 습성으로 인해 내적으로 괴로웠으며, 반복적으로 하나님께 맹세하고 죄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다시 똑같은 문제에 봉착하곤 했다.
얼마 후 나는 전처럼 사악하게 살던 생활방식과 외적인 죄(outward sin)를 다 버렸다. 그리고 구원받기를 간구하면서 종교적 의무를 다했다. 그러나 첫 번째 각성 때처럼 기쁨이나 즐거움을 경험하지는 못했다. 당시 나의 관심은 내적인(inward) 생활이었는데, 그것에 관해 생각할 때마다 갈등이 점점 커져갔다. 그러나 나에게 구원의 길은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것으로 보여서 때때로 구원받는 것에 관해 의문이 일어났다. 게다가 그런 고통스러운 과정이 계속 되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됐다. 하지만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원의 길을 찾았다. 나의 관심은 내적인 생각과 투쟁으로 가득 찼으나, 그것이 꼭 공포스러운(fear) 것으로만 표현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것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는,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고, 버리운 바 된 사람에게 영원한 지옥을 준비한다는 선택론의 교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해 영적으로 성숙하는 데 큰 장애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끔찍한 교리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째 각성의 시기에는 선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 아주 만족스러웠고, 그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인간들의 길이 정해졌다는 것에 큰 확신이 들었고 그래서 전적으로 믿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어떤 수단으로 그렇게 됐는지는 당시에도, 그리고 그 후 긴 시간이 지난 후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성령님이 오셔서 특별한 감화를 주셨을 때 그것이 옳다는 것을 온전히 깨달았다. 그래서 나의 마음은 선택론에 관한 신앙의 장애물과 흠집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 결과 내 마음에 하나님의 주권에 관해서, 바로 그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고 지금까지 그 확신에는 변함이 없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실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강퍅하게 할 자를 강퍅하게 하신다는 교리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믿게 된 후부터, 신앙의 걸림돌이 제거되었다. 또한 내 마음속에서는 구원과 저주의 면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공의를 때때로 눈으로 보는 것만큼이나 확신하게 되었다. 첫 각성 때와는 달리 나는 종종 전에 알았던 것과는 또 다른 주님의 주권에 관해서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자주 '죄의 회개'만이 아니라 '기쁨의 확신'도 경험했다. 그 교리는 매우 기쁘고 즐겁고, 달콤하게 느껴졌다. 비로소 나는 절대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믿게 되었다. 그러나 첫 번째 뉘우침 때는 그렇지 못했다.
내가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것들에 대해서 내적인 달콤한 즐거움을 처음으로 경험한 것은 디모데전서 1장 17절을 읽었을 때였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내가 그 말씀을 읽고 있었을 때, 내 영혼 속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느낌이, 내가 이전에 경험했던 어떤 것과도 완전히 다른 새로운 느낌이 내 영혼으로 들어왔다. 아니 영혼 속에 퍼져 들어갔다는(diffused through)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성경의 다른 어떤 구절도 그와 같이 보인 적이 없었다. 나는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훌륭하시고 아름다우신 분이신가, 그리고 만일 내가 천국에서 그러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즐거이 교제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만 온통 빠져 있을 수 있다면,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영원토록 그분 안에 삼키어진다면 그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를 혼자 생각했다. 나는 계속해서 찬송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주님께 기도하러 갔는데, 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그 시간이 무척 새로운 즐거운 류의 감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때 영적으로 온전히 구원이 임했다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말했는데, 말하자면 그러한 성경말씀을 혼자 노래하고 있었다. 기도하러 갔는데, 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그를 즐거워하며 기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이 어떤 영적이거나 또는 구원에 이르는 것이었다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부터 나는 그리스도와 그의 속죄의 사역과 그에 의한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되었다. 항상 내적인 달콤함이 마음속으로 스며들어 와서 그에 대한 아름다움을 본 나는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나의 이성은 온통 그리스도께 사로잡혀 주님에 대한 묵상과 말씀을 읽는 데 시간을 다 보냈다. 그의 인성의 아름다움과 완전함, 그분에게 있는 자유를 주시는 사랑스러운 은혜로 충만하게 되었다. 나는 그런 고상한 주제에 대해서 그렇게 기쁨을 주는 책은 읽어 본 적이 없다. 아가서 2장 1절 말씀에서 “나는 샤론의 꽃이요, 골짜기의 백합화라”는 구절이 무척 감격스럽게 다가왔다.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사랑의 대명사처럼 달콤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가서가 나에게 무척 기쁨으로 다가왔는데, 그 당시 이 말씀을 읽으면 내적인 달콤함으로 인해 찬양을 멈출 수가 없었다. 굳이 침묵하지 않고 표현해야 한다면 비록 어떻게 표현하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 느낌은 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달콤함만을 추출해 낸 것 같았다. 때때로 어떤 영상과 고정된 생각 또는 상상에 사로잡혔는데, 마치 내가 산속에 혼자 있는 것 같았고, 세속에서 떨어져 고요한 광야에 있다고 생각되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감싸고 있고, 예수님께서 나와 달콤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신성한 감격이 갑작스럽게 불붙어, 말하자면 달콤함의 불이 내 마음에 비추었다. 영혼의 격정이랄까, 그러나 그것을 표현할 길은 없다.
나는 처음으로 그런 것을 경험한 지 오래지 않아, 내 마음에 일어났던 것들을 아버지께 설명해드렸다. 대화가 끝났을 때 나는 정말 많은 감동을 받았고, 혼자서 아버지의 조용한 목초지로 찬양하기 위해 걸어갔다. 걷는 동안 하늘의 구름을 쳐다보았을 때 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이 너무나 달콤하여 그것을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 광경은 두 가지의 달콤한 것으로 연합된 것처럼 보였다. 장엄하면서 온유하고, 달콤하고 부드러우면서 거룩하고, 아주 부드러우면서 달콤하고, 매우 높고 웅장하면서도 아주 부드러웠다.
이런 신성한 감격에 사로잡히면서 점점 더 나는 활동적이 되었고, 내적인 달콤함을 맛보게 되었다. 사물의 모습이 모두 달라 보였다. 모든 사물 속에 하나님의 영광의 고요함과 달콤함이 나타나 보이는 듯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지혜와 순결과 사랑이 만물 안에 나타나 보이는 듯했다. 해와 달과 별들 안에, 구름과 푸른 하늘 안에, 풀 포기와 꽃들과 나무 안에, 그리고 물들과 모든 자연 안에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이 나타나 보이는 듯했다. 나는 종종 앉아서 한참동안 달을 쳐다보곤 했다. 낮에는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바라보면서, 그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달콤한 영광을 보았다. 그때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주님에 대한 찬양이 조용히 찬양 드렸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전에는 내게 무척 무섭게 보였던 천둥과 번개가 그때는 무척 아름답게 느껴졌다. 전
에 나는 천둥치며 폭풍우가 불 때는 몹시 두려워했었는데, 이제는 반대로 그것이 나를 즐겁게 했다. 이제는 천둥을 동반한 폭풍이 막 일어나는 것을 보면 그 속에서 하나님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는 그럴 때면 구름을 관찰하고, 번개가 치는 것을 유심히 보고,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천둥의 장엄하고 두려움을 자아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기회로 삼는다. 그것은 종종 넘치도록 즐거운 일이었으며, 나로 하여금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운 나의 하나님을 달콤히 묵상하도록 해 주었다.
그런 상태를 만족감을 느꼈지만, 완전히 소망을 이루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나는 더욱 맹렬히 주님을 찾았으며, 더욱더 거룩해지기 위해서 노력했다. 내 마음은 그런 생각들로 가득 차서, 깨어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시편 119편 28절의 말씀이 종종 내 마음에 떠올랐다.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망하나이다.” 나는 자주 더 빨리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은혜 안에서 더 성장하지 못한 것 때문에 통곡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 마음이 매우 신적인 것에 고정되어 있어서 찬양이 절로 솟아났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을 신성에 관한 것들을 묵상하면서 보냈다. 자주 숲을 걸으며 조용한 곳에서 묵상을 하거나, 혼잣말을 하듯이 주님과 대화하며 기도했다. 당시에 나는 그런 식으로 주님께 찬양을 돌려 드렸으며 기도할 때마다 거의 절규하듯이 어디서나 기도했다. 기도는 나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웠는데, 기도할 때면 마치 마음속에 뜨거운 불을 내뿜는 듯 했다.
그때 내가 신앙 안에서 느끼게 된 즐거움은 그 전에, 즉 내가 소년이었을 때 느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것이었다. 그때에 내가 느꼈던 것을 지금과 비교하자면 정상인과 나면서부터 맹인인 사람이 유쾌하고 아름다운 색깔에 대해 가지는 느낌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누리게 된 즐거움은 더욱 내적이고, 순수하고, 영혼을 살리고, 영혼을 새롭게 하는 그런 즐거움이었다. 이에 비하여 이전의 즐거움들은 결코 가슴 깊숙이 도달하지 못했었고, 하나님께 속한 것들의 탁월함을 보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었다. 또는 영혼을 만족케 하고 생명을 주는 선한 것을 맛봄으로써 생긴 것도 아니었다.
그런 신성에 대한 느낌은 뉴욕에서 설교할 때까지 커져갔다. 그때는 회심하고 1년 반이 지난 후였다. 나는 전보다 더욱 신적인 것에 민감해졌다. 하나님과 거룩에 대한 열망은 더욱 증가했다. 순결, 겸손, 거룩, 천국의 신앙이 더욱 나를 온화하게 했다. 나는 모든 방면에서 진실한 크리스천이 되려는 마음으로 불타올랐다. 축복하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려고 했으며, 모든 것에서 순결과 기쁨 그리고 복음의 축복된 법칙에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나는 그러한 법칙을 더욱더 갈급하였고, 더욱더 그러한 법칙을 추구하며 살아가기 위해 열심을 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계속적으로 밤낮으로 투쟁했으며 어떻게 해야 내가 더욱 거룩해지는지, 더욱 더 거룩하게 살 수 있는지, 더욱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있는지, 하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지 지속적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그때 나는 전보다 더욱 거룩하고 진실하고, 은혜로운 생활을 추구했다. 나는 전에 내 인생에서 추구해 온 것보다 더욱 계속해서 나 자신을 살폈고, 좀 더 좋은 길과 수단을 연구하고 찾았으며,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살지, 더욱 부지런하고, 진실하게 살 수 있는지를 깊이 생각했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힘에 의지하고 있어, 후에 그런 태도가 나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에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경험은 나를 가르치지 않고, 매사에 극도의 무기력에 휩싸이게 했다. 내 마음 바닥에는 깊고 비밀스러운 부패와 기만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더욱더 경건해지기를 추구했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도록 노력했다. 내가 바랐던 천국은 거룩한 천국이었다.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신성한 사랑을 영원히 누리면서 거룩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꿈꾸었다. 내 마음은 하늘에 대한 기쁨과 찬양으로 가득 찼으며 완전한 거룩과 겸손과 사랑으로 충만했다. 천국에서 성도들은 자신의 사랑을 그리스도에게 표현할 수 있는 커다란 행복으로 가득 차리라고 생각되었다. 그 심정을 원하는 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큰 짐이자 장애였다. 영혼의 내적인 열심이 방해를 받아, 막힌 것 같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었다. 나는 종종 천국에서는 자유롭고 완전하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완전하고도 자유롭게 표출하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천국은 기쁨으로 가득한 사랑의 세계로서, 생생하고 순전하며 겸손함과 천국의 신성한 사랑으로 이루진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거룩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자주 혼잣말을 했다.
‘복음이 말한 것처럼 나는 거룩을 확실히 사랑해.’ 황홀한 기쁨과, 지극한 아름다움과 온화함… 신성한 아름다운 것 외에 천국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곳은 이 땅의 모든 진흙탕과 더러운 것과 심히 비교가 되었다.
그 당시 나는 거룩함에 대해 묵상하면서 글을 기록하곤 했는데, 거룩함은 달콤하고, 평화롭고, 매혹적이며, 진지하고, 고요함이라고 생각되었다. 그것은 표현할 수 없는 순수하고, 빛나며, 평화롭고, 활기찬 것이었다. 즉, 거룩은 하나님의 뜰이나 정원 같았고, 모든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 찬 곳 같았다. 모든 기쁨, 즐거움, 평화로움이 있는 곳. 달콤한 고요를 즐길 수 있고, 부드럽고 생생한 햇빛을 감상할 수 있는 곳 이었다.
당시 나는 묵상 노트에 이렇게 기록했다.
“진실한 크리스천의 영혼은 우리가 봄에 보게 되는 순백의 작은 꽃과 같다. 땅 위에 핀 작고 조그마한 그 꽃은 영광스런 태양의 유쾌한 빛을 받아 그 빛을 속으로 품고 평온한 황홀감을 즐기면서 주위에 달콤한 향기를 퍼트린다. 그 꽃은 주위의 다른 꽃들 사이에서 평화스럽고 사랑스럽게 있다가 태양의 빛을 머금기 위해 꽃잎을 활짝 편다.”
나는 겸손하고 가난한 영혼을 마음을 찢을 만큼 사랑해서 거룩을 추구하는 것 외에 다른 곳에 마음을 조금도 두지 않았다. 오직 그것만을 갈구했다. 내 마음은 이것을 철저히 구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먼지처럼 낮아졌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모든 것이 되시며 나는 단지 어린아이와 같았다.
뉴욕에 있었을 때 참된 신앙을 갖기 전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헛되이 보냈는가를 생각하면서 과거의 삶에 대해서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그때 얼마나 내가 악했는지 생각하니 한동안 쉬지 않고 눈물이 솟구쳐 나왔다.
1723년 1월 12일 나는 하나님 앞에서 엄숙하게 헌신하기로 마음먹고,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칠 것이다. 미래에 대해서도 나의 것을 조금도 주장하지 않을 것이고, 어떤 면에든지 나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 나의 전 재산과 나의 복을 모두 맡길 것을 엄숙하게 맹세한다. 인생이 끝날 때까지 나의 행복은 조금도 구하지 않을 것이고, 말하자면 조금도 내 방식대로 행동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며, 세상에 대항해서 육체와 마귀와 싸울 것을 다짐한다. 그러나 나의 의무에 관해 얼마나 많이 실패해 왔는지를 생각하니 겸손해야한다고 생각되었다."
내가 머물고 있은 뉴욕의 거처에는 존 스미스 씨와 그의 경건한 어머니가 계셨는데, 그분들과 함께 달콤한 신앙이야기를 충만히 할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 그들의 진실한 경건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그렇게 경건하고 주님의 축복된 제자인 그분들 외에 당시 나는 다른 어떤 사람과도 교제할 수 없었다. 그분들과 함께 이 세상에서 주님의 나라가 이루지기를 간구했다. 또한 나의 대부분의 골방기도는 그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만약에 아주 약간이라도 이 세상의 어떤 곳에서나 주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식에 관해 호의를 갖고, 그리스도의 나라의 유익에 관해서 듣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면, 나는 너무나 기쁘고 즐거울 것 같았다. 나는 그런 목적으로 신문을 펴고 이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그런 소식이 있는지 발견하기 위해 읽었다.
나는 자주 도시에서 떨어진 허드슨 강가의 언덕의 고요한 장소에 가서 하나님과 내밀한 교제를 하면서 주님의 신성(divine)을 느끼며 달콤한 시간을 보냈다. 스미스 씨와 나는 함께 그곳을 산책하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는 대부분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에 관해 토론을 했고, 훗날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완성하시는 은혜로움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었다. 당시 어떤 책보다 나는 성경책에서 가장 큰 만족을 느꼈다. 때때로 성경책을 읽을 때면 모든 말씀이 벅찬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 말씀을 읽으면서 달콤함과 주님의 능력이 내 마음속에서 다가와 조화롭게 자리 잡아 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종종 나는 아주 맛있는 음식을 대접받고 어쩔 줄 몰랐을 때처럼 모든 말씀구절이 마치 빛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서 말씀을 읽을 수 없을 것 같은 감격을 느끼곤 했다. 종종 말씀 한 구절을 계속하며 묵상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기이한 것인가를 깨닫고 기뻐했다. 그러나 여전히 모든 말씀이 기이함으로 꽉 차있었다. 1723년 4월 달에 스미스 씨 가족과 나는 가슴 아픈 이별을 하고 뉴욕을 떠나야 했다.
즐겁고 달콤한 나날을 함께 보낸 그들과 추억의 도시 뉴욕을 떠날 때 나의 마음은 매우 가라앉았다. 나는 뉴욕을 떠나 웨더스필드(Wethersfield)를 향해서 배편으로 출발했다. 떠나가는 동안 계속해서 그 도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슬픈 이별을 한 그날 밤 잠시 정박한 웨스트체스터(Westchester)에서 나는 하나님의 큰 위로를 받았다. 천국에서는 귀한 친구들과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나에게 평안을 주었다. 토요일에는 세이브루크(Saybrook)에서 정박하고, 안식일을 지켰다. 거기서 나는 홀로 뜰을 걸으면서 안식과 쉼을 얻었다.
윈저(Windsor)에 있는 집으로 돌아온 후, 내 마음은 아직도 뉴욕에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때때로 뉴욕에 있는 친구들이 생각나 마음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나는 1723년 5월 1일의 일기에 쓴 것처럼 하늘에 관한 찬양을 생각하며 힘을 얻었다. 기쁨이 충만한 그곳을 생각할 때 큰 평안을 누릴 수 있었고, 거기에는 전적으로 고요와 지극한 사랑과, 해로움이 없었다고 생각이 되어 기쁨을 멈출 수 없었다. 그곳에는 계속해서 지극한 사랑의 표출이 멈추지 않았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없으며 이 세상의 어떤 사람들도 표현할 수 없는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져 있었다. 하나님과 어린양을 찬양하며 서로 사랑을 나누는 것은 얼마나 달콤한가! 이 기쁨과 달콤한 사랑이 영원히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뉴욕에서 뉴헤이븐에 대학교 강사로 갈 때까지 나는 이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특별히 한번은 볼튼(Bolton)에서 보스톤으로 여행할 때, 뜰을 혼자 걷는 동안 천국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뉴헤이븐으로 온 후에 나는 복잡한 생각과 여러 일들로 인해 내 마음은 거룩과 순결에 떠나 신앙이 침체되고 말았다.
1725년, 9월에 뉴헤이븐에서 병에 걸려 윈저에 있는 집으로 요양 가는 동안, 나는 병이 의외로 심해져서 노스빌리지(North Village)에 3개월을 머물러야 했다. 그렇게 앓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위로해 주셔서 성령님의 달콤함 감화를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밤새 나를 간호해준 사람들이 빨리 ‘아침’이 되기를 원하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이 내 마음에 시편 기자의 “파수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은 주를 기다리네”라는 노래를 생각나게 하여, 기쁨이 가득하였다. 특히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라는 구절이 그랬다. 아침의 햇빛이 창문으로 비쳐올 때 그것은 내 영혼을 하루 종일 즐겁게 해주었다. 아침은 하나님의 은혜의 빛의 형상으로 다가왔다. 그때 나는 아주 오랫동안 몇몇 사람들과 대화하기를 원했는데, 만약 진실로 거룩하다면 그들을 존경하고 기쁨으로 그들의 발아래에서 종의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이후 몇몇 일상적인 일들로 인해 다시 나의 마음은 분산되었고, 너무 과도하게 이것저것 신경쓰다보니, 영혼에 큰 상처를 입었다. 다양한 일들이 일어나니까 전보다 더 내 마음이 분주해져, 일들에 지치게 되었다. 노샘프턴에 돌아온 후 나는 자주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하심과 완전하신 은혜의 모습을 느끼고 달콤한 찬양을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하심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사랑 자체로 나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은 항상 가장 큰 사랑 그 자체로 다가오셨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값없이 주시는 은혜, 하나님의 성령을 주시고자 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신다는 약속, 그것에 인간은 절대 의존해야한다는 교리가 나에게 매우 달콤하고 은혜롭게 다가왔다. 하나님의 주권이 그분의 커다란 은혜로 느껴졌다. 하나님께 나아가서, 주권자이신 그분께 경배하고 자비를 간구하며 큰 즐거움을 만끽했다. 즉 그 모든 말씀들이 나를 매우 기쁘게 했다.
푸른 초장처럼 다가온 복음의 교리들을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복음은 가장 큰 선물로 내가 가장 갖고 싶고, 바라던 것이었다.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길이 가장 보편적이고 은혜롭고, 훌륭하며, 아름답고, 찬란한 길로 보였다. 만약 다른 길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천국을 완전히 망치는 것처럼 보였다. 또한 이사야 32장 2절 말씀인 “그 왕은 바람과 폭풍으로부터 피할 피난처이시오”라는 구절이 나를 즐겁고 기쁘게 해주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 종종 나에게 큰 즐거움을 제공했다. 그분이 내 머리요, 몸의 일부분이요, 선생님과 예언자가 되신다는 것이 나를 즐겁게 했다. 어린아이의 영혼이 되어 그리스도를 따라서 이 세상의 광야를 통과해 나아간다는 생각이 나를 즐겁게 했다. 마태복음 18장 3절 말씀에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이라는 말씀이 나를 즐겁게 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생각할 때마다 기쁨을 이길 수 없었다. 가난하고, 완전히 비인 마음을 가진 영혼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그리스도를 겸손히 홀로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위해 내 자신을 완전히 뿌리 채 뽑았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나오는 모두 사람에게 예수님의 믿음 안에 살게 하시며 모든 사람들을 겸손하고 거짓이 없이 대하신다는 사실이 내 마음에 믿음을 확고히 하게하곤 했다.
시편 95편 1절의 말씀이 내게 달콤하게 다가왔다. “오 주여, 우리 중에 어느 사람도 아니고, 당신의 이름만 은혜와 자비와 진리를 주시나이다.” 그리고 누가복음 10장 21절에서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그의 시간에 그리스도께서 영을 즐거워하시고”라는 말씀을 읽고 새 힘을 얻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나에게 기쁨을 주었다. 그리스도께서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또한 나를 즐겁게 하고, 그 즐거움으로 인해 나는 그리스도의 완전하심과 그 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때때로 내 마음을 타오르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특징적인 이름을 생각해보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삼위일체에 관해서 은혜롭게 알려 주셨다. 하나님께서 세분 즉, 성부, 성자, 성자의 하나님이시라는 생각이 나를 매우 기쁘게 했다. 내가 경험한 것 중에서 가장 즐겁고, 좋았던 것은 내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복음의 은혜로운 것을 직접 보았을 때였다. 이 기쁨은 내 유익을 구하는 것보다 더 큰 기쁨과 감사로 다가왔다. 그때 나는 내 유익을 위하여 내 것에만 눈을 고정시키고, 은혜와 기쁨으로부터 시선을 돌리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상실처럼 느끼고 있었다.
내 마음은 이 세상에서의 주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데 경도되었다. 주님의 나라가 확장되었던 과거의 역사가 나를 기쁘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과거의 역사를 읽었을 때 나를 가장 기쁘게 한 것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앞으로 내가 읽을 역사에서 그 약속의 성취가 다시 나타날 것을 생각하니 무척 기쁘고 즐거웠다. 내 마음은 성경에서 예언되어 있듯이, 미래에 이 땅에 주님의 은혜의 나라가 완성된다는 생각에 고정되어 있었다.
때때로 나는 그리스도의 완전하심과 겸손하심이 구원자로서 가장 알맞은 성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분이 이 세상의 수 만 명의 왕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고 느껴졌다. 그 피와 속제와 의로움이 달콤했고, 그것이 항상 나의 영혼을 불타게 했다. 주님의 아파하심에 대한 생각에 나는 말할 수 없는 내적인 투쟁과 거친 호흡과 신음으로 허덕였고 그 아픔이 나를 비우고, 그리스도를 채우게 했다.
한번은 1737년에 건강을 위해서 말을 타고 숲에 들어가 보통 하던 대로 말에서 내려 고요한 어떤 장소에 들어가 찬양과 기도를 드렸다. 그때 나는 겸손하시고, 부드럽고, 사랑스럽고, 순전하고 달콤하며 은혜가 풍성하신 인간과 하나님의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강하게 체험했다. 조용하고 달콤하게 다가온 이 은혜는 거대한 천국으로 나타났다. 모든 생각과 개념을 집어 삼킬만한 거대한 탁월하심으로 다가와 할 말을 잃게 했다. 그것은 판단하건대 한 시간 이상 계속 되었고, 그때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큰 소리로 울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당시 나는 텅 빈 것 같고, 아무것도 아닌, 단지 먼지처럼 느껴졌고, 거룩하고, 순전한 사랑으로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되어, 그를 신뢰하고 그와 함께 거하며, 그를 따르고 섬기며, 완전히 성화되고, 신성과 천국의 순결함으로 깨끗하게 되었다. 그 후 여러 번 나는 그런 상태를 경험했고, 그것과 똑같은 감동에 사로잡혔다.
당시 나는 삼위의 세 번째 위격이신 성령님의 영광을 여러 번 느끼며 그분께서 내 영혼에 직접 주입하시는 신성한 생명과 빛의 교통함을 체험했다. 성령님과의 교통하심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달콤함과 신성한 은혜의 끝없는 샘의 근원이 되셔서 나타났다. 그분은 내 영혼을 충만히 채우셔서 나에게 큰 만족을 주셨고, 달콤한 교제를 계속해서 허락하셨다. 또한 은혜의 해처럼, 즐겁고 달콤한 것을 생명과 빛으로 흩뿌리셨다. 때때로 나는 하나님의 탁월하신 말씀에 영향을 받아, 그것을 생명과 달콤함과 아름다운 은혜의 말씀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 말씀은 더욱더 다른 말씀을 갈급하게 하여, 내 마음을 풍성히 채웠다.
그런데 이 마을에 정착한 이래, 내 자신의 죄와 비열함을 느끼고 자주 심각하게 울음을 터뜨리며 한동안 계속해서 슬픔에 빠져 자주 자신감을 잃고 낙망했었던 적이 있다. 회심하기 전보다 더, 나의 악함과 해로움에 대한 생각이 더 크게 다가왔다. 때때로 나는 만약 하나님께서 나를 악인으로 삼으시면, 나는 모든 인간보다 가장 악하게 되어 이 세상이 시작된 이래 가장 악한 지옥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영혼에 관하여 나와 대화할 때, 자신들의 사악함을 고백하며 자신이 악마만큼 악하다고 말하곤 고백하곤 했다. 그런데 그들의 말은 나의 사악함에 비하면 희미하고 미미하게 보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의 사악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으며, 그 생각과 상상이 나를 집어 삼키기 시작했다. 끝없이 큰 산더미 같은 홍수가 내 머리 속에 채워졌다. 끊임없이 죄가 생각나며 그것이 나의 죄성이 배가되는 것 같았다. 이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 할 지 표현하기가 힘들었다. 수년 동안 그런 생각이 “무한 위에 무한, 무한 위에 무한…”이라는 말로 입안에 계속 맴돌았다.
내 마음속에 있는 그 사악함을 보았을 때 나는 지옥보다 더 깊고 끝없는 심연 같은 것을 느꼈다. 만약에 주님을 찬양하고 영원하신 은혜를 찬미하고 그의 무한하신 능력과 은혜의 주권을 찬양하는 것이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다면, 나의 마음은 지옥 밑으로 가라앉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며 주님의 주권적인 은혜가 내 마음을 깊이 찔렀다.
그러자 내 죄에 대한 판결이 너무 가볍고, 희미해보였다. 내 죄가 다 사라졌다는 생각이 나를 놀라게 했다. 그때 나는 죄성이 나를 끈질기게 사로잡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죄를 위해 울부짖음을 멈추었을 때, 나의 회개가 죄를 없애는 데 어떤 공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주 앞에 엎드려, 낮아짐으로 주님께 간구했을 때 너무 늦게 마음을 부수었다는 생각으로 인해 나는 다른 모든 크리스천보다 더 낮아짐으로 주님께 나아갔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장 낮아지고 겸손히 나아간다고 생각했을지는 몰라도. 그들은 나보다 형편이 나아보였다. 그래서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 내 길이라고 생각되었다. 다른 사람이 “먼지처럼 겸손해져”라며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며 낮아졌지만, 나는 그들보다 더 악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기도중에 “주 앞에 무한히 낮아져”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알맞다고 생각되었다. 젊었을 때, 사악함의 깊이와, 자만감, 위선, 속임수가 내 마음 밑바닥에 있었던 것과, 그것에 얼마나 무지했던가하는 생각이 나를 괴롭게 했다.
그 이후 내 자신이 의롭게 되기 위함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에 대해 바라게 되었다. 그런 삶이 나의 보편적인 일상이 되었다. 지금까지 마음속으로 스스로 의롭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즐겼던 사실이 진절머리 나게 하고 혐오스럽게 생각되었다. 나는 전보다 더욱 양심이 예민해져, 나의 자만심과 이기적인 영혼에 대해 고통받았다. 나는 사단이 어디에서나 그의 머리를 들어 내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비록 회심한 후 2, 3년 동안 어떤 면에서는 지금보다 더 나은 크리스천의 모습이었지만 ‘지속적인’(constant) 기쁨과 연락함을 느끼게 된 것은 최근에 들어서였다. 나는 주님의 절대 주권에 대해 기쁨으로 그것을 계속해서 받아들였다. 그리고 복음에서 밝혀진 중재자이신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특히 어느 토요일 밤에, 나는 다른 어떤 교리보다 더욱더 복음의 탁월함을 발견하고, 나는 “이것이 나의 선택된 빛이구나, 나의 선택된 빛이구나!”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리스도만이 나의 예언자이심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분께 배우며, 조명 받으며, 그에게 가르침을 받고 같이 동행하는 삶이 다른 무엇보다도 표현할 수 없는 큰 기쁨이었다.
1739년 1월의 어느 토요일에 나는 주님의 길을 가는 것이 얼마나 축복되고 달콤한 길인지를 알았고, 의의 길을 행하고 그것을 보고 하나님의 거룩한 마음에 일치하며 사는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깨달았다. 그 깨달음에 나는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때로 나는 그 때문에 문들 닫고, 나를 자제시켜야 했다.
“주님 앞에서 옳게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그런 사람들이 축복받은 자이고, 행복한 자이다!”라고 울부짖으며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배하시고 그의 기뻐하심에 따라 질서를 부여하신 것이 얼마나 합당하신 것인가를 알고 감동받았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세상을 주관하시고 그의 뜻대로 세상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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